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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자등포진지

아지빠 2022. 10. 12. 16:36

이야기 공작소 <5-6> 오륙도·이기대 스토리텔링- 응답하라, 장자등 포진지

"적군 오면 해안포로 박살 내버릴테다" 일제, 대한해협 길목 요새화

박창희 선임기자 chpark@kookje.co.kr | 입력 : 2013-05-13 19:57:42 | 본지 6면

부산 남구 용호동 오륙도 SK뷰 아파트 옆에 남아 있는 장자등(오륙도) 일본군 포진지. 1930년대 이후 일본군 대대병력이 주둔했다는 곳이다. 6·25 전쟁 후 육군 문서보관소로 이용하다 최근 폐쇄했다.

오륙도 해안가 절벽 포진지 공사에 조선인 인부가 일일이 손으로 팠다

무게 100t 넘는 전함 함포 설치하고 콘크리트 덮는 공사하다 사상자 속출

대마도 포대와 완벽한 방어전략 완성 하지만 히로시마에 원자탄 투하되자

일제 침략 야욕은 보기 좋게 꺾였다 장자등 포진지에도 폭탄 4발 떨어졌다

포신은 날아가고 포진지는 주저앉아 6·25전쟁 때 軍 문서보관소 사용했고

한때 나환자촌 새우젓 창고 '역사 현장'

(이미지-01)

오륙도 SK뷰 아파트 옆 임시 통로를 통해 들어가 본 일본군 포진지 내부. 일부가 매몰됐으나 여전히 삼엄한 기운이 감돈다. 한때 용호동 주민들이 젓갈 창고로 이용하기도 했다.

'꽝~꽝~' 지축을 흔드는 요란한 굉음이 울려 퍼졌다. 오륙도 바위섬에 서식하던 바다새들이 놀라 푸드득 날아올랐다. 장자등 포진지에서 포사격 연습을 지휘하던 일본군 장교의 눈가에 회심의 미소가 번졌다.

"누구든 들어와 보라지. 해안포 맛을 톡톡히 보여줄테니. 미국이든 러시아든 적국이 들어오면 박살을 내버리는거야. 대일본제국 육군을 누가 넘봐, 흐흐."

예고없이 실시된 해안포 사격 연습으로 용호동 주민들은 놀란 가슴을 쓸어내려야 했다. 강한 진동으로 일부 회벽에 금이 갔다. 장자등(오륙도) 해안포는 무게가 100톤, 구경 16.1인치(410㎜), 포신 길이 18.8m에 달하는 초대형 포였다. 설치된 포는 1기2문이었고 높이가 아파트 3개 층 정도였다. 오륙도 입구 해안가 언덕에 설치된 포의 모습은 영화 나바론요새처럼 웅장하고 위압적이었다.

1920~30년대, 일본은 부산 일대를 요새화하고 대륙 침략을 획책하고 있었다. 장자등 포진지도 이 즈음에 구축된다.

#해수표의 잔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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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호동 일대에는 일본군 포진지 유적이 곳곳에 남아 있다. 오륙도 옆 거무섬(나암)의 포진지 해수표.

왕정문(67·남구문화원 향토사 연구위원) 씨의 눈시울이 포르르 떨리고 있었다. 왕 씨는 조선 중기 이후로 대대손손 용호동에서 살아온 토박이다. 오륙도 앞 갯바위에 박힌 해수표를 바라보며 그가 말했다.

"저게 장자등 포진지의 대포 관측점이야. 해안포는 바다의 조수 수위가 중요하지. 저걸 보고 사격점을 잡아야 하니까 말야. 일본놈들이 어찌나 치밀한지…. "

오륙도 방패섬을 기준으로 왼쪽 승두말 앞의 상여돌과 오른쪽 거무섬(나암)에 일본군 포대가 사용했다는 해수표 잔해가 남아 있었다. 풍파 속에서도 존재감을 잃지 않은 일제의 콘크리트 구조물이 순간 무섭게 다가왔다.

"어릴 때 저 포진지 동굴에서 친구들과 놀았어. 땅굴같은 포진지 안에서 철제 사다리를 오르내리며 전쟁놀이를 하고 숨바꼭질도 했어. 그 추억들이 세월과 함께 매몰돼 버렸으니…."

왕 씨는 동네 어른들로부터 포진지 공사장에 동원된 조선인 노역자들과 일제의 야욕 등에 대한 얘기를 들으며 자랐다. 그의 아버지 왕석호(91) 옹은 18세 때 포진지 공사장에서 콘크리트 반죽을 했다고 한다.

포진지 공사는 엄청난 난공사였다. 거대한 콘크리트 지하 요새에 100톤 가량의 포탑을 설치하는 공사가 쉬울 리 없었다. 조선소에서라면 크레인과 도크를 이용하여 작업을 할 수 있지만, 해안 포대는 절벽 등에 진지를 구축하는 것이어서 일일이 사람의 손이 필요했다. 공사는 굴착이 아니라 해안의 산자락을 절개하여 평평하게 만든 뒤 콘크리트 거푸집을 만들어 2, 3중 방수 방습처리를 하여 완공했다. 완공된 포진지 위에는 주변과 같은 소나무를 심어 철저히 위장했다. 이 공사를 위해 600여 명의 조선인 인부가 동원됐다. 공사 과정에서 적잖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러일전쟁과 한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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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륙도 SK뷰 아파트 옆의 동굴 통로.

1905년 5월 27일 오후 2시께 대한해협. 러시아의 발틱함대가 마침내 대마도 앞 대한해협에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7개월 간의 긴 항해로 발틱함대는 몹시 지쳐 있었다. 한국의 진해만과 쓰시마 운하 등에 대기하고 있던 일본의 연합함대가 기동을 시작했다. 양측 함대의 거리가 8㎞ 정도로 좁혀지자 일본 해군 총사령관인 도고 헤이하치로(東鄕平八郞·1848~1934) 제독의 공격 명령이 떨어졌다. 일시에 포문이 열렸다. 이때 러시아의 38척의 함대 중 35척이 궤멸되고 3척만이 회생했다. 러일전쟁의 하이라이트다. 결과는 일본의 대승. 제정 러시아의 무적함대를 궤멸시키자, 일본을 보는 세계 열강들의 눈이 달라졌다. 러일전쟁 승리 직후인 1905년 11월 일본은 강제로 을사조약을 체결해 한반도를 손아귀에 넣는다. 오륙도 근해는 일본군의 작전구역으로 들어가 어선들이 마음대로 왕래하기 어려웠다.

#일제의 해안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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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 포진지에 설치됐을 것으로 추정되는 포탑과 포신.

군국주의 깃발을 앞세운 일본은 부산 일대를 병참기지화 하면서 적국의 본토 공격 및 부산항 공격에 대해 위협을 느껴 주요 공해상의 길목에 포진지를 구축한다. 1900년 초부터 만들기 시작한 일본군 포진지는 부산 기장, 용호동, 영도, 가덕도 외양포, 거제 지심도, 제주도 등 동남해안 11군데에 이른다.

이 가운데 장자등 포진지는 규모가 매우 컸다. 전체 부지는 5000여평, 지하시설 연면적이 500여평에 달했다. 내부는 폭 14m, 길이 45m, 높이 3m의 동굴 형태다. 바닥에는 장비 운반을 위한 레일을 깔았고, 포탄 운반용 수압조절기와 승강기까지 설치했다. 당시로선 첨단 포진지였던 셈이다. 이곳에 일본군 대대 병력이 주둔했다.

장자등 포진지에는 군함에 쓰던 함포가 그대로 설치됐다. 1921년 영국과 미국, 일본은 워싱턴 군축조약에 따라 주력 함정 비율을 각각 5:5:3으로 합의했다. 당시 일본은 막강 전함 '도사'와 '아카기'를 건조하면서 구경 16.1인치(410㎜) 함포를 장착하고 있었다. 그런데 군축조약으로 이 전함이 폐기될 상황에 놓이자, 함포를 그대로 떼어와 부산 오륙도와 대마도 북단의 토요포대에 설치한 것이다. 장자등 포진지를 일명 '육상 군함(구남)'이라 부르게 된 건 이런 연유다.

부산 장자등과 대마도 토요포대 사이의 거리는 50㎞. 반면 두 포대의 사거리는 30㎞여서 완벽한 포사격권에 들어갔다. 일본은 대마도 남단과 약 73㎞ 떨어진 후쿠오카 앞 이키섬에도 해안포를 설치, 적의 해상 공격에 대비했다. 한반도 일원을 요새화하려는 일본의 치밀한 방어 전략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대동아 공영권을 내세우던 일제의 야욕은 1945년 8월 히로시마에 원자탄이 투하되면서 보기 좋게 꺾였다. 1945년 6월부터 미군의 B29 포격기가 부산 하늘을 출몰하기 시작했다. 항간에선 일제가 항복한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그해 7월부터 8월 초에는 오륙도 상공에 B29 폭격기가 배회하더니 장자등 포진지에 폭탄 4발을 떨어뜨렸다. 꽝~꽈꽝~. 장자등 언덕의 대형 포신이 날아갔고, 포진지 일부 터널이 내려앉았다. 미군은 일본군이 사용하던 함포와 총기 등을 배에 싣고 나가 바다에 투척하게 하고 본국 귀환을 종용한다. 한국도 해방을 맞는다.

#교훈의 역사공원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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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늘하고 오싹하군요!"

왕 씨와 함께 장자등 포진지 내부를 답사하던 부산 남구 김용민 홍보계장이 긴장된 표정으로 말했다. 동굴 안은 칠흑처럼 캄캄했다. 플래시를 하나씩 들었지만 전체를 비춰주진 못한다. 명멸하는 카메라 플래시가 구원의 빛처럼 여겨진다. 굴 천장에 철근들이 흉물스럽게 덕지덕지 붙어 있다. 왕 씨가 혀를 끌끌 차며 말한다.

"주민들이 철근을 빼먹은 자취야. 철근이 돈이 되니까…. 아주 의미있는 일제시대 유적인데, 이렇게 방치를 하니 원형이 훼손되는 거야. "

장자등 포진지는 일부가 매몰됐으나, 지금도 콘크리트 구조물과 쌍굴 상당부분이 남아 있다. 6·25 전쟁 이후 뒤편 쌍굴은 군부대의 문서보관소로 이용되다 해군이 넘겨받아 관리 중이며, 바깥쪽 쌍굴은 한때 용호농장 나환자들이 새우젓 숙성 창고로 사용했다.

한반도의 일제 포진지를 연구하고 있는 부산KBS 이완희 PD(현 부산KBS 편성제작국장)는 "장자등 포진지는 일제가 한반도 지배를 획책한 실체적 사례라 할 수 있다"고 했다. 지난 2009년 KBS스페셜에 '1945년 한반도는 일제의 결전기지였다'라는 프로그램을 제작한 바 있는 이 PD는 의미심장한 제안을 했다.

"우리는 역사자원을 너무 소홀히 해요. 이곳에서 전개된 일제의 포진지 공사와 부산항 요새화 과정, 미군에 의한 폭파, 이후 용호동 나환자촌 주민들의 창고 활용까지 모두 이야깃거리 아닙니까. 스토리텔링만 잘 하면 훌륭한 교육자료, 관광자원이 될 수 있습니다."

이제 장자등 포진지를 관할·관리하고 있는 지자체와 군당국과 응답할 차례다.

◇"두 기생 무덤 있어 이기대 이름 지어져…몇 년 전 직접 발견"

- 향토사 연구위원 왕정문 씨 주장

- 임진왜란 때 왜장 끌어안고 죽어

- 과거 기생조합서 매년 위로 행사

"이기대(二妓臺) 이야기를 하려면 제대로 알고 해야지. 그렇잖아도 논란이 많은데, 가공을 통한 팩션을 갖다붙이면 논란이 더해지지 않나 말야?"

장자등(오륙도) 포진지 터를 함께 답사한 왕정문(67·남구문화원 향토사 연구위원·사진) 씨는 본지의 이기대 스토리텔링에 대해 불만이 적지 않았다. 용호동 토박이로서 '이기대'에 대해 그만큼 많이 듣고 연구 조사한 사람은 없다고 자신하는 그다. 포진지를 안내하면서도 그의 촉수는 이기대에 닿아 있었다. 점입가경, 이야기는 그가 몇 년 전 발견했다는 이기, 즉 두 기생의 무덤으로 모아졌다. 다음은 그와의 인터뷰.

-두 기생의 무덤이라는 증거가 있습니까?

"문헌과 구전을 통해 안 거죠. 1850년 당시 좌수사가 쓴 '동래영지'에 '좌수영 남쪽으로 15리(6㎞)에 두 명의 기생 무덤이 있어 이기대라 부른다'고 돼 있어요. 공룡바위 부근의 정황과 구전에 비춰보면 거의 틀림없다고 봐요."

-이기대는 후대에 지어진 이름이라는데.

"기생이 죽었다고 하니 처음엔 대(臺)를 붙일 수 없었지요. 기록을 보면 이기가, 이기개, 이기총 등으로 나타나기도 해요."

-구전 중 잘 알려지지 않은 내용도 있다던데.

"임진왜란 당시 왜놈들의 승전 파티에 우리쪽 악사 5명과 기생 2명이 갔다고 합니다. 왜장을 끌어안고 죽었으나 당시엔 실족사로 처리된 것 같아요. 하지만 진실은 언젠가 드러나죠."

-두 기생의 넋을 위로하는 행사도 있었다죠.

"우리 조부께서 1965년까지 매년 부산 동구 초량동과 서구 충무동 권번(기생조합)에서 기생들을 이곳으로 불러 위로연을 열었다고 해요. 알고 보니, 두 기생의 넋을 위로하는 행사였어요. 그러니까 주민들이 챙기고 있었던 거예요."

-남구에서도 무덤을 인정하나요?

"남구에서 2011년 9월부터 묘 주변에 울타리를 치고 연고자를 찾는 공고문을 붙였으나 아직 아무런 소식이 없다고 해요. 연말까지 연고자가 나타나지 않으면 고증작업에 들어가야죠. 어떻게든 관광자원으로 활용해야 합니다."

왕 씨는 인터넷 다음에 '농바우'라는 개인 블로그를 개설, 용호동과 이기대 일대의 지명유래 등을 흥미롭게 소개하고 있다.

※'오륙도-이기대 스토리텔링'은 〈6회〉로 끝이 나고, 다음주부터는 '송상현 광장 스토리텔링'이 이어집니다.

※ 공동기획: (사)부산스토리텔링협의회, 부산 남구, 국제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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