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해야항(吾海也項)
동국여지승람 기록에 성종(成宗)12년 서기1481년 신선대 동방 산상에 오해야항(吾海也項) 토성 봉수대를 신설하였다고 했다
북으로 수영강 , 해운대 간비오산 봉수대와 서쪽으로 황령산 봉수대가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 남구 용호동 장자산의 봉수대는 흙과 돌로 제작한 오래된 봉수대였다 .
봉수대 동쪽은 대마도가 관측되는 남, 동해 바다며 오륙도가 지척에 있다 .
용호동은 3면이 바다며 서쪽 염전을 보호하기 위해 축성이 있어 가축을 기르는 목장이었을 가능성이 크며 목장의 입구가 석포와 연결된다.
봉수대 뒤는 대나무를 심어 해상에서 관측할 수 없도록 하였고
봉수대 주위에는 백자 사금파리 파편과 조개껍질이 쌓여 있었다.
담치 와 굴 껍질도 수북이 쌓여 조개 무덤을 이루고 있었다.
봉화지기가 생활 할 수 있도록 산 정상에서 10여보 아래에 옹달샘이 있으며1970년대까지 2월 영등 정화수를 올리기 위해 새벽이면 할머니께서 물을 길어 장독대에 치성을 올리기도 했다. 그러나 공동주택이 건립되면서 물 부족으로 옹달샘에 파이프를 매설하여 공동주택까지 연결하여 사용하면서 물은 말랐다 .그러나 그때 심은 차나무가 자라고 있어 봉화꾼들이 차를 애용 하였을 것으로 추정 한다.
지금도 매년 음력4월 보름 용호동 기원 재에는 꼭 옹달샘을 깨끗이 청소하고 정화수로 사용하였다.
미군이 동경을 공습한 1942년4월 이후 일본은 점령지를 비롯한 일본전역에 항공탐조등을 설치하기 시작했다.
봉수대는 일본이 큰 고개에 발전기를 설치하고 장자산 정상에 항공탐조등을 설치하면서 높이 6자가 넘는 큰 원형 토담 형 봉수대 3개중 1개만 남아 있었다.오해야항(吾海也項)봉수대는 파괴되었다.
봉화용 아궁이는 북서쪽에 위치(금련산쪽)하였다고 한다.
마을사람 몇 분은 봉수대 터에서 사금파리 등을 주워 보관하며 꿈을 키우고 있다.
주민중 몇몇분은 봉수대 터에서 사금파리등을 주워 보관하며 꿈을 키우고있다.
스토리 텔링 해주신 분이 말씀하신데로 봉수대를 재 구성하였다.
11월에찍은 옹달샘의 모습이다
봉수대터 서쪽 저멀리 황령산이 보인다
북쪽으로 해운대 운촌의 간비오산 이 보인다
1970년대까지 돌담으로 구축된 축성이형태를 갖추고 있었다 일부는약 60cm높이로 남아 있었으며 대부분 50cm정도였다(축성의 돌을 옮겨 묘축과 매립지 논뚝보강용으로 사용하였다)축성의 폭은 약60~70cm였다
축성 주위에 개성왕씨 선영이 여러기 있어 매년 시제를 모시기 위해 축성을 밟고 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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