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유적지(성곽)
1.초진지
1971년 12월 28일에 사적 제225호로 지정되었으며, 면적은 4,233m2 이다.
1656년(효종 7) 강화유수 홍중보(洪重普)가 처음 설치하였다. 66년(현종) 병마만호를 두었다가 1763년(영조 39)에 첨사로 승격시켰는데 이 때의 병력은 병마첨절별사(兵馬僉節別使) 1명, 군관 11명, 사병 98명, 돈군(墩>軍) 18명, 목자(牧子) 210명, 진선(鎭船) 3척과 무기 다수가 있었다. 1866년(고종 3) 병인양요(丙寅洋擾) 때 이 곳에서 프랑스 함대의 로즈 소장과 싸웠으며, 1871년(고종 8)에는 미국 아시아함대의 로저스 중장이 이 곳에 침입하였을 때 필사의 방어전을 전개하다 함락된 바 있었고, 1875년(고종 12)에는 일본 군함 운요호와도 이 곳에서 교전하였다.
이 초지진은 모두 허물어져 돈(墩)의 터와 성의 기초만 남아 있었던 것을 1973년 초지돈만 복원하였다. 돈에는 3곳의 포좌(砲座)가 있고 총좌(銃座)가 100여 곳 있다. 성은 높이 4m 정도에 장축이 100m쯤 되는 타원형의 돈이다. 돈 안에는 조선 말의 대포 1문이 포각 속에 전시되어 있는데, 포각은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집 홍살로 되어 있으며, 대포의 길이는 2.32m, 입지름 40cm이다.
효종 7년(1656) 안산에서 이 곳으로 옮겨온 것이다.
조선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은 뒤 국방을 튼튼히 하는 차원에서 강화에 천험한 요새를 구축하기 시작했다. 강화도 해변에 8개의 진을 설치한 것도 이러한 정책의 일부분이었다. 초지진에는 초지돈, 장자평돈, 섬암돈이 소속되어 있는데 이 돈대들은 숙종 5년(1679) 함경도, 강원도, 황해도의 승군 8천 명과 어영군 4천 3백 명을 동원하여 40일 동안에 걸쳐 49개의 돈대를 축성할 때 함께 이루어진 것이다. 이 때 9개의 포대도 축조되었는데 초지진 남쪽 진남포대에는 대포 12문이 설치되었고, 초지진 앞의 대황산 황산포대에도 대포 6문이 설치되었다.
초지진은 신미양요 때 최대 격전지 가운데 하나였는데 덕진진과 광성보가 함락당하고 어재연 장군 이하 전수비군이 전사하는 수모를 당하기도 했다. 초지진은 그러나 수난을 통해 모두 허물어졌다. 1976년 간신히 남아 있던 돈대의 터와 성의 기초 위에 초지진의 초지돈을 복원하고 대포 1문을 포각 속에 전시했다. 이 돈대에는 3개소의 포좌가 있고 100여 개의 총좌가 있다. 높이가 4m 정도에 긴 축이 100미터쯤 되는 타원형 돈대이다. 성과 돈대 옆의 소나무에는 당시의 전투를 말해 주는 포탄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다. 바닷가에 임한 돈대가 근대사에 있어서 처절한 전쟁을 치르고도 여전히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어 보는 이의 마음을 더욱 아프게 한다.
■ 역사음미
고려 때는 물론 조선조에 들어와서도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고 나서 강화도의 중요성을 더욱 실감하고 방어시설을 강화하여 외세가 밀어 닥치던 당시의 강화도엔 5개의 진(鎭), 7개의 보(堡), 53개의 돈(墩)이 있었다고 한다. 당시의 군 편제를 오늘의 그것과 비교할 수는 없지만 지휘부였던 진이 대대급이었다면 보는 중대급이요, 돈은 분대급의 초소였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강화읍에서 301번 도로를 따라 남쪽으로 내려가다가 전등사 못 미쳐 길상 사거리에서 좌회전하여 들어가면 광성보(廣城堡)와 용두돈대(龍頭墩臺), 초지진(초芝鎭)으로 이어진다.광성보는 강화해협에 접한 고려 때 외성이었던 것을 보수하고 성문을 건립하여 여러 돈대 들을 이에 소속시켰는데 효종으로부터 숙종, 영조에 이르기까지 여러 번 보수하고 개축해온 것이라고 하며, 성문의 문루에는 안해루(按海樓)라고 하는 현판이 걸려 있다.
병인양요(1866) 때는 프랑스군과 공방전이 펼쳐졌고, 신미양요(1871)때는 미군함대에 의하여 초지진, 덕진진(德津鎭)이 점령되고 이어 광성보마저 포위되는 등 가장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던 곳이다.1866년에 평양에서 일어났던 셔어맨(Sherman)호 사건의 문책과 통상을 요구하면서 5척의 군함에 1,200명의 군사를 실은 미국함대가 남양만에 정박하여 시위하고, 그중 일부가 강화의 관문인 초지진과 덕진진을 점령한 후 북진하여 광성보를 공격하였다.당시 미군은 8~9인치 대포를 쏘아 댔으나 우리는 정조준도 안되고 사정거리도 형편없으며, 포탄이 날아간 후 폭발되지도 안는 쇠덩어리를 쏘는 것이 고작이었다.
중군장(中軍將)이었던 어재연(魚在淵)장군과 그의 아우 어재순(魚在淳)이 200명의 휘하 군사와 함께 ‘적에 포로가 되느니 차라리 싸우다 죽겠다’ 고 결의하고 2일 동안 48시간의 사투를 벌리면서 끝까지 저항하다가 모두 무참히 전사하고 말았다.광성보에서 용두돈대로 가는 길 위에 어재연장군 형제의 순국을 기리는 쌍충비(雙忠碑)가 서 있고, 길 아래에 신원을 확인할 수 없는 51명의 시신을 나누어 뭍은 7기의 분묘가 있어서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
이 광상보와 돈대는 사적 제227호이다.광성보에서 해안의 성터를 따라 용두돈대와 손돌목돈대로 가는 길은 전적지 답지 않게 숲과 바다가 어우러지는 연인들의 산책 길이다. 좀 더 걷고 싶을 만큼 아름다운 길을 한참 걷다 보면 강화해협에 용머리처럼 쑥 내민 암반을 이용하여 설치한 천연의 교두보 용두돈대(龍頭墩臺)가 있다.병인양요 때는 프랑스군과, 신미양요 는 미군과 치열한 포격전을 벌인 현장이요,어재연장군이 지휘했던 광성보에 속한 돈대이다. 1977년에 성벽을 보수하면서 강화전적지 정화기념비(江華戰跡地 淨化紀念碑)를 세웠다.앞의 큰 글씨는 박대통령이 썼고, 뒤의 비문은 이은상이 짖고 김현이 썼다. 이 돈대와 좀 덜어진 곳에 유명한 손돌목(孫乭項) 돈대가 있어서 두 곳이 모두 경치가 아름답기로 으뜸인데 이곳을 찾는 이들은 이곳에 얽힌 애잔한 사연들를 한번 음미해 보아야할 것이다.
2.용장산성
■ 개 요
전라남도 진도군(珍島郡) 군내면(郡內面) 용장리에 있는 고려시대 석축산성. 축성연대는 1270년(원종 11) 6월 이후로 추정되며, 몽골 침입에 대항하던 고려 장군 배중손(裵仲孫)이 삼별초(三別抄)를 이끌고 대몽항쟁을 하던 근거지였다. 삼별초는 강화(江華)에서 이곳으로 옮겨와 관부와 성곽을 쌓고 승화후(承和侯) 온(溫)을 왕으로 추대, 고려 관군과 몽골군에 저항하였으나 김방경(金方慶)이 이끄는 여·몽연합군에게 패하였다. 그때 쌓은 성이 용장성으로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 성의 둘레 3만 3741자, 높이 5자로 기록되어 있으나, 지금은 용장산 기슭에 석축이 부분적으로 남아 있고, 성내에 용장사터·행궁터가 있다. 임회면(臨淮面) 남동리(南洞里)의 남도석성(南桃石城)과 함께 삼별초의 대몽항쟁유적지로 귀중한 자료이다. 사적 제126호
3.강화산성
■ 개 요
인천광역시 강화군에 있는 고려 및 조선시대의 석축산성. 총면적은 307.1㎢ 고려가 몽골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해 지은 것인데 1234년부터 본격적 공사에 들어갔다. 고려 때 쌓은 성의 구조를 보면 내성(內城)·중성(中城)·외성(外城)의 형태를 취했는데, 이 중에서 내성이 지금의 강화성이다. 중성은 내성을 지키기 위하여 50년 축조했으며, 길이 약 9㎞의 토성으로 모두 8개의 성문이 있다. 외성은 33년부터 축조하기 시작하여 각 주현의 일품군(一品軍)을 징발, 강화 동쪽 해협을 따라 공사를 실시하였다. 몽골군을 막기 위한 중요 방위시설이었으며 강화성은 조선 초기에 다시 축성한 적이 있으나 병자호란 때 파손되고 1677년(숙종 2)에 대규모의 개축공사를 시작하면서 토성(土城)이던 것을 돌로 쌓기 시작하였다. 성문은 동서남북에 4개 있고 암문(暗門)이 4개, 수문(水門)이 2개 있다. 문루로는 남쪽에 안파루(晏波樓), 서쪽에 첨화루(瞻華樓), 북쪽에 진송루(鎭松樓), 동쪽에 망한루(望漢樓)가 있다. 사적 제132호.
4.적상산성
■ 개 요
전라북도 무주군(茂朱郡) 적상면(赤裳面) 북창리(北倉里)에 있는 고려 말기 석축산성. 둘래 약 3㎞. 현재 북문지·서문지·사고지(史庫址)가 남아 있으며, 성벽은 무너져 숲 사이에서 겨우그 모습을 찾아볼 수 있을 정도이다. 《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이 산성은 석축으로, 둘레 약 5127m, 높이 약 2.12m였으며 성내에는 토양이 비옥한 넓은 분지가 있었고 못이 4개소, 우물이 23개소가 있었다고 한다. 1614년(광해군 6) 실록전(實錄殿)이 창건되었고, 18년 실록이 처음 봉안되었다. 41년(인조 19) 선원각·군기고·대별관이 세워지고, 43년 호국사 등이 세워졌다. 조선 말기에 건물의 보수(補修)를 위하여 고종이 보수비를 지급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건물이 있었음을 알 수 있으나, 지금은 남아있지 않다. 사적 제146호.
5.괴산미륵산성
■ 개 요
괴산은 산지가 많은 고장이다. 이처럼 산세가 수려한 고장에 산성이 없을 리 없다. 미륵산성이 그러한 예이다.
미륵산성은 낙영산(685.2m)과 도명산(650.1m)의 정상을 각각 남북으로 하여 천연의 암벽을 이용하여 축조됐다. 전체 둘레 5.1km, 외성을 합한 석축만도 3.7km에 달하는 거대한 포곡식 석축 산성이다.
서쪽으로 난 계곡에 수문과 서문을 내고 서문의 바깥 좌우의 기슭에 외성을 축조하여 계곡 방면을 공제하고 있으며, 성의 동문은 화양동계곡 쪽, 남문은 사담계곡 쪽에 설치되었다.
성벽의 축조는 자연 할석으로 쐐기물을 많이 사용하여 쌓고 내면으로는 2 - 3단의 계단 모양으로 쌓아 고려후기에서 조선시대로 이어지는 축조기술의 면모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성벽의 요소마다 네모꼴의 망대를 만들고 있으며 자연암반을 둥글게 파내어 기둥을 세운 흔 적이 많다. 동남쪽의 성벽 일부는 커다란 석재를 열지어 놓은 특이한 축성법을 보이고 있다. 성내에는 여러 개의 건물터가 있고 중앙부인 수정골에는 수정의 원석이 발견되고 있다.
전체적으로 성벽의 잔존상태가 매우 양호한 편이며, 고려시기 대규모의 입보농성용 산성으로서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
6.천리장성
고려시대 거란·여진 등의 침입을 막기 위해 여진족과의 국경에 쌓은 성(城). 고려는 초기부 터 거란과 여진의 침입에 대비해 왔는데, 1033년(덕종 2)에는 유소(柳韶)에게 명하여 이 장 성을 쌓게 하였다. 성의 규모는 매우 컸으며 서쪽의 압록강 어귀인 흥화진(興化鎭)으로부터 맹주(孟州:孟山)·삭주(朔州) 등 성을 거쳐 정변(靜邊)·화주(和州) 등의 성에 이르고, 다시 도련포(都連浦)까지 이어지는 천여 리 되는 긴 성으로 높이와 폭이 각각 25자나 되는 석축 이었다. 1044년경 완공되었는데, 유소는 그 공으로 추충척경공신(推忠拓境功臣)의 칭호를 받 았다. 이 장성은 그 뒤에도 오랫동안 고려의 북방 방어선으로 이용되었으며, 그 유적은 지금도 의주(義州)·정평(定平) 등 여러 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7.윤관의 9성
오랫동안 부족 단위로 분산되었던 여진은 11세기 후반에 이르러 통일 세력을 형성하기 시작하였다. 고려 숙종 때 북만주 완옌부의 추장 영가가 여진족을 통일하면서 북간도 지방으로 세력을 뻗쳐 왔고, 뒤를 이은 우야소는 다시 남하하여 고려에 복속하여 있던 동여진을 아우르게 되자, 정주를 경계로 고려군과 충돌하였다.
이에 고려에서는 임간을 시켜 여진을 정벌하려 했으나, 오히려 크게 패하였고, 뒤를 이은 윤관의 북벌군도 여진의 기병에 패하여 철수하였다. 기병 중심의 여진군 을 보병 중심의 고려군이 막아내기는 어려웠다. 이를 계기로 고려는 윤관의 주도로 별무반을 창설하였다. 별무반은 기병 부대인 신기군, 보병 부대인 신보군, 승병 부대인 창마군으로 구성되었다. 신기군은 문무 산관(散官)과 서리로부터 상인, 노복에 이르기까지 말을 가진 자로 편성하였고, 말을 가지지 않은 자와 20세 이상의 남자로서 과거 응시자가 아닌 사람은 신보군에 편속시켰다.
여진 토벌은 예종 때에 이르러 단행되었다. 예종 2 년 12월에 윤관을 원수로. 오연총을 부원수로 하는 17 만의 출정군은 천리 장성을 넘어 여진족의 거점인 함흥 평야와 그 이북 지방을 대대적으로 토벌하였다.
고려는 남쪽으로부터 백성을 이주시켜 이곳을 개척하여 살게하고 9성을 수축하였다. 새로 성을 구축한 곳은 함주(咸州)에 이주민 1,948가구, 영주(英州)에 성곽 950칸과 이주민 1,238가구, 웅주(雄州)에 성곽 992 칸과 이주민 1,436가구, 복주(福州)에 성곽 774칸과 이주민 680가구, 길주(吉州)에 성곽 670칸, 이주민 680 가구, 공험진에 이주민 532가구로서, 이 6성 외에 이듬해에는 숭녕(崇寧) · 통태(通泰) 진양(眞陽)의 3성을 더 쌓아 이른바 동북 9성의 설치가 완결되었다. 특히 함흥 평야의 함주에 대도독부(大都督府)를 두어 이곳 이 가장 요충이 되었다. 러나 거처를 잃은 여진족의 끊임없는 침략으로 인 한 방비의 곤란, 서북쪽 거란에 대한 경계의 필요성 및 여진의 환부 애원으로 고려는 9성을 1년 7개월 만에 다 시 여진족에게 되돌려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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