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사

용호동의 유래 현황

아지빠 2013. 5. 3. 17:21

 

제1편 용호동의 유래 현황

 

1) 용호동의 유래 (고유문화역사)

용호동(龍號洞)은 동해의 최남단으로 부산시 남구의 동쪽에 위치하고 남서쪽의 용당동과 북서쪽 일부는 대연동과 접해 있다, 교통의 연결도 대연동과 용당을 거처야 하는 교통의 종착지며 밀집한 대단위 주거지 로 형성되어 있다.

 

1950년용호동의모습(상이미지) 2013년6월 용호동 모습   비교사진

 

 

        용호동2동의 이주민 마을

용호 천(소랑강)과 대연 천에서 흘러온 개흙(뻘모래)으로 용호만이 완만하여 전오제염으로 최적의 염전지역 이었다









용호(龍湖)는 10대(代300년)가 지나도록 앞세대의 사실을 입(口)을 통해 차례차례로 전하기를 변함없이 용호만의 물(水)에 동산과 달(月)이 비치고 그 달(月)안(立)에 용(龍)이 있어 용호라 하였으며 풍수지리 경에 의한 산야의 지명도 이와 같다.

. 산의 이름도 동산(瞳山)은 용의 눈자리 장자산(長子山)의 장자봉과 남쪽 용각지(龍胳地) 비용개와 비룡산(飛龍山). 신선대의 대붕산(大鵬山)서쪽의 신용산(神龍山) 용의 꼬리부분인 수장산(水藏山)으로 이루어져 용과 붕새의 전설이 말해주듯 풍수사상(風水思想)의 영향이 큰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 는 질 좋은 검은 개흙이 많아 염전으로 적합하여 서슬을 받는 동이(盆)가 바다를 따라 많이 있어 분포리 또는 분개라 하였다.

지명의 유래가 된 북쪽 염전 터는 대단위 아파트단지와 환경공단 용호하수처리장이 있으며 환경공단 상부에 체육시설과 축구장, 테니스장, 다목적광장 등이 조성되어 주민들의 체력증진 및 휴식공간으로 제공하고 있다.

1740년경 동래부지(洞萊府誌)』와 동래부읍지(東來部邑誌) 행정구역은 동래부(東來部) 남촌면(南村面) 분포리(盆浦里)로 기록되어 있으며,

1910년 한일 합방부터 동래군 용주면 용호리 (東來郡 龍珠面 龍湖里)로 변경되고 그 당시 159호의 농업과 어업에 종사하는 주민이 거주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수백 년 전부터 제석곡(帝釋谷)부근 구 주거지 에서 금녕김씨와 파평윤씨 개성왕씨가 집성촌을 이루고 있었으며 그 후 월성최씨, 담양 전씨 밀양 박씨 김해김씨들도 이주하여 살았다고 집성씨족보 등에 기록되어 있다.

 

 

 

 

금녕(金寧)김씨 용호동 입향조 경순왕 봉사공파(奉事公派)13대손인 김원실(金元實)정삼품 통정대부(正三品通政大夫) 절충장군(折衝將軍)으로 임진왜란 부산 다대 방어에 참전하여 순국하시어 동반(東班)종이품(從二品) 가선대부 호조참판(嘉善大夫戶曹參判)을 추서(追敍)하셨다는 기록과 사정(射亭)을두어 문.무신 집안으로 활약한 흔적이 남아있고 사정터라는 지명도 있다.

파평윤씨 태사공(太師公)윤신달(尹莘達)영은공파(永隱公派) 22세손 윤성룡(尹成龍)이 1671년경 용당동 입향하시고 25세손 윤천백(尹天伯)경인생(庚寅生) 1710년경에 출생하여 산넘어 용호동에 입향 하였다.

개성왕씨 고려 태조(王建) 27세손 입향조 왕태용(王泰龍)1724년생으로 1739년경 반송동에서 용호동으로 입향한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월성최(月城崔)씨 사성공파(司成公派) 15세손 최세춘(崔世春)은1755년출생으로 성균관 유생으로 2차시험에 합격하여 1775년경 진사(進士)로 입향하였다 는 각 집성 족보의 기록과 추모비로 볼 때 임진왜란 이전부터 용호동은 마을을 형성(形成) 하였다.

선사시대부터 비용개 비룡산 자락 이개에서 선사 신석기시대 유물7점이 1982년2월에 발견 되었다.

또한 2013년3월11일 같은 곳에서 청동기시대 토기파편1점도 발견되었다

용호동의 선사 유적은 주위환경이나 유적의 입지상태로 보아 주거지(住居址)가 존재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전문가의 판단이다. 신석기시대 후기부터 용호동에 거주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시대 부터  1패(牌), 2패(牌), 3패(牌), 4패(牌)라는 가옥단위가  부락 이름으로 불려졌다



                                                        (  1패라고 한 웃마실전경 용당고개에서)

1패(牌)는 솔밭쉼터부터 비용개 까지, 2패(牌)는용호천의 동쪽, 3패(牌)는솔밭쉼터에서 용호1동 시장까지 4패(牌)는 용호 시장에서 섶자리 바닷가 를 말한다.

.(1900이전에는 용호동은3개패와 수장산 뒤   지금의 용소 남쪽대연천 변에 염전이 있어 4분개 혹은 분개4패라 하였다)

1990년 원주민200여명이 향우회를 발기하여 왕흥권씨를 초대회장으로 길흉사에 기쁨과 슬픔을 나누고 선후배간 우정을 돈독히 하며 이주민들의 모범이 되고 있다.

3면이 산으로 땔감의 원천으로 약200세대가 유구한 역사동안 버틸 수 있었던 것 은 가까운 산이 있었기 때문이다. 산림은1960년대 초반부터 무연탄이 연료화 되면서 자연 성장하여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남구용호동의 식생은 총131과 652종으로 확인되어 자연 환경이 우수하게 보존 되고 있으나 전문적인 관리가 부족하여 소중한 자원이 소멸되지 않을까 걱정 된다

.용호동의 연혁을 도표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연도

연 혁

선사시대

백운포 이개 신석기 와 청동기 유물출토 주거유력

1592년이전

임진왜란부산전투순국 집성족보확인

1740년

동래부 남촌면 분포리

1910년

동래군 용주면 용호리

1936년

부산부 부산진 출장소

1953년

부산시 부산진출장소와 대연출장소로 분리

1972년

용호지구 구획정리사업 발주

1973년

부산시 정책이주사업 실시 및 시범지구로 선정됨, 신흥주택지로 변모

1975년

부산직할시 남구개설 용호1동,용호2동으로 분동

1982년

용호1동이 1.3동으로 분동

1983년

용호2동이 2.4동으로 분동

2012년

용호1동.용호2동.용호3동.용호4동으로 유지

 

 

*용마산-대붕산(大鵬山)으로

*용비산-수장산(水藏山)으로

*보오지산,봉우리산은 신용산(神龍山)

*백운포는 비용개(飛龍臺비용대)

*별첨 이미지 대붕산과 수장산)2~300년전 족보기록 1월#8 폴드지명자료jpg

*용각지(龍胳地)벽산아파트뒤 골에서문서보관서 SK아파트단지(구남전역)

 

 

 

2 용호동의 현황 (고유문화역사)

3면이 바다에 접해있어 해안기류에 의해 밤낮으로 바람의 방향이 바뀌어 공기가 맑고 기온이 따뜻하여 겨울이라도 눈이 내리지 않고 얼음이 잘 얼지 않는 지역적 특성을 갖고 있다.

그래서 집단 거주지로 발전하여 교통과 주거환경이 낙후되고 생산성이 빈약한 소비도시다.

3면이 산으로 우수(빗물)가 자동 차집 되어 2011년7월27일과 같은 단시간에 집중호우가 내릴 경우 복개한 용호 천으로서는 우수를 처리할 수 없다는 사실을 확인한바 있다.

이에 집중 국지성 호우로 인한 피해발생 복구계획 확정으로 용호동의 침수피해 개선사업 1차 우수저류시설과 펌프장 1차공사를 마무리하였다.

단계적으로 제1저류소를 장자산 제석곡 우수 차집과 제2저류조를 수장산 용문초등학교, 제3저류조는 용호중학교 장자산 사정터 일원에서 내려오는 우수차집을 하여 단시간기록인 68.55mm/시간 또는 268.5mm/1일 의 량을 카바할 계획이다.

공사비는 방재청 판단으로 국.시비 교부확정되어 2013년부터 년33억3천만원식 3회에 걸쳐 2015년12월에 완료 되여 상습적 국지 호우로부터 피해가 개선될 것이다.

운전방식 은 자동감지에 의한 수자동 겸용방식으로 효율적으로 운전한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용호동의 산의 토질이 부드러워 집중호우에 취약하여 산사태 등으로 30여곳이 유실되어 50억원에 가까운 복구비가 소요되었다.

산자락의 복구 사업 또한 자연석과 시멘트콘크리트로 유수 유도형으로 하여 다양한 수생 동식물의 생육환경이 훼손되어 반딧불이와 도둑게등이 관찰되지 않는 실정이다.

문화 시설은 빈약한 상태이나 3면이 생태 보존적 가치가 있는 울창한 삼림과, 기암절벽이 푸른 바다와 어우러진 해안 절경이 있어 몸과 마을의 피로를 풀어준다

남쪽은비용개(백운포)라고 부르는 포구를 끼고 남해 바다와 접하고 있으며 매립하여 남구체육공원과 군사시설이 있으며 횟집과 낚시터로 이름나 있다

백운포에 민자사업으로 요트 계류장 시설등 마리나 항만과 공공시설조성을 할 예정이다.

2007년10월01일 국가지정 명승지 24호의 오륙도는 이기대 도시자연공원의 갈맷길

그리고 오륙도~고성 통일전망대 688km 구간을 잇는 국내 최장트레일 화랑순례, 관동팔경 등 4개 테마, 40개 코스선정을 2014까지 조성하여 동해안 지역 18개 지자체간 협의체 구성 상호협력 및 공동마케팅의 해파랑길의 시발점이다.

해파랑길 안내소가 있는 잘록개(승두말) 에 스카이워크를 설치하고 해맞이공원을 생태광장으로 개발할 예정이다.

용호만 부두를 관광유람선 전진기지로 조성할 계획이며 남쪽해안 백운포 요트 계류장및 항만조성계획이다 용호만 매립지에도 유람선 선착장 사업이 진행 되고 있다

용호동은2000년12월말 1,2,3,4동으로 면적은 6.48㎢이며4,28㎢가 산이다. 인구는 72,497명 이었다.

별지:인구자료 및 통계표 별지 참조

 

 

1-1) 현황 통계

2012년12월현제재 용호 1

 

동면적

가구수

인 구 (명)

 

차량

문화

시설

학 교

유아 교육

남자

여자

초등

중등

고등

어린집

유치원

1.44

15,910

46,064

22,398

23,666

14,886

3

4

2

1

28

3

 

종교시설

병 원(수량)

약 국

시 장

목욕탕

음식점

성당

교회

사찰

양 방

한 방

1

12

1

14

8

15

1

5

275

 

통반조직

통 수

반 수

40

347

7세미만인구

65세이상인구

남자

여자

남자

여자

1,499

1,445

2,016

2,779

 

1-2) 현황 통계

2012년12월현재 용호 2

동면적

가구수

인 구 (명)

 

차량

문화

시설

학 교

유아 교육

남자

여자

초등

중등

고등

어린집

유치원

2.01

7,592

20,868

10,259

10,609

6,588

 

2

 

 

13

1

 

종교시설

병 원(수량)

약 국

시 장

목욕탕

음식점

성당

교회

사찰

양 방

한 방

 

8

4

5

4

7

2

2

119

통반조직

통 수

반 수

24

176

7세미만인구

65세이상인구

남자

여자

남자

여자

718

668

1,146

1,530

 

1-3) 현황 통계

2012년12월현재 용호 3

동면적

가구수

인 구 (명)

 

차량

문화

시설

학 교

유아 교육

남자

여자

초등

중등

고등

어린집

유치원

1.96

7,592

15,297

7,533

7,764

4002

1

1

1

1

9

2

 

종교시설

병 원(수량)

약 국

시 장

목욕탕

음식점

성당

교회

사찰

양 방

한 방

1

8

5

12

6

4

 

4

 

 

통반조직

통 수

반 수

21

135

7세미만인구

65세이상인구

남자

여자

남자

여자

386

376

954

1,183

 

 

1-4) 현황 통계

2012년12월현재 용호 4

동면적

가구수

인 구 (명)

주택

차량

문화

시설

학 교

유아 교육

남자

여자

초등

중등

고등

어린집

유치원

1,53

3,130

8,155

4,044

4,111

2,654

2,274

1

 

 

1

2

 

 

종교시설

병 원(수량)

약 국

시 장

목욕탕

음식점

성당

교회

사찰

양 방

한 방

 

5

2

4

 

3

 

2

 

 

통반조직

통 수

반 수

13

74

7세미만인구

65세이상인구

남자

여자

남자

여자

201

270

459

549

 

 

2012년12월말 면적은 백운포와 용호만 매립으로 0.45㎢ 늘어나 6.93㎢로 집계되었다

인구는 2000년12월말보다 17,887명 늘어난 90,384명 이다.

인구중 7세미만 6,063명 65세이상 10,586명으로 집계되었다

1.2동은 대단위 아파트 단지로서 용호동 전체인구수의 74%차지하고 면적은 50,78%이다

그러나 용호2동, 4동 정책이주 지역은 1973부터 건축이 시작 되어 노후 된 주택으로 생활환경이 열악하고 주정차지가 전무한 상태이며 주택재개발 사업과 주거환경 개선사업의 지연으로 기존 노후 주택의 누수 및 누전의 위험에 노출되어 환경이 갈수록 악화되고 있으며 폐 빈집이 늘어나고 극빈층의 유입이 확산될 가능성이 있다고 한다.

7세미만의 인구수에서는 1.2동은 전체평균 6.708%에 근접하나 3동은 4.98%로 출생율이 낮으며 4동은 11.9%로평균을 5.19%높게 나타 났다

65세이상 1동 노령인구는 천체평균 11.71%보다 낮은 10.409%로 1.301%낮으며 2.4동은 비슷하나 3동은 평균보다 2.26%높게 나타 났다.



(동명학원 모습)

3)용호동의 교육발전사 (사회교육)

일제 강점기 을축년(乙丑年)1925년에 동명학원(東明學院)을 설립하여 용호, 용당 지역주민의 신학문을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초대 왕기통(王基統)교장 2대 교장에 김유상(金有相)씨가 역임하였다

대연동에 사립 용연보통학교가 설립됨으로 동명학원은 문을 닫고 학생전원은 편입되어 공부하도록 하였다 . 범일동에 거주하신 김성학(金性學)씨가 야학교 건립기금전액을 기부하여 용호동309-1번지 대지456㎡(138평)위에 265㎡(80여평)의 목조건물3교실을 기묘년(己卯年)1939년2월 건립하여 한글과 ,산수, 주산 등을 가르쳐 이 지방 문맹퇴치와 신교육의 선구자로 노력 하셨다. 야간 학교 학생들을 가르치고 일본에서 수학하다 방학이면 고국에 와서 학생들을 가르치기도 하였다. 1948년~1954년(대연12~18회) 2학년~3학년까지 대연초등학교 용호분교로써 충실한 역할을 하였다 1955년부터 대연초등학교에 편입할 때 까지 초기에는 용호, 용소, 용당 어린이들이 공부하였다

그 건물은 용호동사무실로 사용하였다.

오늘날 유치원이 자리하고 참봉김공성학장학불망비(參奉金公性學獎學不忘碑)후학 양성 공덕비가 길섶에 자리하고 있다

 

 

초중등 교육 시설 현황(2012년12월현제)

학교명

설립년도

학생수(명)

용호초등학교

1964년09월

1,004

용산초등학교

1979년03월

726

백운초등학교

1982년03월

443

운산초등학교

1989년01월

462

분포초등학교

2001년9월

913

용문초등학교

2003년9월

1,212

오륙도초등학교

2008년9월

542

용문중학교

1984년

839

용호종학교

1984년10월

841

분포중학교

2002년3월

925

오륙도중학교

2009년

669

디자인고등학교

1974년

613

예문여자고등학교

1993년3월

1,055

분포고등학교

2003년3월

805

 

 

 

 

 

별지: 학교별 통계자료별지 참조

초등학교 7개교 중학교 4개교 고등학교 3개교로 14개교가 있다

초등학교 학생은 5,302명중 남학생이 2,743(51.35%)명 여학생 2,559(48.65%)명으로184명( 2.7%)남학생이 많다

중학교 학생은 3,274명중 남학생이1,704(52.04%)명 여학생 1,570(47.96%)명으로 134명(4.08%)남학생이 많다

고등학교 3개교 총 학생은 2,473명으로 집계 되었다.

초,중등학교11교의 통계에 의하면 남학생이 여학생에 비하여 3.7%318명이 많다

용호주민 90,384명 약9.5%의초,중등학생 12월 주민등록 상 우리나라 총인구 50,734,284명의 9.5%는4,819,757명이다

남녀성비 차 3.7%는 178,331명의 남자어린이가 많다는 추정이다

 

2.편 용호동의역사

1) 근대이전(사회역사)

비용개(백운포) 해안구릉지 안전지대 에 선사시대 신석기와 청동기 소수의 유물이 발견되고 주거의 흔적은 정밀한 조사를 하지 않아 단정 할 수 없으나, 주위 환경이나 유적의 입지 상태로 보아 주거지가 존재할 가능성도 배제 할 수 없다는 전문가들의 판단으로 볼 때 용호동도 동삼동과 다대포지역의 유적지와 같이 유구한 삶의 최적지로 분류 할 수 있을 것이다.

공부 등의 기록은 미미하고 겉핥기식으로 자료로 활용하기는 부족하다 .

각 집성 부락의 지명에서 그 당시의 생활을 짐작 할 수 있을 정도이다

용호만은 완만하여 안전이 보장되고 패류의 수확이 가능한 지역으로 신석기 시대 이전부터 삶의 터전으로 적당 하였을 것으로 추정하나 선사 유적이 발굴되지 않아 이 또한 단정하기는 어렵다 .

조선 선조(宣祖)초기부터 용호동 장자산 아래 사정(射亭)을 두어 무술을 연마하고 문, 무인으로

조국을 지키다 순국한 용호동 초기 입향한 금녕김씨 족보의 기록과 구전(舊傳)에 의하면 사정터가 오랫동안 존재 하였다고 한다.

지금의 용호천 (소랑강)이 형성되면서 소규모 염전은 파평윤씨 구 선영(솔밭공원)과 100보 북쪽 나지막한 등(언덕) 아래로 염전이 축소되고 전답으로 재 개간 된 흔적은 건축물의 기초공사에서 살아있는 조개가 발견되고 있는 실정이다.

근대에 이르기 까지 보수성이 강한 집성부락은 크게 진보하기를 두려워한 흔적도 감지되고 있다 .용호동이나 인접 용당동의 혼사(婚事)의 최적지로 감만동과 해운대지역을 선호하였고 또한 낙동강 유역을 삶의 근거지로 이해하였다고 한다.

임진왜란으로 양반의 세도가 주춤한 틈을 타 새로운 삶을 찾아 전 국토 구석구석으로 흩어져 새터민 으로 이곳에 정착 하였을 것으로 추정할 뿐 역사의 자료마저 미흡하여 꼭 꼬집어 낼 자료도 없는 실정이다

고집이 강한 보수적 가부장제로 발전을 기대하기 어려운 실정에서 일제 강점기를 맞아 혼란스러웠을 것이다.

 

2).일제 강점기(사회역사)

경술년(庚戌年)1910년 8월29일 한일합방으로 일본 침탈(侵奪)시대를 맞이한다.

일제(日帝)는 수많은 역사자료 와 유적, 유물을 침탈하고 정신까지 폐해 시킨 전례와 같이 염소고 방식의 제염생산(製鹽生産)의 요지(要地)분개(盆浦)의 이권(利權)을 그냥 둘리가 없었다.

조선침탈(朝鮮侵奪) 준비 중 1903년 시모노세끼에서 조선 해수산조합 창립총회를 하였다. 1907년에 일제통감부(日帝統監府)는 조선해수산조합본부에 시험제염용호출장소(試驗製鹽龍湖出張所)를 설치하여 유제염전 전오제염 2町3段7畝13步(23,633㎡7,150평)염전(鹽田)에 조선염전과 절충염전 일본염전으로 시험생산(製鹽試驗) 을 시작 하였다. 조선염전은 지금 환경공단, 절충식염전은 태광아파트 장자산자락, 일본식염전은 외식명가 부근이었다고 한다.

그 후 일본인들은 용호초등학교 북쪽에서 옛 주공아파트 자리까지 4개의 염전이 있었으며 조선 해수산 조합 남쪽과 동쪽 바다를 메워 염전으로 하였다. 그곳이 해방 후 이종철 춘부장 이규정씨가 구입하여 운영하였다 , 마지막으로 지금의 LG매트로 상가에서 용호천까지의 염전이 생기고 해방후 박치상씨가 구입하여 운영하였다 .그 당시 일본인들은 거분,신분.강개분.보리분.광계분.동분이라 불렀지만 어느 염전의 이름인지 알고 있는 분은 한분도 계시지 않는다.

조선 초기에는 염전 한 개에 최초 1마지기당 동이(염정)가 1개 이었으나 염전이 확장되자 동이가 5~6개정도로 동이간 거리가 멀었다.

그러나 1908년부터 시험제염 결과에 따라 같은 염전에30~40여개의 염정(동이)을 만들어 동이간의 거리는 사람의 힘으로 살토를 뿌릴 수 있는 거리의 두 배 거리로 하여 작업 환경을 고려하여 생산량을 배가 하였다 .조선의 염부옥은 토부에 함수(서슬)를 섭씨88도에서 90도의 온도로 저온 가열하여 생산하여 미네랄이 풍부한 연한핑크빛 소금이었다.

그러나 일제는 서슬을 정제하고 소금을 굽는 솥을 리벳(rivet)처리한 선철 가마를 사용하여 많은 량을 높은 온도로 가열하여 미네랄 함유량은 떨어졌으나 생산량을 높일 수 있었다.

지금의 용호초등학교 까지 매립하여 약 2만3천여 평의 염전을 일구었다. 용호출장소 용호염전에서 상세히 기술하기로 한다.

오륙도 해안에 포진지를 구축하여 연합군의 공격을 봉쇄할 목적은 폐망하여 성과 없이 끝나고 흔적만 남아 있다

장자산 장산 봉에는 1942년까지 원형이 잘 보존된 토담형 봉수대가 있었다.

그러나 이봉수대가 오해야항(吾海也項) 봉수대라는 기록은 없지만 동래 공부(公簿)와 고지도등의 기록에 근접하여 오해야항 봉수대가 유력하다.

이 봉수대는 일본본토에 연합군의 공습이 시작되자 장산 봉에도 탐조등 설치공사를 하면서 봉수대를 훼손하게 되었다고 한다.

오랫동안 장자산 정상 봉수 터에 사금파리와 기와조각(瓦片)과 조개껍질이 널브러져 있었다.

한국전쟁으로 미군이 장자산 정상과 신용산 부근 에 진주 하면서 그나마 사금파리조차 자취를 감추었다

용당동에서는 신용산(보오지산)에 봉수대가 있다고 하나 용호동 주민들은 어불성설(語不成說)하다며 장자산 에만 봉수대가 있었다고 하였다. 증언하신 분 중에 92세의 王 碩鎬옹 만 생존해 있다.

(이미지 오해야항봉수대708101-3jpg/대동여지도 (영도)

2)근대 변천사 (사회역사)

용호동 농민들은 퇴비의 부족으로 외지에서 인분을 우마차에 담아 운반하여 삭혀 사용하였다 , 1961년부터 오물처리법이라는 최초의 환경법 때문에 분뇨를 지정한곳에 폐기하기 시작하였다. 용호동도 그중 한곳으로 지금의 현대 아파트 맞은편 해안가에 대형 콘크리트 탱크를 만들어 타지의 인분을 모으기 시작하였다.

자연 건조한 인분의 건더기를 별도로 걷어내 농지에 운반하여 퇴비로 활용하기 시작하자 용호동은 파리 때가 기승하여 똥골 동내라고 하기도 하였다.

이 퇴비로 생산한 용호동 시금치는 달작지근하다고 인기 있는 채소이었다.

한센 병 용호농장에서도 닭, 돼지를 열악한 환경에서사육하기 시작하였다

돼지와 닭의 배설물은 연안에 투기하여 바다를 오염 시키고 생산된 계란은 부산시민의 먹거리로 시장을 점유 하였다

이렇게 과도기 변화를 겪으면서 환경의 오염과 불결한 위생 상태에서도 굳건히 이겨낸 주민들의 의지가 대단 하였다. 뿐만 아니라 주민들은 소금염전의 분개. 한센병원. 똥골동네 등의 변천에도 흔들리지 않은 자긍심 강한 곳이다.

용호동은 한정된 농토에서 수백 년을 인구 및 생활수준까지 남구에서 가장 변화가 더딘 곳이라 모르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을 정도로 보수적 이었다.

북쪽 해안을 제외하고 동, 남, 서쪽이 완만한 산세에도 좁은 평지(2.2㎢)에서 농사를 고집한 흔적은 타 지역처럼 주거지나 전답이 유구한 역사동안 한 뼘도 자연을 침범 하지 않고 자연을 보존한 것에서 짐작이 간다.

오랜 세월 동안 보수적으로 안주한 까닭에 역사에 이름을 남긴 인물도 찾기 힘들다.

용호동에는 처음으로 1963년부터 의원을 개원하여 1969년 교통사고를 당하기 전까지 밤낮 구별 없이 용호동의 주치의로써 王洪權 원장의 활동에 연로하신 노인들께서는 홍권씨가 없었으면 지금까지 살 수 없었다는 넋두리로 짧은 생을 애석하게 생각하신다. 산업 활동 과 비래하여 산업재해 도 늘었지만 그 당시 는 재해를 숨겨야 하는 실정이라 병원에서 진료해야하는 어려움을 알고 많은 환자들은 돌보아 장애를 극복하도록 하였다 .

1963년 동국제강이 자리를 잡고부터 변화의 조짐이 일기 시작 한다

일자리를 찾아 이주한 사람이 본동주민보다 늘어나는 이변이 발생하면서 원 주민들은 처음으로 진보하기 시작하는 계기가 되었다 .

경제의 흐름에 조금씩 반응하기 시작하면서 처음으로 주거환경을 바꾸어 한 칸의 방이라도 새를 놓아 생활수준도 조금씩 좋아지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1966년부터 급격이 나빠지는 대기오염과 분진으로 빨래를 밖에 널 수 없게 되고, 밤마다 전로의 폭음과 전기로의 폭발성 굉음, 그리고 대형 전동기계의 구동소리가 조용한 마을을 어수선 하게 만들기 시작 하였다.

진동과, 분진, 매연. 소음이 늘어날수록 이주민도 비례하여 늘어나고, 경제조건은 향상되었으나 생활환경은 최악으로 악화되기 시작하였다.

동국제강과 부산주공이 현금으로 지불하는 월급날인 매월10일부터 10여 일간은 골목시장이 형성되고 늘어나는 술집에는 짙은 화장을 한 접대부들과 취객들의 추한 꼴이 비일비재 하여 교육환경 까지 나빠지기 시작한 것이다.

1973년부터 집단 정책 이주민으로 인구는 급속이 늘어나고 자투리땅의 채전도 찾아보기 힘들 정도의 빈 땅이 없는 석류 속처럼 빼곡한 반촌 마을로 변하기 시작하였다.

대기업이 지역경제에 미치는 파급효과는 기업의 윤리 도덕적 경영 여부에 따라 문화까지도 변하였다. 1998년 동국제강은 30여년의 역사를 마감하고 포항으로 자리를 옮겼다.

한때는 용호동보다 분개로 알려진 동이(盆)만 있는 마을

전오제염법(煎熬製鹽法)으로 소금을 생산한 염전을 갈아엎어 공장이 들어서고 그 공장이 떠난 자리에 고층건물이 하늘을 찌르고 용호 천을 사이에 두고 환경공단 용호하수처리장이 동산을 꿰뚫어 바다에 하수처리수를 방류하여 환경오염의 장소를 연안으로 돌렸다.

현재 하수처리방법은 총질소 제거율 연평균 60%~70%질소제거를 위해 적용하는 공법인

활성 슬러지 순환변법(MLE공법)으로340,000㎥/일 가동하고 있다. 2013년6월부터 2016년5월까지 막분리공정(MBR공법)65,000㎥/일 고도처리 시설을 설치 계획이다. 완공되면 MLE공법은 줄여 275,000㎥/일 처리하고, 고도 처리된물은 생태하천등에 활용할 예정이다.

용호동 하면 용호농장이 대명사처럼 인식되어 용호동을 혐오지역으로 좋은 평을 받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용호농장 주민들이 타지로 이주하고, 오륙 도 대단위 아파트단지 계획부터 부산의 관문에 아파트 가 들어오는 것을 용호주민뿐 아니라 부산 시민들도 찬성 하지 않았지만 지방분권의

역할은 구호에만 그쳐 결국 2005년 착공하여 2008년8월부터 입주하기 시작하였다

미완성 아파트 단지로 처음 계획한 조건을 충족하여 완성도 높은 주거지가 되기를 바라며,

용호동은 주거 환경영향 평가와 교통영향 평가에서도 낙제점을 받은 최악의 주거지로 알려지고 있다. 천혜의 자연경관을 자랑하지만 막다른 종착지의 교통의 흐름을 바로잡아 주민생활의 질을 높일 수 있는 마지막 희망으로 남아 있다.

용호 만에 모항 3선석( 1000~3000톤)외 기항선(3~4척)접안관광유람선 터미널건립이 4월이면 준공예정이다, 남해바다 백운포에도 해양레포츠 및 해양관광 전진기지 조성으로 해양선진도시 위상 구축이라는 이름으로 주민들의 휴식 공간이 잠식되고 주민들의 생활여건이 열악할 것이 뻔하다. 뿐만 아니라 도시화 과정에서 훼손된 자연 생태계복원 네트워크 기능 수행 사업으로 용각지(잘록개언덕해맞이공원)부근 생태광장으로 친환경시설물 설치사업이2014년에 준공될 예정이다. 주민들이 불편없이 행복한 공간으로 복원되길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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