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성왕씨 부산파

北 고려왕릉 40여 기⓵ 능주도 모른다

아지빠 2020. 1. 4. 08:49





北 고려왕릉 40여 기 능주도 모른다

수백여 년 방치·도굴… 18곳만 왕릉주인 확인 김정은 왕릉 대대적 정비에도 곳곳 황폐화

평화경제연구소 사진 500여 장 단독입수 공개

1. 연재를 시작하며

북한 개성지역에 흩어져 있는 60여 기의 고려왕릉은 오랜 세월 역사의 풍파에 시달리며 능주를 확인할 수 있는 시책(諡冊)이 대부분 분실됐다. 김정은 체제가 들어서며 대대적 발굴·정비에 나섰지만 18기의 능주만 확인했을 뿐이다. 남북을 아우른 500년 왕조의 유적이 처참하게 쇠락한 것이다. 이 왕릉들의 현재 모습을 살펴보는 것은 남북의 역사를 잇는 하나의 작은 발걸음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뉴시스는 분단 75주년을 맞아 머니투데이 미디어 산하 평화경제연구소가 단독입수한 500여 점의 개성지역 고려왕릉 사진을 정창현 평화경제연구소장의 글과 함께 매주 연재한다.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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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북한은 개성시 용흥동에 있는 소릉군으로 부르는 5기의 왕릉을 대대적으로 보수 정비했다. 사진 오른쪽 상단에 ‘소릉군 제3릉’을 정비하는 대원들 모습이 보이고 있다. (사진=평화경제연구소 제공)

 북한이 김정은 체제 출범 이후 문화재 발굴과 정비에 부쩍 신경을 쓰고 있다. 특히 지난 5년간 북한 당국이 개성시와 개성 인근 지역에 흩어져 있는 고려 왕릉과 왕릉으로 추정되는 무덤을 대대적으로 발굴, 정비한 것으로 확인됐다. 이 과정에서 고려 9대 왕 덕종(숙릉, 肅陵)과 10대 왕 정종(주릉, 周凌)의 무덤을 새로 찾아냈고, 2017년에는 15대 숙종(영릉, 英陵)의 묘를 발굴했다. 또한 남북이 공동 발굴해온 고려궁궐 만월대(滿月臺)를 독자적으로 발굴 조사해 금속활자 1점을 찾았고, 지난해에는 화곡릉을 발굴해 2대 혜종의 묘라고 확정 발표했다.

분단 이후 사실상 처음으로 개성지역 고려 왕릉에 대한 전면적인 조사와 보수가 이뤄지고 있던 셈이다. 개성의 고려 왕릉들은 1956년 사회과학원 고고학연구소가 공민왕릉을 발굴하면서 조사가 시작됐고, 총 20여 기의 왕릉과 왕릉급 고분들이 간헐적으로 조사된 것으로 전해진다. 발굴 이후 북한은 1994년 태조 왕건이 묻힌 현릉(顯陵)을 대대적으로 개건하고 공민왕릉을 보수했지만, 나머지 왕릉들은 거의 방치되어 세월의 풍상을 견뎌야 했다. 1990년대 중반 최악의 경제난을 겪으면서 문화재 관리에 신경을 쓸 여력도 부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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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태조 왕건의 무덤 북쪽에 있는 7릉군의 제1릉 앞에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됐다는 표식비가 세워져 있다. 고려 왕릉 중에서는 7층군을 비롯해 태조 현릉(顯陵), 공민왕 현릉(玄陵), 명릉군이 포함됐다. (사진=평화경제연구소 제공)

2004년 ‘고구려 고분군’(高句麗 古墳群), 2013년 개성역사유적지구를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으로 올리는데 성공하면서 북한은 민족문화유산의 보존과 세계화에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김정은 국무위원장까지 직접 나서 2014년 ‘민족유산보호사업은 우리 민족의 역사와 전통을 빛내는 애국사업이다’ 제목의 담화를 통해 “우리나라 유산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하기 위한 활동을 계속해야 한다”고 독려했다. 문화재 관리 법제도 개정해 2015년 ‘민족유산보호법’을 새로 제정했다.

이후 북한은 내각 민족 유산 보호국민족유산보호국 산하 조선민족유산보존사와 사회과학원 고고학연구소의 연구사, 송도사범대학 교원 주도로 고려의 도성인 개성성 안의 여러 유적과 도성 밖 고려 왕릉에 대한 대대적인 조사 활동을 벌인 것으로 전해진다.

- 왕릉의 현재와 과거 비교 위해 수천장 사진DB 대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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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는 고적조사 명목으로 고려 왕릉을 조사한 후 출토된 유물을 약탈해 갔다. 사진은 1916년 고적조사 후 촬영한 명종의 지릉 전경. 당시도 퇴락한 모습이었고, 현재는 완전히 소실된 것으로 추정된다. (사진=국립중앙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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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인종의 능에서 발견된 시책. 아들 의종이 선왕인 인종의 생전의 여러 업적과 인품을 서술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고, 말미에 시호와 묘호를 기록하였다. 명문이 새겨진 책엽(冊葉) 41개(33.0×3.0×2.5cm)와 천부상(天部像)이 새겨진 다소 넓은 책엽 2개(33.0×8.5×2.5cm)로 구성되어 있다. (사진=국립중앙박물관)

머니투데이미디어 산하 평화경제연구소는 개성지역에 대한 북한의 조사와 발굴 작업이 활발해진 것에 주목해 지난 1년 동안 고려 왕릉의 과거와 현재를 종합적으로 엿볼 수 있는 사진과 동영상을 집중적으로 수집했다. 이 과정에서 최근 중국, 일본, 미국 등 북한에 들어갈 수 있는 해외교포를 통해 고려 왕릉 사진 5백여 장을 단독 입수했다. 이를 과거 고려 왕릉의 모습과 비교 분석하기 위해 일제강점기는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유리 원판 사진을, 분단 이후 시기는 ㈜미디어한국학이 소장한 수천 장의 개성지역 역사유적 사진 DB를 활용했다.

현재 개성지역에 남아 있는 고려 왕릉 중에서 무덤의 주인이 밝혀지거나 추론이 가능한 것은 모두 18기다. 태조 왕건을 비롯해 혜종(2대), 정종(3대), 광종(4대), 경종(5대), 성종(6대), 현종(8대), 덕종(9대), 정종(10대), 문종(11대), 순종(12대), 숙종(15대), 예종(16대), 신종(20대), 원종(24대), 충목왕(29대), 충정왕(30대), 공민왕(31대) 등이다.

개성지역 18기 왕릉은 현재 행정구역상 개성시와 황해북도 개풍군에 모두 소재한다. 그중 태조 현릉(顯陵)과 공민왕의 현릉(玄陵)은 국보급 유적으로, 나머지는 보존급 유적으로 지정돼 관리되어 왔다. 이번에 입수된 사진을 통해 2017년 발굴한 숙종 영릉이 국보 유적 36호로 새로 지정된 사실이 처음으로 확인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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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쇠락한 고령 왕릉 처참한 모습 드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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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2016년 북한이 황해도 개풍군 해선리에서 발굴한 9대 덕종의 숙릉으로 비정한 무덤의 모습이 보이고 있다. 왕릉의 모습이라 보기 어려울 정도로 관리 상태가 엉망이고, 도굴의 흔적이 역력하게 남아 있다. (사진=평화경제연구소 제공)

최근 사진을 통해 확인된 고려 왕릉은 북한 당국의 대대적인 정비에도 600년 넘게 제대로 관리되지 않아 석물의 상당수가 사라지고 왕릉이라고 볼 수 없을 정도로 황폐해진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관리가 잘된 신라나 조선 시대의 왕릉과 비교하면 충격적인 모습이 아닐 수 없다. 몰락한 왕조의 비애를 그대로 보여주는 듯하다.

현재 파악된 고려 시대 재위 국왕, 추존된 국왕, 그리고 왕비와 공주를 포함한 왕릉은 모두 61기이다. 그러나 주인공을 알 수 있는 왕릉은 현재 20여 기에 불과하다. 제17대 인종 때까지만 해도 고려는 59기의 왕릉에 위숙군(圍宿軍)을 배치해 철저히 관리하였으나 무인집권기와 몽골 침입기 등을 거치면서 왕릉에 대한 관리가 소홀하게 되면서 많은 왕릉이 도굴 피해를 당하였고, 그에 따른 보수가 여러 차례 있었다.

- 고려 왕릉은 왜 이렇게 방치됐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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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가 멸망하고 조선이 건국되면서 이 왕릉마저도 제대로 유지되지 못했다. 조선 건국 이후, 태종은 고려의 태조를 비롯한 전조 8왕의 능에만 수호인(守護人)을 두었고, 세종은 태조·현종·문종·원종의 능에만 수호인을 두고 나머지 왕릉은 소재지의 관(官)이 관리케 하였다. 따라서 4명의 왕을 제외한 나머지 왕릉은 관리가 소홀해지게 되었고, 구전으로 왕릉의 위치 등이 전승되는 수준이었다.

이후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고려 왕릉은 다시 방치되었다. 현재 확인되는 왕릉의 능주는 양난 이후 대부분 실전됐다가, 조선 현종 때 다시 고려 왕릉을 찾아서 비정한 것을 기반으로 한 것이다. 현종은 1662년부터 고려 왕릉의 보수와 관리 등을 실시해 고려 왕릉 61기 가운데 43기까지 파악할 수 있었고, 그 가운데 능주를 알 수 없는 왕릉에 대해서는 번호를 매겨 통칭했다.

1867년(고종4) 고종은 고려 왕릉을 일제히 정비하여 57기에 대해 ‘고려 왕릉’이라고 표석을 세웠다. 이들 명칭은 1910년대 조선총독부의 왕릉조사 사업 때까지 이어졌고, 그 결과물이 1916년 『고려제릉묘조사보고서(高麗諸陵墓調査報告書)』에 표기된 53기 고려 왕릉의 위치이다. 이것이 현재까지 이어져 오늘날에도 그대로 불리고 있지만 불확실한 능주를 둘러싼 논쟁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 관리와 연구 위해 남북 공동 노력 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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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개건을 마친 태조 왕건의 현릉. 다른 고려 왕릉에 비해 잘 관리되어 있다. 2013년 유네스코지정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는 표지석이 앞에 서 있다. (사진=평화경제연구소 제공)

 

대다수 고려 왕릉의 능주를 알 수 없게 된 결정적인 이유는 왕릉 안에 여러 부장품과 함께 묻은 시책(諡冊)이 도굴되거나 없어졌기 때문이다. 시책이란 왕의 시호와 묘호, 생전의 업적 등을 돌에 새긴 것이다. 글을 새긴 각 돌의 옆면 위아래에 구멍을 하나씩 뚫어 금실 같은 끈을 넣어 연결해 놓았다. 현재 발견된 시책은 두 개로 고려 17대 인종(仁宗)과 20대 신종(神宗)의 무덤에서 나온 것이다.

인종 시책은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그렇게 된 사연이 기구하다. 이 시책은 1916년 9월 25일 총독부 박물관에서 일본 육군대학 교수이자 일본어 학자로서 한국도자기 컬렉터로도 유명한 구로다 다쿠마(黑田太久馬)로부터 사들인 것으로 고려청자 등 인종의 무덤인 장릉(長陵)에서 도굴된 여러 점의 유물과 함께 입수됐다. 구로다가 어떻게 이것을 구했는지, 경술국치 직전 통감부에서 촉탁으로 근무한 그가 개성 왕릉 도굴에 어느 정도 개입했는지 알려지지 않았다.

1908년부터 1910년대에 걸쳐 일본인들에 의한 개성 주변의 분묘 도굴과 고려청자의 유통이 성행했다는 여러 사람의 증언으로 미루어 보아, 이들 역시 개성의 인종 장릉에서 도굴되어 도쿄까지 건너갔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나마 총독부 박물관이 구매해 해방 후 국립중앙박물관에 남게 된 것이 다행이다. 다른 고려 왕릉의 시책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존재 자체가 알려지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고려 왕릉은 일제강점기에 집중적인 도굴 피해를 당하였고, 한국전쟁 때도 많은 석물이 파괴·분실돼 대다수 왕릉의 원형은 크게 훼손됐다. 휴전 이후에도 개성이 군사도시로 되면서 고려 왕릉은 제대로 관리되기 어려웠다. 해방 후 남과 북으로 갈라진 분단의 굴레에서 고려 왕릉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북한은 2013년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개성역사유적지구에 당시 제외된 고려 왕릉(태조릉, 공민왕릉 명릉군, 7릉군만 포함)을 추가로 포함하려는 의도가 있는 듯하다. 남한에서는 강화도 소재 고려 왕릉까지 포함해 남북이 공동으로 확장 올리는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

고려 왕릉은 삼국시대에서 조선 시대로 이어지는 묘제를 잘 보여준다. 왕릉의 크기 변화, 출토 유물 등은 당대의 권력 관계와 사회문화를 엿볼 수 있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가장 최근 모습을 확인할 수 있는 사진으로나마 고려 왕릉 연구에서 남과 북이 소통하고 교류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한다.

정창현 평화경제연구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