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의 종
신라의 양식을 이은 고려 초의 범종은 호국불교사상과 함께 일반 백성에게까지 널리 확산되어 개인적인 발원을 담은 주조활동도 성행하였다.
그러나 시대가 흐르면서 수법이나 규모에 많은 변화를 보였다. 그 가장 큰 원인은 12세기 몽고의 침입으로, 이전까지 이어오던 신라의 전통에서 벗어나 예술성도 퇴화하며 왜소한 양상을 띠게 되었다.
구체적인 특징으로 상대에 입상화문(立狀花文)이 나타나며 정교한 조각 수법보다는 음·양각의 선적인 도형으로 형식화되어 졸렬한 느낌을 준다. 명문은 유곽 안에 위패(位牌) 모양을 조각하여 그 안에 양각하는 새로운 형식을 사용하였다.
신라범종에 비해 국내에 보존된 것이 상당히 많으며, 천흥사동종(1010년)·청녕사년명동종(1058년)·정풍이년명동종(1157년)·내소사동종(1222년) 등이 대표적이다.
1.성거산천흥사동종
국내에 남아있는 고려시대 종 가운데 가장 커다란 종으로 크기는 종 높이 1.33m, 종 입구 0.96m이다.
종 위에는 종의 고리 역할을 하는 용뉴가 여의주를 물고 있는 용의 모습으로 표현되었는데, 신라 종의 용보다 고개를 쳐 들어 올린 모습을 하고 있다. 소리 울림을 도와 준다는 용통은 대나무 모양이며, 편평한 부분인 천판 가장자리에는 연꽃무늬를 돌렸다. 몸체의 아래와 위에는 구슬무늬로 테두리를 한 너비 10㎝ 정도의 띠를 두르고, 꽃과 덩굴로 안을 채워 넣었다.
위에 두른 띠 바로 아래로는 4곳에 사각형의 유곽을 만들고 그 안에 가운데가 도드라진 9개의 연꽃을 새겼다. 유곽 아래에는 종치는 부분인 당좌를 원형으로 2곳에 두었고, 구슬로 테두리하고 연꽃으로 장식하였다. 당좌 사이에는 2구의 비천상을 두었는데, 1구씩 대각선상에 배치하여 신라종과는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유곽 바로 아래에는 위패형의 틀을 설치하고 그 속에 글을 새겨, 고려 현종 원년(1010)에 주조되고 성거산 천흥사에 있던 종임을 알 수 있다.
현재 국내에 남아있는 신라 상원사 동종, 성덕대왕 신종 다음으로 큰 종으로 제작기법이나 양식이 고려 범종을 대표하는 종이라 할 수 있다.
2.여주출토청녕4년명동종
여주출토청녕4년명동종은 고려시대의 범종으로 1967년 경기도 여주군 금사면 상품리에서 고철 수집 때 우연히 발견되었다.
종을 매다는 고리인 용뉴의 용두(龍頭)는 신라 범종의 용두와는 달리 한 마리의 용이 고개를 들고 있는 모습이며, 용체(龍體)를 구부러뜨려 범종을 매어 달게 하고 있다. 용의 등 뒤에 있는 음통은 6단으로 구분되어 있고, 각 부분마다 보상문(寶相紋)·당초문(唐草紋)을 양각하여 장식하였다.
용뉴 아래 상대(上帶)의 문양대와 천판(天板)이 접하는 경계 상에는 8개의 입화형(立華形) 뇌두문을 배치하였고 또한 상대·하대(下帶)·유곽대(乳廓帶)에는 가늘고 섬세한 연주문대(聯珠紋帶)를 돌리고 그 내부에 모란문(牧丹紋)과 당초문을 주된 문양으로 하여 화려하게 장식하였다.
상대 아래에 있는 사각형 유곽에는 꽃 모양으로 돌출된 유두(乳頭) 9개를 붙여놓았고, 유곽 주위에는 유곽대를 돌렸다.
종신(鐘身)에 있는 비천상(飛天像)은 이보다 48년 전에 만들어진 국보 제280호 성거산 천흥사동종이 두 군데에 배치된 것과는 달리 네 곳에 있다. 모두 구름무늬 위에 복련(覆蓮)으로 된 연화좌(蓮花座) 위에 천의(天衣)를 날리며 두신광(頭身光)을 갖추고 결가부좌한 모습으로 배치되어 있는데, 특히 대칭 되는 곳에 보관(寶冠)을 쓴 2위의 보살상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종을 치는 부분인 당좌(撞座) 역시 종신 중하단에 보살상과 교대로 엇갈리게 하여 네 곳에 배치하였는데, 당좌 중앙에는 자방(子房)을 갖추고 그 주변에 복엽(複葉)의 16연판(蓮瓣)을 돌렸으며, 그 외곽도 가늘고 섬세한 연주문으로 장식하여 처리하고 있다.
종신 아랫부분 하대에 접하는 곳에는 사각형으로 구획된 방곽(方廓內)을 만들고 그 상부를 화문으로 장식하였다. 방곽 안에는 지름 1.3㎝ 크기의 글씨를 4행으로 새겨 넣었는데, 이 같은 방식은 국보 제28호 천흥사동종 또는 현재 일본 사가(在賀)현 혜일사(惠日寺)에 소장된 태평6년(太平六年, 1026)명 거제북사종(巨濟北寺鐘) 등에서 그 유례를 찾아 볼 수 있다. 특히 이 명문대가 자리한 위치는 용뉴의 용두 방향과 일치되어 유곽 바로 아래에 해당하여 제작 당시 의도적으로 이 자리를 정면으로 삼았던 듯하다.
명문은 하대에 붙여서 만든 사각형의 구획 안에 '特爲聖壽天長之願鑄成金鐘一口重一百五十斤淸寧四年戊戌五月日記'라고 새겨져 있다. 전부 4행으로 음각하였는데, 명문 중에 이 동종을 봉안한 사원이나 승려 이름 등이 나와 있지 않지만, 고려 문종 12년(1058)에 해당하는 '청녕(淸寧)'이라는 중국 요(遼)의 연호가 있어 연대가 확실한 작품이 되고 있다. 현재 이 청녕4년명동종 보다 이른 시기에 제작된 고려 동종으로는 1010년에 조성한 천흥사동종이 유일하므로 이 동종은 국내에 남아 있는 고려 동종 가운데 두 번째로 빠른 시기에 제작된 것이다. 다만 일본에 반출된 고려 동종 가운데는 이 보다 빠른 시기의 것으로 영암서원종(靈巖西院鐘, 963), 거제북사종, 태평10년(太平十年, 1030)명 동종 등이 있다.
한편 명문 가운데 이 동종을 가리켜 '금종(金鐘)'이라 한 것도 처음 나타나는 용어이기에 동종의 명칭 고찰에서 매우 중요하다.
유곽 바로 아래에는 위패형의 틀을 설치하고 그 속에 글을 새겨, 고려 현종 원년(1010)에 주조되고 성거산 천흥사에 있던 종임을 알 수 있다.
현재 국내에 남아있는 신라 상원사 동종, 성덕대왕 신종 다음으로 큰 종으로 제작기법이나 양식이 고려 범종을 대표하는 종이라 할 수 있다.
3.정풍2년명동종(正豊二年銘銅鍾(13의 部分)
고려시대. 높이 22.5cm, 입지름 16.8cm, 서울 개인소장. 이 鐘은 鐘肩의 立花장식이 뚜렷하고 鐘口가 넓어진 고려양식을 보여 주는 小鐘인데 장식무늬가 특이하여 주목된다. 上帶와 下帶는 2段의 雷文으로 장식하였는데 이 紋樣帶 안에 上帶에 12字, 下帶에 7字의 梵字가 圓圈안에 조각되었다. 上帶 밑 네 곳에 큼직한 乳廓이 있는데 雷文帶를 돌린 속에 돌기된 9乳가 있다. 유곽 밑에는 子房과 꽃잎에 모두 珠文을 장식한 8葉 연꽃으로 撞座를 삼았고 乳廓 사이 鐘身 거의 중앙부에 頭光과 身光을 갖추고 蓮花座 위에 앉은 如來像 1軀씩이 있다. 어깨에는 한 줄 聯珠를 돌리고 그 위에 花形 立飾이 돌려 있다. 정상에는 용뉴와 音筒이 있는데 용뉴는 다리가 하나 없어졌으나 힘차게 표현되었고 音筒 위에는 작은 구슬이 있어 특징을 이루고 있다.
如來像 밑에는 「正豊二年庚戌」운운의 鐘銘이 있어 고려 毅宗 11년(1157)의 鑄成으로 추정된다.
4.내소사고려동종(來蘇寺高麗銅鐘)
고려시대. 높이 22.5cm, 입지름 16.8cm, 서울 개인소장. 이 鐘은 鐘肩의 立花장식이 뚜렷하고 鐘口가 넓어진 고려양식을 보여 주는 小鐘인데 장식무늬가 특이하여 주목된다. 上帶와 下帶는 2段의 雷文으로 장식하였는데 이 紋樣帶 안에 上帶에 12字, 下帶에 7字의 梵字가 圓圈안에 조각되었다. 上帶 밑 네 곳에 큼직한 乳廓이 있는데 雷文帶를 돌린 속에 돌기된 9乳가 있다. 유곽 밑에는 子房과 꽃잎에 모두 珠文을 장식한 8葉 연꽃으로 撞座를 삼았고 乳廓 사이 鐘身 거의 중앙부에 頭光과 身光을 갖추고 蓮花座 위에 앉은 如來像 1軀씩이 있다. 어깨에는 한 줄 聯珠를 돌리고 그 위에 花形 立飾이 돌려 있다. 정상에는 용뉴와 音筒이 있는데 용뉴는 다리가 하나 없어졌으나 힘차게 표현되었고 音筒 위에는 작은 구슬이 있어 특징을 이루고 있다.
如來像 밑에는 「正豊二年庚戌」운운의 鐘銘이 있어 고려 毅宗 11년(1157)의 鑄成으로 추정된다.
5.전등사 범종
보물 제393호. 높이 1.64m, 입지름 1m. 꼭대기에는 좌우에서 쌍룡이 등을 지고 웅크린 모습으로 꼭지를 이룰 뿐, 음통(音筒)은 없다. 용머리 주위에는 복판(複瓣) 16엽의 연꽃이 둘레에 새겨져 있고 연판(蓮瓣)과 연판 사이에도 판단(瓣端)이 있어 마치 중판처럼 보인다. 종신(鐘身) 상부에는 8괘가 나열되었고 종신은 수조(數條)의 횡대로서 상하 2구로 구분한 다음, 종선(從線)으로 상하가 8개의 사각형 3획으로 마련되었다. 간지(間地)와 곽(廓) 안에 명문(銘文)이 양주(陽鑄)되어 있으며 종구(鐘口)의 선(線)과 평행되는 소문대(素文帶)가 돌려 있고 이 소문대 위에 당좌(撞座) 4개가 새겨져 있다.
형태가 장중하고 조각이 웅경하며 소리도 청아하다. 전체적인 형태에서 개성 연복사종을 연상케 하며 중국종의 특징을 볼 수 있다. 명문(銘文)으로 보아 1097년 중국의 허난성[河南省] 백암산 숭명사의 종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어떤 경로로 전등사에 전해졌는지는 알 수 없다.
이 범종은 중국 북송 철종 4년(1097, 고려 숙종 2년) 하남성 회경부 수무현 백암산 송면사에서 주조된 철제 범종으로 우리나라 종과는 형태가 전혀 다른 중국에서 주조된 중국 종이다. 종의 용뉴에는 두마리의 용이 등진 형상을 하고 있고, 종견에는 16엽의 연꽃잎을 돌렸다. 또한 종신에는 2개에서 4개의 횡선을 배치하여 상,중,하단으로 구획하였으며 그 안에 각각 8개씩의 가사문대를 양각하였다. 종구는 팔능파상형을 이루고 있으며, 종구와 하단 가로선 사이에는 4개의 당좌(종을 칠 때 때리는 부분)가 마련되어 있다. 특히 종신 하단의 가사문대 내에는 시주인, 동역인, 장인 및 주조 연대를 알 수 있는 명문이 양각되어 있다. 종 몸체에 일부 명문이 남아 있어 만들어진 곳 대송 회주, 절이름 송명사, 연대(1907)등을 밝힐 수 있다. 기하학적인 무늬가 장중하고 소박한 중국의 솜씨가 버이는 이 종은 일제말기에 군수 물자로 징발 당해 전등사를 떠나 이곳저곳을 떠다니다 광복 이후 부평 군기창에서 발견되어 다시 이곳으로 옮겨 온 유물이기도 하다.
6.전낙수정출토고려범종
이 범종은 일본인 다까하라 히미꼬 여사가 선대로부터 물려받아 소장해 오던 중 1999년 11월 국립문화재연구소를 통해 기증·반환한 것으로, 종을 매다는 용뉴 부분의 훼손이 있기는 하나 거의 완전한 형태를 갖추고 있다. 종의 윗면은 수평에 가까우며, 어깨부분인 상대와 맨아래 부분인 하대에는 띠를 돌리고 그 안쪽으로 반원무늬와 덩굴무늬가 장식되어 있다. 상대와 연결된 사다리꼴 모양의 유곽 테두리에도 덩굴무늬를 얕게 조각하였으며, 유곽 안에는 작은 꽃받침을 갖춘 유두가 돌출되어 있다.
종의 약간 아래쪽 2곳에 배치되어 있는 당좌는 종을 치는 부분으로, 이중원의 테를 두르고 그 안에 덩굴무늬를 장식하였다. 당좌를 중심으로 대칭을 이루며 배치된 4개의 비천상은 구름 위에 꿇어앉고 두손을 모아 합장한 형태를 하고 있다. 이 비천상은 다른 문양들보다 도드라지게 조각되어 있다.
종에 새겨진 기록이 없어 종의 제작년대를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그 형태와 문양 및 성분비율 등을 살펴볼 때 통일신라시대 양식을 계승하여 고려 초에 제작된 범종으로 생각된다.
7.오어사 동종
신라시대 종의 형태를 하고 있는 고려 범종으로, 종의 꼭대기 부분에 종을 매다는 역할을 하는 용뉴와 소리의 울림을 도와주는 용통이 있다.
몸통부분의 위와 아래에는 횡선의 띠를 두르고, 같은 무늬를 새겨 넣었다. 3분의 1되는 곳 위쪽으로는 사각형의 유곽을 만들고, 그 안에 9개의 돌출된 모양의 유두가 있다. 또한 중국이나 일본에서는 볼 수 없는, 종을 치는 곳인 당좌를 따로 둔 것도 특징이라고 하겠다.
이 종 몸통의 문양을 보면 서로 마주보고 꽃방석 자리에 무릎을 꿇고 합장하는 보살을 새겼고, 다른 두 면에는 범자가 들어간 위패형 명문으로 장식하였다.
고려 고종 3년(1216) 주조되었고, 무게가 300근이나 되고 오어사에 달았다는 기록이 남아 있어, 종의 변천과정을 연구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