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만동 한센인 정착촌 초기모습
감만동 상애원 앞 한센인 기념촬영(벼돌교회 1924년)
상애원 항센인 운동회(용호동 상애원 운동회매년개최) 가족이거주 가옥은 흙벽돌을 이용하였다.
상애원에 입소하기위해 기다리는 나환자
구평동과 청학동해병33대대등 한센정착촌 뒷산을 일구어 텃밭에 채소를 심었다 저멀리 오륙도와 신선대 송림이보인다
감만동 상애원은 대붕산(신선대가 있는 주봉)이 가려 오륙도가 보이지 않내요(구글어스확인)
미군이 사진 정리를 하면서 잘못기록한것을 확인하지 않고 실수를 한것 양해바랍니다
#상애원(相愛園) 한센인 정착촌
한센인 보호병원 감만동 상애원은 1910년 개원하였고 1912년 이래로 호주선교 부가 운영하던 의료 및 구호 시설이었다.
원래 나병(한센병)은 인간이 당하는 가장 고통스러운 병으로 가족으로부터 격리되고 의료혜택도 누릴 수 없어 이들이 당하는 정신적, 육체적 아픔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이런 아픔을 안고 절망 속에 살아가는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일용할 양식과 의료혜택을 베푸는 일은 기독교 신앙에서만 가능한 사역이다.
상애원은 1912년 5월 제임스 노블 맥켄지( James Noble. Mackenzie 1865-1956 : 한국명 매견시 梅見施) 원장으로 취임하면서 이름이지어지고 활성화 되었다. 당초 미국 북 장로교 어빈(Irvin)선교사에 의하여 감만동에 자리를 잡았다, 그 후1909년 부산지역이 호주장로회 선교구역으로 정해져 호주장로회 선교부로 이관되었다.
매켄지가 목사와 의사로서 상애원 환자들에게 쏟은 정성은 지극하였다. 1930년대 전국의 한센병자 수는 2만 명 정도였는데 이 가운데 1/3에 해당하는 6~7천명이 경상남도에 집중적으로 거주하고 있었으므로 매켄지는 상애원 운영에 더 큰 사명감을 가질 수 있었다.
처음20여명으로 시작된 나환자수용소는 1911년40명의환자를 돌보며 상애원으로 공식정비된후 1914년80명으로 늘었으며 1938년650명까지 늘었다.
이들에게 삶의 여건을 개선하고 약물치료를 통하여 사망률을 감소시키는 일도 대단히 중요하였다. 1917년부터 피하주사(대풍자유)를 사용한 이후 25%의 환자 사망률을 2%로 줄이는 놀라운 성과를 거두었다. 상애원은 단순히 병을 치료하는 병원이 아니라 스스로 자활하는 생활공동체 기능과 신앙 수련과 복음을 전하는 선교공동체 역할을 담당하였다.
이곳에서 사랑의 원자탄으로 잘 알려진 손양원은 매켄지를 만나게 되었고 나병환자들에 대한 연민과 애정을 갖게 되고, 이들에 대하여 관심을 갔게 된다. 손양원 전도사가 이곳에서 일하게 되는 1926년부터 1934년까지의 기간은 수용인원은 450명에서 600명에 달했고 ,이 기간 동안 건물이 세워지는 등 나환자들의 수용과 진료, 영적 지도에 있어서 가장 활발한 시기였다.
제임스 노블 맥켄지 1910년부터 1939년 6월30일까지29년간 선교사 은퇴하였다 귀국1956년7월01일 91세로 별세.
매켄지 자서전에서 나환자들을 위한 선교 사역은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침울하고 맥이 빠진 것은 결코 아니다. 진실로 세월이 지나갈수록 나환자 가운데 살면서 사역하는 것보다 더 가치 있는 선교 사업은 없다 고 하였다.
감만동 상애원은 1940년12월 소록도 로 이주시작 완전철수1941년3월650명 수용자중 소록도로 간 환자 390명이며 나머지는 사방으로 흩어졌다.
해방 후 상애원은1946년3월 270명의 나환자를 이끌고 용호동 장자등 포진지 일본군막사 건물을 감만동과 같이 남녀 독신주거와 감만동 주거지를 철거하여 이곳에 재건축하여 선교와 한센인 치료를 하게 되었다.
용호동 상애원(이성곤 장로2001년작고)
에도 일본군 병영을 개조하여 운동장을 만들어 환우들의 건강에 힘썼다.
용호동 나환자 정착촌 상애교회는 2004년3월 기장군 정관면 용수리1047-2번지일원 3000평대지로 이전 65세대의 주택을 건축하여 새 터전에서 교회전통을 이어가고 있다.
용호2동 나환자 정착촌 재개발전 약1,200명이었다.
( 상애원에 대한 언론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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