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2년4월23일 부산진전투와 동래성함락 승전축하연을 한곳이며 기생 남(南)이와 경(京)이 두의기(義妓)가 왜군 동래성관할 대장기시(岸)와 부대장 고이소(小磯)를 치마로감싸 않고바다에뛰언든 곳 이기대다
오랜세월 돌보지않아 잡초에 묻어 잊혀질뻔한 두 의기의 무덤(처음 발견하였을때의 모습)
부산 이기대의 ‘두 기생 추정 무덤’ 찾았다”
공기화 부산교대 명예교수가 두 기생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묘를 가리키고 있다. 부산 남구청 제공
부산의 상징인 남구 용호동 오륙도 순환도로를 따라가면 ‘이기대(二妓臺)’가 나온다. 바다를 끼고 있는 이기대는 절경으로 꼽힌다. 1850년 좌수사 이형하(李亨夏)가 편찬한 ‘동래영지(東萊營誌)’에는 ‘좌수영 남쪽으로 15리(6km)에 두 명의 기생(二妓) 무덤이 있어 이기대라고 부른다’고 기록돼 있다. 임진왜란 때 왜군이 인근 수영성을 함락시킨 다음 축하연을 열고 있을 때 의로운 기녀 2명이 왜장을 술에 취하게 한 뒤 끌어안고 바다로 투신해 함께 숨졌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이기대가 아니라 ‘의기대(義妓臺)’라는 주장도 있다.
이와 관련해 두 기생의 것으로 추정되는 무덤이 발견돼 지역 문화계와 학계의 관심을 끌고 있다. 기록은 있었지만 실체가 없어 공공기관이나 민간단체에서도 관심을 두지 않았다.
부산 남구청은 “부산교대 공기화 명예교수(66)와 향토학자 왕정문 씨(67)가 ‘2011년 9월 이기대공원관리사무소에서 공룡바위 방향에 2기의 무덤을 찾았다’며 구청에 알려왔다”고 29일 밝혔다. 구청은 “이후 연고자를 찾기 위해 1년 6개월이 넘도록 묘 근처에 공고를 했으나 연고자가 나타나지 않아 동래영지에 기록된 기생 무덤일 가능성이 크다”고 밝혔다.
무덤은 바다에서 북서 방향으로, 이기대 공룡바위에서 정남향으로 약 100m 떨어진 곳에 있다. 발견 당시 무덤은 수십 년째 방치돼 잡목으로 뒤덮여 접근이 쉽지 않았고 축대도 훼손된 상태였다.
무덤을 처음 발견한 공 교수와 왕 씨는 동래영지 산천조에 있는 ‘이기대는 좌수영에서 남쪽으로 15리 되는 곳에 두 기생의 큰 무덤이 있어 그리 불린다(二妓臺 左營南十五里上有二妓塚云)’는 기록으로 미뤄 이곳이 두 기생의 무덤일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했다.
남구문화원 향토사연구위원이자 용호동 토박이인 왕 씨는 “어린 시절 조부(왕기세)께서 ‘80년 전만 해도 동구 초량, 서구 충무동의 기생들이 이 무덤에 찾아와서 두 기생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가야금을 연주했다’는 얘기를 들었다”며 “기생들 사이에서 이기대 두 기생의 의로운 애국충절이 전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공 교수는 “무덤의 크기는 일반 묘에 비해 2, 3배 커 일반인의 묘라기보다는 총(塚)이라고 볼 수 있다. 이는 두 기생의 의로운 죽음을 기렸다는 의미로도 해석된다”고 설명했다.
남구청은 역사적 사실을 뒷받침할 수 있는 학술조사를 거친 뒤 본격적인 문화관광자원화 사업을 할 방침이다. 일단 묘 관리를 한 뒤 축대 조성과 표지판 등 시설물을 설치할 계획이다. 두 기생의 의로운 죽음을 주제로 문화상품을 만들고 연극공연, 뮤지컬 등 예술작품도 구상하고 있다. 이종철 구청장은 “이기대는 경남 진주의 논개와 관련된 의기를 연상하게 하지만 2명이라는 점에서 다르다”며 “고증작업을 거쳐 부산과 남구를 대표하는 관광상품으로 만들 것”이라고 말했다.
조용휘 기자 silent@donga.com
부산광역시 남구청이 두의기의 묘소를 벌초하고 행정고시를하고 있다
부산 이기대에서 두 기생 묘 추정 무덤 발견
부산 남구 용호동 이기대(二妓臺)에서 두 기생(二妓)의 묘로 추정되는 무덤이 발견돼 비상한 관심을 끌고 있다.
이기대라는 지명에 대해 1850년 당시 좌수사가 쓴 '동래영지'에는 "좌수영 남쪽으로 15리(6㎞)에 두 명의 기생 무덤이 있어 이기대라고 부른다"라고 돼 있다.
이들 기생에 대해서는 임진왜란 때 수영성을 함락시킨 왜장이 벌인 잔치에 불려갔다가 왜장에게 술을 잔뜩 먹이고 함께 바다로 뛰어든 의기(義妓)라는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부산 남구문화원 향토사연구위원인 왕정문(67)씨는 이기대 공룡바위 근처에 있는 일반 묘와 다른 모양의 무덤 2기가 두 기생의 묘로 추정돼 2011년 9월 부산 남구에 알렸다고 30일 밝혔다.
이들 묘는 좌수영에서 6㎞가량 떨어진 곳에 있는데다가 위쪽이 가늘고 긴 일반 묘와는 달리 전체적으로 둥근 형태고 크기도 2배가량 된다.
또 10대째 남구 용호동에 거주하는 왕씨의 조부가 1965년까지 매년 부산 동구 초량동과 서구 충무동 권번(券番·기생조합)에서 기생들을 이곳으로 불러 위로연을 열었던 기억 때문이다.
왕씨는 "당시에는 조부께서 왜 그런 일을 하는지 몰랐는데 관련 자료를 수집하다 보니 의로운 두 기생의 넋을 위로하는 행사였다"고 말했다.
그는 또 "이들 묘가 두 기생의 묘라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학술조사 등을 통해 확인해볼 가치는 충분히 있다"고 밝혔다.
남구는 2011년 9월부터 이들 묘 주변에 울타리를 치고 연고자를 찾는 공고문을 붙였지만 아직 아무런 소식이 없다.
남구는 이에 따라 올해 말까지 연고자가 나타나지 않으면 고증작업에 들어갈 계획이다.
또 이들 묘가 두 의기의 무덤으로 결정되면 보존방안을 마련, 문화관광 자원으로 활용할 방침이다.
(부산=연합뉴스)
두 의기 남이와 경이 가 왜놈대장의 추행에 모멸과 치욕을 죽기로 결심하고 각각두장수를 치마로감싸 뛰어 든곳 이기대 그때의 일어난 일들
임진왜란 첫날1592년 4월13일 밤 동산에서 왜놈을 정탐하다 개의 울음소리에 왜병들이 산위에 까지올라 오자 기생은 숨을 곳을 찾아 헤매었다. 발 빠른 병사들이었다. 비탈길 옆 작은 석굴을 발견하고 숨어들었다. 석굴 앞에서 개는 왜병들의 움직임 에 계속 짖었다.
왜병들은 동굴을 향하여 여러 번 무어라 고래고래 고함을 내뱉었다.
누렁이는 왜병이 가까이 올라오자 달려들며 달빛에 하얀 이빨이 빛나는 순간 총소리가 메아리쳐 들려 왔다.
누렁이의 살벌한 짖는 소리를 들을 수 없었다.
왜병들은 낄낄 거리며 동산말 선착장으로 내려갔다.
남이와 경이 자매는 꼭 껴안은 채 적막이 잠긴 석굴에서 엉금엉금 기어 나와 주위를 살폈다.
이 석굴을 각시 당이라 하며 4월13일에 제를 올리고 어민들이 배를 진수 하면 오방색과 흰 소복을 만들어 각시 당에 바쳐 바다에서의 무사를 비는 곳이기도 하다
왜군은 단숨에 부산진성을 점령하고 왜관의 도움으로 별저 항을 받지 않고 수영 성까지 도달하였다. 수영 성을 함락시키고 군을 재정비하였다.
전투부대는 북진을 계속하며 큰 항쟁을 받지 않았다.
수영성에서 점령지를 관할하는 기시(岸)대장과 고이소(小磯)부 대장은 성격이 포악하고 주색을 즐기는 전형적인 왜놈이었다. 침략군에 빌붙은 몇몇 관리들은 아부하기 시작하였다 .
일패 기생을 소개하고 이름난 요정을 찾아가며 비위를 맞추기 시작하였다.
점령지가 평정되고 주민들도 생업에 돌아가는 분위기를 감지한 고이소(小磯) 는 왜관 통역관과 조선 관료 몇몇을 불러 들여 경치 좋은 곳을 물었다 .
통역관은 금정산을 추천하였다
의심이 많은 기시(岸)는 산보다 툭 트인 바닷가를 선호하였다
결국 일본을 바라볼 수 있는 장자산 해안가를 추천 하였다
기시(岸)와 고이소(小磯)는 부관과 오장등 오륙명을 대동하고 조선기생 5명과 악기를 다루는 일본 기생 3명을 데리고 전함을 타고 장자산해안 장바위에 정박하였다.
장바위에서 백 여 보 떨어진 넓은 반석에 자리를 마련하여 여흥을 즐기든 왜병들은 취기가 오를수록 짐승에 가까운 짓을 서슴없이 저질렀다
조선기생들은 처음 당해보는 왜병의 욕구에 모멸감에 치를 떨었다
기생들이 반항 할수록 술에 취한 왜병들은 미쳐 날뛰며 추행을 즐겼다
경치 좋은 이곳에서 성전의 축하 잔치가 무르익을수록 미쳐 날뛰는 왜병들은 기생을 껴않고 돌 틈으로 하나둘 숨어들었다
기시(岸)대장과 고이소(小磯).는 신라의 안압지처럼 공룡(恐龍)의 발자국에 바닷물을 넘치도록 퍼붓고 술잔을 띄우며 즐기는 독특한 술버릇이 있었다. 술이 거나하여 기생의 부축으로 간신이 걸을 정도 이었다.
눈은 반쯤 감긴 채로 윗옷은 풀어 흐느적거렸다
4월23일 조금 바다에는 가마우지가 먹이잡이에 물속을 드나들었다
기시(岸)와 고이소(小磯)는 기생의 부축을 받으며 동해바다를 바라보며 오줌을 누기 시작했다
이 순간 두기 생은 치마를 풀어 외장을 감사며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한 기생은 오장 요나이 (米內)에게 추행당하며 이 순간을 지켜본 것이다
파도소리만 들렸다
두기생과 기시(岸) 대장 그리고 고이소(小磯)부대장이 개모자반 위에 떠있는 것을 본 것은 30여분이 지나서 요나이 (米內) 오장이발견하였다.
요나이(米內) 오장의 고함소리에 부관과 참모가 옷을 걸치며 달려오고 전함의 병사들이 모여들어 시신을 수습하였다
그리고 서둘러 조선기생의 시신은 남겨두고 본대로 돌아갔다
이곳이아니면 아래 이미지에서 술잔을뛰웠을 것으로 추정
이들은 치열한 전투중 기생과 축하잔치를 하다가 물에 빠져 죽은 것이 밝혀지면 문책 당 할 것이 두려워 입을 맞추어 실족하여 죽은 것으로 보고하기로 하여 남은기생들도 무사하였다
4월25일 남이와 경아 두기생이 기시(岸)와 고이소(小磯) 부대장과 바다에 뛰어 드는 것을
지켜본 기생은 마을 주민들에게 알리고 반석에 있는 두기생의 뒤처리를 부탁하고 돌아갔다
두 기생은 철따라 농사짓는 법을 가르치고 홍수와 가뭄을 대비하여 관계시설을 만들어 해마다 풍년 들게 하고 농번기가 끝나면, 물때를 정확히 맞추어 바다에 나가 그물을 치게 하니 언제나 만선으로 돌아 왔다,
해풍에 약발이 오른 초목으로 병든 마을 사람들을 치유토록 하였다.
밤이면 마을 사람을 모아 글을 가르치니 기생은 마을의 촌장이며 의사이고 신(神)이었다.
주민들은 1592년4월27일 두기생의 시신을 수습하여 동해바다가 가려지는 작은 등뒤에 상좌에 남이기생을 그 아래 동생 경아의 무덤을 만들었다.
그 후 정유재란까지 7년 전쟁 이 끝난 2년 후 목 너머 반석에서 기생들이 신축년(辛丑)1601년 4월 25일 바다 에서 전사한 영혼과 두 기생을 추모하는 무혼 굿을 한 장소를 이기대 라 하였다고 한다. 지금은 선돌에 이기대 (二妓臺)음각으로 새겨져 있다.
조선시대 공부(公簿)등의 기록은 이기대를 설명하기를(左營南十五里 上有 二妓塚云)라 장소와 두기 생의 묘지가 있다는 것 이외 상세한 자료는 없다.
*1)기시(岸) 란 성은 임지왜란 이기대 반석 언덕에서 기생을 추행한 것을 숨기고 공을 세웠다고 기시(岸) 라하였으며 일본 56대 기시 노부스케(岸 信介)와 같은성씨이다
2)고이소 (小磯)란 성도 임진왜란 이기대 반석 물가에서 기생을 추행하다 죽은 것을 전공으로 기록하여 그 후 고이소 (小磯)라 하였으며같은성씨로 대표적인 인물은 41대 총리 고이소 구니아키(小磯 國昭)가 있다
3)요나이(米內)란 이름도 임진왜란 이기대에서 아름다운 기생들 틈에서 추행을 하고 문책이 두려워 간부들과 입을 맞춘 전형적인 간사한 왜놈이었다. 그러나 그 또한 인품에 어울리는 요나이(米內)로 일본37대 총리 요나이 미쓰마사(米內光政) 와 같은 성씨다
그 당시 왜놈들은 반도 신라와 백제 그리고 고구려의 높은 문화에 열등감을 가지고 또한 반도의 여인들의 아름다움에 혼줄을 놓고 치욕과 모멸감을 주어 쾌감을 즐겼을것으로 추정이 간다
*조금-음력23일8일을 조금이라고하며 조수의 변화가 없는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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