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사

염전의 유래(전통산업)

아지빠 2013. 5. 3. 17:22

 

 

 

 

2).일제 침탈기(사회역사)

경술년(庚戌年)1910년 8월29일 한일합방으로 일본 침탈(侵奪)시대를 맞이한다.

일제(日帝)는 수많은 역사자료 와 유적, 유물을 침탈하고 정신까지 폐해 시킨 전례와 같이 유제염전 방식의 제염생산(製鹽生産)의 요지(要地)분개(盆浦)의 이권(利權)을 그냥 둘리가 없었다.

조선침탈(朝鮮侵奪) 준비 중 1903년 시모노세끼에서 조선 해수산조합 창립총회를 하였다. 1907년에 일제통감부(日帝統監府)는 조선해수산조합본부에 시험제염용호출장소(試驗製鹽龍湖出張所)를 설치하여 유제염전 전오제염 2町3段7畝13步(23,633㎡7,150평)염전(鹽田)에 조선염전과 절충염전 일본염전으로 시험생산(製鹽試驗) 을 시작 하였다. 조선염전은 지금의 태광아파트 장자산자락, 절충식염전은 환경공단 , 일본식염전은 LG메트로부근 용호176번지일원 이었다고 한다.

그 후 일본인들은 용호초등학교 북쪽에서 옛 주공아파트 자리까지 4개의 염전이 있었으며 조선 해수산 조합 남쪽과 동쪽 바다를 메워 염전으로 하였다. 그곳이 해방 후 이규정씨와 박두상씨가 운영하였다 그러나 박두용씨가 염전소유주라고도 한다. 그 당시 일본인들은 거분,신분.강개분.보리분.광계분.동분이참고:해수중에 녹아있는 주요 염류의 각각의구성비율(%)

염화나트륨(NaS04)77.4%소금

염화마그네슘(MgC12)10.89%간수

황산마그네슘(MgS04)4.74%

황산칼슘(CaS04)3.06%

황산칼륨(Ka2S04)2.46%

탄산칼륨(CaC03)0.34%

브르민화마그네슘(MgBr2)0.23%

비중“1”은 4℃의 순수한 물의 비중

해수의 염도 3~2.8 우리나라 동해가 서해에 비해 높다

조선 초기부터 최초 1필지당 섯등(염정)이 1개 이었으나 ,1908년부터 시험제염 결과에 따라 같은 염전에30~40여개의 섯등(염정)을 만들어 동이간의 거리는 사람의 힘으로 살토를 뿌릴 수 있는 거리의 두 배 거리로 하여 작업 환경을 고려하여 생산량을 배가 하였다 .조선의 염부옥은 토부에 함수(서슬)를 섭씨88도에서 90도의 온도로 저온 가열하다, 소금이 결정되는 염도24~27이 되면 불을 약하게 하여 결정이 이루어지면 소금을 퍼내고 함수를 공급한다. 이렇게 생산하여 미네랄이 풍부한 연한핑크빛 소금이 된다.

그러나 일제는 함수를 정제하고 소금을 굽는 솥을 리벳(rivet)처리한 선철 방형 가마를 사용하여 증발량을 높여 미네랄 함유량이 높은 소금을 만들 수 있었다.

지금의 용호초등학교 까지 매립하여 약 2만3천여 평의 염전을 일구었다. 용호출장소 용호염전에서 상세히 기술하기로 한다.

오륙도 해안에 포진지를 구축하여 연합군의 공격을 봉쇄할 목적은 폐망하여 성과 없이 끝나고 흔적만 남아 있다

장자산 장산 봉에는 1942년까지 원형이 잘 보존된 토담형 봉수대가 있었다.

그러나 이봉수대가 오해야항(吾海也項) 봉수대라는 기록은 없지만 동래 공부(公簿)와 고지도등의 기록에 근접하여 오해야항 봉수대가 유력하다.

이 봉수대는 일본본토에 연합군의 공습이 시작되자 장산 봉에도 탐조등 설치공사를 하면서 봉수대를 훼손하게 되었다고 한다.

오랫동안 장자산 정상 봉수 터에 사금파리와 기와조각(瓦片)과 조개껍질이 널브러져 있었다.

한국전쟁으로 미군이 장자산 정상과 신용산 부근 에 진주 하면서 그나마 사금파리조차 자취를 감추었다

용당동에서는 신용산(보오지산)에 봉수대가 있다고 하나 용호동 주민들은 어불성설(語不成說)하다며 장자산 에만 봉수대가 있었다고 하였다. 증언하신 분 중에 99세의 王 碩鎬옹 만 생존해 있었으나 2020년음력4월8일 별세하셨다

(이미지 오해야항봉수대708101-3jpg/대동여지도 (영도)

2)근대 변천사 (사회역사)

용호동 농민들은 퇴비의 부족으로 외지에서 인분을 우마차에 담아 운반하여 삭혀 사용하였다 , 1961년부터 오물처리법이라는 최초의 환경법 때문에 분뇨를 지정한곳에 폐기하기 시작하였다. 용호동도 그중 한곳으로 지금의 현대 아파트 맞은편 해안가에 대형 콘크리트 탱크를 만들어 타지의 인분을 모으기 시작하였다.

자연 건조한 인분의 건더기를 별도로 걷어내 농지에 운반하여 퇴비로 활용하기 시작하자 용호동은 파리 때가 기승하여 똥골 동내라고 하기도 하였다.

이 퇴비로 생산한 용호동 시금치는 달작지근하다고 인기 있는 채소이었다.

한센 병 용호농장에서도 닭, 돼지를 열악한 환경에서사육하기 시작하였다

돼지와 닭의 배설물은 연안에 투기하여 바다를 오염 시키고 생산된 계란은 부산시민의 먹거리로 시장을 점유 하였다

이렇게 과도기 변화를 겪으면서 환경의 오염과 불결한 위생 상태에서도 굳건히 이겨낸 주민들의 의지가 대단 하였다. 뿐만 아니라 주민들은 소금염전의 분개. 한센병원. 똥골동네 등의 변천에도 흔들리지 않은 자긍심 강한 곳이다.

용호동은 한정된 농토에서 수백 년을 인구 및 생활수준까지 남구에서 가장 변화가 더딘 곳이라 모르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을 정도로 보수적 이었다.

북쪽 해안을 제외하고 동, 남, 서쪽이 완만한 산세에도 좁은 평지(2.2㎢)에서 농사를 고집한 흔적은 타 지역처럼 주거지나 전답이 유구한 역사동안 한 뼘도 자연을 침범 하지 않고 자연을 보존한 것에서 짐작이 간다.(조선의 호조 판적사의 생활주거정책)

오랜 세월 동안 보수적으로 안주한 까닭에 역사에 이름을 남긴 인물도 찾기 힘들다.

용호동에는 처음으로 1963년부터 의원을 개원하여 1969년 교통사고를 당하기 전까지 밤낮 구별 없이 용호동의 주치의로써 王洪權 원장의 활동에 연로하신 노인들께서는 홍권씨가 없었으면 지금까지 살 수 없었다는 넋두리로 짧은 생을 애석하게 생각하신다. 산업 활동 과 비래하여 산업재해 도 늘었지만 그 당시 는 재해를 숨겨야 하는 실정이라 병원에서 진료해야하는 어려움을 알고 많은 환자들은 돌보아 장애를 극복하도록 하였다 .

1963년 동국제강이 자리를 잡고부터 변화의 조짐이 일기 시작 한다

일자리를 찾아 이주한 사람이 본동주민보다 늘어나는 이변이 발생하면서 원 주민들은 처음으로 진보하기 시작하는 계기가 되었다 .

경제의 흐름에 조금씩 반응하기 시작하면서 처음으로 주거환경을 바꾸어 한 칸의 방이라도 새를 놓아 생활수준도 조금씩 좋아지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1966년부터 급격이 나빠지는 대기오염과 분진으로 빨래를 밖에 널 수 없게 되고, 밤마다 전로의 폭음과 전기로의 폭발성 굉음, 그리고 대형 전동기계의 구동소리가 조용한 마을을 어수선 하게 만들기 시작 하였다.

진동과, 분진, 매연. 소음이 늘어날수록 이주민도 비례하여 늘어나고, 경제조건은 향상되었으나 생활환경은 최악으로 악화되기 시작하였다.

동국제강과 부산주공이 현금으로 지불하는 월급날인 매월10일부터 10여 일간은 골목시장이 형성되고 늘어나는 술집에는 짙은 화장을 한 접대부들과 취객들의 추한 꼴이 비일비재 하여 교육환경 까지 나빠지기 시작한 것이다.

1973년부터 집단 정책 이주민으로 인구는 급속이 늘어나고 자투리땅의 채전도 찾아보기 힘들 정도의 빈 땅이 없는 석류 속처럼 빼곡한 반촌 마을로 변하기 시작하였다.

대기업이 지역경제에 미치는 파급효과는 기업의 윤리 도덕적 경영 여부에 따라 문화까지도 변하였다. 1998년 동국제강은 30여년의 역사를 마감하고 포항으로 자리를 옮겼다.

한때는 용호동보다 분개로 알려진 동이(盆)만 있는 마을

전오제염법(煎熬製鹽法)으로 소금을 생산한 염전을 갈아엎어 공장이 들어서고 그 공장이 떠난 자리에 고층건물이 하늘을 찌르고 용호 천을 사이에 두고 환경공단 용호하수처리장이 동산을 꿰뚫어 바다에 하수처리수를 방류하여 환경오염의 장소를 연안으로 돌렸다.

현재 하수처리방법은 총질소 제거율 연평균 60%~70%질소제거를 위해 적용하는 공법인

활성 슬러지 순환변법(MLE공법)으로340,000㎥/일 가동하고 있다. 2013년6월부터 2016년5월까지 막분리공정(MBR공법)65,000㎥/일 고도처리 시설을 설치 계획이다. 완공되면 MLE공법은 줄여 275,000㎥/일 처리하고, 고도 처리된물은 생태하천등에 활용할 예정이다.

용호동 하면 용호농장이 대명사처럼 인식되어 용호동을 혐오지역으로 좋은 평을 받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용호농장 주민들이 타지로 이주하고, 오륙 도 대단위 아파트단지 계획부터 부산의 관문에 아파트 가 들어오는 것을 용호주민뿐 아니라 부산 시민들도 찬성 하지 않았지만 지방분권의

역할은 구호에만 그쳐 결국 2005년 착공하여 2008년8월부터 입주하기 시작하였다

미완성 아파트 단지로 처음 계획한 조건을 충족하여 완성도 높은 주거지가 되기를 바라며,

용호동은 주거 환경영향 평가와 교통영향 평가에서도 낙제점을 받은 최악의 주거지로 알려지고 있다. 천혜의 자연경관을 자랑하지만 막다른 종착지의 교통의 흐름을 바로잡아 주민생활의 질을 높일 수 있는 마지막 희망으로 남아 있다.

용호 만에 모항 3선석( 1000~3000톤)외 기항선(3~4척)접안관광유람선 터미널건립이 4월이면 준공예정이다, 남해바다 백운포에도 해양레포츠 및 해양관광 전진기지 조성으로 해양선진도시 위상 구축이라는 이름으로 주민들의 휴식 공간이 잠식되고 주민들의 생활여건이 열악할 것이 뻔하다. 뿐만 아니라 도시화 과정에서 훼손된 자연 생태계복원 네트워크 기능 수행 사업으로 용각지(잘록개언덕해맞이공원)부근 생태광장으로 친환경시설물 설치사업이2014년에 준공될 예정이다. 주민들이 불편없이 행복한 공간으로 복원되길 바랄 뿐이다.

 

5. 염전의 유래(전통산업)

 

현재의 용호 1,3동에 자리 잡았던 분개 염전은 일제침탈기 이전 까지만 해도 행정구역상으로는 동래부 남촌면 분포리(東萊府 南村面 盆蒲里)였다. 『경상도지리지』에는 동래 현에 25곳, 동평현에 40곳의 소금 굽는 가마가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동래부읍지』역시 동면(지금의 해운대구)에 23곳, 남촌면(지금의 남구)에 31곳, 부산(동구)에 4곳, 사하에 7곳의 염분이 있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 수량은 섯등(염정盆)의 수량으로 추정되며 염부옥 시설은 몇 곳이었는지는 정확히 기록되어 있지 않다

.

구전(舊傳)에 의하면1880년경까지 분개는3개의패와 지금의 용소부락을 분개4패 또는 4분개(四盆逋) 라고하여 약40여호가 염전이나 어업에 종사하였다.

석포의 동쪽 수장산(水藏山) 자락해안가에 축성(가축이 소금을 먹기위해 염전 출입을 막기위한 석성) 이50cm높이에 폭 또한 50cm정도로 지금의 동명불원 자락까지 있는 것으로 보아 수목원 부근 까지 염전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지금의 대연천도 질 좋은 점질토의 개흙으로 바닷물이 들어왔다 나갔다 하므로 유제염전을 하기에 적당하였다. 그 후 지구의 자연 변화 등으로 염전에 다른 작물을 제배하게 되었다. 당시 지금의 용호동도 소랑강 좌우로 한마지기에 염정(동이盆)한 개씩, 이곳저곳에 염전이 흩어져 있는 갯가였다고 한다. 조선시대 선조들이 염밭 동이에서 채함 하여 가락지모양의 송진(비중계)으로 함수의 농도를 측정하여 물 소금인 함수를 생산하였다.

선조들은 토기를 이용하여 여러 동이의 함수를 모아 토부옥(貝釜屋)에서가열온도를88도~90도 유지하여 연한 보라색의 핑크빛소금을 생산 하였다. 그러나 평민은 저렴한 물 소금을 선호하였다.

물소금인 함수를 헐값에 구입하여 집에서 끓여 소금과 간수를 분리하였다고 한다

바닷물을 정제한 소금을 구할 수 없을 때 대용으로 염분을 구하려는 우리 선조들의 노력은 정말 눈물겨웠다. 특정의 벌레에서 염분을 얻는 충염(蟲鹽), 신 나물을 뜯어 독 속에 재어두어서 얻는 초염(草鹽), 쇠똥이나 말똥을 주워 다가 이를 태워서 얻는 분염(糞鹽) 등 이름만 들어도 소금을 얻는 과정이 얼마나 어려웠는지 짐작이 간다. 그러나 분개의소금은 최상의 소금이었다.

 

 

 

6)용호동 분개 염전

조선의 전통염전 전오제염

염전의 구성은 함수를 채취하는 작업 즉 채함작업(採鹹作業)과

함수를 끓이는 작업 전오작업(煎熬作業)으로 되어있다.

먼저 채함 작업의 방법 순서 등은 염전 방식의 차이에 따라 다르다. 또한 동일한 방식의 염전에서도 지방에 따라 그 형식이 다르며 그 기구의 종류 형태 명칭에도 어느 정도 이동이 있다. 그 개요를 들면 입빈식(入濱式만조때염전에 해수가 유입되는방식) 유제염전(제방이있는염전)과 양빈식(해수를 퍼올리는식) 무제염전(제방이없는염전)에서는 먼저 살토(撒砂)를 가래를 이용하여 섯등(염정)에서 개흙을 퍼내어 이것을 발채나 삼태기 에 담아 염전면의 각 장소에 옮긴 다음, 이것을 가래로 염전 바닥에 펼 친후 써레로 염전바닥을 종횡으로 끌고 돌아다니면서 살토를 고르게 편다. 다음은 예판(曳板)이나 전목(轉木)이라고 부르는 원통모양의 나무를 끌어서 모래 덩어리를 부수고 해수를 뿌린 후 다시 써레로 갈아엎는다.

다음날 다시 두세 번 써레로 갈아엎거나 예판을 끈다. 제3일이나 4일째아침에 써레로 간다.

오후에 미레(集板)로 염전 간핀 모래를 모으고 발채나 삼태기를 이용하여 이것을 섯등 으로 운반하고 서너 명이 밟아서 다진 후 해수를 부어 염도 12~15정도의 함수를 채집한다. 보통 이틀 동안 두지만 여름철에는 더 오래 두는 경우도 있다. 기타의 염전작업은 모두 인력으로 하는데 경상도나 전라도지방의 넓은 염전 에서는 많지 않지만 대부분 써레나 예판, 혹은 전목 작업은 소를 이용 하는 곳도 있었다. 혹은 살사의 반출, 살토와 수집에 목삽(木鍤나무가래)이라고 부르는 미레와 비슷한 큰 것을 소가 끌게 해서 이용하는 경우도 있었다.

채함작업 중에서 가장 기이한 것은 건조되어 염분이 부착된 살사, 즉 소위 함사(艦砂)를 그대로 쌓아서 자리(蓆)나 볏짚(藁)으로 덮고 오랫동안 저장하면서 필요에 따라 섯등으로 운반하여 채함 하는 것이다. 이러한 방법은 함경북도 강원도 경상도 전라도의 염전에서 일반적으로 볼 수 있는데 해안이 있는 곳에서 빈번하게 행해진다. 이 는 기후가 건조하고 함수구덩이가 비교적 협소하기 때문에 행해지는 것이다.

입빈식 유제염전 1종은 채함 후의 살토를 만조 2~3일 전에 나레로 섯등에서 반출하여 염전 바닥에 적당하게 살포하여 써레로 균등하게 갈아엎는다. 만조 때 해수를 충분히 스며들게 해서 만조 후 2일간 그대로 방치하고 어느 정도 건조되기를 기다렸다가 쟁기로 파서 일으킨다. 이 후 4~5일간은 매일 써레로 3~4회씩 간다. 그 사이 때때로 예판이나 나레를 끌어서 흙덩이를 부순다. 충분히 건조되었을 때 나레로 살토를 모두 섯등 속으로 모으고 , 고르게 한 후 해수를 저장소서 큰 바가지로 퍼서 섯등 속에 부어 함수를 채취한다.

넓은 염전에서는 나래, 써레, 예판의 작업에는 모두 두 마리 정도의 소를 이용한다.

때문에 살토층도 면적에 비해 많아서 섯등의 위에 거의 60cm 의 층을 이룬다, 따라서 함수가 완전히 여과하기를 기다리는 데는 약4일 내외를 필요로 한다.

채취한 함수를 물통을 지개로 운반 하든지 물독을 머리에 이고 운반하는 것이 일반적인데 ,드물게는 섯등(염정)과 함수 저장고 사이에 점질토 고랑을 만들고 여기에 퍼내어 유입하게 하는 곳이 경상남도 일부에 존재 하였다. 일제 침탈 기에 접어들면서 용호제염시험결과 섯등은 조선식으로 하고 크기는 일본

규격으로 작아지고 수량은 늘어났다. 섯등과 염부 옥까지 배관을 이용하여 높이를 조절하여 함수저장고까지 이송하였다.

 

*살토-개흙모래를 염전바닥에 뿌리는 것

*섯등-염정盆.동이.누이(ぬぃ)라고하며 여과하기위한 시설이라고 할 수 있다

*예판_넓은판으로 덩어리진 살사를 미레로 고르 염전기구

 

 

 

 

 

다음 각도의 예를 표시하여 염정과 조업을 나타 내었다 (1910년자료)

 

지명 염전의 조류 염전지질 염전1정보당염정의수 년간1정보당함량(石) 평균
비중
조업시기
경기 입빈식무제염전 점토모래 약8 1,575 20.0 3,4,5,8,9,10월
전북 입빈식무제염전 점토모래 1약19 475 15~20 4,5,6,7,9,10월
전남 입빈식유제염전 점토모래 30 2,055 20.0 3,4,5,6,9,10,11월
전남 입빈식유제염전
입빈식무제염전
점토모래 약8 1,100 19.0 1~5,8~11월
경남 입빈식유제염전 점토모래혼합 25 250 18.0 1~12월

 

 

 

염전은 무제염전(無堤鹽田)과 유제염전(有堤鹽田)으로 구분한다.

둑이 없는 무제 염전은 입빈식(入濱式)과 양빈식(揚濱式)으로 구분하며 입빈식은 제1종 입빈식 무제염전과 ,제2종 입빈식 무제염전으로 나누어진다.

제1종 입빈식 무제염전 원추 뿔 형으로 사발을 엎어 놓은 모양과 같고 중앙에 염부옥(鹽釜屋)과 섯등(염정盆)을 두어 주위의 사면(斜面)을 염전의 지반으로 한다. 지반은 점질토 이기 때문에 개흙을 뿌리는 것도 점질토인 개흙 이다. 만조(大潮)때 바닷물이 염전에 들어와 뿌리는 개흙을 적시지만 간조 때는 작업을 할 수 없어 월2회 살토(撒土)를 갈아엎고 건조 시켜서 이것을 섯등으로 운반해 함수를 채취한다. 조업 중에 만약 비가 오면 다음 만조 때까지 휴업해야만 한다. 평안도와경기도. 충청남도. 전라북도의 염전이 이러한 방식으로 월2회 조업 하였다.

제2종 입빈식 무제염전 제방을 설치하지 않는 염전으로 사토질의 해빈에서 행한다. 만조 시에 조수가 밀려들어와 살토(撒砂)를 적시도록 하는 것과 간조 시에 갈아엎어서 건조시켜 일반적인 방법으로 채함(採艦)을 하는 것이다. 염전에서 곳곳에 해수를 저장하는 시설만 있다. 염전 주위의 높은 곳에 섯등과 염부옥을 두었다.

이러한 염전은 전라남도 일부에만 존재하였다.

양빈식 무제염전은 해면보다 높은 지면에 만든다. 먼저 점질토나 황토로 지반의 하층을 구성하고 그 위에 사질토를 상당한 두께로 펴서 지반으로 한다. 여기에 도랑을 통하게 하고 다시 해빈의 물가에 이르기까지 점질토로 도랑을 구성한다. 큰바가지를 이용해서 해수를 퍼 올리고 섯등은 염전 도랑의 곁에 60~90cm의 높이로 배치시킨다. 이 염전은 조수간만의 차이가 적은 경북, 강원도와 함경도 일부의 염전에 있었다.

이와 같은 염전은 고래(古來)의 제염 법을 고수하고 추후도 진보를 도모하는 곳이 없어 헛되이 태양이준 혜택을 버려둔 채 돌아보지 않은 상태로 있었다가 일제침탈기 부터 천일염전으로 변모하게 되었다.

유제염전(有堤鹽田)은 염전의 주위에 제방이 있어서 함부로 해수가 침입하는 것을 막았으며 관문을 만들어 필요에 따라 해수를 염전고랑으로 유통이 가능 하도록 하였다.

부득이 해수면 보다 높은 곳의 염전은 용두레를 설치하여 해수를 염전에 퍼 올렸다.

염전의 면은 점질토나 질 좋은 황토 흙으로 염전을 만들고 개흙을 염전에 살포하여 여기에 해수를 흡수시켜 햇빛을 쬐인다. 수분이 증발 건조되어 염분만 남아서 개흙에 부착되면 이것을 끌어 모아 섯등으로 운반하고 여기에 해수를 부어 염분을 용해하여 농후한 함수를 채취한다. 이것이 물 소금 이며 서슬이라고도 한다

개량 섯등의 크기는 사방 3m 높이는 60cm~90cm 정도 이었다.

염전 한필지의 넓이에 대한 섯등의수나 구조 등은 장소에 따라 각각 차이가 있었으나 일제침탈기

용호 전오염전 시험결과에 따라 호퍼로 개흙을 뿌릴 수 있는 범위의 두 배의 거리를 두어 작업 능률을 배가 하였다. 전라남도와 경상남북도의 주요염전이었다. 용호동염전도 여기에 속한다.

전오작업에 꼭필여한 가마(釜)

가마는 조선에서 토부(土釜)라고부르는 가마와 쇠가마(鐵釜)가있었다, 토부에는 두 종류가

있는데. 하나는 대형 굴 껍질을 배열하고 그 양면에 굴 껍질 재나 굴 껍질을 부순 가루에 함수나 간수(苦汁)를 섞어서 이긴 것을 칠하는 것이다. 이러한 종류의 토부는 가장 널리 이용하고 있었다. 다른 하나는 위의 조개껍질 대신에 부정형의 조약돌을 이용하여 같은 방식으로 칠해 굳힌 것으로 일부 지역에서 사용하였다. 경상남도 울산의경우가 대표적 이다.

쇠가마도 또한 2종류로 대별할 수 있다. 하나는 얇은 방형이나 장방형으로 만든 것으로 사용된철판은 대부분 얇은데 가장 두꺼운 것은 3.2mm 이었다. 인천 .목포. 부산과 같은 개항장 부근에서 볼 수 있는 것으로 쇠 가마를 이용하였다.

다른 하나는 외형의 냄비모양 쇠 가마로 직경이 60~90cm내외로 한다, 일부지역에서만 이용되는데 전라남도와 제주도와 같은 경우가 그 예이다.

가마의 크고 작음과, 넓고 좁음은 지방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토부와 철가마를 막론하고 방형(方形)인 것은 사방1.5m부터 사방 4m 가 되는 것도 있었다. 모두 가마가 뒤 툴려서 요철이 생기는 것을 막기 위해 20~30가닥 내지 40~50가닥의 철사줄로 묶은 다음 밧줄로 위의 가로대에 매달아 두었다. 소형 쇠가마는 1개의 부뚜막에 2개의 가마를 나란히 두는 것을 통례로 한다. 연료는 대부분 솔가리(松葉)를 이용 한다 .지방에 따라서 소나무장작, 대(蘆)섶 나무가지 및 잡초를 이용하고, 석탄은 경상남도의 일부 부산부근에서 드물게 사용할 뿐이었다. 토부 (土釜)나 패부(貝釜)는 끓일 때마다 다시 만들어야 하는 불편이 있어 계속 함수를 보충하며 전오를 한다. 가열된 소금은 삼태기나 소쿠리 같은 것으로 퍼 올려 가마를 매다는 철사를 거는 횡목위에 잠시 두고 간수(염화마그네슘)를 흘러내리게 한다.

그 후 부옥내의 거출장(居出場)에 두는 것이 가장보통이지만 혹은 부뚜막의 곁, 소위 소선장(搔先場)을 설치한 곳도 있어서 여기에 가열된 소금을 두고 간수의 대부분을 빠지게 한 후 거출장으로 옮기는 곳도 있다.

1901년부터 인천을 중심으로 그 부근의 재제염이 활발하게 행해졌다. 원료 염은 중국염의 사용이 확산되어 그 소비구역이 확산되어 조선염의 가치에 영향을 미쳤다. 중국염과 조선염의 가격 차이는 연료와 인부(여망이)의 임금(焚夫賃)을 보전할 수 없기에 조선염의 모습을 찾아 볼 수 없었다. 부산에서 1908년부터 중국염과 대만염이 원료 염으로 재제염이 발전하였다.

*전목-원통모양으로 염전의 살토 덩어리를 펴는 염전기구

*미레- 논밭을 골라 반반하게 하는데 쓰는 농기구 ,써레와 비슷하나 아래에 발 대신에 널빤지를 가로대어 자갈 이나 흙 같은 것을 밀어냄

*염부옥(부옥)-소금을 굽는 가마집

*채함_간핀 모래 모으기

*거출장_소금 반출 대기 장소

*소선장_따뜻한 부뚜막에서 간수가 빠질 때까지 기다리는 곳

*여망이-소금굽는 기술자

 

 

 

 

 

 

 

 

 

중국염 재제염의 수지계산 (부산 1906년)

 

수 입
일금 25원50전 소금1,700근.100근1원50전 매상수입
지 출
일금 19월54전
내 역
일금11원5전 중국염1,700근대금부산에서 100근당65전
일금1원50전 불때는인부(焚夫)2인
일금1원70전 포장비1,700근분100근당10전
일금70전 심부름 인부와 잡비
일금4원59전 석탄1,530근1만근당30원
남은돈 5원96전

 

 

즉 이상의 계산에 의하면 소금 100근(60kg)당35전의 이익이 생긴다. 그래서 이 안에서

영업비, 자본이자를 공재해도 또한 상당한 이익을 거둘 수 있었을 것이다.

융희2년 (1909년)조선의 소금 소비고 3억5천만근(58천톤)에 대해 생산고는 2억5천만근(41.7천톤),외국 수입 염은 1억근(16.7천톤)으로 산정하는 것이 사실에 가까운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조선에서 식염으로 가장 기호에 적당한 것은 전오 염인 조선 염(韓염)만 한 것이 없었다. 그런데 앞에서 서술한 것과 같이 중국. 대만 및 일본 등 외국은 조선염의 가격이 높은 상황을 틈타 가격이 싼 소금을 수입하여 더욱 그 수용을 늘이고 있었다.

외국염 수입고의 통계표 (1905~1907년)

 

국별
연도별
일본소금 대만소금 중국소금
광무9년1905년 8,084,048원 876,000원 17,121,240원 26,081,288원
광무10년1906년 13,906,069원 9,131,560원 17,077,056원 40,114,685원
융희원년1907년 18,309,303원 9,720,060원 31,915,846원 61,026,209원

 

 

*융희원년통계59,945,209원을 61,026,209원으로1,081,000원 차이 원문기록으로 함

*본표는 단지 세관을 통하여 수입한 수량을 나타낸 것이다.그 밖의 청국에서 밀수입된 소금 5천만근을 더하 면 총 수입은 앞서에서 말한 1억근 내외에 달하게 된다.

 

정부는 소금업의 개량. 진보를 꾀하기 위해 염업시험장을 설치하였다. 한반도 동쪽 해안은 토질이 종래의 염전식 전오제염업에 적당하므로 이의 계량을 도모하고 모범을 보이기 위해 하나의 시험염전을 또 그 서쪽의 해안은 토질이 종래 조선에 없던 천일 제염업에 적당하므로 이것이 성공 한다면 청국소금에 대항하여 소금업이 유지될 것이므로 하나의 시험 염전을 설치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후자로는 인천 부근의 주안포에 , 전자는 부산부근의 용호만에 토지를 선정하고 지난 융희원년 1907년 봄에 그 공사에 착수해 그 해에 완성하였다.

이듬해 1908년 에 이르러 농상공부 소관으로 옮겨서 비로소 염업시험장이라고 칭하였다.

이 기관은 농상공부 내에 두고 양 시험염전은 출장소라 칭하였다.

 

◎전자의 용호출장소 사업성적

용호출장소는 경상남도 동래부 남촌면(원본 석남면) 용호리에 있다. 부산항에서 동남쪽으로 25리(8.5km)떨어져 있다. 염전은 입빈식 유제염전으로 이 지방 전통적인 채함 방법, 일본 내지식 채함 방법 및 양자를 절충한 방법의 비교시험, 즉 채함 방법의 개량과 전오방법을 시험하고 아울러 소금업자에게 이것을 보여주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그 설비는 대략 다음과 같다.

1)전오식염전(煎熬式鹽田)시험소

◇염전 총면적 2정(町 )3반(段)7무(畝)13보(步)23,633㎡7,150평

◇내역:일본식염전 9단3무29보2,817.5평LG메트로 용호176번지일원

조선식염전5단8무8보1,757평동편아래 용호364번지일원

절충식염전8단5무6보2,575.5평호경공단 용호36번지일원

2)염부옥(소금을 굽는 가마가 있는 건물)

가마는 고전식이며 길이 12척(363cm), 폭8척(242cm) 깊이 4촌5푼(13.6cm)의 주철제1개를 벽돌로 축조한 루스터가 달린 아궁이 위에 장치한다. 예열용 가마솥 2개를 그 옆에 준비하며 ,기타의 장치는 통상 일본내지의 부옥과 같다.

3) 함수 채취량 1908년

 

염전별 일본식 절충식 조선식
함수채취량 3,019석 1,979석 1,444석 6,442석
함수채수평균비중(보메도수) 16도5 19도4 20도4 평균18.76
함수채수평균1정보당 3,213석 2,323석 2,478석 -
채함일수 67일 70일 130일 -

 

 

 

단,1908년7~8월의 강우량이 예년보다 많아 채함 하는데 큰 장애가 있었다. 평년이라면 90일 안팎은 지속할 수 있다. 또 일본식과 절충식은 교대로 바꿔가며 채함 하였다.

4)전오 실적:(하루밤낮의 평균실적)

전오함수량33석6두(6㎥)

함수평균비중18도 7분

채염근수1,915근(1,149㎏)

소비석탄량1,706근

소금1백근당 소비석탄89근

석탄의품종 대임탄(大任炭) 절입(切込)

 

5)완성염의 품질

조선염의 질은 부옥(가마집)이 불결하고 작업이 청결하지 않기에 불순물이 많았다. 때문에 대부분은 회색이나 흑색을 띠며 보기에도 아주 나빴다. 그렇지만 원래 모두 진염가열법(眞鹽焚法)으로 하기 때문에 소금의 질은 실제로 외관보다도 뛰어 났다. 일반적으로 결정이 작고, 촉감이 부드러우며 가벼운 것이 많았다. 금번 시험제염은 순백의 소립자로서 보통 전오염과 다르지 않다. 일본 내지의 4등염에 필적하였다.

용호출장소는 날씨가 온난하여 채함은 1년 내내할 수 있다. 여기에서는 올해의 실적을 게재할 뿐 종래 제염법과의 비교연구와 같은 것은 시험일이 또한 오래지 않았기 때문에 다른 날을 기대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시험의 결과 석탄을 연료로 사용하는 것은 종래 연료에 비해 이익이 크고 1개년으로 충분히 가마솥 및 대바구니의 개량비 등을 갚을 수 있고, 또한 남는 것이 있었다.

 

◎전반적인 용호염전의 실태

조선인이 일반적으로 옛 습관을 고치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므로, 제염법의 개량의 진보와 같은 것은 생각조차 한 일이 없는 상태로서, 오로지 옛날 관습을 고수하고 스스로 만족하는 풍습이 있었다. 진염을 위한 연료, 또한 민둥산이 많은 조선은 더구나 남벌을 하고 조금도 조림할 방도를 생각하지 않음으로써, 해마다 연료가 모자라게 되고 따라서 가격이 폭등하였고 이대로 간다면 더욱 등귀할 것이었다.

 

◎생산비의 증가에 비해 소금가격은 오르지 않고 오히려 하락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므로 소금 업자들은 큰 곤란을 겪게 되었다. 소금가격의 하락은 외국소금의 수입, 그 가운데 중국천일염으로 그 외관은 회색을 띠고 알갱이도 커서 ,언뜻 보기에는 소비자에게 혐오감을 주지만, 그 화학적 성분에 있어서 순 염분의 양이 많을 뿐만 아니라, 가격이 대단이 저렴해서 1906년 당시 소금100근에 1원30전인데 비해 ,중국 염은 50전이었다.

그러므로 폐업하는 염전의수가 해마다 늘어나서 소금업자는 실로 불쌍한 상황 이었다.

고육지책으로 조선 염전에서 생산되는 함수와 수입한 중국 천일염을 원료로 재제염을 하기시작 하였다. 이는 부옥에서 소금을 굽는 자와 염전 주인만 알고 진행하여 그전보다 질과 빛깔이 고운 소금을 전천후로 생산하기에 이른 것이다.

염전에 종사하는 근로자들이 함부로 부옥에 드나들 수 없자 짚신발로 밟고 다니든 거출장이 깨끗하여 소금에 먼지나 흙이 줄어들었다.

해방 후 용호동에 인접한 해안가 우암동은 피난민들이 많아 노동자를 구하기 쉽고 바다와 접해있어 재제염이 성행 하였다. 왕상호씨가 재제염업을 하였다.

 

*루스크(rooster)-화격자(火格子)라고도 하며 ,보일러 따위의 아궁이 안에 고체 연료를 올리는 석쇠 모양의도구를 말한다.

*대임탄-福岡縣 田川郡 大任村에 위치한 藏內鑛業 大峰炭鑛第2坑에서 생산된 석탄을 말한다 이곳은 1899년에 채탄을 시작하여 월 37,000톤의 유연탄을 생사하였다

*절입- 석탄은 형상이나 크기에 따라 절입탄, 괴탄, 중괴탄, 소괴탄, 분탄, 미분탄으로 분류된다.

*진염가열법-불을때서 만든 상질의 소금을 진염이라한다.

 

 

 

(염전이미지 염전-1/염전-2/염전-3/염전-4jpg)과 염전농기구12매sa703372~703385까지

7. 염전의 역사(전통산업)

우리나라 에서도 일찍이 삼국시대로부터 전오제염으로 소금을 생산한 기록이 있다.

조선 시대에는 관염(官鹽)이 주였으나 사염(私鹽)도 허용하였다

부산 지방의 염업을 살펴보면 조선전기 15세기에 동래현에는 공염분(貢鹽盆) 23곳, 좌도부산포처치사도군수염분(左道釜山逋處置使道軍須鹽盆) 1곳, 해운포만호도군 수염분(海運蒲萬戶道軍須鹽盆) 1곳이 있고, 속현인 동평현에는 공염분 3곳, 사염분 2곳, 부산포군수염분(釜山蒲軍須鹽盆) 7곳, 다대포군수염분(多大蒲軍須鹽盆) 1곳이 있었다. 이와 같이 조선 초에 동래현 관내에는 모두 6곳의 염분이 있었는데, 『세종실록지리지』에 수록된 8도 염분이 모두 1,362곳(座)이므로 동래현의 65곳은 전체의 4%에 해당된다.

소금은 제조방식에 따라 여러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째로 대한제국 융희원년(1907년)까지는 전오제염으로 소금을 생산하였다.

융희2년(1908년) 조선해수산조합 시험 염전출장소는 조선의동쪽 해안은 토질이 종래의 전오제염이 적당하므로 이를 개량하여 용호동의 시험염전을두고 .또 서쪽해안은 조선에서 시도하지 않은 천일 제염이 적당하다고 판단하여 인천부근의 주안포(朱安浦)에 천일염(天日鹽)주안 출장소를 두어. 1908년 인천에서 처음으로 염전을 만들어 시험 생산에 들어갔다.

주안포 천일제염전 총면적은 6,000평으로 그중 1,800평의 제1증발지와 588평의 제2증발지를 만들었다.

증발지 함수류(鹹水瘤)36평과 결정지 (結晶池)320평 그리고 결정지 함수류64평도 만들었다.

밭두둑(畦畔) 및 도랑 192평반과 저수지 1,350평 제방1,650평으로 대한제국 첫 천일염 시험생산을 하였다 .

해수면보다 높은 곳에 저수지와 증발지등 염전을 만들고, 바람과 태양에 의한 수분 증발로 소금 결정을 얻는 방식이다. 그래서 평지가 넓고 일조(日照)가 길고 뜨거운 햇빛과 건조한 바람이 소금 생산량을좌우하였다. 서해지방의 천일염전은 꾸준한 연구와 새로운 기술 개발로 대량생산을 위에 염전 바닥을 비닐장판을 깔아 함수가 토양에 쓰며드는 것을 막았다. 또는 검은 큰 타일을 이용하여 증발열량을 높이기도 한다. 주로 목포등 서해안 에서 많이 생산하였다고 한다.

재제염(再製鹽)은 값싼 중국산 암염과 천일염(청염)을 해수나 담수에 녹인 후 불순물을 제거하고 다시 끓여 증발시켜 만든다. 재제염은 저온에서 높은 온도까지 가공이 가능하여 죽염등 다양한 소금이 생산되고 있다. 특수목적으로 전기분해를 하여 소금을 생산하기도 한다.

최저 저온 가열하면 연한 핑크빛 소금이 생산되었다.

다음으로 북쪽지방에서 동절기에 염전 소금물이 얼면 얼음을 걷어내어 염도를 높이는 방식의 냉동 채함법(서슬법)이 있다.

*서기1908년 純宗隆熙2년대한제국 농상공부 수산국장 鄭鎭弘이 봄부터 12월까지 일본인과 조선인이 조사하여 기록한 한국 수산지 자료를 인용하였슴

8. 분개염전과 변화 (전통산업)

 

용호동 (분개) 소금은 미네랄이 풍부하여 전국적으로 그 품질을 인정받아 유명하였다고 한다. 염전은 장마철을 재외하고 사철 작업하였으나 겨울은 생산이 저조하여 염전수리에 치중하였다. 염전일은 일급제였으며 하루 삯은 쌀 한 되 반이었다. 그러나 판매가 부진할 때 주로 소금을 품삯 대신 받아 각자 팔아 생활하였다. 이규정씨는 국염증산가를 손수 만들어 노동자들이 노래하며 생산노동을 강요하였지만

1962년부터 천일염에 비해 염전의 인건비 상승과 소금의 질이 떨어져 새로운 사업(염산)에 도전하였으나 별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노천작업으로 독극물에 의한 전답과 자연의 오염을 가중시켰다.

천일염과 황.초석으로 염산을 생산하여 미원식품에 납품하고 부산물인 망초를 제일 모직에 납품 하였다고 한다.

1965년 동국제강이 수장끝(水藏末)자락에 일부 염전부지와 용호만을 매립하여 제강공장을 설립하고 자회사인 부산주물공장도 가동하여 주민들의 생활이 향상되었다.

용호천 좌측에 주민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분뇨처리장과 1일 약34만 톤 처리 능력의 하수처리장의 확장으로 민관의 불신의 골이 깊었다.

그나마 환경공단 하수처리장 상부에 체육시설을 갖추어 주민들의 건강증진과 휴식공간에 일조하고 있다.

동국제강과 주물공장이 대기업으로 성장하여 공단지로 이설하고 동산 말에 폐기한 산업쓰레기의 처리가 주민들의 요구에 적절한 조치를 취하지 않아 기업에 대한 불신이 크다.

천일염도 새로운 도전에 하나둘 문을 닫기 시작하였다 1971년 (소화(昭和)46년)일본 전매공사(현JT)에 의해서 전국적으로 실시한 이온 교환 수지막법(交換樹脂膜法)에 의한 제염법이다.

공장에서 전기를 사용하여 염화나트륨(NaCl)의 함유량이 99.5%에 달하는 순수한 소금이 대량 생산되었기 때문이다. 납, 아연, 비소 같은 중금속들은 막을 통과하지 못하기 때문에 99.5% 이상순도 높은 염화나트륨을 얻을수 있다. 이렇게 만든 염화나트륨 용액을 진공건조법으로 진공상태의 증발판에서 결정시켜 꽃소금과 같이 결정이 작고 약한 소금을 만든다.

대량생산이 가능하고 값이 저렴하며 순도가 높아 화학공정용이나 식품용으로 많이 이용하고 있으며 1979년 우리나라에 도입됐다. 현재 전 세계적으로 가장 많이 사용하는 방법으로 불순물을 대부분 제거했기 때문에 위생적이지만 몸에 좋은 미네랄 성분도 함께 제거되어 다른 소금에 비해 영양적인 면에서는 부족한 면이 있다. 덩어리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소량의 탄산칼슘이나 염화마그네슘등을 첨가하기도 한다. 일부 국가에서는 요오드 등 부족한 미네랄 성분을 소금에 첨가하기도 한다.

다음으로 해수직자법(海水直煮法)이다.

해수직자법은 염전이 없이 염부 옥만으로 염도가 낮은 해수를 바다에서 퍼 올려 그대로 가마에 넣고 다량의 연료와 많은 시간을 들여 끓여서 제염하는 것으로 거의 태고의 유물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런 형태의 소금생산도 용호동에 있었다. 왕계득(王癸得)씨와 왕병년(王丙年)씨 형제가 해수직자법으로 자염을 만들었으며 주위염전으로부터 함수를 구입하기도 하고 중국암염으로 재제염을 하다, 일찍 문을 닫았다.

(지구의 자전에의하여 대륙을 중심으로 말하면 대륙의 동쪽이 서쪽보다 염분 농도가 높은 것이지요

9)염전이야기

 

1960년대 초반부터 용호동의 염전마다 재제염으로 근근이 운영 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유제염전인 용호동은 둑을 정비하지 않아 해마다 들어 닥친 태풍으로 염전 둑이 무너지고

복구비가 만만찮게 들어갔다 .

개흙 염사(鹽砂)를 염정에 모으고 먼 곳에서 채함한 개흙은 발채에 담아 운반한 짚신으로 염부 옥을 드나들자 전오소금이 청염과 같은 색이 되어 판매도 부진하여 염부옥 분부(焚夫)외는 출입을 삼가도록 하였다.

 

 

  

 

 

            절충식  현 환경공단자리 염전 조선말  최초개발한 섯등(염정)계량섯등)

 

 

 

   LG메트로의 염전 모습   일본식 섯등은  조선식과 달랐다(일본식섯등)

 

 

 

                        용호3동앞 염전  조선식 2,575평의 염전에 대형 섯등이 한개만 있다 섯등의 함사를 운반중이다(조선식섯등)

 

 

 

   일제가 선철을 리벳처리한 큰사각가마를 이용하여 전오제염 물소금을 90도 끓여 백색의 소금을 굽는 가마 염부옥/저온처리하면 핑크빛소금생산

 

                                       일본강점기의 조선 해 수산조합건물 1907년 뒤에보이는 산이 동산(瞳山)이다

 

 

 

 박명하씨의 장남 박두상(朴斗祥)씨 염전(1952년사진)박명하씨 의1남 박두상씨

섯등(盆)이 시멘트로 제작되었다

 

염전농기구는 1908년 순종융희 2년 조선의 염전을 둘러보고 농상공부 수산국 직원이 직접 스케치한 이미지

 

 

 

 

 

 

 

 

 

 

 

 

분개 염전 용두레  바닷물을 염전에 퍼 올리는 장치

 

 

 

 

 

 

 

 

 

 

 

 

 

 

 

 

1908년 염전에서 사용하는 농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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