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성왕씨 부산파

고려의 궁터

아지빠 2019. 6. 10. 14:42




고려의 궁터

 

1.고려궁지 (高麗宮址)

 

 

 

강화읍 관청리, 강화산성의 북문으로 가는 도중에 고려 고종19년(1232)부터 원종11년(1270)까지 39년간 몽골의 난을 피하여 머물렀던 고려궁터가 있다.

규모는 작으나 송도의 궁궐과 비슷하게 지었고, 도성(都城)도 지금은 ‘강화읍성’ 으로 불리는 내성만 남았지만 당시에는 중성과 외성까지 쌓아서 삼중으로 요새를 만들어 장기 저항 태세를 갖추었다.

그러나 39년이라는 긴 항전 끝에 강토는 황폐해지고 백성은 기진맥진하여 헤어날 길이 없으므로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몽골의 요구대로 스스로 성을 허물고 나와 항복한 후에 개경으로 환도하고 말았다.

그 후 빈터로 남아 있던 고려궁터에 조선 인조 때 행궁(行宮)을 건립하고 강화유수부, 규장외각(奎章外閣) 등을 세웠으나 병자호란 때 함락되었으며,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에 의하여 완전 소실되는 등 수난의 역사가 거듭되었다.

 

2.고려동종(강화동종)



 

지정번호 : 보물 제 11호

동헌에서 이방청으로 가는 정원 한편에 프랑스군이 약탈해 가려다 실패한 강화동종이 종각 안에 걸려 있는데 한국종의 특징인 음통이 없고, 종 아래 부분에도 당좌가 없이 ‘숙종37년(1711)에 만들어 졌다’ 는 명문만 새겨져 있다. 꾸밈이 없이 간결한 조선시대의 문화적 특징을 지닌 종이다. 원래 종은 강화역사관에 보존되여 있다.

외규장각(外奎章閣)

고려궁터에서 가장 관심을 갖게 하는 것은 외규장각이다.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에 의하여 귀중한 소장품들을 약탈 당하고 건물까지도 소실된 것을 최근에 복원하여 빈 건물만 제자리도 아닌 담장 밖에 쓸쓸히 서 있다.

 

임진왜란 때 각지에 있던 사고(史庫)들이 불타버리자 국가의 중요한 서적들을 가장 안전하다고 판단되는 강화에 보관하기 시작했으며, 궁궐도서관으로 규정각을 세웠던 정조가 이곳에 외규장각(外奎章閣)을 짖고, 강화 안에 분산되어 있던 서책들과 왕실의 족보인 선원록(璿源錄)을 비롯하여 어필(御筆), 어제(御製), 의궤(儀軌), 옥인(玉印), 옥첵(玉冊), 금보(金寶)등을 서울 궁성으로부터 옮겨 보관했다.

그러나 왕실보관소로서 귀중한 자료와 보물들로 가득했던 외규장각은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에 의하여 서적 340책을 비롯한 옥책, 은괴 19상자 등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보물을 약탈 당하고 나머지는 거의 다 소실되었다.

지금도 한.불관계에 있어서 주요 현안이 되고 있는 것이 바로 이 문화재 반환문제이다. 찾아오기가 그리 쉽지 않으리라고는 하지만 도적 질 해 간 우리 문화재가 명백한 이상 조속히 환수되어야 할 것이다.

3.만월대

 

 

 

황해북도 개성시 송악산 기슭에 있는 고려의 궁궐터. 919년(태조 2) 태조가 송악산 남록에 도읍을 정하고 궁궐을 창건한 이래 1361년 홍건적의 침입으로 소진될 때까지 고려 왕의 주된 거처였다.

 

동서 445m, 남북 150m 정도의 대지에 위치한 왕궁터의 가운데는 정사를 처리하는 정전(正殿)인 회경전(會慶殿)이 위치하였다. 회경전은 정면 9칸, 측면 4칸의 규모이며 전면에 4개의 계단을 만들었고 좌우에는 동행각(東行閣)·서행각(西行閣)이 있었다. 회경전의 북쪽에는 고려 왕실의 보물을 보관하는 장화전(長和殿)과 비상시에 대신들과 정사를 논의하던 원덕전(元德殿)이 있었고, 북서쪽에는 천자의 조서를 받들고 사신을 접대하던 건덕전(乾德殿), 희빈들이 거처하던 침전인 만령전(萬齡殿)이 있었다. 회경전과 건덕전 사이에는 사신 등이 바치는 물품을 받아들이던 장령전(長齡殿)과 뒤에 집현전(集賢殿)으로 개칭된 연영전(延英殿)이 있었으며, 회경전의 서쪽에는 왕의 침전이, 동쪽에는 세자가 거처하던 좌춘궁(左春宮)이 있었다.

(계단)



 

황성에는 13개의 성문과 15개의 궁문이 있었다고 하며 성문 중에는 동문인 광화문(廣化門), 궁문으로는 왕궁의 정남문인 승평문(昇平門)과 신봉문(神鳳門)·창합문·의봉문(儀鳳門)이 유명하였다. 승평문은 정전인 회경전으로 연결되는데 이 문을 들어서면 신봉문이 있었고 그 동쪽에 세자궁으로 들어가는 춘덕문(春德門)이, 서쪽에 왕의 침전으로 들어가는 태초문(太初門)이 있었다. 신봉문 안에는 왕이 천자의 조서를 받들던 창합문이, 그 안에 다시 회경전의 전문(殿門;會慶門)이 있었다. 건덕전 앞에는 건덕전문·흥례문(興禮門)·의봉문이 있었으며, 의봉문 밖에 구정(毬庭)이 있었다고 한다. 중앙의 회경전터에서 동벽까지 135m, 서벽까지 230m, 승평문까지 250m 정도이며, 궁궐의 위엄을 드러내기 위하여 넓지 않은 공간에 많은 건물을 계단식으로 배치하였고, 문과 문 사이를 연결하는 계단이 지금도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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