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호동(龍湖洞)산이름
용의 머리쪽부터
동산(瞳山)-본래 동산(童山 아기산)이라하였다.
임진왜란후 분개를 용호(龍湖)라 개명하면서 용의 머리며 용의 눈자리라 하여동산 (瞳山)라 하였다.
묘터로 쓰면 가산(家産)이 기운다 고함. 일제침탈기 구리광산이 많아 동산(銅山)이라고 도 하였다
목너머-동광산에 종사하는 일꾼들이 용의 목을 넘나든다고 목너머길이라함.
목너머 창(艙)바위는 용호 동광석을 일본으로 운반하기위한 임시 선착장을 창바위라하여 화물선이 정박할만한 깊이와 바위의 높이가 선착장으로 만족하였다고한다.
장자산(長子山)-용호동의 주봉이며 오해야항 봉수대가 1942년까지 1대가 원형보존 된곳
꽃밭등 (花田山 나나까(7처고사포진지)-너덜겅이 많고 진달래꽃이 유명 하였음./골짜기에 재석곡(齋釋谷)의 재석암(齋釋庵)이라하여약500여년전부터 삼존석불을 모신법당과 산신당이있다
비룡산(飛龍山)-오륙도쪽과 천주교공동묘지쪽으로 두 개의 봉이 있고, 비용개 고개와 용대(龍臺)로 알려져있으며 비용개라고 하였음. 지금은 백운포(白雲布)라고도함
대붕산(大鵬山)-신선대가 있는산이 날개를편 붕새와같다하여 대붕산이라하였고붕새는 신선을 태우고 날으는 전설의새이며 해운(海雲) 최치원도 타고 다녔다는전설의 산 이다. 울창한 송림의 신선대는 항만청 부두공사로 훼손되어 흔적도 없어졌다 신선대가 있었던산은 대붕산이라고불러야한다
일제강점기때 용마산(龍馬山)일본에서 미친말을용마라함)이라폄훼하기도 하였다.
신용산(神龍山)-용의 자궁터라하여 신성한 곳이라 묘지를 쓰지 않았다. 용당주민들은 보오지산 또는 봉우리산이라고 한다..
수장산(水藏山)-용호동에서 가장 신성시 하는 산이며 임진왜란시 너무 이름이 좋은산이라 조선의산은 용의꼬리라 수미산(水尾山)이라고
폄훼하기도 하였다 .수장산은 마을을 감추어 보호하며 동산의 용설(龍舌)이 있어 명당으로 최적지이다. 강석진씨가 명당에 절과 학교 당신의 영면지(永眠址)
로 택하였다.수백년전부터 선조들이 명산 명당의 좋은 이름을 점지 하였으나 몇몇 무식한 나부랭이들이 입에 담기도 어려운 보오지산이나 용마산과 같은 이름을 지금까지 고집하고 있어 개탄할 일이다. 아름답고 성스러운 명산의 이름을 항상 불러 정기를 받기를 기원합니다.
사분개- 분개의 염전은 총25개정도가 있었다고하며 모두가 입빈식 유제염전. 21개는 소랑강 좌우에 자리하였고 4개의 염전은 지금의 대연천좌우에 염전이있었다 그래서 4분개(분개4패)라 하였다고 한다. 모두를 합하여 분개염전(盆) 분이라 하였으며 지금의 용소도 분포리4패였다고 하였다
평정산- 신용산에서 용당고개 를넘어 민방위훈련장이 있었든산
청량산- 석포와 천재등 사이의 산
천재등- 대연고개와 석포 청량산 중간산 우룡정이 있는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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