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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독립선언서와 항일투쟁

아지빠 2019. 2. 11. 18:55




쉽고 바르게 읽는 3·1독립선언서


우리는 오늘 조선이 독립한 나라이며, 조선인이 이 나라의 주인임을 선언한다. 우리는 이를 세계 모든 나라에 알려 인류가 모두 평등하다는 큰 뜻을 분명히 하고, 우리 후손이 민족 스스로 살아갈 정당한 권리를 영원히 누리게 할 것이다.

이 선언은 오천 년 동안 이어 온 우리 역사의 힘으로 하는 것이며, 이천만 민중의 정성을 모은 것이다. 우리 민족이 영원히 자유롭게 발전하려는 것이며, 인류가 양심에 따라 만들어가는 세계 변화의 큰 흐름에 발맞추려는 것이다. 이것은 하늘의 뜻이고 시대의 흐름이며, 전 인류가 함께 살아갈 정당한 권리에서 나온 것이다. 이 세상 어떤 것도 우리 독립을 가로막지 못한다.

낡은 시대의 유물인 침략주의와 강권주의에 희생되어, 우리 민족이 수 천 년 역사상 처음으로 다른 민족에게 억눌리는 고통을 받은 지 십년이 지났다. 그동안 우리 스스로 살아갈 권리를 빼앗긴 고통은 헤아릴 수 없으며, 정신을 발달시킬 기회가 가로막힌 아픔이 얼마인가. 민족의 존엄함에 상처 받은 아픔 또한 얼마이며, 새로운 기술과 독창성으로 세계 문화에 기여할 기회를 잃은 것이 얼마인가.

아, 그동안 쌓인 억울함을 떨쳐 내고 지금의 고통을 벗어던지려면, 앞으로 닥쳐올 위협을 없애 버리고 억눌린 민족의 양심과 사라진 국가 정의를 다시 일으키려면, 사람들이 저마다 인격을 발달시키고 우리 가여운 자녀에게 고통스러운 유산 대신 완전한 행복을 주려면, 우리에게 가장 급한 일은 민족의 독립을 확실하게 하는 것이다.

오늘, 우리 이천만 조선인은 저마다 가슴에 칼을 품었다. 모든 인류와 시대의 양심은 정의의 군대와 인도의 방패가 되어 우리를 지켜 주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나아가 싸우면 어떤 강한 적도 꺾을 수 있고, 설령 물러난다 해도 이루려 한다면 어떤 뜻도 펼칠 수 있다.

우리는 일본이 1876년 강화도조약 뒤에 갖가지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고 해서 일본을 믿을 수 없다고 비난하는 게 아니다. 일본의 학자와 정치가들이 우리 땅을 빼앗고 우리 문화 민족을 야만인 대하듯 하며 우리의 오랜 사회와 민족의 훌륭한 심성을 무시한다고 해서, 일본의 의리 없음을 탓하지 않겠다.

스스로를 채찍질하기에도 바쁜 우리에게는 남을 원망할 여유가 없다. 우리는 지금의 잘못을 바로잡기에도 급해서, 과거의 잘잘못을 따질 여유도 없다. 지금 우리가 할 일은 우리 자신을 바로 세우는 것이지 남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다. 양심이 시키는 대로 우리의 새로운 운명을 만들어 가는 것이지 결코 오랜 원한과 한순간의 감정으로 샘이 나서 남을 쫓아내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단지, 낡은 생각과 낡은 세력에 사로잡힌 일본 정치인들이 공명심으로 희생시킨 불합리한 현실을 바로잡아, 자연스럽고 올바른 세상으로 되돌리려는 것이다.

처음부터 우리 민족이 바라지 않았던 조선과 일본의 강제 병합이 만든 결과를 보라. 일본이 우리를 억누르고 민족 차별의 불평등과 거짓으로 꾸민 통계 숫자에 따라 서로 이해가 다른 두 민족 사이에 화해할 수 없는 원한이 생겨나고 있다. 과감하게 오랜 잘못을 바로잡고, 진정한 이해와 공감을 바탕으로 사이좋은 새 세상을 여는 것이, 서로 재앙을 피하고 행복해지는 지름길임이 분명하지 않은가!

또한 울분과 원한에 사무친 이천만 조선인을 힘으로 억누르는 것은 동양의 평화를 보장하는 길이 아니다. 이는 동양의 안전과 위기를 판가름하는 중심인 사억만 중국인들이 일본을 더욱 두려워하고 미워하게 하여 결국 동양 전체를 함께 망하는 비극으로 이끌 것이 분명하다. 오늘 우리 조선의 독립은 조선인이 정당한 번영을 이루게 하는 것인 동시에, 일본이 잘못된 길에서 빠져나와 동양에 대한 책임을 다하게 하는 것이다. 또 중국이 일본에게 땅을 빼앗길 것이라는 불안과 두려움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것이며, 세계 평화와 인류 행복의 중요한 부분인 동양 평화를 이룰 발판을 마련하는 것이다. 조선의 독립이 어찌 사소한 감정의 문제인가!

아, 새로운 세상이 눈앞에 펼쳐지는구나. 힘으로 억누르는 시대가 가고, 도의가 이루어지는 시대가 오는구나. 지난 수천 년 갈고 닦으며 길러온 인도적 정신이 이제 새로운 문명의 밝아오는 빛을 인류 역사에 비추기 시작하는구나. 새 봄이 온 세상에 다가와 모든 생명을 다시 살려내는구나. 꽁꽁 언 얼음과 차디찬 눈보라에 숨 막혔던 한 시대가 가고, 부드러운 바람과 따뜻한 볕에 기운이 돋는 새 시대가 오는구나.

온 세상의 도리가 다시 살아나는 지금, 세계 변화의 흐름에 올라탄 우리는 주저하거나 거리낄 것이 없다. 우리는 원래부터 지닌 자유권을 지켜서 풍요로운 삶의 즐거움을 마음껏 누릴 것이다. 원래부터 풍부한 독창성을 발휘하여 봄기운 가득한 세계에 민족의 우수한 문화를 꽃피울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떨쳐 일어나는 것이다. 양심이 나와 함께 있으며 진리가 나와 함께 나아간다. 남녀노소 구별 없이 어둡고 낡은 옛집에서 뛰쳐나와, 세상 모두와 함께 즐겁고 새롭게 되살아날 것이다. 수천 년 전 조상의 영혼이 안에서 우리를 돕고, 온 세계의 기운이 밖에서 우리를 지켜 주니, 시작이 곧 성공이다. 다만, 저 앞의 밝은 빛을 향하여 힘차게 나아갈 뿐이다.

세 가지 약속

하나, 오늘 우리의 독립 선언은 정의, 인도, 생존, 존영을 위한 민족의 요구이니, 오직 자유로운 정신을 드날릴 것이요, 결코 배타적 감정으로 함부로 행동하지 말라.

하나, 마지막 한 사람까지, 마지막 한 순간까지, 민족의 정당한 뜻을 마음껏 드러내라.

하나, 모든 행동은 질서를 존중하여 우리의 주장과 태도를 떳떳하고 정당하게 하라.

조선을 세운 지 4252년 3월 1일

(1919년 3월 1일)

조선 민족 대표

손병희 길선주 이필주 백용성 김완규 김병조 김창준 권동진 권병덕 나용환 나인협 양전백 양한묵 유여대 이갑성 이명룡 이승훈 이종훈 이종일 임예환 박준승 박희도 박동완 신흥식 신석구 오세창 오화영 정춘수 최성모 최린 한용운 홍병기 홍기조


30년 항일무장투쟁 전통으로 창설 … 국내 진입작전, 자주적 독립 쟁취 의지의 표현

대한민국 100년 ⑥ 한국광복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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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용대에서 한국광복군으로 1938년 김원봉에 의해 창설된 조선의용대(1938년 10월 10일 성립 기념 촬영)는 한국광복군의 전신에 해당한다. 초창기 병력 200여 명에서 출발했으며 항일운동사에 많은 공을 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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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년 대한민국임시정부가 한국광복군을 창군(1940년 9월 17일 한국광복군 성립 전례식)하면서 조선의용대는 1942년 5월 18일자로 광복군 제1지대로 편입됐다. 이후 광복군은 3지대로 재편되면서 조직과 전투력이 급격하게 증대됐다

임시정부의 국군으로 창설되다

1919년 4월 11일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중국 상해에서 한국역사상 최초의 민주공화제 정부로 수립됐다. 그 해 9월에는 노령, 한성의 임시정부를 합쳐 새로운 통합 임시정부를 수립하면서 활발한 독립투쟁을 전개했다.

그러나 국내를 연결하는 교통국 및 연통제가 일제에 의해 와해되면서 임시정부는 긴 침체 국면을 맞이해야 했다. 1932년 윤봉길 의사의 홍구공원 의거를 통해 임시정부는 활기를 되찾았지만 오랜 근거지였던 상해를 떠나야 했다. 그 후 중국 대륙을 전전한 끝에 마침내 1940년 국민당정부의 수도인 중경에 도착했다.

중경 시기 임시정부는 전시체제를 정비하고 정상적인 운영을 도모했다. 그 결과 임시정부는 정부(정)·한국독립당(당)·한국광복군(군)의 삼위일체 체제를 확립하게 됐다. 그 과정에서 한국광복군은 임시정부의 국군으로 창설됐다. 1919년 임시정부는 수립 당초부터 일본에 대한 대규모 정규전의 전개를 지상목표로 설정했다.

다만 이러한 목표의 실천은 중국 영토에서 활동하고 있다는 객관적인 이유, 나아가 광범위한 대중적 토대의 결여 등 여러 가지 요인으로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윤봉길 의거 이후 피난 중의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임시정부는 광복군의 창설을 준비하고 추진했는데, 1940년 중경에 안착한 다음에 비로소 광복군이 창설될 수 있었다.

대원을 모으고 훈련시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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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광복군의 사격훈련 모습

총사령부를 먼저 창설한 광복군의 최대 급선무는 병력을 모집하는 일이었다. 광복군 창설을 준비하기 위해 임시정부는 1939년 11월 서안에 군사특파단을 파견해 화북일대에 이주해 온 한인들을 대상으로 선전 및 모집활동을 전개했다. 주된 지역은 산서성의 임분(臨汾) 등지였다.

이와 동시에 모병활동을 추진하기 위한 별도의 기구로 징모분처가 수원성 포두, 강서성 상요(上饒), 안휘성 부양(阜陽)에 각각 설치됐다. 또한 1942년 7월 조선의용대가 광복군 제1지대로 편입된 후 호북성 노하구(老河口)와 절강성 금화(金華)에 각각 구대를 설치, 대원 모집활동을 전개했다. 그 결과 1945년 8월경에는 총사령부와 3개 지대가 편성되기에 이르렀다.

광복군의 활동은 일본군에 소속된 한인 병사와 적후방의 한인 청년을 포섭하는 모집공작, 이들에 대한 교육과 훈련, 적군에 대한 정보수집과 교란활동 등이었다. 특히 중국 내 한인청년들에 대한 모집활동은 성과가 매우 컸다. 1944년 학병으로 중국 전선에 끌려온 한인청년 수십 명이 광복군 진영으로 탈출했고 1945년에는 수백 명의 한인청년이 광복군 대열에 합류했다.

1945년 3월 514명에 불과하던 광복군은 그해 8월 전후 약 1,000명의 병력을 보유하기에 이르렀다. 또 이들의 훈련을 위해 서안에서는 중국군 중앙전시간부훈련단에 한국청년훈련반(한청반)을, 안휘성 임천에서는 한국광복훈련반(한광반)을 설치하고, 모집된 청년들을 군사 초급간부로 양성했다.

인도·버마에서 싸우다

광복군은 인도·버마 전선에까지 활동 범위를 넓혔다. 광복군은 1943년에 들어서면서 연합군, 특히 영국군과 협동해 항일전을 수행했다. 1942년 겨울 인도 주둔 영국군총사령부에서는 민족혁명당 측에 공작인원의 파견을 요청했다. 이때 총서기인 김원봉은 최성오, 주세민 등 2명을 인도에 파견했다. 영국군은 일본군과 전쟁을 수행하면서 일본어를 구사할 수 있는 인원을 필요로 했고, 그 인원을 민족혁명당 측에 요구해 왔다.

그리하여 1943년 5월에는 민족혁명당이 버마전구 영국군 총지휘부와 협정을 체결했다. 그 후 한영 합작은 다시 광복군총사령부로 이관해 추진됐다. 1943년 9월에는 인도 주둔 영국군의 대일전을 지원하기 위해 대장 한지성 등 9명의 광복군 인면전구공작대를 인도에 파견했다.

이들은 8월초부터 중국군사위원회에서 3주간에 걸쳐 현지에 대한 예비지식을 위주로 교육을 받았다. 그 후 현지에 파견된 광복군 공작대는 일본군에 대한 선무공작, 후방지역의 교란, 일군 포로의 심문, 노획한 문서의 번역 등 전쟁 수행을 돕는 임무를 띠고 활동했다. 이들은 일본군과 접전하고 있는 최전선에 투입됐고, 주로 일본군을 향한 대적방송, 적 문서 번역, 전단 제작, 포로 심문 등을 담당했다.

공작대는 실전에도 참여했다. 1944년 초부터 영국군과 일본군이 대접전을 벌였던 임팔(Imphal) 전투와 1945년에 전개된 버마 총반격전에도 참여했다. 이러한 활동은 일본군에게 심리적으로 큰 영향을 주었음은 물론, 영국군이 대일작전을 수행하는 데도 큰 도움을 주었다.

한반도 진입작전을 전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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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광복군 OSS훈련반

광복군의 지상목표는 국내로 진입해 일본군을 상대로 대규모 정규전을 벌여 자주독립을 쟁취하는 것이었다. 1941년 12월 태평양전쟁 발발 후에야 그것을 전망할 수 있게 됐다. 미일전쟁의 발발로 광복군의 대일전 참여가 가시화되면서 임시정부는 미국정부 혹은 주중 미군사령부에 대해 한인의 대일전 참여를 지속적으로 제의했다.

1945년에 접어들면서 미군의 필리핀 점령, 특히 6월 말 오키나와 점령으로 임시정부 요인들은 한반도 상륙작전이 임박했음을 인식하게 됐다. 그리하여 임시정부는 광복군을 태평양지역에서 북상하고 있는 미군에 파견해 한반도 상륙작전이 전개될 경우 이에 협력하고자 시도했다.

특히 김구 주석은 미국정부에 대해 미군이 제주도를 점령하면 그곳에서 모든 한인들을 지도해 대일전에 협조할 것을 제의했다. 이러한 제의는 임시정부 및 광복군이 오랫동안 지향해왔던 독립전쟁을 전개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할 수 있다는 점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1945년 들어 광복군은 미국 전략첩보국(OSS, Office of Strategic Service)과의 합작을 추진했다. 그것은 광복군을 훈련시켜 한반도에 투입하여 정보수집과 게릴라활동을 전개한다는 ‘독수리작전(The Eagle Project)’으로 구체화됐다. 서안의 광복군 제2지대 대원 가운데 50명이 선발돼 제1기생으로 5월 중순부터 특수훈련을 받고 8월 4일 수료했다.

8월 7일 김구와 OSS의 총책임자 도노반 장군에 의해 특수훈련 수료생들을 중심으로 국내진입작전이 추진됐다. 그러나 출발 직전에 일본의 항복소식이 전해지면서 “천신만고로 수년간 애를 써서 참전할 준비를 한 것도 다 허사다”라는 김구의 탄식처럼 광복군은 실전에 투입되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광복군이 미국 OSS와 합작해 한국 내 공동작전을 수행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었다는 것은 앞서 광복군 인면전구공작대가 영국군과 합작한 것과 마찬가지로 해방 직전 광복군이 거둔 귀중한 성과였다. 아울러 한국독립운동의 활동범위와 합작대상국을 확대시키고 질적으로 심화시켰다는 의의가 있다.

광복의 꿈을 위해 분투하다

광복군은 대한제국의 국군과 만주의 독립군을 계승하고, 30여 년에 걸친 항일무장투쟁의 전통을 기반으로 창설되었던 자주독립군이었다. 광복군은 창설 당시 30여 명으로 출발한 이래 열악한 물적·인적 기반과 중국이라는 타국 영토에서 활동해야 한다는 제약 하에서도 광복 전후 약 1,000명이라는 인원을 확보한 무장세력으로 발전했는 점은 특기할 만하다.

국제적으로 광복군은 태평양전쟁에서 연합군의 일원으로 참전해 대일전쟁을 전개함으로써, 전후에 교전단체의 지위를 획득한다는 전략을 추구했다. 광복군이 인도버마전선에 공작대를 파견하여 영국군과 함께 대일작전을 수행한 것이나, 미국의 OSS와 합작하여 공동작전을 추진한 것은 그러한 시도였다.

이와 같이 광복군은 열강이 임시정부를 외면하는 불리한 상황에서도 연합군의 일원으로 대일전에 참전하려고 노력했다. 나아가 국내진입작전을 시도한 것은 그것의 규모나 실현 여부를 떠나 조국의 광복과 민족의 해방을 자주적으로 쟁취하려는 움직임으로 높이 평가해야 할 것이다.

김광재 /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