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구의 유형문화재
1. 금동보살입상(金銅菩薩立像)
ㆍ 종 류 : 국보 200호 (1979. 4. 30)
ㆍ 시 대 : 통일실라시대 (8세기 후반)
ㆍ 소재지 : 부산직할시 시립박물관
이 보살상은 보관, 대좌, 광배가 유실되고 천의의 일부가 결손 되었으나, 8세기 후반의 전형적인 양식을 갖춘 금동보살상이다.
정면을 바라보며 가슴을 펴고 당당한 자세로 꼿꼿이 선 보살상으로, 높이가 34cm나 되는 비교적 큰 불상이다.
체구는 다소 뻣뻣한 느낌이 없지 아니하나 떡 벌어진 어깨와, 풍만한 가슴에서 허리로 이어지는 곡선은 한결 부드럽고 탄력성과 중량감이 넘치고 있다.
얼굴은 원만한데 아래턱은 살이 올라 풍만하고, 치켜 올라간 가는 눈과 오뚝한 콧날, 작은 입 등 그 표정은 단엄하고 자신만만해 보인다. 그러면서도 입가에는 잔잔한 미소가 서려있어 보살의 자비로움을 느끼게 한다.
굵은 목에는 삼도가 두툼하게 새겨져서 힘찬 느낌은 주는 듯하다.
보발은 이마에서 곱게 갈라 빗어 정수리까지 높이 틀어 올려서 마치 구름을 휘감은 듯한 보계가 우뚝 솟아 있다.
오른팔은 구부려 옆 가슴에 대고 엄지와 검지를 꼬부렸고, 왼팔은 자연스럽게 아래로 뻗어 손으로 무엇을 잡으려는 듯이 엄지와 검지를 살짝 꼬부렸다. 양팔의 상박부와 팔목에 팔찌를 끼웠는데, 상박부의 염천은 보주를 장식한 굵은 것이고 팔목에는 쌍가락지형의 가는 것을 끼웠다.
이 두 쌍의 팔찌가 유일한 장식구로서 그 밖에 아무런 장식도 하지 않은 것이 이 불상의 특징의 하나이다.
상반신에는, 소위 보살의 옷이라고 하는 천의를 양어깨에 걸쳤을 뿐이고 하반신에는 엷은 군의를 입었는데 그 윗부분을 접어서 허리에 동여맸다. 군의의 옷자락은 좌우 두 갈래로 “U”자형의 다섯줄을 옷 주름을 잡은 다음 흐르듯이 아래로 드리워졌다가 끝에 가서 다시 한번 U자형의 옷 주름을 반복하면서 발목을 덮었다.
양어깨에 걸친 띠 모양의 천의는 겨드랑이를 살짝 가린 다음 몸의 양쪽으로 율동적인 굴곡을 그리면서 자연스럽게 흘러내려 발끝에 가서는 미묘한 변화를 보이고 있다.
왼쪽 천의의 중간부분과 끝부분이 약간 결손 되었으나, 큰 흠이 되지는 않는다.
이와 같이 하반신의 아름다운 옷 주름과 천의의 율동적인 곡선은, 이 불상이 마치 장부와 같이 당당하고 엄숙한 분위기를 한결 부드럽게 조화시켜서 보살의 성스러운 정신을 조형화하는데 큰 구실을 하고 있는 듯 하다.
총체적으로 본다면 서로가 원만하고 거체의 조형이 사실에 충실한 편이며, 균형과 입체감도 충분하여 보살의 위엄과 자비로움을 아울러 갖춘 불상이다. 통일신라시대 장인의 기상과 원숙한 조형기법으로 조성된 뛰어난 작품이라 하겠다.
이 보살상은 청동을 재료로 주조한 것으로 불상의 내부는 공동이고, 후면 세 군데에 주물공이 있으며, 중앙부에 광배를 고정시키기 위한 큰 촉이 마련되어있다. 도금은 거의 완전하여 아직도 금색이 찬연하다
도금이 깨끗하게 남아있는 사유는 사찰에서 불상을 모시고 있다가 어떤 부분이 파손되면, 오동나무상자에 넣고 다시 석함에 이중으로 넣어 절 경내에 묻어 버리는 것이 예라고 한다.
이것을 몰래 본 어떤 사람에 의하여 발굴, 보관되었다가 박물관에 오기 직전에는 고 오재균 선생님이 소장하셨다. 그 후 선생님의 뜻에 따라 부산직할시립박물관 개관 때 전시하게 되었다.
그 당시(1978년) 1억 5천만원의 건물과 바꾸자는 제의에 거절한 사유는 건물 주인이 서울사람이고, 이 불상이 부산을 떠나는 것이 싫어서였다고 한다. 그러나 그 가격의 절반에 양도하게 된 것은 부산직할시립박물관에 기증한다는 조건 때문이었다. 국보 200호는 부산을 사랑하신 고 오재균 선생님과 고 김지태 회장님의 깊은 뜻이 담긴 국보이다.
2.전 산청 석남암사지 납석사리호 (傳 山淸 石南巖寺址 蠟石舍利壺)
ㆍ 종 류 : 국보 233호(1986. 10. 15)
ㆍ 시 대 : 신라 (766년)
ㆍ 소재지 : 부산직할시 시립박물관
경상남도 지리산 암벽 아래에 있는 암자터에서 불상이 없는 대좌의 가운데 받침돌 안에서 발견된 통일신라 때의 거무스름한 곱돌(납석)항아리이다.
그릇은 거무스레한 갈색곱돌을 물레로 깎아 만든 것으로 그릇의 안팎에 칼자국이 그대로 남아 있으며 별다른 장식은 없으나 어깨에 한 줄 아랫배에 두 줄의 쌍선을 음각하였다.
뚜껑의 상면에도 두 줄의 동심원을 음각하고 그 안에 세 겹의 간결한 연화문을 새겼는데 이것이 유일한 장식이다.
전체 높이 14.5cm, 입지름 9cm, 몸통지름 12.3cm, 밑지름 8.4cm, 항아리 높이 (뚜껑제외)는 12.2cm이다. 이 그릇의 몸통에는 한 줄에 8~11자 15줄 136자의 비로자나불상조상기(毘盧遮那佛像造像記)가 새겨져 있고 그릇의 밑바닥에도 4줄 22자의 글자가 초서로 음각되어 있다.
이 명문은 고식의 이두문으로 고졸한 문투가 곳곳에 보이고 약자 성획자(省劃字), 이자(異字)들이 섞여서 읽기가 쉽지 않으나, 대략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해석된다.
「영태 2년 7월 2일 석 법승, 법연 2승이 돌아가신 두온애랑(豆溫哀郞)을 위하여 석조비로자나불상을 조성하여 무구정광다라니(無垢淨光陀羅尼)와 아울러 석남사 관음암에 봉안하나이다. 바라옵컨대 두온애랑의 영신이나, 2승이나, 정례하거나, 수희(隨喜)하는 일체중생의 삼악도의 업보가 없어지기를 비로나자나불에 비나이다.」 즉 죽은 사람의 혼령을 위로하고 불상을 조성하는 공양승과 불법에 귀의하는 중생들의 업멸을 비는 일종의 서원문형식이다. 밑바닥은 명문은 송곳 같은 것으로 새긴 흘림글씨가 되어서 첫줄 「內物是在之」이하는 거의 판독할 수가 없다.
이 납석호는 1981년 부산시립박물관이 우연한 기회에 입수 수장하게 된 것인데, 그 뒤로 박물관 측의 꾸준한 추적조사에 의하여 이것이 출토된 석불대좌의 원소재지와 이 납석호를 발견 채취한 사람을 찾게 되었다.
처음 이 항아리를 발견하였을 때에는, 그 속에 청동제 장방형의 작은 상자가 있었고, 그 안에는 산화되어 재가 된 종이가 가득 들어 있었다고 한다. 또, 이 대좌 위에 봉안되어 있던 석조불상은 1947년 석남리에 사는 동민이 반출하여 보관하였다가, 1959년경에 내원사(산청군 삼장면 내원리)에 양도한 사실도 알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 납석호와 현지에 무너져 있던 석불대좌와 광배, 내원사에 봉안하고 있던 석조비로자나좌상 등, 여러 곳에 흩어졌던 불상을 완전 수습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불상대좌중대석에 법사리를 봉안한 것도 우리나라에서 처음 보는 사례로서 복장(腹臟)의 초기양식으로 보인다. 또 항아리의 형태나 몸통 표면에 명문을 새기는 방식도 그 뒤 동화사(桐華寺) 석탑에서 나온 석합 등으로 양식적 계통이 이어진 것으로 생각된다.
이 납석호에 의하여 내원사의 석조비로자나좌상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것임이 밝혀짐에 따라 신라시대 비로자나불사의 조성 연대를 8세기까지 끌어올리게 되어, 불교사와 미술사 연구에도 귀중한 자료를 얻게 된 것이다. 도 이 불상은 그 조성연대와 장소, 관계인물과 사연이 명확하여, 당시 석불의 조성과 사리봉안에 대한 일면을 엿볼 수 있으며, 조성기는 8세기의 이두문으로서 어문연구에도 좋은 자료가 될 것으로 생각된다.
3. 약조제찰비(約條制札碑)
ㆍ 종 류 : 부산시 지정문화재 제17호(1972. 6. 26)
ㆍ 소재지 : 부산직할시 시립박물관
부산시의 지방문화재 기념물 제 17호로 지정되어 있는 이 비석은, 1683년(숙종 9)에 동래부사와 대마도도주가 왜관의 운영을 위한 금제조항 다섯 가지를 제정하고, 이를 널리 알리기 위하여 세운 것이다. 비석의 높이는 140cm, 폭은 68cm이며, 머리는 반달모양이고 재료는 화강석이로서, 원래 용두산 공원 동쪽에 있던 것을 1978년 5월에 시립박물관 경내에 옮겨 놓았다. 이것을 세우기 된 경위는 다음과 같다.
1607년(선조 40) 부산의 두모포(현재 동구 수정동 부근)에 왜관이 설치되고, 또 이어서 조선과 일본 양국 간에 국교의 정상화가 이루어지자, 왜관에는 대마도관인과 항거왜인이 거주하게 되었으며 한편으로 일본상인들의 출입이 잦아지면서 양국 상인의 접촉도 빈번해져, 자연히 국금을 무시한 밀무역 잡상행위 등의 여러가지 폐단이 일어나게 되었다. 정부에서는 이러한 폐단을 바로잡기 위하여 왜인과 교섭하여 여러 차례의 약조를 맺고 위반자를 엄중히 단속하였으나 두모포에서 초량(현재 용두산 일대)으로 왜관을 옮긴 후 그 왜관의 규모가 매우 크고 넓었던 까닭에 왜인들의 범법행위는 걷잡을 수 없이 심해졌다. 이에 1683년(숙종 9)에 통신사로서 일본에 갔던 윤지완(尹志完)은 돌아올 때 대마도에서 도주와 더불어 전문 5개조에 달하는 약조를 체결하였는데, 동년 8월에 이르러 양측은 이것을 한문과 일문으로 각기 제찰하고 비석에 새겨 조선 측은 수문안, 일본 측은 왜관의 경계선에 각각 세워서 널리 알리게 하였다. 이때 조선 측에서 세운 비석이 지금 남아 있는 것으로서, 그 내용은 아래와 같다.
* 이 금표(禁標)한 정계(定界)밖에 대소사를 막론하고 함부로 뛰쳐나와 범월(犯越)하는 자는 사형죄로 논단(論斷) 할 것
* 노부세(路浮稅 : 倭債)는 현장에서 잡은 후 준 자와 받은 자를 똑같이 사형죄로 다스릴 것
* 개시(開市)할 때 각 방(房)에 몰래 들어가서 비밀리에 서로 물건을 팔고 사는 자는 피차가 각기 사형죄로 다스릴 것
* 5일마다 잡물(雜物)을 입급(入給)할 때 색리(色吏), 고자(庫子), 소통사(小桶事) 등은 화인(和人 : 일본인)들을 일체 끌어내어 구타하지 말 것
* 피차 의 범죄인은 모두 관문(館門) 밖에서 집행 할 것
(본문)
一, 禁標定界之外 母論大小事 欄出犯越者 論以一罪事
一, 路浮稅 現捉之後 與者受者 同施一罪事
一, 開市日 潛入各房 密相賣買者 彼此各施一罪事
一, 五日雜物入給時 色 子庫子小通事等 和人切勿扶曳毆打事
一, 彼此犯罪之人 俱於館門外刑事
4. 척화비(斥和碑)
ㆍ 종 류 : 부산시 지정문화재 제18호(1972. 6. 26)
ㆍ 소재지 : 부산직할시 시립박물관
1871년(고종8) 대원군이 서양 제국주의 세력의 침략을 경계하기 위하여 서울, 부산을 비롯하여 전국의 중요한 곳에 세우게 되었는데 이 비석이 그 중의 하나이다. 이 비석은 원래 부산진성터에 세워져 있던 것을 1924년 용두산 공원으로 옮겼다가 1978년 5월에 부산시 남구 대연동 소재 시립박물관 야외 전시장에 전시되어 있다.
비문의 내용은 병인양요 이래의 구호인 “서양 오랑캐가 침입하는 데 싸우지 않으면 화친하는 것이요, 화친을 주장하는 것은 나라를 팔아먹는 것이다.” 洋夷侵犯 非戰則和 主和賣國의 12자가 큰 글자로 되어있고, 그 옆에 “우리들의 자손만대에 경고하노라! 병인년에 짓고 신미년에 세운다.” 戒我萬年子孫 丙寅作 辛未立가 작은 글자로 각각 새겨져 있다.
그 뒤 1882년 임오군란 때 대원군이 청나라에 납치되자 이 틈을 탄 일본공사의 요구로 모두 철거되었다.
이 비석은 우리나라 개항 당시의 시대상황을 알리는 중요한 자료이며 당시의 상황을 보면 다음과 같다. 1866년(고종 3)에는 미국 상선 제너럴 셔어먼호가 강제로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가 평양에까지 이르러 통상을 강요하자 선원과 평양 군민간에 충돌이 발생, 상선은 화공을 당하고 선원들은 살해당했다. 1866년 로즈제독이 이끈 프랑스 함대 7척이 인천 앞바다에 나타났다. 프랑스 함대의 내습은 프랑스인 신부에 대한 정부의 박해가 직접적인 원인이 되어 프랑스군의 일부는 강화도에 상륙하여 강화읍을 점령, 병기와 서적들을 약탈했다. 그러나 서울로 향하던 함대는 많은 피해를 입고 퇴각하였는데 이것이 병인양요이다.
고종 8년(1871) 셔어먼호사건에 대한 추궁을 계기로 신미양요를 일으킨 미국은 이것을 기회로 삼아 조선을 개국하여 수호통상의 길을 열고자 하였다. 그러나 대원군은 전승의 기세로 척화의 결의를 다짐하면서 쇄국정책을 강행하게 되었는데 이것을 상징하기 위하여 척화비를 전국 요지에 세우게 되었다.
비의 높이는 143cm, 폭 44.7cm, 두께 23.8cm의 크기에 주문 12자가 새겨져 있으며 재료는 화강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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