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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4년의 검찰권력 일제가 낳고 보안법이키웠다

아지빠 2019. 9. 30. 08:58







124년의 검찰권력, 일제가 낳고 보안법이 키웠다

 

[토요판] 커버스토리무소불위 검찰의 탄생기

일본, 프랑스법 토대로 형소법 마련검사는 경찰과 수사판사 중개역갑오개혁 이후 일본 영향으로1895년 재판소법에서 검사 첫 등장재판소 직원으로 수사·기소권 행사

1912년 조선형사령 공포

검경 강제수사권 폭넓게 허용법적 기준 애매… 독소조항 비판1940년대 검사 중심의 수사 확립

 

프랑스혁명 이후인 1808년 나폴레옹은 형사소송법을 개혁하면서 기소권자인 검사에게 직접수사권을 줄 것을 요구했다. 하지만 프랑스 법률가들은 “기관의 성격상 검사는 소추권을 가진 당사자로서, 그가 수사를 시행하는 것은 정의에 어긋나고 도시를 위협하는 작은 폭군이 될 것”이라고 거부했다. 기소권과 수사권이 검찰에 집중되면 지배권력의 이익을 위해 악용될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프랑스 형사소송법은 ‘소추(공소제기)-수사(예심)-재판의 분리 원칙’을 확립했고, 이 근대 검찰 제도는 독일 등 유럽 각국의 모델이 됐다.

200년 넘게 흘렀지만 한국에서는 검찰이 수사권과 기소권을 장악하고 있다. 이 막강한 권력의 출발점은 일제강점기 형사 제도다. 갑오개혁 때 근대화의 첫발을 내디딜 때부터 견제·분리의 원칙이 제대로 작동되지 않았지만 일제강점기와 해방을 거치면서 검찰의 권력 집중은 더해졌다. 사상범을 처벌하기 위해서든, 경찰의 권력 남용을 막기 위해서든 검찰은 권한을 키우는 기회로 삼았다. 혼란 속에서도 검찰 중심의 수사 체제가 만들어지고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중앙집권적인 검찰 제도가 탄생하게 된 배경이다.

검사 역시 ‘사법관’이라는 인식 확산

한국 검찰 제도는 1895년 ‘재판소구성법’ 공포에서 시작됐다. 갑오개혁이 낳은 사법 근대화의 산물인 이 법은 재판과 행정을 나누고, 재판권을 재판소로 통일하는 내용을 담았다. 검사는 재판소의 직원으로 수사와 기소권을 행사하게 돼 있었다. 이 법 제정에도 일본인들이 관여했지만, 1905년 을사늑약 이후에는 일본 검찰 제도가 더욱 노골적으로 이식됐다. 1945년 해방에 이를 때까지 조선 검찰 제도는 19세기 유럽대륙법계의 근대 검찰 제도 형식을 따왔지만 내용은 후진적이었다. 일본 검찰 제도라는 ‘프리즘’을 통과한 탓이었다.

일본은 1808년에 제정된 프랑스 형사소송법을 토대로 형사 제도가 마련됐다. 이에 검사는 직접 사건을 세밀하게 수사하지 않았다. 경찰 수사에 기초한 사건을 수사판사에게 보내고 공소를 제기·유지하는 중계자 몫만 맡았다. 수사 단계부터 경찰의 수사를 지휘하고, 구속영장 발부나 기소 여부까지 판단하는 것은 수사판사였다. 이들은 피의자 신문, 조서 작성 등도 맡는다.

하지만 일본 검찰이 힘을 키우면서 그 위상과 역할에 변화가 생겼다. 경미한 범죄자를 불기소(기소유예)하는 ‘검사의 기소편의주의’ 관행이 뿌리내리고 검사 역시 판사에 준하는 ‘사법관’이라는 인식이 퍼졌다. 이에 형사소송법을 개정하려는 움직임이 1901년부터 움텄다. 검찰의 압수수색 등 강제처분권을 확대하고, 기소편의주의의 법적 근거를 마련하는 것이다. 또 검사와 수사판사의 경계를 허물고 검사가 공판 전 절차의 지배자로 나서고자 했다.

이러한 검찰권 강화는 특이하게도, 일본보다 앞서 일제강점기 조선에서 시행됐다. 조선총독부가 1912년 ‘조선형사령’을 공포하면서 검사와 사법경찰관(경찰)에 무제한 강제수사할 자유를 부여한 것이다. 조선형사령을 보면, 검사는 현행범이 아닌 사건이라도 “급속한 처분이 요하는 때”는 공소제기 전에 영장을 발부해 검증, 수색, 물건 압수를 하거나 피고인·증인을 신문할 수 있도록 했다. 검사에게는 20일 이내의 피고인 구류도 허용됐다. 경찰도 이러한 강제처분을 임시적으로 할 수 있도록 했고, 구류와 동일한 14일 유치권까지 줬다. 수사판사의 영장이나 신문 없이도 검사와 경찰은 피의자를 일정 기간 붙잡아놓고 강제수사할 수 있다는 뜻이다. “급속한 처분이 필요한 때”라는 기준은 명확하지 않았는데, 그 판단의 주체는 전적으로 검사와 경찰이었다. 수사기관이 거의 자유롭게 강제수사할 여지를 열어둔 셈이다. 이는 근대적 형사소송법의 일반적 원칙을 배제하는 대표적 독소조항이다.

이러한 ‘급속처분’ 조항이 일본 형사소송법에 등장한 것은 1922년(다이쇼 형사소송법)이었다. 일제강점기 조선이 일본보다 10년이나 빨랐던 셈이다. 조선인을 억압하기 위해 일본 검찰 제도보다 막강한 권한을 검사에게 미리 준 것이었다. 당시 검찰과 재판소, 경찰은 일본인이 장악한 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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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픽 박향미 기자 phm8302@hani.co.kr

소추-수사-재판의 분리 원칙 무너져

검사와 경찰의 강제수사가 보편화하자 피의자를 일단 체포해 자백을 받아내는 방식으로 수사가 진행됐다. 언론인 박은식의 증언을 보자(<한국독립운동지혈사>, 1920년).

“경찰이 보고 죄를 범했다고 인정되는 자는 사법(재판)에 의하지 않고 직접 체포했다. 그자뿐만 아니라 그의 친척, 친구까지 관련시켜 사실의 유무와 경중을 불문하고 신문에 앞서 잔인한 형벌을 가했다. 인사불성이 되도록 여러 날을 감금한 뒤에 비로소 신문하기 시작하는데, 또한 형벌을 가하여 자백을 강요하고 아무런 증거도 없이 자백만으로 죄를 성립시킨다.”

실제로 일제강점기에 검거된 인원의 절반이 경찰에서 풀려나고, 검찰에 송치된 인원의 절반 이상이 불기소처분을 받았다. 약식명령 사건을 제외하면 예심이나 공판에 회부되는 인원은 애초 검거 인원의 10~20%에 그쳤다. 불기소 사건 가운데에도 40% 안팎이 무혐의였다. 많은 무혐의와 불기소처분은 검찰과 경찰의 공권력 행사가 무능하고 가혹함을 증명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당시 경찰과 검찰이 “비과학적 검거”를 일삼아 “7인의 범죄자를 검거하기 위해 100명을 잡아들인다”는 언론 비판이 나오기도 했다.(<동아일보> 1929년 12월6일치)

공판정(법정) 모습도 일본과 조선은 확연히 달랐다. 일본에서는 검사와 변호인이 재판장의 허가를 받아 피고인·증인 등을 직접 신문할 수 있었다. 하지만 조선에서는 판사가 일본인, 피고인·증인이 조선인인 탓에 통역이 불편하다며 이를 허용하지 않았다. 검사와 변호사가 증인·피고인을 직접 신문하지 못하니까 재판은 서면 심리를 위주로 하는 ‘조서재판’이 됐다.

일제강점기 조선의 형사 절차는 검사와 경찰이 ‘급속처분’이 필요하다며 피의자를 강제로 붙잡아 자백을 강요하는 ‘신문’을 하고 조서를 작성해 이 조서를 법정에 제출해 증거로 삼아 유죄를 이끄는 게 일반적이었다. 결국 ‘강제수사-자백 강요-조서재판’이라는 관행이 굳어져갔다. 1934년 일본 재판을 방청한 조선인 변호사 강병순이 조선 재판과 비교한 글을 보자.

“이 (일본) 공판심리는 당사자대등주의가 가장 완전하게 발휘된 것이다. 노련달식한 변호인이 기소 사실이 미흡하다는 점을 지적하고, 수속상의 흠을 들어 재판장의 관용 아래 검사에게 비난의 화살은 쏘아붙였고 동경검사국의 정예(의 검사)가 나서 사실을 설명하고 필요한 요건을 보충하도록 만들었다. 완전히 공격과 방어의 지위가 뒤바뀐 것 같았다. 이렇게 3자(법원·검찰·변호사)가 서로 견제하고 제휴하며 형사사법의 사명을 완수하고 재판의 오류를 막을 수 있는 것이다.

변호인의 변론을 번거롭고 자질구레한 것으로 여기는 재판관, 검사독선주의에 도취해 변호인을 깔보고 흘겨보는 검사, 하등 경청할 가치 없는 변론으로 어물어물 얼버무리는 변호인을 다분히 포함하는 조선의 사법기관이 관점을 바로잡고 거친 면을 다듬어 좀더 가깝고 합리적으로 운영되는 일은 언제가 될 것인가.”(<법정신문> 1937년 7월5일치)

 

국가보안법으로 검사 위상 올라가

일제강점기에 검사의 경찰에 대한 수사지휘권과 직접수사권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조선형사령은 경찰이 검사의 지휘를 받아 범죄를 수사하고 검사의 직무상 명령이 복종해야 된다고 규정했지만, 실상에서 검사가 경찰에 대한 확고한 통제력을 갖고 있지 않았다. 예를 들어 경찰은 ‘급속처분’이 필요한 사건에서 그 취지를 검사에게 ‘통지’하고 강제수사를 독립적으로 할 수 있었다. 또 벌금·구류·과료 등 범죄 즉결처분과 무죄, 면소, 훈계방면 등도 경찰은 가능했다. 이는 검사의 통제력이 미치지 않는 영역이었다.

검사의 통제력이 약했던 이유는 검사 수가 부족한 탓도 컸다. 1910년대에 식민지 조선에는 총 60여명의 검사가 있었는데, 법원에 속한 검사를 빼고 나면 실제 일선에서 수사와 송무를 담당할 인력이 절반 수준이었다. 이 상황에서 검사가 적극적으로 수사권과 수사지휘권을 발휘하기가 어려웠다. 일제강점기 초기 검사는 경찰의 수사 결과에 전적으로 의존해 사건을 법원에 넘겨주는 데 충실했다.

하지만 조선총독부의 검찰 관료들은 이에 만족하지 않았다. 이들은 검사가 ‘수사의 수뇌’로서 직접수사에 나서야 한다는 생각이 강했다. 일본 검찰은 이미 직접수사를 검찰사무의 중추로 내세우고, 정치권의 운명을 좌우할 정도의 영향력을 발휘하는 상태였기 때문이다. 1920년부터 조선에서도 검찰이 능동적·적극적으로 직접수사하도록 검찰 당국이 일선 검사들을 독려했다. 실제로 검찰이 직접수사한 사건 비율로 보면, 1910년대에는 10% 안팎에 그쳤지만, 1920년대 들어 늘어나 1931~33년에는 30%를 웃돌았다. 검찰이 범죄의 수사와 소추에 적극 임한 것이다.

큰 변화는 일제강점기 후기에 찾아왔다. 1941년 3월에 공포된 ‘국가보안법’과 ‘치안유지법’ 개정안으로 검사의 위상이 획기적으로 바뀐 것이다. 두 법을 위반한 사건을 수사할 때 검사에게 피고인의 소환, 구인·구류, 피고인과 증인신문, 압수, 수색, 검증, 감정, 통역과 번역 등의 강제처분권이 부여됐다. 하지만 경찰은 검사의 명령에 의해서만 이들 처분을 할 수 있어, 이전과 달리 모든 강제수사권이 검사에게 집중됐다. 검사 중심의 일원적 수사 체제가 수립된 것이다. 두 법은 고스란히 조선에 적용됐고, 검사의 수사주도권이 한층 강화됐다. 이처럼 일본의 추세에 앞서가며, 혹은 그에 보조를 맞추며 조선의 검찰은 권력을 차곡차곡 쌓아갔다.

경찰에 대한 비난 여론을 등에 업고

1945년 해방 직후 일제강점기의 잔재인 ‘식민지 사법체제’를 극복해야 한다는 개혁의 목소리가 터져나왔다. 방식은 권력을 분립하고 인권을 보장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선 강제수사가 무한정 보장됐던 검사 권한의 축소가 필수였다. 하지만 검찰은 기존의 지위와 권한을 지키고 조직을 강화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그 노력은 결실을 보았다.

예컨대 미군정은 검찰과 경찰의 상명하복 관계에 변화를 꾀하려 했다. 1945년 12월29일 하달된 ‘법무국장의 검사에 대한 훈령 제3호’를 보면, “검사의 선결직무는 관할재판소에 사건을 공소함에 있고 세밀한 조사는 검사의 책무가 아니”며 “검사는 경무국(경찰)이 행할 조사사항을 경무국에 의뢰”하되 “실제로 법적 검토를 요하는 조사에 관하여 필요하다면 관여한다”고 규정했다. 미국식으로 경찰에 1차 수사권을 주고 검찰과 경찰의 관계도 상호 협력적으로 바꾸려는 움직임으로 읽혔다. 실제로 일본에서는 비슷한 변화가 생겼다.

하지만 경찰은 이 훈령을 주관적으로 해석해 검찰에 비협조적 모습을 보였다. 경찰은 군정포고 위반 범죄를 한국 검찰에 송치하지 않고 미군정 재판소에 넘겨버리고 검찰의 수사지원 요청도 외면하기 일쑤였다. 미군정 또한 경찰을 두둔했다. 이에 맞서기 위해 검찰은 갖은 트집을 잡아 경찰보고서를 반려하거나 경찰의 피의자 고문 사건을 가차 없이 구속 기소한다는 내부 방침을 세웠다.

검찰과 경찰이 격하게 대립하자 여론은 검찰 편에 섰다. 해방 이후 중앙집권적 조직으로 개편된 경찰이 고문 등 심각한 인권 유린을 자행하고 권력을 남용한 탓이었다. 검찰은 경찰의 행태에 대한 비난 여론을 등에 업고 수사지휘권을 확보하는 데 나섰다. 경찰이 검사를 보좌해 검사의 지휘명령을 받아 범죄를 수사한다는 점을 법률로 못박자고 건의한 것이다.

1947년 대검찰청이 법원과 검찰청의 분리를 위해 마련한 ‘검찰청조직법안’을 보면 당시 검찰이 꿈꾼 ‘검사의 역할’을 짐작할 수 있다. “형사사건에 관하여 어떤 범죄라도 직접 또는 사법경찰관리를 지휘하여 수사하고, 그 결과에 의해 공소 제기 또는 불기소처분의 결정을 하며, 공판 진행에 필요한 사무를 수행한다.” 검찰청법이 1949년 12월20일 제정되면서, 이 꿈은 실현됐다.

검사가 작성한 피의자 신문조서도 여전히 재판에서 증거능력을 인정받았다. 원래 조서 작성은 판사의 권한에 속하는데도 대법원은 이를 문제제기하지 않았다. 1950년 나항윤 판사의 글(‘법창수상’·<법정>)에서 그 이유를 짐작해볼 수 있다.

“준전시체제에 돌입한 현 단계에 있어 물적 증거의 수집이 극도로 곤란한 국가보안법 위반사건에 관하여 법정에서 물적 증거가 없는 사실에 대해서는 전혀 부인하는 것으로써 표어를 삼고 있는 그자들을 유죄의 심증이 드는데도 불구하고 단순히 형식적인 증거가 없다는 이유로서 무죄판결을 선고함으로써 그자들로 하여금 법망을 뚫고 나가게 할 수는 절대로 없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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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경 수사권 분리는 100년 후에나”

1954년 1월9일 서울 태평로 부민관(현 서울시의회 건물)에서 ‘형사소송법 초안에 대한 공청회’가 열렸다. 이날 첫 안건은 ‘검사와 사법경찰관리와의 관계’에 관한 것이었다. “범죄 수사에 있어서 사법경찰관에게 주도권을 줄 것인가 또는 현행 형사소송법과 마찬가지로 사법경찰관리를 검사의 지휘하에 둘 것인가, 말하자면 사법경찰관리와 검사와의 관계가 상호 협력 관계이냐, 상명하복의 관계에 둘 것이냐, 이 문제에 대해서 말해달라.”(전문위원 서대교)

미군정 초기에 떠올랐던 ‘상호 협력’과 ‘상명하복’이 다시 쟁점으로 떠오른 것이다. 검사 출신인 엄상섭 의원이 말했다. “검찰기관이 범죄 수사의 주체가 된다면 기소권만 가지고도 강력한 기관인데 수사의 권한까지 더하게 되니 이것은 결국 ‘검찰 파쇼’를 가지고 온다. 우리나라는 경찰이 중앙집권제로 되어 있는데, 경찰에다가 수사권을 전적으로 맡기면 ‘경찰 파쇼’라는 것이 나오지 않나 (우려된다). 검찰 파쇼보다 경찰 파쇼의 경향이 더 세지 않을까? 이런 점을 봐 법제사법위원회에서는 오직 우리나라에 있어서 범죄 수사의 주도권은 검찰이 갖는 게 좋다는 정도로 생각했다. 그러나 장래에는 우리나라도 조만간 수사권하고 기소권하고는 분리하는 이러한 방향으로 나가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다.”

엄 의원의 말에 한격만 검찰총장은 ‘시기상조론’을 들고 나섰다. “이론적으로 말하면 수사는 경찰에 맡기고 검사에게는 기소권만 주자는 것은 법리상으로는 타당하다. 하지만 앞으로 100년 후면 모르지만 검사에게 수사권을 주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일제 ‘순사’가 남아 있는 경찰에 수사권까지 주는 것은 어렵다는 주장이었다.

1954년 9월23일 국회를 통과한 형사소송법에서는 △검찰의 수사권과 사법경찰에 대한 수사지휘권 △검찰 내 사법경찰 인력 도입 △검찰 작성 피의자 신문조서 증거능력 인정 △사법경찰관의 강제수사에 대한 검사의 영장 통제 등을 규정했다. 이 골격은 65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유지된다.

검찰의 ‘칼바람’에 요동

수사권과 기소권 등 검찰에 집중된 권한이 분산되지 않는 이유는 검찰이 이를 거부하는 대신 그 권한을 토대로 정권을 좌지우지하기 때문이다. 방식은 이렇다. 정권 전반기에는 과거 정권 비리를 수사해 현 정부의 신임을 얻어 개혁의 시간을 피한다. 정권 후반기에 들어서면 현 정권 비리에 칼날을 들이대 야당이 검찰개혁의 방패막이가 되도록 한다. 문재인 정부에서도 초기에는 적폐 수사에 힘을 쏟더니 이제는 조국 법무부 장관에 칼을 겨누고 있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반복되는 검찰의 ‘칼바람’에 한국 사회는 어김없이 요동친다. 태어난 지 124년이 지났지만 권력분립이 여전히 이뤄지지 않은 탓이다.

무엇보다 검찰의 힘은 갈수록 커져간다. 과거 군부독재 시절에는 보안사나 국가정보원 등이 권력을 독점했지만, 문민정부 들어와서는 그 자리를 검찰이 차지한 것이다. 헌정 사상 첫 정권교체를 이룬 1998년 4월, 김대중 대통령은 법무부를 찾아가 “검찰이 바로 서야 나라가 선다”고 말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의 바람과 달리 검찰은 스스로 권력으로 자리매김하며 선출된 권력인 문재인 정부와 맞서는 지경이 됐다. 일제강점기에 탄생한 비정상적 검찰 권력의 어두운 그림자가 여전히 짙다.

정은주 기자 ejung@hani.co.kr

 

대한민국 최초 서초동 검찰개혁 촛불이 성공하려면

 

조국 압색 분노 국민들 자발적으로 나선 ‘개싸움’… 16년 탄핵촛불 복원되나

지난 9월 25일 촬영된 한 장의 사진이 화제를 모았다. 오른손에 케이크를 들고 아파트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조국 법무부 장관의 뒷모습 사진이다. 기자는 조 장관에게 “본인 사진이 맞느냐”고 물었다. 문자메시지가 왔다. “출근길과 귀가길에 항상 많은 기자들이 대기해 일거수일투족을 찍고 있습니다.” 사진은 이른바 ‘뻗치기’를 하던 한 일간지 기자가 휴대폰으로 찍은 것으로 알려졌다.

 

사진에 얽힌 사연도 알려졌다. 사진이 찍힌 전날은 조 수석의 딸 생일이었다. 아들은 밤늦게까지 이어진 검찰조사 때문에 귀가하지도 못했다. 검찰 수사와 취재경쟁으로 풍비박산난 가족의 일상. ‘당사자는 원하지 않았던’ 이 한 장의 사진이 기폭제였을까.

■ 서초동 검찰개혁 촛불 폭발한 이유

9월 28일 서울 서초동 검찰개혁 촛불시위. 노란색 바탕에 케이크를 든 조국 장관의 뒷모습 실루엣을 담은 피켓이 등장했다. 아래엔 ‘나도 조국이다’라는 구호가 적혀 있었다.

 

“나도 카톡으로 공유된 그 사진을 봤다. 동병상련이고 트라우마가 아닐까. 10년 전 노무현 전 대통령을 지키지 못했다는….” 서초동 집회에 참여한 한 시민사회 인사의 말이다. 기자도 이날 서초동에 갔다. 인산인해였다. 집결지로 안내되었던 지하철 서초역 7번 출구는 몰려든 인파에 폐쇄됐다. 많은 사람들이 교대역에서 내려 서초역까지 걸었다. 기자가 서초역에서 대검찰청 입구까지 도착하는 데 2시간이 걸렸다. 참가자 연령대는 다양했다. 10대 초반의 자녀와 함께한 가족단위 참가자들도 많았다. 인터넷 커뮤니티들 이름이나 ‘혼밥동맹’과 같은 유머 섞인 깃발도 등장했다. 2016년 늦가을부터 겨울 내내 주말마다 지속됐던 박근혜 대통령 촛불시위가 떠올랐다. 촛불동력이 거의 복원된 것으로 보였다.

3년 전과 차이는 있었다. 4시간가량 서초동에 있는 동안 ‘맞불 조국 구속 집회’를 제외하고 중심무대를 만날 수 없었다(나중에 확인해보니 작은 트럭 단상에 마련된 행사무대는 서초동 사거리 인근에 있었다). 이날 행사의 주최는 ‘개싸움국민운동본부’라는 온라인단체다.

‘개싸움’이라는 키워드는 지난 7월 중순, 일본의 경제보복조치에 대해 한 누리꾼이 내놓은 것이다. 인터넷커뮤니티 엠엘비파크에 ‘안알랴줌’이라는 닉네임을 사용하는 누리꾼이 올린 “개싸움은 우리가 한다. 정부는 정공법으로 나가라”는 글이다. 일본산 불매운동은 정부나 여당, 언론이나 방송이 시킨 것이 아니라 국민 스스로가 들고일어나 하는 싸움이니, 정부는 누가 비난하더라도 아랑곳하지 말고 정정당당하게 대응하라는 내용이다. 딱지 붙이기나 비난에 개의치 않겠다는 것이다(글을 쓴 ‘안알랴줌’은 “당시 불거진 일본 불매운동에 혹시 패배주의가 생겨날까 걱정해 평상시 커뮤니티에 글을 쓰듯 쓴 글일 뿐 반향이 이렇게 클 줄은 몰랐다”라며 “스스로 드러내는 것을 원하진 않아 인터뷰는 거절하고 싶다”고 밝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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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28일 오후 서초구 서초동 서울중앙지검 앞에서 열린 검찰 개혁 촛불 문화제에서 참석자들이 구호를 외치고 있다./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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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초동에서 검찰개혁을 주제로 대규모 집회가 열린 것은 대한민국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다. 대부분 이날 참석자들에게는 첫 집회지만 앞서 개싸움국민운동본부의 집회는 9월 28일이 7차 집회였다. 수십~수백 명 규모의 촛불시위가 갑자기 수십만 명이 참여하는 대규모 시위로 폭발한 것이다. 이날 집회 참가자들은 ‘윤석열 퇴진’과 함께 외친 ‘조국 수호’라는 구호에 별다른 이질감을 갖고 있지 않은 것으로 보였다.

 

“검찰개혁을 요구하는 국민들 목소리가 매우 높다.” 9월 30일 문재인 대통령은 주말 서초동 촛불집회에 대해 입을 열었다. 법무부 업무보고 자리에서다. 문 대통령은 검찰에도 “국민으로부터 신뢰받는 권력기관이 될 수 있는 방안을 조속히 마련해 제시해주길 바란다”고 공개 지시했다. 하루 만에 검찰이 자체개혁안을 내놨다. 특수부를 축소하고 검사의 외부기관 파견을 취소하겠다는 것이다. 준비된 ‘모범답안’이다. 검찰개혁에 대한 국민 목소리에 마침내 검찰도 호응해 나서는 것일까. 뭔가 기시감이 드는 액션이다.

■ 눈 가리고 아웅? 검찰 셀프개혁안 ‘기시감’

문재인 정부가 출범하며 제1의 과제로 내건 것이 ‘적폐청산’이다. 기조에 호응해 법무부는 법무·검찰 개혁위원회를 만들었다. 집권 첫해 8월 9일이었다. 검찰은 법무부의 외청이다. 위원회의 명칭에서도 보이듯 법무부의 탈검찰화와 고위공직자비리수사처(공수처) 설치방안에서 핵심은 검찰개혁이었다. 산하에는 위원회의 권고를 실행할 법무·검찰개혁단도 설치됐다. 그런데 한 달 뒤, 이번에는 ‘검찰개혁위원회’라는 조직이 발족했다. 법무부의 위원회와 상관없이 검찰이 자체적으로 만들어낸 것이다.

 

“우리와는 한마디 상의도 없었다. 지금도 기억나는 것이 검찰이 안을 발표한 다음 회의가 월요일쯤 열렸는데, 위원들이 ‘이거 어떻게 돌아가는 거냐’ 하고 설왕설래했다.” 법무부 개혁위원회에 참여했던 인사의 말이다. 그는 이렇게 덧붙였다. “우려했던 것은 우리의 권고방향과 전혀 다른 상충된 내용을 검찰 쪽에서 발표하면 어떻게 하느냐는 것이었다. 다행히도 두 개혁TF가 서로 충돌하는 일은 없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검찰이 법무부와 아무 상의없이 TF를 만들었다는 이 인사의 기억은 사실일까. 박상기 당시 법무부 장관의 최측근 인사에게 물어봤다. “사실이다. 당시 검찰 TF를 만들면서 법무부와 어떤 논의도 하지 않았다. 개혁위원회를 만들고 사람들을 선임하는 것도 다 검찰이 독자적으로 했다.” 그는 이번 대통령 지시에 검찰이 내놓은 검찰개혁 방안에 대해서도 비판적이었다. “한마디로 ‘눈 가리고 아웅’이다. 전임 문무일 총장 때 (검찰이) 제안한 것에서 한 발짝도 나가지 않은 것이다. 내가 보기엔 서초동에 운집한 인파에 깜짝 놀라 면피용으로 내놓은 것일 뿐이다.”

 

“대통령이 검찰도 개혁주체라고 이야기했지만, 검찰의 셀프개혁은 현재까지 전혀 이뤄지지 않았다.” 10월 1일 국회에서 열린 ‘검찰개혁 완수를 위한 국회 토론회’에 참석한 하태훈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의 말이다. 그는 이렇게 덧붙였다. “검찰이 가지고 있는 가장 막강한 권력은 법의 다른 이름인 ‘정의(justice)’보다는 마음대로 ‘정의(define)’를 내리고 결정한다는 것이다. 지금 논란이 되는 조국 장관 케이스를 보라. 권력형 비리라고 한다면 어떤 인물이 권력을 갖고 있을 때 저지른 비리를 말하는 것이다. 사모펀드 의혹을 제외한다면 지금 검찰이 기소한 표창장 위조니 입시의혹이니 하는 것들이 그가 권력을 갖고 있을 때의 일들인가.”

“밖에서는 검사들이 도대체 왜 이러는지 궁금할 것이다. 지휘부의 폭주에 대해 2000명이 넘는 검사들이 모두 한 덩어리가 돼서 왜 아무 말도 하지 않는지.” 검찰 조직에 10년을 몸담았던 오선희 법무법인 혜명 대표변호사는 검찰 조직의 내적 경직성이 ‘막 나가는’ 오늘날 검찰의 모습을 만들었다고 말했다. “현재의 검찰청법에 모든 직급은 검사 하나다. 법률상으로 직급은 검사와 총장 두 가지밖에 없다. 그런데 보직개념으로 보면 검찰총장, 고검장, 지검장, 지청장, 차장, 부장검사, 검사의 6단계다. 법률상 2단계이지 실제로는 6단계다. 그리고 승진이 이들의 통제수단이다.” 승진에 실패하면 낙오자 취급을 받는다. 승진 경쟁이 과열되다보니 상급에 무조건적인 복종, 관료화, 정치검찰화가 일어난다는 것이 오 변호사의 지적이다. “총장은 개개 사건에 모두 개입이 가능하다. 법률상으로는 정권이 장관과 총장을 통해 지휘할 수 있는 것으로 되어 있지만 장관은 할 수 없고 총장은 가능하다. 정치검찰이 이렇게 탄생하는 것이다.”

 

승진을 무기로 한 상급지휘관의 통제는 사건 배당을 통해 이뤄진다. 배당은 검사들을 길들이는 대표적인 방법이다. “무작위로 배당되는 법원과 달리 검사장은 자신에게 복종하는 검사에겐 승진에 유리한 사건을 주고 골치 아픈 민원사건 등은 반골검사로 찍힌 사람에게 배당한다. 근무평정을 통해 날리는 방법도 있다. 검찰 업무 중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면서도 힘든 것이 형사·공판 담당 업무지만 천대를 받는다.” 특수부를 줄이고 형사부나 공판부 배치를 늘리는 것이 당면과제라는 설명이다.

 

10월 1일 검찰이 밝힌 자체개혁안에는 이 내용이 들어 있다. 오랫동안 검찰 안팎에서 지적되어온 문제이지만 아직 개혁은 실행된 적은 없다. 검찰 개혁안에 언급되지 않은 것은 공수처 설치나 수사권과 기소권 분리다. 이 내용을 담은 사법개혁안은 현재 국회에 2개 안이 상정돼 패스트트랙에 올라 있다. 다시 말해 검찰은 “검찰개혁의 핵심과제는 국회에 넘어가 있으며 그건 국회가 할 일”이라는 무언(無言)의 시위를 하고 있는 것이다.

대한민국 역사상 최초로 ‘검찰개혁’ 촛불시위가 열렸지만, 아직 출구는 보이지 않는다. 검찰개혁은 결국 입법으로 완수된다. 패스트트랙 상정은 더불어민주당을 비롯한 4당 공조로 가능했다. 조국 장관 사퇴를 주장하는 자유한국당이 법안 통과에 협조할 가능성은 없다. 게다가 ‘조국대전’ 이후 국면에서는 ‘4당 공조’에서 바른미래당도 이탈한 상태다. 이대로라면 참여정부 당시 ‘4대 개혁입법’ 실패의 악몽이 재현될 가능성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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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대통령이 9월 30일 오전 청와대 여민관 소회의실에서 법무부로부터 업무보고를 받고 있다./청와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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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검찰개혁, 참여정부 4대 개혁입법 실패 전철?

 

조국 장관은 오연호 오마이뉴스 대표와의 대담집 <진보집권플랜>(2010)에서 참여정부 때의 대표적 개혁 실패사례로 이 ‘4대 개혁입법’을 들었다. 개혁이 성공하려면 정권 초반부터 시작해야 하며, 그 성과를 정권 임기 내에 국민들이 피부로 느낄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랬던 그 자신이 정권의 실패와 성공 여부를 가르는 핵심인물로 떠오르는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다. 리얼미터가 10월 2일 발표한 조사에 따르면 서초동 검찰개혁 촛불집회에 ‘공감한다’는 54%인 반면, ‘공감하지 않는다’는 비율은 42%다. 주목할 만한 부분은 ‘적극 공감한다’(43%)는 사람과 ‘전혀 공감하지 않는다’(33.0%)의 비중이 각각의 의견 내에서 압도적이라는 점이다. 중도의 시각은 협소해진 가운데 국민 여론의 분열, 양극화가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서초동 촛불’은 당분간 매 주말 되풀이될 것으로 보인다. 주최 측은 이미 10월 5일과 12일 집회일정을 공지하고 있다. 앞으로 추는 어디로 기울까. 현재 과반을 넘어 우세로 기울고 있는 검찰개혁 목소리는 더 힘을 얻을 수 있을까. 다시 말해 검찰개혁 촛불은 현재의 규모를 넘어 더 확장될 수 있을까.

신진욱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는 “현재의 여론은 대통령과 여당에 대한 평가, 조국 장관 이슈에 대한 인식, 보수야당과 검찰, 언론 보도에 대한 태도의 세 가지 측면이 함께 작용하고 있다”며 “서초동 촛불집회 주최와 참여자들이 ‘문재인-조국-검찰개혁’을 강하게 연결시킬수록 확장성은 떨어질 것이고, ‘사법권력 남용 견제’와 ‘여야에 대한 공정한 수사 요구’라는 보편적 구호가 전면에 나오면 촛불의 확장성이 커질 것”이라고 말했다. ‘조국 수호’가 ‘서초동 검찰개혁 촛불’의 발단이 되었을지 모르지만 조국 장관이나 문 대통령 개인에 대한 호불호를 넘어서야 더 넓은 국민 지지로 이어질 것이라는 지적이다.

 








검찰·국회, 100만 촛불 ‘검찰개혁’ 외침 직시해야

 

‘국민주권’ 훼손한 과도한 검찰권 행사

중앙지검 앞 ‘촛불 민심’ 의미 새기길

국회, 연내에 공수처법 등 입법 끝내야

 

검찰개혁 사법적폐청산 범국민 시민연대 주최 7차 촛불집회가 28일 저녁 서울 서초동 서울중앙지검 앞에서 열려 참가 시민들이 촛불로 파도를 만들며 ‘검찰개혁’을 외치고 있다. 이정아 기자 leej@hani.co.kr

지난 주말 서울 서초동 서울중앙지검 일대에서 ‘검찰개혁’을 요구하는 거대한 촛불이 타올랐다. 규모로 보면 3년 전 박근혜-최순실 국정농단 사건을 규탄하는 범국민적 촛불시위에 버금갈 정도다. 조국 법무부 장관 가족에 대한 수사를 벌이고 있는 검찰은 물론이고 정치권도 이 촛불에 담긴 민심을 제대로 직시하길 바란다. 특히 윤석열 검찰총장은 조 장관과 가족에 대한 수사가 국민주권 원칙을 훼손한 과도한 검찰권 행사가 아닌지 엄중하게 돌아봐야 한다. 또 수사 과정에서 무리한 수사행태와 부당한 인권침해는 없었는지 살펴야 한다. ‘사회 정의’를 명분으로 내건 어떤 방식의 수사도 민주주의와 삼권분립 원칙을 넘어서려는 순간 검찰의 기득권 보호 수단으로 전락할 수 있다는 걸 이제라도 깨닫길 바란다.

 

28일 저녁 서초동 촛불집회에 참여한 시민 규모가 수십만인지, 100만인지 또는 200만을 훌쩍 넘는지를 두고선 의견이 분분하지만, 분명한 건 애초 10만명 정도라던 주최쪽 예상을 훨씬 뛰어넘었다는 점이다. 촛불집회 이튿날인 29일 오후 윤석열 검찰총장은 ‘검찰개혁에 관한 입장문’을 내어 “검찰개혁을 위한 국민의 뜻과 국회의 결정을 검찰은 충실히 받들겠다”고 밝혔다. 조국 장관과 가족에 대한 수사가 검찰개혁에 대한 ‘저항’이 아니란 점을 강조한 것으로 읽힌다. 하지만 집회 참여 인원이 예상을 크게 웃돈 것은, 그만큼 검찰 수사가 ‘정치적이고 과도하다’는 인식이 많은 국민 사이에 팽배해 있다는 뜻으로 봐야 할 것이다.

가장 큰 문제는 검찰이 주어진 권한을 넘어, 대통령 인사권과 국회의 장관 인준 절차를 무력화하고 상관인 법무부 장관 적격 여부를 판단하려 한 ‘오만과 월권’에 있다 할 것이다. 검찰은 여야가 국회 인사청문회에 합의한 무렵 대대적인 압수수색에 나섰고, 인사청문회가 끝나자마자 후보자 부인을 단 한차례의 소환조사도 없이 불구속 기소했다. 조국 후보자에게 ‘더이상 버티지 말고 자진 사퇴하라’는 강한 압력으로 볼 수밖에 없다. 도대체 누가 검찰에 법무부 장관 임명을 좌지우지할 권한을 주었는가. 만약 혐의가 있다면 국회 인사청문회가 끝나고 국민 평가가 내려진 이후에 수사에 들어가는 게 맞았을 것이다. 서초동 촛불은 검찰의 무소불위 행태에 대한 국민의 매서운 비판이라 말할 수 있다.

그렇게 조국 장관과 가족에 대한 수사에 들어간 지 벌써 한달 넘게 지났다. 검찰 공식 발표가 없어 자세한 내용을 알 순 없지만, 언론 보도를 보면 조 장관 부인의 사모펀드 실소유 의혹과 동양대 표창장 위조 의혹, 아들·딸의 인턴 증명서 의혹 등이 지금까지 나타난 주요 혐의로 보인다. 이들 하나하나가 사실이라면, 그 책임은 가볍지 않다. 그러나 중요한 건, 이번 수사가 조국 장관이나 부인의 ‘권력형 비리 사건’에서 출발한 게 아니라 조국 후보자의 ‘인사청문 보고서’에서 시작됐다는 점이다. 특수부 검사 수십명을 동원해 한달 넘게 수사한 내용이 부인과 아들·딸 등 가족 관련 사안이라면, 그것이 과연 장관 임명의 결격 사유로 볼 수 있는지, 또 그런 식으로 공직 후보자 가족을 탈탈 털어 ‘혐의’를 밝혀내는 걸 용인하면 검찰총장을 포함해 어느 고위 공직자가 자유로울 수 있는지 많은 국민은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검찰은 이런 국민적 비판과 수사에 대한 불신을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정치권도 국민의 검찰개혁 요구에 입법으로써 답을 해야 한다. 현재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 법안과 검경 수사권 조정법안이 국회 신속처리안건(패스트트랙)에 올라 있다. 서초동 촛불집회에서 가장 많이 나온 구호 중 하나가 ‘공수처 설치’였다는 점을 국회는 가볍게 여겨선 안 된다. 이들 법안은 10월27일 이후에 국회 본회의 상정이 예상된다. 비대한 검찰 권한을 제어하기 위해선 제도적 입법이 필수적이며, 여기엔 여야 정치권의 이해가 다를 수 없다고 본다. 국회는 올해 안에 검찰개혁법안 입법을 마무리함으로써 국민의 강렬한 검찰개혁 요구에 응답하길 바란다.


다시는 지지 않는다" 서초동서 '검찰개혁 최후통첩' 촛불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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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초역 사거리에서 열린 ‘제9차 검찰개혁 촛불 문화제’에서 참석자들이 태극기 손팻말을 흔들며 구호를 외치고 있다./강윤중 기자

조국 법무부 장관을 지지하고 검찰 개혁을 촉구하는 대규모 집회가 지난 주말에 이어 서울 서초동 대검찰청 앞에서 열렸다. 본 집회가 시작되기 전부터 시민들이 모여들었다. 이번 집회를 끝으로 서초동 집회는 잠정 중단된다.

‘사법적폐청산 범국민 시민연대’(시민연대)는 12일 오후 6시부터 서울 서초구 대검찰청 앞에서 ‘제9차 사법적폐 청산을 위함 검찰 개혁 촛불 문화제’를 연다. 시민연대는 이번 집회에 ‘최후통첩’ 이름을 붙이고 마지막 집회라고 밝혔다. 다만 “납득할 만큼의 검찰개혁이 이뤄지지 않으면 언제든 다시 수백만 명이 촛불을 들 것”이라고 했다.

사전 집회가 시작되는 오후 4시 전부터 참가자들이 모여 들었다. 이들은 반포대로 서초역~서초경찰서, 서리풀터널~서초역, 서초대로 서초역~교대역, 반포대로 서초역~교대입구 삼거리를 메웠다. 반포대로 교대입구 삼거리에서 서초경찰서까지는 8개 차선 1.1㎞, 서초대로 서리풀터널에서 교대역까지는 10개 차선 1.3㎞에 달한다. 주최측은 참가 인원 수는 공식적으로 밝히지 않기로 했다.

이날 모인 참가자들은 20대부터 60대, 자녀와 함께 참석한 가족 단위 등 다양했다. 참가자들은 ‘조국수호 검찰개혁’ ‘다시는 지지 않는다’ ‘최후통첩’ 등이 써진 손펫말과 노란 풍선을 들었다. 이들은 “조국수호” “우리가 조국이다” “기레기 아웃” 등 구호를 외쳤다. 사전 집회가 시작되자 사회자 진행에 따라 태극기 파도타기 응원을 이어가기도 했다.

신당동에서 11살 조카와 함께 집회에 참가한 박미경씨(40)는 “과거부터 검찰이 수사 과정에서 지나치게 권력을 행사하는 일이 반복됐다. 그런 일이 반복되지 않았으면 해서 참가했다”고 했다. 이어 “조카에게 평화로운 시위 현장을 보여주고 싶기도 했다”고 했다. 이번에 처음 집회에 참가했다는 가민근씨(29)는 “지난 주 언론 보도를 보다가 문제가 심각해 집회에 나가야겠다고 결심했다”고 했다.

지역 곳곳에서 집회에 참가한 시민들도 있었다. 제주도에서 온 이수정씨(43)는 “그동안 집회는 멀어서 참석할 수가 없었다”며 “서울에 올라올 일이 있어서 왔다가 마지막 집회에 참가했다”고 했다. 신권씨(72)는 전라북도 부안군에서 새벽부터 버스를 타고 집회에 참석했다. 신 씨는 “마지막 집회 빠지면 죄인 같기도 하고 싸우고 싶어서 참석했다”며 “조 장관에 대한 검찰의 먼지털기식 수사는 끝나야 한다”고 했다.

이날 발언자로 나선 황교익 칼럼니스트는 “문재인 정부는 ‘사람이 먼저다’라는 구호를 외치며 집권했는데, 조국 장관과 그 가족에게 행해지는 검찰 권력 행태를 보면 사람이 먼저인 게 아닌 것 같다”며 “조국 장관 을 사퇴시키면 검찰개혁을 뒤로 물릴 수 있고, 검사들은 이제까지 해온 대로 계속 해나갈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있다. 문 정부는 당장 검찰이 권력을 남용하는 일을 멈추도록 해야한다”고 했다.

우희종 서울대 교수는 “어제 7000여명 교수·연구자들이 실명으로 서명을 하고 시국선언을 발표했다”며 “검찰개혁에서 더 나아가 언론개혁, 교육개혁, 종교개혁까지 이어나갈 것”이라고 했다. 지난 11일 검찰개혁을 촉구하는 국내외 교수·연구자 모임은 기자회견을 열고 시국선언문에 7924명이 서명했다고 밝혔다. 최민희 전 민주당 의원은 “한겨레 보도가 나간 이후 대다수 메이저 언론은 윤석열 검찰총장 편을 들어주기 바쁘다”며 “왜 언론은 조 장관에만 가혹하고, 윤 총장에겐 관대한가”라고 했다.

이날 경찰은 참석 인원에 따라 서초역을 중심으로 서초대로와 반포대로를 순차적으로 통제할 예정이다. 서초구 서울성모병원 인근에서 열리는 보수단체 집회와의 충돌에 대비해 누에다리 부근에 바리케이드를 치고 경력 94개 부대를 배치했다.

김희진 기자 hjin@kyunghyang.com

입력 : 2019.10.12 19:35 수정 : 2019.10.12 19: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