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사

전승문화의 유산

아지빠 2013. 5. 3. 17:27

 

 

제4장 전승문화의 유산

1.용호동의 신석기 유적

용호동의 유적은 1982년2월경에 용호동산의임232-2/임233번지 일대에서 배순석씨가 석기를 발견하여 부산광역시 시립박물관에 신고 함으로써 알려지게 되었다.

당시 마제석부(磨製石斧)등의 석기류(石器類)출토 소식을 듣고 부산시 문화재 관계자와 부산광역시 시립박물관 직원의 현장조사가 있었으나 이미 주위 지면이 상당히 삭평된 상태여서 유구(遺構)의 흔적이나 그 밖의 유물들은 확인 할 수 없었다고 한다.(현재 도로와 무단경작으로)

석기 류가 출토된 곳은 행정구역상 용호동 산의임232-2/233번지 일대이다. 유적은 백운포 이개 해발50m정도의 나지막한 구릉 상에 입지하고 있는데 아래쪽에는 천주교묘지가 조성되어 있고 남으로는 부산 앞바다가 보인다.

용호동 일대는 현재까지 선사(先史) 및 고대(古代)의 유적이 발견된 바 없으나 금번에 소개하는 석기류(石器類)의 예로 보아 앞으로 이 일대에 대한 정밀 지표조사(地表調査)가 행해진다면 새로운 유적이 검출될 가능성이 매우 크다고 생각된다.

전술(前述)한 바와 같이 용호동 출토 석기류는 공사 중에 우연히 발견된 관계로 유물의 출토 상태나 유구(遺構)의 성격은 불확실 하다 . 그러나 당시 신고자의 말(言)에 따르면 마제석부(磨製石斧),지석(砥石) 등의 석기류는 거의 동시에 수습되었다고 하므로 일괄품(一括品)으로 보아도 좋을 것으로 생각된다.

용호동 유적지에서 출토된 석기는 마제석부(磨製石斧)1점, 편평양인석부(扁平兩刃石斧)2점,편평편인석부(扁平片刃石斧)1점, 석착(石鑿)1점 지석(砥石)2점 등 총7점이다.

마제석부(磨製石斧)는 평면이 말각장방형(抹角長方形)의 타원형(橢圓形)을 이루고 전체적으로 납작한 느낌을 주는데 이와 유사한 형태는 금탄리 유적 재2문화층 출토품 등이 있다.

용호동출토 마제석부(磨製石斧)는 다대동출토품과 마찬가지로 인부(刃部)만 마연한 특징을 보여준다. 편평양인석부(扁平兩刃石斧)는 2점모두 석재(石材)나 제작 기법 상에서 동일한 모습을 보여주는데 전체적으로 제형(梯形)을 이루는 것이 특징이다.

편인석부(片刃石斧)와 석착(石鑿)은 각1점씩 출토 되었는데 전체적으로 가볍게 마연한 상태 이다. 석착(石鑿)은비교적 세장(細長)한 형태인데 보통석착(石鑿)보다 길이가 긴 편이다. 한편 용호동 유적지에서 출토된 석기류의 대부분은 혼펠스제(製)인데 이들 석질은 부산 지역뿐만 아니라 그 밖의 지역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것이며 신석기(新石器)와 무문토기시대(無文土器時代)의 석기 재료로써 일반 적으로 이용되는 것이다.

그런데 용호동에서 출토된 마제석부(磨製石斧)는 그 석질(石質)이 편마암(片麻岩)으로 이것은 부산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인접지역에서는 구할 수 없고 경남의 진주 ,하동, 산청, 합천, 경북안동, 동해안의 영덕을 연결하는 지역 부근이나 그 이북 지역에서 발견 되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용호동 출토 편마암제(片麻岩製)마제석부(磨製石斧)가 재지(在地)생산품이 아니라 타 지역에서 유입된 것임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으로 앞으로 석기 연구(石器硏究)에 시사 하는 바가 크다고 생각된다.

용호동 출토 편마암제(片麻岩製)마제석부(磨製石斧)의 유입 배경에는 여러 가지로 추정 할 수 있겠지만 크게 인간 이동의 소산물로써, 혹은 집단 간의 교류 품으로써 그 가능성을 상정할 수 있을 것이다. 전체적으로 보아 편마암제 마제석부가 정형화(定型化)되어 있는 점이나 인부(刃部)의 마연상태, 석재의 산출지 등에서 타석기류와 확연히 구분되는 것으로 보아 후자의 가능성이 높다고 하겠다.

아무튼 용호동 출토 편마암제 마제석부는 석재의 공급 관계라든가 집단 간의 교류 실체 등을 파악 하는데 귀중한 자료로 생각된다.

용호동 유적은 주위 환경이나 유적의 입지 상태로 보아 주거지가 존재할 가능성도배제할 수 없으나 여기서 출토된 마제석부 편평양인석부(扁平兩刃石斧)석착(石鑿)지석(砥石)등 석기류의 기종구성이라든가 유적의 입지 환경이 바다를 바라 볼 수 있는 곳에 위치하고 있는 점 등에서 전술한 다대동 유적과 거의 동일한 양상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에 다대동 봉화산 유적과 비슷한 성격을 갖는 유적으로 추정 되며 ,그 시기도 신석기 시대 후기로 판단된다.

 

                                  신석기시대 유물

                                                            청동기시대 토기파편

*용호동 백운포 이개 신석기 유적출토지 임232-2/233번지

*용호동 백운포 이개 신석기 유물 7점

 

1. 각시당(아씨당) (전통문화유산)

 

 

각시 당에 관한 전설은 용호동 두 기생이 임진왜란 때 고초를 당하고 그 석굴에서 목숨을 구한 곳이며 열흘 후 왜장을 껴안고 바다에 뛰어들어 모자반에 뒤엉켜 생을 마감하였다고 한다. 두 기생을 추모 하는 곳으로 음력 4월25일 제를 올린 자리였다.

어민들이 있는 해안가나 섬에 각시 당이라는 신당이 있다

이곳도 어업에 종사하는 어민들이 선박을 건조하여 진수하기 전 오방색 실타래와 흰 소복을 만들어 올리고 기도를 하여 바다 일이 순탄하고 만선하기를 기원하는 장소이기도 하다.

지금은 명당 이라 하여 신 굿을 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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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재석골(齋釋谷)재석암(齋釋庵)의산신재와 3존불당 그리고 재당(전통문화유산)

 

재석골 산신 재당과 법당

 재석골 삼존석불







   동재당 진설

 동재당에 참석하신분들

 

재석암(齋釋庵)산신재와 3존불당 그리고 제당(전통문화유산)

 

용호동 재석 곡에 위치한  재석암 산신각과 3존 불을 모신 법당이 있다.

보통 산신각은 3존 불당과 동네 토지지신위를 모시는 재당을 관장하는 산신에게 예를 올리는 재를 지낸다.

.삼존불은 대개는 법신(法身)·보신(報身)·화신(化身)의 세 부처를 말하며 과거 현재 미래 동안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는 재를 올린다. 위패는「삼존불신지위(三尊佛神之位)」이다

용호동을 수호해 준다고 믿는 토지지신을 모시는 재당(齋堂)이 마을에 있다. 주민들은 해가 바뀔 때마다 매년 음력9월9일 재당에서 용호 향우회 주관으로 마을 재를 지낸다.

신위의 위패는「용호동수호토지지신신위(龍湖洞守護土地之神神位)」이다

용호재당보존회는 재(齋)일 1개월 전 회의를 소집하여 재관선정과 예산 책정 등을 의결 한다

재관은 초헌관. 아헌관. 종헌관, 축관과 집례. 좌 우집사 등으로 구성되며 향우회 회장이 초헌관으로 아헌관과 종헌관은 구의원과 동자치위원 및 동장 등이 재관으로 선정된다.

재수는 용호 여성 향우회가 주관한다.

질병과 재액으로부터 벗어나 건강하고 풍요롭게 살 수 있도록 해 달라고 빌고 희망을 가진다.

구전(舊傳)에 의하면 1549년 이곳에 거주하든 금녕 김씨 집안에서 지금의 재당 앞 옹달샘 위에처음3개의 돌부처(신석)를 모셔 불공을 드리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돌은 목욕을 시켜 한지로 싸고 창호지로 승려들이 쓰는 것과 비슷한 고깔을 만들어 씌운 후 빨강 색깔의 천으로 방석을 만들어 그 돌을 받쳐 놓았는데 1년에 한 번씩 한지를 바꾼다. 모셔진 돌의 크기는 제법 큰 돌부처 다.

1940년경 노천의 삼존석불을 주민들의 모금으로 김중하씨가 부처님을 모시는 법당을 만들었다고 한다.

마을에서는 부정하여 큰 벌을 받았다는 이야기가 있었으나, 신병이 때를 같이 발생한 것이 대부분이었다고 한다.

 


*삼존석불 신석사진 10월#8폴더 sam0431-2jpg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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