향토사

용호동의 지명

아지빠 2013. 8. 24. 16:52

 

 

 

 

 

 

 

지명

1). 거미섬(거무섬)나암

 

오륙 도 와 비용개(백운포) 사이에 거미처럼 생긴 나지막한 섬이 있다, 이 섬은 일제강점기 이전까지 오륙도에 포함된 섬이었다. 사투리로 거무섬 이라 하여 검은 섬으로 비쳐 흑석도(黑石島)라 하였다.

전설에 의하면 이 고을 용이 옥황상재의 부름을 받아 하늘로 승천하려 하였으나 뇌물로 바칠 불로장생수를 손에 넣지 못해 거미 섬을 밟고 약이담긴 수리병을 잡으려 하였으나 거미섬이 자리를 옮겨 버렸다. 용은 있는 힘을 다하여 잡으려다 엎질러 버리고 말았다.

그래서 용은 승천하지 못하고 이무기로 남아 남해바다 깊은 곳에서 다시 기회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다.

화가 난 이무기는 우식도를 솔섬과 방패 섬으로 자르고 거미 섬을 오륙 도에서 쫓아 버렸다.

용왕님의 심부름꾼 거북이 거미 섬을 위로 하기위해 이름을 나암(娜岩아리따울)이라 부르게 하여 고기들이 자주 찾아 위로 하고 있다고 합니다.

대조기 때는 모세의 기적이 생기는 바닷길이 열리는 명소이다

 

2). 비용개(飛龍개)의 백운포(白雲布)

 

비용개를 용대(龍臺)라하며 신선대의 대붕산과 비룡산을 말하고 좌우 비룡산을 삼신산의 남방 주작이라고하고 명당국세도에 버금간다하여 봉곡등이라 묏자리로 알려져 잇다

飛龍개는 중국의 명산 황산의 안개에 버금가는 해무가 비용고개를 넘나들고 아련한 남해바다 대붕산과 비룡산 저 멀리 조도와 태종대 파도소리가 산울림처럼 묻어오는 몽돌의 소리를 신선의 풍악이라 하며 해무 속을 용이 승천한다하여 비용대라 하였다.

백운포라는 지명은 포구가 아니지만 늦봄과 여름이면 남해의 운해(雲海)가 비용고개를 넘어 마을로 넘어 오는 장관을 백운이라 하였고 옴팡진 곳이라 포구로 인식하여 백운포라 하였을 것이다.

 

3).신선대

 

신선대(神仙臺)는 1972년 부산시 기념물 제29호로 지정됐다. 신선대란 지명은 엔드류 왕자 길을 따라 200m 지점 좌측으로 오래된 돌계단을 따라 50m 정도 올라가면 자연석으로 층을 만들고 용당동 을 향하여 큰 바위 아래 우물이 있는 제법 넓은 집터가 있다

그 자리가 용당지(龍堂址)라고 한다. 그 당이 언제까지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이곳 큰 바위를 무제등이라 하였으며 이 큰 바위에 신선의 발자국과 신선이 탄 붕새의 발자취가 있다 하여 붙여졌다. 그러나 웅대한 바위에서 신선의 흔적을 찾기는 쉽지 않을 것 같다. 옛날 신선들이 이곳에서 주연을 베풀 때면 풍악소리가 용당포까지 들려왔고, 신라의 대학자 최치원이 여기서 신선으로 화했다는 전설도 남아 있다.

무제등 에서 신선이 활소기를 하다가 부러진 화살을 버리고 간 자리에 뿌리가나고 잎이 자란 나무가 화살나무라고 한다. 무제 등에는 3월에 노란 꽃이 피는 개 동백 생강나무와 화살나무가 바위틈에 자생하고 있다.

돌 틈에는 사방 한자정도의 샘이 있다. 이 샘을 유하정(流霞井)이라고 하며 유하수를 마시면 전설의 유하주와 같이 오랫동안 목마르지 않았다고 하여 많은 사람들이 이샘이 있는 무제등을 찾았다고 한다.

  신선대는 신선대부두 공사로 울창한 송림의 신선대는 부두로 변하였다 공사가끝나고서 부산시가 훼손된신선대를 확인하였으나 이미 없어졌으며 부산시가 항만공사에 신선대가 기념물이란것을 알리지 않았다고함

4)못난이 골짜기

 

동산 말에서 한고비를 넘으면 못난이골짜기라는 기암절벽이 작은 암자를 바치고 있다.

낙동강 작은 마을 어부의 외동딸 처녀가 중매쟁이 꼬임에 속아 분포리(용호동) 박 씨 총각과 혼인을 하였다. 신혼 단꿈을 꾸고 아침 신랑을 보고 너무 못생겨 기절할 뻔하였다.

시집가면 살아서는 친정에 오지 말라든 아버지 의 말씀 따라 남편으로 모시고 잘 살겠다는 다짐을 하였다. 결혼한지 1년되는 봄내음이 풍기는 4월 덜꿩나무 꽃향에 취해 봄나물을 캐다 절벽 아래로 실족하여 주검이 되었다.

못난이 남편의 별칭을 따서 이루지 못한 새 각시의 애절함이 묻어나는 이 절벽을 못난이 골짜기라 하였다. 그 후 신랑은 천연두로 곰보가된 처녀와 재혼을 하여 잘살았다고 한다 .

못난이 골짜기의 구름다리가 바람이 불면 중매쟁이를 원망하며 흐느껴 운다고 한다.

5.농바위

농(籠)이란 버들 채나 싸리 채 따위로 함처럼 만들어 한지를 바른 궤를 포개어 놓도록 된 가구를 말한다.

제주의 성산포 앞 우도 해녀들이 남천동 해안가에 자리를 틀어 물질을 하면서 동산 끝에서 백운포 맹밑(끝)까지 특정 바위 등을 기준으로 서로 연락하는 수단으로 농을 닮은 이 바위를 농 바위로 불러왔다고 한다.망부석이 된 농바위 할머니이야기가 있다.

어느 추운 겨울 어부는 대구를 잡으러 동해 바다로 떠나갔다.

한 달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았다. 소금 장사를 하던 어부의 아내는 수소문을 하여 남편이 떠난 동해 바다를 바라보며 그리움에 한없이 울고 있었다. 등에 엎인 젖먹이 딸이 엄마 팔다 남은 소금을 바다에 넣으면 아버지가 온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깜작 놀란 아내는 소금을 동해 바다에 부어 버렸다.

그래도 남편은 오지 않았다. 화가 난 아내는 딸을 꼬집었다 . 아기가 크게 울었다.

용왕님이 시끄럽다며 아내와 딸은 망부석으로 만들었다

그 후로 동해바다가 짜다고 하였다.

 

6).숭충골

 

농바위 옆 골짜기에 큰 선돌을숭충(崇忠)이라하고 이 골짜기를 숭충골 이라 한다.

숭충바위는 임진왜란과 관련이 있는곳이며 이골짜기를 쑹충골이라한다

 

7)구덕

 

물을 담는 동이(물 허벅)를 지고 다니기도 하고, 아기를 뉘어 지고 다니기도 하는 광주리의 일종을 제주도 방언으로 구덕이라 한다.

이곳 구덕은 넓은 반석이 많고 잘록 개가 바람을 막아 따뜻하여 해녀들이 작업을 마치고 쉬기에 적당한 장소로 애기에게 젓을 물리기도 하였다고 한다. 해녀들이 이런 조건을 갖추었다고 구덕이라 하였다.

해녀들이 물질을 마치고 태왁을 두드려 장단을 맞추고 구성진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며 해녀의 애환을 달랬다고 한다. 해녀의 노래를 들은 고둥의 껍질이 빨갛게 변하여 쉽게 잡을 수 있었다고 한다

8),치마 바위와 밭골새

돌의 모양이 치마를 입고 다소곳이 앉아 있는 모습과 같다고 하여 치마 바위라 부른다.

용호동 해안가 중에 낚시터 명당자리로 소문이 나 있다.

철마다 다양한 낚시의 손맛을 볼 수 있어 외줄낚시와 숭어 등을 채낚기도 한다.

2012년 적도의 남자 촬영지로도 알려져 있다

밭골새는 바다에서 산중턱에 개간한 밭이 보여 밭이 보이는 골짜기라 하여 밭골 새라 한다. 지금은 송림이 우거져 밭은 보이지 않는다.

 

9). 각시당(아씨당)

 

각시 당에 관한 전설은 용호동 두 기생이 임진왜란 때 정탐을 하다 그 석굴에서 목숨을 구한 곳이며 열흘 후 왜장을 껴안고 바다에 뛰어들어 모자반에 뒤엉켜 생을 마감하였다고 한다. 두 기생을 추모 하는 곳으로 음력 4월25일 제를 올린 자리였다.

어민들이 있는 해안가나 섬에 각시 당이라는 신당이 있다

이곳도 어업에 종사하는 어민들이 선박을 건조하여 진수하기 전 오방색 실타래와 흰 소복을 만들어 올리고 기도를 하여 바다 일이 순탄하고 만선하기를 기원하는 장소이기도 하다.

지금은 명당 이라 하여 신 굿을 하기도 한다.

 

10). 제석곡의 작은제석암(帝釋庵) 3존불당 과 산신당

 

용호동 제석 곡에 위치한 산신각과 3존 불을 모신 법당 이 있다.

 산신각은 재당을 관장하는 산신에게 예를 올리는 재를 지낸다.

제석암 은 신석의 3존 부처님을 모시고 불공을드리는 곳이다. 불공은  동재와 같이 음력9월9일에 재를 올린다

.삼존불은 대개는 법신(法身)·보신(報身)·화신(化身)의 세 부처를 말하며 과거 현재 미래 동안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는 불공을 올린다. 위패는「삼존불신지위(三尊佛神之位)」이다

용호동을 수호해 준다고 믿는 토지지신을 모시는 제당(祭堂)이 마을에 있다. 주민들은 해가 바뀔 때마다 매년 음력9월9일 제당에서 용호 향우회 주관으로 마을 제사를 지낸다.

신위의 위패는「용호동수호토지지신신위(龍湖洞守護土地之神神位)」이다

재당 앞 옹달샘 위에처음3개의 돌부처(신석)를 모셔 불공을 드리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돌은 목욕을 시켜 한지로 싸고 창호지로 승려들이 쓰는 것과 비슷한 고깔을 만들어 씌운 후 빨강 색깔의 천으로 방석을 만들어 그 돌을 받쳐 놓았는데 1년에 한 번씩 한지를 바꾼다. 모셔진 돌의 크기는 제법 큰 돌들이었다.

 

 

11)밭골새

 

치마바위에서 농바위 중간지점 넓은 반석이 바다로 미끄러지듯이 넓고 따뜻한 곳이다

지금은 소나무가 울창하여 산중턱의 밭이 보이지 않지만 50년 전에는 띄엄띄엄 밭을 개간하여 채마밭이 있었다. 그래서 해녀들이 밭이 있는 골짜기라 밭골새라 하였다 .

이 골짜기에는 콩짜개덩굴이 자생하며 철새 긴 꼬리 딱새가 열대지방에서 한여름 이곳에서 알을 낳고 새끼를 키워 고향 스리랑카로 돌아간다.

 

12)치마바위

 

해녀들이 바다에서 물질을 하면서 약속장소로 치마를 펼쳐 놓은 것과 같은 이 바위를 치마바위라 하였다. 낚시꾼들이 즐겨 찾는 곳이며 가을이면 숭어 채낚기와 1월이면 학꽁치 등의 입질이 좋은 곳이라 입소문이 난 곳이다

 

13)낭끝

 

이기대(이부지)와 치마바위 중간의 절벽지이다

오래전부터 해안초소가 있어 민간인들이 출입할 수 없는 곳이었다.

1960년도까지 땔감으로 산의 관목과 삭정이 새골 까지도 잘라 땔감으로 하였다

그러나 통재된 곳이라 소나무가 한그루 버티고 있어 나무가 끝으로 남았다하여 낭끝이라 해녀들이 불렀다 제주방언으로 나무를 낭이라 한다.

 

14)창(艙)바위(배다리)

 

이기대반석에서 환경공단 남부하수 처리수 해중 방류구 대트라포트를 설치하여 터널을 보호하고 있는 곳이 창(艙)바위다. 동광산의 동광석을 화물선에 싣기위해  배다리가 있는 바위를 창바위라고하며 배다리 선창 이라고도 하였다.

임진왜란 두기생과 왜군장군들이 이기대 반석에서 승전축하 잔치를 하기위에 전함을 정박시키기도 한 곳이다

용호동 동광의 광석을 일본으로 실어나르는 부두 역확을 한곳이다. 수심이깊고 큰화물선이 선착하기 좋은곳은 창바위 뿐이다

 

15)목넘어

동산의 두 봉우리 중간이며 용의 목이라 하고 그 등을 용의 목을 넘는 다고하여 목 넘어 라고 하고 그등을 목 등이라 하였다.

 

16)동산끝(瞳山末 동산말)

 

동산(瞳山)의 끝이며 용의눈자리 아래용의 아가리 그리고 용설(龍舌)이 수영만을 지키고 있어 어부들이 출항을 하면서 마음으로 빌었다는 곳이다.

그러나 공무원이 잘못 기록하여 동생 말이라 기록하여 엉뚱한 이름을 얻었다.

이유인즉 부산해안가 억양이 동산 끝을 동사이 끝이라고 발음하여 사이를 일본말의 생으로 받아 적어 동생말이 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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