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사

용호동 스토리텔링

아지빠 2013. 5. 3. 17:18

 

 

 

 

 

 

 

 

 

 

(스토리텔링)

 

용호동 과 이기대이야기

1)

너와지붕과 갈대 지붕이 불규칙하게 신용산(神龍山)을 향하여 가을 햇살을 받고 있는 30여 호의 마을 앞 개흙에는 붉은 도둑게가 바쁘게 가다 서다, 눈을 감추며 걷기를 여러 번.

살며시 노을빛에 숨어버린다.

토실토실 살찐 개들이 서너 마리 모여 어슬렁거린다. 아이들도 어른도 보이지 않는다.

텅 빈 마을 같다.

오늘이 열사흘 물때가 좋아 번천까지 바닷물이 강을 따라 올라온다.

만조가 끝 날 무렵 염전(입빈식유제염전) 수로에 바닷물을 받고, 썰물이 되기 전에 보릿짚과 돌멩이로 수문을 야무지게 막는다. 바다메기와 껄떼기 몇 마리, 그리고 모쟁이 때가 염전 갯골을 따라 수문 앞으로 의논한 듯 모였다, 돌아가기를 반복한다.

멸치나 동어는 돌멩이 사이로 잘도 빠져 나간다.

이 염전은 소랑강(小浪江) 상류 큰 포구나무가 두그루 버티고있는 고포현 에서는 열사흘부터 열이레까지 대조기에만 바닷물을 염전에 받을 수 가 있다. 하류의 염전은 하루에 두 번의 밀 물때는 언제나 부족한 바닷물을 염전고랑에 가득 채울 수 있어 물때를 맞추느라 고생 하지 않고, 수문으로 들락거리는 물 고기를 잡기도 한다. 상류 염전은 갯골 한 복판에 구덩이를 파 바닷물을 별도로 모으는 곳이 염전 크기에 따라 한두 개씩 있다.

갯밭에는 망둥이와 참게가 구멍을 파고 거품을 만들며 미쳐 상류로 도망못간 죽은 새끼 붕어나 미꾸리가 썰물 따라 떠내려 오기를 기다린다.

2)

소랑강은 폭이 제법 넓어 밀물 때는 상류라도 아이들 무릎까지 물이 차오른다. 염전 둑이 없는 빈자리는 갯밭에 갈대가 둑을 대신한다.

마을은 장자산 자락과 신용산자락 그리고 수장산 능선을 따라 작은 등위에 옹기종기 자리를 잡고 있다.

섶자리 밭에 동산의 그림자가 쌍봉을 이루어 출렁인다

진수는 한참을 동네 구석구석을 살피며 걸었다.

개흙 묻은 짚신을 오른손에 들고 모래바닥에 툭툭 두드려 모래를 털어 낸다.

소랑강을 따라 마을 한 복판에는 숭어가 여러 번 뛰어 오르는 둥글넓적한 웅덩이 가 있다. 하구 에서 대여섯 발 폭으로 물이랑을 만들며 바닷물을 밀고 올라 왔다.

좌우에 염전 둑이 다랑 논처럼 크기도 다르고 모양도 제각각이다. 갈대가 염전을 병풍처럼 감싸고 있어 미로 갔다

진수는 오든 길로 방향을 바꾸어 수장산(水藏山) 앞쪽 목부(牧夫) 움막중 제일 작은 집 옆 둥근 선돌 위에 걸터앉았다.

짚신을 고쳐 신고 담뱃대를 물고 약쑥을 비벼 붙이고 부싯돌을 때려 불씨를 만들었다.

담배 내음이 연기가 되어 하얗게 뭉쳐 나왔다.

신용산 그림자가 웅덩이를 덮었다

굴뚝에서는 한집 두 집 차례를 기다려 연기가 백운이 되어 장자산 중턱을 고리처럼 감싸 돌았다.

 

3)

송아지 울음소리가 들려오는 쪽으로 진수는 고개를 돌리며 벌떡 일어 나 담배를 털었다.

사촌 상기가 송아지를 앞세워 말체나무 가지를 흔들며 터벅터벅 내려오고 있었다.

“진수야 집에 안 들어가고 여기서 뭐하누?

들어가자”,

상기형의 목소리는 크고 울렸다.

하루 종일 우마(牛馬)를 몰아 좋은 새 밭으로 몰아가는 일이 힘들어 지친듯하다.

동네에서 외진 사분개(분개4패) 염전으로 소나 말이 소금을 먹겠다고 염전을 밟아 주인이 벼루고 있는 터였다.

가마때기로 매달아 놓은 방에는 둥근 멍석이 깔려 있는 좁은 방이었다.

방에는 화근(禍根)내를 머금은 진한 흙냄새가 다른 냄새를 덮었다.

시무룩하든 형수가 저녁상을 봉창 문으로 들이 밀었다.

톳 나물과 수수로 만든 톳 밥이 움푹한 토기그릇에 수북이 담겨 있었다.

작은 종지에는 염전 분(盆)에서 퍼온 끓인 물 소금에 마른 달래를 채 쓸어 절여 놓았다.

톳 밥에 물 소금을 한 숟가락 넣어 간을 맞춰 비벼 먹었다.

산골에서 먹든 송피 밥보다 부드럽고 고소했다, 진수는 양이 적어 좀 아쉬웠다.

밥상을 물리고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형수가 들어 왔다 .

오늘 저녁밥에는 유근피 를 말려 가루를 내어 밥을 안칠 때 조금 넣었다며 속 이 편할 거라고 했다.

집 구조는 세 칸 이었다 중간이 부엌이고 좌우에 작은 방이 있었다.

그 날 밤 혼자서 방 하나를 차지했다, 신묘(辛卯)년1591 음력4월 초순이라 새벽은 한기가 두 겹 가마때기 문틈으로 걸림 없이 들락거렸다.

 

4)

햇살은 장자태(長子泰) 큰 고개 넘어 수장산(水藏山)비탈을 따라 내려 왔다.

눈곱을 때며 상기 형을 따라 염전 있는 검은 개흙밭을 한참 걸었다.

새벽 갯냄새가 비릿했다. 맨발이라 조개껍데기와 홍합 굴 껍질을 피하며 쿵쿵 바닥을 치며 걸었다. 갯지렁이가 물을 품었다 .

염전 한 필지(뙈기) 에 섯등(동이盆)이 하나씩 있었다,

한 가족이 한마지기 염전 을 만들기도 힘에 부친다며 염전 만드는 법을 소상이 말해주었다.

황토 땅의 돌과 자갈을 골라내어 고르고 황토에 물을 뿌려가며 밟고 다져 단단하고 수평이 되도록 고무래질을 하며 다듬어 말린다.

밭두렁에 고랑을 파서 바닷물을 가두어 담도록 돌담도 만들고,

소조기 때를 대비하여 바닷물을 퍼 올리는 용두레도 만들어야 한다고 했다 .

염전 바닥에 돌과 자갈을 골라낸 개흙을 뿌려 써레질을 하며 초불 말리기를 하고 ,만조 때 아낙네들은 용두레로 소금물을 염전에 퍼 넣고 바가지로 개흙에 바닷물을 여러 번 뿌려가며 모래가 한얀 간이 필 때 까지 몇 날을 반복한다.

섯등은 사방13자(尺)정도 높이는2~3자로 함수가 걸러 질수 있도록 자갈을 깔고 껍질 벗겨 엮은 싸리발을 깔고 그 위에 간핀 개흙을 모아 바닷물을 뿌려 함수을 받았다.

함수가 가득차면, 노린재나무 재를 발라 가며 나무망치로 다듬어 만든 송진 가락지를 서슬 통에 담가 떠오르면 좋은 물 소금이다.

송진(비중계)이 가라앉으면 간핀 모래에 함수를 뿌려 염도를 높여가며 적당하게 조절 하였다.

 

5)

소랑강 좌우의 염전에는 섯등이 하나씩 있다. 섯등 염정에는 간핀 점질토 (모래혼합 지질)에서 해수로 채취한 함수(鹹水)가 모인다.

개흙의 질이 좋아 입빈식 유제염전 전오제염법((煎熬製鹽法) 으로 함수를 동이에 받아 염부 옥에서 토부나 패부 가마에 함수를 넣어 잡목이나 삭정이 불로 끓여 소금(자염)을 만들었다.

물 소금도 도가니에 담아 팔았으며, 염소고(鹽燒藁)법으로 만든 연한 핑크빛 소금은 소금장수가 곡식과 바꿨다.

그러나 마을 사람들은 쉽게 구할 수 있는 물 소금을 선호 하였다.

염전도랑을 손보며 돌담을 쌓든 아낙이“문 씨”라고 부르자

상기 형은 “소가 마을 아래로 내려가지 못하도록 단속을 한다며 대꾸한다.”

아낙이 받아 답을 한다. “ 소가 내려와도 축성을 높게 했으니 소가 염전을 넘지 못할 거야!

 

6)

영재 어머니가 진수를 보고 상기와 많이 닮았다고 한다.

상기는 제 동생이라고 대꾸하자 총각이냐고 뜬금없이 묻는다.

상기가 빙그레 웃었다.

진수가 실하게 생겼다며 은근히 탐을 내는 눈치다.

한참 말없이 진수를 훑어보다가, 막무가내로 진수가 염전 일을 거들었으면 좋겠다며

영재 어머니는 상기대답을 기다리지 못하고 결정을 내린다.

나중에 진수를 집으로 보내라고 한다.

진수는 이곳 염전 농사가 내 일 같아, 자신감이 들어 들떴다.

고향에서 내려온 진수의 밥벌이가 생기자 상기도 얼굴에 희색(喜色)이 돌았다.

상기와 진수가 동시에 답했다.

 

7)

어느덧 수장산 끝에 당도 했다.

바다에 덤성덤성 자란 초록 풀이 부추 밭 갔다 .

이풀을 섶자리(거머리 말과 애기거머리말)라고 했다.

고둥이 잘 먹는 해초라 고기들이 많이 모인 다고 상기 형이 말한다.

섶자리를 대처서 맛 조개를 넣고 국을 끓이면 맛이 좋다고 한다.

섶자리 밭까지는 그리 깊지 않아 바닷물이 종아리 까지 올라 왔다.

섶자리에 고둥이 붙어 있었다. 너울에 떨어지고 또 떨어져도 올라붙었다.

발바닥에 가시 같은 것이 있다 .모래를 파보니 큰 꽃게가 손가락을 질건 물고 딸려온다.

너무 아팠다, 꽃게를 때려고 하자 더 질근 물었다 .

“게에게 물린 손을 물에 넣으라고” 형이 다그친다.

얼른 물에 넣었다, 한참에야 꽃게는 물었든 손을 놓고 물속으로 헤엄쳐 갔다.

발이 시려 왔다, 그리고 손가락도 아팠다. 한참동안 손가락을 빨았다

 

8)

형을 따라 진수는 영재 집으로 갔다

영재가 고개를 꾸벅 했다. 엄마 계시냐.

상기 아저씨가 왔다고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고함을 질렀다

부엌에서 머리를 질근 맨 아가씨와 영재 어머니께서 허리춤을 흔들며 나왔다.

대뜸 총각의 나이와 이름을 물었다.

20살, 남평 문 씨 진수입니다. 아버지가 가르친 대로 또박또박 말씀드렸다.

우리 염밭일도하고 농사도 거들면서 같이 살아 보게나 ,영감 승낙도 받았으니, 오늘부터 일을 하시게나. 정중하며 조심스러웠다.

진수는 상기 형을 처다 봤다 .고개 짓을 한다.

진수는 상기의 반응에 안도의 한숨을 내뱉다가 가래 채어 기침을 한다.

쉰에 가까워 보이는 상기 어머니 성품이 시원시원했다.

상기 형은 가고 진수만 남았다.

아침 먹고 염밭에 가서 도랑도 손 보고 써레질도 하고 소금물도 뿌리고 …….

영재 어머니가 이것저것 상세히 설명했지만 알아들은 것은 염전 물 소금의 질을 높이는 방법만 머리에 남았다.

 

9)

아침밥은 무 보리밥, 물 소금에 절인 산 마늘 로 배불리 먹었다.

며칠 염밭일 을 마치고 영재와 같이 굴피를 벗기러 비룡산 자락 용각지(龍胳地)로 갔다 .

용각지와 대붕산(大鵬山)에 굴참나무가 자생하고 있어 영재네 너와 지붕은 두 곳에서 껍질을 벗겨 지붕을 덮었다고 한다.

올 여름 장마를 대비하여 사흘간 굴참나무 굴피를 벗겨 가지런히 쌓아 돌을 올려 펴 두었다. 영재누나 윤옥이 처음으로 거들어 주었다.

윤옥이 여러 번 예사롭지 않은 곁눈질을 할 때마다 얼굴이 뜨거웠다.

가마우지가 떠난 지 보름, 5월 마을 사람들과 친하게 지내며 틈이 나는 데로 일을 거들기도 하고 이야기도 들으면서 한 마을 사람이 다 되었다.

오늘은 여덟 물때, 조개를 잡으러 영재와 윤옥이 를 따라 수리병(호리병의 옛말)에 물 소금을 담아 섶자리 밭으로 갔다. 몇 일전 파도가 일어 중골산 황토 흙이 아직도 깊은 곳은 바닷물이 불그스레하게 물들어 있었다. 개흙모래에서 호미로 조개 구멍을 찾아 물 소금을 넣으면 맛 조개가 개구리 혀처럼 내밀고 올라 왔다.

잡는 재미 보다 욕심이 생겼다, 밀물이 밀러 올 때 쯤 싸리 소쿠리에 가득 잡았다.

꼬르륵 소리가 여러 번 ,흘러내리는 허리춤을 올려본다

윤옥이 조개껍질로 맛 조개 살을 발라 바닷물에 모래를 헹구어 내밀었다.

영재가 맛있다며 먹으라고 재촉한다.

입술로 소금물을 짜며 맛 조개를 먹었다, 처음 먹어보는 쫄깃한 단맛에 윤옥이 살을 발라주는 20여 마리를 허겁지급 먹고서야 두 얼굴이 떠올랐다.

바닷물에 손을 행구고 머리를 만지며“ 너 도 먹어 ” 윤옥을 쳐다봤다

빙그레 웃었다.

 

10)

너울에 조가비가 모래 속으로 파묻히며 조잘거린다.

조간대 에는 이름 없는 작은 게들이 파도를 타고 춤을 추며 들락거린다.

비린내 나는 덜꿩나무 향기가 갈바람을 타고 마을로 들어온다.

소쿠리에 담긴 조개도 목을 빼고 꽃향기에 꿈틀거린다.

잡은 조개를 나누어 상기형수 에게 갖다 주었다

윤옥이 아버지는 목수이며 어부였다.

 금형 김 씨 아저씨와 작은 배를 타고 주낙을 하고 있었다.

마당에는 줄에 메달아 말리는 각종 고기 나름의 냄새가 진동을 했다 .

파리나 등에, 말벌이 번갈아 날라 들었다.

대나무 가지로 파리를 쫒는 일은 영재 몫이었다.

   

11)

며칠에 한두 번씩 마을 자매 아가씨를 수영 강을 따라 깊숙이 실어 주기도 하였다.

귀한 손님처럼 깍듯이 공대(恭待)받는 양반집 자매는 참 곱기도 하고 처음 보는 옷매무새가 예사롭지 않았다, 며칠 전에는 가까운 거리에서 만나 뵐 수 있었다. 지체 높아 보이는 어른과 이야기를 나누며 두루마리 종이를 건네는 것도 보았다.

난생처음 여자의 향기에 연거푸 재채기를 했다.

윤옥이 저 각시는 기생(妓生)이라고 귀띔 해주었다

기생이 뭔지도 모르면서 고개만 끄덕끄덕 했다.

예쁜 여자를 기생이라고 하나보다.

 

12)

유월 초순 처음으로 삼베바지를 입었다, 무릎까지 말아 올렸다.

왕모시대를 삶아 노끈을 만들고 남은 것으로 허리띠도 만들었다.

처음 입어 보는 삼베 바지는 윤옥이 아버지 장수가 입든 허름한 바지를 곱게 바느질을 하고 풀이 성이 나도록 다듬질을 하여 주었다.

사타구니가 쓰려 한동안 어정어정 걸었다, 풀이 숨죽자 입을 만 했다 .

염밭 일이 바빴다, 써레질도하고 소금 간이 핀 개흙을 밀어 모으는 고무래 (라스)질도하여 섯등(盆)에 모아 바닷물을 붓고 다시 모래를 뿌리는 호퍼(Hopper)질을 번갈아 하였다.

밤이면 동이에 우장 같은 발을 덮어 비라도 내리면 염수가 떠내려갈 것을 대비 하였다.

땀이 눈꺼풀을 따라 눈시울을 적셨다.

무명 속바지도 샅에 달라붙어 불알을 비틀었다. 여러 번 손으로 바로잡아 봤지만 별 효과가 없었다.

긴긴 해가 떨어질 무렵 바닷물에 멱을 감고 갈밭에서 바지를 짜 입고 올라 왔다.

등목을 하고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 등에 물집이 생겨 아려 잠이 오지 않았다.

그나마 영재와 같이 할 수 있어 다행이었다.

올여름은 가뭄 때문에 물 소금을 많이 만들 수 있을 것 같다.

개똥벌레가 한두 마리 꼬리에 등(燈)을 달고 갈밭에 날라 들었다 .

 

 

13)

오늘은 선창가 공터에서 쑥대 모깃불을 피워 모기를 쫒으며 염전 장마대비 발 짜는 방법을 배웠다 . 장대비가 내리면 염전이 유실되어 복구시간동아 달포는 작업을 하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늦게 염전을 일군3곳의 염전 덮게 발을 공동으로 품앗이하기로 하였다.

한마지기 염밭에 20장 두루마리 갈대발을 만들어야 했다. 열흘 남짓 걸린다며, 작년에 준비한 갈대 동(棟)을 서둘러 날랐다. 어른들은 손에 익은 솜씨로 빨리 짜내려 같다.

처음 내가 왔을 때도 미역을 채취하여 물 소금에 담갔다가 왕 모시 끈에 빨래를 말리듯이 널어 사흘 만에 걷어 들인 일도 자매 각시가 가르쳐주어 오래도록 미역을 보관 할 수 있었다. 그 때 산 너머 비용개 백석에서 짚신발로 김 파래 밭을 걷다가 미끄러져 팔꿈치에 멍이 들기도 했다. 촌놈 표를 야무지게 했다.

그래도 달짝지근 씹히는 거덕거덕 마른 진두바리(진두말) 맛은 잊을 수 없었다.

진수도 제법 솜씨 있게 발한동을 짰다 . 눈썰미가 좋다며 장수가 칭찬을 했다. 발 짜는 옆에서 윤옥이 우리 집 발 한개 헤어진 것 바꿨으면 좋겠다며 보챘다. 윤옥이 부탁을 들어 내가 짠 발은 영재 염밭에 헤어진 발과 바꾸기로 하였다. 발 작업을 마친 다음날 염밭 발을 풀어 점검을 했다.

올이 빠진 발을 염전 둑에 펴 놓고 쉬기로 마음먹고 버들강아지 그늘에 자리를 옮겨 발을 겹쳐 깔았다.

윤옥이 기뻐하며 내 옆에 앉았다, 참 좋네!

그 말에 윤옥을 쳐다봤다 눈이 마주쳤다. 한참을 보다 고개를 돌렸다, 진수는 벌떡 일어나 용두레 디딤돌 을 만지작만지작 거렷다. 윤옥이 말없이 집으로 올라갔다.

번갈아 걸어가는 하얀 종아리가 고왔다, 갈밭에 오줌을 누고 바지를 추슬러 입고 용두레로 고랑에 바닷물을 넉넉히 받았다.

 

 

14)

유월중순 영재를 데리고 꽃밭 등으로 나무하러 갔다, 꽃밭 등은 진달래꽃과 잡목이 우거져 땔감을 구하기에 가깝고 수월했다. 두어 번 이곳 너덜겅 에서 발채지개에 나무를 해온 터라 길이 눈에 익었다. 한 짐씩 나무를 지고 내려오다 제석(帝釋)곡 샘을 보자 갈증이 일어 동발을 바쳐 놓고 떡갈잎으로 서너 모금 떠먹었다. 가재가 뒷걸음질로 돌 틈으로 들어갔다.

옹달샘 위에 무명실타래를 걸친 주먹보다 큰 돌 3개가 나란히 있었다.

 

15)

진수는 상주(尙州)에서 어렵게 살았다

석이버섯을 따러가서 낙상하여 다리가 불구가 된 아버지와 몇 마지기 안 되는 자투리 채전이 재산이었다. 어머니는 누이와 밭일 품삯으로 몇 되의 늘보리를 받아 건건이 살아 왔다 .

지난해부터 상주에서는 건장한 젊은이들을 징집 한다는 소문에 지레 겁을 먹고 상기 형을 찾아 이곳 까지 며칠을 걸어 왔다.

고향에 계시는 부모님과 누이를 생각하면 부끄럽고 송구스러웠다.

그나마 상기 형 때문에 배 굶지 않고 힘든 노동도 윤옥이 옆에 있어 고된 줄을 몰랐다.

 

 

16)

7월 찜통더위가 한창인 한낮, 윤옥이 아버지가 기생이 갖다 준 나뭇가지를 가지고 진수를 데리고 동산(瞳山)목등을 타고 목 너머 골짜기를 넘었다.

노루가 놀라 뛸 때마다 삼베바지 올이 메어 지도록 미끄러지며 내려가 말 오줌대 가지를 한 다발 잘라 짊어지고 올라 왔다.

땀 냄새와 약재(藥材)냄새가 혼합되어 악취가 심하게 났다.

그날 이후 사흘이 멀다 하고 혼자서 말오줌대 나뭇가지를 꺾어 왔다.

보름이 지나서야 윤옥이 약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방귀 질 나자 보리양식 떨어진다고, 며칠 전부터 수축한 얼굴에 볼우물이 더 곱다 싶었는데, 오늘은 눈도 맞추고 방긋이 웃으며 진수가 약을 구해 온 것을 알아차린 듯했다.

이제 약이 필요 없다는 말에 서운하기 까지 했다.

윤옥이 회복하고 비용개 맹밑(맨 아래)으로 영재와 멱을 감으러 갔다.

맹밑은 바다도 잠잠하지만 대붕산에서 내려오는 개울물이 더 좋았다. 우리보다 먼저와 머리를 감는 자매 각시를 만났다, 낮 익은 얼굴이라도 서먹해서 인사만 하고 바다 쪽으로 다시 자리를 옮겼다.

물놀이도 흥이 났지만 돌을 뒤져 전복이나 삿갓조개를 잡아 영재가 시키는 대로 까서 먹었다. 제법 큼지막한 소쿠리에 수북이 잡았다.

내심 마음은 맛있는 해산물을 윤옥이 먹일 생각에 목덜미와 어깨가 타는 줄도 몰랐다.

영재를 부르는 소리에 언덕 위의 윤옥이를 힐끔 보았다 .

신이 났다 뛰어가서 안고 싶은 생각이 불끈 솟았다.

그러나 영재와 자매가 마음에 걸려 기분은 차츰 식었다.

왼지 억울한 느낌도 들었다.

윤옥이 언덕 아래로 내려오자 자매들도 따라 내려 왔다.

사리채에 담긴 해산물을 까서 윤옥과 각시 입에 넣어 주느라 진수와 영재는 손이 바빴다 .

사양도 하지 않고  반쯤 비우고서야, 윤옥이 떠오르는 아버지 생각에 부끄러워

벌떡 일어나 소쿠리를 이고 길을 잡았다.

윤옥이 어머니는 전복 큰놈은 골라 버들가지를 깔고 쪄서 그늘에 말려 놓고 작은 것과 삿갓조개는 물 소금으로 장을 담갔다.

 

17)

상기는 매일 같이 소가 더위에 지쳐 간핀 개흙을 먹으러, 울이 허술한 염전 바닥을 밟아 염전 주인으로부터 된통 욕을 먹었다. 그때 각시 자매가 염전의 간핀 개흙을 마구간 구유에 넣어주라고 일러주었다.

염전주인과 목부들이 합의를 도출하여 “누이와 매부가 좋은” 고육지계(苦肉之計)를 짜냈다. 개흙을 얻어 갓골 마구간 구유에 넣어 주고 나서는 우마(牛馬)모두가 별 탈 없이 새도 잘 먹고 털에 윤기가 흘렀다.

상기는 여유가 생겨 오랜만에 진수도 볼 겸 양수 씨 염전을 찾았다 .

염전 구석진 곳 발위에 늘어지게 잠을 자는 진수를 보고 상기는 피식 웃었다.

편히 자는 모습에 부러움 같은 편안함. 상기는 진수의 잠을 깨울 수밖에 없었다.

흘러내린 침을 닦으며 먼 산을 쳐다보는 진수에게 한마디남기고 상기는 길을 질러 내려갔다. 그동안 배불리 먹고 건장한 몸으로 하고 싶은 대로 일을 해온 것이, 몸에 배어 상기가 하는 말이 하루 종일 귓가에서 맴돌았다.

상기 형이 고향으로 올라가고 쉽냐고 물었을 뿐인데! 왜 마음이 아련한지.

밤새 뒤척이다 새벽에 일어났다 .힁하니 염전으로 갔다, 딱히 일머리가 떠오르지도 않았다. 한참 후에 영재 고함 소리에 정신이 번쩍 했다 .

배도 고팠다.

아침을 먹고 처음으로 오늘 내가 할 일이 있느냐고 윤옥이 아버지에게 질문 했다.

지금까지는 눈치로 일을 해왔다

염전에 고무래질하여 섯등에 간핀 개흙을 수집하여 바닷물을 흥건히 붓고, 동산 끝 약수터에서 약수를 길러 오라고 했다.

오늘이 말복이라 지난번 쪄서 말린 전복으로 기장 죽을 끓이라는 하명(下命)을 남기고 삿대와 어구가 담긴 망태기를 매고 집을 나갔다.

양수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진수는 염전으로 내려 왔다 .

석자나 되는 고무래자루를 아랫배에 밀착하여 모래를 밀어 모아 섯등에 퍼 담았다.

한마지기 검은 모래가 이렇게 많은지 새삼 놀랐다.

바닷물을 질통으로 지다 흥건하게 부었다.

함수 통에 뚝뚝 떨어지는 소리와 간격이 짧아지기 시작했다 ,

동산끝 (瞳山末) 약수터는 조간대와 맞물려 있었다. 물통을 행구고 약수를 가득 퍼 담고 떡갈잎을 서너 겹 덮고 바쁜 걸음으로 올라 왔다.

 

18)

난생처음 먹어보는 기장 죽 맞은 임금님의 진지를 훔쳐 먹는 기분이었다.

가슴이 두근거리고 형용할 수 없는 두려움 같은 맛이었다.

뜨거운 죽 맛에 놀라 땀도 나지 않았다.

허겁지겁 먹는 영재 옆의 윤옥은 차분하게 죽 맛을 아는 듯 했다

그날은 영재와 윤옥이 일찍 잠이 들었다

죽을 끓이느라 분주한 틈을 타서 장수는 염전 함수 통 물 소금을 물끄러미 처다 보고 있었다.

노란 식혜 빛의 함수에 송진 가락지를 담가보고는 빙그레 웃음을 머금은 흡족(洽足)한 얼굴이다.

진수가 염전 일을 맡아하고 나서 장수는 몰래 함수을 떠보며 물소금의 질을 꼼꼼히 지켜보았다.

장수 처를 쿡쿡 질러 잠을 깨웠다. 중얼중얼 옹알이를 하듯 잠이 들깨 말소리가 흐릿하다. 장수는 진수가 어떠냐고 떠본다.

착실하고 성실하다며 남의 집에 주기 아깝다고 말을 맺는다.

장수 작심을 한 듯 윤옥이 짝지어 주자고 넌지시 말 꼬리를 흐린다.

벌떡 일어난 장수 처 는 저고리도 입지 않았다. 아무 말도 없다.

장수는 비스듬히 누워서 은은한 달빛에 비치는 아내의 가슴을 쳐다본다.

둘은 말없이 발치에서 잠든 윤옥이 숨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진수가 아내의 허리를 잡아 당겼다, 모래성이 무너지듯 진수의 오른팔 베개를 하며 삼베 홑이불을 끌어 덮었다. 그 일은 다른 날 보다 빨리 끝났다. 전복죽 덕을 톡톡히 보았다.

두 사람의 숨소리는 들릴 듯 말듯 윤옥이 눈치체지 못하고 아침을 맞이했다

한동안 진수와 윤옥이 혼인은 묵시적(黙示的 )승인이 난 듯 말이 없었다.

 

 

19)

윤옥이 지난밤 아버지이야기를 다 듣고 있었다.

콩닥콩닥 뛰는 가슴을 억누르며 숨소리를 죽이느라 한동안 잠을 이루지 못했다.

윤옥이 아침 진수의 얼굴을 바로 볼 수 가 없었다. 지난밤 일어난 일들이 진수와 연관(聯關)되어 얼굴이 뜨거웠다.

진수는 분(盆)에 있는 개흙을 염전에 퍼 헛쳤다. 골고루 써레질도 했다

한 낮이 지나서 바닷물을 뿌리고 집으로 올라 왔다

다른 날이면 윤옥이 염전에 내려왔는데 오늘은 기척이 없었다.

 

20)

그늘이 질 무렵 지개에 발채를 올리고 용각지에 나무를 하러 가기로 작심을 했다

지개 작대기를 두드리며 한참을 걸었다. 넉 달 동안 친하게 지낸 각시집 개가 따라 왔다. 반가웠다.

용각지(龍胳地)는 운해가 들락거리고 나무에 이끼가 주렁주렁 달려 음침하고 들짐승 이 많아 혼자 다니기엔 겁이 났다.

지개 동발을 바치고 덥석 지개 등받이에 걸터앉았다 .

옆에 있든 개가 뛰어 갔다.

꼬리를 흔들며 뒤따라온 윤옥 이를 반기는 개가 고마웠다.

금세 나무를 발채에 가득 담아 지게 작대기를 바치고 윤옥이 옆에 앉았다.

분내가 났다. 한참동안 허공만 쳐다보다 왈칵 윤옥이 손을 잡았다.

손을 뿌리치지 않았다 .땀이 흘렀다. 다른 손으로 바꾸면서 몸을 틀었다.

윤옥이 입술에 침을 발랐다. 쪼그린 채로 윤옥을 안았다. 그리고 입을 맞추었다 .

가슴 뛰는 소리가 들렸다. 숨이 차 견딜 수 없어 벌떡 일어났다.

윤옥이 진수를 바라봤다. 아랫도리가 불쑥 올라와 있었다.

황급히 돌아서며 바지를 고쳐 멨다.

윤옥이 뒤따라 개가꼬리를 흔들며 가고 있었다.

다시 바지를 추스르며 지개를 지고 뒤를 따랐다. 집에 올 때까지 묵묵히 걸었다.

윤옥이 사나흘 아팠다.

얼굴은 축이 나지 않았지만 진수도 핼쑥했다.

 

21)

아침저녁으로 시원한 팔월이다.

명절 며칠 후 두 기생 과 진수가 배를 타고 상기와 김 씨가 노를 저으며 수영 강을 올라갔다.

작은 배가 아니었다. 서너 명을 더 태워도 여유가 있어 보였다.

언덕위에 망루가 보이고 큰 성이 있었다. 넓은 선착장에 배가 여러 척 정박해 있었다.

기생을 내려주고 주낙을 같이 하기로 하였다.

처음으로 접해보는 낚시가 궁금하여 흥분 되었다.

양수가 시키는 대로 미끼를 낚시에 끼우고 둥글게 사렸다.

바다 한복판에서 낚시를 던지라고 했다 .차례대로 채롱 3통을 던졌다. 마지막으로 빈 박통을 던지고 집으로 돌아 왔다.

다음날 아침 세 사람이 배를 타고 어제 던져 놓은 낚시를 건지러 갔다.

낚시마다 팔뚝만 한 가지각색의 고기가 올라 왔다, 기분이 너무 좋았다.

오는 길에 수영 강을 따라 기생이 내린 선착장에 가서 기생을 데리고 왔다.

지개 발채에 고기가 두 짐이나 되었다. 상기 처와 윤옥이 고기를 장만하고 물 소금에 담갔다가 줄에 널었다.

몇 마리는 각시 집에 갖다 주라고 했다 .삼태기에 담아준 고기를 가지고 각시 집으로 갔다.

개가 반겼다. 스님이 와 있었다. 얼굴이 둥글 납작 했다.

동생 되는 각시를 경(京)아라고 불렀다.

집에 와서 김 씨에게 큰 각시 이름을 물어 봤다 . 언니는 남(南)이라고 했다

고기를 잡아 올 때 마다 각시 집에 고기를 전했다.

팔월 하순부터 염전일보다 땔감 준비가 바빴다

9월 중순까지 너덜겅에서 하루에 두 번씩 나무를 해다 날랐다

써레질은 하루에 영재가 한번 진수가 한번으로 족 했다

장자산 해안가에서도 기생자매집에서 만난 스님을 만났다, 장삼의 색깔이 붉었다

바닷가에는 파도에 실려 온 큰 나무들이 있어 거리는 멀어도 나무하기는 수월했다

오늘은 송판 같이 넓은 나무 두개를 지고 왔다. 윤옥이 편하도록 집 앞 거랑에 다리를 만들어 주고 싶다.

 

22)

9월부터 도토리로 물들인 광목 접 바지를 입었다.

활동하기 편하도록 만들어 진수를 위해 만든 맞춤옷이었다.

파도에 밀려온 송판을 지고 오다 나뭇가지에 걸려 구멍이 났다. 윤옥이어머니가 바지를 벗어 달라며 양수의 소금꽃핀 바지를 던져주었다.

바지를 갈아입고 상기 집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형수가 반겼다

인사를 하고 선돌에 앉았다. 서방님 윤옥이하고 혼담 이야기가 있었다고 귀띔을 해주었다.

대꾸도 하지 않고 올라 왔다. 윤옥이 내 사람이 된다고 생각하니 걱정 반 기쁨 반이었다.

 

 

23)

첫얼음이 얼었다.

염전 고랑도 얼어 얼음을 걷어냈다. 그리고 용두레로 고랑에 바닷물을 보충했다.

한겨울 매일 얼음이 얼 때마다 얼음을 걷어내어 고랑의 바닷물의 염도를 높여 물 소금을 만든다. 마을 주민들은 열흘 동안 갈대를 베어 발을 만들고 지붕을 덮을 준비를 하였다. 이틀에 한 번씩 양수를 따라 바다에 나갔다.

주낙을 주업으로 하는 여섯 집이 있어 집집마다 크고 작은 배가 한 척식 있다.

엄동설한에 잡은 고기는 소금에 절여 오래 보관 하도록 손질하여 말리고

잘 말린 고기를 노간주나무 몽둥이로 잘근 잘근 두드려 뼈를 추리고 함지박에 담아둔다.

윤옥과 영재의 밤 간식이다.

하현달이 뜰 때까지 오누이는 보풀보풀한 고기를 씹으며 이야기를 도란도란 한다 .

 

 

24)

새해를 맞아 진수도 누비 속바지와 겉 바지를 얻어 입었다.

섣달에 윤옥이 정성들여 영재 옷 을 만들면서 진수 옷도 추위를 탈 가봐 만들었다.

누비 바느질 솜씨가 좋아 포근했다.

양지바른 곳에는 광대나물과 개불알풀이 다투어 꽃을 피우고 큰 고개 너머 복수초 노란 꽃이 봄바람에 하늘을 쳐다보고 나비를 기다린다. 그러나 나비는 오지 않았다.

양지바른 신용산 중턱에 남이와경아 두기생과 윤옥이 친구 점례를 따라 광주리를 들고 누렁이와 진수는 윤옥이 뒤를 따랐다. 누렁이가 이리 뛰고 저리 뛰며 어쩔 줄을 모른다.

진수는 점례를 곁눈질로 훔쳐보았다. 옆모습에 넋을 잃고 처다 보는 진수는 윤옥이 심기가 상한 눈치도 차리지 못하자 경아언니 남이가 광주리를 가지고 오라고 큰소리로 진수를 부른다. 정신이 번쩍 난 진수 주위를 둘러보다 윤옥이 눈이 마주치자 멈칫 놀라 고개를 돌리며 광주리를 들고 기생 자매 쪽으로 단숨에 올라간다.

나물 캐고 내려오는 동안 윤옥이 시무룩하여 진수는 어쩔 줄을 몰랐다.

 

25)

임진년(1592)3월부터 기생자매는 좌수영으로 올라가면 사나흘이 걸렸다.

한겨울 냉동 함수 법으로 모아둔 염전 고랑의 염수를 동이 옆 대통에 퍼 담았다.

올봄부터 간핀 개흙을 동이에 모아 진한염수를 이용 하여 물 소금을 두 배 이상 생산하였다.

삼월중순경 염전의 개흙을 고무래로 수집하여 동이에 담아 대통의 간수를 흥건히 부었다

염전 둑에 작년 깔아놓은 발위에 앉아 햇살을 받으며 쉬고 있었다.

생각지도 않은 윤옥이 함지박에 부침개를 담아 진수가 쉬고 있는 옆에 나란히 앉았다.

지난번 산나물 캐러가서 삐친 이후 처음 단둘이 앉았다.

윤옥이 손으로 입에 넣어주는 처음 맛보는 메밀 부추 전을 게 눈 감추듯 먹고 입술에 두 번이나 침을 발랐다. 윤옥이 함지박을 들고 일어서면서 진수 볼에 입을 맞추고 황급히 나갔다. 간간이 진수의 가슴은 황홀경(怳惚境)에 취해 강아지풀을 물고 염전을 빙빙 돌았다.

노을이 장자산에 비칠 때 집으로 올라 왔다.

 

 

26)

기생 자매는 관청으로부터 왜구(倭寇)가 노략질 할 것이라는 정보를 얻었다.

1592년4월13일 아침 마을이 어수선 했다. 기생이 진수와 영재를 불러 마을사람들을 급히 소집했다.

상기를 포함한 목부가족들에게 소를 마구간에 가두고 석포 목장관리소에 가 있으라고 독촉하고, 배는 뭍으로 끌어 올리고 봇짐을 싸서 용각지로 빨리 피난을 가야 한다고 다그쳤다.

진수도 서둘러 양식과 그릇 옷가지를 챙겨 마을사람과 합류하여 윤옥이 손을 잡고 오륙도가 송림사이로 보이는 옴팡한 구석에 해안싸리를 깔아 자리를 마련하였다.

마을사람들도 적당한자리를 마련하고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젊은 사람들은 바닷가 까지 나가 살펴보고 돌아오기를 여러 번, 기생은 몇몇 어른들을 불러 모아 왜구해적들이 노략질을 할 것이니 꼼짝 말고 있으라고 당부하고, 남이와 경아자매는 누렁이를 데리고 사정(射亭)에서 작년에 뵈었든 수염이긴 고운피부의 어른을 만나 한참 이야기를 나누고 장자산 정상으로 올라갔다. 뒤따라 진수와 윤옥이도 올라갔다 .남동풍이 불어 따뜻하고 노곤했다.

 통정대부 김원실공 은  신라 경순왕 봉사공파로 당파싸움에 가문이 풍비박산이난 같은 파의 두여식을 좌수영 기생으로 천거하고 원실공 가까운곳에 두어 보살핀것이었다.

 

   

# 생전에 분포리 두기생을 돌보아오신 금령(金寧)김씨 용호동 입향조 경순왕 봉사공파(奉事公派)13대손인 김원실(金元實)정삼품 통정대부(正三品通政大夫) 절충장군(折衝將軍)으로 임진왜란 부산 다대 방어에 참전하여 순국하시어 동반(東班)종이품(從二品) 가선대부 호조참판(嘉善大夫戶曹參判)을 추서(追敍)하셨다는 기록과 사정(射亭)을두어 문.무신 집안으로 활약한 흔적이 남아있고 사정터라는 지명도 있다.

 

 

27)

치욕의 임진왜란, 본대는 절영도와 우암 그리고 좌수영으로 상현 달빛에 빨려 들어갔다, 나머지 병선은 은빛 찬란한 이 마을 포구로 들어 닥쳤다. 해안이 난장판이다.

물속에 잠긴 장산이 꿈틀거렸다.

진수와 윤옥은 용각지로 달려가고 두 기생은 목 너머를 지나 동산에 당도 하였다.

벌써 수장산 자락에 해가 떨어지고 있었다. 배들을 하나둘씩 마을 쪽으로 몰았다

개는 출렁이는 바다에 꿈틀 거리는 장산을 바라보며 무슨 까닭인지 목 놓아 울부짖었다. 개짓는 소리에 왜군 들이 대여섯 명이 올라오는 것 같았다.

기생은 숨을 곳을 찾아 헤매었다. 발 빠른 병사들이었다. 비탈길 옆 작은 석굴을 발견하고 숨어들었다. 석굴 앞에서 개는 왜병들의 움직임 에 계속 짖었다.

왜병들은 동굴을 향하여 여러 번 무어라 고래고래 고함을 내뱉었다.

누렁이는 왜병이 가까이 올라오자 달려들며 달빛에 하얀 이빨이 빛나는 순간 총소리가 메아리쳐 들려 왔다.

누렁이의 살벌한 짖는 소리를 들을 수 없었다.

왜병들은 낄낄 거리며 동산말 선착장으로 내려갔다.

남이와 경아 자매는 꼭 껴안은 채 적막이 잠긴 석굴에서 엉금엉금 기어 나와 주위를 살폈다.

왜놈들은 마을 앞 선착장에 배를 정박하고 왁자지껄 하였다.

상현달빛은 대낮처럼 밝았다. 피를 흘리며 늘어진 누렁이를 버려두고 동산을 할레 벌떡 거리며 넘고, 장자산도 단숨에 올랐다

마을이 불타기 시작했다

너와지붕과 갈대발은 불쏘시개 가되어 삽시간에 마을은 불바다로 변했다.

마을이 재가 되고 천지가 암흑 이었다.

진수와 윤옥은 마을이 불타는 것을 한참 바라보며 눈시울을 적셨다.

그때 인기척이 들리는 곳을 숲속에 쪼그리고 앉아 바라봤다 남이와 경아 자매의 모습이 어스름 달빛에 떠올랐다.

눈물이 핑 돌아 가까이 올라올수록 흐릿하기만 했다 .

진수와 윤옥은 남이와 경아 각시와 용각지 피난처로 돌아왔다 .

 

28)

마을주민들은 웅성웅성 거리다 조용했다

이틀간 마을주민들은 불을 피우지도 못하고 생식을 하며 이틀을 보냈다

사흘째 되는 날4월15일 장자산 정상 봉수대 뒤에 숨어서 마을을 살펴보았다 .

왜놈 선박은 어디로 갔는지 흔적도 없이 바람에 재만 날랐다.

병인(丙寅)생 남이와 무진(戊辰)생 경아 두 자매와 대책을 논의 하였다.

마을로 내려갔다 마을은 온전한 것이라고 하나도 없었다,

마을주민들 일부는 옛 고향과 연고지로 떠나기로 하였다 .

장자산 아랫목과 수장산 등 마을에도 바쁘게 새 삶을 일구느라 개도 바쁘게 움직였다.

신용산 등에는 10호를 남겨두고 뿔뿔이 새 삶을 찾아 떠났다.

상기는 왜놈들이 노략질하고 남은 소 두 마리를 몰고 왔다 .

상기는 진수를 데리고 코뚜레를 만들 노간주나무를 잘라 껍질을 벗기고 표면을 다듬어 불에 구워 코뚜레 틀 을 잡았다.

마을 주민들의 도움을 받아 소두마리를 소나무에 매달고 노간주나무 한쪽 끝을 송곳처럼 깎아 소코를 뚫어 코뚜레를 끼웠다. 발버둥 치든 소의 포박을 풀고 고삐를 소나무에 메어 놓았다.

마을주민들은 집지을 나무를 잘라오고 집터를 다지고 야단법석이었다.

목수 이었든 양수와 상기 진수도 두 마리의 소를 몰고 신갈나무가 있는 용각지에서 기둥으로 쓸 7자(尺) 길이로 나무를 잘라 소 길마의 거지게에 묶어 운반하였다.

5일 걸려 나무는 잘라 운반을 마쳤다. 두 마리의 말 잘 듣는 소덕에 수월했다.

배는 파손하지 않아 손도키나 망치 등 다양한 연장이 남아 있어 다행스러웠다.

나무껍질을 벗기고 길이를 맞추어 홈을 파고 다듬었다,

주춧돌을 깔고 기둥을 세우고, 대들보를 맞추고, 문틀과 칸막이 기둥까지 하고서야 집 모양을 갖추었다. 비를 대비하여 석가래 를 올리고 대나무로 지붕을 엮고 염전에 있는 갈 때 발을 그 위에 올려 황토를 발랐다. 황토가 마를 동안 지난해 남은 갈대로 발을 촘촘하게 만들어 지붕을 마무리하기로 하였다. 황토에 물을 뿌려 수시로 밟았다.

 

29)

왜군은 단숨에 부산진성을 점령하고 왜관의 도움으로 별 저항을 받지 않고 수영 성까지 도달하였다. 수영 성을 함락시키고 군을 재정비하였다.

전투부대는 북진을 계속하며 큰 항쟁을 받지 않았다.

수영성에서 점령지를 관할하는 기시(岸)대장과 고이소(小磯)부 대장은 성격이 포악하고 주색을 즐기는 전형적인 왜놈이었다. 침략군에 빌붙은 몇몇 관리들은 아부하기 시작하였다 .

일패 기생을 소개하고 이름난 요정을 찾아가며 비위를 맞추기 시작하였다.

점령지가 평정되고 주민들도 생업에 돌아가는 분위기를 감지한 고이소(小磯) 는 왜관 통역관과 조선 관료 몇몇을 불러 들여 경치 좋은 곳을 물었다 .

통역관은 금정산을 추천하였다. 깊은 뜻이 있었으나 이루지 못하였다. 금정산성에 서 기회를 노리는 많은 조선 병사들은 북으로 걸음을 재촉하였다.

의심이 많은 기시(岸)는 산보다 툭 트인 바닷가를 선호하였다 .

언제나 전쟁이 나면 간신이 있기 마련 서둘러 조선 기생을 수소문하고. 한편으로 장소를 물색하여 왜군들이 흡족해하는 대마도를 바라볼 수 있는 장자산 해안가를 추천 하였다.

기시(岸)와 고이소(小磯)는 부관과 오장등 오륙 명을 대동하고 조선기생 남이와 경아를 포함한 5명과 악기를 다루는 일본 기생 3명을 데리고 전함을 타고 장자산해안 창바위에 정박하였다. 기암괴석이 병풍처럼 둘러서 있고 앞이 툭 트인 곳이라 만일의 경우 조선 의병들의 공격에도 안전하다고 판단한 오나이가 흡족해 하는 눈치였다. 사전에 이미 이곳을 답사하고 기시에게 상항을 보고한 오나이는 기시가 신임하는 참모였다.

장 바위에서 백 여 보 떨어진 넓은 반석에 자리를 마련하여 여흥을 즐기든 왜병들은 취기가 오를수록 짐승에 가까운 짓을 서슴없이 저질렀다.

조선기생들은 처음 당해보는 왜병의 욕구에 여자를 다루는 짓이 해괴망측하고 대담하여 어쩔 줄을 몰라 당하면서도 반항하지 못한 자신이 밉고 모멸감에 치를 떨었다.

기생들이 몸부림칠수록 술에 취한 왜병들은 미쳐 날뛰며 추행을 즐겼다.

경치 좋은 이곳에서 성전의 축하 잔치가 무르익을수록 미쳐 날뛰는 왜병들은 기생을 껴않고 돌 틈으로 하나둘 숨어들었다.

기시(岸)대장과 고이소(小磯).는 신라의 안압지처럼 큰 돌개구멍에 바닷물을 넘치도록 퍼붓고 술잔을 띄우며 즐기는 독특한 술버릇이 있었다.

물에 띄운 술잔을 부채로 바람을 일으켜 잔이 자기 앞으로 밀려오면 옻을 한 겹씩 벋기고 좋아 날뛰는 것이었다. 선돌의 그늘이 길어질 무렵, 술이 거나하여 기생의 부축으로 간신이 걸을 정도 이었다.

눈은 반쯤 감긴 채로 윗옷은 풀어 흐느적거렸다 .상투가 반쯤 풀어져 한쪽으로 기울어져 눈꼬리가 더 날카로웠다.

바다에는 북쪽으로 올라가지 못한 가마우지가 뒤엉킨 괭생이모자반 사이를 들락 그리며 고기를 물고 고개를 좌우로 흔들어 머리부터 꿀꺽 삼키고 자맥질을 계속하고 있었다.

기시(岸)와 고이소(小磯)는 기생의 부축을 받으며 동해바다를 바라보며 몸을 빙글빙글 돌리며 오줌을 누기 시작했다.

이 순간 두기 생은 치마를 풀어 외장을 감사며 게 눈 감추듯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가마우지가 놀라 머리를 곤두박질하며 어디론가 사라지고 허우적거리는 왜장과 두기생은 몸부림을 쳐보지만 긴 괭생이모자반 덩굴은 팔다리를 친친 감았다.

몸부림도 잠시 엎어진 자세로 반쯤 물속에 잠긴 4구의 주검은 파도에 덩실덩실 춤을 추듯 일렁거렸다 한 기생은 오장 요나이 (米內)에게 폭행당하며 이 순간을 지켜보다 아! 하고 소리를 질럿지만 숨 가쁜 오나이는 체중을 싫어 더욱 힘주어 기생을 안았다.

바위를 처박는 파도소리만 들렸다.

두기생과 기시(岸) 대장 그리고 고이소(小磯)부대장이 괭생이모자반 위에 떠있는 것을 본 것은 30여분이 지나서 요나이 (米內) 오장이발견하였다.

요나이(米內) 오장의 고함소리에 부관과 참모가 옷을 걸치며 달려오고 전함의 병사들이 모여들어 시신을 수습하였다.

그리고 서둘러 조선기생의 시신은 남겨두고 본대로 돌아갔다.

 

   

*1)기시(岸) 란 성은 임지왜란 이기대 반석 언덕에서 기생을 추행한 것을 숨기고 공을 세웠다고 기시(岸) 라하였으며 일본 56대 기시 노부스케(岸 信介)와 같은성씨이다

2)고이소 (小磯)란 성도 임진왜란 이기대 반석 물가에서 기생을 추행하다 죽은 것을 전공으로 기록하여 그 후 고이소 (小磯)라 하였으며같은성씨로 대표적인 인물은 41대 총리 고이소 구니아키(小磯 國昭)가 있다

3)요나이(米內)란 이름도 임진왜란 이기대에서 아름다운 기생들 틈에서 추행을 하고 문책이 두려워 간부들과 입을 맞춘 전형적인 간사한 왜놈이었다. 그러나 그 또한 인품에 어울리는 요나이(米內)로 일본37대 총리 요나이 미쓰마사(米內光政) 와 같은 성씨다

 

30)

이들은 치열한 전투중 기생과 축하잔치를 하다가 물에 빠져 죽은 것이 밝혀지면 문책 당 할 것이 두려워 입을 맞추어 실족하여 죽은 것으로 보고하기로 하여 남은기생들도 무사하였다.

4월25일 남이와 경아 두 기생이 기시(岸)와 고이소(小磯) 부대장과 바다에 뛰어 드는 것을 지켜본 기생은 마을 주민들에게 알리고 반석에 있는 두기생의 뒤처리를 부탁하고 눈물을 흘리며 돌아갔다.

  기생은 철따라 농사짓는 법을 가르치고 홍수와 가뭄을 대비하여 관계시설을 만들어 해마다 풍년 들게 하고 농번기가 끝나면, 물때를 정확히 맞추어 바다에 나가 그물을 치게 하니 언제나 만선으로 돌아 왔다,

해풍에 약발이 오른 초목으로 병든 마을 사람들을 치유토록 하였다.

밤이면 마을 사람을 모아 글을 가르치니 기생은 마을의 촌장이며 의사이고 신(神)이었다.

주민들은 1592년4월27일 두기생의 시신을 수습하여 동해바다가 가려지는 작은 등뒤에 상좌에 남이기생을 그 아래 동생 경아의 무덤을 만들었다.

기생에게 점잖게 뭔가를 설명하든 풍채가 크고 수염이 긴 어른은 보이지 않았다.

   두기생을 보살핀 그분이 이 마을 어른인 원실공이었다. 이번 전투에서 다대포에서 전사 하시였다.

 

31)

어른들이 공동으로 돌아가며 집을 짜 맞추고 흙을 발라 2달 만에 열 동을 마무리 하였다.

진수는 버려진 3곳의 염전을 손보고 용두래 목줄을 바꿔 염전고랑에 물을 퍼부었다.

진수는 새로 지은 상기 집으로 이사했다 상기 집은 양쪽에 방을 두고 중간은 부엌과 외양간으로 하였다 두 마리의 소를 밤이면 몰아넣었다.

살림집이 구색을 갖추자 양수는 윤옥과 진수의 혼인을 서둘렀다. 뜬소문에 시집안간 처녀를 왜놈들이 데려간다는 흉흉한 소문 때문에 윤옥이 두문불출하고 있었다.

양수와 상기는 7월 초순에 혼례를 시키기로 약조를 하였다.

진수는 방을 깨끗이 청소하고 신혼살림에 대비하여 며칠 밤을 고민하고 있었다.

먹고살 양식을 자급하기위해 재석곡 푸서리를 논으로 경작하기로 결심을 했다.

쟁기와 멍에를 만들 줄 아는 분이 있어 부탁하고 수로를 어떻게 해야 할지 곰곰이 생각했다 .

아침이 밝자 윤옥이 검은 수건을 쓰고 아낙처럼 엄마 옷을 입고 진수와 논밭 예정지로 갔다. 윤옥에게 설명하고 논물 수로를 어떻게 할지를 의논했다.

간단한 답변을 했다 논보다 높은 곳에서 고랑을 파면된다고 쉬운 문제를 염전의 용두래 질에 매달려 생각을 하지 못했다.

7월초에 제석곡 제석당(帝釋堂제석신앙 의 천왕제석을모시는곳)  옹달샘에 정화수를 올려 놓고 삼불제석님(산신제석.용신제석.부루제석) 을 청하여 오신하며 양가 가족 앞에서 혼인을 하였다.

짧은 시간에 마친 결혼식이지만 둘은 너무 행복했다.

그 다음날 두기생의 무덤을 찾아 그리움에 한참을 울었다. 목이 메어 윤옥이 한동안 쉰 소리에 기침까지 했다. 다행이 각시가 알려준 잔대를 끓여 마시고 아름다운 본래 목소리를 찾았다.

다음날부터 4개의 염전 일을 하고 소를 몰고 논을 만들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날이 밝자 일찍부터 돌을 주워 옮기고 두마지기 논을 만들 준비를 시작했다.

때맞추어 쟁기와 멍에가 만들어 졌다는 연락을 받았다. 소등에 길마를 얹고 꼬리와 목줄을 껑거리막대 에 매고 쟁기를 가지고 왔다.

밭을 갈며 돌을 골라내고 평지 작업을 보름 만에 4마지기를 만들었다. 두 살 많은 윤옥이 손등이 터지고 피가 마를 날이 없었다.

길들이지 않은 소로 밭갈이는 고행 이었다, 그러나 갓 뚫은 코뚜레의 고통에 소도 잡생각하지 않고 시키는 대로 우왕좌왕 하긴 해도 순순히 따랐다.

상기 형의 도움이 껐다, 소를 교대로 부릴 수 있도록 꼴을 베다 소를 잘 먹여 가능했다.

다음날 비가 왔다 하늘에 계신 남이와경아 자매가 돕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

 

32)

논을 써레질하고 논두렁을 밟아 올리고 물이 세지 않도록 구석구석을 살펴봤다.

상기 형과 장인어른도 걱정이 되어 올라 왔다. 쉬어가면서 하라고 고생하는 딸이 안쓰러워 어쩔 줄을 몰라 한다.

8월에 논을 마무리하고 옆 비탈을 밭으로 개간하기로 윤옥과 뜻을 같이 했다.

올해는 논농사를 할 수 없지만 가을에 보리씨를 파종하여 보리농사부터 하고 개간할 밭에 채소를 심어 농사 경험을 얻기로 하였다.

진수 윤옥과 나란히 누워 내년에 이밥을 먹도록 열심히 하자며 윤옥을 독려하고, 볍씨를 구해 4월에 직파하기로 하였다.

이틀간 장대비가 내렸다 신 혼방 구석에 간혹 물방울이 떨어져 함지박을 바쳤다.

아침 하늘이 푸르고 하얀 구름이 빠르게 흘러간다. 염전에 가서 고랑의 물을 빼고 밭 을 개간하러 진수가 먼저 올라 왔다. 한나절 돌과 자갈을 주워내고 잡목도 뽑았다 .

마을은 유행처럼 밭을 일구고 잘살아 갈 꿈에 부풀어 있었다.

전쟁 중에도 물 소금을 생산하고 보리농사며 제법 쌀농사 흉내로 수확이 좋았다.

진수의 첫딸은 쌀미음으로 이유식을 하며 자랐다.

볏짚으로 지붕도 덮어 비도 새지 않았다.

 

33)

조선의 정치권력 무능과 기강해이 편당정치가 불러온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7년 동안 백성은 고통과 수난(受難)의 세월 이었다. 결국 조선은 폐망을 자초하였다.

기축년(己丑年)1589임진왜란이 일어나기 3년 전 새벽안개 속을 바삐 걸어오는 사람이 있었다.

조선 침략의 일등공신, 남이기생집에서 처음 본 승려 겐소(玄蘇)였다

승려의 신분으로 조선 왜관에 잠입하여 조선팔도의 군사시설. 관청의 규모 산과강의 높이 ,각 마을의 인구수, 봉수대의 위치 등을 샅샅이 조사해서 만든 지도를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에게 받쳤던 인물이다.

그는 풍수지리에도 뛰어난 인물이었다.

어느 3월 새벽 동 틀 무렵 동래부의 군사요충지 좌수영을 살피기 위해 해운대 큰등(장산)에 올라 수영강과 해안선을 두루 살피다 깜짝 놀랐다.

하현달이 수영만 검은 바다에 용의 비늘처럼 퍼져

용(龍)이 마을 을 감싸고 용틀임 하고, 곧 승천 할 형국임에 놀랐다.

동이 트자 은빛 바다는 금빛으로 변하여 하늘로 퍼져 갔다.

아 조선은 .......무슨 생각 을 하고 있었을까?

승려 겐소(玄蘇)의 용호 풍수지리경은 다음과 같았다.

용의머리는 동산(瞳山)에 두고 북향 을 향해 용설(龍舌)은 동산 끝에서 섶자리를 휘감아

드넓은 은빛 바다를 향하고 있다 .

동틀 무렵 용눈(龍眼)은 瞳山(동산) 지금의 백년사 터 아래 금빛으로 변하고 지금의 각시당 은 수심에 젖어 그늘져 있었다.

수장산은 이 마을에 액운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감추고 있어 명당 이었다.

 

34)

임진년 4월3일 왜란이 일어나기10일전 대마도 도주 소오요시토시(宗義智)는 그들의 대장(隊長)이자 장인(丈人)되는 고니시유끼나가(小西行長)앞에 조선 지도를 펼쳐 수장산 골짜기를 가리키며 이곳 마을은 그냥 지나치라고 대장께 잘 말씀 드리라며, 겐소가 부탁하드라고 전했다.

고니시 유끼나가는 부리부리한 눈이 튀어 나올 듯이 펄쩍 뛰었다.

수장산 자락(용호포구)에 제1진 18,700 여 병력 중 최 첨예 군인과 군수 일부를 숨겨 놓을 군 기지로 계획 하고 있는 터였다.

“그 놈이 !이유가 무엇 이냐?

이유는 묻지 말라 했습니다.

튀어 나올 듯한 눈동자에 붉은 핏발이 섰다

“그래 내가 그 마을 을 쑥대밭으로 만들고 말거야!

가톨릭 신자인 고니시 유끼나가와 불교신자 겐소 와의 종교적 갈등 이었다.

겐소는 명당에 피를 뿌리고 싶지 않았다. 조선전쟁 7년동안 조선의 정보를 성심껏 유끼나가에게 제공한 대가로 결국 겐소의 부탁을 들어 마을은 불태웠지만 두 기생 과 금녕(金寧)김씨 입향조(入鄕祖) 호조참판 원실공(元實公)외는 변을 면한 셈이다.

겐소는 두 기생이 변을 당한 것을 안 것은 5년 후였다

명당 용호(龍湖)에 악행(惡行)을 저지르는 것은 조선정벌(征伐) 실패의 시초가 될 것이라고

우긴 것은 두 기생에 연민의정을 품은 것도 한 이유였다.

그리고 동산의 용(龍)아가리에 군영을 설치하면 한 잎에 죽을 것이라는 겐쇼의 충고에 고마워 한 것은 바둑을 좋아한 유끼나가의 판단에 도움을 주었기 때문 이었다.

 

35)

임진년 4월13일 누렁이를 앞세워 왜병을 정탐하다 숨어 있던 석굴을 각시 당이라 하며 4월25일에 제를 올리고 어민들이 배를 진수 하면 오방색과 흰 소복을 만들어 각시 당에 바쳐 바다에서의 무사를 비는 곳이기도 하다.

마을사람들은 기생의 시신을 수습한날 해마다 4월25일이면 마을 수호신이며 의기(義妓)로써 자존심을 지킨 조선의 각시로 추앙하며 정성들여 무덤을 관리하고 이밥과 봄나물을 차리고 정성껏 두 기생을 추모 하였다. 전쟁이 끝나고 2년여 경과한 신축년(辛丑)1601년 4월 25일 동래부 기생들은 수장당한 병사들 과 두기생의 영혼을 달래는 무혼 굿을 하였다. 그곳이 훗날 이부지라 부르게 되었다.

오랜 세월이 흐르고 서야 두기생을 추모하며 이기대(二妓臺)로 고쳐 불렀다.

주민들은 기생이 일러준 지명을 잊지 않고 사백여년을 구전(舊傳)하며 경술년(庚戌年)1910년 8월29일 한일병탄 이 시작 되자 각지명은 뚜렷이 상기(想起) 되었다.

염전 섯등(盆)이 있다고 하여 분포(盆浦)또는 분개 라는마을 명을 용호동으로 동산(瞳山)은 동광이 발견되자 한때는 동산(銅山)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동산의 두 봉우리 사이를 목등 이라 하고 그 아래 바닷가를 목너머 라고 불렀다.

 

36)

장자산 정상의 오해야항(吾海也項) 봉수대 10여보 아래 봉수지기의 우물인 작은 옹달샘은 개인 신앙으로 음력2월 영등할머니(2월할만네)인 풍신(風神)이며 2월내방신에게 올리는 장독 대 정화수(井華水) 이었다. 애석하게도 주민이 늘어나자 급수 시설이 부족하여 옹달샘이 있는 원천 마다 파이프를 매설하여 수맥이 막혀 그 기능을 상실하였다. 그래도 매년 옹달샘을 청소하며 그 물길이 되살아나길 기원(祈願)하고 있다.

봉수대는 2차대전 막바지 연합군이 일본 본토를 공습하자 장자산에 대공 탐조등을 설치하면서 토담 오해야항 봉수대는 명을 다하였다. 오래도록 봉수터에 사금파리며 조개껍질이 널브러져 봉수지기의 애환(哀歡)을 느낄 수 있었다

용(龍)가슴에 산신과 삼불제석님을모신 제석곡(帝釋谷)에는 산신제석.용신제석.부루제석님을 청하여오신하며 복을빕니다..

땔감이 풍부한 너덜겅 꽃밭등 에도 일본고사포 기지가 있었다, 지금도 군사기지로 국토수호의 의지를 불태우고 있다 .

동산 말에서 한고비를 넘기면 못난이골짜기라는 기암절벽이 작은 암자를 바치고 있다.

1920년경 박 씨 총각과 혼인하여 신혼단꿈이 피기도 전에 봄기운에 들뜬 새댁은 가막살나무 꽃 향에 취해봄 나물을 캐다 절벽 아래로 실족하여 주검이 되었다.

못난이 별칭을 따서 이루지 못한 새 각시의 애절함이 묻어나는 이 절벽 아래 출렁다리는 가슴을 도려내는 슬픔을 더 한다.

진수가 윤옥을 위해 삼베바지 올이 메어 지도록 약초를 캐든 목너머는 젊은 연인의 사연을 아는지 넌지시 물어 보고 싶다.

진수와윤옥이 생각에 입가에 침이 고였다 .

 

37)

그 옛날 왜란으로 전장에서 고귀한 목숨을 바친 영혼과 이 마을 수호신인 남이와경아 두 기생의 슬픈 이야기가 깊이 새겨진 이기대, 물안개 속에서 그들의 모습을 찾아본다. 울창한 오십년 우열을 가리기 힘든 동갑내기 송림과 참나무사이를 지나, 외롭게 이기대 바닷가 해안을 지켜본 외솔, 낭끝을 지날 때는 목너머 에서 날 부르는 소리가 하얀 포말에 부풀려 들린다.

큰 치마폭을 펴고 앉은 이 여인의 마음이 얼마나 크기에 해가 뜨면 찾아오는 수만은 태공들을 치마폭에 담고도 자리가 남은 치마바위의 훈훈함이 세상 사람들의 귀감(龜鑑)이 아닐까?

반석이 기울어져 파도가 바쁘게 미끄러지는 이곳이 옛날 산중턱을 개간하여 채소를 심든 윤옥이 생각나듯, 물질을 하며 산중턱을 보고 밭이 보이는 골짜기라 밭골새라 불렀다니 사백년 이 흘러도 산천을 보는 마음은 변함이 없어라.

밭골새를 넘어가면 진수와 윤옥이 혼인한 제석곡 옹달샘은 지금도 샘물이 용천 한다

샘위의 제석암에는해마다 9월9일이면 천왕제석인 산신제석.용신제석.부루제석님을 청하여 오신하며 정성들인 재수를 올리고 명과 복을.빌었다

태고부터 억새가 임을 기다린다면 농바위를 따라온 숭충(嵩蟲)(숭충골)은 지조 지킨 갈대 갔다.

수백 년 전부터 전란으로 수많은 여인들이 참담한 수난(受難)을 겪었다.

부질없는 한 목숨 지키려고 젖먹이 자식이 떨어져간 빈 포대기를 두 손으로 쥐어뜯으며 오열하는 쪽진 우리민족 한의 어머니가 동해바다가 가로막은 막다른 이곳에서 넋을 잃고 ,

고난과 역경을 똬리의 크기로 항변 하고 있다.

남이와 경아 두기생의이야기부터 가까이는 동족상잔의 전쟁 이야기까지 들려주는 농바위를 해녀들은 큰 옷장에 한이 맺혀 농(籠)바위라 불렀을까?

 

이기대 장바위 석벽에 음각으로 새겨진 이기대는 1850년 이전에 새긴것으로 확인된다

가) 1850년 경상좌수사 이형하(李亨夏)가 내영지(來營誌) 산천조(山川條)에 이기대를 설명하기를(左營南十五里이기대 上有 二妓塚云)라 장소와 기생묘지로 추정되는  두기의 무덤이 있다는 것 이외 상세한 자료는 없었다. 좌수사이형하는 동래부 관료들과 이기대 주변마을 사람들로부터  석벽에 새긴 이기대 위쪽산에(上有)두기의 기생무덤이있다하여 확인하였으나  기생의 무덤으로확인할 비석 조차 없어 총(塚)이라고만 기록하였다.

   

나)최한복(1895-1968, 수영 향토사학자)수영팔경(水營八景) 중에 남양낙안(南陽落雁)

석양 비낀 양장로 신선대 찾아가니 신선이 안재재오. 빈배 홀로 뿐이로다.

오륙도 곁에 두고 경치 좋아 내려가니, 절벽 거꾸러진 곳이 창해가 지척이라.

석벽에 새긴 글자 의기대(義妓臺)가 여기로다. 의기의 천추 원한 망경대 전 백마탄과 박모에 울어있다.

(석벽에 새긴 글자는 이기대(二妓臺)로 향토사학자 최한복의 의기대설은 현장을 가보지 않고 풍문을 기록한 것으로 추정됨)

 그당시의 향토사학자 최한복도 석벽에 이기대라는 글자가 있다는 풍문을 듣고  위와 같은 시를 남겼을것이다

 

 

38)

숨이 차 가슴이 아파온다 .어느덧 용각지(장자등) 왜놈 침략의 피난지로, 문둥이라 천대받으며 격리되어 숨어살든 곳, 깊은 첫사랑에 당황하여 달음박질하든 진수와 윤옥의 모습이 아른아른 눈물이 묻어나는 용각지. 큰 나무 가지에 이끼가 주렁주렁 매달려 물안개가 쉬다 간 자리는 하늘을 찌르는 높은 빌딩 숲이 대신한다.

빌딩 사이로 윤옥이 부르는 소리가 갯바람에 울림이 되어 그 자리에 영혼으로 남아 있다.

용호동의 전설과 관련이 있는 오륙도 6섬은 나름대로 이름을 가지고 태어났다.

바다 길을 지키는 육지와 너무 멀리 밖에 나와 있어 외자 이름을 받은 밖 섬,

짓궂은 파도의 놀이터로 구멍 뚫어 숨바꼭질하든 굴 섬과 작아도 친구인 송곳 섬의 철없는 놀이를 좋아한 가마우지의 배설물이 하얗게 분칠을 했다.

희망이 부풀고 그리운 임을 찾아 승천할 꿈을 잃은 용의 한이 서린 수리 섬

본래 수리 섬은 지금처럼 누워있지 않았다고 한다. 수리병의 손잡이가 온전하여 언제든지 병을 들어 불로장생수를 마실 수 있었다고 한다.

용각지 앞 잘록개가 용의 앞발이라 승천을 위해 발을 벋어 수리 병을 잡으려다 급한 마음에 손잡이가 떨어져 병을 엎질렀다고 한다. 옥황상제 깨서는 얌전한 용을 원하여 손잡이를 약하게 만들어 차분한 성품의 용을 선택하도록 하였다고한다.

인간이 살면서 꼭 익혀야할 덕담이 아닐까?

육지와 가까운 곳에 소풀섬이 있다. 그리고 좀 떨어진 곳에 거미섬이 있다

동쪽을 바라보면 6개의 섬이며 서쪽에서 바라보면 잘록개에 가려 거미섬이 보이지 않아 오륙도라고 하였다. 거미섬은 대조기 간조 때는 물길이 열리고 밀물이 밀려오면 길은 바다 속으로 잠긴다.

그러나 구전(口傳)의 흐름으로 우삭도(又削島)와 소나무만 있다고 솔 섬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소풀 섬에는 합환수(合歡樹) 자귀나무가 울창하여 여름이면 붉은 자귀 꽃이 피고 나비 벌 울음소리가 육지까지 들렸다고 한다. 신혼부부들이 유월이면 방패 섬에서 해 뜰 무렵 소풀섬을 향하여 기도 하면 백년해로(百年偕老) 한다는 전설을 만들었다. 자귀나무의 열매가 가을바람에 조잘조잘하는 여설수(女舌樹)를 아내의 잔소리로 비유하여 싫어했다고 한다.

비용개를 용대(龍臺)라하며 신선대의 대붕산(大鵬山)과 비룡산(飛龍山)의 거미섬까지를 비용대라고 하였다

飛龍臺는 중국의 명산 황산의 안개에 버금가는 해무가 비용고개를 넘나들고 아련한 남해바다 대붕산과 비룡산 저 멀리 조도와 태종대 파도소리가 산울림처럼 묻어오는 몽돌의 소리를 신선의 풍악이라 하며 해무 속을 용이 승천한다하여 비용대라 하였다.

그 앞산 천주교 묘지가 있는 산을 비룡산(飛龍山)이라 한다.

백운포라는 지명은 포구가 아니지만 늦봄과 여름이면 남해의 운해(雲海)가 비용고개를 넘어 마을로 넘어 오는 장관을 백운이라 하였고 옴팡진 곳이라 포구로 인식하여 백운포라 하였을 것이다.

용의 승천몸부림이 촌각에 달하자 태종대에서 풍월을 즐기든 신선 최치원이 황급히 뛰어 붕새의 발목에 매달렸다. 얼마나 화급했으면 태종대 앞바다에 이 떨어지고 대붕산(大鵬山) 자락에 탕건이 벗어지는 수모를 당했다.

뒷발의 돋음으로 (塘)이 생겼지만 용은 승천 하지 못하였다.

옥황상제가 붕새를 보내 신선을 불러 들여 미아는 면하였지만 갓과 탕건과 수리 병은 돌이 되어 파도에 시달리며 옛 영광을 그리워한다.

마을 지붕을 덮든 굴참나무군락지 대붕산 아래 용당(龍塘못), 용당동 을 향하여 큰 바위 아래 우물이 있는 제법 넓은 집터가 있다 .

.그 자리가 용당지(龍堂址)라고 한다. 그 당이 언제까지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이곳 큰 바위를 무제등이라 하였으며 해안가 울창한 송림을 신선대라하였다.해안가 큰 바위에 신선의 발자국과 신선이 탄 붕새의 발자취가 있다 . 그러나 웅대한 바위에서 신선의 흔적을 찾기는 쉽지 않을 것 같다. 옛날 선행을 쌓은 천선(天仙), 지선(地仙), 시해선(尸解仙), 이들 삼선의 선인(仙人)들이 이곳에서 주연을 베풀 때면 풍악소리가 용당포까지 들려왔고, 신라의 대학자 최치원과 많은 선인들이 여기서 신선으로 화했다는 전설도 남아 있다.

무제등 에서 신선이 활소기를 하다가 부러진 화살을 버리고 간 자리에 뿌리가나고 잎이 자란 나무가 화살나무라고 한다. 무제 등에는 3월에 노란 꽃이 피는 개 동백 생강나무와 화살나무가 바위틈에 자생하고 있다.

돌 틈에는 사방 한자정도의 샘이 있다. 이 샘을 유하정(流霞井)이라고 하며 유하수를 마시면 전설의 유하주와 같이 오랫동안 목마르지 않았다고 하여 많은 사람들이 이 샘이 있는 무제등을 찾았다고 한다.

 

39)

두기생과 윤옥이 봄이면 산나물을 캐든 신용산은 용의 자궁자리, 훗날 보오지산 또는 배가 불러 온다고 봉우리 산이란 별칭을 얻기도 하여 지금도 불러주고 있다.

진수의 눈의 외도가 싹튼 양지쪽에는 북동쪽을 향한 파평(波平) 윤(尹)씨 선영이 자리하고 있다. 반대쪽 용의 가슴자리에 개성(開城) 왕(王)씨 선영이 남서를 향하여 있다,

왕 씨와 윤 씨는 집성부락의 자존심이다. 용호동에 정착하신 첫 왕씨 신랑부인이 파평 윤 씨, 그래서 윤 씨들은 왕 씨를 외손이라고 하여 친족이상으로 관계를 유지 하고 있어 타 성씨의 모범이 되고 있다.

용의 생식기는 밤나무 숲이 우거진 수장산 갓골이다, 지금의 동명불원자리다

1925년 용호동에 신학문의 요람지로 설립한 동쪽의 번영을 바라는 깊은 뜻의 동명학원이 최초 동명이 휘호(揮毫)였다.

갓골에서 석포를 거쳐 황령산에 걸쳐있어 백두대간의 정기를 받았다.

축성을 쌓아 동래부의 목초지로 상기와 목부들이 우마(牛馬)를 기르는 곳이었다.

용의꼬리(龍尾)는 수장산(水藏山)이라 호(湖)의기(氣)를 감추고 있다 .승천의 몸부림으로 수장끝에 소(沼늪)가 생겼다 지금도 별칭으로 용소(龍沼)라 한다

용호 나들목은 수장산(水藏山)을 휘감아 용설(龍舌)이 출렁이는 바다를 타고 들어 와 액운이 범접하지 못해 우환이 없었다.

영재가 물놀이하고 뛰놀든 넓은 웅덩이는 용각지와 재석곡 맑은 물을 모아 소랑 강으로 변하여 추억을 만들고 오랜 세월 지쳐 그늘 진 복개 천에 숨어 그 이름 잊고 용호천이 되었다.

진수와 윤옥이 조개 잡으며 첫사랑을 이룬 섶자리 터에 공장이 들어와 큰 기업으로 성장하여 타지로 떠나고 그 자리에 대단위 아파트가 자리하여 명당이란 소문에 텃세가 올라 용설(龍舌)임을 확인시켜주고 있다.

용호 해안 지형은 아름답고 갈맷빛 푸른 숲길과 툭 트인 은빛 조각물결이 푸른바다를 조망하여 갈맷길은 이제 이지방의 자랑을 넘어 전국투어가 되었다.

출렁이는 이기대 구름다리를 지나면 가슴은 두근두근하고 울창한 송림에서 풍기는 달콤한 향기는 그 옛날 애달픈 사랑이 파도에 부서진 바다조각에 담겨와 진수와 윤옥의 사랑에 파랗게 날마다 덧칠 한다.

남이와 경이 두 기생을 추모하든 음력 4월 세월이 흘러도 같은 달 기원제로 변하여 사백년 세월 명맥을 이어 오고 있다 .두 기생의 묘를 벌초하고 동래온천장과 충무동 권번(券番)의 기생들을 불러 의기(義妓) 두 기생을 위로하는 왕기세(王基世)옹과 윤광주옹 무연할배등 어른들은 해마다 자랑스러운 조선의 각시를 잊지 않고 후손들에게 일깨워주신 선조들에게 깊이 감사하며 지난 역사를 되새겨 기록하여 후손이 조상들이 하였듯이 오래도록 기억하였으면 한다.

용호동 ,이기대 스토리텔링을 마무리하면서.

50년 전부터 어른들로부터 들어온 이야기를 오늘에야 정리하면서 벌써3,40년 전에 돌아가신 분들이 생각난다. 마지막 남은 망백을 보낸 나의 아버지가 살아온 꿈같은 이야기, 농사일에 사용한 농기구 까지 아직도 잊지 않고 일러 주시는 덕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

고인의 명복을 빌며 그분들의 증언이 없었다면 우후죽순처럼 글 쓰는 이의 창작물이 지명이 되고 회자(膾炙)되어 역사에 기록되는 것을 막을 수 있었으면 한다

압축하여 용호동 이야기를 정리하고 다음세대에 압축을 풀고 맛깔스런 이야기가 더해지기 바라며 끝을 맺는다.

(王正文)

 

(지명 설명)

 

신용산(神龍山)-용호동과 용당사이의 산 일명 보오지산,봉우리산이라고도함

수장산(水藏山)-LG메트로 남쪽산 동네를 감추어 보호한다는의미

말체나무-우마를 몰아가는 회초리용 나무이름

새-억새,기름새,쥐꼬리새와같은 벼과식물중 소가 좋아하는풀

송피밥-소나무 속껍질을 다져서 곡식과 같이 하는밥

느릅나무뿌리겁질(楡根皮)-항암및구충항진효과의약초

서슬-진한소금물, 물소금, 간수는 일본식표기

염소고(鹽燒藁)-물소금을 끓여서 마른 소금을 만드는 것 소금은 88도에서 끓기시작

용각지(龍胳地)-용각은 용의 겨드랑이를말하며 한센농장(SK뷰)과 문서보관소자리 훗날

장자등이며 포대가 있어 구남이라고함

대붕산(大鵬山)-전설의 새로 신선을 태우고 수 천리를 나는 새를 붕새라 한다. 흔히들 대붕산을 용마(龍馬)라고 표기한 것은 일본 이 폄훼하기 위해 괴물 말을 비유 한 것.

호퍼-굴삭기의 버켓을 말하며 모래를 퍼 흩는 염전농기구

왕모시대-바닷가에 자생하는 일종의 모시풀

목등- 산과 산이 연결되는 골짜기의고유명사

말오줌대나무-여성병,생리통등의 치료약재목

음식을 익힐 때 버드나무 가지를 깔고 하면 아스피린효과로 혈관을 확장하고 혈액순환을

촉진 한다.

동산말(瞳山末)-잘못표기하여 동생말 이라고 함

신갈나무-참나무의 일종으로 미국이 탐내어 우리나라 신갈나무를 개량 하여 가로수종으로

숭충(崇蟲)-큰 벌레처럼 생긴 돌 그 돌이 있느 골짜기를 숭충골이라 한다

잘록개-작은산이 잘록하게 생겼다고 함 (승두말은 잘못된표기) 일제가 육상에 전함과 똑같이 포를설치하여 구남이라하였다

우식도(牛食島)- 소가 잘먹는 소찰밥나무가 있다고 하여 소풀섬 또는 우식도라 하였음

우삭도 (又削島)-해식애를 말하며 연안의 바위들은 대부분 해식애 우삭섬이다.

갈맷길-갈매기와 갈맷색(푸른색이 검개 보일 정도의 색)의 이중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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