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유적(기타)
1.선죽교
개성직할시 선죽동(善竹洞) 자남산 동쪽 기슭의 작은 개울에 있는 고려시대의 돌다리.
옛이름은 선지교(善地橋)라 하였으며, 다리의 동쪽에 한호(韓濩) 글씨의 비(碑)가 있다. 돌기둥과 노면(路面)이 맞닿는 부분에는 시렁돌을 철도의 침목처럼 올렸으며, 돌기둥 위에 마련된 노면에는 양쪽 가에 긴 난간돌을 놓았고 그 사이를 여러 줄의 판석(板石)으로 깔았다. 노면 위에는 교량의 난간주 구실을 하는 돌기둥을 3단으로 쌓았다.
이 다리는 고려 말 정몽주(鄭夢周)가 이성계(李成桂)를 문병하고 오다가 방원(芳遠)이 보낸 조영규(趙英珪) 등에게 쇠몽둥이로 맞아 피살된 곳으로 유명하다.
이 돌다리에는 아직도 정몽주의 혈흔이 있다고 한다.
2.아미타 삼존 내영도
고려 14세기, 110cm×51cm, 비단에 채색, 용인 호암미술관 소장. 아미타불로부터 한 줄기 빛이 뿜어져 나와 공양자를 비취고 있다. 아미타불은 극락정토를 주관하는 부처. 그에 의해 극락정토로 이끌려가는 숨막히는 장면이다. 세계 최고의 수준을 자랑하는 섬세하고 화려한 고려 불화. 고려 후기 귀족들의 염원을 단적으로 표현하고 있으며, 아울러 그들의 재력, 미적 수준들이 유감없이 발휘되어 있다. 행복만이 보장된 서방극락정토에 왕생하려면, 한마음으로 아미타불의 이름을 정성되이 외워야 한다. 이렇게 염불을 잘 한 중생은 그가 세상을 하직한 다음이나, 혹은 수행이 성숙해졌을 때 아미타불이 직접 그의 권속과 함께 마중해서 서방극락으로 맞이해 간다고 한다. 이러한 염불왕생신앙은 이미 신라 때부터 널리 유행하고 있었다. 욱면의 설화에서처럼. 아미타불의 협시로 관음과 세지가 아니라, 세지 대신 지장이 등장하고 있다. 본존은 다소 정적인 모습이지만, 풍만한 얼굴, 근엄한 표정, 활기찬 어깨와 당당한 가슴, 쑥 내민 팔 등에서 건장한 장자풍 부처의 위엄이 잘 표현되어 있다 .
3.아미타 아미타 9존도
고려 1320년, 177.2cm×91cm, 비단에 채색, 일본 송미사 소장. 아미타 내영도에는 몇가지 형식이 있는데, 아미타불 단독으로 왕생자를 맞이해 가는 장면, 아미타 삼존불이 맞이해 가는 장면, 아미타불과 8대 보살이 맞이해 가는 장면, 아미타불과 25 보살 또는 많은 성중이 맞이해 가는 장면 등이 있다. 아뭏든 아미타불은 단독 예배를 위한 아미타불 존상화, 아미타 내영도, 관경변상도 등의 여러가지 모습으로 수없이 많이 그려지고 숭배되었다. 이 그림들은 왕족이나 귀족의 원당이나 사찰의 무량수전, 극락전, 아미타전 등에 봉안되었다.
4.수월관음도
고려 후기, 227.9cm×125.8cm, 비단에 채색, 일본 대덕사 소장. 수월관음도는 관음 신앙의 유행에 따라 사찰의 원통전의 후불화 또는 극락전에 모시는 불화로 많이 제작되었다. 관음보살은 관세음보살의 준말. 대승 불교의 위로는 진리를 찾고 아래로는 중생을 제도한다는 이상 가운데 중생 제도를 몸소 실천하는 자비의 화신. 즉, 중생의 갖은 고난에 적절히 대처함으로써 모두를 구제, 안락한 세계로 인도하는 구제자이니, 관음보살만큼 진심에서 우러난 친근감과 열렬한 환영을 받은 보살도 다시 없을 것이다. 관음도의 제작에는 화엄경이 절대적인 영향을 미쳤는데, 이에 의하면 관음은 보타락가산에 거주하면서 중생을 제도한다. 보타락가산에는 수많은 성현들이 살고 있는데, 온갖 보배로 꾸며졌고 지극히 청정하며 꽃과 과일이 풍부한 숲이 우거지고 맑은 물이 솟아나는 연못이 있는데, 이 연못 옆 금강보석 위에는 용맹 장부인 관음 보살이 결가부좌하고 앉아서 중생을 제도한다. 수월관음도는 우리 나라에서 아미타도와 함께 가장 많이 그려진 도상인데, 선재 동자, 암굴, 염주, 공양자, 보주를 든 용, 한 쌍의 청죽 등의 표현은 다른 나라의 수월관음화에서는 잘 볼 수 없는 특징이다. 보타락가산에 살고 있는 관음보살을 선재 동자가 방문하여 청문하는 장면을 소재로 한 도상이 널리 유행하였다. 아마도 의상이 친견했다는 낙산의 수월관음을 도상화한 것이 계속 유행하였던 것 같다.
5.혜허의 양류관음도
고려 후기, 혜허 그림, 144cm×62.6cm, 비단 채색, 일본 도쿄 센소지(淺草寺) 소장. 그림의 오른쪽 아래에 작자를 분명히 밝히고 있으며 고려 수월관음도 중에서 구도와 형태가 특이한 그림이다.
대각선적 구도는 다른 수월관음도와 비슷하지만 버들잎 속에 서 있는 입상이나 화면 오른쪽의 절벽과 대나무가 없어지고 버들잎 광배가 화면의 중심을 압도하는 구도는 이 상의 독특한 특징이다.
역시 풍만하고 여유로운 표정, 부드러우면서도 세련된 어깨의 곡선이나 완만한 굴곡을 이루는 신체의 흐름, 오른쪽으로 휘어진 늘씬한 자태 등은 당대 왕공 귀족들의 모습을 연상하게 한다.
6.사경변상도
고려 1334년, 34.0×11.5cm, 보물 제752호, 호림박물관 소장.
목판 인쇄술이 발달하기 이전의 경전들은 모두 필사한 것일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경전을 베끼는 경서사의 공덕은 극히 강조되기 마련이었다. 그러나 목판이 발달하면 대부분의 수요는 판경이 담당하게 되므로 사경의 필요성은 그만큼 줄어들 수밖에 없고 이제는 실용적인 면이 아닌 '경서사의 공덕'이라는 신앙적인 면만 강조되기에 이른다. 이렇게 만들어진 사경들은 초호화판으로 만들어졌으니 글자는 금이나 은으로, 그림은 금니로, 바탕은 최고급 종이인 감지 같은 색지로 만들어졌다.
이러한 화려한 사경들은 통일 신라 때부터 유행하기 시작했지만, 초호화판의 사경이 대량으로 유행하기 시작한 것은 고려 때부터이다. 사실, 고려의 호화판 사경들은 무수히 조성되었고, 현재도 많이 남아 있다. 이 변상도는 충숙왕 복위 3년(1334)에 자선대부 장작원사였던 안새한이라는 사람이 부모님의 은공을 기리기 위해 대방광불 화엄경 보현행원품을 사경한 책의 첫 부분이다.
그림은 화면 가운데에 보현보살이 위치하고, 그를 향해 합장하고 법문을 듣고 있는 보살들로 구성되어 있다. 보살들의 보관과 법의 등은 화려하고 장식적인 필치로 정교하게 그렸고, 배경은 동일한 문양을 반복해서 채웠다.
8.부석사 조사당벽화 浮石寺祖師堂壁畵
경상북도 영주시 부석면(浮石面) 북지리(北枝里) 부석사에 있는 고려 말기의 벽화. 1962년 12월 20일 국보 제46호로 지정되었다. 모두 6폭이며, 각각의 크기는 가로 75cm, 세로 205cm이다. 원래 부석사의 창건 당시 조사당 벽면에 그려져 있던 벽화인데, 현재는 이 벽면 전체를 그대로 떼어내어 안전장치를 한 후에 부석사 무량수전(無量壽殿) 안에 보관하고 있다. 조사당 벽면에 있던 원래의 위치 순서대로 열거하면 ①보살상(菩薩像), ②다문천왕상(多聞天王像) ③광목천왕상(廣目天王像), ④증장천왕상(增長天王像), ⑤지국천왕상(持國天王像), ⑥보살상(菩薩像)으로 되어 있다. 이들 벽화는 흙벽 위에 녹색으로 바탕을 칠하고 붉은색, 금색, 녹색, 백색 등으로 짙게 채색하였다. 양 보살상은 풍만하면서도 우아한 귀부인상으로 정적이고도 유려한 선(線)을 잘 구사하여 그렸다. 또한 가운데의 사천왕상은 악귀를 밟고 서서 무섭게 노려보는 모습으로, 힘차고 동적인 먹선으로 윤곽을 그렸고 그 안에 채색을 하였다. 1916년의 수리공사 때 발견된 묵서명(墨書銘)으로 미루어 조사당을 세운 연대가 고려 우왕 3년(1377)임이 밝혀졌으며, 벽화를 그린 연대도 같은 시기일 것으로 추측된다. 국내에 남아 있는 고려시대의 벽화는 이 조사당벽화를 비롯해서 개성 수락암동(水落巖洞) 고분벽화, 개풍군 공민왕릉(恭愍王陵) 벽화 등이 있으나 예술적 가치나 보존 상태로 보아 이 벽화가 가장 뛰어나다. 뿐만 아니라 한국에 남아 있는 벽화로서는 가장 오래된 작품으로 그 의의가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