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륙도 전설 상상의 오륙도모습
오륙도 추정 본래의모습
거미섬이 자리를 비켜 옮긴 오륙도의모습(대붕산에서바라본)
바다에서 바라본 비용개의 모습이 주작과 닮아 있다
오륙도 설화(說話)그리고 구남의삶
1)
오륙도는 백두대간의 황령산 줄기를 따라 우암반도 끝자락 장자산의 장자등 조군돌(작은돌제주방언)동한난류가 흐르는 남쪽해안에 자리하고 있다.
용호동 풍수지리경(風水地理經)에, 용의머리는 수영만을 향하고 앞발은 잘록개와 오륙도를 관장하고, 뒷발은 대붕산이며, 신용산은 용의 자궁자리이다. 그래서 용당에서는 보오지산이라고 한다. 용의꼬리는 수장산(水藏山)이며 용호동의 관문은 수장끝을 지나야한다 .
임진란의 기록에는 용의꼬리라 하여 수미산(水尾山)이라 고쳐 기록하기도 하였다.
앞발과 뒷발사이 비룡산(飛龍山)의 산세가 주작을 닮아있고, 삼신산의 운해가 비용고개를 넘는 곳이다.
주작(朱雀)의 어깨 죽지를 타고 삼신의 운해가 넘어오는 장관이 용이 비상하는 것과 같다하여 비용개(飛龍浦)라하고, 고개를 넘는 운해의 폭포가 백운포(白雲浦) 와 같다.
삼신산(三神山)이 있는 남쪽 바다를 바라보는 주작의 좌우 날개는 창공을 활주할 기세다.
두 날개위로 해무(海霧)가 넘나들며 파도에 부딪히는 몽돌의 몸부림이 신선의 풍악이 되고, 동백꽃의 금가루로 분칠한 동박새가 쮸- 쮸- 찌이 찌이 노래하며, 울창한 동백지에 날아드는 비룡산 우측은 신선의 무릉도원(武陵桃源)인 명산 대붕산(大鵬山)이다.
좌측은 선약(仙藥)이자 불로불사(不老不死) 환단금액(還丹金液)이라는 대약(大藥)이 담긴 수리병이 있는 수리섬과 신에게 바치는 부수(符水)가 석굴에서 떨어지는 굴 섬이 있는 오륙도가 있다.
충(忠충성)효(孝효도)화(和정다움)순(順착함)인(仁어진마음)신(信믿음)의 선행을 쌓은 천선(天仙), 지선(地仙), 시해선(尸解仙), 이들 삼선의 선인(仙人)들이 대붕산 신선대 송림에 모여들어 대약을 얻어 승천할 날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중에는 을지문덕, 연개소문, 고운 최치원, 김유신, 우륵, 의상대사, 원효대사, 강감찬, 매월당 김시습, 북창 정 렴, 토정 이지함, 망우당 곽재우, 청하 권극중 도 있었다. 이름이 생소한 시해선인도 다수 있었다.
선인을 모시고 승천할 용호의 청용과 대붕산의 붕이 호시탐탐 기회를 엿 본지 어언 수천 년 세월이 흘렀다.
구름이 하늘을 가려 암흑천지가 되고 수 천근 바위가 구름처럼 날라 가는 비바람이 수 만 번, 깊은 바다가 갈라지며 용암이 끓어올라 뜨거운 물 폭포를 이루는 쓰나미가 수천 번,
천둥번개와 벼락이 은하처럼 수 만 번 떨어졌다.
그래도 오륙도의 여섯 섬은 수 천길 물속에서 숨이 막히는 고통도, 천지가 불타고 어둠이 하늘처럼 덮어도, 선인의 승천을 도울 그 날을 기다리며 묵묵히 버티고 있었다.
오륙도는 삼신산 남쪽부터 밖섬, 굴섬, 송곳섬, 수리섬, 거미섬, 소풀 섬이다.
칠월 윤달 해가중천에서 자취를 감추고 은하수를 흐르는 별이 우박처럼 떨어지고, 바다는 천 길의 용오름이 일고 바다가 열리며 다섯 번째 섬인 거미섬이 자리를 옮기고 있었다.
검은 구름이 일기 시작하자 번개가 치고, 천둥소리에 물보라가 방향을 잃고 포말을 토했다.
수천 길 하늘에서 용과 붕이 사생결단을 낼 듯 몸을 부딪치며 용붕상박(龍鵬相搏)하고 있었다. 붕의 날개와 용의꼬리가 부딪쳐서 섬광이 바닷물을 끓이고 포효(砲哮)는 지천(地天)을 흔들며 수십 합의 싸움이 끝이 없었다. 먼저 수리병의 선약을 움켜쥐고 승천하겠다는 의욕이 욕심을 키웠기 때문이었다.
이를 알아차린 옥황상제가 거미섬이 징검다리 역할을 하지 못하도록 바다를 열어 자리를 옮기도록 한 것이었다.
옥황상제가 싸움을 말리고, 붕은 대붕산으로 날아가자 용은 칠흑 같은 허공에서 짐작으로 소풀섬을 밟고 거미섬을 징검다리로 수리병을 잡으려 하였으나, 아뿔싸! 불로불사 대약 병을 엎지르고 말았다.
서서히 하늘이 열리고 긴 일식이 끝나자 바다는 옥색 면경지수가 되고 거미섬이 자리를 옮긴 것을 알아차린 용은 분함을 참지 못하고 애꿎은 소풀섬을 꼬리로 자르고 이무기가 되어 남해바다 심해에서 기회를 보다 2010년 소풀섬에 있는 여의주를 만들 둥근 원석을 심해로 운반해 다듬고 있다고 한다.
소풀섬의 잘려나간 작은 섬을 방패가 없어 용의횡포로 잘렸다하여 방패 섬이라 부르고 있다. 용이 승천하지 못하자 세상은 평온하고 활기가 넘쳤다.
붕은 선인을 태우고 삼신산에 모두 모셨다.
수리병은 넘어진 모습으로 바위섬이 되었다.
수리병 주둥이에는 대약이 흘러 용궁에서 별주부를 따라온 물고기가 대대손손 자리를 지키고, 설원의 북쪽에서 찬 기운 따라 남쪽바다 오륙도에 모여드는 고기잡이 새, 가마우지
수 백 마리가 한겨울을 배불리 먹고, 두 뺨에 하얀 솜털이 자라는 푸른 오월에 다음해 동짓달을 기약하며 고향으로 날라 간다.
수리병-호리병의 옛말
2)
1972년 6월 26일 부산광역시 지정문화재 기념물 제 22호 그리고 2007년10월01일 국가지정 명승지 24호로 지정된 곳이다. 부산항을 오가는 배들의 무사항해를 기원하며 외로움을 달래는 호적 없는 바다의 외로운 무인도 섬이었다. 이 무인도 섬 오륙도가 유인도 섬이 된 것은 1927년 오륙도 끝에 있는 밖 섬에 등대가 세워진 후 등대섬으로 부르면서 부터이다. 1876년 부산항이 개항되고 나서 부산의 관문인 오륙도 앞으로 배들이 드나들기 시작하자 항구를 알리는 길잡이 역할을 하도록 오륙도의 밖 섬(일명 등대섬) 위에 등대를 세웠던 것이다. 오륙도 임야(20,542㎡)를 측량하여 1978년 5월 30일 호적을 부여받으면서 부산광역시 남구 용호2동 936번지에서 941번지까지의 지번이 주어졌다.
오래된 기록으로는 1740년 동래부지 도서조에 기록한 오륙도의 어원에서 “오륙도는 본영(좌수영)에서 남쪽으로 15리(실질25리) 절영도의 동쪽에 있다”.
봉우리와 깎아지른 듯 모양이 기이하고 바다 가운데 나란히 서 있으니 동쪽으로 보면 여섯 봉우리가 되고 서쪽으로 보면 다섯 봉우리가 되어 이렇게 한 것이다.
(五六島, 在營南十五里絶影島東. 峯密削立列在海中,自東觀之爲六峯, 自西觀之爲五峯)
태종대 에서 동쪽으로 쳐다보면 여섯 섬이 보이고 해운대에서 서쪽으로 처다 보면 잘록개에 가려 거미섬이 보이지 않아 다섯 섬만 보이게 되었다. 그래서 오륙도라 부르게 되었다 .
거미섬은 영등할미가 내려오는 음력 2월 대조기에 바닷길이 열리고 풍성한 해산물을 채취할 기회를 베풀어 준다. 거미처럼 살금살금 기어서 자리를 옮겼다고 거미 섬이 되어 수만은 풍파를 격고도 본래의 자리로 옮겨갈 날을 기약하며 나암이라는 새 이름으로 오륙도 에서 잊히고 있다.
이 섬들은 육지에서 먼 곳부터 차례로 밖섬(등대 섬)(941번지, 3,416㎥) 굴 섬(940번지, 9,716㎥),송곳 섬(939번지, 2,073㎥), 수리 섬(938번지, 5,313㎥), 소풀섬의 솔섬(솔섬937번지, 5,505㎥),방패 섬(936번지, 2,166㎥), 으로 나눠지고 거미섬을 제외시키는 잘못을 저질렀다.
밖섬은 바닷길을 안내하는 등대가 생겨 밤이면 섬들을 비추고 옛날의 추억을 되새기며 등대섬이 되었다.
신에게 바치는 부수가 한두 방울씩 떨어지는 굴섬은 촛불공양 불공치성을 발원하는 곳이 되었다.
소풀섬은 소가 좋아하는 소 찰밥나무(자귀나무)가 빼곡하여 유월이면 붉은 꽃이 만개하고 벌 나비의 날개소리가 뭍까지 들렸다고 하며, 소풀섬을 향하여 기도하면 부부금실이 좋아진다고 믿고 있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 해방되기 전 연합군의 소이탄(네이팜) 폭격으로 소실되어 지금은 소나무가 자생하고 있어 솔섬이라 부르기도 한다.
이웃하여 잘록개의 천공에 매달린 유리다리(스카이워크)에서 용의 한이 서린 오륙도를 바라보면 간담이 서늘하고 등골에 소름이 돋는다.
소녀들은 오금저린 유리다리를 내려오며 깔깔 대며 손뼉을 치고 웃는다.
구남의 한센 농장
3)
1946년3월부터 오륙도 앞마당에는 보리밭두렁으로 눈에 뛰지 않게 찾아오기도 하고, 달 밝은 밤이면 도선에 가족을 싣고 하나둘 모여들었다. 감만동 상애원이 문을닫고 떠돌이생활을하든 270여명으로 나환자촌이 되었다. 이곳을 구남이라 한다.
부근의 주민들의 반대가 극악했다. 길목의 다리를 걷어내고 청년들이 순검을 돌며 출입을 막았다. 험악한 분위기를 느끼면서도 이곳이 아니면 선택할 곳이 없었다.
어느 누군들 반기는 사람도 몸을 누일 판잣집도 없는 곳을 눈을 피에 까치걸음으로 목을 빼고 찾아온 곳이다. 해가 뜨는 수평선이 보이는 남녘의 바닷가 삶의 터전,
오륙도 송곳섬의 해무가 보이는 동쪽 바다 외는 나지막한 등이 병풍처럼 감아 고즈넉한 곳이다.
아는 사람이 찾아올 리도 없고 폐차나 리어카에 잡동사니를 파는 사람도 없는데 왠지 이곳이 마음편한 고향 갔다.
오월이면 운해가 널빤지 틈으로 스며들어 이부자리며 행어의 헤어진 옷가지가 눅눅하여 아침마다 한기를 몸에 감고 귀에 걸린 비뚤어진 입을 다물어 본다. 눈이 이슬받이 같다.
이쯤의 고통은 언제나 놀부의 혹처럼 몸에 달고 산다.
그래도 산에는 삼나무도 있고 전봇대만한 편백나무도 코숭이를 덮고 있어 밤이면 가족이 몰래 톱질을 해서 해가 뜨기 전에 집터에 옮겨 미군 쓰레기장에서 주워온 천막아래 숨겨두고 말렸다. 독립운동을 한일도 없으면서 일본을 싫어했는데, 지금 일본이 심어놓은 나무여서 도둑질해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아 고마운 마음도 들었다.
어느덧 남향으로 엉성한 집 한 채를 지었다. 거울 앞에서 화사하게 화장한 딸을 보는 소원도 풀었다. 엄마를 닮아 마음가짐이 눈 밝을 때 처음으로 읽은 소설 심청전의 봉사 심학규 같았다.
구남-군함의소리글 일제침탈기 일본해군군함의 포를 설치한곳이라 구남이라 하였다
4)
내 나이 마흔넷(경술생)에 피부병에 걸려 큰 병원에 가라는 동네 의사가 어찌나 원망스러웠든지,
남을 해코지 한일도 없고, 아내 몰래 딴 여자를 가슴에 품어본 적도, 조실부모하여 부모님께 불효한 기억도 없는데, 어찌 문둥이라니. 벼락을 맞고 죽으면 죽었지 집에 가서 내가문둥이라고 아내 한데며 딸에게는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눈앞이 캄캄했다.
이틀을 굶고 헤매니 배가 고팠다. 밤하늘의 별은 유난히도 많았다.
세상을 포기한 듯 죽을 날만 기다리며 4년 동안 두문불출하고 세상을 등지고 살았다.
봄바람이 삽짝으로 들어오는 양지바른 오후 품앗이를 하고 돌아온 아내가 뜬금없이 오륙 도로 이사를 가자고 한다.
소록도를 잘못들은 것 같아 소록도 말인가? 되물었다.
아니오, 부산 오륙도 로 이사를 갑시다.
그곳은 따뜻하고 살기가 참 좋다고 하네요.
달포를 망설였다. 딸아이도 멀리 떠나서 살고 싶다고 다그쳤다.
반신반의 로 이삿짐을 트럭에 싣고 어느 바닷가에서 목선으로 갈아타고 어두운 밤에 불빛하나 없는 선착장에 이삿짐을 풀었다. 가까운 곳의 등대불이 바다를 비추고 있어 어스름 했다.
여명이 깔릴 때 까지 꼼작하지 못하고 움츠리고 있었다.
바위틈에서 바위게들의 거품 만드는 소리만 들렸다. 배를 따라오던 너울도 별빛이 구름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햇살이 바다를 붉게 물들여도 갈매기 만 바다를 오르내릴 뿐 인기척은 없었다.
아내와 딸을 두고 숲이 우거진 옴팡한곳으로 올라가서 기웃거렸다.
허름한 옷차림의 사람들이 첫새벽부터 개간을 하고 있는듯했다.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
내 마음을 읽고 있는 듯 했다.
한참동안 말을나누다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가르쳐 달라고 매달렸다.
그들 중 석 달 전에 이곳에 왔다는 차 씨라는 분으로부터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곳에 자리를 틀라고 하였다.
대답도 하지 못하고 손수레를 빌려 짐을 나르고 가지고 온 미군 천막으로 비를 피하고 잠을 잘 수 있도록 주위 나무에 얼기설기 매달았다.
그리고 푸서리에 텃밭도 만들고 밀물 따라 떠내려 온 널빤지 조각으로 토끼집도 만들었다.
작은 교회당이 있어 여러 가지 도움을 받으며 2년 만에 내 집을 가질 수 있었다.
분말우유며 치즈 그리고 바싹 마른 식빵과 노란 옥수수가루는 원조식품이었다.
옥수수가루와 우유로 끓인 죽에 식빵을 찍어 먹기도 하고 죽에 치즈를 넣어 먹기도 하였다. 오륙도 조간대 돌짬과 홈에는 돌미역이 파도에 일렁이고 그 아래 담치도 입을 벌리고 있었다. 미역을 따서 양지바른 곳에서 헛바람에 거덕거덕 마르면 마대에 담고 담치는 망사리에 담아 젖은 몸을 움츠리며 멜빵으로 지고 왔다.
텃밭의 푸성귀와 미역 그리고 원조식이 결합한 이곳의식생활은 일반인들은 생각해보지 못한 식단 이었다. 집에서 기른 토끼는 번식력이 좋아 부족한 영양을 보충할 수 있었다.
1970년까지 치료하며 생활하기에 부족한 것은 별로 없었다.
이 곳 구남 용호병원에서도 원조가 끊어지고 새마을 운동으로 잘살아 보자는 분위기가 일기 시작하였다.
한센병원이 농장으로 탈바꿈하기 시작하면서 편했든 세상이 끝났다.
용호농장 구남은 일본이 패전하고 본국으로 철수하고 군막사와 관사들이 정돈되어 있었다.
1948년 감만동의 경상남도 도립나환자 수용소 상애원에서 양성나환자는 소록도로 옮기고 부산일원에 흩어져 살고 있던 환자와 상애원 음성 환자들이 구남을 접수하였다
1961년 경상남도 부산갑구 민의원선거 유세에서 당선되면 국립용호병원으로 해주겠다는 약속을 지켜 국립용호병원이 되었다. 그리고 7년 후
1968년 용호병원은 국립소록도 용호분원으로 바뀌었다.
1975년 양성 환자들은 모두 소록도로 옮기고 음성 환자들만 정착하여 용호농장이 되었다.
1989년 나환자 850명중 744명만 용호농장에 등록되었다
1993년 농장원은 712명으로 확인되었다
그 후 용호농장 정착규모가 7,000여명이 거주하기도 하였다
용호농장 재개발사업은 2000년부터 철거시작이 이루어졌다
5)
아이의 울음소리가 끊긴지 얼마나 되었는지 잊고 살았다.
문둥이 동네라고 아이들은 이곳을 찾아오지 않아 아이 구경은 할 수 없었다.
보리깜부기가 생길 때쯤이면 성가시게 구는 손주들에게 보리밭에서 문둥이가 아이들을 잡아먹는다고, 으름장을 놨기 때문이기도 하다.
조선 명종(1546~66)과 선조실록(1576)에 보면 7~8세의 아이들과 걸인의 간과 쓸개를 추출하여 명약이라며 환자에게 거액에 팔았다는 기록과 살인자들을 엄벌하였다는 기록에서 구전된 것으로 추정된다.
우연한 기회에 바람 한 점 없는 이곳을 지나면 한집건너 마다 기르는 배터리 케이지 양계장과 돼지 울에서 가축 분뇨의 악취가 진동하고, 죽 달라고 고래고래 질러대는 돼지의 울음소리, 알을 낳았다고 주인에게 알리는 조잘거림도 한몫을 한다.
아이는 나환자들의 굽고 떨어져 나간 손가락과 몰골을 바라보고 겁에 질려 울지도 못하고 어른들의 치마폭에 얼굴을 파묻고 재촉하며 도망 걸음을 한다.
금은보화를 준다고 해도 다시는 이곳에 오지 않을 아이들이다.
6)
가끔은 예쁜 옷으로 치장하고 윤기가 흐르는 얼굴에 웃음꽃을 바른 여인네들과 오륙도를 찾아오는 외지인들이 코를 막고 지나가기도 한다.
행여나 알아보는 사람을 만나기라도 할 가 봐서 방문(榜文)에 붙은 수배자처럼 얼굴을 돌리고 고개를 숙이는 것이 이곳 사람들의 습관이 되었다.
행인들을 만나면 귀도 막고 눈도 가리며 살아왔다. 비틀리고 찌그러진 얼굴을 알아볼 리도 없는데.
함석 대야를 똬리에 바친 계란 장수 아주머니는 자주 찾아와 문둥이 콧구멍의 마늘을 빼먹듯 얼토당토 않는 금액을 제시하는 문둥이계란 값 흥정을 하기도 한다.
그래도 나환자들은 이곳을 낙원으로 만들기 위해 죽을힘을 다해 억척같이 살았다.
지금까지 해 왔듯이 소외된 계급으로 극단적 투쟁을 일삼고 그런 지도자를 따르며 나름대로의 삶이 익숙해졌다.
슬레이트 지붕에 벽돌집을 지어 공장으로 임대도하고 , 눈먼 땅도 돈 받고 빌려주기도 하면서 돈이 되는 짓은 물불을 가리지 않고 살았다.
동백지 벼랑에 자생하는 분재 같은 동백나무와 소사나무. 팥배나무를 반 뿌리로 뽑았다.
산태골과 오륙도 돌 틈에 간신히 매달려있는 섬 향나무와 문둥이 손처럼 비틀어지고 난장이처럼 제대로 크지 못한 이름도 모르는 나무도 자연산 분재라며 뽑아 팔았다.
물때가 좋으면 바다를 뒤져 톳. 우무가사리. 곤포(다시마). 모자반등. 해조류를 채취하기도하고, 도박을 말려 일본 수출에 동참하기도 하였다. 멍텅구리멍게와 성게. 고둥도 잡았다. 말똥성게처럼 가시가난 것은 아픔을 느끼지 못하는 문둥이손이라 보통사람보다 고통 없이 잡을 수 있었다. 채마밭에는 잡초 때문에 무제한 제초제를 뿌리며 닭똥거름으로 쪽파며 시금치 갓등 가릴 것 없이 키워 아내가 저자길에서 전(廛)을 펴고 무농약 친환경먹거리 채소라며 팔았다.
땅이 죽든 오염된 먹거리가 되던 우리만 살면 되는 것이었다. 이렇게 모은 돈은 아내가 이자만은 저축은행에 예금을 했다. 돈이 날개라 하지 않든가, 사람도 빤히 처다 보고 내가 제시한 값으로 큰소리로 흥정도 한다.
속내는 나도 알부자다 손가락 하나하나 떨어질 때마다 돈은 늘어만 갔다.
7)
딸이 도선을 타고 오륙도에 자주 간다는 소문을 들었다.
딸 에게 어느 날 작심을 하고 물어 봤다.
굴섬에 갔다 온다고 말끝을 흐리며 방으로 들어간다.
이곳에는 성당과 장로교회가 있어 주민들이 양분되어 있다.
선화(善化)는 가족과 같이 성서를 들고 성당에 나간다.
그리고 일주일에 한번 꼴로 굴섬 에서 촛불을 밝히고 소원을 빈다는 소문이 회자 되었다. 해식동굴 천정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이 왕관처럼 솟구쳐 오르는 모습을 보며 합장하여 몸이 식어 소름이 돋고 이빨이 부딪칠 때까지 만 있다가, 도선을 타고 돌아오기를 서너 해 되었다.
굴섬에서 떨어지는 물이 신에게 바치는 부수라는 말을 외지손님들의 어깨너머로 듣고 나서 부터였다.
성모 마리아에게 빌어야 당연한 신자의 도리가 아닌가?
그런데 굴섬으로 위험을 무릅쓰고 여자의 몸으로 혼자서 다니는 이유는 아무도 모르고 있었다.
11월중순경 선화가 굴섬에 들어가고 나서 폭풍이 발령되어 도선이 나가지 못해 이틀 넘게 갇히게 되었다 .
주민들이 방파제에서 파도가 숨죽기를 기다리며 안절부절못하여도 바다는 아랑곳 하지 않았다. 선화 부모는 쪼그리고 앉아 오륙도를 바라보며 서성거리는 이웃을 가끔 쳐다보는 듯 했다.
달이 밝았다. 송곳섬에 둥지를 튼 수리부엉이가 시간을 재듯 붕붕 울기만 하였다.
해 뜰 무렵 바람이 잦고 파도의 포말이 보이지 않자 서둘러 도선을 띄웠다.
장정 서너 명을 태운 통통배는 굴섬을 바라보며 선자세로 달려갔다.
제법 시간이 흘렀다 . 도선의 엔진 소리가 들리기 시작하자 선착장에 동네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 했다. 선화가 갈색 담요에 덮인 채로 인력거에 실려 마을로 올라갔다.
사흘 뒤 노천 화장터에서는 검은 연기가 거미 섬으로 꼬리를 낮추고 휘날렸다.
통곡하는 사람도 없었다. 이곳 화장터는 언제나 조용하게 신부님이나 목사님의 성경 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동네 아낙네 들은 귀엣말로 수군덕거린다.
선화가 무엇 때문에 그곳을 다녔는지 알려고 하는 사람도 없이 잊혀졌다.
8)
딸을 하느님 곁으로 보내고 선화 아버지는 몸져누웠다.
문둥이는 자식을 낳으면 문둥이가 태어난다고 가축을 거세하듯 불알(고환)을 까 자식을 가질 수 없는 또 다른 장애자가 되도록 국가가 권장했다.
선화 엄마는 아직도 잉태할 능력이 있어 더 분통했다.
손이 뭉개지고 이빨이 흘러내리고 발가락이 잘려 중심이 잡히지 않아 뒤뚱뒤뚱 걸으며 모아둔 돈이 무슨 소용이 있다는 말인가? 알아들을 수 없는 옹알이 같은 목소리로 울부짖는 남편을 쳐다보는 선화 엄마는 눈만 껌뻑껌뻑 할 뿐 내뱉을 말이 없었다.
세상이 세 번째 원망스러웠다.
첫 번은 딸로 태어난 것이고, 두 번째는 남편이 문둥이가 된 것이었다.
옛날 문둥이가 어린 아이를 잡아간다는 뜬 구름 같은 이야기를 들은 기억이 생소리가 아닌듯하다.
아이를 하나 훔쳐다 사랑을 듬뿍 주며 키워 봤으면!
“여보, 우리는 입양은 되지 않으니 남의 애를 하나 훔쳐다 키우면 어떻겠소?”
남편은 동공을 크게 펴고 뚫어지듯이 쳐다보며 벼락을 맞아죽을 생각을 한다며, 처음 보는 또 다른 일그러진 남편의 얼굴을 보고서야 부질없는 생각을 해서 남편의 깊은 상처에 소금을 뿌렸구나 싶었다.
선화아버지는 딸의 방에서 한나절을 잠들어 있었다.
딸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화장을 하고 거울 보는 시간이 많았다. 그러나 친한 친구는 단하나 가구집의 딸 민주(珉珠)뿐이었다.
봄이면 조군돌이 보이는 구덕아래에서 몽돌을 줍기도 하고 고둥껍질을 주워 목걸이도 만들고 갯고들빼기와 바위채송화로 나물도 만들었다.
톳이나 서실을 따다가 대쳐서 아버지가 좋아하는 반찬을 맛깔스럽게 만들었다. 둘은 짬을 내어 영화관에 가기도하고 시내 목욕탕에도 같이 다녔다.
둘은 농장총각들의 인기절정의 처녀로 성장했다. 그래도 같은 동네총각들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총각들은 애가 타들어가도, 선화 엄마는 이곳 총각에게 딸을 시집보낼 마음은 없었다.
두어해 지나고 나서 민주가 동내총각과 결혼을 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마을 아낙네들은 선화의 혼사에 집중적으로 관심을 갖기 시작하면서 성가시게 굴었다.
그래도 선화는 시큰둥했다.
선화는 말쑥하게 생긴 시내 총각과 사귀고 있었다. 학교 다닐 때부터 눈 이 맞아 종종 만난사이였다 .
일요일이면 낚싯대를 들고 구덕 상여바위틈에서 이야기도 나누며 또래 아이들과 같이 사랑을 키웠다.
그 총각은 군에 입대하고 2년 가까이 편지를 주고받으며 애절한 마음을 나누는 것을 엄마는 알고 있었다. 딸의 꿈을 깨고 싶지 않았다. 내 딸이 문둥이의 딸이며 미감아[未感兒]라는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사랑이 익어갈수록 선화는 불안하고 초조했다.
그토록 사랑한 사람이 서울의 대학기숙사에 들어가고는 소식이 줄어들기 시작하였다.
선화엄마는 딸의 마음을 헤아리고 있었지만 아무런 도움이 되어주지 못했다.
그래도 끝까지 남편에게는 마음에 묻어두고 말하지 못했다. 그래서 억장이 무너져도 눈은 말라 있었다. 그렇게 내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선화를 보냈다.
다음날 늙은 장로님의 화장(火葬)이 있었다.
*초기의 남자나병환자들을 거세하여 고자를 만들었다
9)
선화가 죽고부터 누렁이가 염 씨의 눈치를 보며 슬그머니 자리를 피한다.
같이 양지바른 사료 포대기에 누워 있든 고양이도 꼬리를 낮추고 닭장 안으로 들어간다.
누렁이와 고양이가 집을 지키다 주인이 들어오면 누렁이는 도꾸(dog)와 메리(merry)를 만나 어디론가 바쁘게 사라진다.
닭장에는 떨어진 사료며 깨진 계란을 먹은 쥐가 버글버글한다.
누렁이 한데도 갓 죽은 닭을 던져준다. 이곳 쥐와 고양이 그리고 개도 이지다.
그런 누렁이를 보며 염 씨는 발길질을 할 듯이 헛발질을 한다.
매미소리에 그리도 괴롭히든 이명이 낮에는 들리지 않는 장마가 끝난 여름이다.
옆집에서 누렁이와 닮은 강아지 한 마리를 얻어와 목줄로 닭장 앞에 메 놓았다.
그리고 누렁이도 목줄을 메고 성당 뒤 언덕배기 순이 집으로 끌고 갔다. 순이 집 벽에는 붉은 굴림체로 “개잡아주는 집”이라고 써놓았다.
돼지 사료와 닭 사료를 넣어주고 잘록개에 올라가 어렴풋이 보이는 대마도를 힐금 보고 발아래 잡초를 발로 비벼 보기도 하고 작은 돌멩이를 차보기도 했다.
옛 포진지 옆 밭뙈기가 보였다.
채전까지는 동백지 정도 떨어진 장자등 푸서리에 무단 경작한 국유지 150여 평이 있다.
심어놓은 것은 왕고들빼기와 독말풀 그리고 애기똥풀 그 틈에 양귀비 몇 포기가 나환자에게 꼭 필요한 작물이다.
그리고 대파도 있고 완두콩, 동부, 아주까리, 상치 그리고 마늘도 심는다. 그 외도 푸성귀는 알만한 것은 다 심어 봤다.
왕고들빼기는 흰 수액이 이슬처럼 맺힌다. 쌈을 싸먹고 채를 쓸어 닭에게도 사료와 같이 넣어준다.
마취재로 쓰이는 독말풀은 극약이다. 정해진 양보다 과다 섭취하면 심장이 멈춘다.
상처의 심한고통을 참지 못해 몸부림치다 독말풀의 씨앗을 달여 마시면 마취상태가 되어 잠이 밀려온다고 한다.
그리고 줄기에서 노란 애기똥물 같은 유액이 흐르는 백굴채(애기똥풀)는 상처의 치료제다.
양귀비는 만병치료제 아편을 추출하는 식물이다, 속병이 나고 잠을 이루지 못할 때 말려둔 전초를 달여 먹으면 응급처치가 된다.
이런 식물은 인도문둥이들이 길러 먹었다고 교우(敎友)들이 전해주었다.
나환자들의 보조 상비약이다. 다들 양을 적절히 조절하여 별탈도 없고 습관성도 없이 그때그때 적절이 이용하는 작물이다.
그렇다고 한센병(Hansen`s)의 약이 없는 것은 아니다. 옛날문둥이약 대풍자유로 치료할때보다 특효약인 치료약은 답손(Dapsone). 리팜피신(Rifampin).클로파지민(Clofazimine)등 3가지 약을 병합처방 하면6개월~24개월이면 완치된다. 모습은 변함이 없어도 음성판정을 받은 사람만 이곳에서 가축 농장을 하며 나름대로 행복한 생활을 하였다.
오늘 저녁부터 염 씨 내외는 보신탕으로 몇 날은 특별한 반찬 없이도 배불리 먹고 이쑤시개로 대문니사이를 헤집고 텔레비전을 보면서 누렁이 이야기를 나누며 하루하루를 맞이했다.
딸을 그리워하며 수평선에 아지랑이가 피는 바람 한 점 없는 따뜻한 초여름 아내도 없는 방에서 외롭게 숨을 거두었다. 아내를 기다리며 한쪽 눈은 감지 않았다. 그분들이 이승을 떠나는 모습은 그만그만하였다.
10)
이곳 용호농장이 세상에 너무 알려졌다.
설화의 오륙도가 지척에 있고 눈뜨면 수평선이 발아래 푸른 융단으로 깔려 있다. 평생한번 보지도 못하는 가마우지며 괭이갈매기의 울음소리도 예약 없이 들을 수 있는 곳이다.
밤낮으로 미세먼지 마스크 하지 않고 갯냄새 넘쳐나는 살기 좋은 곳.
일본도 명당이라 대포를 설치하여 방어망을 구축한 곳이다.
그러니 계급사회의 자본계급이 이곳 용대(龍臺)를 그냥 둘리 없다.
국회 선거구 획정위원회는 부산 남구 “갑 을”이 합구 대상이라고 했으니 갑 을 선거구 의원들 지역구를 사수하라는 특명이 개발을 부추기는데 한몫을 했다.
명분은 주거환경 개선사업이다.
한센 농장도 그냥 쉽게 물러가지는 않았다. 속 차릴 것은 빈틈없이 요구하며 보상받고 추가 개발에 권리증도 받아놓고 다른 곳으로 이주했다.
(2006년부터 강제격리정책도 해지되어 어느 곳이나 마음에 드는 곳으로 이주하여 정착할 수 있다.)
용호동 주민과 부산시민 대 다수는 이곳이 공원으로 개발되기를 염원 하였다.
부산의 권력자들이 미래를 설계할 능력의 한계가 여기까지 이었다.
얄팍한 꼼수로 빈틈없이 높은 고층 건물이 독버섯처럼 바람을 막고 버티고 있다.
오륙도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입방아에 깊은 잠이 들기나 할까?
11)
문둥이 는 법도 없나!
손수레에 질벅한 돼지 똥을 절벽아래 구덕으로 쏟아 붓는다.
재래씩 화장실 인분도 돼지 똥과 섞어서 바다에 버린다.
닭똥은 운동장이나 공터에서 말려 닭똥 비료 공장에 판다.
똥파리가 닭똥위에 까맣게 달라붙어 있다. 여름 소나기가 오면 도랑 마다 닭똥물이 넘친다.
가축이 음식물쓰레기를 먹어 쓰레기양을 조금은 줄여 줄뿐 쓰레기는 재활용품 분류도 하지 않고 오륙도 앞바다에 수시로 버린다.
수리섬과 거미섬 사이에 미역 양식장과 다시마 양식장이 있었다.
나환자촌에서 공급하는 인과 황이 함유된 자연산 퇴비를 무제한 공급하여 빛깔 좋은 해조류를 키워 부산시민의 식단에 조석으로 공급되었다.
소주안주와 맥주안주의 돼지족발과 통닭구이용 묵은닭도 이곳 상품이 많았다.
그래서 산 너머 용호동을 똥 골 동네, 문둥이 동네라고 애먼 소리를 들었다.
한센 환자들 앞에서는 감히 꺼내지 못한 말을 용기내서, 먼 산보며 문둥이는 법도 없나!
이 소리는 쥐나 새가 들어야지 사람이 들으면 육두문자의 욕설과 살기 가득한 악담을 하며 창문에 돌팔매가 융단 폭격처럼 퍼붓는다.
무법천지 사법권이 범접 못하는 특권을 누리는 한센환자들이 어디로 갔는지 없어졌다.
알려고 해서도 안 된다. 무섭다고 한다.
이제야 하는 말이지만 구남 해안의 오염된 연안 해류는 남부하수처리장 해중방류수와 혼합하여 시간당 평균 약720m의 유속으로 같은 방향으로6시간가량 이동하며 광안리와 해운대 해수욕장에 공급하고 다시 돌아온다.
여름이면 닭똥 물에 몸 담그고 모래조각이랑 광안대교 구경하고 좋아하는 모습에 피식 웃는다.
3~4년 동안 밀물과 썰물이 연안마다 넘쳐 말라붙은 분뇨를 말끔히 청소했다.
오염된 바다를 강 건너 불구경 하듯 무관심한 부산시도 구덕에 바다목장을 조성했다 .
그러나 60여년을 이곳에서 정착하면서 그들 입맛대로 오륙도 이름도 작명하고 외지인들에게 밖섬을 밭섬. 소풀섬을 솔섬과 방패섬으로 두 개의 섬으로 가르고 , 거미섬을 나암으로 홍보도 하였다. 어쩌면 장애 때문에 말이 어둔해서 듣고 전하는 사람이 작명을 했는지도 모른다. 제법 말께나 한다는 사람들이 주 대상이 된 꼴이다.
그들 때문에 용호동 오륙도 주변의 옛 지명이 심하게 오염되었다. 용마산. 동생말과 승두말 처럼 전국 혼합 방언이 통하는 곳이었다.
조상들이 즐겨 부른 옛 지명 복원도 수십 년이 걸리지 않을까?
12)
오륙도앞 스카이워크에 오르니 연안 해류가 개천에 흐르는 논물 같다.
임진왜란에 참전한 명나라 장수 만세덕의 기공비가 수리섬에 있다, 그래서 수리섬이 비석 섬이라고 했다. 한센환자들이 운영하는 도선을 타고 쓰레기로 오염된 오륙도를 둘러보면 수리섬 남쪽에 큰 비석 같은 자연석이 버티고 있다.
사학자들이 진위를 확인하고 싶어 하는 까닥이다.
원(元) 다음으로 2백여 년의 명나라가 쇠퇴하고 청나라의 연호를 쓰며 권력 구조도 바뀐 조선의 정치는 좌우로 갈리지 않았겠는가? 그래서 기공비가 양단 파손되어 초간에 넘어진 채로 방치되어 있었다.
肅宗(숙종)35년 서기1709년 동래부사 권이진이 이 사실을 조정에 아뢰어 자성대 위에 만세덕(萬世德)의 공을 기리는 만공단(萬公壇)과 자성비각(子成碑閣.記功碑)을 세웠다.
그러나 일제 침탈기 1927년 이후 일본이 자성비각을 오륙도 3번째 섬으로 옮겼다고 한다.
일본을 몰아낸 명나라장수 만세덕의 기공비를 일본이 수장하지 않고 섬에 옮겼을까?
한반도 에도 천왕만 존재한다고 주장하고 비호한 친일파가 꾸며낸 짓일 가능성도 있다.
주작의 발아래 비용개 에는 백석과 고래 등 그리고 신선의 탕건이 돌이 되어 있었다.
백석의 몽돌은 파도가 밀려왔다 내려가면 눈이 부시도록 자수정처럼 빛나고 신선의 풍악이 되어 대붕산 아래 신선대 까지 들렸다. 홀딱 벗고 알몸으로 물장구치는 아이들도 오지 않는다.
이제는 파도소리도 들리지 않고 몽돌의 부딪히며 뒹구는 모습도 없다.
산허리에 노란 딱지 꽃, 보랏빛 각시붓꽃과 하얀 꽃이 핀 옥녀꽃대가 빼곡한 공동묘지를 장식하고 있다.
살아서 그리도 표독한 사람들 일제 순사와 헌병으로 긴 칼 허리에 차고 혀 가긴 사냥개 앞세워 이웃을 닦달 하며, 히죽히죽 웃든 개기름 낀 얼굴.
독립만세 삼창한 죄밖에 없는데 어느 날 경찰복으로 갈아입고 나타난 그 사람들이, 보도연맹 운운하며 다짜고짜 포박하여 취조실로 끌고 가서, 반죽음이 되어서야 엉금엉금 돌 개단을 내려와 그길로 몸져누워 떠난 사람들, 좌파우파 모함 당해 억울해서 죽은 사람들도 순사와 이웃하고 잠들어 있다. 상가의 윷판을 기웃거리며 정탐하든 매부리코에 단추 구멍만한 눈 그리고 잔주름이 많은 일본순사 앞잡이가 독립하고 열흘 만에 벼락 맞아 검게 타 죽은 묘지도 개울 옆에 무너진 봉분으로 있다.
다행히 오륙도를 이웃하고 살아서 적에게 부역(賦役)하지 않아 참수는 피했다.
우리는 이웃사촌이라고 한다. 3대가 이웃으로 살아 왔다는 의미다.
지난일은 용서하고 배려하며, 미래를 향하여 모두 한마음으로 정진(精進)하자.
피비린내 나는 그 시절을 죽지 않고 살아서 반려 견 목줄잡고 장자산에 올라와 산세를 살펴보니 좌청룡(左靑龍) 우붕(右鵬)이 지켜주는 이곳이 명당이고 신선이 머무는 곳이다.
내 나이 다 들거든 주작 등에 업혀 삼신산 신선을 만나 오륙도 이야기 나누리라.
2014년11월22일 왕 정 문
선화 아버지 염씨(가성) 처음으로 용호동의 행정구역 농장 통장을 역임하신 분이며 첫 주민등록증 발급에 음성나환자 지문 채취(전염 염려로 경찰이 지문을 채취하지 않았다) 봉사를 하면서 알게 되어 그의 살아온 이야기를 기록한 것이다.
붕새-붕(鵬) 이라는 이름의 거대한 새가 있었다. 북쪽 바다의 큰 물고기의 이름은 곤(鯤)이다. 곤의 크기는 얼마만큼 큰지 모른다. 이 물고기가 변화하여 새가 되었는데 그것이 붕이다. 붕의 크기는 힘껏 날면 그 날개가 하늘을 덮은 구름과 같다. 붕이 남쪽 바다를 날 때 날개로 해면을 치면 3천 리(약 1,200 킬로미터), 그로 인한 회오리바람이 9만 리(약 36,000 킬로미터)에 이르렀다. 이 새는 머나먼 고대 신화시대부터 존재했고, 그 엄청난 신통력은 보통 신선의 기술로는 당해낼 수 없을 정도였다. 무엇보다 붕은 인간 세계에 관심을 갖지 않았으며, 붕의 목적은 인간으로서는 헤아리기 어려운 곳에 있었다.
『서유기』에 나오는 붕의 마왕은 한 번의 날갯짓으로 9만 리를 날 수 있다고 한다.
오로지 신선만이 탈수 있는 새 붕(鵬)이다 (naver자료)
전설의 붕이 나는 신선대에서 신라의 대학자 최치원이 신선으로 화(化)한곳, 대붕 산을 일제강점기 미친 말의 대명사 용마산(龍馬山)이라 부르게 하여 대붕 산을 폄훼하였다.
변하는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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