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성왕씨 부산파

고려유적지 (건축)

아지빠 2019. 6. 10. 11:34







부석사무량수전

부석사의 주불전으로 아미타여래를 모신 전각이다. 아미타여래는 끝없는 지혜와 무한한 생명을 지녔으므로 무량수불로도 불리는데 '무량수'라는 말은 이를 의미하는 것이다.

무량수전은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건물 가운데 두 번째로 오래된 것이다. 역사적으로는 안동 봉정사 극락전이 가장 오래된 목조 건축물이지만 건물 규모나 구조 방식, 법식의 완성도라는 측면에서는 이 집에 비하여 다소 떨어진다. 그러므로 무량수전은 고대 불전 형식과 구조를 연구하는데 있어서 기준이 되는 중요한 건물이다.

[원융국사비문]에 의하면 고려 현종 7년(1016) 원융국사가 무량수전을 중창하였다고 한다. 1916년 실시된 해체 공사 때 발견된 서북쪽 귀공포의 묵서에는 공민왕 7년(1358) 왜구에 의하여 건물이 불타서 우왕 2년 (1376)에 원응 국사가 중수하였다고 되어 있다. 그러나 건축 양식이 고려 후기 건물과 많은 차이를 보이므로 원래 건물은 이보다 약 100년 정도 앞선 13세기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시대에는 광해군 3년(1611)에 서까래를 깔고 단청을 하였고 1969년에는 번와 보수하였다.

무량수전은 정면 5칸, 측면 3칸 규모인데 평면의 경우 건물 내부의 고주 사이에 형성된 내진 사방에 한 칸의 외진을 두른 형식을 취했다. 기둥 사이의 주칸 거리가 크고 기둥 높이도 높아 건물이 당당하고 안정감 있게 지어졌다. 지붕은 팔작 형식인데 지붕의 물매는 후대 건물에 비하여 완만하다. 예로부터 건물의 구조는 단면에 위치한 도리의 수를 셈하여 말하는데 이 집은 소위 9량집으로 외목을 제외한 도리가 9개나 되는 큰 건물이다.

면석과 갑석을 짜맞추어 만든 가구식 기단과 사갑석을 받치는 지대석이 돌출된 계단, 원형 주좌와 고막이를 가진 초석의 법식은 전형적인 통일신라의 기법을 계승한 것이다. 계단 동측면에 선각된 '충원적화면(忠原赤花面) 석수김애선'이라는 기록으로 미루어 고려시대의 작품임을 알 수 있다.

무량수전은 고려시대의 법식을 거의 완벽하게 보여 주지만 그 가운데 가장 유의하여 볼 부분은 평면의 안허리곡(曲), 기둥의 안쏠림과 귀솟음, 배흘림, 항아리형 보 등의 의장 수법이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눈에 잘 띄지 않지만 착시에 의한 왜곡 현상을 막는 동시에 가장 효율적인 구조를 만들기 위하여 고안되 고도의 기법들이다.

안허리곡은 보통 건물 중앙보다 귀부분의 처마 끝이 앞쪽으로 더 튀어나오도록 처리한 것을 말하는데 기둥의 안쏠림과 관계가 있다. 안쏠림은 기둥 위쪽을 내부로 경사지게 세운 것이다. 무량수전에서는 안허리곡과 안쏠림이 공포와 벽면에까지 적용되어 마치 평면이 오목거울처럼 휘어 있다. 귀솟음은 건물 귀부분의 기둥 높이를 중앙보다 높게 처리하는 것인데 수평 부재의 끝부분이 아래로 처져 보이는 착시를 막아준다. 기둥의 배흘림 역시 기둥 머리가 넓어 보이는 착시 현상을 막기 위한 것인데 무량수전의 기둥은 강릉 객사문 다음으로 배흘림이 심하다.

무량수전의 공포 형식은 기둥 위에만 배치된 소위 주심포계인데 매우 건실하게 짜여졌다. 주두 위에서 공포의 짜임이 시작되고 벽면 방향의 첨차와 튀어나온 제공의 길이가 똑같은 전형적인 벽면 방향의 첨차와 튀어나온 제공의 길이가 똑같은 전형적인 북방계통의 수법이다. 주두와 소로는 내반된 곡선의 굽을 가지고 있다. 또한 공포 사이 포벽에 뜬 소로를 가지고 있는 점은 이 집만의 특징이다. 무량수전 정면 중앙칸에 걸린 편액은 고려 공민왕의 글씨이다.

내부 서쪽에는 불단과 화려한 닫집을 만들어 고려시대에 조성한 소조 아미타여래 좌상(국보 제45호)를 모셨다. 좌우에 보조하는 협시보살 없이 부처님 홀로 계신 상태에서 동쪽을 향하도록 모신 점이 특이한데 교리를 철저히 따른 관념적인 구상이라 하겠다. 즉 부석사는 서방 정토 아미타여래(무량수부처님)를 모시는 도량이니만큼 부처님이 서방에 계시는 부처님이니 무량수전 안의 부처님도 서쪽에 안치시키고 동쪽을 바라보게 한 것이다.

그렇지만 불상을 동향으로 배치하고 내부의 길게 늘어선 기둥을 통하여 이를 바라보도록 함으로써 넓게 퍼진 대신 깊이가 얕은 일반적인 불전에서는 느낄 수 없는 장엄하고 깊이감 있는 공간이 만들어졌다. 일반적으로 진입하는 정면쪽으로 불상을 모시는 우리나라 전통 건축에서는 드문 해결 방식이다. 여기서 우리는 이 집을 만든 대목(大木)의 뛰어난 감각을 느낄 수 있다.

대들보 위쪽으로는 후대 건물과는 달리 천장을 막지 않아 지붕 가구가 잘 보인다. 굵고 가늘고 길고 잛은 각각의 부재들이 서로 조화 있게 짜맞춰진 모습은 오랫동안 바라보아도 싫증이 나지 않는다. 어떤 이는 이와 같은 무량수전의 천장 가구에서 고저

이렇게 천장을 노출시키려면 각각의 부재가 아름답게 디자인되어야 하고 또한 정확하게 짜맞추어야 하므로 품이 훨씬 더 들어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옛 목수들은 이러한 건물을 많이 지었다. 특히 고려시대 주심포 집들에는 천장을 가설하지 않은 것이 많다. 원래 내부 바닥에는 푸른 유약을 바른 녹유전을 깔아서 매우 화려하였던 모양이다. {아미타경}을 보면 극락 세계의 바닥은 유리로 되었다고 하는데 녹유전은 이러한 이상 세계를 표현하기 위한 장엄 도구의 하나였던 것이다. 

 

■ 역사음미

부석사는 한국 화엄종의 근본도량이다. 676년(신라 문무왕 16) 의상조사가 왕명을 받들어 창건하고, 화엄의 대교를 펴던 곳으로, 창건에 얽힌 의상과 선묘(善妙) 아가씨의 애틋한 사랑의 설화는 유명하다. 1016년(고려 현종 7)에 원융국사(圓融國師)가 무량수전(無量壽殿)을 중창하였고 1376년(우왕 2)에 원응국사(圓應國師)가 다시 중수하고, 이듬해 조사당(祖師堂)을 재건하였다. 그 후 여러 차례 중수와 개연(改椽)을 거쳐 1916년에는 무량수전을 해체 수리하였다.

경내에는 무량수전(국보 18) ·조사당(국보 19) ·소조여래좌상(塑造如來坐像:국보 45) ·조사당 벽화(국보 46) ·무량수전 앞 석등(국보 17) 등의 국보와 3층석탑 ·석조여래좌상 ·당간지주(幢竿支柱) 등의 보물, 원융국사비 ·불사리탑 등의 지방문화재를 비롯하여 삼성각(三聖閣) ·취현암(醉玄庵) ·범종루(梵鐘樓) ·안양문(安養門) ·응향각(凝香閣) 등 많은 문화재가 있으며 또 신라 때부터 쌓은 것으로 믿어지는 대석단(大石壇)이 있다.

의상은 제자가 3,000명이나 있었다고 하며 그 중에서 10대덕(十大德)이라 불리는 오진(悟眞) ·지통(智通) ·표훈(表訓) ·진정(眞定) ·진장(眞藏) ·도융(道融) ·양원(良圓) ·상원(相源) ·능인(能仁) ·의적(義寂) 등은 모두 화엄을 현양(顯揚)시킨 승려들이었다. 이 밖에도 《송고승전(宋高僧傳)》에 그 이름이 보이는 범체(梵體)나 도신(道身)및 신림(神琳) 등도 의상의 훌륭한 제자였으며 의상 이후의 부석사와 관계된 고승으로는 혜철국사(惠哲國師) ·무염국사(無染國師) ·징효대사(澄曉大師) ·원융국사 ·원응국사 등이 그 법통을 이었다.





봉정사극락전

경북 안동시 서후면(西後面) 태장리(台庄里) 봉정사에 있는 고려 말기의 건축물. 국보 제15호. 정면 3칸, 측면 4칸의 단층 맞배지붕 주심포(柱心包) 집. 1972년 해체˙수리할 때 중앙칸 종도리(宗道里) 밑에서 발견된 묵서명(墨書銘)에 의하면 1368년에 옥개(屋蓋) 부분을 중수(重修)하였던 것으로 미루어, 건립연대는 그보다 100∼150년 정도 앞섰으리라 짐작된다. 건물의 전면(前面)에만 다듬질된 석기단(石基壇)을 쌓고 그 위에 자연석 초석을 배열하여 주좌(柱座)만을 조각하였고, 초석 위에는 배흘림 기둥을 세웠다. 극락전 전면과 측면 중앙칸에 판문(板門)을 달았고 전면 양협간(兩夾間)에는 살창을 달았는데, 전면의 판문과 살창은 수리할 때 복원된 것이며 수리하기 전에는 3칸 모두 띠살 4분(分) 합문(閤門)이 달려 있었다.




수덕사대웅전



충남 예산군 수덕사에 있는 고려시대의 건조물. 국보 제49호. 정면 3칸(5.454`m), 측면 4칸(7.272`m)의 단층 맞배지붕 주심포(柱心包)집. 가구수법(架構手法)이 부석사 무량수전과 흡사하며 세부양식 역시 비슷한 점이 많지만 중요한 차이점이 그 구조˙장식˙양식˙규모˙형태 등에서 발견되었다. 외관은 각 부재(部材)가 크고 굵기 때문에 안정감이 있어 보이고 측면은 특히 아름답다. 약간 배흘림을 가진 기둥을 연결하는 경쾌한 인방(引枋), 고주(高柱)와 평주(平柱)를 잇는 퇴보, 고주간을 맞잡는 대들보 등의 직선재(直線材)와 이들을 지탱하는 다분히 장식적인 포대공(包臺工), 그리고 곡률(曲率)이 큰 우미량(牛眉樑)들이 이루는 조화와 이들이 흰벽을 구획한 세련된 구도는 한국 고건축(古建築)의 아름다움을 대표할 수 있는 가장 뛰어난 것이다. 또한 건물의 건립연대(1308)를 정확히 알 수 있는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로서 다른 건물의 건립연대를 추정하는 기준이 되는 귀중한 자료이다.



해인사장경각

장경판전은 장격각 또는 판당으로도 불린다. 판전은 13세기에 만들어진 세계적 문화유산인 고려대장경판 8만여 장을 보존하는 보고로서 해인사의 현존 건물 중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장경판전의 정확한 창건연대는 알려져 있지 않으나, 조선 세조3년(1457)에 판전 40여 칸을 중건하였다.

성종 19년(1488) 30칸의 대장경 경각을 중건한 뒤 보안당이라 했다는 기록이 있다. 광해군 14년(1622)에 수다라장, 인조 2년(1624)에는 법보전을 중수하였다. 장경판전은 1488년 조선초기에 건립된 후 여러차례 큰 화재가 있었으나 단 한 번도 화재나 전란의 피해를 입지 않았으며, 팔만대장경이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다. 이 판전에는 81,258장의 대장경판이 보관되어 있으며, 단 한자도 오자나 탈자 없이 모두 정밀함과 완벽함으로 그 명성은 세계적이다.

 

판전일곽은 50m가 넘는 긴 마당둘레에 배치된 4동의 건물로 구성돼 있다. 안쪽에 해당하는 북쪽의 긴 건물이 법보전이고, 바깥쪽에 해당하는 앞의 건물이 수다라전이다. 이 두 건물의 동쪽과 서쪽 끝 사이에 있는 작은 두 동의 건물은 각각 동사간전, 서사간전이라고 한다.

 

건축방식은 판전으로서 필요로 하는 기능만을 추구하였고, 장식적인 의장은 전혀 하지 않았으며, 전면과 후면 창호의 위치와 크기가 서로 다르다. 대장경판이 지금까지 온전하게 보존되어 있는 중요한 이유는 판전의 내부가 통풍, 방습, 실내온도 유지, 판가의 진열 등이 매우 과학적이며, 합리적인 것이다. 약 500년전에 세워진 판전건물이 기둥하나 기울지 아니하였고, 판가 등 진열과 판각작업을 할 때의 통행에 이르기까지 치밀한 배려를 한 것이다.

 

판전 건물은 가야산 중턱 서남향으로 위치해 있다. 서남향은 뒤쪽의 어느 봉우리와도 일직선의 축을 형성하지 않는 좌향이다. 해인사 주변에 부는 바람의 주방향인 동남향과 달리 서남향으로 건물이 들어섬으로 남쪽 아래에서 타고 올라오는 습기 찬 바람이 자연스럽게 판전을 돌아 옆으로 비스듬히 스쳐지나가게 한 것이다. 또 남쪽 아래가 열리고 북쪽이 높게 막힌 판전 주변의 지형은 판전 뒤에서 북풍이 걸리지게 만든다. 판전 건물의 좌향은 일조와도 상관이 있는데, 주변 어느 곳에서도 영구 음영이 생기지 않는 것이 판전의 일조환경 조절에 중요한데, 모든 방향에서 건물 주위로 햇볕이 들어오도록 하는 데 유리하기 때문이다. 정남향에서는 건물 북쪽에 영구 음영이 생긴다. 또한 판전이 있는 655m 지점은 계곡에서 불어 올라온 공기의 습도가 어느 정도 떨어지는 고도이기도 하다. 이는 건물 내부의 적절한 습도 유지, 원활한 통풍과 직결된다.

 

판전 내부를 보면 직사광선이 비쳐 경판이 상하지 않도록 진열대 사이의 간격을 3m 거리를 두었고, 또한 바닥에서 올라오는 습기를 받지 않도록 지상에서 30cm 위치에 진열대를 세워 놓았다. 남쪽 건물인 수다라전의 동남쪽 건물인 수다라전의 동남쪽 창은 창살이 굵고 큰 데 비하여, 북쪽 건물인 법보전의 창은 작고 좁아 대비되는 면을 보여준다. 이것은 공기의 원활한 흐름과 장경각 내의 적정온도를 유지하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산 밑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수다라전 아래 남쪽면 넓은 창을 통해 들어와 진열대를 지나 북쪽면 작은 창으로 일부가 빠져나가고, 나머지는 다시 벽면을 타고 북쪽면 작은 창으로 일부가 빠져나가고, 나머지는 다시 벽면을 타고 위쪽 큰 창문으로 빠져나가게 된다. 이렇게 빠져나간 바람은 또 다시 법보전 아래 남쪽면 넓은 창을 통해 들어가 수다라전 에서와 같은 공기의 흐름이 반복되어 완벽한 통풍을 기할 수 있는데, 실내온도는 외부온도보다 0.5~2℃ 낮게, 습도는 5~10% 낮게 유지된다.

 

또한 판전 내의 습도를 조절하기 위해 판전 바닥의 훍에 숯과 소금, 횟가루, 모래, 찰흙 등을 섞어 지반을 다졌다. 이것은 습도를 일정하게 유지시켜 주는데 습기가 많을 때에는 습기를 빨아들이고, 건조할 때는 습기를 내뿜는다. 이러한 흙의 자동 습도조절기능으로 경판이 변형을 막는 동시에 해충을 방지하는 효과가 있다.

 

해인사 장경판전은 국보 제52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1995년 12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영남루

영남루(보물 147호)는 신라(新羅) 경덕왕(景德王)(742∼765, 재위)때 이 자리에 세워졌던 영남사(嶺南寺)가 폐사(廢寺)되고 흔적만 남게 되자 고려(高麗) 공민왕(恭愍王) 14년(1365)에 당시 밀양군수 김주(金湊)가 신축하여 절 이름을 따서 영남루라 한 것이다.

조선(朝鮮) 세조(世祖) 5년(1459)에 밀양부사 강숙경(姜淑卿)이 규모를 크게 하였고, 중종(中宗) 37년(1542)에 밀양부사 박세후(朴世煦)가 중건하였으나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병화(兵火)로 타버렸다. 그 뒤 인조(仁祖) 15년(1637)에 밀양부사 심흥(沈興)이 다시 중건하였고 헌종 8년(1842)에 실화로 불에 탄 것을 이인재(李寅在)가 밀양부사로 부임하여 현종 10년(1844) 다시 개창한 것이 현재의 건물이다.




.죽서루

소 재 지 : 삼척시 성내동 9-3번지

관동은 강원도 일원을 가리키는 것으로 대관령의 동쪽이란 뜻이다. 이 관동지방에서 가장 경치가 뛰어난 8개의 곳을 가리켜 관동8경이라 하는데, 이중 그 절경이 가장 아름다워 정철의 관동별곡에서 관동의 제1루라고 칭송되는 곳이 삼척시 성내동의 죽서루이다. 죽서루를 관동 제1루라 부르는 이유는 관동8경 중 7경은 전부가 대해를 바라보는 것을 중심으로 한데 비하여 죽서루 만은 동쪽으로 영 너머 동해의 푸른 파도가 넘실거리며, 봉황산 봉우리 위에 달과 해가 떠오르는 일품 정경과, 해변을 지척에 두고 봉황산 높은 봉이 가파른 낭떠러지로 되어 바다가 보이지 않는 것과 서쪽으로 두타산과 태백산의 경승이 서로 연하여 웅장함을 자아내고, 절벽아래를 흐르는 오십천의 맑고 깨끗한 물굽이, 절벽사이에 피는 꽃으로 이곳을 찾는 이를 무아의 경지로 이끌기 때문이다.

고려(高麗) 충렬왕(忠烈王) 원년(元年)(1275) 학자(學者)인 이승휴(李承休)(1224∼1300) 선생(先生)이 벼슬에 뜻이 없어 두타산(頭陀山) 아래에 은거(隱居)할 때 창건(創建)하였고, 조선(朝鮮) 태종(太宗) 3년(1403) 삼척부사(三陟府使) 김효손(金孝孫)이 중건하였다 하며. 누 동쪽 죽림에 죽장사가 있어 죽서루라 이름하였다 하고, 또한 누 동쪽에 명기 죽죽선녀의 집이 있어 죽서루라 하였다고도 한다.

그 후 조선 태종3년(1403) 삼척부사 김효손이 중창한 이래 10여 차례의 중수를 거쳐 현재에 이르고 있다.

오십천 층암절벽 위에 세운 이 누는 자연암반을 초석으로 삼고 암반 높이에 맞춰 길고 짧은 기둥을 세운 5량 구조의 팔작집으로 공포에서는 익공계수법과 다포계수법이 혼용되었다. 천장의 구조로 보아 맞배집이었을 가능성도 있어 조선 후기까지 여러 번의 수리로 많은 변형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서액 중 “제일계정”은 현종 3년(1662) 부사 허목이 쓴 것이고, “죽서루”와 “관동제일루”는 숙종 37년 (1711) 부사 이성조가 썼으며, “해선유희지소”는 헌종 3년(1837) 부사 이규헌이 쓴 것이다. 이 밖에 숙종(1674 -1720년) , 정조 (1776 -1800년)와 율곡 이이(1536 -1584) 등 많은 명사들의 시액이 걸려 있다.

누의 남쪽에는 별관(別館)인 연근당(燕謹堂)이 있었다 한다. 두타산의 푸른 숲, 굽이쳐 흐르는 오십천 기암절벽 등과 어울려 절경을 이루고 있다.






'개성왕씨 부산파'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고려인물사  (0) 2019.06.10
고려유적지(성곽)  (0) 2019.06.10
고려역대왕  (0) 2019.06.10
고려왕실 비운의 역사  (0) 2018.08.08
중파파묘  (0) 2018.07.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