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사

지명과명소(2)

아지빠 2013. 5. 3. 17:26

 

2. 거미섬(거무섬)나암 (지명 명소)

 

 

거미섬의 설물때 걸어서 거미섬까지 갈수있다

 

 한센병환자들이 떠나고 똥섬은 본레의청정 거미섬으로 거듭나고있다 수산자원의 치어방류지로 최적지가 아닐까?

바다목장도필요하지만 자연환경이갖추어진 거미섬에 치어들이 건강하게자라남,동해바다를살찌울 그 날까지

 

                             해안(海岸)암초(暗礁)에있는 조위(潮位) 측정(測定)용 수척(水尺)

  (일제가 용호동용각지 자락애 움직이지않는 육상군함을 설치하여 현해탄을 감시할

전함역할을 하기위해 해수표를만들어 조석차이를확인하든 원형그대로 보존하고 있다.)

 

 

 

  일본쓰시마 해안(海岸)암초(暗礁)에있는 조위(潮位) 측정(測定)용 수척(水尺)

 ㅇ용호동 장자등 구덕 해안(海岸)암초(暗礁)에있는 조위(潮位) 측정(測定)용 수척(水尺)

 

 

 

 

 

 ( 상여돌앞수표)

오륙 도 는 남동해안 끝에 위치하여 용호동의 해안은 조군돌(작은 돌 제주방언) 까지 동해에 속해 있어 남동해의 경계점에 있다

오륙도 와 비용개 사이에 거미처럼 생긴 나지막한 섬이 있다, 용호농장이 있을 때는 똥섬이라 부르기도 하였으나 한센 농장이 이주하고 해안이 깨끗하게 복원되어 본래의 이름인 거미 섬의 역할이 기대 된다. 사투리로 거무섬 이라 하여 검은 섬으로 비쳐 흑석도(黑石島)나암이라고 한다. 거미 섬은 수심이 2m 미만으로 다양한 해조류와 각종 해산물이 풍부하여 치어의 산란지로 조성할 가치가 높은 곳이다

일제는 거미섬 북단에 바닷물의 높이를 관측하는 구조물인 해수표를 만들어 사용하였다 현재까지 원형 유지하고 있다 역사속의 거미섬은 오륙도 의 섬에속해 있었다 (아래자료이다)

1740년 동래영지 도서조에 기록한 오륙도의 어원에서 “오륙도는 본영(좌수영)에서 남쪽으로 15리 절영도의 동쪽에 있다.

봉우리와 깎아지른 듯 모양이 기이하고 바다 가운데 나란히 서 있으니 동쪽으로 보면 여섯 봉우리가 되고 서쪽으로 보면 다섯 봉우리가 되어 이렇게 한 것이다.

(五六島, 在營南十五里絶影島東. 峯密削立列在海中,自東觀之爲六峯, 自西觀之爲五峯)

절영도(영도)나 대붕산 정상(신선대)에서 보면 우식도(牛食島 방패 섬과 소풀 섬))와 수리 섬. 송곳 섬. 굴 섬. 밖 섬(등대섬) 그리고 거미 섬으로 구성하여 여섯 섬으로 보이나,

서쪽인 해운대에서 보면 잘록개에 가려 거미 섬이 보이지 않아 다섯 섬으로 보인다고 기록한 것이었다.

1850년내영지에서도 같은 기록이 있어 그 후

어느 때부터 가까운 곳에서 세분(細分)하여 거미 섬을 재외하고 우식도의 두 섬인 방패 섬과 소풀 섬(솔섬)을 분리하여 밀물일 때는 방패 섬과 솔 섬으로 나누어지고 썰물일 때는 바닥이보여 하나로 되어 오륙 도라고 하고 있다.

동래영지 도서조의 기록에서도 각 섬의 이름을 명기하지 않아 거미 섬은 오륙도에 이름을 올리지 못하는 외로운 섬으로 남아 이름마저 부산사투리 거무 섬이라 하여 흑석도(黑石島)로 불렀다. 근래에는 나암(那岩)이라 하여 어찌하겠는가? 서운함을 달래고 있다. 참고 견디는 것이 아리따워 娜岩이라고도 한다.

 

방패섬 :2012년11월 2일촬영한장자산 오륙도해안 폴드 sam0525이미지에 바위가 없어진 것이 확인됨

거미섬이미지 장자산#오륙도 230.231jpg 거미섬

5). 천주교 공동묘지 (종교복지)

 

 

 

 

 

 

 

 

 

 

용호 4동의 비룡산 남단 바닷가 언덕 위에 아늑한 무덤 자리가 마련되어 있다. 1970년대부터 이곳 산록의 약 6,050㎡ 산지에 천주교 묘지가 마련되어 있는데 구획정리가 잘 되어 있고 단장을 잘 했기 때문에 공원묘지와 같은 인상을 주고 있으나 개발 계획과 주변 사람들에 의하면 이 공동묘지도 곧 다른 곳으로 옮겨가게 될 것이라고 한다.

1월8 이미지2692/2693-1

 

6,대기업 변화와 지역 에 미치는 파급효과(경제환경)

 

 

 50톤용광로 가동 소결로및 큐푸라 그리고 주제품 철근생산시설

 

 

후판공장 가동시작및 롯드 생산

 

(거대기업이 최악의 환경을 용호동 주민들의 가슴과 귀와 코그리고 마음까지병들게하든 그 모습 분진과 매연이 괭음에실려  마을을 삼키고 있다)

이곳에 처음으로 철강생산 공장이 1963년 자리를 틀었다

용호만 개흙바다에 수장끝(水藏末) 자락을 채석하고 연탄재 등으로 매립의 물꼬를 틀었다

고철 철판 재활용 소형 철근생산부터 (1965년) 일 생산50톤의 용광로와 전로 그리고 소결 로를 설치하여 중형압연을 위한 강대생산을 시작했다.

450㎥의 산소공장과 내화공장을 완공하고 부가시설을 설치하였다

그 당시300마력 급 소형압연 3기의 공장과1000마력 급 중형3기의 압연 공장이 가동 되여 철근생산을 본격적으로 하였다

소결용 선철과 고철에 의한 용광로의 강대의 질이 낮아 고철전용15톤 전기로3기를 1966에 설치하고 본격적으로 강대를 원료로 한 압연공장의 질 좋은 생산이 시작되었다.

1971년 일본에서 중고후판공장을 구입하여 후판을 생산하고 연속 rod 공장을 가동하여 계열회사 조선선재의 선재와 용접봉 생산의 원료 공급을 시작하였다.

15톤 전기로 가동으로 용광로와 부가시설가동은 중단하였다

철강수요가 증가하자 전기로 50톤과 직류전기로100톤으로 고철용해를 시작하여 후판용 강대와 선재, 철근용 연속강대생산 공장(ccm)을 독일에서 수입하여 설치하여 대량생산의 틀을 다졌다

이에 산소 수요가 늘어나자 1200㎥의 중고(니혼산소) 산소공장을 설치하고 후프밀 공장을 설치하기에 이른다.

진공가스방식이 아닌 대기형 교류아크로에 의해 스데인레스 스틸 제강을 생산한 마르덴사이트계 sus410급 강대 생산을 하게 된다

sus410의 종형(bell type)소둔로 열처리 및 냉연압연기, 산(酸)처리 시설을 자회사 사상 대궁산업에 설치하여 생산을 시도 하였으나 실패하자 후프밀(hoop mill) 공장도 철거 하게 된다.

고철공급이 원활하지 못하자 외국으로부터 폐선을 수입하여 해체하여 철판은 소형압연 재료로 이용하고 고철은 용해재료로 충당하였다.

재철 재강산업으로 기업은 대형화 하였으나 근로환경은 열악하였다

열연 작업에 지급하는 석면 덧바지와 얼굴과 눈을 보호하는 보안모자가 전부 이었다.

생산과정에서 발생하는 분진과 쓰레기 각종 산업 폐기물이 쌓이기 시작하자 처리에 어려움을 겪었다, 일부는 매립에 사용하고 남은 것들은 한곳에 모아두기 시작하였다.

아시안게임이 결정되고 해운대 요트경기장 설치에 따른 자갈 및 돌을 용호동 동산 끝에서 채석하기로 부산시와 산주(山主)가1980년8월1차3930㎥계약하고 1984년 2차28,180㎥.추가 계약하게 된다.

채석이 끝나고 공장 구석구석에 모아둔 각종 산업폐기물을 1980년8월부터 동산 말에 적치하게 된다.1986년 12월31부터 폐기물 관리법이 시행 되는 날에 폐기물 매립이 끝났다고 기록하였다

부산 남구청 청소행정과에서 동산말 산업 폐기물 처리를 요구하자.

2001년4월27일 동국제강(주)은 부산남구청 청소행정과에 철강슬래그10만 톤을 용호만 매립 시 폐기물 전문업체로 하여 선박 및 차량 등으로 운반 매립하기로 조치계획서를 제출하였다.

그러나 용호만 매립이 끝날 때 까지 어떤 이유로 2013년1월 현재까지 방치상태 이다.

매립초기는 폐기물관련 법은 오물처리법이 전부 이었다

폐기물의 양이 예상보다 많아 콘크리트 옹벽 구조물을 만들고 공장 이전할 때까지 매립을 하였다. 2001년부터2006년까지40개의 환경 관련 법률이 재정되어 환경법이 강화되었다.

그러나 기업은 몇몇 자생단체와 폐기물 처리를 요구하지 않는 조건으로 용호만 매립권의 일부를 이전하는 조건을 충족 하였다.

지역주민들의 폐기물 이전을 강력히 요구하였으나 폐기물을 재활용하였다. 말만 되풀이하고 결국 그 자리에 건축물 허가를 발급하여 건축물이 준공하기에 이르렀다.

기업이 일자리를 창출하고 국가 경제에 많은 역할을 하였다 하드래도 지역에 미치는 각종 파급효과에도 관심을 갖고 주민들과 소통하지 않아 아쉽다.

관련이미지석면덧바지 동생말폴더 dscno675jpg/매립폐기물층 pic-0066jpg

 

7. 비용개(飛龍臺)의 백운포(白雲布) (명소지명)

 

 

 비용개 비룡산자락 백운이 넘나들든  비용고개가보이고  우측에 오륙도가 자리하고 있다

 

 

 

 

 

 

(비용개 매립초기의 모습 대붕산 자락에 탕건돌이 보이고 우측 현 체육센타 자리에 화강암 채석장도 보인다)

 

 

  비용고개 1차교차로공사후 그러나 교통량이증가하여 효과미지수?

 

  2차 로타리교차공사로 재공사  지방정부와 부산시는 조금만 관심을갖이고 교통영향평가를 하였드라면.......

 

(바다에서 바라본 비용고개 몽돌소리는 들을수 없어도 천주교묘지와 신석기 청동기시대 첫주민들이거주한것으로 추정되는 맹밑 이개가 길아래 누워있다.)

 

비용개를 용대(龍臺)라하며 신선대의 대붕산과 비룡산의 거미섬까지를 비용대라고 하였다

飛龍臺는 중국의 명산 황산의 안개에 버금가는 해무가 비용고개를 넘나들고 아련한 남해바다 대붕산과 비룡산 저 멀리 조도와 태종대 파도소리가 산울림처럼 묻어오는 몽돌의 소리를 신선의 풍악이라 하며 해무 속을 용이 승천한다하여 비용대라 하였다.

그 앞산 천주교 묘지가 있는 산을 비룡산(飛龍山)이라 한다.

백운포라는 지명은 늦봄과 여름이면 남해의 운해(雲海)가 비용고개를 넘어 마을로 넘어 오는 장관을 백운포(白雲布)라 하였다

포구의 역할은 하지 않았고 배의 선착장도 없었다.

비용대 갯바위를 백석 이라 하여 각종 산호가 자라는 물이 맑은 곳 이었다. 각종 해산물도 풍부하였다.

곤포(다시마), 모자반, 돌미역 등 해조류도 풍부하여 바다의 숲을 이루었으며 용호동 해조류 채취권 각전 23구역중 맹밑(마지막) 자리가 비용개 이개 아래였다. 맹밑(보성사앞 체육센타자리) 다음부터는 용당 관할이었다.

비용개 깨진돌새는 1패 아이들이 처음으로 다이빙을 배우는 곳이며 해조류가 집단서식 하여 바다속 바위 마다 곤피돌 가시리돌,참몰 밭등 이름이 있었다,

용호동 신석기 석기류가 출토된 곳은 행정구역상 용호동 산의임232-2/233번지 일대이다. 유적은 비용개 이개 해발50m정도의 나지막한 구릉 상에 입지하고 있다

용호동 일대에서는 현재까지 선사(先史) 및 고대(古代)의 유적이 처음으로 발견되었다.

6거리의 비용고개는 교통량이 많아 4거리를 원형 교차로 로터리(rotary)화 하였다

해안은 빙하기 지층으로 몽돌 화석이 다양하게 발견 되고, 파도에 연마된 크고 작은 몽돌 자갈밭이었다

신선대 대붕산 끝자락 연안 바다의 탕건 바위는 백운포 2차 매립하면서 채석되었다.

비용개의 매립은 현대정유(주)에서 1983년1월20일 매립면허를 받아 1996년5월18일 준공하였으며 면적은 118,670㎡완공되어 남구에 양여되어 체육공원으로 남구민들이 이용하고 있다. 일부 매립지는 군사시설이 자리하고 있다.

거미 섬에서 백운포 사이 절벽 지를 동백 곳이라 하였으며 동백나무가 빼곡하게 자생하고 3~4월이면 동백꽃이 만개하여 부산항을 아름답게 하였다고 한다.

동백곳은 큰 포진지를 구축하기 전에 15cm케논포 4개의 진지를 구축하여 부산항 방어를 하였으나 1945년 일본 항복 후 고철을 수집할 목적으로 폭약(爆藥) 설치하여 파괴하여 경작지로 활용하였다.

 

비용개는 개발에 의해 옛 모습은 추억으로 남아 있고 횟집이 하나둘씩 늘어나고 있으며 낚시터로 유명하다.

미개발 백운포(동백지)에 300억원 민간 투자 사업으로 요트와 보트 100여척이 계류할 수 있는 계류장을 비롯해 클럽하우스, 교육, 체험 시설 등을 갖춘 거점형 마리나를 2015년까지 조성할 계획이다.

남구 문화원은 해마다 음력 정월 대보름 달집을 만들어 달집태우기 행사와 해마다 오륙도 축제로 주민들의 화합과 번영을 기원한다.

*이개_뻘기고개(대붕산입구주차장.신선대주차장)에서 맹밑사이를 이개라 하였다

*맹밑- 제주방언으로 한구역의 끝지점을 일컷는말

비용고개 이미지 2월-1 5340.5354.백운포-1

비용고개교차로 7월-4 1588.1590,1594jpg

비용고개로타리 2월8 2830-1. 2830

 

  신석기및 청동기 유물출토지

*이개_뻘기고개(대붕산입구주차장.(신선대주차장 이라고도함))에서 맹밑사이를 이개라 하였다

*맹밑- 제주방언으로 한구역의 끝지점을 일컷는말

 

8).신선대 (문화유산)

 

 

 

신선대는 대붕산 아래 해안가 울창한 송림이 신선대이다.1950년 촬영  신선대라고 믿고 있는 산은 대붕산(大鵬山)

 

 

    신선대 무제등 류하정(옹달샘) 류하수

 

   무제등 전경

 

 

 

 

 

 

 윌리엄 브로우턴 함장 부산방문200주념 기념비

 

       태극기와 영국기가 

신선대(神仙臺)는 부산 남구 용호동 비용개(백운포) 맹밑(보성사앞)에서 대붕산(大鵬山) 자락을 돌아 옛 동명목재와 솔밭이 자리했던 현 신선대 부두까지의 해안 절벽과 산정을 총칭한다. 용당부두 신선대의 서쪽을 재외하고 유원지는 행정구역상 용호동에 속해 있으며 , 1972년 부산시 기념물 제29호로 지정됐다. 신선대란 지명은 엔드류 왕자 길을 따라 200m 지점 좌측으로 오래된 돌계단을 따라 50m 정도 올라가면 자연석으로 층을 만들고 용당동 을 향하여 큰 바위 아래 우물이 있는 제법 넓은 집터가 있다

.그 자리가 용당지(龍堂址)라고 한다. 그 당이 언제까지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이곳 큰 바위를 무제등

(無際嶝)이라 하였으며 이 큰 바위에 신선의 발자국과 신선이 탄 붕새의 발자취가 있다 하여 붙여졌다. 그러나 웅대한 바위에서 신선의 흔적을 찾기는 쉽지 않을 것 같다. 옛날 신선들이 이곳에서 주연을 베풀 때면 풍악소리가 용당포까지 들려왔고, 신라의 대학자 최치원이 여기서 신선으로 화했다는 전설도 남아 있다.

무제등 에서 신선이 활소기를 하다가 부러진 화살을 버리고 간 자리에 뿌리가나고 잎이 자란 나무가 화살나무라고 한다. 무제 등에는 3월에 노란 꽃이 피는 개 동백 생강나무와 화살나무가 바위틈에 자생하고 있다.

돌 틈에는 사방 한자정도의 샘이 있다. 이 샘을 유하정(流霞井)이라고 하며 유하수를 마시면 전설의 유하주와 같이 오랫동안 목마르지 않았다고 하여 많은 사람들이 이샘이 있는 무제등 찾았다고 한다.

해안의 가파른 절벽으로 바다에서 올라오는 습한 운해와 바람의 영향으로 식생은 다양하다.

참빗살나무,말오줌대나무,때죽나무,복사나무등 관목이 주류를 이루고 서어나무와 소사나무 그리고 굴참나무 등 소교목과 상록 사스래피나무와 송악이 자생하고 있다. 그리고 보리장나무와 부리수나무의 열매는 붉은색에 금가루를 무친 듯한 모습으로 4월과 7월에 여물어 익는다. 보릿고개 시절 구황식물(救荒植物)로 인기가 있었다.

한일합방 시 전국 여러 곳의 명승지 의 이름을 미친 말인 용마를 산 이름으로 많이 사용하였다. 신선대의 대붕산도 용마산이라 하였다

(무제등의풍악소리- 바위들이 뽀족한 모양으로 비틀리고 높낮이가 달라 바람의 방향이 급하게 바꾸면서 다양한 소리가 자연 발생 하였을 것으로 추정하며 비용대 몽돌자갈 밭에서들리는 소리도 한몫 하였을 것으로)

영국 해군이 처음으로 용당포구에 도착한 브라우턴 함장의 일기 중에서

이른 아침 낯선 우리 배를 보기위해 호기심에 찬 남자, 여자 어린이들을 가득 실은 작은 배들이 우리 배를 둘러쌌다, 그 들은 누볐거나 이중 천으로 된 흰 무명천의 헐렁한 상의와 바지를 입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 중 일부는 크고 헐렁한 두루마기를 입고 있었다. 여자들은 속바지위에 짧은 치마를 입고 있었다고 남자들은 머리카락을 정수리에 묶어 상투를 틀었고 여자들은 머리카락을 꼬고 땋아서 머리위에 올려놓았다. 우리 배에서 가까운 남쪽에 있는 산(대붕산)으로 올라가 방위각을 재기위해 뭍으로 나갔다 .정상에서 우리가 볼 수 있는 시야는 매우 넓었고 항구의 모든 부분을 명확히 볼 수 있었다.이산의 강한 자력으로 인해 나침반의 바늘이 정확한 방향을 가리키지 못하고 항상 북쪽이 아닌 동쪽을 가리키므로 방위각 측정은 소용이 없었다. 나는 가파르며 높고 튀어나온 이산이 우리 나침반 바늘에 영향을 주었기 때문에 지도상에 이산의 이름을 자석의 머리라고 표기 하였다

(원문)

Captain Broughton`s Journal

Early in the morning we were surrounded by boats full of men, women, and children, whose curiosity had brought them off to see the strange vessel,

They were universally clothed in linen garments made into loose jackets and trowsers, quilted or doubled, and some of them wore large loose gowns, The women had a short petticoat over their trowsers, and both sexes, linen books, with sandals made of rice straw The men wore their hair in a knot tied up to the crown, and the women had theirs twisted and plaited round their heads.

We went on shore to ascent the hight land near us to the South, and from thence to take some bearings, Our view from the top was very extensive; and we saw distinctly over every part of the harbour .Out angles were however useless, the needle being so strongly affected as to point East instead of North, owing to some magnetic power in the mountain, which would not admit the needle pointing true in any situation, I named this abrupt high head-land Magnetic Head from its affecting our compass needles

이때

조선왕조실록 정조21년丁巳년 음력1797년9월6일 임진일 에 경상도 관찰사 이형원이 달려와서 다음 과같이 적어 올린다.

이상한 나라의 배 한척이 표류하여 동래 용당포 앞바다에 닿았습니다. 그 사람들은 모두 코가 높고 눈이 파랬습니다. 그들에게 국호와 표류하여 닿게 된 연유를 한나라, 청나라, 왜국, 몽고의 언어로 물어 보았으나 모두 알지도 이해하지도 못했습니다. 붓을 주어 글로 써보라고 하였으나 글자의 모습이 구름이낀 산과 같았고 그림을 그려도 알 수가 없었습니다.

또한 삼도통제사 윤득규(尹得逵)가 올린 장계에는 두려움이 묻어나 있다.

'싣고 있는 화물에 유리병, 천리경, 나침반, 구멍이 없는 은전이 있고 모두 서양산이었습니다. 언어와 말소리는 하나도 알아들을 수 없었고, 오직 낭가사기(浪加沙其)라는 네 글자만 알 수 있었는데, 이는 일본말로 나가사키(長崎)를 말하는 것 같습니다. 대마도 근처를 가리키면서 입으로 바람 부는 시늉을 하는 것으로 보아 순풍을 기다린다는 뜻으로 이해됩니다. 그들이 원하는 대로 바람을 기다렸다 보내도록 명하였습니다.'라는 이른바 이양선(異樣船)에 관한 보고 였다

신선대 기념비문

1797년 10월 윌리엄 브로우턴 (William Broughton)함장과 승무원들은 영국해군소속 프로비던스(Providence)호의 부속선을 타고 용당포에 상륙하여 주민들과 접촉을 가졌던 최초의 영국인 들이 었다

 

2001년 4월20일 영국 해군중령 요크공작(앤드류윈저왕자) (Andrew Windsor)이 주목 한 그루를식수 하였다. 왕 상은 부산주재 영국명예 영사의 후원을 받아 윌리엄 부로우턴 함장의 부산 방문 200주년을 기념하여 그가 부산항을 정밀하게 측량 관측했던 지점에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이미지11월#2 기념비와영국및태극기

 

용호동애국지사무덤 (문화유산)

 

 

  

 

 

애국지사 진주정공몽석지묘(愛國志士 晉州 鄭公夢錫之墓) 비문(碑文)

애국지사(愛國志士)정몽석(鄭夢錫)께서는 경남하동군 금남면 대치리(慶南河東郡金南面大峙里)에서1896년4월16일 出生 하셨고 임진왜란시 전공(壬辰倭亂時戰功)을 세우신 정기용(鄭起龍)장군(將軍)의 後孫이시며 진주(晉州)봉래 學校에서新學問을배우셨다. 1919년3월18일 진주의거(晉州義擧)에서 學生 靑年群衆 들을 지휘(指揮)하시며 선두(先頭)에서열열(熱烈)히 대한독립만세(大韓獨立萬歲)를 고창(高唱) 하시며 대대적인 示威를 展開하시다가 체포(逮捕)되어 진주지청(晉州支廳)에서징역1년형(懲役一年刑)을 받았다(1919년4월22일) 다시 대구복심법원(大邱覆審法院)에서 法的항일투쟁(抗日鬪爭)을 전개(展開)하셨으나 일년징역형(一年懲役刑)을 받으셨다.1919년6월17일)또다시 고등법원(高等法院)에 上告 하시고 法的鬪爭을 계속 하셨으나 1919년9월6일 上告가 기각(棄却)되어 1년刑이확정(確定)되어 옥중고생(獄中苦生)하셨다. 출옥후(出獄後) 에도 大韓赤十字社支社 社員으로서 독립군자금(獨立軍資金)을 募金中 일경(日警)에 탐지되어 다시 2년옥고(獄苦)를 격으셨다. 그후 1923년진주읍내형평사발기회 회원(晉州邑內衡平社發起會 會員)으로 活動하시다가 1961년 8월16일 餘生을 마치셨다.

슬하에 영복(永福)영철(永哲) 두아들을 두셨다

 

*정몽석 묘소 이미지 3월#8 2814jpg

 

9). 섶자리(지명생태환경)

 

 

 

용호동 선착장 선창  옛날 섶자리

 

  지명으로 알려진 섶자리의 본래모습

 

 

용호북쪽포구는 넓은 개흙 모래밭으로 섶자리(애기거머리말)가 바다잔디를 이루고 있었다. 한길 깊은 곳에는 잘피 (거머리 말)가 해안을 감사고 있어 고기의 목장구실을 해왔다

국립수산 과학원 해조류 바이오 연구센타 이상용박사 는 섶자리(경상도와 경북일원) 섶진질(전라도) 은 거머리 말과의 애기 거머리말 이라고 확인하였다.(이미지제공)

선창가 주변에는 서너 집만 거주하였으며 그물과 멸치를 삶는 큰 가마솥이 걸려 있었다.

용호천 담수가 바닷물과 만나는 곳 30cm깊이까지는 고둥과 꽃게, 쏙 등이 섶자리 밭에서 은신하며 있었다. 쏙의 집에 된장을 붓에 적셔 넣고 집밖으로 나올 때까지 기다리면 쉽게 잡을 수 있었다.

특이한 이름이 없어 어장 배와 주낙(채롱(綵籠)광주리형 낚시통) 과 문어 통발(단지) 잡이 배 등이 정박하고 있어 선창 이라 불렀다.

섶자리 밭 염전 둑에는 염생 식물 함초(퉁퉁마디).칠면초, 나문재. 해홍나물등이 번식하고

염전 둑 바다 쪽 해안가 에는 염도가 높은 소금물을 좋아하는 고둥이 많았다

소랑강(용호천) 하구에는 개ㅅ조개라는 맛 조개와 비슷하게 생긴 조개가 많았으며 조개의 입구는 8자 모양으로 생겼다

갈대밭 에는 엽낭게와, 칠게, 농게, 말똥게등 다양한 갑각류가 서식했다.

어릴 때는 섶자리 밭에 놀러가자면 수영을 하지는 약속 이었다.

그러나 언제부터 섶자리 라고 뚜렷하게 지명으로 부른 시기가 없이 섶자리 밭이 매립되고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지명으로 굳어지게 되었다.

횟집과 선착장이 정비되어 시민들의 이용 빈도가 높다.

 

 

      섶자리선창 선착장(용호초등학교카페이미지제공)

 

*섶자리이미지 3#8 img-2302/dsc-0995-1/dsc-0980이상용박사자료재공

*왕거머리말-잘피 게거머리말-갱자리 애기거머리말-섶자리

 

 

 

 

10. 용호동(銅)광산과 화강암채석장 (경제생태환경)

 

 

일제가 양질의화강암을수 십년간채굴한 채석장

 

 

 

 

 

장자산해안의 용호광산도 일제30여 년간 채굴 되어 폐광이 될 무렵 대한광업(주)은 일제로부터 인수받아 1960년대 중반까지 구리광석을 캐었다

주로 적철광으로 순도 높은 구리를 생산하였으며 게르마늄도 대량함유 하였으나 그 시대는 각광을 받지 못했다

1호광산 침출수를 오랫동안 섶자리 주민들의 식수로 사용하였다.

2호부터 야외공연장인 어울 마당의 5호까지 수직과 수평으로 광구에서 채광하였으나 생산성이 줄어 폐광되고 ,폐광석과 광미는 연안 조간대 및 어울 마당 복토에 사용하였다

광산 주위의 토양오염 시료 채취 봉을 설치하고 보건환경연구원에서 매년 조사하였으나 언제부터인가 자취를 감추었다

용호만 쪽 1호 갱도옆과 이기대 장바위옆 3호. 갱도는광산 노동자가 터널처럼  이용하여 출퇴근을 하였다.

4호광산은 3호광산 바로위에 출입구가 있었으나 3.4호는 붕괴되어 흔적만 남아있다

.  못난이 골짜기 는 기암절벽이라 갈수 없어 갱도를재 활용하였다고 한다. 지금은 갱도가 허물어져 다닐 수 없으나 이를 복원하여 활용하면 볼거리가 되지 않을 가 싶다.

5호광산지의 어울 마당은 각종행사를 해온 광장으로 영화 해운대의 촬영지로 널리 알려져 있다.

또한 일본은 용호동 산의196-1번지 산태 골 해안가 일원과 비용개(백운포) 체육센타 부근 산240번지 대붕산 해안 지금의 맹밑 보성사 부근 해안의 질 좋은 화강암을 노천 체굴 하는 채석장을 운영하며 일본으로 실어 날랐다. 산태 골 지역은 운반하기 좋은 크기의 화강암으로 흙속에서 채광하여 일본으로 운반하였다고 한다.

그때흔적의 일부는 태풍 등으로 훼손되었으나 확인이 가능하지만 백운포 지역은 매립되어 흔적도 없다. 아쉽게도 기업체와 채굴양의 기록은 알 수 없다

 

 

* 광산지역 토양오염조사지점 이미지 장자산#이기대 06978jpg

(산태골 화강암과 채광지 이미지 3월#8에기록)

 

11못난이 골짜기(명소지명)

 

 

 

 

 

동산 말에서 한고비를 넘으면 못난이골짜기라는 기암절벽이 작은 암자를 바치고 있다.

1920년경 박 씨 총각과 혼인하여 신혼단꿈이 피기도 전에 봄기운에 들뜬 새댁은 가막살나무 꽃 향에 취해봄 나물을 캐다 절벽 아래로 실족하여 주검이 되었다.

못난이 별칭을 따서 이루지 못한 새 각시의 애절함이 묻어나는 이 절벽을 못난이 골짜기라 하며 그 후 설치한 출렁다리는 가슴을 도려내는 슬픔을 더 해 울렁거린다.

* 못난이골짜기이야기는 실화임

 

12.농바위(명소지명)

 

 

  농바위의설경

 

 

농(籠)이란 버들 채나 싸리 채 따위로 함처럼 만들어 한지를 바른 궤를 포개어 놓도록 된 가구를 말한다.

제주의 성산포 앞 우도 해녀들이 남천동 해안가에 자리를 틀어 물질을 하면서 동산 끝에서 백운포 맹밑(끝)까지 특정 바위 등을 기준으로 서로 연락하는 수단으로 농을 닮은 이 바위를 농 바위로 불러왔다고 한다.

바위의 모습에서 베어 나오는 느낌은 보는 이 마다 다르나 쪽진 머리 위의 똬리의 크기로 여인의 삶의 무게를 느끼게 한다. 많은 전설의 스토리텔링의 주제가 되었으면 한다.

 

13.숭충골(명소지명)

 

 

  숭충의거대한모습

 

 

농바위 옆 골짜기에 큰 선돌은 임진왜란과 관련이 있다고 한다.선돌의 뒷쪽 좌측에 나무 사다리가있어  할머니들이 방풍 나물을 따러 숭충(崇忠충성을다한 높은곳)바위까지 올라 갔다고 한다. 왜놈들의 움직임을 망을보고 수영에 연락하는 이 골짜기를 숭충 골 이라 한다. 지금도 러시아 캄차카 반도에서 겨울을 나기위에 가마우지가 굴 섬에 가기 전에 쉬었다간다. 11월부터 4월말까지

* 숭충이미지 장자산#이기대 01755/01756jpg

 

14구덕 (명소지명)

 

 

(구덕의 모습)

물을 담는 동이(물허벅)를 지고 다니기도 하고, 아기를 뉘어 지고 다니기도 하는 광주리의 일종을 제주도 방언으로 구덕이라 한다.

이곳 구덕은 넓은 반석이 많고 잘록개가 바람을 막아 따뜻하여 해녀들이 작업을 마치고 쉬기에 적당한 장소로 애기에게 젓을 물리기도 하였다고 한다. 해녀들이 이런 조건을 갖추었다고 구덕이라 하였다.

한때는 용호농장 가축분뇨와 계분공장에서 버린 오물이 연안 바위에 말라붙어 흉물스러워 구디기라고 한적도 있었다

지금은 용호동 해안에서 해녀들의 나잠은 하지 않으며 오륙도 선착장에서 해산물을 판매하고 있다

 

*제주도등에서 카페리로 운반한 해산물을 판매하는정도

구디기-인분을 모아두는 곳의방언

 

15,치마 바위와 밭골새(명소지명)

 

 

  치마바위 전경

 

 

                                                       밭골새전경

 

돌의 모양이 치마를 입고 다소곳이 앉아 있는 모습과 같다고 하여 치마 바위라 부른다.

용호동 해안가 중에 낚시터 명당자리로 소문이 나 있다.

철마다 다양한 낚시의 손맛을 볼 수 있어 외줄낚시와 숭어 등을 채낚기도 한다.

2012년 적도의 남자 촬영지로도 알려져 있다

밭골새는 바다에서 산중턱에 개간한 밭이 보여 밭이 보이는 골짜기라 하여 밭골 새라 한다. 지금은 송림이 우거져 밭은 보이지 않는다.

해안 경계부대의 야간 조명 사격장으로도 활용하고 있다.

 

16,용호복지회관 (복지 환경)

 

 

 

용호사회복지관은 용호3동36-7번지 남부환경공단입구에 있다.

부산 남구청 소유이며 사회복지법인 불국토가 운영하고 있다. 부지 2,285㎡에 지하1층 지상3층으로 1996년 건립하였다. 20개의 방을 갖추고 복지관련 자격소지자64명의 종사자가 근무 한다.

2012년 12월 현재 복지 사업 현안은 다음과 같다.

정 나누기 활동으로 명절 소외된 이웃400세대의 경제지원과 지역 어르신 320명을 초대 한 경로잔치, 그리고 저소득 604세대 겨울나기 지원 사업을 실시하였다.

결식어르신 및 장애인을 위한 월요일부터토요일까지 매일 무료점심 연간49,586건과 결식청소년 월1회 특식제공 연간477건 그리고 장애인 이 미용 서비스 연376건 또한 해군작전사령부 건강검진 연791건, 청소년 장학금 및 교복지원 연66건의 보호 사업을 하였다.

전문사회복지 프로그램 네트워크 구축으로 1대1 아동심리와 정서발달 상담과 각 학년 별 집단상담 실시. 저소득 가정 청소년의 맞춤멘토 희망설계 지원 등 다양한 복지사업을 하고 있다.

교육 문화사업 으로 한글학교와 노인대학 체험 학습과 노래교실 특별활동으로 여가선용과 기회를 제공하여 긍정적인 노후생활을 영위 하도록 돕고 있다.2012년 12월기준 사업비 총예산은 1,983,590,000원이 소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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