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의 사찰
고려시대에 들어 불교사원은 수도 개경을 중심으로 새롭게 많이 건립되었고, 동시에 지방에도 전국적으로 건립된 사찰이 많다. 특히 지방에 건립된 사찰들은 그 지방의 사회·경제·문화의 중심적인 역할을 하며 하나의 도시적인 기능을 담당하였다.
따라서 사찰은 고대 사찰들과 달리 다양한 독립된 생활 공간을 가진 여러 개의 원으로 구성되었다. 이러한 사찰에서는 종교의식과 승려들의 수행 도량의 기능 외에도 각종 물품의 생산과 소비활동이 이루어졌고, 또 신자들의 거주공간이 필요하였다.
1.개태사지
개태사는 고려 태조 왕건이 후백제 세력을 완전히 물리친 후, 태조 23년(940)에 지은 절이다. 당시 절 안에는 태조의 초상화가 있어서 나라에 전쟁의 기미가 있으면 그 앞에 기원문을 올려 나라가 태평하기를 빌었다고 한다. 그 후 이 절은 고려 후기에 이르러 왜구의 빈번한 약탈에 의해 차츰 기울어진 것으로 보인다.
현재의 위치는 세종 10년(1428)에 옮겨진 것으로, 개태사 안에는 개태사지삼존불상(보물 제219호)이 있고, 이외에도 석탑과 쇠솥이 있다. 전성기에 장국을 끓였다고 전해지는 이 쇠솥은 지름 3m, 높이 1m, 둘레 9.4m에 이를 정도여서 수백명의 승려가 기거했다는 전설을 사실로 뒷받침하고 있다. 건물 자리와 주춧돌, 석조, 불상의 대좌, 죽대들이 남아 있으며, 이곳에서 출토된 청동제 반자는 국립부여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이 절터에 있었던 석조불좌상 1구는 상방산의 한 암자에 안치되어 있다.
2.관촉사
968년(고려 광종 19) 혜명이 창건하였는데, 창건 당시 조성한 석조미륵보살입상(에 관한 설화가 전한다.
한 여인이 반야산에서 나물을 캐다가 아이 우는 소리를 듣고 가보니, 아이는 없고 큰 바위가 땅에서 솟아나고 있었다. 이 소식을 들은 조정에서는 바위에 불상을 조성하라고 혜명에게 명하였다. 불상을 완성하여 세우자 미간의 옥호에서 발한 빛이 사방을 비추었는데, 중국의 승려 지안(智眼)이 그 빛을 좇아와 예불하였으며, 그 빛이 촛불과 같다고 하여 절 이름을 관촉사라 하였다 한다. 이 밖에도 불상에 얽힌 많은 영험담이 전하고 있다.
그 뒤 1386년(우왕 12)에 법당을 신축하였고 1581년(조선 선조 14)에는 백지(白只)가 중수하였으며, 1674년(현종 15) 지능이, 1735년(영조 11)에는 성능이 중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관음전과 삼성각·사명각·해탈문·현충각 등이 있으며, 중요문화재로는 보물 제218호로 지정된 석조미륵보살입상과 보물 제232호인 석등,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53호인 배례석,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79호인 석문, 그 밖에 5층석탑·사적비 등이 있다.
3.장육사
장육사는 고려 공민왕(재위 1351∼1374) 때 나옹선사가 처음 세웠다고 전한다. 조선 세종(재위 1418∼1450) 때 산불로 인해 불에 타고 그 후 다시 절을 세웠으나 임진왜란(1592) 때 훼손되어 다시 절을 세웠다. 광무 4년(1900)에 수리하였다고 한다.
대웅전은 앞면 3칸·옆면 3칸의 규모이며, 지붕은 옆모습이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기둥 위에만 있는 주심포 방식으로 건축되었다. 한편 대웅전 내에는 영덕장육사건칠보살좌상(보물 제993호)이 모셔져 있다.
단청을 금단청으로 하여 화려하기 이를 데 없으면서도 색상이나 무늬가 장엄하고 거룩한데, 특히 사천장의 주악비천상과 좌우벽의 보살상벽화는 예술적 가치가 높은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4.수덕사
수덕사는 덕숭산에 자리잡고 있는 절로, 절에 남겨진 기록에는 백제 후기 숭제법사가 처음 짓고 고려 공민왕 때 나옹이 다시 고친 것으로 기록되어 있고, 또 다른 기록에는 백제 법왕 1년(599)에 지명법사가 짓고 원효가 다시 고쳤다고도 전한다.
석가모니불상을 모셔 놓은 대웅전은 고려 충렬왕 34년(1308)에 지은 건물로, 지은 시기를 정확하게 알 수 있는 우리 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이다. 앞면 3칸·옆면 4칸 크기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으로 꾸몄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짜은 구조가 기둥 위에만 있는 주심포 양식이다. 앞면 3칸에는 모두 3짝 빗살문을 달았고 뒷면에는 양쪽에 창을, 가운데에는 널문을 두었다.
대웅전은 백제 계통의 목조건축 양식을 이은 고려시대 건물로 특히 건물 옆면의 장식적인 요소가 매우 아름답다. 또한 건립연대가 분명하고 형태미가 뛰어나 한국 목조건축사에서 매우 중요한 문화재로 평가 받고 있다.
5.회암사지
고려 말∼조선 초에 경기도 양주시 회암동 천보산(天寶山)에 있던 사찰터.
1964년 사적 제128호로 지정되었다. 1328년(충숙왕 15) 원나라를 거쳐 고려에 들어온 인도의 승려 지공(指空)이 인도의 아라난타사(阿羅難陀寺)를 본떠 창건한 266칸의 대규모 사찰이었다. 1376년(우왕 2) 나옹(懶翁)이 중건하고, 조선왕조에 들어와 세조비 정희왕후(貞熹王后)의 명으로 정현조(鄭顯祖)가 재중창하였는데, 명조 때 보우(普雨)가 실각한 후 쇠퇴하기 시작하여 19세기 초에는 거의 폐허가 되었다. 절터는 남쪽 기슭 경사진 대지에 있으며, 계단상으로 8단의 축대를 쌓고, 그 위에 여러 건물을 세웠던 흔적만 남아 있다.
6.대조사
충남 부여군 임천면(林川面) 구교리(舊校里) 성흥산(聖興山)에 있는 사찰.
대한불교조계종 제6교구 본사인 마곡사(痲谷寺)의 말사(末寺)이다. 사적기(寺蹟紀)에는 527년(성왕 5) 담혜(曇慧)가 세운 것으로 되어 있고, 《부여읍지(扶餘邑誌)》에는, 백제 불교를 중흥시킨 겸익(謙益)이 세운 것으로 되어 있다. 두 기록이 다른 까닭은 알 수 없으나 6세기 초에 건립된 것은 확인된다. 그 뒤 고려 원종 때 장로(長老)인 진전(陳田)에 의해 중창된 이래, 여러 차례 중수 ·개수가 이루어졌다.
7.경국사
경국사는 북한산 동쪽에 자리한 고려시대의 사찰이다.고려 충숙왕 12년(1325)에 자정율사(慈淨律師)가 창건하여 청암사(靑巖寺)라 하였다. 이 사찰은 옛부터 정토사상에 바탕을 둔 기도도량으로 유명하다.'경국사 사적기'에는 문정왕후의 중창 이후 '부처님의 가호로 국가에 경사스러운 일이 항상 있기를 기원하는 뜻에서' 청암사를 경국사로 이름을 바꾸었다고 한다. 일제 때인 1921년부터는 단청(丹靑)과 탱화 조성에 일가를 이루었던 보경(寶慶:1890~1979)스님이 60년간 주지로 머물면서 절을 새롭게 변모시켜 나갔다. 1950년대에는 이승만대통령이 보경스님의 인격과 태도에 감화되어 몇 차례나 찾아왔고, 1953년 닉슨 미국 부통령이 방한하였을 때도 이 절을 찾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