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7년 2월6일 동아일보에 기고한 내고향 명물자성대 만세덕 기공비투고 에서 비문에 글서너자도 보이지 않은상태로 남아 있다고 기록하고 있고 수리섬에 옮겼다고 하나 확인된바 없어 수장으로 추정되며 2013년6월24일 오륙도 앞바다에서 인양한 이돌비석이 기공비가 유력하다하겠다
만세덕의 자성대 기공비
명나라 군은 1597년 12월 22일부터 다음해 정월 4일까지 연 13일 동안 전투를 하다가 스스로 퇴각을 결정하여 많은 병력상의 손실을 보고 실패한 전투를 승전으로 조작하려다가 명나라 장군 양호(楊鎬)는 명나라 황제 신종에게 경질을 당하고 대장의 자리를 만세덕(萬世德)에게 물려주고 말았다.
양호는 천여 명이 죽고 수천여명이 부상당한 실패한 울산성 전투를 100여명만이 죽은 승전으로 조작하려한 엉터리 명나라장군 양호를 따라 다니다가 결국엔 조선병사들도 다 죽고 인심도 잃었다.
유성룡은 징비 록에서 울산 전투에서 조선군은 사망 298명. 중상자 876명. 도망자 4,982명. 현재인원 3,813명으로 도망자가 50% 를 능가하는 결과를 초래하고 있다 고 기록하였다.
정유재란(丁酉再亂)이 끝나고 부산진 지성(枝成)인 자성대 (子成臺)에 명(明)나라장수 만세덕이 주둔하였다.
만세덕은 임진왜란때 조선을 도와준 명나라의 경리(經理)로 조선을 열성적으로 도와주었다. 경리는 지금의 참모(參謀)와 같은 직책인데 만세덕은 양호(楊鎬) 대신으로 같은 해의 12월 경리로 임명되었다.
만세덕의 기공비(釜山平倭碑銘. 釜山子城碑銘)는 만세덕 장군이 많은 문무 장리를 거느리고 조선에서 왜적을 물리친 다음 그의 공적과 휘하 장병 59인 이름을 각명해 놓은 것으로 전 병부직방사 낭중(兵部職方司 郎中) 가유약(賈維鑰)이 비명을 짓고 돌에 새겼다.
그 후 이 비가 양단 파손되어 초간에 넘어진 채로 방치되어 있었다.
肅宗(숙종)35년 서기1709년 동래부사 권이진이 이 사실을 조정에 아뢰어 자성대 위에 만세덕(萬世德)의 공을 기리는 만공단(萬公壇)과 자성비각(子成碑閣.記功碑)을 세웠다.
1927년2월6일 동아일보에 부산명물 자성대의 내 고을 명물 투고에는 “후세 사람들이 만세덕과 훈일원 마귀동장군의 공적을 기념키 위하여 세운돌비만 세넷글자도 보이지 않게 지금까지 남아 있습니다. 자성대를 세운 이유가 무엇인가?라고 묻고 있었다.
그러나 그 후 일제는 제사를 모시지 못하게 금지하였고 유적비마저도 땅에 묻어 버렸다. 만공단은 없어지고 매몰되었던 자성비 는 오륙도 수리섬으로 옮겼다고 하나
용호동 주민 한사람도 기공비(記功碑)를 목격한 사람이 없었다. 고 한다
자성비의 규모가 어느 정도 이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수리섬에는 배를 접안할 장소도 없는 곳에 굳이 달갑지 않은 비석을 운반하여 재설치 하였을까?
고침 두깨는 두께로고침
수리섬의 상부 바위가 비석처럼 보여 비석섬이라고 기록한곳도 있으며 만세덕 과 관련하여 기록한 예도 있다고 한다
ㅊ천만리장군기념비 기념비는 받침대 1400x1050x250 비석높이2700폭1000두께300
영양천씨 중시조가된 명나라 천만리장군 기념비(1947년2월1일)이끼가자생하고 벌레에의해 훼손되어 시멘트로 후손들이 비문을 세웠다
자성대 장대 진남대 에는 만세덕에관한 자료는 없었다
영양천씨(潁陽千氏)중시조(中始祖) 만리(萬理)장군 묘소
비석
1952년 천만리 비문 과 주위환경 미군촬영
'향토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용호동의 지명 (0) | 2013.08.24 |
---|---|
오륙도의역사와거미섬 (0) | 2013.07.28 |
비룡산 동백곳 (0) | 2013.06.23 |
남구의 유형문화재 (0) | 2013.05.03 |
오륙도 (환경문화) (0) | 2013.05.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