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룹명/나의포토이야기

우리는 언제까지 지상에 환생해야 하나.

아지빠 2021. 9. 16. 10:37

우리는 언제까지 지상에 환생해야 하나.

“환생을 그치는 것은 굉장히 힘들다. 환생을 그치려면 영혼이 가지고 있는 미움과 집착같은 부정적인 것들이 모두 사라져야한다.”

-인간이 환생한다는 증거가 있나.

“증거는 없고. 과학적으로 실험할 수도 없다. 다만 역행 최면을 해서 로마의 누구였다고 하면, 역사기록도 없을 경우 믿기 어렵다. 좀 더 신뢰성을 얻은 것은 미국의 의사 이안 스티븐슨 연구였는데, 전생을 기억하는 아이들을 대상으로 검증할 수 있는 사례들을 골라놓은게 2천여건으로 1천쪽 책 두권으로 냈다.”

-이번 생은 어떻게 형성된 것인가.

“3천년전 인도에서 인간의 몸을 세가지로 구분했다. 육체와, 이를 감싸는 미세체, 원인체, 이 셋이다. 우리는 통상 몸이 있으니 오라(발광체)가 있다고 생각하는데, 이는 잘못된 생각이다. 오라가 상징하는 미세체가 있으니 몸이 있는 것이다. 이번 생에 풀 과제가 미세체에 프로그램화 되어있다. 부모의 교합에 의해 태어난 인간의 몸체는 미세체가 주조한 것이다. 프로그래밍된 대로 외모와 성격이 주조된 셈이다.”

-가족이나 연인, 친구 등 이번 생에 가까웠던 사람들은 다음 생에도 또 만날까.

“누군가를 강하게 미워한다면 다시 만나게 된다. 상대방과 풀게 없으면 다시 안만나지만, 풀게 남아있으면 다시 만나게 된다. 원불교 창시자인 소태산 박중빈은 한 여성이 ‘알콜중독자로서 구타하는 남편을 내생엔 다시는 만나고싶지안은데 어떻게 해야하느냐’고 묻자 ‘그렇다면 미워하지도 말고, 관심을 끊어라’고 했다. 미움이든 애착이든 생각이 끈끈한 인연을 만들기 때문이다.”

-카르마이론이 비판받는 것은 이번생이 전생부터 이미 정해져있는 결정론이나 숙명론이어서 인간이 자유의지에 따라 진급시킬 여지를 없애는 것 아니냐는 것 아닌가.

“결정론이냐 자유의지냐는 질문 자체가 잘못된 것이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자유롭다. 팔은 안으로 굽혀지지만 인간은 팔을 거꾸로 제낄 자유도 있다. 꺾이면 아프니까 그런 자유를 사용하지않을 뿐이다. 카르마는 ‘줄에 묶인 개’에 비유할 수 있다. 개는 줄의 길이만큼 자유롭다. 인간도 자유롭긴 하지만, 카르마의 한계 내에서 자유롭다.”

-카르마에 의해 프로그래밍 된채로 현생에 태어났다면 삶이 어떻게 전개될지 예측도 할 수 있는 것인가.

“붓다의 시대 다른 경쟁자들은 영혼이 정확하게 어디에서 다시 태어날지를 놓친 것에 대해 붓다는 임종하는 순간에 가졌던 생각을 놓쳤기 때문이라고 했다. 마지막 순간의 생각조차도 내생에 큰 영향을 미친다. 인간이 자유의지를 가지고 삶을 도전하고 성취해가니 사고력까지 예측은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어느 정도 큰 것들은 예측할 수 있다. 프로그로밍은 현생의 숙제를 해마치기 위해서이기 때문에 현명한 사람들은 카르마를 알고 받아들인다. 결국 자신이 선택한 삶이어서다.”

‘죽음 강의’ 3부작을 8년에 걸쳐 완간한 한국죽음학회장 최준식 이화여대 명예교수. 조현 기자

‘죽음 강의’ 3부작을 8년에 걸쳐 완간한 한국죽음학회장 최준식 이화여대 명예교수. 조현 기자

-점술사가 인간의 미래를 점치는 것이 가능한가.

“점을 치는 무당이나 영매들은 본인들이 영혼의 정보를 직접 보는게 아니고, 자기가 모시는 영적인 존재가 상대방 영혼에 새겨진 정보를 읽어서 알려준다. 무의식에 정보가 내장돼 있으니 그걸 읽는다면 예측이 가능하다. 영매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점을 치는게 간단치가 않다. 영적인 존재가 모든 정보를 다 알려주는게 아니라, 한두개 정도만 알려주는 경우가 많아서 그걸로 해석을 해야한다는 것이다.”

-신체 장애도 카르마 때문인가.

“세상에 카르마가 아닌 건 없다. 그러나 그게 전생의 죄 때문이 아닐 수 있다. 이 생에도 좀 더 압축적으로 영적 성장을 하기위해 일부러 고난의 조건을 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카르마법칙의 또 하나의 한계로 지적되는 것은 너무 업을 개별화한 것이다. 한국전쟁이 나면 개인의 죄가 없어도 난리의 고통을 당하고, ‘코로나’가 창궐하면 개인이 자연을 파괴하지않았어도 고통을 당하는것 아닌가.

“코로나나 기후변화에 대한 죄를 짓지않았다고 주장하더라도 책임은 있다. 자신은 죄가 없다고 하는 이들도 반생태적으로 대량 사육하는 닭고기나 돼지고기를 먹어서 반환경적 자연에 일조하는 경우도 많다. 카르마엔 개인의 업도 있지만, 공업도 있다.”

-통상 노승들이 ‘몸 바꿔 다시 와야겠다’라고 열반을 예고하는데, 몸이 옷처럼 바꿔 입는 것이라면 바뀌지않은 진정한 나는 누구며, 진정한 고향은 어디인가.

“‘진정한 나’는 선불교 같은데서 말하는 언어도단의 경지이므로 내가 말할 처지가 아니다. 하지만 통상 우리는 지상에 너무 익숙해서 이것만이 존재한다고 믿는데, 이건 잘못된 생각이다. 이번 생은 잠시 다녀가는 여행일 뿐이다.”

-지구학교를 졸업하면 어디로 가서 무엇을 하는가

“원래 왔던 곳으로 돌아가게 된다. 대부분이 카르마에 따라 생사의 윤회를 계속하게 된다.”

-영혼에 담긴 정보, 즉 전생을 알기 위해, 즉 자신의 카르마를 읽기 위해서 ‘소울 스캐닝’이 필요하다고 했는데, ‘소울 스캐닝’은 어떻게 하는가.

“역행최면을 통해 전생을 탐구하거나 무당이나 영매를 통해 알아가는 방법도 있지만, 좀 더 쉽게 스스로 자신을 탐구해서 알아가는 방법도 있다. 영혼, 즉 무의식에 기록돼 있는 숨어있는 정보를 알기 위해서, 즉 자신의 카르마를 알기위해, 내가 가장 좋아하는 사람은 누구인지. 내가 가장 싫어하는 사람은 누구인지, 내 삶에서 가장 결정적인 사건은 무엇인지 등을 찾아가면 알아갈 수 있다.”

-죽음관련 시리즈 첫 책이 <죽음학 강의>였는데, 죽음이란 무엇인가.

“죽는다는 말보다는 ‘몸을 벗는다’는 표현이 더 적절하다. 지상에 살려면 육체라는 옷이 필요했고, 물에 들어갔다 나올 때 잠수복을 벗듯이 지상의 옷을 벗을 뿐 영혼 자체가 없어지는게 아니다. 육신으로부터 자유로워져 영체로서의 삶을 새롭게 시작하는 것이다.”

-어떻게 해야 평화롭게 죽음을 맞이할 수 있을까.

“좋은 마음씨로 잘 살면 된다. 수많은 임종환자를 보낸 의사의 말이 임종한 사람의 얼굴을 보면 그가 어떻게 살았는지 알수 있다고 했다. 잘 살아온 분들은 임종 수간 얼굴에 마치 보톡스 주사를 맞은 것처럼 오히려 주름이 펴진다고 한다.”

-죽음을 앞둔 노인들이 누군가 잡으러 왔다며 무섭다고 하기도 하는데, 책에서 저승사자같은 존재는 없다고 했는데.

“한국사람들은 얼굴에 분칠한 저승사자가 나타나 마치 강제 구인하는 것같은 두려움으로 죽음을 생각하는데, 실은 저승사자가 아닌 안내자가 온다. 당황하지 않고 다음 생으로 잘 갈 수 있도록 안내하기 위해 가족을 비롯한 가까운 인연들이 찾아오거나, 고급영들이 오는 것이다. 하지만 이번 생에 나쁜 일을 많이 하고 못된 짓을 많이 하면 그런 상냥한 안내자가 아닌 나쁜 영들이 올수 있을 것이다.”

-지금은 물질과학이 지배하는 세상이어서 영혼이나 사후세계에 대해 터무니없이 생각하는 이들이 많다. 그런 이야기는 모두 인간이 만들어낸 환상이거나 사후체험은 뇌가 일으킨 반응일 뿐이라는 주장에 대해 어찌 보나.

“전도된 세계관이다. 마르크스의 유물론을 원용해 물질과 육신으로만 환원한 사고인데, 실은 영혼이 먼저 있고, 육신이 나중에 생긴 것이다. 우리가 전부라고 믿는 육신은 텔레비전으로 치면 수상기다. 프로그램을 수용하는 매개체일 뿐이다. 수상기가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만드는 것은 아니다. 수상기가 망가지면 버리고, 다른 수상기를 통해 프로그램을 수신해 텔레비전을 볼 수 있다. 육신과 영혼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스위스출신의 미국 정신과 의사 퀴블러로스박사도 허무맹랑하다는 비판을 받았지만, ‘그들도 죽으면 알게 될 것이다’고 자신있게 말했다. 사후생을 믿어서 손해 볼게 없다. 없다면 후회할 일도 없다. 그러마 만약 아무런 준비도 안했는데, 사후생이 있다면 어떻겠는가.”

-사람이 죽으면 주검은 냉동실에 넣고, 이후 대부분 화장을 해버리는데, 육체와 영혼의 관계는 무엇인가.

“육체는 물질이고, 영혼은 의식이 들어있는 에너지체다. 영혼은 전생으로부터 수많은 정보가 들어가 있는 의식체다.”

-가족들이 사망하면 그립다. 그런데도 왜 영혼을 만날 수 없는가.

“사후세계를 부정하는 논거중 하나가 그것이다. 그러나 근사체험자들에 따르면 영혼의 세계와 물질(육신)의 세계는 파동이 다르다고 한다. 지상의 느린 파동과 비교할 수 없이 영계의 파동은 빠르다고 한다. 따라서 영계의 존재가 지상의 인간과 교신하려면 자기 파동을 엄청나게 늦춰야하는데, 만볼트를 천볼트의 변압기로 수용해야하는 것처럼 쉬지않다고 한다.”

-간혹은 영혼들이 우리에게 소식을 전할 수 있다는데요. 어떻게 전하고, 이를 어떻게 알 수 있나.

“월가의 증권맨에서 사후 연구자로 탈바꿈했던 빌 구겐하임의 책 <사후통신>에선 영혼들이 소식을 전하는 12가지 방법이 나와있다. 많은 경우 꿈이나 냄새, 촉감 등으로도 나타난다고 한다. 또 서울대 의대교수인 지인의 경우 미국에 교환교수로 갔을 때 자기가 돌봐주던 환자가 찾아왔다가 대화도 하고 돌아갔는데, 후에 한국에 와서 확인해보니 그 시간에 그 환자가 사망한 시각이었다고 한다.”

-예수의 부활도 육체의 부활이 아닌, 영체로 볼 수 있나.

“부활했다면 영체 부활이지 육신의 부활은 아니다. 기독교 교리에선 육신 부활이라고 했지만, 돌아가신 다음 제자들이 모여있는 장소에 갑자기 나타났다는 것으로 봐서 영체 부활로 볼수 있다.”

-근사체험자 가운데 10% 정도만이 빛을 체험한다고 하는데, 그들이 본 빛은 무엇인가.

“빛이라기보다는 빛의 존재를 체험한 것이다. 지상이 칙칙한 색깔의 세계라면 영계는 빛나는 세계다. 빛이 물질화하면 색깔이 된다. 근사체험자들 영계의 아름다움은 인간의 언어로 표현할 수 없다고 한다.”

-천당과 지옥은 있다고 보나.

“종교에서 말하는 천당과 지옥은 없다. 예수를 믿어야 천당 간다고 하는데, 천당이나 무간지옥 같은 것도 없다. 사후의 세계는 물질이 아닌 파동의 세계여서 같은 파동의 영끼리 유유상종한다고 한다. 내가 수준이 높으면 파동이 빠른 영계에서 고급영들과 함께 지내지만, 내가 탐욕스럽고 폭력적이라면 사후에도 그런 영들이 사는 세계에서 아귀다툼을 벌이게 된다. 영계에선 유유상종해서 급이 다른 영들끼리 소통이 쉽지않기에, 영적인 진급은 지상이 훨씬 수월하다고 한다.”

-한국 개신교 근본주의는 예수 믿어야 천당가고 믿지않으면 지옥간다는 주장을 펴지않은가.

“미국에서 근사체험 연구가 처음 시작되었을 때 드디어 사후의 삶이 있다는 것을 대중들이 믿을 근거가 생겼다면서 기독교계가 대환영을 했다. 그러나 근사체험자들이 막상 사후에 가보니, 지상에서 교회에 나갔느냐, 예수를 믿었느냐를 아무도 묻지않았다고 증언하자 기독교가 돌아섰다.”

-카르마 법칙에 따라 잘못된 행동을 하면 현생에 벌을 받는다는데, 어떤 행동을 하면 어떤 과보를 받는가.

“일률적으로 말하기는 어렵다. 살인을 하면 살인을 당하는 직접적인 되갚음도 있지만 살인자라도 크게 참회하고, 봉사를 한다면 과보가 달라질 수 있다. 또 전생에 남을 창피를 준 사람은 얼굴에 흉터가 생기고, 전생에 남을 속상하게 하면 현생에 가슴앓이를 하고, 전생에 빈자를 멸시하면 노숙자가 된다고도 한다.”

-우리가 세상에 태어난 것을 기뻐하며 파티를 벌이는 것을 죄수의 잔치에 비유한 까닭은.

“삶은 빡세고 고되다. 그런 삶을 축하하는 것은 죄수가 감옥에 들어온지 1년이 됐다며 파티를 하는 것과 같다. 내생을 믿는다면 오히려 고난의 몸을 벗고 자유를 얻은 죽음을 축하하게 될지 모른다.”

-임종이 가까운 부모나 가족을 잘 보내는 방법은.

“첫번째는 마음을 편하게 해드려야한다. 임종 직전 두가지 고통이 있다. 육체적인 고통과 함께 혼자 떠날 수 밖에 없다는 정신적인 고통이다. 육체적인 고통은 의사가 최대한 해결해줘야한다. 정신적인 고통은 가족들이 계속 옆에서 ‘우리는 아버지 어머니와 같이 한다’는 것을 잊지않도록 쓰다듬으며 사랑한다고 하고, 돌아가신 다음에도 추모하고 기억할 것임을 주지시켜 외롭지않게 해드릴 필요가 있다. 호스피스들의 말에 따르면 종교 여부와 상관없이 사후세계를 믿지않는 이들보다 사후세계를 믿는 이들이 훨씬 더 편하게 삶을 마무리한다고 한다.”

-말기 환자에 대해서도 불효가 될까봐 연명 치료를 계속하는 경우가 많은데.

“치료가 환자에게 도움이 된다면 모르지만, 그런 연명치료가 더욱 고통스럽게 할 수 있다. 또한 한사람이 평생 쓰는 의료비 중 절반을 죽기 전 한달 동안 받는 치료에 쓰고, 특히 죽기 전 3일 동안 의료비 중 25퍼센트를 쓴다는 통계가 있다.”

-말기 질환 상태에 들어가면 반드시 해야할 일은 무엇인가.

“유언장과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작성해야한다. 통장은 물질을 남기지만 유언장은 마음을 남긴다고 한다. 만약 유산의 분배를 분명히 하는 유언장을 남기지않으면 주검이 침상에서 벗어나기 전부터 자식들이 싸울 수 있다.”

-말기환자들은 육체적으로 통증으로 고통을 겪을 때 어떻게 해야하나.

“몰핀을 최대한 투여해 통증의 고통을 해소해줘야한다. 우리나라의 경우 마약관리대장 기입의 부담 때문에 의사들이 소극적인 경우도 많은데, 먼저 고통스런 환자의 입장에서 생각해 통증을 줄여줘야 한다.”

-말기환자 방문자들이 주의해야할 것은

“환자에게 스트레스를 주지않아야한다. 마지막엔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방문자들이 ‘내가 누군지 아세요’라고 묻는데, 당사자는 한두번도 아니고, 짜증이 배가될 수 있다. 따라서 환자의 상태가 좋지않을 때는 ‘저 누구입니다’라고 먼저 소개하고 인사를 드려야 한다.”

-임종 순간 주의해야할 점은

“환자가 허공을 보며 ‘누가 왔다’고 하면, ‘오긴 누가 왔다’고 그러냐며 구박을 하지말고 ‘그러시냐’고 호응해주면 된다. 숨이 끊어진 뒤 흔들거나 통곡하지 말아야 한다. 내생으로 가는 여행을 방해하는 일을 일체 삼가야 한다. ‘저 위에 환한 빛이 보이시지요. 그 빛을 따라가세요’ 정도가 좋고, 근사체험자들은 기도도 좋지않다고 한다. 특히 의사와 간호사를 불러 심폐소생술 등을 하는 것을 삼가할 필요가 있다. 말기환자의 경우 심폐소생술로 경우 20~30분 생명을 연장하기 위해 가슴뼈가 부서지고, 더욱 고통을 가중시키는 경우가 많다는 점을 유의해야한다. 무엇보다 임종학 강의를 받고 준비할 필요가 있고, 장례는 직접 하기보다는 믿을만한 상조회사에 맡기는 게 가장 현명하다.”

조현 종교전문기자 cho@hani.co.kr

환생은 환상이 아니에요, 죽음 뒤에도 패자부활전 있죠”

등록 :2021-09-11 15:44수정 :2021-09-12 10:52

죽음학 정현채 명예교수

(이미지-01)

출처 : 언스플래시

죽음 뒤 무엇이 있는지, 14년째 죽음학 연구·강의한 내과의사

“윤회는 교리 아니고 서구 연구에 근거 둔 것, 이젠 윤회 믿어”

“공수래공수거는 절반만 정답…이 생의 것, 다음 생에 다시 와”

당신은 언제 그 생각을 해야 할지, 지금 하는 게 나을지 잘 모른다. 아주 당황스럽고, 공포스럽고, 이상하고, 압도적이고, 놀라울 만큼 중요한 것. 악몽처럼 회의적인 것. 이 모든 것의 가장 나쁜 혼합. 바로 죽음에 대해서다.

유물론과 실증적 접근, 환원주의의 세상에 정현채 서울대 의대 명예교수는 우리가 배운 바 없는 죽음 이면을 들춘다. 죽음이 끝인지, 죽음 뒤에 무엇이 있는지, 어떻게 죽음을 맞아야 하는지.

정현채 교수가 2007년부터 시작한 죽음학 강의는 주류의 사상도 아닌데 벌써 605회를 넘겼다. 그가 피자 조각처럼 입에 쏙 들어가는 크기로 잘라 넣어주는 이야기는 죽음이란, 인생을 잔인하게 쥐어짠 요약에 불과하다는 마음을 차분히 비틀고 있었다.

죽음학의 마스터, 헬리코박터 파일로리 연구의 권위자, <우리는 왜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 없는가>의 저자. 때로 혹세무민하는 ‘요승’이라는 유머 악플의 대상. 그는 죽음의 황금빛 실마리를 쥐고 있을까? 아니면 목적에 활용할 수 있다면 기꺼이 확증편향 편에 서는 위선자일까?

제주 중산간, 해발고도 230m, 해안에서 15㎞ 거리의 조천읍에서 그를 만났다. 나무들이 보초병처럼 에워싼 뾰족지붕 집은 근대건축처럼 검박해 보였다.

“나무를 130그루 심었어요. 묘목도 50그루 심었어요 퇴직 때 받은 금반지까지 홀라당 팔아 나무를 샀는데, 큰 나무를 심은 것은 제 삶의 종착역이 얼마 안 남았을지 몰라서. 작은 나무 묘목은, 크는 거 보려면 한참 시간이 걸리니까요.”

(이미지-02)

정현채 교수는 2007년 죽음학 강의를 시작해 605회를 넘겼다. 그는 “환생은 환상이 아니고, 죽음 뒤에도 패자부활전이 있다”고 설명했다. 제주/이정용 선임기자 lee312@hani.co.kr

기독교 국가에서 환생 더 연구

이름난 소화기 내과 의사의 면류관을 벗고 연고 없는 제주에 내려온 지 5년째. 아내가 죽기 전 나무 집을 짓고 싶어 한데다, 암 수술 받은 대학 동창이 작파하고 내려와 구좌읍에 게스트하우스를 연 것을 보고 마음을 굳혔다.

“의사는 40년간 일했으니까 그때가 그립지는 않아요. 이제 할 만치 다 했다, 이런 생각이 들어요.”

늦여름의 비가 뽀얗게 뿌리는 오후, 실내에는 복숭아나무와 녹나무 냄새가 어른거렸다.

“죽음학 강의 초반에는 보이지 않는 영적인 현상, 근사 체험(사망 선고를 받은 사람이 체외 이탈을 해서 공중에 뜬 채 자기 육신을 바라보다 터널을 통과해 빛의 존재를 만나 전 생애를 회고한다는)이나 삶의 종말 체험을 다루는 게 겁나기도 했고, 윤회는 긴가민가하는 정도였는데 이젠 전혀 아니죠. 제가 얘기하는 윤회는 어떤 교리가 아니고, 실제 서구의 연구에 근거를 둔 거죠. 미국 버지니아대학의 인지과학연구소에 제일 자료가 많아요. 그걸 이끌었던 이언 스티븐슨은 2007년인가 돌아가셨는데, 전생을 기억하는 아이들을 조사했어요. 통역관 데리고 범죄 사건 수사하듯 모은 케이스가 2400건 정도 돼요. 환생 개념은 인도나 미얀마가 일반적인데 제임스 라이닝어(전생을 기억하는 아이들 중 가장 잘 알려졌다) 사례처럼 기독교 국가라는 미국, 영국에서 점점 많아졌죠. 요새는 3000케이스 이상 될 거예요.” 이언 스티븐슨은 아이의 전생 기억 무대인 마을과 부모를 찾아 면밀하게 교차 검증한 끝에 그 자신도 환생을 확신하게 되었다.

“전생 기억은 대부분 사라지죠. 일부 성인이 되면서 기억이 되살아나기도 해요. <예스터데이 칠드런>(Yesterday’s Children)은 실화를 바탕으로 만든 영화인데, 1953년생 여자 주인공이 어릴 때 가본 적 없는 아일랜드 거리하고 교회, 가족을 그렸어요. 다 잊었다가 아들이 고등학생이 될 무렵 기억이 생생하게 되살아나 생활이 불가능할 정도였대요. 친정어머니의 권유로 아일랜드에 가서 성당 세례자 명단도 들여다보고, 천신만고 끝에 자기가 1932년에 애들 다섯을 두고 세상을 떠난 메리 서턴이었다는 걸 알게 돼요. 21년 만에 다시 태어난 거죠. 놀랍게도 그사이 노인이 된 자녀 다섯을 만나요. 인터넷에 사진 다 나옵니다. 재회 장면도 나오고.”

그의 이야기가 주는 직선적인 흥미로움. 그러나 이성은 낯선 데이터로부터 결론을 이끌어내도록 발달하지 않았다. 그 말이 사실이라고 해도 21년 만의 환생이라니, 어쩐지 주기가 짧게 느껴진다. 600년 뒤쯤이라면 모를까.

“모르죠, 왜 그런지는. 헬렌 웜백이라는 집단 최면 심리학자가 700명 넘는 사람들 통계를 내봤는데 환생 주기가 짧게는 4개월, 길게는 200년, 평균 50년이라는 계산이 나왔다는 거죠.”

(이미지-03)

정현채 명예교수가 인간의 자존감과 발전을 상징하는 애벌레 인형을 보여주고 있다. 제주/이정용 선임기자 lee312@hani.co.kr

전생의 트라우마 앓는 사람들

윤회란 교화 목적으로 발명된 불교식 방편 같은데, 가려진 비밀이 공식적인 지식처럼 발음되는 순간의 어색한 감각, 어떤 전지적인 상태가 주는 불안함. 혹시 잠복된 기억이 문득 촉발되는 건 아닐까? 데자뷔의 오해? 또는 뒤틀린 거짓에 속박된 환영? 그런데 그의 근거는 방대한 자료와 각기 다른 경험들이 갖는 일관성이었다. 허구란 수집할 수 없는 데이터로 하는 실험이니까. 하긴 성경도 다수의 증언을 혼합한 뒤 부동의 필독서가 되었다.

“왜 아이들 중 일부만 기억하는지는 알 수 없어요. 심장이 멎었다 살아난 사람의 15퍼센트 정도만 근사 체험을 하는데 왜 누구는 하고 누구는 못 하는지. 그런데 꿈이 대답이 되지 않을까. 어떤 날은 꿈이 하나도 생각 안 나고 어떤 날은 전부 생생하게 생각나는 것에 비유한다면 어떨까.”

꿈은 달구어진 주전자에서 또르르 흘러내리는 물방울 같은 것. 응고시키지 않으면 그대로 수증기로 변해버릴 것이다. 그는 이어 의학적으로 설명되지 않는 문제가 어떻게 전생과 결부되는지에 대해 말해주었다.

“어떤 사람이 옆구리가 너무 아픈데 병원에선 아무 이상이 없다고 해서 최면으로 전생을 봤더니 1차대전 때 창에 찔려 죽은 프랑스 병사였다거나, 두통 때문에 병원에서 엠아르아이(MRI), 시티(CT) 찍어도 아무것도 안 나오는데 전생에서 1800년대 호텔에서 권총 자살을 했던 미국 검사라거나 하는 사례가 있어요. 그걸 아는 순간 통증이 해결된다는 거죠.”

지금의 상흔이 전생의 트라우마로부터 비롯되었거나 카르마 이론이 그렇게 또렷한 인과관계로 드러나는 거라면, 프로이트야말로 완전히 헛짚은 것 아닌가?

모든 사람과 모든 짐승, 심지어 풍경까지 죽는다. 그러나 주변을 보면 언젠가 자기 차례가 오리란 걸 알면서도 다들 자기만은 안 죽을 것 같은 얼굴들뿐. 그러나 지금 살아 있다는 것 또한 정말로 죽는다는 의미 아닌가. 죽음의 실질적인 공포는 모든 기억이 소멸된다는 데 있을 것이다. 몸이 나인 줄 알았던 동일시와 비동일시, 그 틈새를 잇던 의식이 비워지고, 자국 하나 없는 어둠 속에 영원히 갇히는 절대 공(空)의 상태.

“육신이 보고 들었던 체험과 기억, 그걸 받쳐주던 모든 게 일시에 사라진다는 생각이 제일 두려운 거죠. 사형선고 받은 소크라테스가 그런 얘기를 했어요. 죽음이라는 미지의 세계로 간다는 흥분으로 가슴이 떨린다고. 친구들이 국외 탈출을 권유했지만 거부하고 독배를 마시죠.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에, 어떤 파도가 이제 곧 없어져서 슬프다고 하니까 옆에 있는 파도가 그게 아니고 이제 바다가 되는 거란다, 하면서 위로하는 장면이 있어요. 즉, 우리가 죽어도 그 특성과 개성이 유지된다고 보는 거죠.”

죽은 뒤에도 모든 정보가 사라지지 않는다고? 그 정보는 우주 어디에 저장될까? 기억이 남는다 해도 그게 나일 수 있을까? 그래서 우주가 홀로그램이라는 학설이 나온 걸까?

“엘리자베스 퀴블러로스(임종 연구 개척자) 박사의 강연에서 나온 얘기인데, 어떤 남자가 미국 독립기념일에 가족을 기다리는데 가족들이 타고 오던 차가 유조차하고 부딪혀서 다 죽은 거예요. 이 남자는 삶의 밑바닥에서 술과 마약을 하다가 고속도로에 뛰어들어 트럭과 부딪히는 순간 근사 체험을 했는데, 가족들이 우린 여기서 잘 지내고 있으니까 너는 끝까지 살아야 한다고 얘기했다는 거죠. 영적인 차원으로는 자살한 영혼조차 어서 치유하고 다시 건강하게 태어나라는 영적인 체계가 존재해요. 교회에서는 그렇게 얘기 안 하죠. 영원한 지옥불에 빠진다니까. 저는 자살자 유가족한테 패자부활전이 있다는 걸 많이 강조했어요. 죽음 뒤에도 패자부활전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안심되는 정보겠어요?”

‘영원불멸’ 수용한 과학자들

그의 강의에는 근사 체험이 빠지지 않는다. 근사 체험을 한 사람들의 특이성은 공통적으로 타인을 배려하는 삶을 산다는 것인데, 강의나 책을 통한 간접 경험만으로도 그들을 닮아간다는 이유였다. “근사 체험은 사랑과 친절을 퍼뜨리는 바이러스 같다는 거죠.”

우리가 삶의 끝까지 놓고 싶지 않은 것은 정말이지 내세의 희망과 사랑의 영원성일까? 긴박한 듯 부드럽게 흐르는 연유(煉乳) 같은 어조, 변화 없는 표정이 감춘 장난기, 일본 미중년 풍의 고딕적인 얼굴, 그리고 휘파람 부는 소년 같은 허심탄회함. 그건 필시 개연성 95퍼센트가 넘지 않으면 사실로 받아들이지 않는 과학의 언어였다.

“2014년 2월에 300명 넘는 과학자들이 미국 애리조나 투손에 모여 18개 조항을 선언했어요. 과학은 어떤 도그마가 아니고 관찰되는 현상을 포용하고 새 이론을 만드는 거니까 물질 집착에서 벗어나자는 거죠. 1년 반 뒤 같은 장소에서 의식의 비국지성, 의식은 뇌라는 특정한 장소에 국한되지 않고 육체가 죽은 후에도 존속된다고 발표했어요. 우리가 죽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고, 말기 환자가 임종을 평화롭게 맞는 데 적용하자는 획기적인 목적이었죠. 인상 깊었던 건 ‘영원불멸의 의식’이나 ‘사랑하는 가족이 죽음 뒤에 가게 될 여행’이라는 말이었어요. 의학은 근거 중심 분야이고, ‘영원불멸’이나 ‘여행’은 과학에선 안 쓰는 말이거든요.”

사춘기 때 그의 별명은 벙어리였다. 말이 없고 노는 것엔 젬병인 채 공부만 파던 고등학생 땐 스스로 하잘것없는 존재라는 자의식 때문에 한강에도 갔었다. 그때의 자살 충동은 지금 그의 죽음학에 긴요한 목차가 되었다. 서울대 문리대에 의대가 있던 동숭동 시절 내내 ‘박정희 물러가라’, ‘유신 철폐하라’는 함성이 소용돌이쳤다.

“인턴으로 소아과를 돌 때 열네살 소년이 고열로 입원해 있었는데 몇달이 지나도 병명이 안 나오다가 마침내 골수 검사에서 혈액암 진단이 나왔어요. 그리고 한달 반 뒤쯤 결국 임종을 맞았죠. 걔가 세상을 떠나는 순간 울음이 복받쳐 올라와서 굉장히 많이 울었어요. 하도 우니까 오히려 걔 누나가 저를 위로해주던 기억이 나요.”

두려움과 연민은 그가 처음 본 죽음의 얼굴이었을까. 이윽고 저명한 소화기 내과 전문의의 치세를 누리는 동안 그는 크고 작은 수술을 네차례 받았다. 2018년, 퇴임 2년을 앞두고는 네번째로 방광암 수술을 받았다.

“아버지는 쉰둘에 급성 심근경색으로 돌아가셨어요. 어머니는 24년 뒤 뉴질랜드 관광을 갔다가 대동맥 박리라는 급성 심장 질환으로 돌아가셨어요. 두 분이 똑같이 11월달에 가슴 통증 나타난 지 사흘 만에 돌아가셨죠. 형님 한 분도 몇년 전 대동맥 박리로 응급 수술을 받아서 저도 틀림없이 심장 질환으로 갈 줄 알았는데 떡 하니 방광암 진단을 받아서 의외다 생각했죠. 암 진단 받으면 대부분 그래요. 하필이면 내가? 그런데 이게 내가 태어나기 전에 계획한 거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어떤 철학자는 사람이 그냥 세상에 던져졌다고 하지만 죽음 공부를 하면 우리가 부모의 유전자 조합으로 그냥 태어난 게 아니고, 그 전에 어떤 부모 밑에서 자랄지 자기가 결정했다는 걸 알게 돼요. 힘든 삶을 기획하는 건 성장을 가속화시키기 위해서라는 거죠.”

(이미지-04)

미리 준비된 정현채 교수 부부의 수의가 서랍에 가지런히 놓여 있다. 제주/이정용 선임기자 lee312@hani.co.kr

죽은 이 살리는 기술은 성공 못할 것

자유의지와 결정론 사이에는 무엇이 있을까. 그는 배뇨 장애 탓에 세시간 반마다 한번씩, 매일 밤 두번 깬다고 했다. 잘못하면 젖으니까. 방광이 없어서 방광에 탈이 안 생길 거란 얘기는 자구책의 위트.

시대는 마음을 거슬러 슈퍼 휴먼이 가까이 다가왔다. 유전자 공학, 전자 이식, 신약으로 노화가 사라질 거라는 관측, 기억을 칩에 이식해 전자 마을에서 영생하리라는 의지가 작열한다. 냉동 시신은 죽음이란 기술적으로 해결될 수 있는 어떤 상태에 불과하다는 은유 같다.

“지금 러시아, 미국의 냉동 질소통에 들어간 시신이 몇백 구죠. 언젠가 의학이 발달해서 병 고칠 수 있는 시대가 되면 해동을 해 다시 살겠다는 건데, 죽은 사람을 냉동했다가 살리는 기술은, 아마 안 될 걸로 봅니다. 바람직하지도 않고요.”

인터뷰의 막간, 그는 이층 서재에서 서랍장 위칸을 열었다. 색채 없는 빛의 수의 두벌이 수평으로 가지런했다. 아래칸 서랍에는 우연히 둔 여행 가방. 그렇게 먼 곳으로 여행을 떠나는 죽음의 한 세트가 완성되었다.

“동대문시장 수의 하는 조그만 가게에서 면으로 지었어요. 평상복으로 하려다가 화학 섬유도 많고 플라스틱 단추가 타면 다이옥신이 나오니까. 마음이 심란할 때 수의를 들여다보면 많이 안정돼요. 4년 전엔 빛을 받아 광선 에너지로 저장했다가 동력 에너지로 바꾸는 시계를 샀어요. 수명이 12년에서 15년이라는데, 좀 낮게 보면 앞으로 8년쯤 남았구나. 내 삶의 종착역이 이 정도 남았구나, 그 생각이 위안이 돼요.”

그는 올해 예순여섯살. 일흔 중반까지 사는 게 적당하다지만, 우주 나이 138억년에 비하면 그야말로 우주의 어린이 아닌가.

“스콧 펙이라는 미국 정신과 의사에게 청중이 물었어요. 우리에게 무슨 은총이 있을까? 그의 대답은, 죽을 수 있다는 게 은총이다. 이런 쓰레기 같은 세상을 3, 400년 살아야 한다면 있는 돈 다 털어 죽는 쪽에 투자하겠다. 놀이터에서 실컷 놀았으면 저녁 해 기울기 전에 나가야지, 계속 죽치고 있으면 다음 사람이 못 들어와요. 후손들이 못 태어나는 것과 같죠. 보통 공수래공수거라고 하지만 반밖에 안 맞는 게, 아이가 태어날 땐 빈손이 아니라 전생에서 쌓았던 것들을 이번 생에 갖고 와요. 갈 때도, 살면서 행한 타인에 대한 배려나 사랑, 쌓았던 수양, 다 갖고 가죠.”

(이미지-05)

정현채 교수는 인생에 대해 “공수래 공수거란 말은 절반만 정답”이라고 했다. “이 생의 것을 다음 생에 다시 갖고 오기 때문”이라고 그는 설명했다. 제주/이정용 선임기자 lee312@hani.co.kr

성공은 세상을 더 좋게 만들고 떠나는 것

유리창 밖으로 멀구슬나무가 비에 젖어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오후와 저녁 사이의 어디쯤, 그는 캘리포니아 가이저피크 와인을 꺼냈다. 제일 좋아한다는 카베르네 소비뇽. 조금 뒤, 다시 보르도 마르고의 지스쿠르를 따랐다. 몇분 뒤, 아꼈던 2008년 나파 세인트헬레나의 에머스를 땄다. 그는 정말로 전생에 루마니아에서 와인을 빚던 수도사였을까. 아니면 마을을 술독에 빠뜨릴 작정인 사악한 화학자였을까?

“제주 생활은 좋은데 와인 애호가가 별로 없어요. 앞집에 있는 분은 담배만 피워요. 저쪽 집에 있는 분은 막걸리만 마시고.” 그러고는 마지막으로 작년에 황매실로 담근 매실주를 꺼냈다.

“후배 교수가 제가 암 진단 받았다는 소식 듣고 알코올이 방광암 발병에 영향을 주는지 전세계 논문을 다 뒤졌는데 관련 논문을 하나도 발견하지 못했다고 했어요.”

그의 위트가 불그스름해졌다. 같이 취하니 비밀스러운 동료애가 생겼다. 아무것도 추가할 수 없는 닫힌 전체로서.

“카잔차키스가 그랬죠.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렵지 않다. 나는 자유다.’ 저도 자주 읊어봐요. 요새 카잔차키스 심정하고 비슷해서.”

서울로 돌아오는데 배를 젓듯이 나아갔다 오는 것 같았다. 가끔 그가 나무 캐비닛에 인두로 새긴 랠프 월도 에머슨의 말을 떠올렸다. ‘진정한 성공이란 자기가 태어난 세상을 조금이라도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어놓고 떠나는 것.’

어느 날 그는 곶자왈에서 찍은 사진 몇장을 보내주었다. 카메라는 제자가 퇴임 선물로 준 라이카 Q. 나뭇잎과 풀과 버섯 위로 오린 듯 동그란 햇빛이 비치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빛의 입자들이 죽음의 두께를 뚫고 들어가 기억의 양지 속에서 한데 엉키고 있었다. 아니 광휘로 춤추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