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구남 의 용호농장
일제는 용각지 잘록개 지역에 움직이지 않는 군함의 위력을 갖춘 기지를 건설하였다(일제침탈기 잘록개를 장자등이라고기록)
그래서 지명은 군함(軍艦) 소리글로 구남이라 하였다.
1945년 해방후 부터 군함의 일본군인 병영에 한센병 환자들이 밤을 이용하여 배와 육로로 모여들기 시작하여 마을을 이루었다.
용호본동 주민들의 반대가 있었으나 결국은 용호병원으로 인가되고 추가로 한센병 환자들이 모여 들었다 .용호동의 1개통으로 인구가 늘어나자 정치적(경남도의원선거공약)으로 국립 용호병원으로 바뀌게 되어 한때는 부산시의 권한 밖이 되었다.
그 후 새마을 사업으로 용호농장으로 변모하면서 돼지와 닭 등 가축을 대량 사육하고, 인근 산을 개간하여 채소 등을 재배 하게 되었다 .
농장자체 보안을 담당하고 간이 화장장을 운영하였으며 비룡산자락에 불법 분묘도 생겨났다 .농장 입구에 미감아들의 교육시설인 용호분교를 운영하였다.
용호주민들과 운동회 등 다양한 접촉이 이루어지고 교류도 많았다 .
또한 일본은 군함의 포진지등을 위장하기위해 편백과 삼나무 군락지를 조성하여 울창한 숲이었지만 심각하게 훼손되고 파괴되어 자취를 감추었다
용호농장은 한센병 환자들이 이주하고 대단위 아파트단지로 변모 하였다 1차설계는 약70층의 고층건물이었으나 선거구 획정후 지금의 높이로 설계변경되었다고 한다
구남용호농장
*용각지(龍胳地) SK아파트-문서보존소와 용호농장의 골짜기를 말한다
8.구남의 일본군 포탑 포진지와 탄약고
제2관측소도 콘크리트 내부 청근을 뽑기위해 파쇠하여 원형을 잃었다
( 제2관측소 gop)
1904년의 러일 전쟁 당시 러시아군의 콘크리트 요새를 공격하려고 고민하던 끝에 일본 본토에 설치되어 있던 해안포 28cm 투박한 메이지 유탄포를. 운반해 여순 공방전 최대의 악전고투를 보이던 203고지 점령 전에 승리를 이끌었다.
이때부터 일본은 해안포의 중요성을 깨달았다.
일본해군이 전함 도사(土佐)장자등설치’와 ‘아카기(赤城)토요설치, 카가 를 건조하든 ’1921년 영국, 미국, 일본 3국의 워싱턴 해군 군축조약의 체결에 의해 주력함정 의 비율을 5:5;3으로 하였다. 그 전함에 탑재될 예정이던 16인치 . 408mm 함포(일본호칭은40cm급2문을1포)를 일본 육군이 구입하여, 부산 용호동 오륙도 해안과 쓰시마섬(對馬島) 북단의 ‘토요포대’(豊砲臺)에 각각 바다를 마주보며 움직이지 않는 군함의 화력을 갖춘 거대한 규모의 포진지를 구축하게 되었다.
일본은 1924년부터 1932년까지(토요포대는1929년5월부터 1934년3월에 완공), 총 8년에 걸쳐 11군데에 함포용 해안포대를 설치하였다.
그 당시 연합군은 일본본토와 부산일원에도 공습경보와 많은 폭탄을 투하 하였다. 용호동에도 벽산아파트 뒤2곳 낙천대 아파트1곳 동산말에 1곳 용호초등학교 염전에1곳 신용산 용당쪽 에2개의 대형폭탄을 투하하였다.
천혜의 오륙 도 앞 잘록개(적기말) 해안까지 절개하여 거대한 지하 포진지를 구축 하였다.
포진지에 사용한 자갈은 비용개(백운포) 몽돌을 사용하여 포의 구조물을 만들고 지붕을 덮어 석면마분지 에 아스콘을10겹 사용하여 방수처리를 하고 그 위에 지상포격에 견딜 수 있도록 콘크리트를 하였다 지하 구조물은 진동에 의한 균열을 최소화 하기위에 3겹으로 아스콘 처리한 석면 마분지를 연결부위에 넣었다
포신의구경장은 45cm급(18.5m 108ton)으로 제작한 함포로 사정거리가 약30km 에 달하였다고 한다.
진지를 완공하고 복토하여 관목과 대나무를 심어 위장하여 항공 지표 식별을 할 수 없도록 하였다.
포진지 위쪽에 2곳의 관측소를 구축하고 거미섬(933m위치)과 구덕 상여 돌(498m위치) 앞에 콘크리트 해수표 구조물을 만들어 해수면의 조석관측을 하도록 하였다
그 당시 함포의 조작은 수압에 의한 방식으로 별도 압축 조정 탱크(축력기蓄力機)를 만들어 압력보조 추를 이용하여 수압의 상태를 확인 하였다.
가까운 해안 잘록개, 동서로 88식해안포 28cm급의 다양한 유탄포(메이지곡사포)4문과 15cm급 속사 카농포(加農砲.)비교적 긴 포신을 가진 포, 옛날 분류의 ‘캐논’을 일본식으로 읽음)4문, 그리고7cm 대공고사포4문등 메이지 포대외 6개의 지하포진지를 해방 무렵까지 구축하였다.(동백곶1934년5월~1935년12월 1938년1월개축)
캐논포진지에는 2포대 45식15cm와 3포대38식(5인치 전함부포)등이설치되고 소화15년5월(1940년5월)시험사격완료하였다
28cm 유탄포(메이지 곡사포) 잘록개아래 원통진지아래 설치 해발고도 (Earth Level)북위35°06′05.36"동경 129°07′22.46")위치에 원통 방호벽 속에 설치하였다.
대표적인 메이지 32cm 박격포 (메이지포)
함포용으로 제작한 5인치 함포
18cm장포
15cm 속사 케논포를 파괴하여 철수중
15cm케논포(박격포)
메이지(明治)포는 1922년 이전에 오륙도 선착장 잘록개에 원통 방호벽 속에 설치하였으나 사용하지 않고 철거하여 다른 포를 설치할 계획만 수립한 상태였으며 카농포4문은 지금의 오륙도 중학교 앞 씨사이드 공사 예정지 동백 곳에 설치하여 매년2~3회 사격훈련을 하며 탄두 없이 발사 시험을 하였다.
두 곳의 탄약고는 진해 총사령부 예하 모든 군영에 보급하는 화약고 이었으며 제1탄약고 앞 4동의 건물에서 포탄을 제조하여 전국으로 보급하였다고 한다.
제1탄약고는 아파트 후문 10m지점에 용호초등학교 분교 뒤쪽에 있었으며 지금은 해군숙소공사와 아파트 후문도로공사시 입구를 발파하여 위치 추적이 어려운 상태다.(초등학교시절 1탄약고에서 뇌관과 탄약을 가지고폭탄을 만들어 불을부쳐 바다에던져 폭파시키기도 하였다.)
화약의 용해는 파라핀(Paraffin)을 이용하여 간접가열 하였으며 이곳에서 신관(信管Fuse)과 뇌관(雷管 Detonator) 삽입 관 가공도 하였다고 한다.
장자등 화물운송 선착장은 방패섬 앞에 ( ㄱ )자 형 부두를 축조하여 운동장까지 대차 레일을 설치하여 운반 하였다. 부두는1959년9월17일 사라(Sarah)호 태풍으로 파손 유실 되었다.
7cm고사포는 장자산 큰 고개쉼터 남쪽 산 정상꽃밭등(구309전대)에 4문을 설치하고 그곳을 나나까(7處) 라 불렀다 .
군병영막사까지약600m
대공포 터널입구 철근 작업파쇠
대공포 터널입구 철근 작업파쇠
대공포 터널입구 철근 작업파쇠
대공포 터널입구 철근 작업파쇠
꽃밭등 정상 나나까 7cm고사포 4문은 정상의 서편에 설치되었으며 장자등 군수품 창고위쪽은 군 병영 막사와 통신용(일본 대마도와 진해사령부간 비둘기 연락 통신운영)화려한 전서구 탑이 길 좌우에 있었다. 군수창고에서 고사포 진지까지는 작은 레일위에 마차를 올려놓았으며 역용(役用)마는 영국종 싸이어종과 클라이즈데이종으로 키가 188cm의 힘이 강하고 온순한 말이 대형마차 를 끌어 정상 뒤편 터널까지 운반하였다. 터널은 수평으로 들어가면 수직 승강기로 포탄과 화약을 포까지 운반되도록 하였다.
1959년 9월 사라오 태풍이 지나 간 후 꽃밭 등에 근무하는 잘 아는 육군병사에게 추석음식을 전하러 가서 승강기를 들어낸 터널한쪽에 사라리가 설치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지금은 그때 막사는 없어지고 바닥은 흙으로 정비 되어 있었다.
1942년부터는 서치라이트를 장자산 정상까지 설치하여 밤마다 가동하였다.
그러나 큰 포는 두 문중 왼쪽 1문만 운전하도록 수압배관을 하였고 우측1문은 가동포(可動砲)를 따라다니는 모양새였으며, 년 1~2회 추진화약만 장진하여 대포(큰포라함)를 시험하고 일본이 폐망하자 1945년10월 미군이 진주하여 폭약을 설치하여 폭파시켰다.(1945년9월9일 민군정과총독부간 항복조인
이키섬 뒤편 사이까이(相崎)섬 북단 쿠로사키 (墨崎)포대 鹿島전함의포탑은 미군이 알지 못해 훼손 되지 않았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속(內)포신(고탄소강)의 조각을 수습하여 철판의 절삭 가공용 (포탄)바이트(Cutting tool)로 70년대까지 사용하였다.
현재 히로시마현(廣島縣)구레시(吳市) 해상 자위대 연병장에는 용호동 장자등에 설치한 동급45cm급 나가사키(長崎)의 사이까이(相崎)섬북단 쿠로사키(墨崎)포대에 설치하였든 포를 전시하고 있다 .부산 용호동 장자등 포진지를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장자등 포탑포진지 해발고도(Earth Level)56.1m 위치 북위35°06′13.48" 동경 129°07′20.79"지점에 포진지 총길이 70m. 통로포함 총폭 36.8m. 3개의 갱도 폭20.7m .포대높이 12m. 포탑높이 17.6m.
포탑직경 15.56m의 거대한 포탑포진이였다. 포신등의 폭파작업과 내부 철재 철거작업으로 훼손되어 현재 해발고도 약61m(5.1m)까지만 남아있다
지하에 추진 화약과 포탄 보관 및 운반을 위하여 대차 레일을 설치하고, 포탄(길이150cm)을 포에 장진할 수 있도록 수압 수직 승강기도 설치하고, 40cm급 대포(408mm)를 운영할 수압 디젤엔진(Diesel engine) 75마력 급 피스톤 2열 압축펌프2대를 중앙갱도와 우측 갱도에 각각 설치하고(75마력1대는 우측용 포신가동용 설치하지못함), 발전기용 8마력(5kw)과 32마력(20kw)(가솔린 엔진오일 혼합유)은 모두 우측 갱도에 설치하였다. 또한 우측 입구에 우수 차집 물탱크와, 우측 상승 승강기 옆과 좌측 입구에 기름창고(儲油庫)를 갖추었다
좌측 입구도 아파트 공사등으로 파손되어 일부분만 남아있다.콘크리트 옹벽의 두깨는 2.5m에서 3.5m의 두깨였으나 철근회수작업으로 1/2정도만 남아 있는 실정이다
화장실은 우측갱도 입구에 있었다. 현재 지하갱도의 3열이 개방되어 있으나 이 또한 철근 회수를 위한 콘크리트 벽을 파쇄 한 것이다 .
조선기술자는 윤장술 씨와 김쾌암(快岩 까이강)씨, 두 분이 관리와 정비를 담당하였으며 우수한 기술자로 인정받았다고 한다.
지하시설물을 장입하고 돌이 없는 흙을 덮어 평토하고 포의 발사 때 진동 충격의 전달을 최소화 하기위해 승강기와 포설치 대를 연결하지 않고 별도 공사를 하였다 .
포설치대는 약10m의 원통, 높이5m의 대형 콘크리트 방호벽 아래 20cm의 철판을 깔고 그 아래 고무판을 삽입 하였다. 포의 회전이 가능하도록 바밷 메탈 기어 처리 하였다.
포의 상하 회전 및 충격방지 쇼바(쇼크업소바 Shock absorber) 실린더도 수압 실린더(Cylinder)로 작동하였다.
포를 안착하고 5m높이로 콘크리트 상단 방호를 하고150mm두께의 철판으로 원형 덮개를 하여 개폐 하도록 하였다.
큰포 덮개철판 (덮개의 자료는 대마도 45급(장자등과 동급)자료에 두껑의 사진을확보하였다.
항공식별이 불가 하도록 관목과 소 교목을 심고 그 중앙에 우수 차집 관을 설치하였다
1942년까지 (1차 시험은1932년 이전) 매년1~2회 추진 화약으로 시험발사를 하였다.
그 때마다 지표의 흙먼지가 솟아 앞을 분간할 수 없었다고 공사에 참가한 분들이전해주었다.
시험 발사 후 글리세린(Glycerin)으로 포신을 청소하고 주위 먼지의 청소는 폭발성이 적은 가루 화약을 뿌려 순간에 소거 하였다
포진지의 총 높이는 지상에서 약 15m 이었다.(10여m 철근회수작업으로 발파함)
관측소는 1관측소, 2관측소 두 곳이 있었으며 2관측소 아래 2개동의 건물과 통신용 비둘기 집이 있었다.
2관측소 바로 아래 건물은 7cm(나나까)고사포 관련 창고 이었으며, 그 아래 건물은 큰 포 사무실이었다. 잘록개는 지하수를 찾지 못하여 지붕에서 내리는 빗물을 받아 차집 하여 물탱크에 비축하였다.
장거리 통신은 전서구 (傳書鳩 Homing pigeon 훈련시킨 비둘기) 로 진해 사령부와 쓰시마 토요 포대 간 군용통신 연락망을 운영하였다.
용호동 동급 포대 쓰시마 토요포대도 미군이 일부 폭파하였으나 1984년12월에 복원하여 관광 상품으로 많은 관광객이 찾고 있다고 한다.
용호동 장자등 포대도 복원하고 이기대 의기의 충절 또한 볼거리가 충분하다고 판단되며 문화적 가치도 우수하다
*전함 카가’와‘아카기는 항공모함으로 개조하고 ,도사 는 폐기하였다
증언자: 1922년생 왕 석호(王 碩鎬)개성왕씨33대손으로11대째용호동에서 거주
1935년대일 화물선 선장인 부친(王基世1888년생)의 소개로 용호광산 급사로 사회에 첫걸음을 시작하시었다.
성실함을 인정받아1936년 나나까(7處 7cm고사포기지)에 서 군수시설 보조공으로 근무하셨다.
나나까 공사 완공되고 최고위소령급 장교가 큰포진지에 소개하여 1937년부터 1940년까지 조선인 두 기술자와 근무하면서 본(見)대로 사실을 수차례 설명하여 주셨기에 지금까지 밝혀지지 않은 그시대의 지명과 포진지의 역할을 수록할수 있었다.
40Cm급 포의 상세한자료는 동급 쓰시마 토요포대 에 전시기록한 사양을 인용하였슴
주포설치대 수정도면
포진지 갱도 금속고철 분리파쇄작업으로 원형보존 어려워
1945년10월이전 미군이 폭파하기전의 장자등포탑 과 포의모습 쓰시마 토요포대와 동일한 16인치(410mm)포 일문은 배관공사를 하지않아 상하로 움직이지못함
장자등포진지 좌측 입구 원형 1965년
파괴되기전의모습 (쓰시마포탑포대참조용)
대포 방호벽(쓰시마 토요포대(豊砲臺)같은 규격의 포대
용호동 장자등(용각지) 잘록개위 구남에설치한동일 함포(일본자위대연병장에설치)3층건물보다 높다
(鹿島전함포탑 16인치케논포)
용호동 구남에 설치한 같은급의 구로사끼(墨騎)포의내부설치도 (구로사끼 포대 발자취)墨崎砲臺跡
추가설치한 케논포
( 해안 케논포 장자등에설치한것과 동일종)
*포진지방수:(이미지1월#8폴더2640.2641jpg)
.*해수표:(6월#12폴더1590-1jpg
*육상자위대 사진 11월#5폴더에 이미지수록/남태평양 카리바시에설치한 해안포 월외폴더.임시.#카리바시jpg
9)탄약고 (문화역사)
해안포는 진지 내에 세 종류 모두 있었는데 탄약고는 2개가 있었다. 고철을 수집하기위한 탄약고 발파 작업은 사하구 엄궁동의 발파공이 많이 와서 작업을 하였다고 한다. 현재 남아 있는 탄약고는 말굽 모양의 쌍굴 로서 폭 4m, 높이 7m 정도의 길이 있으며 바닥은 콘크리트를 치고 그 위에 철도 레일을 깔았고 대차가 통행하였다고 한다. 굴 안쪽 화약고는 바닥크기 100m×20m 정도였는데 습기가 차지 않도록 하기 위해 콘크리트를 한 후 1m를 띄우고 35㎝ 두께의 콘크리트 옹벽을 쳐서 탄약고에 통풍이 잘 되도록 만들었다. 이중 콘크리트에는 석면 마분지에 아스콘을 묻힌 것을 10겹으로 붙이고 구조물 연결 부위는 아스콘 처리한 석면 마분지 3겹을 삽입하여 네 외부충격에 대비 하였다.
1차 만든 탄약고의 규모는 길이 100m, 폭 50m, 높이 10m정도였으나 습기 방지를 위하여 통풍구 공간을 두고 2차 공사를 하였기 때문에 완성된 탄약고는 길이 90m, 폭 20m, 높이 7m로 작아졌다고 한다. (공사에 참여한생존자가 없으며 공사완료후 보수작업에 참가한 분들의 증언)
그러나 입지조건과 탄약고의 외형으로 봐서는 폭60여m 길이 120m정도로 산을 깎아 평지 상태에서 폭20m길이 90m높이7m의 탄약고를 만들고 그 위에 폭50m길이100m높이10m의 콘크리트구조물을 덮어 쉬우고 흙을 덮고 식수를 한 것으로 추정된다. 국방부 관할이라 정확한 확인은 불가능 하다.
탄약고로 사용하는 굴이기 때문에 항상 습도계를 비치해 두고 있었으며 1년에 1회 48시간동안 통풍하여 건조를 했다고 한다. 먼저 한쪽 통풍구에는 따뜻한 바람을 불어넣어 다른 쪽 통풍구로 바람이 빠져나가게 하였고 탄약고의 문은 전함의 문처럼 만들어서 핸들을 돌려 문을 잠그고 나면 외부의 공기가 전혀 들어갈 수 없도록 완벽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탄약고 안에 습기가 절대로 차지 않도록 하였다고 한다.
현재 탄약고 한개는 문서 보존서 내에 있으나 지금은 해군에서 관리하고 나머지는 1개는 sk뷰아파트 후문쪽 이었으나 아파트기초공사시 굴착하여 없어 졌다.
용호 장자등 구남 포진지 공급수 취수장 탱크
포대와 탄약고의 방수장치 석면포10겹에아스콘처리
연결석면포3겹에 아스콘처리
제2장 지명의 유래
1. 이기대(二妓臺) 의기대(義妓臺) (문화전설)
두 의기가 동래 점령지 관할 장수 기시와고이소를 치마폭으로 감싸 투신한곳
둥근 (?) 돌개구멍(과거공용발자욱)에 물을부어 반도의 높은 문화를 즐긴 곳 이곳이 이기대다
안압지 처럼 술잔을뛰워 흥을돋운곳 아래 원형과 두곳추정
괭생이모자반이 뒤엉킨 저바다 낚시꾼이 서 있는 저 곳에서 외장을 감싸 않고 같이 바다에 뛰어들어가
괭생이모자반에 뒤엉켜 주검을 맞이한 의기의 한이서린곳
두 의기의 무덤을 발견 당시의 모습 묘지라기보다 잡목이우거진 등으로
남구청이 매년 벌초를 하고 있다
이기대는 동산(瞳山)동쪽 목 너머 남쪽해안 넓은 반석이다 .
동산말에서 오륙도에 이르기까지 조간대에는 보호종인 개바다말(거머리말과)이 생육 및 발육상태가 양호한 것으로 확인됐고 다양한 해조류가 서식하고 있으나 연안의 하수방류수의 영향을 받아 부유토가 침전되어 산호말의 갯녹음이 가속되고 있다.
그 당시 공부(公簿)마저 변변한 기록이 없는 이기대(二妓臺)는 다양한 의견이 있었으나 구전(舊傳)에 의하면 임진왜란 첫날1592년음4월13일 (양력5월23일)밤 동산에서 왜놈을 정탐하다 개의 울음소리에 왜병들이 산위에 까지올라 오자 기생은 숨을 곳을 찾아 헤매었다. 발 빠른 병사들이었다. 비탈길 옆 작은 석굴을 발견하고 숨어들었다. 석굴 앞에서 개는 왜병들의 움직임 에 계속 짖었다.
왜병들은 동굴을 향하여 여러 번 무어라 고래고래 고함을 내뱉었다.
누렁이는 왜병이 가까이 올라오자 달려들며 달빛에 하얀 이빨이 빛나는 순간 총소리가 메아리쳐 들려 왔다.
누렁이의 살벌한 짖는 소리를 들을 수 없었다.
왜병들은 낄낄 거리며 동산말 선착장으로 내려갔다.
남이와 경이 자매는 꼭 껴안은 채 적막이 잠긴 석굴에서 엉금엉금 기어 나와 주위를 살폈다.
이 석굴을 각시 당이라 하며 음력 4월25일에 제를 올리고 어민들이 배를 진수 하면 오방색과 흰 소복을 만들어 각시 당에 바쳐 바다에서의 무사를 비는 곳이기도 하다
왜군은 단숨에 부산진성을 점령하고 왜관의 도움으로 별 저항을 받지 않고 수영 성까지 도달하였다. 수영 성을 함락시키고 군을 재정비하였다.
전투부대는 북진을 계속하며 큰 항쟁을 받지 않았다.
수영성에서 점령지를 관할하는 기시(岸)대장과 고이소(小磯)부 대장은 성격이 포악하고 주색을 즐기는 전형적인 왜놈이었다. 침략군에 빌붙은 몇몇 관리들은 아부하기 시작하였다 .
일패 기생을 소개하고 이름난 요정을 찾아가며 비위를 맞추기 시작하였다.
점령지가 평정되고 주민들도 생업에 돌아가는 분위기를 감지한 고이소(小磯) 는 왜관 통역관과 조선 관료 몇몇을 불러 들여 경치 좋은 곳을 물었다 .
통역관은 금정산을 추천하였다
의심이 많은 기시(岸)는 산보다 툭 트인 바닷가를 선호하였다
결국 일본을 바라볼 수 있는 장자산 해안가를 추천 하였다
기시(岸)와 고이소(小磯)는 부관과 오장등 오륙명을 대동하고 조선기생 5명과 악기를 다루는 일본 기생 3명을 데리고 전함을 타고 장자산해안 장바위에 정박하였다.
장바위에서 백 여 보 떨어진 넓은 반석에 자리를 마련하여 여흥을 즐기든 왜병들은 취기가 오를수록 짐승에 가까운 짓을 서슴없이 저질렀다
조선기생들은 처음 당해보는 왜병의 추행에 치를 떨었다
기생들이 반항 할수록 술에 취한 왜병들은 미쳐 날뛰며 추행을 즐겼다
경치 좋은 이곳에서 성전의 축하 잔치가 무르익을수록 미쳐 날뛰는 왜병들은 기생을 껴않고 돌 틈으로 하나둘 숨어들었다
기시(岸)대장과 고이소(小磯).는 신라의 안압지처럼 돌개구멍에 바닷물을 넘치도록 퍼붓고 술잔을 띄우며 즐기는 독특한 술버릇이 있었다. 술이 거나하여 기생의 부축으로 간신이 걸을 정도 이었다.
눈은 반쯤 감긴 채로 윗옷은 풀어 흐느적거렸다
바다에는 가마우지가 먹이잡이에 물속을 드나들었다
기시(岸)와 고이소(小磯)는 기생의 부축을 받으며 동해바다를 바라보며 오줌을 누기 시작했다
이 순간 두기 생은 치마를 풀어 외장을 감사며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한 기생은 오장 요나이 (米內)에게 추행당하며 이 순간을 지켜본 것이다
파도소리만 들렸다
두기생과 기시(岸) 대장 그리고 고이소(小磯)부대장이 괭생이모자반 위에 떠있는 것을 본 것은 30여분이 지나서 요나이 (米內) 오장이발견하였다.
요나이(米內) 오장의 고함소리에 부관과 참모가 옷을 걸치며 달려오고 전함의 병사들이 모여들어 시신을 수습하였다
그리고 서둘러 조선기생의 시신은 남겨두고 본대로 돌아갔다
이들은 치열한 전투중 기생과 축하잔치를 하다가 물에 빠져 죽은 것이 밝혀지면 문책 당 할 것이 두려워 입을 맞추어 실족하여 죽은 것으로 보고하기로 하여 남은기생들도 무사하였다
음력 4월25일 남이와 경아 두 기생이 기시(岸)와 고이소(小磯) 부대장과 바다에 뛰어 드는 것을
지켜본 기생은 마을 주민들에게 알리고 반석에 있는 두기생의 뒤처리를 부탁하고 돌아갔다
두 기생은 철따라 농사짓는 법을 가르치고 홍수와 가뭄을 대비하여 관계시설을 만들어 해마다 풍년 들게 하고 농번기가 끝나면, 물때를 정확히 맞추어 바다에 나가 그물을 치게 하니 언제나 만선으로 돌아 왔다,
해풍에 약발이 오른 초목으로 병든 마을 사람들을 치유토록 하였다.
밤이면 마을 사람을 모아 글을 가르치니 기생은 마을의 촌장이며 의사이고 신(神)이었다.
주민들은 1592년음력4월27일(25일사망) 두기생의 시신을 수습하여 동해바다가 가려지는 작은 등뒤에 상좌에 남이기생을 그 아래 동생 경아의 무덤을 만들었다.
그 후 정유재란까지 7년 전쟁 이 끝난 2년 후 목 너머 반석에서 기생들이 신축년(辛丑)1601년 4월 25일 바다 에서 전사한 영혼과 두 기생을 추모하는 무혼 굿을 한 장소를 이기대 라 하였다고 한다. 지금은 선돌에 이기대 (二妓臺)음각으로 새겨져 있다.
(전쟁중에는 왜군의 눈을피해 리부지(利扶地)라 하였다)
조선시대 공부(公簿)등의 기록은 찾을 수 없으나 1850년 경상좌수사 이형하(李亨夏)가 내영지(來營誌) 산천조(山川條)에 이기대를 설명하기를(左營南十五里( 二妓臺)上有 二妓塚云)라 장소와 기생묘지로 추정되는 두기의 무덤이 있다는 것 이외 상세한 자료는 없었다.
(경상좌수사 이영하가 두기생의 묘를 총이라한것은 258년이 경과하고 발굴하지 않아 확실한 자료가 없었기에 그리하였을것이다)
좌영15리를 구글 어스로 거리측정결과 약5.8km 지점에 우거진 잡목과 잡풀 속에 어렴풋이 분간되는 큰 묘(塚)를 발견하기에 이르렀다. 묘의 앞에는 긴 웅덩이가 2개 있었다 .어떤 의미의 웅덩이었는지는 알수 없었다. 개구리들이 봄이면
매년 찾아와 슬피 울부짖고 알을 낳고는 숲속으로 사라진다.
이기대는 천혜의 자연 보존지역으로 반딧불이 와 애반디가 서식하고 있다.
해마다 반딧불이 축제를 벌여 그 존재 가치를 알릴 정도로 수가 급격히 줄고 있어 보호와 보존 전략이 시급히 요구되는 생물이다. 반딧불 이를 복원하기 위해 민간단체와 꾸준히 노력을 기울여야 할 가치 있는 사업이라고 판단하고 있으나 아직은 효과가 미미한 편이며, 희소성으로 2011년7월27일 이전으로 생태 복원이 절실한 실정이다.
해파랑길 장자산 도시자연공원 구간 갈맷길 을 재정비 하지 않으면 지금처럼 많은 관광객이 찾지 않을 수 도 있다. 산책로의 폭과 바닥의 정비가 시급하며 지명의 표지와 해설사의 상시 활동이 요구 되고 있다
*1)기시(岸) 란 성은 임지왜란 이기대 반석 언덕에서 기생을 추행한 것을 숨기고 공을 세웠다고 기시(岸) 라하였으며 일본 56대 기시 노부스케(岸 信介)와 같은성씨이다
2)고이소 (小磯)란 성도 임진왜란 이기대 반석 물가에서 기생을 추행하다 죽은 것을 전공으로 기록하여 그 후 고이소 (小磯)라 하였으며같은성씨로 대표적인 인물은 41대 총리 고이소 구니아키(小磯 國昭)가 있다
3)요나이(米內)란 이름도 임진왜란 이기대에서 아름다운 기생들 틈에서 추행을 하고 문책이 두려워 간부들과 입을 맞춘 전형적인 간사한 왜놈이었다. 그러나 그 또한 인품에 어울리는 요나이(米內)로 일본37대 총리 요나이 미쓰마사(米內光政) 와 같은 성씨다
이기대 4-8 2713-1 발견당시묘지 4-8 70076 /77 벌초한 묘지 9-8 761-762
*이개대 와 의기대에 관한 상세의견 별첨 수록
(부록)별첨 참고
이기대와 의기대
1. 들어가면서
부산의 절경일 뿐만 아니라 남구의 절경인 이기대는 해안산책로 외에 우리들에게 알려진 것이 없다. 우리들은 남구의 해안인 섶자리, 백운포, 신선대는 가치를 알지 못하고 개발로 말미암아 훼손되어 우리 곁에서 멀어져 있다.
1993년 이래 ‘이기대냐 의기대이냐’에 대한 매스컴의 논란이 있었다. 그 동안 이기대의 주인공인 이름도 모르는 두 기생에 대하여 문헌 부족으로 진위를 파악하기 힘들지만, 이기대에는 두 기생의 무덤이 있다는 문헌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세인들의 관심을 끌지 않은 것은 지역의 문화의 무관심의 연유라고 할 수밖에 없다. 이제 문헌과 구전으로 전해진 이기대의 현실과 두 기생이 의기라는 진실을 밝히고자 한다.
2. 이기대에 대한 문헌
1) 이기대의 명칭
이기대에 대한 문헌은 이형하가 1849년에서 1850년 8월까지 경상좌수사로 역임하고 1850년 9월에 통정대부(通情大夫) 행절도사(行節度使) 승정원우부승지(承政院右副承旨) 겸경연참찬관(兼經筵參贊官)로 있으면서 저술한 ‘내영지(萊營誌)’ 또는 동래영지(東萊營誌)가 이기대에 대한 유일한 문헌으로 소개되어 있다. 기타 문헌으로는 ‘부산지명총람’과 ‘남구민속과 문화’인데 그 내용은 아래와 같다.
左營南十五里이기대 上有二妓塚云(좌수영 남쪽 15리에 규모가 큰 두 기생의 무덤이 있어 그렇게 불린다.(李亨夏, 萊營誌, 山川條, p, 43) 지명없이 상유이기총운
그지명은 석벽에 새겨진 이기대상유에 묘지가 있다라고 봐야 할것이다
左營南十五里 上有二妓場云(부산시사편찬위원회, 부산지명총람, 1997, p, 79))
左營南十五里 上有二妓臺云(남구민속회, 남구민속과 문화)2001, p, 197))
이들 문헌에서 이기대에 있는 두 기생의 무덤을 이기총(二妓塚), 이기장(二妓場), 이기대(二妓臺)라고 달리 기록되어 있는데, 첫 번째의 ‘二妓塚’은 ‘두 기생의 큰 무덤’, 두 번째의 ‘二妓場’은 ‘두 기생에게 제사를 지내주었던 터’, 세 번째의 二妓臺는 문맥상으로 맞지 않는다. 그러므로 ‘二妓場’이나 ‘二妓臺’는 원문(二妓塚)을 옮겨 적을 때 생긴 잘못 적었던 오류라고 사료된다. 그리고 현재 이기대에 있는 이기대의 유래의 기록에 ‘二妓塚’이라고 잘못 기록된 것은 조속히 원문대로 수정해야 할 것이다.
3. 이기대와 의기대
이기대 지명에 대한 설은 기생설(妓生說), 무덤설, 의기설(義妓說) 세 가지가 있다.
1) 기생설(妓生說)
항간에서 경상좌수사가 두 명의 기생과 함께 이곳에서 놀았던 곳이라고 하여 이기대라고 하였다는 이야기가 오래 전부터 남구지역에서 전해내려 왔다. 이 전설이 어느 때부터 전해졌는지 모르지만, 아마 그리 100년 미만이었을 것이라고 사료된다. 이곳의 지명이 기생에 관련되었기 때문에 기생이라면 남자와 함께 노는 직업이라는 전제아래 이야기를 만들었을 것이다. 조선조 당시 동래군 남면에서 가장 고위층이 경상좌수사였기 때문에 이기대의 유래를 좌수사와 두 기생들과 이곳에서 놀았다고 추측했던 것 같다. 이 설을 말한 사람은 내영지에 기생의 무덤이 큰 무덤(塚)이 있다는 기록을 잘 알지 못하였던 것 같다. 기생설은 잘못된 이야기에 불과하다고 사료된다.
2) 큰 무덤설(二妓塚說)
이형하는 지금부터 161년 전인 1850년에 내영지 산천조에 이기대의 유래에 대하여, “두 기생의 큰 무덤(塚)이 있어서 이기대라 불린다.” 라고 기술되어 있다. 실제로 이기대에는 내영지에 기술된 대로 두 기생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2기의 큰 무덤이 현존하고 있다. 이것이 두 기생의 무덤으로 추정된다. 객관적으로 보아 이기대의 유래에 대한 설명으로 가장 타당하다.
3) 의기대설(義妓臺說)
이기대의 명칭에 대한 논란은 18년 전에 TV와 신문지상에서 거론된 바가 있었다. 향토사학자인 최한복(崔漢福 : 1895 ~ 1968)은 그의 저서인 수영유필(水營遺筆)의 수영팔경(水營八景) 중에 남양낙안(南陽落雁)이란 글에서 이기대를 의기대(義妓臺)라고 언급하였다.
석양 비낀 양장로(羊腸路)로 신선대 찾아가니i 신선이 안재재(安在哉, 어디 있겠는가)오. 빈 배 홀로 뿐이로다.i 오륙도 곁에 두고 경치 좋아 내려가니, 절벽 거꾸러진 곳이 창해가 지척이라. 석벽에 새긴 글자 의기대(義妓臺)가 여기로다.i 의기의 천추 원한 망경대(望境臺, 광안리 해수욕장 북쪽 언덕의 대) 전(前) 백마탄(白馬灘)과 박모(薄暮)에 울어 있다.
(모순)최한복의 남양낙안 석벽에 새긴글자 의기대는 풍문을 들은것이며 현장에 가 봤드라면 이기대라고 했을것이다
그리고 1961년 그를 찾아간 박주홍 교수(당시 동아대학교 교수, 한글학회 이사)에게 의기(義妓)가 누구인지 아무리 조사해도 알 수가 없다고 했다. 그가 박 교수에게 말한 내용은 아래와 같다.
임진왜란 때 왜구들이 수영성을 함락시키고서는 부근의 경치 좋은 곳을 가려 축하잔치를 열었다. 그 때 수영의 한 의로운 기생이 자청해서 그 잔치에 참가하여 왜장에게 술을 잔뜩 권하고서는 술 취한 왜장을 끌어안고 물속에 떨어져 죽었다. 그래서 뒷날 이 대를 이기대라고 부르게 되었다.(부산일보 1993년 7월 22일 자)
최한복의 구전은 이형하에 비하여 구체적으로 표현하였다. 최한복은 좌수영에서 19세기에 수영에서 태어나 1960년대까지 어렸을 때부터 상세하지는 않지만, 수영에서 전해 내려왔던 이기대에서 왜장과 함께 바다에 빠져 죽은 기생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성장했다고 사료된다. 그러나 그는 이기대의 주인공 기생은 왜장이 배설한 잔치에 자청한 한 명의 의로운 기생이라고 하였고, 이 의로운 기생으로 의기대(義妓臺)라고 불렀고, 석벽에 義妓臺라고 적혀 있다고 하였다. 그는 기생이 살았던 곳이 수영이라고 하였고, 그가 아무리 조사하여도 그 기생이 왜장과 순사했다는 사실과 기생의 이름을 알 길이 없다고 인정하였다.
최한복은 왜장의 승전연회(勝戰宴會)에 자원했던 기생의 수가 한 명이라고 하지만, 이기대에 2기의 묘가 현존하고 있기 때문에 기생은 내영지의 내용과 같이 두 명이 옳다. 그의 시에 적혀있는 석벽 즉 각자(刻字)바위에 의기대가 아니라, 二妓臺라고 각자되어 있기 때문에 이곳을 이기대라고 하는 것이 옳다. 박지홍 교수는 수영의 향토사학자인 최한복의 의기대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그의 말에 동의하여 의기각(義妓閣)이라도 세워드려야 의기의 원한이 풀리지 않겠는가고 하였다.
4. 의기라는 전설의 타당성
일반 기생이 할 수 없는 의로운 일을 하였을 때, 그녀를 의기라고 할 것이다. 최한복은 이기대에서 죽은 기생을 의기라고 하고, 그곳의 지명도 의기대라고 불렀다고 하였다. 이기대에서 죽은 기생이 의기라고 칭해야 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내영지 서문
이형하가 경상좌수사로 부임하여 측근의 사람들에게 동래현의 군사, 지리, 인물, 산천, 풍속, 군무, 성씨 등 전반에 걸쳐 기록한 것이 내영지였다.
내영지 서문에 이형하는 이 책을 저술했던 목적이 아래와 같이 기술되어 있다.
.......기록이 제대로 정리되어 있지 않았다. 그는 옛날 영지(營誌)에 남은 글이라고 두서너 건에 지나지 않으니 지극히 소략하다. 마침 나의 족인(族人) 상사(上舍)가 다시 왔고 좌수영의 책실(冊室)로 있는 현도(玄都)가 거듭 찾아와서는 보고 들은 것을 서로 참조하고 사적을 수집하여 부연하여 늘이고 번거로운 것은 깎아 버리고 한 책을 만들어 참고의 자료로 삼으니 내 마음을 알아 준 것이라 하리라.
아아! 옛날 임진년의 변란에 송상현, 정발, 윤홍신 세 분이 차례로 순절하고 막하의 장수와 기첩 및 병사와 주민들이 죽음 알기를 제 집으로 찾아가 듯 여긴 자가 많았다......(중략)
적에게 대항하였던 이들의 훌륭한 이름은 산과 바다를 두고 변치 말자. 맹세한 공신의 철권(鐵拳)에 실리지 않았으며, 황령산의 지는 달과 장산 냇가의 가을비는 귀신이 하소연하는 듯 구슬프다. 아아! 참혹하여라. 지금까지 수백 년 동안 사적이 묻힌 채 알려지지 않았으니 얼마나 통탄할 일이냐!
이형하는 이 책을 쓰게 된 동기는 자신이 좌수사가 되어 경상좌수영 임지에서 살펴보니, 과거 이 지역의 역사적 자료와 기록이 거의 없었다고 하였다. 그리고 그는 임진왜란에 왜적에 대항하였던 송상현, 정발, 윤홍신, 장수, 기첩(妓妾), 병사와 주민들의 공적과 군사기록이 제대로 정리되지 않았고 임진난에 죽은 25명 공신의 공적을 인정받지 못한 것을 통탄하면서 이 책을 저술하였다고 하였다.
조선조에 신분의 차례대로 임진란의 공적의 순위대로 기록했다면, 임진란 시에 부산, 동래지역에서 왜군과 싸우다가 장렬하게 전사한 송상현, 정발, 윤홍신의 3명 뒤에 장수, 병사, 주민과 기첩 순으로 기록되어야 했다. 내영지의 기록에는 신분대로 기록되지 않고 장수 다음에 가장 천한 기첩이 기록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신분을 뛰어넘은 파격적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 내용은 임진왜란 당시에 연약한 여성이지만 공적을 세운 기첩이 있었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표현했다고 할 수 있다.
2) 이기대 주인공은 공적이 있는 기생이다.
무덤을 뜻하는 글자는 능(場)과 총(塚) 외에 능(陵), 분(墳)과 묘(墓)가 있다. 이것들의 차이는 陵은 왕이나 왕비의 무덤이며, 塚은 규모가 큰 무덤이고, 평민들의 규모가 작은 무덤은 墳과 墓이다.
장자산 아래 이기대에는 다른 무덤에 비하여 규모가 큰 두 무덤이 있는데 내영지의 산천조에 기술된 무덤과 일치된다. 이 무덤의 위치는 붉은 글자로 이기대(二妓臺)라고 쓰인 각자(刻字)가 있는 공룡바위에서 정남향으로 약 100m 정도 떨어진 야산에 위치하고 있으며, 이곳 원주민에 의하면 삼백 년 이상이 된 묘소라고 하였다. 그리고 이 무덤의 특징은 지관에 의해 방위를 잡아 조성된 것이 아니라 바다너머 기생의 고향인 수영을 향하고 있다는 점이다. 무덤은 아래 위쪽으로 배치되어 있으며, 두 무덤 모두 축대와 봉분만 있고 울타리가 되는 곡장(곡장)이 없다는 점과 상석이 없다. 규모는 직경이 각각 5.3m(둘레 : 16.10m)와 5.1m(둘레 : 16.30)이다.
이들 두 무덤이 크기가 비슷하고, 양식이 동일하기 때문에 동시대에 조성되었다는 것을 확실하다고 하겠다. 그리고 큰 무덤이지만 비석이 없다는 것은 무덤의 망자가 누구인지 모르나, 나라에 공적이 있다는 것을 추측할 수 있다. 그리고 상석이 없다는 것은 여자의 묘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일반적으로 조선조에는 기생의 무덤은 아이들 무덤과 같이 작게 조성하였다. 이기대의 무덤의 규모는 웬만한 관직에 있었던 사람보다도 큰 편이기 때문에 이기대에서 죽은 두 기생은 공적이 있었다고 추측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면 두 기생은 임진란 때에 애국충절의 큰일을 하다가 죽었기에 큰 무덤이 조성되었다고 충분히 추정할 수 있다.
첫째, 두 기생이 임진왜란에 의기로 죽었다면, 그 당시에 석포에 편입되어 있었던 용호동에 사람들이 거주하지 않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왜냐하면 거의 용호초등학교의 위쪽 솔밭근처에까지 갈대밭으로 우거진 곳이었다고 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거의 거주하지 않았을 것이다. 육로로 이기대에 닿으려면 생천향(生川鄕 또는 生川堰, 현재 대연동)을 지나 마장(馬場)이 있었던 석포(石浦 대연 4동)을 지나 신선대를 거쳐 이기대에 도착했을 것이다. 지리적으로 사람의 발이 잘 닿지 않았던 지역에 큰 무덤을 조성한 것은 고관대작이 아니라 기생과 같은 의외의 인물일 것으로 추정된다.
둘째, 조선조에 지관도 없이 큰 규모의 유택을 조성했다는 것은임진왜란과 같이 전란 중 급박한 시기에 급하게 조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셋째, 용호동 원주민이었던 왕기세(王基世)의 구전에 의하면, 그는 1930년대에 이기대의 두 기생의 무덤에 찾은 초량기방의 기생들을 안내하였다. 기생들이 무덤 앞에서 가야금 등을 연주하며 두 기생의 넋을 위로해주었다고 한다. 두 기생들이 나라를 위해 순사하였는데, 지역의 민(民)과 관(官)은 의로운 기생을 잊었으나, 오래 전부터 기생들 사이에서 전해 내려온 ‘전설의 이기대의 두 기생’의 넋을 달래러 초량기방의 기생들이 찾아왔다는 것에서 이곳은 두 기생의 무덤이 확실하다고 하겠다. 이 내용의 제보는 왕기세의 손자인 왕정문 씨가 하였고, 왕 씨의 선산의 묘소들은 두 기생의 묘소에서 바로 보이는 곳에 있기 때문에 정확하다고 하겠다.
2) 전설도 문화이다.
419년 전인 임진년(1592년)에 수영의 두 기생이 왜장을 껴안고 이기대의 바다에 순절했던 애국충절을 밝혀줄 문헌이나 자료가 전혀 발견되지 않고 있다. 다만 최한복 씨의 구전만 남아 있고, 내영지의 내용과 같이 큰 규모의 기생의 묘가 현존하고 있다는 점이 이해가 되지 않는 미스터리이다.
임진왜란 초기 왜군들은 우암동에 상륙한 바로 그날 부산진성과 수영성은 초전박살 나서 성안은 초토화되었을 것이며, 성의 안팎에 주검이 널려있었을 것이다. 이 상황에서 왜장이 이기대에서 배설한 연회에 억지로 끌려간 짐꾼 외에 간 사람이 없었을 것이니, 두 기생의 이름이 전해지지 않았을 것이다.
이형하는 이기대에 규모가 큰 2기의 기생 무덤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 이유는 아래와 같이 추정할 수 있다.
첫째, 이형하는 내영지에 관리와 함께 죽었던 기첩 몇 명은 기술하였으나, 왜장과 함께 죽었던 두 기생을 인물조에 언급하지 못하고 산천조에 기술하였다. 그가 내영지를 발간했을 때(1850년)는 임진왜란(1592년)이 일어난 지 258년 전의 사실이므로 실증할 수가 없었다. 둘째, 조선조 후기, 국내의 정치 상황은 갖은 국론 분열, 외침과 천주교 박해 등 국란의 연속이었던 시대에 이기대의 기생의 공적에 대해 생각할 겨를도 없었을 것이다.
셋째, 임진왜란 후에 공적이 누락된 양반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있었으나, 두 기생들이 애국적 행동을 하였더라도, 사회적으로 천민인 이름도 모르는 기생들이 한 일을 기록하는 것을 꺼렸을 것이라고 추측된다.
이기대 유래가 기술된 내영지 기록이야 말로 두 기생에 대한 중요한 단서임에 틀림없다. 내영지의 이기대 기록을 하나의 다빈치 코드로 생각했으면 한다. 기생들의 실명이나 구체적인 애국충절의 행위에 대한 기록이 없었기 때문에 그들의 의로운 내용을 인물조(人物條)에 기록할 수가 없어 이형하는 산천조(山川條)에 “두 기생의 무덤이 있다고 이기대라고 불린다.” 라고 기술하였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즉 신분의 차이가 뚜렷했던 시대의 한계 때문에 그는 기생의 큰 무덤이 있는 이기대를 산천조(山川條)에 언급했을 것으로 가정해 볼 수 있다. 만일 그렇다면 내영지의 기록을 단순한 문자적으로만 단순한 해석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이기대의 두 기생의 산소의 비밀을 다빈치 코드처럼 견해를 달리 추리하여 재해석하지 않으면 임진왜란 시 순사한 두 기생의 비밀이 풀리 지 않을 것이다.
실제로 두 기생이 임진왜란 시 왜장을 껴안고 순사한 의로운 사건에 대한 기록이 없기 때문에 두 기생이 충절은 밝힐 수가 없다. 내영지에 이기대 두 기생의 무덤을 塚이라고 분명히 기술되어 있고, 이기대에는 모양과 조성 시대가 동일한 2기의 큰 무덤이 있기 때문에 이 무덤이 기생의 유택이라고 할 수 있다. 임진왜란 당시에 사람이 많이 거주하지 않았던 용호동에 두 기생의 무덤이 塚이 될 만큼 크게 만들었다는 의문이 있다. 기생의 무덤을 장난으로 크게 만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19세기에 수영에서 출생한 최한복 구전이야 말로 의기임을 밝혀주는 유일한 단서라고 할 수 있다.
내영지야 말로 이기대의 비밀을 풀 수 있는 유일하고도 소중한 단서라고 본다. 이것과 최한복과 왕기세의 구전을 적용하면 숨겨진 역사의 코드를 풀 수 있을 것이다. 그래야만이 임진왜란 시 이곳에서 왜장을 껴안고 바다에 빠져 순사했던 이름도 모르는 두 기생의 공적을 기려 큰 무덤을 조성했으나, 알려지지 않고 지금에 이르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순사한 것으로 추정되는 이기대의 두 기생의 묘까지 찾았으나, 기록이 없기 때문에 두 기생의 애국충절을 밝힐 수가 없어 전설에 묻혀두어야 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두 기생의 묘와 전설이 있다는 것만 해도 부산과 남구의 소중한 문화이다. 이러한 문화라도 가꾸어 나가야 할 것이다. 그래야 사후에 큰 무덤에 묻혔을 뿐 아무런 공적의 치하나 위로를 받지 못한 의기의 정신만은 후대가 길이 기려야 하는 것이 마땅하기 때문이다.
5. 결어
전설이 많지 않은 부산에 이기대의 두 기생의 큰 산소가 현존하고 있음은 내영지의 기록과 일치된다. 그러나 사실을 증명할 길이 없어도, 이형하가 저술한 내영지의 저술 동기와 산천조에 이기대에 대한 기록은 마치 다빈치 코드처럼 추리하여 재해석해야 이기대의 비밀이 풀 수 있는 유일한 단서일 것이다. 내영지의 저술 목적에 기첩의 언급과 산천조의 이기대의 두 기생의 무덤이 塚이라는 단서가 바로 해답이다. 그렇지만 엄정하고 정확하게 기록되었던 군사 저서인 내영지에 이기대에 대한 기록과 같이 2기의 큰 무덤이 현존하고 있다. 신분에 의하여 사후에도 무덤이 초라해야 할 기생이지만 그들의 무덤이 당시의 묘에 비해 엄청나게 큰 규모라는 것을 보아, 이들 기생은 예사로운 인물이 아니라, 최한복과 왕기세의 구전처럼 임진왜란 시에 왜장 껴안고 죽은 애국충절의 의기였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19년 전에도 이기대냐, 의기대냐에 대한 논란이 있었으나 남구지역인은 무관심하였다. 이기대의 기생의 경우에 확실한 증거에 의해 결정되는 국가유공자나 훈장(勳章)을 결정하는 것과는 다르다고 본다. 이기대의 의기라는 사실에 대하여 최한복, 박주홍 교수, 남구갑의 김정훈 국회의원들과 이종철 남구청장, 왕정문 등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사실을 밝히려고 최선을 다하였다. 그러나 최한복의 구전과 같이 이상 더 자료를 찾을 수 없었다는 말이 옳다. 그러나 이기대의 전설이 사실과 너무 유사하다. 두 기생의 무덤이 내영지 기록과 같이 현존하기 때문에 굳이 의기라는 것을 고증할 수 없다고 하면, 기본적인 의기대의 구전된 내용을 바탕으로 새로운 전설을 만들 수밖에 없다고 본다. 이것은 문화적, 교육적으로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구전에 의한 두 기생의 의로움에 대한 예를 갖춰야 하는 것이 도리일 것이다.
이제는 내영지의 기록과 이기대의 무덤이 사실을 고려하여 우리들은 충절의 두 기생의 공로를 인정해 주어야 할 것인지 아니면 증거가 있을 때까지 기다려야 할런지 결단 내려야 할 것이다.
참고문헌
부산광역시사편찬위원회(1997), 부산지명총람, 부산 : 대원인쇄문화사
부산남구민속회(2001), 남구의 민속과 문화, 부산 : 인쇄골
부산일보(1993), 7월 22일
李亨夏(1850), 萊營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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