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오래된 '13세기 금속활자’ 개성 만월대서 찾았다…청자그릇 속에 박힌채 출토된 '성할 선’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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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개성 만월대 조사단이 2017년 발굴한 금속활자 ‘성할 선’자. 13세기 유물인 꽃모양청자접시 속에 박힌채(○표시 안) 확인됐다. 기록으로만 전해진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본(<고금상정예문> 및 <남명천화상송증도가>)과 같은 시기의 금속활자다. |최광식 교수 제공
북한 개성 만월대 조사단이 2017년 발굴한 금속활자 ‘성할 선’자. 13세기 유물인 꽃모양청자접시 속에 박힌채(○표시 안) 확인됐다. 기록으로만 전해진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본(<고금상정예문> 및 <남명천화상송증도가>)과 같은 시기의 금속활자다. |최광식 교수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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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헌상 금속활자로 간행된 최초의 책으로 알려진 <고금상정예문>(1234~1241년) 및 <남명천화상송증도가>(1239년)와 같은 시기인 13세기에 사용된 금속활자가 처음으로 확인됐다. ‘성할 선(人변에 扇)’자가 새겨진 이 금속활자는 13세기 유물인 청자접시 속에 박힌채 발굴됨으로써 역사학·고고학적으로 획기적인 의미를 갖는다.
2007년 1차 조사 때부터 만월대 공동발굴을 이끌어온 최광식 남북역사학자협의회 고문(고려대 명예교수)은 15일 고려대 국제관에서 열리는 ‘고려 도성 개경 궁성 만월대’ 학술심포지엄에서 기조강연을 통해 “2017년 북한이 만월대를 단독 발굴하면서 ‘성할 선’자를 더 찾아낸 것으로 확인됐다”는 내용을 공개할 예정이다.
■청자속에 박힌채 발견된 금속활자
지금까지 남북한 학자들이 고려궁성인 개성 만월대에 대한 공동조사를 시작한 2007년부터 이곳에서 찾아낸 고려 금속활자는 모두 5점으로 알려져 있었다. 2015년 11월 남북한 조사단이 공동으로 찾아낸 ‘한결같은 단(전·혹은 아름다운 전)’자 1점과, 2016년 북측의 4차 핵실험과 남측의 개성공단 무기한 중단 등에 따라 북측 단독으로 확인한 4점(水변에 仄·糟·名·明) 등이다. 기존 남측의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복(山 밑에 復)’자와 북측 조선중앙역사박물관이 보관하고 있는 ‘전(顚)’자 등 2점을 합하면 총 7점의 금속활자가 확인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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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이 소장중인 금속활자. 물흐르는 모양 칙과 지게미 조, 이름 명 눈밝을 명, (산)이마 전 등이다.|조정철의 ‘만월대에서 발굴된 금속활자와 청자 꽃모양 접시에 대하여’, <민족문화유산>, 2018년 4월호에서.
■2017년 북한 단독으로 발굴
그런데 이 7점 외에 남북관계가 급냉되면서 북한 단독으로 발굴한 지난 2017년 조사에서 금속활자가 1점 더 확인됐다는 것이다. 최광식 교수는 미리 배포한 기조강연문(‘개성 만월대 발굴조사의 성과와 과제’)에서 “확인된 ‘선’자는 2015년 남북한이 공동으로 발굴한 지점과 가까운 곳에서 찾아냈다”면서 “재질도 2016년 북한이 단독 발굴한 4점과 같다”고 전했다. 최교수는 “이같은 발굴성과는 북측 조사단의 일원인 조정철이 지난해 4월 학술지 논문(‘만월대에서 발굴된 금속활자와 청자꽃모양 접시에 대하여’, <민족문화유산>)을 발표함으로써 알려졌다”고 덧붙였다. 최교수는 “이 금속활자 ‘선’자는 발굴 당시 흙속 30㎝에 묻힌 청자 접시 안에 박혀있었다”고 전했다. 이로써 지금까지 확인된 금속활자는 남북한 통틀어 8점으로 늘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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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노동신문에 실린 개성 만월대 출토 금속활자들. |최광식 교수의 기조강연문에서.
북한학계에 보고된 이 ‘성할 선’자는 가로 1.174cm×세로 1.164cm×높이 0.68cm 정도이다. 2007년 이후 찾아낸 다른 5점의 금속활자는 ‘물채질’로 걸러냈지만 ‘성할 선’자는 흙속에 묻혀있던 13세기 청자 속에 박혀있었다. 이는 고고학적으로 엄청난 의미를 지닌다. 최교수는 “이 ‘선’자가 13세기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꽃모양 청자접시’와 함께 발굴됐다”면서 “이는 금속활자의 제작시기와 관련되어 획기적인 자료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2015년 남북한 조사단이 공동으로 발굴한 ‘단(전)’자는 만월대 신봉문터 서쪽 255m 지점에서, 2016년과 2017년 북한이 단독으로 발굴한 4점과 1점 역시 이곳과 가까운 곳에서 찾아냈다. 북한학계 보고에 따르면 1956년 발굴되어 지금 조선역사박물관이 소장한 ‘전(顚)’자 역시 신봉문터 서쪽에서 확인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지금까지 발견된 금속활자들의 생김새나 크기, 재질 등이 모두 같다고도 한다. 이는 만월대 신봉문터 인근 지역에 금속활자를 주조한 주자소의 존재를 가늠해볼 수 있다. 남측의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한 ‘복’자는 1913년 10월7일 덕수궁 구 왕궁박물관이 일본인 골동품상 아카보시(赤星佐七)로부터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12원을 주고 사들인 것이어서 출토지를 알 수 없다. 그러나 이 역시 출토지가 ‘개성’인 것으로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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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한이 1점씩 소장하고 있었던 금속활자등. 남측의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복’자는 1913년 일본인 골동품상으로부터 구입한 것이며, 북측 소장 ‘전’자는 1956년 개성 만월대에서 발굴한 활자라 한다. |국립문화재연구소 제공.
■<고금상정예문> <남명천화상송증도가> 찍어낸 활자인가
지금까지 문헌상 금속활자로 간행된 최초의 책은 1234~1241년 사이에 출간된 <고금상정예문>과 1239년 나온 <남명천화상송증도가> 등이 있다. <고금상정예문>은 나라의 제도와 법규를 정할 때 참고했던 책이다.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집>에 “(1234~1241년 사이) 강화도에서 <고금상정예문> 28부를 금속활자로 찍었다”고 했다. 그러나 이 <고금상정예문>은 기록만 존재할 뿐이었다. 또 <남명천화상송증도가>의 경우 책의 발문을 보면 고려 무인정권의 실세인 최이(?~1249)가 “이 책이 제대로 유통되지 않으니 주자본(鑄字本·금속활자본)으로 판각한다. 기해년(1239년)”이라고 기록했다. 그러나 이 책도 안타깝게 목판본만 전해지고 있다. 지금까지 현전하는 세계 최고(最古)의 금속활자본은 1377년(공민왕 13) 청주 흥덕사에서 인쇄한 <직지심체요절>이다. 서양에서 요하네스 구텐베르크(1397~1468)가 처음 금속활자를 발명한 것이 1447년 무렵이니 <고금상정예문> 및 <남명천화상송증도가>보다 무려 210여년 뒤처진다.
최교수는 “이번에 12~13세기에 제작된 꽃모양청자접시(청자화형접시)와 함께 발굴됨으로써 ‘선’자의 제작시기가 기록으로만 존재했던 <고금상정예문> 시기까지 올라간다는 사실을 고고학적으로 알려주었다”면서 “‘고려=금속활자의 나라’임을 확실하게 부각시키는 발굴성과”라고 의미를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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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성 만월대 서북지구. 이 인근에서 고려 금속활자들이 속속 발굴되고 있다. 이 근방에 금속활자를 제작한 주자소가 존재했을 가능성이 짙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고려 금속활자는 왜 적을까
그렇다면 한가지 의문이 생긴다. 고려가 금속활자의 원조임에도 지금까지 남아있는 금속활자가 턱없이 적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서양의 경우 구텐베르크가 활판인쇄로 금속활자를 대량보급한 것과 달리 최초발명국이던 고려의 금속활자는 그 존재조차 찾기 어려울 정도로 후퇴하고 말았다.
왜 서양에서는 금속활자 선풍이 불었을까. 금속활자를 발명한 것은 고려였지만 활판인쇄로 실용화한 것은 구텐베르크였다. 구텐베르크 이전의 유럽에서는 수도사가 한 자 한 자 필사해서 10~15일에 겨우 한권의 성경을 만들었다. 그러던 차에 구텐베르크가 혜성같이 나타나 같은 책을 수십권. 수백권을 찍어댄 것이다. 구텐베르크가 활판인쇄를 찍어낸 지 불과 50여 년 만에 유럽 전역 350개 도시에 1000개 이상의 인쇄소가 생겼다.
그 50년동안 대략 3만종 900만부의 서적이 출간됐다. 유럽은 구텐베르크의 활자혁명으로 책이 대량 보급되었고, 종교개혁과 과학혁명, 문예부흥시대가 이어졌다.
그러나 금속활자의 최초발명국인 고려와 그 뒤를 이은 조선에서 서적은 대중용이 아니었다. 왕실과 사대부 용이었다. 조선왕조실록처럼 몇 부 찍어서 4~5대 사고(史庫)에 보관하는데 그쳤다. 그러니 지식의 확대재생산에는 한계가 있었다. 근본적인 문제도 있었다. 영어 알파벳은 26자로 모든 글자를 표현할 수 있다. 그러나 동양의 공식글자였던 한자는 5만자가 넘는다. 이렇게 많은 글자를 활자로 구현하기는 매우 힘들다.
고려·조선에서 활자인쇄가 쉽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그러다보니 남아있는 금속활자의 수도 거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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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남북공동 조사단의 개성 만월대 제 7차 발굴에서 찾아낸 명문기와. 월개요에서 ‘동똥’이라는 기와장인이 제작한 기와라는 의미이다. 사진은 글자를 도드라지게 처리한 모습..
■<증도가자> 재검증, 만월대 주자소 발굴 등이 필요
몇 년 전 <남명천화상송증도가>를 찍어냈다는 이른바 ‘증도가자’가 100여 점 나왔으나 ‘보물 지정’을 두고 진위논란을 빚었기 때문에 치지도외(置之度外) 되고 있다. 문화재청이 이 <증도가자>의 진위를 판정하는 조사단을 조직한 뒤 문화재위원회 동산문화재분과의 심의에서 ‘보물 지정’이 최종 부결된 바 있다. <증도가자>가 과학적 분석에 의하면 고려시대에 제작된 금속활자일 가능성이 있지만, 출처와 소장경위가 불분명해 고려금속활자로 판단하기 어렵다고 판정한 것이다. 정재숙 문화재청장은 10월 열린 국회 국정감사에서 “<증도가자>가 고려 금속활자일 가능성은 유보적인 입장”이라고 밝힌바 있다. 그러나 <증도가자>의 연대가 고려시대일 가능성이 있다는 과학적 분석결과도 있는 만큼 차제에 다시 한번 검증해볼 필요가 있다. <증도가자>가 13세기 금속활자본인 <고금상정예문> 및 <남명천화상송증도가>를 찍어낸 활자가 맞는데도 출처·소장경위 등을 문제삼아 ‘가짜판정’을 내린다면 씻을 수 없는 손실이기 때문이다.
또하나 ‘지속가능한 개성 만월대의 남북한 공동조사 사업’을 마련하는 것도 간과할 수 없다. 남북관계가 냉랭해진 다음 북한 단독으로 금속활자들을 잇달아 발굴하자 남측학자들은 발만 동동 굴렀다. 활자들이 속속 발굴되는 신봉문터 인근지역에 금속활자를 찍어낸 주자소가 존재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정재숙 청장은 “최소한 5년 단위의 공동조사 연구사업으로 남북한이 합의해야 정치적인 변수에 구애받고 안정적으로 문화교류사업을 벌일 수 있을 것”이라고 희망했다. 만월대 지역은 고려 망국 이후 약 700년 동안 별다른 인위적인 훼손없이 보존되어온 곳이다. 남북한 학자들이 금속활자를 주조한 이른바 주자소’를 찾아낸다면 ‘고려=금속활자 발명국’임을 재차 확인할 수 있는 획기적인 발굴성과를 이룰 수 있다.
이기환 선임기자 lkh@kyunghyang.com
입력 : 2019.11.14 09:15 수정 : 2019.11.14 1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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