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사

꿈의 신 오륙도공원

아지빠 2009. 4. 24. 11:32

 

 

  남태평양에 잘 보존된 일본의 벙커 참고자료

 

일본 식민지의 마지막 발악

1936~9년경 일본은 대마도와 부산의 남해바다 부산항의 관문에 독일의 도라 -구스타프 열차포와 같은 육상포를 설치하기 시작 한다.

육상포로는 최대의 408mm(16인치)구경의 함포와 박격포의중간형태?

지금의 용호동 산96번지와 산97번지 그리고 200번지일원에 대형 참호 형 포진지를 구축하기 시작하게 된다.

산을 깍고 평지에 가깝도록 정지 작업을 하고 대형육상포의 운영에 필요한 지하 물탱크와 화약을제조하고 보관 ,저장할 탄약고 그리고 포탄의 지하저창고까지 갖추어야할 육군해안 육상포진지 구조물은 하나둘 건설되어 갔다.

일본에서 제작한 포를 운반할 선박이 접안할 부두작업도 병행하였다

큰 포를 어떻게 부두에서 산중턱까지 운반하였는지 공사에 참여한 조선인부들은 알 수 없었다는 것이다 .철저하게 기밀에 부쳐진 것이다.

포를 이동하여 격납고형 진지에 안착하여 조립하고 상부를 콘크리트 2중 벙커로 구축하였다 ,그리고 흙으로 고분처럼 위장하여 관목과 대나무 잔디등 으로 철저한 위장을 하였다

포의 구동은 수압펌프로 고압의 시린다 를 동력으로 포의상하 좌우 및 추진 화약 의 장입과 포탄의 장진까지 반자동으로 운영하였다

큰 주포진지 아래쪽에는 야마토 트리플포 형포를 육상으로 옮겨 원형 대공포로 운영하는 벙커도 2개 설치하였다. 이는 큰 주포를 연합군(적군) 공중공격을 차단하기위한 구색을 갖춘 것 이었다

1940년경부터 매년 1회 정도 포의 시험발사를 할 때 마다 용호동과 인접한 용당동,대연동 주민들은 민방위 훈련을 하듯 방문을 열고 선반 등에 올려놓은 가구나 그릇 등을 내려놓도록 하였다고한다 .

그래도 흙과 돌이 대부분인 조선의 집들은 흙벽이 진동에 갈라지고 떨어져 시운전이 끝나면 집수리를 했다고 한다

이렇게 대역사를 하였으나 일본은 오끼나와로 향하든 대형구축함 야마토의승무원 3000여명과 같이 침몰하고 본토 나가사끼와 히로시마 원폭투하로 일본은 연합군에 항복하게 된다

조선반도는 연합군 미군이 진주하고 남북으로 2개의 국가로 분단되었다

주둔군은 408mm의 대포에 최신 미군화약을 설치하여 폭파시켜 산산조각의 고철로 산야와 바다에 흔적 없이 뿌렸다.

이때 포신의 인장강도를 높이기 위해 명주실타래처럼 감았든 금속와이어는 거미줄처럼 엉켜

가시덩굴처럼 앙상한 몰골이었다고 한다,

이로써 주포는 자취를 감추고 대공포 트리플포도 절단되어 고철이 되어 팔려나갔다

그뿐인가 준비부족으로 독립한 국가의 경제는 진지의 레일 철사다리 철근까지 남김없이 파헤쳐 도난 되고(1960년중반) 역사의 자취는 개발과 건설의 장에 묻어 버렸다

60여년이 흘러 추억 같은 흔적의 발굴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 부산남구청이 대견하다

진지와 벙커를 발굴하고 꽃동산으로 꾸며 미래의 산교육으로 정치 경제 문화의 종속을 막을

가치의 공원이 되었으면 하는 바램 이다

아직도 1.2 관측소와 벙커 그리고 터널의 흔적이 남아있어 다행이다.

늦다고 생각 할 때가 발굴의 시작이 되었으면 합니다.

유체꽃에 나비 벌이 나르고 꽃단장한 아이가 뛰노는 부산의 오륙도 공원을 상상하며 피식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4월 신록의 따스한 졸음에 취해본다

나 행복하다

부산남구 용호동 오륙도앞 장자등(장자산)포대 함포408mm를 개조하여 해안포루 설치하였다

40cm급포의 숫자에는 한계가 있었지만 그 외에도 30cm나 25cm 함포등은 45구경장의 긴 함포를 가진 덕분에 사거리에서는 일본 육군의 기존 해안포를 능가했고, 육군으로서는 마다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육군으로서는 오로지 ‘잉여 함포’의 숫자나 예산이 모든 해안포대를 업그레이드할 만큼 넉넉하지 않은 것을 아쉬워할 뿐이었다.

이렇게 해서 1924년부터 1932년까지, 총 8년에 걸쳐 11군데에 함포를 설치한 해안포대가 설치되었다. 대개의 경우 함포용으로 만들어진 포탑을 그대로 지상에 설치한 것인데, 물론 설치는 결코 쉽지 않았다.

 

 

 

 

 

 

▲현재 구레의 일본 해상자위대 기지에 전시중인 전함 ‘무츠’의 포탑. 해안포로 사용된 것들과 동형의 40cm 급함포다- 부산 등지에 설치되었던 해안포대도 이런 거대한 포탑이 그대로 땅 위에 얹혀져 있던 것이라고 생각하면 될 것이다



포탑이 얹혀져야 할 자리는 대충 땅만 파면 되는게 아니라 거대한 콘크리트 지하 요새로 만들어져야 했고, 또 포탑을 운반하는 자체도 보통 힘든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조선소에서라면 거대한 크레인과 도크를 이용해 비교적 쉽게 처리하지만 해안포대는 대개 절벽등 진지 공사 자체가 불편한 곳에 설치되는 경우가 많은 만큼 수백톤의 포탑을 설치하는 공사는 엄청난 난공사였음에 틀림없다.
재미있는 것은 이렇게 설치된 해안포 진지중 하나는 우리나라의 부산에, 또 하나는 부산을 마주보는 쓰시마섬 북쪽에 설치되었다는 것이다. 특히 이 진지들에 설치된 포는 전함 도사와 아카기에 설치될 예정이던 40cm급함포였는데, 같은 포가 설치된 포대는 부산과 쓰시마 이외에는 일본 본토의 나가사키 지역에 위치한 ‘쿠로자키’포대뿐이다. 나머지는 30cm급 아니면 25cm급함포를 설치한 곳이고, 심지어 도쿄 방어를 위해 설치한 ‘치요가사키’포대조차 30cm급 함포를 장비하고 있다.
부산의 장자등 포대와 쓰시마섬 북단의 ‘토요’포대는 앞서 언급했듯 서로 마주보고 있는데, 그 사이의 거리는 약 50km 정도로 두 포대의 함포 사거리가 두 지점 사이의 해협을 거의 다 커버할 수 있다- 즉 부산과 쓰시마섬 사이에 들어오는 배는 어떤 배도 해안포 사격을 피하기 어렵다는 이야기였다.

 

 

 

 

 

▲나가사키의 쿠로 포대 단면도. 매우 규모가 거대했음을 알 수 있다



따지고 보면 나가사키의 쿠로사키 포대 역시 쓰시마로부터 73km 정도 떨어진 곳으로, 쓰시마 남쪽의 포대와도 거의 마주보는 수준이다. 즉 일본은 적함, 특히 러시아나 미국의 함정이 대한해협을 쉽게 통과하지 못하게끔 매우 애를 썼던 것이다.
하지만 이 해안포들은 결국 일본이 원하던 효과를 발휘하지 못했다. 2차 대전중 일본 본토에 대한 공격의 대부분은 해안포가 어찌할 수 없는 하늘로부터 날아왔기 때문이다. 또 기나긴 일본의 해안선을 생각하면 해안포 진지의 숫자가 충분한 수준이라고는 할 수 없었고, 실제로 미국 전함이 몇 차례 일본 해안지역에 함포사격을 가했지만 일본 해안포들은 이것을 막지 못했다.
전쟁이 끝나면서 일본은 해안포를 모두 폐기했고, 해안포대의 일부는 오늘날 관광지로 활용되는 정도가 전부이다.
다만 일본은 해안 방어를 중시한다는 태도 자체는 꾸준히 유지하고 있다. 일본이 대함미사일을 개발한 중요한 동기중 하나도 해안에서 적함을 향해 쏘는 이동식 미사일 차량을 장비하기 위한 것이었고, 또 각종 대전차 미사일들도 개발 목적이 ‘대전차/대주정(즉 상륙정등의 보트)’용이라는 이름을 붙이는 등 ‘해안방어’목적이라는 사실을 어떻게든 포함시키기 때문이다. 일본이 직접 개발한 전투기인 F-2도 주요 요구조건중 하나가 대함미사일 4발 탑재인 만큼, 해안포대 자체는 사라져도 그걸 만들게 한 마인드 자체는 쉽게 없어지지 않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