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호동지명
부산에서 이름이 알려진 사학자나 역사를 가르치는 교수들이라면 용호동을 설명할 때 마을 한 복판에 호수가 있었고 그 호수에 용이 있었는데 승천 하지 못하고 이무기가 되었다.
그래서 용이 살든 호수가 있어 용호동이라 한다. 라고 말문을 열기 시작한다.
영조(英祖)16년 1740년 동래부 남촌면 분포리 그 후 100여 년 후,
청(淸)의 연호 도광(道光) 29년, 조선 현종15년 서기 1849년 조선의 동래부 행부사(行府使)에 남하면(南下面)용호리(龍湖里) 로 기록하였다.
청(淸)연호 선통(宣統)2년 1910년 일제강점기 동래군 용주면 용호리로 행정구역이 달라도 용호(龍湖)로 기록되어 왔다.
1740년부터 1849년 동안 호수가 생기고 용이 승천하려다 이무기가 되는 과정이 있었다는 것이다. 이는 전설도 아니며 풍수지리경도 아닌 마을 이름에 호수 호(湖)자가 있어 그렇게 어림짐작으로 그를듯하게 꾸며낸 것이다.
분개(盆浦)전오제염은 바닷물을 머금은 개흙이 햇살과 대륙풍에 의하여 수분이 증발하여 개흙에 하얀 간(肝)이피면 염정에 수집하여 해수로 씻어 함수를 받는 장치를 분(盆)이라하며 이런 동이는 염전1개에 한 개씩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경상도와 분개의 염전은 대부분 입빈식 유제염전이다. 바닷물이 염전에 직접 들어오고 바닷물을 가두는 둑이 있어야 한다.
기억에 남는 바닷가의 둑에 수십 개의 동이가 있는 큰 염전은 일본이 시험염전으로 연구한 염전이었다.
분개 마을 중앙으로 소랑강이 있어 밀물 때면 바닷물이 상류까지 올라오고 썰물이 되면 바닷물이 소랑강을 따라 내려간다. 이런 지세(地勢)와 조건이 염전으로 적합하여 소랑강(小浪江)좌우에 염전을 만들어 염수를 생산하고 별도의 염부 옥에서 끓여 소금을 생산 하였다 .
용호동의 산세와 지명이 용의 형상(形狀)이다.
북향의 용머리가 있는 산을 동(瞳)산 중간능선고개를 용의 목 넘어 라 하여 광산 종사자들이 그 길을 택하여 출퇴근하여 안전을 보장 받았다. 그 다음 산 주봉인 장자산 이다
우암반도(적기반도)의 끝을 잘록개 라하고 용의 앞발자리이며 ,뒷발자리의 산이 대붕(鵬)산 이며 신선이 머물렀다하여 신선대라 한다. 앞발과 뒷발 사이 남쪽에 두 개의 비룡(飛龍)산이 있다. 그 고개를 비용고개라하고 해안을 비용개라 하였다. 4월부터 5월까지 바닷물이차고 기온이 상승하여 해무가 비용고개를 넘어오는 모습이 구름이 폭포같다 하여 백운포라 부르기도 한다. 대붕산에 용당(龍堂)이 있었으며 서쪽의 신용산을 용의 자궁 터라 하여 묘를 쓰지 않았다고 하며, 동명불원 이 있는 산은 수장산(水藏山)이라 하여 용호만에 비친 동산과 달이 용호만에비쳐 그깊이를 가늠할수없어 액운을 막아주며 넓은 바다를 향하여 용설(舌)자리라 풍요로운 지세라 하였다.고 한다
용호의 글에 담긴 구전은10대를 지나도록 바르게 전해오기를 용호만에 비친 동산(용의눈자리) 위에 뜬 달에 용이있다 하여 龍湖 라 하였다
선조(宣祖)25년 임진란 이후 고승들이 조선반도의 산세에 따라 지명을 정하였으며 처음으로 용호라 하였다는 구전이 전해졌다. 가장 믿음이가는 지세의 지명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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