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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5주기 특별기고

아지빠 2019. 4. 17. 08:27

 

 

 

 

 

 

 

 

 

 

 

 

우리가 아는 ‘참사의 기억’…우리가 모르는 ‘기억의 참사’

4·16시민연구소 세월호 5주기 특별기고.

“사고 직후에 즉각적이고, 적극적으로 인명 구조활동을 펼쳤다면 희생을 크게 줄일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해경의 구조업무가 사실상 실패한 것입니다. (…) 20년이 다 된 노후선박을 구입해서 무리하게 선박구조를 변경하고, 적재중량을 허위로 기재한 채 기준치를 훨씬 넘는 화물을 실었는데, 감독을 책임지는 누구도 잘못된 부분을 바로잡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민관유착은 해운분야뿐만이 아니라 우리 사회 전반에 수십년간 쌓이고 지속되어 온 고질적인 병폐입니다. (…) 이번 사고의 직접적인 원인은 선장과 일부 승무원들의 직무유기와 업체의 무리한 증축과 과적 등 비정상적인 사익추구였습니다.”

해경의 무능, 민관유착, 선박 구조 변경, 과적, 선원의 직무유기, 청해진해운의 비정상적 사익추구 등을 세월호 참사 배경으로 짚은 이 말은 누구의 것일까요? 2014년 5월19일 박근혜 전 대통령의 대국민담화 일부분입니다. 그는 담화 때 해경을 해체하고 국민안전처를 만들겠다면서, 몇몇 희생자들 이름을 부르며 눈물을 흘리기도 했습니다.

우리는 참사 초기부터 “끝까지 함께하겠다” “기억하겠다” “행동하겠다”라고 외쳐 왔습니다. 우리는 세월호 참사를 어떻게 기억하고 있나요. 혹시 박 전 대통령의 해석에 머물러 있다면, 세월호는 ‘기억의 참사’일 수 있습니다.

■ 우리가 아는 것, 모르는 것

 

자기들끼리 탈출한 선원들 구조 전까지 어떤 행동했나‘가만히 있으라’는 선내 방송

어떤 경위로 이뤄졌을까참사 당일 쏟아진 언론 오보 누구 얘기를 듣고 내보냈나

 

조타실 선원: 조타실 선원들이 승객 구호 없이 자신들만 탈출했다는 사실은 모두가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조타실에 선원들이 모인 오전 8시50분부터 탈출한 9시49분까지 선원들이 조타실 안에서 어떤 행동, 대화를 했는지 밝혀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많지 않습니다. 선원에 대한 판결은 대법원 판결까지 종료됐습니다.

기관실 선원: 기관실 선원들도 승객 구호 없이 탈출했습니다. 그러나 기관실 선원들이 세월호 3층 좌현 복도에 모인 오전 9시6분부터 9시39분까지 30분 넘는 시간 동안 이들은 선박 상태를 물어보거나 무슨 임무를 수행해야 할지 묻지 않았고, 해경에 신고하지 않았으며 엔진·발전기 상태를 살피지 않았습니다. 맥주나 몇 모금씩 했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거의 없습니다. 배가 왼쪽으로 기우는 상황에서 3층 좌현에 있는 사람은 오른쪽이나 4·5층으로 올라가기 마련이지만, 이들은 3층 좌현에서 30분 이상 기다렸습니다.

선내대기 방송: 침몰하는 세월호 안에서 ‘가만히 있으라’는 선내대기 방송이 나온 사실은 전 국민이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방송이 어떤 경위로 이뤄졌는지는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물이 들어차는 순간까지 선내대기 방송을 했던 선원은 기소조차 되지 않았고, 그 선원은 1기 세월호 특별조사위원회에서 ‘선사의 지시’로 선내대기 방송을 했다고 진술했다가 이후 번복했다는 사실도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참사의 본질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선내대기 방송조차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우리는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선내 이동 가능성: 퇴선명령이 내려졌다면 짧게는 5분5초, 길게는 9분28초 만에 476명 모두 탈출할 수 있었다는 시뮬레이션 연구결과는 많은 이들이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실제 당시 세월호에서 상당수 사람들이 이동했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많지 않습니다. 각 시간대별로 다양한 층내 이동과 층간 이동이 존재했습니다. 세월호가 기운 직후 조타실로 온 1등 항해사는 얼마 뒤 같은 층에 있던 자신의 선실로 가서 휴대폰을 가져왔고, 사무장 양모씨는 다양한 시간대에 3·4·5층에서 목격됐으며, 9시44분 세월호 3층에 올라탄 해경은 불과 1~2분 만에 5층 선수 쪽으로 이동했습니다. 세월호 승객들도 분명 이동할 수 있었습니다.

해경 초계기: 세월호가 기운 동안 해경 비행기가 현장에 도착했다는 사실은 익히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해경 초계기 CN-235(B703)가 세월호 현장으로 이동하는 중이나 현장 도착 후에도 세월호와 한 번도 교신하지 않았다는 점, CN-235는 저속저공 비행이 가능하고 팽창식 구명뗏목 5개를 보유하고 있었지만 투하하지 않았다는 점, 현장 촬영만 했다는 것을 아는 이는 많지 않습니다. 당일 오전 10시38분 CN-235 부기장은 KBS와 인터뷰하면서 ‘대부분 구조됐다’고 얘기했고, 10시39분 기장은 다른 항공기와 ‘대부분 구조되지 않았다’고 교신했다는 사실도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해경 헬기: 해경 헬기가 현장 도착 후 바스켓을 내려 한 명 한 명 구조하는 방식을 진행한 것은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해경들이 한목소리로 ‘세월호 안에 많은 승객이 있는 줄 몰랐다’고 주장하는 것은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해경 상황실에서 헬기에 세월호 승객 수를 알려 줬다고 진술하고, 해경 교신에서도 승객 수에 대한 교신이 존재하는데 많은 승객이 있는 줄 몰랐다고 주장해온 겁니다. 헬기 도착 후 먼저 바스켓으로 구조한 사람 역시 선원이었다는 것도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선원 인지: 해경 경비정 123정이 현장 도착 직후 구한 이가 선원이었다는 것은 모두가 알고 있습니다. 123정 승조원들은 ‘처음 구조한 이들이 선원인 줄 몰랐다’고 주장하는 사실 역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검찰이 만든 수사보고서에서는 영상, 선원 복장, 진술 등으로 선원임을 알 수 있었다고 판단했다가, 공소장에서는 123정에서 선원 여부를 “확인하지 않았다”고 바뀐 사실은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퇴선명령은 선장이 알아서: 세월호에서 퇴선 여부를 물어보았을 때 진도VTS(Vessel Traffic Service)에서 “퇴선명령은 선장이 알아서 판단하라”고 답한 사실은 제법 알려져 있습니다. 세월호에 좀 더 관심이 많은 분이라면 진도VTS에서 서해청 상황실에 문의했고, 서해청 상황실에서 “퇴선 여부는 선장이 판단할 사항”이라고 답해 진도VTS 관제사가 세월호에 그리 전했다는, ‘관료주의의 폐해’로 이 같은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정작 그 교신을 했던 관제사는 누구에게 물어본 게 아니라 자신의 판단으로 그런 교신을 했다고 주장하고 있는 사실을 아는 이는 거의 없습니다.

9시19분: 침몰 중이라는 최초 언론 보도가 오전 9시19분 YTN 보도로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9시19분에 언론이 최초 보도한 내용이 확정된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이는 많지 않습니다. 여전히 오전 7시20분에 KBS에서 속보 자막이 나왔다는 의혹은 해명되지 않고 있습니다. 청와대 국가안보실, 국가정보원, 안전행정부 종합안전상황실이 9시19분 TV를 보고 세월호 문제를 최초 인지했다고 주장하는 것은 알려져 있지만 안산 고잔파출소 순경이 9시6분에 세월호 침몰 발생 사실과 단원고 학생들 탑승을 알았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거의 없습니다.

언론의 오보: 오전 11시1분쯤 MBN과 MBC에서 단원고 학생 전원구조라는 오보가 나왔다는 사실은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참사 당일 오전 10시가 넘으면서 언론 오보가 쏟아졌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많지 않습니다. 10시12분 KBS에서 “선내방송 ‘침몰 임박…탑승객 바다로 뛰어내려야’”라는 자막이 나왔고, 비슷한 시각 MBC에서 “선내방송 ‘승객들 바다로 뛰어내려’”라는 자막이 등장합니다. 선박을 이탈하라는 방송은 단 한 차례도 없었습니다. 언론은 어떻게 이런 자막을 내보냈을까요. 10시46분 KBS는 “해군, ‘탑승객 전원 선박 이탈…구명장비 투척 구조 중’”이라는 자막을 냅니다. 탑승객 상당수는 선박을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KBS는 해군 누구에게 저 얘기를 들었을까요.

 

결론 안 난 침몰 원인처럼 여전히 감춰진 진실이 많아기억할 것을 정하기 전에

진상규명에 최선을 다해야무능·안전 프레임에 그치면 참사의 박제화는 시간문제

 

침몰 원인: 복원성 불량, 평형수 부족, 고박 불량, 조타 과실 등이 결합된 것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선원 재판의 항소심(2심)과 상고심(대법원)에서 침몰 원인을 알지 못한다고 결론 내린 것을 아는 이는 많지 않습니다. 선체조사위원회도 결론 짓지 못했습니다. 아직 ‘모른다’가 답이라는 점은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선장과 아파트: 이준석 선장이 2014년 4월17일 저녁 해경 아파트에서 하룻밤을 보냈고, 아파트 폐쇄회로(CC)TV의 일부 내용이 삭제됐다는 점은 많은 이들이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문제를 내사한 검찰이 거짓 사실을 적시하면서 이 문제를 덮었다는 것을 아는 국민은 거의 없습니다. 4월17일 당시 이 선장은 명백히 피의자 신분이었음에도 검찰은 “이 선장이 참고인 신분이었던 점에 비추어 자살 방지를 위해 보호하였을 뿐 청해진해운 등 외부인과 접촉해 주려는 의도가 없었다고 여겨짐”이라고 결론 내렸습니다.

국정원: 세월호 노트북에서 국정원 지적사항이라는 파일이 나왔다는 것은 익히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국정원과 세월호, 국정원과 청해진해운이 대단히 긴밀한 관계라는 점은 가려져 있습니다. 1000t급 이상 내항여객선 17척 가운데 사고가 발생했을 때 국정원에 신고하는 운항관리규정상 보고체계를 가지고 있는 배는 오직 청해진해운의 선박인 세월호와 오하마나호뿐입니다. 청해진해운 업무일지에는 세월호 도입 전인 2011년 1월부터 국정원과 청해진해운은 정기모임, 점심식사, 면담 등을 빈번히 갖습니다. 청해진해운 기획관리부장의 휴대폰에는 국정원 직원 연락처 12개, 기무사 직원 연락처 15개가 등록된 점도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통영함: 해군참모총장이 구조를 위해 통영함 출동을 두 번이나 명령했는데 출동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많은 국민이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문제가 지금까지도 해명되지 않았다는 점은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검찰은 “안전사고 우려 때문에 투입하지 않은 것”이라고 결론 내렸지만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그 이유라면 해군참모총장이 두 번이나 명령을 내릴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군은 2013년 9월 통영함 성능시험에서 우수 평가가 나왔다고 대대적인 홍보를 했습니다.

이상에서 말씀드리려는 바는, 세월호 참사와 관련해 ‘밝혀진 진실’은 없다는 사실입니다. 가장 기본적인 의문이라 할 수 있는 세월호가 왜 침몰했는지, 해경은 왜 선원들만 구조하고 승객들은 내버려 두었는지 그 이유조차 조금도 밝혀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기억’해야 할까요?

■ 박제화 위기의 4·16, 다시 기억투쟁으로!

1992년 대선에서 김영삼 후보가 당선되자 많은 국민은 새 정부에서 5·18 진상규명을 하길 기대했습니다. 하지만 1993년 5월13일 김 전 대통령은 담화를 내고 5·18을 역사에 맡기자고 주장하고 말았습니다. 이에 5월 운동단체들은 ‘광주 문제 해결을 위한 5원칙’(광주 5원칙)을 제시합니다. 첫째 진상규명, 둘째 책임자 처벌, 셋째 명예회복, 넷째 배상, 다섯째 기념사업입니다. 첫째 진실, 둘째 책임, 셋째 명예회복, 넷째 배상, 다섯째는 기억입니다.

광주 5원칙은 세월호 참사에도 적용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진상규명입니다. 진실이 명백히 밝혀져야 책임자를 처벌할 수 있고, 피해자들의 명예도 회복되고, 보상(합법적인 행위로 끼친 손해를 갚는 것)을 할지 배상(불법적인 행위로 끼친 손해를 물어 주는 것)을 할지, 끝으로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 확정할 수 있습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진상규명은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고, 참사에 대한 기억은 여전히 경합 중입니다. 이윤을 앞세워서, 훈련을 제대로 하지 않아서, 부정부패 때문에, 무능과 무책임 때문에 등의 설명은 이미 오래전 이뤄진 박근혜식 해석과 같은 것입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밝혀진 진실이 없다는 것, 풀리지 않은 의문이 너무 많다는 것입니다. 합리적 의심을 모두 음모론으로 치부해 버린다면 세월호 진상규명은 요원할 것입니다. 화려한 말잔치, 거창한 이론보다 사실관계를 하나씩이라도 확인하려는 노력이 어느 때보다 중요한 시기입니다. 박근혜식 기억, 무능 프레임, 안전 프레임으로만 그친다면 세월호 참사가 박제화되는 것은 시간문제입니다.

일러스트 | 김상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