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사

칭찬하는 유전자가 넘치는 용호동(龍湖洞)

아지빠 2014. 9. 11. 11:37

 

 

 

 

2014년 용호동 전경

 

 

 

 

칭찬하는 유전자가 넘치는 용호동(龍湖洞)

동내 중앙의 큰 호수에 용이 살아 용호동이라 하였다는 구전이 있었으나...............

용호동은 북쪽의 용호만과 동, 남, 서쪽은 나지막한 산으로 병풍처럼 감사고 있다.

산세가 용이 똬리를 틀고, 아늑한 용의 품안에 인가가 자리를 틀었다

입으로 십대전부터 바르게 전해오기를 수장산앞바다에 비친 동산의달에 용이 감춰져 있어 용호라 하였다. 

산세의 이름도 용의 눈자리 동산(瞳山)과 목너머, 장자산과 주작을 닮은 백운포의 비룡산(飛龍山), 신선을 모시는 대붕산(大鵬山)과 용의자궁터 신용산, 그리고 수장산(水藏山)이며 그 끝이 수장 끝이라  임진왜란후 수미산이라고 기록되기도 하였다.

수리섬 또한 오륙도 설화의 중심에 있으며 옛날부터 용대(龍臺)라 하였다.

이렇게 용(龍)과 붕(鵬)중앙에 주작(朱雀)이 있어 명당국세(明堂局勢)도에 버금가며 중앙이 삼신산의 남방(南方)으로 봉곡등(鳳谷嶝)을 갖추어 묏자리로 이름이 올라 있다. 그 뿐인가 신석기와 청동기 이전부터 인간이 살아온 곳이 비룡산 자락이다.

비룡산의 고개를 넘어 넓고 아늑한 곳으로 이주하여 터를 마련하였다.

천혜의 염전으로 자염을 생산하며 대부분은 농업과 어업을 겸한 빈촌(貧村)이었다

이곳을 분개라 하였으며 분포(盆浦)라 기록하고 소금을 만드는 곳으로 알려졌다

처음은 다른 곳과 별 다르지 않게 바닷물을 끓이는 집(鹽釜屋)만 있었다.

땔감이 풍부한 해안가에서 원시적인 해수직자법(海水直煮法)으로 바닷물을 퍼 올려 끓여 만든 소금(煮鹽)과 같이 전오제염은 바닷물의 염도를 올리는 염전을 추가한 것이다. 그러므로 자염의질은 가마의 불을 지피는 여망(焒盳.炃夫)이의 기술에 좌우 되었다.

열에 의해 함수가 증발되면서 소금이 결정되면 불을 줄이고 완전결정이 되도록 담수를 뿌려 촉진시킨다.

결정된 소금을 미레로 끌어 모으고 나무주걱모양의 삽으로 소금을 끄집어내어 삼태기나 소쿠리에 담아 간수를 뺀다. 주의할 점은 함수가 남아있는 상태에서 소금을 끄집어내고 함수를 보충하며 불을 조절하여야한다, 함수가 타면 소금은 철가마 에서는 붉게 되고 토부에서는 가마가 쪼개져 사용할 수 없다.

작은 규모의 염전이 소랑강(小浪江) 좌우에 약30여개가 있었으며 소금을 굽는 염부 옥은 6개정도가 1900년도까지 여러 염전의 함수를 수집하여 자염을 생산하고, 함수의 량과 연료비 그리고 분부의 노임으로 분배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분을 소금을 굽는 염부 옥으로 이해하고 있는 학자들이 많아 안타깝다.

그러나 소금을 굽는 그릇은 토부(土釜)와 철부(鐵釜)이다, 즉 쇠 가마를 만들기 전에는 대형의 굴 껍질을 배열하고 그 양면에 굴 껍질 재나 굴 껍질가루에 함수나 간수를 섞어서 이긴 것을 칠하여 만든 토부가 철판이 생산되기 전까지 사용하였다.

분을 염정(鹽井.沼井)이라 기록하고 섯등이라 하였다.

섯등은 염전의 면에 개흙(살토撒土)을 살포하여 여기에 해수를 흡수시켜 햇빛이나 바람으로 수분이 증발, 건조되어 염분이 개흙에 부착되면 이것을 끌어 모으는(채함 採鹹)곳이다. 염정의 채함에 해수를 부어 함수를 채취한다.

그래서 분(盆)은 섯등이다. 분은 염전의 넓이와 관계없이 한 뙈기에 한 개만 있었다. 일재 침탈 기부터 대형염전으로 개발하고 섯등의 형태는 조선식으로 하고 수량(일본식염전)을 늘여 생산량과 작업조건을 개선하였다.

분개의 개는 포(浦)라 기록하며 바닷가라는 뜻이다.

분개는 소랑(小浪)강 좌우에 유재(둑이있는)염전이 있고 그 염전의 중앙에 각각 섯등(盆)이 있는 곳이라 분개(盆浦)라 하였다.

농업과 어업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소단위의 주거지는 호패의 단위로 10호를 1패(牌)로 하였다. 용호동에는 3패가 있었으며 1패와 2패 는 대나무가 울창한곳 이었다고 한다. 산 짐승으로부터 안전한 자연 울을 활용하여 대나무를 파내고 10여 호(戶)의 단위로 주거하면서 한 패로 모여 살기 시작 하였다.  지금의 평화공원에도 염전이 있어  4패 분개또는 4분개라고 하였다.

3패는 바닷가 이었으며 연자 등을 넘어야 1패로 넘어갈 수 있었다. 소규모 마을을 패라고 한 것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이 끝난 약410여 년 전부터 3패의 부락으로 구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땔감과 농경지의 규모에 따라 주거환경을 책정하여 호구(戶口)의 이동을 조절하고 먹고살아가는 최소단위의 경작지로 유추하면 분개는 30호 즉 3패정도 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패는 계급과 신분 증명의 목적 이었으나, 관리들이 흉년이나 보릿고개를 무사히 넘길 수 있도록 조선의 호조 판적사(戶曹版籍司) 가 복지정책의 일환으로 감시 감독하였다.

패의단위는 6조 가 있었든 1894년 이후부터 주거환경 정책은 지방관청이 관리하였다. 그때부터 살기 좋은 곳에는 가옥이 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용호동과 같이 바닷가는 옛날 관습을 바꾸는 것을 좋아하지 않고 진보와 같은 것은 생각조차 한 일이 없는 옛 관습을 고수하고 스스로 만족하는 풍습이 짙은 곳이라, 한국전쟁의 와중에도 피난민이나 외지인들이 섣불리 이동하지 못하여 문화와 관습이 고스란히 남아 패의 단위를 고집하였다. 이웃의 남천동에서도 오랫동안 4개의 패가 있었다.

1907년부터 해안가를 매립하여 대형염전6군대를 조성하면서 10여 호가 늘어 지금의 4패가 되었다.

호구가 늘어 각 패는 우물을 기준으로 웃깍단 아랫깍단 으로 나뉘고, 아버지 대(代)에는 웃마실 아랫마실 그리고 그 후손은 윗마을 아랫마을이라 하였다. 우물에서 여인들이 서로의 관계를 유지하고 정보를 공유 하게 되었다. 또한 소랑강(용호천) 빨래터가 다른 정보가 공유 되는 곳이며 소문의 진원지였다.

이렇게 모두가 이웃사촌이며 기쁨도 슬픔도 같이하고 품앗이로 공동체를 이룬 살기 좋은 곳이었다. 특히 1패는   남쪽에 위치하며 단결심이 강하여 애칭으로 독일패(覇)라고 하였다. 2패는 장자산의 그늘 때문에 해돋이가 늦어 응달이 길었으며 동쪽이라 하였다. 

3패는 동쪽에 비해 햇살이 일찍 들었으며 서쪽이라고 불렀다 . 

◉동쪽에 입향(入鄕)한 김녕김씨 봉사공파(奉社公派)는 김해김씨 35세손 김녕군(金寧君 時興)의 13세손 원실공(元實)으로 임진년 1592년4월14일 다대포첨사 윤흥신(尹興信)을 도와 다대진 전투중 순국하여 지금의 감천고개 서평 용두암에 매장되었으나, 그 후 용호동 장자산 사정(射停)터에 안장하였다.

입향조의 배(配)정부인 월성최씨(貞夫人月城崔氏)이시다. 아쉽게도 후손들이 선조대왕(宣祖大王)께서 애국충절을 추모하여 종이품(從二品) 가선대부호조참판(嘉善大夫戶曹參判)을 추서하였으나, 충렬사에 위패를 모시고 제향 되어야 옳으나 자료를 찾아내어 조정에 올리지 못해 충절을 인정받지 못하였다.경주이씨국담공파(菊潭公破)28세 경립(慶立)휘 둔암(遯庵)정유생(丁酉1717년)입향조로 기록되어 있다어  김형김씨 그 전에 입향 하였을것으로 유추됨

◉파평윤(尹)씨 영은공후 승지공파(永隱公后承旨公派)또는 소정공파(昭靖公派)휘는 천백(天伯) 경술생(庚戌1730년) 용호동에 입향 하였다.

입향조의 배(配)창원황(昌原黃)씨 례필(禮必)의 따님이시다.

◉개성왕(王)씨는 고려태조 왕건의27세손 휘 태룡(泰龍) 참판공(호조)파 개성북(開城北) 동래파(東萊派)갑진생(甲辰1724년) 용호동에 입향 하였다.

입향조의 배(配)파평윤씨 천운(天運)의 따님으로 정사생(丁巳1725년)이다.

34세손 휘 학조(鶴祚)의 차남 홍권(洪權)선생은 의료혜택이 전무한 이곳주민들을 위해 의학을 전공하여 거동이 불편한 노인들을 찾아 왕진하며 산업일군들의 치료에도 적극 참여하여 삶의 질을 높여 칭송이 자자(藉藉)하였으나 불이의 사고로 일찍 세상을 뜨시게 되어 주민들은 애석한 마음이었다.

천운과 천백이 동일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왕 씨를 윤 씨의 외손이라 한다.

◉밀양박(朴)씨도 여러 파가 입향하여 지금에 이르렀으나 그중 밀성박씨 행산공후(杏山公后)국담공파(菊潭公破)28세 경립(慶立)휘 둔암(遯庵)정유생(丁酉1717년)입향조로 기록되어 있다.

36세손 휘 명하(明廈)의 장남 두상(斗祥)씨는 최초로 일제의 염전을 인수하여 운영하시었다

◉경주(月城)최(崔)씨 사성공파(司成公派)15세 세춘(世春)순조15년 을해생(純祖15年乙亥1815년)입향조로 기록되어 있다.

입향조의 배(配)남평 문씨(南平文)두흥(斗興)의 따님으로 신묘생(辛卯1831년)이다.

◉경주이(李)씨도 가까운 곳의 집성촌 용소(古李里.고이리분깨4패)와 지척이라 이주하였다.

그 외도 김해김씨의 여러 파와 담양전(潭陽田)씨, 남평문씨 전주이씨 등도 용호동에 입향 하여 이웃 간에 화목하며 서로 돕고 나누는 이웃사촌으로 마을을 이끌어 왔다.

용호동에도 봉수대가 장자산 정상에 1942년까지 원형을 유지 하고 있었으나, 연합군의 공습에 대비하여 탐조등 설치로 훼손되었다. 옛 어른들은 그 곳이 오해야항(吾海也項) 봉수대라고 하였으나 확인할 자료는 수없이 많은 사금파리를 소장하고 있는 주민들이다.

어촌마을이라 이곳에도 초분 터가 1950년 까지 있었다. 초분지는 고포현(古浦峴)에 있었으며, 지금의 행정구역으로 용호1동 479번지 언덕이 초분지 이었다고 한다.

바람 부는 밤이면 인광이 일기도 하고 염한 헝겊이 나뭇가지에 걸려 펄럭거려 아이들이 귀신이 나온다고 무서워 근처도 가지 않았다고 한다.

상여를 이끌며 앞소리를 잘하신 분은 갈밭 집 왕기헌(王基憲)옹과 김태진씨로 알려져 있고 동쪽의 전두루 옹도 기능 보유자였다고 한다.

용주면의 신식 교육시설은 일제 강점기 을축년(乙丑年)1925년에 동명학원(東明學院)을 용호동에 설립하여 용호, 용당 지역주민의 신학문을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

대연동에 사립 용연보통학교가 설립됨으로 동명학원은 문을 닫고 학생전원은 편입되어 공부하도록 하였다 . 범일동에 거주하신 김성학(金性學)선생께서 학교 건립기금전액을 기부하여 용호동309-1번지 대지456㎡(138평)위에 265㎡(80여평)의 목조건물3교실을 기묘년(己卯年)1939년2월 건립하여 후학을 가르쳐 이 지방 문맹퇴치와 신교육의 선구자로 노력 하셨다. 일본에서 수학하다 방학이면 고국에 와서 학생들을 가르치기도 하였다. 용호와 용소어린이들이 초급반 공부를 하고 대연초등학교에서 상급반공부를 하도록 하였다.

이렇듯이 교육과 산업 희생정신과 단결 또한 으뜸인 용주면의 모범마을이 용호동이다. 예의 바른 고장으로 남을 배려하고 서로를 칭찬하는 유전자가 넘치는 이곳 용호 향우회의 애향심은 본받아야 할 창조정신(創造精神)이다.

 

오해야항-해동여지도 동래부1736지도낙동하구1776~1795 우암반도기록

윗마을 아랫마을의 방언-웃깍단.아래깍단 웃마실. 아랫마실

  섯등-염정(鹽井.일본식 소정沼井) 으로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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