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 제석당전경(수리전)
천제석 부분 수리후모습
장자산 산신 지위 (長子山 山身 之位)
산신제석. 용신제석.부루제석
산신제석. 용신제석.부루제석
천제석 3불제석(三佛帝釋)님께 복을청하는 기도문 2019
개천절노래가사
1)우리가 물이라면 새암이있고 우리가 나무라면 뿌리가 있다
이 나라 한아바님은 단군이시니 이 나라 한아바님은 단군이시니
2)백두산 높은터에 부자요부부 성인의 자취따라 하늘이 텄다
이 날이 시월상달에 초사흘이니 이 날이 시월상달에 초사흘이니
3)오래다 멀다해도 줄기는 하나 다 시필 단목잎에 삼천리 곱다
잘 받아 빛내오리다 맹세하노니 잘 받아 빛내오리다 맹세하노니
환웅(桓雄)천신(天神)아들 환인(桓因)손자 단군(檀君)
‘開天’의 진정한 뜻을 따져보면 단군의 ‘건국일’이라기보다는, 124년 전 환웅이 천신(天神) 환인의 뜻을 받들어 태백산 신단수(神檀樹)로 내려와 신시(神市)를 열고 홍익인간, 이화세계의 대업을 시작한 서기전 2457년 건국한 날 이기도하다.
우리나라의 개천절(開天節)기원전 2333년10월3일 단군조선을 건국하였다 .
우리나라에서는 제석(帝釋)신을 일찍 받아 들여서 다른 신들에 비하여 그 격(格)을 높게 하여 추앙하였다. 이는 우리나라 건국신화에 보면 단군의 할아버지 환인이 세상에 내려가기를 원하는 한웅에게 천부인(天符印 거울.검.방울) 세 개를 주어 세상을 다스리게 했다는 설에서 보듯이 천신의 개념은 훗날 제석 (석(釋)은 석가모니의 약칭)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제석은 단군신화(檀君神話)에 나오는 환인(桓因)제석을 기원으로 한다.
환인은 한자로 표기되기 이전에 하느님·수리님이나 ,한님·한인 등으로 불렸을 것으로 보이고, 그 한자 표기는 불교의 석가제환인 다라(釋迦提桓因陀羅) 또는 제석환인(帝釋桓因 : Sakra-Devanam Indra)에서 온 것이다. 제석은 원래 인드라(Indra)라는 인도 신령의 중국 역어(譯語)이다.
한민족은 고조선 이래, 특히 고대사회에서 각 나라별로 봄·가을에 크게 모여 천제(天祭)를 올렸다. 부여의 영고(迎鼓), 고구려의 동맹(東盟), 예의 무천(舞天) 등이 그런 것들이다. 여기서는 한민족의 천신을 비롯하여 여러 신령이 모셔졌다.
불교가 융성한 통일신라시대를 거치면서 천신은 제석이라는 불교적 명칭으로 불리게 된다.
고려의 승려 일연(一然)이 삼국유사(三國遺事)에서 단군의 할아버지인 한민족의 천신을 환인제석이라 표기한 것은 그러한 배경을 갖는다.
제석 신앙에서 천부인은 산에 올라 산신제석(天), 들로 내려 용신제석 (땅),집으로 들어 부루 제석(夫婁帝釋) 이다. 이를 삼불제석이라 하고 천왕제석 이라 청한다.
삼불제석은 고깔을 쓴 모습에 가사와 장삼을 걸치고 염주를 들거나 목에 걸은 모습의 삼불제석으로 표현한 것이다.
용호동 천제석 삼불제석은 어른 주먹만 한 신석에 흰 종이 장삼과 종이고깔을 쓴 모습에 오색 줄을 허리에 두른 모습으로 붉은 방석위에 모셨다.
제석에 대한 신앙은 조선왕조의 지속된 억누름과 일제의 탄압과 광복 이후의 서양의 합리주의 내지 기독교적 가치관의 횡행 및 급격한 산업화를 거치면서도 제석신앙은 그 질긴 생명력으로 깊은 산중이나 절간의 명부전에 모시기도 하였다. 집안의 제석신앙은 주거환경의 변화와 미신타파운동에 밀려 1970∼1980년대를 거치면서 거의 소멸되고 말았다.
그러나 부산남구 용호동은 제석신앙 삼불제석을 모신 천제석당과 작은 산신당이 보존되어 있으며
동제를 봉행하는 음력9월9일 진시에 삼불제석님을 청하여 오신 청배한다.
주관은 용호 향우회 회원들이 용호동민의 명과 복을 빌며 행복이 가정에 충만하길 바란다.
신을 모시는 무(巫)당은 깊은 밤에 제석골 천재석을 찾아 촛불과 향을 피워 오신 한다. 제석신을 지방 에서는 방 안 다락이나 부엌 한 귀퉁이에 쌀 또는 조를 담은 조그만 단지를 모시고 여러 헝겊조각을 단지에다 늘여놓고는 제석. 세존. 시존. 조상단지라 칭하기도 한다. 안방의 벽에 주머니를 만들어 쌀 3되가량 넣어놓고 ‘제석주머니’라 부르는 예도 있다. 칠월칠석날 아침 그 쌀을 꺼내 밥을 짓고 미역국과 함께 차려 간단한 의례를 지낸 다음 가족들과 먹는다. 그 뒤 시월 추수한 햅쌀을 잘 말려 그 빈 주머니에 다시 채운다.
남쪽지방에서는 일제 강점기까지만 해도 아예 대청이나 곳간에 큰항아리를 두고 햇곡식을 넣어서 이것을 제석단지·세존단지·천왕독이라 불렀다.
칠성 불을 먼저 켠다.
제석(帝釋)님을 청하여 오신(娛神)하는 내용과 청배하는 제석님들
칠성님전 명을 빌며,
제석당 천왕 제석(帝釋)님 기도문
산에 올라 산신제석 ,들에 내려 용산제석, 집으로 들어 부루 제석 삼불제석님 모시고
환인제석 환웅제석. 왕검제석. 삼신제석. 대함제석. 진제 석요.
제불제천. 삼이삼천. 일월용왕. 항사제석. 해가 돋아. 일광제석.
달이 돋아. 월광제석. 일광월광. 양일 광이. 비취어서. 여함으로.
삼제사경. 백옥남산. 불사제석. 안에 안당. 안당제석. 전대 받아.
전대제석. 후대제석. 후대 받아 바가지로. 넝쿨제석.넝클 항아리로.
백함제석.사해로는. 용신제석. 애기 방에. 삼신제석. 삼사랑은.
심중제석.하위받아. 들으시고. 이정성에. 심중소원, 도와주자.
동두칠성. 서두칠성. 남두칠성. 북두칠성. 천상옥황. 한가운데.
삼태육성. 사부칠성. 선대부터. 위하시던. 조상칠성. 하위 받아.
용호 동민 짧은 명을. 이으시고, 긴 명들은. 서리어서. 삼천갑자.
동방삭이. 명도타고. 명을 주어. 기른 듯이. 석자세치. 손수건에.
자 여섯치. 홀꼬갈에. 일곱자라. 일곱치를. 슬하에둔. 남녀자손.
명다리로. 받으시고. 마흔대자. 일대동에. 대주님의. 명다리요.
서른대자. 일대동에. 기주님의. 복다리로. 받으시구. 복을주고.
기른듯이. 수명장수. 도우소사. 수물대자. 도반필은. 열대자로.
지위석영. 쉬흔석영. 양끝에다. 고빌쳐서. 한끝에다. 명을싣고.
또한끝에. 복을실어. 명산대천. 찾아가서. 양유수에. 흐르는물.
백마전에. 새만전에. 받으시고. 해상년은. 2019년이고. 9월달 己巳
존위로는. 12달이라. 금일정성. 정성덕을. 입히시고. 산천맞이.
용신맞이.제석맞이. 일월맞이. 천신맞이. 받으시고. 오늘날로.
용호동민. 심중소원. 이루어주자.
단군영정
제석신앙에 데한 역사기록
우리 나라에서는 그 이름이 단군신화에도 나타난다. 즉, 단군의 할아버지를 묘사할 때 석제환인(釋提桓因)이라고 표기하였다. 그리고 자장(慈藏)이 당나라에 유학하였을 때 중국 청량산(淸凉山)을 참배하였는데, 사람들이 말하기를 제석천왕이 석공(石工)을 데리고 와서 조성한 문수상(文殊像)이라는 기록이 있다.
또, 선덕여왕이 죽기 전에 도리천에 묻어달라고 유언하였는데 뒤에 사천왕사(四天王寺)가 그 왕릉 밑에 건립되어 그 예언이 맞았다는 기사가 있다. 왜냐하면 사왕천(四王天)의 위가 도리천이기 때문에 여왕은 죽기 전에 묻힐 곳을 알았다는 것이다.
우리 나라의 제석신앙은 ‘하늘’에 대한 외경 심리와 결부된다. 불교가 도입되기 이전 막연하게 숭배의 사상이 되었던 하늘에 제석천이 있다는 불교신앙이 도입되면서 그 민간신앙은 이론의 근거를 갖게 된다.
따라서 고대 한국인들은 하늘의 주인과 제석천을 하나로 보았다. ‘한울님’에 관한 원초적 신앙은 유일 창조주를 부정하는 불교의 입장과 위배되었기 때문에 다만 민간신앙으로만 유포되었다. 제석천의 조상(彫像)은 석굴암의 석실에 조성되어 대범천(大梵天)과 나란히 모셔져 있다.
고려시대에는 태조가 919년(태조 2)에 송악으로 도읍을 옮기고 법왕사(法王寺)내제석원(內帝釋院) 등 10대사찰을 건립하였다. 925년에도 외제석원(外帝釋院)을 건립하였으며, 928년에도 제석원을 설치하였다. 1032년(덕종 1) 외제석원에서 왕이 재를 베풀었고, 1060년(문종 14) 정월에는 천제석도량을 문덕전(文德殿)에서 베풀었다.
1085년(선종 2)에도 천제석도량을 문덕전에서 베풀었고, 1098년(숙종 3)에는 왕이 외제석원에 행차하여 재를 베풀었으며, 1099년 정월과 1101년 정월에 천제석도량을 문덕전에서 베풀었다.
이를 통하여 고려에서는 매년 정월에 제석도량을 베푼 것을 알 수 있다. 1107년(예종 2) 정월과 1110년 정월에도 제석도량을 문덕전에서 베풀었고, 1114년 4월에는 예종이 외제석원에 행차하여 공양하였으며, 1130년(인종 8) 정월에는 제석도량을 중화전(重華殿)에서 베풀었다.
1132년 2월에는 천제석도량을 명인전(明仁殿)에서 베풀었고 1148년(의종 2) 정월에는 제석도량을 문덕전에서 베풀었으며, 1176년(명종 6)에는 천제석도량을 명인전에서 베풀고, 1177년 3월에는 제석도량을 내전에서 베풀었으며, 1181년 3월에 제석도량을 명인전에서 베풀었다.
1203년(신종 6) 정월에는 제석도량을 수문전(修文殿)에서 베풀었고 1214년(강종 4) 정월에도 제석도량을 수문전에서 베풀었으며, 같은 해 3월에는 제석재를 행하였다.
1223년(고종 10)에 제석도량을 수문전에서 베풀었고, 1251년에는 천제석도량을 궐안에서 베풀었다. 이와 같이 고려시대에는 제석천에 대한 호국진병(護國鎭兵)의 신앙의식이 많이 행하여졌다.
참고문헌
『삼국유사(三國遺事)』
『고려사(高麗史)』
법당의 삼불제석불의 대표적 모습
무속은 3가지를 빈다. 첫째는 건강하고 오래 살게 해달라고 제적거리를 하고, 이어 부자 되게 해달라고 대감거리를 하고, 평화롭게 해달라고 성주거리를 한다. 그것이 열두거리의 핵심이다.
민속신앙 제석신(帝釋神) 이야기
1. 개요
제석은 불교에서 세계의 중심을 상징하는 수미산 위의 제석천을 주관하는 천신으로 인드라로 불리는 인도의 신령이 불교에 수용되고 중국에 전해지면서 우리나라에 들어와 토착화 된 신이다. 제석신(帝釋神)은 인도의 가장 오래된 경전이자 브라만교의 근본경전인 『리그베다』최고의 신으로서 비와 번개를 동반하며, 악마의 무리를 퇴치하는 무장이기도 하다.
우리나라에서 제석은 생명과 부귀를 상징하며 환인, 환웅, 단군을 삼신으로 모시는 신앙과 결합한다. 그 이유로 제석신앙이 하늘에 대한 외경심리와 결부된 것을 들 수 있다.
불교가 도입되기 전에 지녔던 하늘에 대한 신앙이 불교를 통해서 보다 이론적인 근거를 지니게 되면서, 이에 따라 하늘과 제석천은 자연스레 동격이 되었다. 이에 따라 환인, 환웅, 단군을 3분 제석이라 일컫기도 하며, 그 때에 제석신은 단군신의 현신(現身)을 말한다.
2. 제석의 기원
2-1) 인도 신화 속의 인드라
제석은 불교에 유입되어 법을 수호하는 선한 신으로서 역할하기 이전인 고대 인도부터 신앙되었던 신이다. 인드라는 당시 인도에 원래 살고 있었던 드라비다족의 신이 아니고 아리아인이 북인도로 이주해 오기 이전부터 신앙하고 있던 아리아인들의 민족신이었다.
기원전 1500-600년 이르는 베다시대 동안 제석은 호방한 무용을 자랑하는 신으로 섬겨졌는데, 아리아인들이 북인도로 이주하여 원주민을 정복하는 과정에서 무용신으로 신격화되었다. 그 예로 베다신화에서 제석은 악한 용 브리트라를 정복한 신으로 강한 힘과 용맹성을 가진 것으로 표현된다.
그런데 이 브리트라는 정복된 원주민인 인도의 드라비다족을 뜻한다. 이러한 신화에서 알 수 있듯이 제석은 호방한 용사로서 전쟁수행의 상징적인 역할을 하였고, 군신답게 거대한 체구에 벼락을 상징화한 금강저를 든 모습으로 표현되었다.
우파니샤드 시대에 제석은 아수라와의 싸움에서 승리하여 모든 신을 주재하는 천상의 최고신의 자리에 오른다. 이후 불교에 수용되어서 범천과 함께 석가모니를 호위하고 수호하는 신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불교에 귀의한 이후에는 모습이 달라져서 고상하고 우아한 귀족의 형상으로 나타난다.
2-2) 불교의 제석천
불교에 들어와서 제석은 수행자의 모습으로도 나타나고, 대승불교 시대에는 인간과 매우 친밀한 관계의 신으로 그 성격이 변화하였다. 또한 인다라망의 무기로 아수라의 군대를 정벌하기도 한다. 인다라망은 제석천궁에 장엄된 그물인데 수없이 많은 보배구슬로 이루어져 있고, 흔들면 아름다운 빛을 발한다고 한다. 결국 인다라망이란 모든 세계가 홀로 있지 않고 첩첩이 겹쳐진 가운데 서로 얽히고 부대끼면서 함께 존재한다는 중준무진 법계의 진리에 비유되고 있다.
『잡아함경(雜阿含經)』에는 제석천은 본래 사람이었으나 사문이나 바라문 등의 수행자에게 음식과 재물, 향과 의구와 등불을 베푼 인연으로 제석천이 되었다라고 부처님이 말씀하신 것으로 전하기도 한다. 또한 『화엄경(華嚴經)』의 불승수미정품(佛昇須彌頂品)에도 제석천에 관한 일화가 실려 있다.
석가모니가 성불한 것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마야부인이 그 설법을 듣지 못함을 슬퍼하니, 석가모니는 신통력으로 수미산(須彌山)의 정상(頂上)에 올라 도리천에 있는 제석천(帝釋天)으로 향했다.
그 때 제석천은 저 멀리에서 석가모니가 오는 것을 보고 많은 보배를 뿌린 자리를 만들어 그 위에 또 보배로 된 자리를 몇 겹으로 폈다. 그리고 제석천은 부처님 앞에 합장하고 예배하며 석가모니를 환영하고 궁전을 머물러 줄 것을 청했다.
석가모니는 이 소원을 받아들여 궁전으로 올라갔다. 그때 제석천의 궁전에서 흘러나오는 무량한 음악은 부처님의 위신력으로 인하여 조용해졌다. 제석천은 과거의 전생에 부처님을 모시고 진리를 지키는 구도자의 고행을 닦던 일을 생각해내고, 과거에 이 땅에 오셨던 여러 부처님의 이름을 말하고 그 복덕을 찬탄하였다.
그들 부처님은 가섭불(伽葉佛), 구나함모니불(苟那含牟尼佛), 구류손불(拘留孫佛), 비사부불(毘舍浮佛), 시기불(尸棄佛), 비바시불(毘婆尸佛), 연등불(燃燈佛)의 7분이셨다. 이와 같이 제석천은 부처님의 위신력을 받아서 과거의 모든 부처님의 공덕을 찬탄하였다. 또한 시방에 있는 십만의 제석천도 또한 저마다 전에 수행하였던 곳에 있는 과거세의 모든 부처님을 찬탄하였다. 그때 석가모니께서 사자좌에 올라 결가부좌하였다. 그러자 궁전은 곧 순식간에 넓혀지고 도리천도 같은 넓이가 되었다. 십만의 궁전도 또한 그와 같이 넓혀졌다고 한다.
앞에서 살펴본 『화엄경』에서 석가모니 부처가 제석천이 주재하는 도리천을 찾아간 이야기를 좀 더 잘 이해하려면 불교의 세계관을 먼저 살펴보는 일이 필요하다. 불교의 우주관에서 수미산은 우주의 중심을 이루는 거대한 산으로, 세계를 떠받치는 풍륜(風輪), 수륜(水輪), 금륜(金輪) 중 물이 가득한 금륜에 있으며, 주위를 8개의 산맥이 동심원을 이루며 둘러싸고 있다.
수미산의 동서남북에 대륙이 하나씩 있는데, 그 중 남쪽에 있는 대륙이 우리가 사는 인간계를 일컫는 섬부주(贍部州)이다. 수미산의 밑 부분이 우리가 사는 세계로 사바세계, 축생의 세계라고 한다.
이 세계를 욕계(欲界)라고 하는데 먹고 자고 싸는 욕망이 가득 찬 세계를 말한다. 이 속에서 인간은 욕망에 사로잡혀 지내고 있다. 수미산을 올라가면 중턱에 자리 잡은 사왕천에는 다문천, 비사문천, 증장천, 광목천의 사천왕이 살고 있어서 세계를 수호한다.
그 주위에는 해와 달이 회전하고 있다. 제석천은 수미산 꼭대기의 욕계(欲界)에 위치한 두 번째 하늘 세계인 도리천의 선견성(善見城)에 머물면서 사천왕과 주위의 33천세계를 통솔하는 하늘의 최고 임금인 천주(天主)로 군림한다.
'도리'는 33을 일컫는 인도 말이어서 보통 삼십삼천으로 번역한다. 도리천은 하늘과 땅의 중간이면서 인간이 갈 수 있는 마지막 단계가 된다. 그 위로는 하늘(天)이니 인간은 갈 수가 없다. 그 수미산 위로 사왕천과 도리천을 포함하여 모두 28개의 하늘이 있어 28천이라 하는데 우리에게 익숙한 도솔천도 이 28천안에 있다. 그 위에 부처가 있는 불국토가 있다.
3. 한국의 제석신
제석천은 도리천에 있으면서 사천왕을 통솔하며 인간세상을 다스린다고 했다. 우리나라에서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제석신앙이 매우 성행하였다.
그 이유는 제석신앙이 우리나의 토속신앙과 결합했기 때문이다. 일연이 지은『삼국유사(三國遺事)』와 이승휴가 쓴『제왕운기(帝王韻紀)』에서는 제석천은 바로 단군 신화에 나오는 환인(桓因)이라고 보았다.
또한 20세기 초 한국불교사를 정리한 이능화가 지은 『조선불교통사(朝鮮佛敎通史)』에서도 “환인은 천이고 환웅은 신이고 단군은 즉 환검이다. 불교에서 전하는 제석과 명칭이 같다”라고 하여 환인에 대한 제석신앙과 불교의 제석신앙이 융합되고 있는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단군신화에서는 환인(桓因)은 천제(天帝)를 일컫는다. 그 아들이 환웅인데 천부인 세 개를 가지고 3천 명의 무리를 이끌고 태백산 신단수 아래에 내려와 그곳을 신시(神市)라고 이름 지었다.
그리고 비(우사), 구름(운사), 바람(풍백)을 관장하는 자들을 거느리고 목숨, 질병, 형벌, 선악 등 인간 세상의 360가지 일을 주관했다. 이때 한 곰과 호랑이가 있어 인간이 되게 해달라고 간청했다. 환웅이 그들에게 마늘과 쑥을 주며 100일 동안 햇빛을 보지 않으면 인간이 되리라고 하여, 곰은 3·7일(21일)만에 여자가 되어 이름을 웅녀(熊女)라 했다. 이에 환웅이 웅녀와 결혼하여 아들을 낳으니 곧 단군 왕검이다.
이상이 우리가 다 알고 있는 단군신화의 간략하게 요약한 내용인데,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환인이 제석천이라면 우리 민족의 시조인 단군의 할아버지는 바로 제석천이 되는 셈이다. 불교의 대표적인 천신인 제석과 우리나라 고유의 천신이 동일시됨으로써 제석에 대한 신앙이 우리 민족에게도 큰 의미를 지닌 신앙의 대상이 된 것이다.
제석신앙은 종래 우리 민족이 가진 하늘을 숭앙하는 관념과 습합하여 민족 신앙으로 깊은 뿌리를 내릴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의 기원은 인도의 인드라(Indra)신을 한자로 번역하면 석제환인타라(釋帝桓因陀羅)가 되는데, 여기에 들어간 환인이란 말에서 온 것 같다. 환인은 '하늘', '하느님'이란 뜻을 가진 말을 소리 나는 대로 적었다라고 보는 것이 자연스런 해석이 될 것 같다.
4. 민간신앙에서의 제석천
앞에서 우리는 제석신이 원래는 인도의 토속 신이었으나, 불법을 보호하는 호법신이 되었다고 했다. 이 제석신이 우리나라의 제천사상(하늘을 숭배하던 신앙)과 합해지면서 하늘과 동일시되어 제석천 신앙을 형성했다. 경주의 석굴암 석실에 보면 대범천상과 함께 제석천이 조각되어 있어 이러한 제석신 숭배사상을 엿볼 수 있다.
이 제석천과 대범천은 무장상이 아니라 단정한 용모를 한 보살상에 가까운 모습을 하고 있다. 손에 불자를 들고 있으면 대범천이고, 금강저를 들고 있으면 제석천이다. 또 민간 신앙에서 '제석신'이라 할 때는 불교에서 말하는 제석신과는 달리 집을 지켜주는 신인 여러 가신(家神) 중의 하나를 말한다.
부엌에 조그마한 단지에 쌀을 넣고 흰 종이로 뚜껑을 덮어 둔 것을 제석단지라고 하는데 이 단지가 제석신을 모시는 것이다. 이 제석신은 집안사람들의 수명과 곡물, 집안의 평안을 맡은 신이라 한다. 이렇게 제석천은 불교, 민간 신앙 할 것 없이 우리나라에서 섬김을 받던 소중한 신으로 자리를 잡고 있다. 불교와 무관하지만 제석신을 위한 굿거리도 있다. 이를 제석굿이라고 한다. 단군신앙이 변모해서 생긴 굿인 듯 하다. 지역에 따라 조금씩 성격이 다르긴 하지만 무엇보다 수명과 다산을 기원하는 성격의 굿이란 점이 특징이다.
5. 한국의 제석신앙의 사례
한국에서 제석천은 널리 신앙되었는데, 특히 우리나라 신중신앙 가운데 그 기록을 처음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이 제석에 관한 기록이다.
옛날 백제의 영역이었던 전북 익산의 왕궁리 궁평마을에 빈 절터가 하나 있는데, 제석사 자리이다. 지금도 사람들은 이곳을 제석들이라고 부르고 있다. 백제 무왕의 궁평으로 왕궁을 잡은 뒤에 제석천을 주존으로 모시는 내불당으로 절을 창건하고 왕실의 번영과 국가의 안녕을 기원했던 절이라고 한다. 제석을 사찰을 주존으로 삼았다는 데에서 당시 제석신앙이 얼마나 번영했는가를 짐작해 볼 수 있다. 안타깝게도 639년에 벼락에 의해서 불전과 7층 목탑 등 절이 완전히 전소 되고 말았다.
또한 신라 진평왕(眞平王)대(579-632)에 제석천을 나라를 지키고 법을 지키는 선신으로 신앙하여 내제석궁(內帝釋宮) 즉, 제석사(帝釋寺)를 세워 부처를 숭앙하고 법을 받들고 국가가 편안하기를 바랐다는 기록이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신라의 선덕여왕은 세상을 떠나기 전에 도리천에 묻어 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실제로는 도리천에 묻는 것은 문무백관들이 아무리 정성을 들여도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그러나 후대에 왕릉 아래쪽에 사천왕사를 건립하게 된다.
자신들이 살고 있는 나라를 불국토로 만들려고 했던 신라인들의 불교적인 정신세계에 비춰 볼 때, 사천왕사는 사왕천을 상징적으로 재현한 것이며, 따라서 선덕여왕의 무덤은 불교의 우주관에서 사왕천 위에 자리 잡고 있는 도리천인 된 셈이다. 따라서 여왕이 죽기 전에 자기가 묻힐 곳을 예언한 것이 정확하게 들어맞았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신라의 홍경스님이 중국에서 대장경의 일부를 가져 왔을 때, 이를 제석원에 두고 제석도량을 열었다는 기록이 전하기도 한다.
이들 기록을 통해 6세기 말과 7세기 초에 이미 제석천 신앙이 있었고, 왕에 의해 독자적인 사찰이 창건될 정도로 국가적으로 제석신앙이 중요시되어 왔음을 알 수 있다. 이 외에도 『삼국유사(三國遺事)』에 기록이 더 전한다. 오대산오만진신조(臺山五萬眞身條)에는 보천이 오대산에 들어가 수도할 때, 도리천신(忉利天神) 즉 제석천이 3시에 법을 청하고 정거천에 사는 무리인 정거천중(淨居天衆)이 차를 달여 공양하였다는 기록과, 륜사벽화보현조(輪寺壁畵普賢條)에 제석천이 흥륜사의 중수 불사를 위해 내려왔다는 기록이 있다.
제석에 대한 신앙이 가장 성행했던 시기는 고려시대로 국가적인 행사로 개설되었던 법회인 제석도량을 통해서 제석신앙의 정도를 가늠해 볼 수 있다. 고려시대에는 태조가 919년(태조 2)에 송악으로 도읍을 옮기고 법왕사(法王寺) 내제석원(內帝釋院) 등 10대사찰을 건립하였다.
925년에도 외제석원(外帝釋院)을 건립하였으며, 928년에도 제석원을 설치하였다고 한다. 제석천에게는 어려움을 이겨내는 능력이 있다고 해서 나라가 위기에 처할 때마다 제석도량이 마련됐던 것이다. 제석도량은 하늘에 대한 재래의 민간신앙과 잘 결합하면서 우리의 독특한 신앙형태로 자리 잡게 된다. 『고려사(高麗史)』에는 제석도량을 베풀었다는 기록이 매우 여러 차례 있다
제석도량은 불교에서 부처와 보살 이외의 모든 신들을 대상으로 삼아 신앙하는 신중신앙(神衆信仰)에 근거를 두고 행하는 법회의식을 말한다. 불교의 신중신앙이란 재래의 토속신을 수용하여 불교의 호법신(護法神)으로 삼은 신앙형태이다. 이때의 신중은 모든 토속신을 동시에 지칭하는 복수개념이다.
그런데 제석도량이란 복수개념으로서의 신중이 아니라 제석이란 고유의 성격을 지닌 신중신앙의 형태이다. 일반적으로 신중이라고 하면 재래의 토속 신으로서의 신격과 그 기능은 사라지고 불교호법신으로서의 신격과 기능만 가지게 되지만, 제석은 원래적인 성격을 가지는 데서 특이한 호법신중이다.
제석도량은 제석을 신앙의 대상으로 한 신앙의 한 형태로서, 제석신앙의 의식 행사를 총칭하여 제석도량이라 한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신라승려 홍경(洪慶)이 대장경의 일부를 중국에서 가져왔을 때 이를 제석원(帝釋院)에 두어 제석도량을 연 것이 그 효시로 생각된다. 『고려사』에 보이는 제석도량에 대한 기록은 다음과 같다.
1032년(덕종 1) 외제석원에서 왕이 재를 베풀었고, 1060년(문종 14) 정월에는 천제석도량을 문덕전(文德殿)에서 베풀었다.
1085년(선종 2)에도 천제석도량을 문덕전에서 베풀었고, 1098년(숙종 3)에는 왕이 외제석원에 행차하여 재를 베풀었으며, 1099년 정월과 1101년 정월에 천제석도량을 문덕전에서 베풀었다.
이를 통하여 고려에서는 매년 정월에 제석도량을 베푼 것을 알 수 있다. 1107년(예종 2) 정월과 1110년 정월에도 제석도량을 문덕전에서 베풀었고, 1114년 4월에는 예종이 외제석원에 행차하여 공양하였으며, 1130년(인종 8) 정월에는 제석도량을 중화전(重華殿)에서 베풀었다고 전한다.
1132년 2월에는 천제석도량을 명인전(明仁殿)에서 베풀었고 1148년(의종 2) 정월에는 제석도량을 문덕전에서 베풀었으며, 1176년(명종 6)에는 천제석도량을 명인전에서 베풀고, 1177년 3월에는 제석도량을 내전에서 베풀었으며, 1181년 3월에 제석도량을 명인전에서 베풀었다.
1203년(신종 6) 정월에는 제석도량을 수문전(修文殿)에서 베풀었고 1214년(강종 4) 정월에도 제석도량을 수문전에서 베풀었으며, 같은 해 3월에는 제석재를 행하였다.
1223년(고종 10)에 제석도량을 수문전에서 베풀었고, 1251년에는 천제석도량을 궐 안에서 베풀었다. 이와 같이 고려시대에는 제석천에 대한 호국진병(護國鎭兵)의 신앙의식이 많이 행하여졌다. 문종 14년(1060)부터 공민왕 15년(1366)에 이르기까지 제석도량이 25회 열렸는데 총 96회 신중관계 도량 중 4분의 1에 해당하는 수만큼 개설되었다는 사실은 제석신앙이 얼마나 성행했는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이다.
특히, 우리나라에서의 제석도량은 천제(天帝)라고 하는 천신의 관념이 우리 민족 고유의 하늘을 숭앙하는 숭천 관념과 쉽게 습합할 수 있게 되어 민간신앙으로서 깊이 뿌리를 내릴 수 있었다. 재래의 숭천 신앙과 제석신앙이 습합되어 기도의 목적에서 이룩된 숭천 신앙형태가 제석도량으로 정착된 것이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전반적인 숭유억불의 분위기 속에서 전시대인 고려 때만큼 활발한 신앙이 이루어질 수는 없었다. 그러나 김시습이 지은 『사유록(四遊錄)』에 수록된 칠언시 「천주사(天柱寺) 간화(看花)」에서 제석천을 주존으로 삼는 제석사가 궁궐 안에 존재하고 있었으며 내불당을 성격을 띠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로 보아 숭유억불을 모토로 삼았던 조선시대에도 제석신앙의 맥이 면면히 이어지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6. 한국 미술속의 제석
제석천의 형상에 대해서는 『대일경소(大日經疏)』에 "머리에 보관을 쓰고 몸에는 각종 영락을 걸치고 금강저(金剛杵)를 잡고 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실제로 조각 또는 그림으로 그려질 때에는 금강저를 들고 있거나 합장을 하는 모습이 일반적이라 할 수 있다.
현재 전하는 가장 오래된 제석천의 모습은 석굴암의 제석천상으로 국보 제24호로 지정되어 있는 뛰어난 작품이다. 오른손에는 불자(拂子)를 들고 왼손에는 금강저를 들고 있으며 얼굴은 오른쪽을 향하면서 몸은 자연스러운 자세를 취하고 있다. 제석천은 한 손에 금강저를 들고 머리에 보관을 쓰고 있는 모습으로 많이 등장하고 있다.
그림으로는 사찰에 다수 전하는 신중탱화에서 쉽게 만나 볼 수 있으며, 흔히 범천과 함께 쌍으로 묘사된다. 신중탱화 속에 다른 선신들과 함께 묘사되고 있지만, 이 때에도 제석천은 크게 표현됨으로써 하늘을 통솔하는 신중의 신임을 드러내고 있다. 제석신앙이 독립신앙으로 분리되면서 제석천을 중앙에 두고 32천왕이 묘사한 제석탱화도 있다. 고려 불화의 경우에는 이마에 제 3의 눈인 수직의 눈이 그려져 있어서 범천과 확실하게 구분이 되고 있다. 통도사 대웅전의 제석탱화, 파계사 설선당의 제석탱화가 유명하다.
조선 후기 신중탱화에서 제석의 모습은 화려한 보관을 쓴 보살형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넓은 소매의 포를 입고 어깨에 천의를 걸치는데, 소매 부분에는 보통 새 깃털 모양의 장식이나 레이스 모양의 장식이 부착되어 있다.
제석천 휘하의 권속으로는 나라연이 있다. 나라연은 인도에서 유래한 신으로 집금강(執金剛)의 하나로 밀적금강과 함께 이천이라고 불린다. 나라연은 산스트리트어 나라야나를 음사(音寫)한 이름으로 나라연나(那羅延那), 나라연천(那羅延天), 나라연금강(那羅延金剛) 또는 인왕(仁王), 인왕존(仁王尊)이라고도 하며, 생본(生本), 승력(勝力) 등으로도 번역된다. 불교에서는 큰 힘을 가진 역사로서 천상계에 거주한다고 믿어, 금강역사(金剛力士), 견고역사(堅固力士) 또는 단순히 역사라고 한다.
제석천의 권속(眷屬)으로 불법을 지키는 신이다. 나라연금강은 천상계의 역사로서 힘이 코끼리의 백만 배나 된다며 힘이 세다하여 '나라연'이라는 이름을 가졌고, 밀적금강은 손에 금강저(金剛杵)라는 무기를 쥐고 부처님을 호위하는 야차신의 우두머리로 부처님의 비밀스런 사적을 모두 듣겠다는 서원(誓願)을 세웠으므로 '밀적'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한다.
나라연금강은 입을 크게 열어 '아'라며 소리치며 공격형의 자세를 취하여 '아금강역사'라 하고, 밀적금강은 입을 굳게 다문 채 방어형 자세를 취하니 '훔금강역사'라 부른다. 범어인 '아(A)'와 '훔(Um-)'은 영원, 완성, 조화, 통일, 성취, 시작과 끝 등의 신령스런 주문인 '옴'에 나온 말로써, '아(A)'는 시작이며, '우(U)'는 유지이며, '움(M-)'은 끝이며 또한 여운이다.
특히 밀교의 태장계 현도만다라(胎藏界現圖曼茶羅)에서는 삼면(三面), 즉 정면은 보살의 얼굴, 좌우는 각각 사자와 돼지의 얼굴에 금시조(金翅鳥)를 탄 모습으로 묘사된다. 범천(梵天), 제석천(帝釋天)과 함께 불법(佛法)을 수호하는 신이다.
[출처] ◈ 민속신앙 제석신(帝釋神)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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