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사

용호동(분개)의 구획

아지빠 2014. 10. 29. 04:44

 

향토지에 수록하려 하였으나 협조하지 않아 블로그에 담아두기로 하였다. 

 

 

 

 

용호동의 구획

1패와 2패는 대나무가 울창한곳 이었다고 한다. 산 짐승으로부터 안전한 자연 울을 활용하여 대나무를 파내고 10여 호(戶)의 단위로 주거하면서 한 패(牌)로 모여 살기 시작 하였다. 오랜 세월동안 3개의 패가 구획되었으나 가구가 늘어나면서 행정구역은 구(區)로 바뀌고 다시 통(統)으로 바뀌었다. 소규모 마을을 패라고 한 것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이 끝난 약400여 년 전부터 3패의 부락으로 구성되었다고 추정된다.10여호의 용소마을은 용호만의 한부락으로 분개4패로 지곡천의 좌우에 염전이있어 4분개라고도 하였다.

집의 단위로 10호를 1패 로하고 땔감과 농경지의 규모에 따라 주거환경을 책정하여 인구이동을 조절하여 먹고살아가는 최소단위의 경작지로 환산하면 분개는 30호 즉 3패가 적당하여 관리들이 감독하여 흉년이나 보릿고개를 무사히 넘길 수 있도록 조선의 호조 판적사가 이를 관리하였다.

패의단위는 6조 가 있었든 1894년 이후부터 주거환경 정책은 지방관청이 관리하였다.

이때부터 살기 좋은곳으로 인구의 이동이 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용호동은 옛날 관습을 고치는 것을 좋아하지 않고 진보와 같은 것은 생각조차 한 일이 없는 옛 관습을 고수하고 스스로 만족하는 풍습이 짙은 곳이라, 외지인들이 섣불리 이동하지 못하여 문화적 해택이 없어 패의 단위를 고집하였다.

일본은 1907년 해안가를 매립하여 대형염전6군대를 조성하면서 10여 호가 늘어 지금의 4패가 되었다.(4분개는 지곡으로 편입되었다)

각 통은 우물을 기준으로 윗마을 아랫마을 로 나뉘고, 우물에서 여인들이 서로의 관계를 유지하고 정보를 공유 하게 되었다. 또한 소랑강(용호천) 빨래터가 다른 정보가 공유 되는 곳이며 소문의 진원지였다.

1통에는 미나리꽝이 있어 봄이면 미나리를 다듬으며 도란도란 이야기도 나누고 맹아(새순)는 가져가서 식생활에 도움이 되었다.

1통주민이 외지로 나가는 길은 수장 산에서 동쪽으로 뻗은 대나무가 울창한 등을 넘어야 했다. 이등에는 큰 연자매가 있어 한때는 연자 등이라고 하였다.

 

 

 

연자매는 방앗간이 두 군데 생기면서 초간에 버려져 있었으나 기억에서 멀어졌다.

이등(嶝)에는 천 씨가3가구 박씨가3가구 왕 씨와 전씨가2가구 윤씨, 최씨, 김씨가 살았다.

모두가 대나무 숲에 집을 지어 대나무 울타리였다. 이등은 대나무 때문에 밤이면 으스스 한곳이라 늦게 오는 아녀자가 있는 집에서는 버스종점에서 기다려 등을 넘고 솔밭을 지나와야 마음을 놓을 수 있어, 등 넘어 오는 것이 걱정이었다.

2통에는 장자산 비탈에 사정(射亭활을 쏘는 정자)이 있었든 곳이라 사정 터라 하였다. 그러나 주민들은 새정터 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그리고 작은 사찰(寺刹) 도 있다.

일제 침탈(侵奪)시 입빈식 유제염전 용호출장소 조선식 시험염전 터를 활용하여 겨울이면 얼음판으로 봄부터 가을은 운동장으로 활용하여 체력단련과 협동심을 길러온 곳이 2통에 있었다. 염전 터가 전답으로 바뀌면서 운동장은 백운포 군 영지를 이용하게 되었다.

3.4통은 염전과 바다를 매립하여 조성된 곳이라 비가 많이 오면 침수가 잦은 곳이며 마을 주위에 갈밭이 많았다. 공동우물은 각각 한곳이 있었다. 용호동의 교육의 중심지로 두 곳에 학교가 있었다. 4통에는 동명학원이, 3통에는 대연 분교가 있었다.

 

※수영구 남천동도 광안동접도부터 대연동접도 남천천까지1패(牌)2패.3패.4패라고 구분하여 불렀다는 남천동 주민들의 증언. 조선시대 최저 40여호가 있었다고 유추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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