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원제홀기
三願祭芴記
◉헌관급제집사 구취배위 ◉집례급대축제집사 선취배위
◉獻官及諸執事 俱就拜位 ◉執禮及大祝諸執事 先就拜位
◉입정◉개사배(국궁.배.흥.배.흥.배.흥.배.흥.평신)
◉立定◉皆四拜(鞠躬.拜.興.拜.興.拜.興.拜.興.平身)
◉알자대축급 제집사 .예관세위
◉謁者大祝及 諸執事 .詣盥帨位
◉관수강복위 ◉알자진 초헌관 지좌◉ 집사자.진찬.개독.
◉盥手降復位 ◉謁者進 初獻官 之左◉ 諸執事.陳饌.開櫝.
◉알자인 .초헌관.예신위전
◉謁者引 .初獻官.詣神位前
◉초헌관,점시진설.◉흘◉강복위◉알자.백근구청행사
◉初獻官,點視陳設.◉訖◉降復位◉謁者.白謹具請行祀
◉헌관이하 재위자 개사배(국궁.배.흥.배.흥.배.흥.배.흥.평신)
◉獻官以下 在位者 皆四拜(鞠躬.拜.興.拜.興.拜.興.拜.興.平身)
◉진홀◉봉향 봉로승◉삼상향 집홀
◉搢芴◉奉香 奉爐陞◉三上香 執芴
◉부복흥◉평신.◉강복위
◉俯伏興◉平身.◉降復位
행 초헌례
行 初獻禮
◉알자인 초헌관 예준소 북향립
◉謁者引 初獻官 詣樽所 北向立
◉사준거멱 작주
◉司樽擧冪 酌酒
◉헌관 신위전 궤◉진홀◉헌작전작승 ◉헌작집작 수헌관
◉獻官 神位前 跪◉搢芴◉獻爵奠爵陞 ◉獻爵執爵 授獻官
◉헌관수작 수전작◉전작수작 전어 신위전
◉獻官受爵 授奠爵◉奠爵受爵 奠於 神位前
◉헌관읍 계반개삽시정.부복흥.소퇴궤
◉獻官揖 啓飯蓋揷匙正.俯伏興.小退跪
◉헌관이하 재위자 개부복
◉獻官以下 在位者 皆俯伏
◉대축승 초헌관 지좌 동향궤.독 축문
◉大祝陞 初獻官 之左 東向跪.讀 祝文
◉헌관집홀◉부복흥.평신.강복위
◉獻官執芴◉俯伏興.平身.降復位
행 아헌례
行 亞獻禮
◉알자인 아현관 예관세위◉진홀.관수.세수,집홀
◉謁者引 亞獻官 詣盥帨位◉搢芴.盥手.帨手,執芴
◉예준소 ,북향립◉사준거멱,작주
◉詣樽所 ,北向立◉司樽擧冪 酌酒
◉헌관 신위전궤 진홀◉헌작전작승
◉獻官 神位前跪 搢芴◉獻爵奠爵陞
◉헌작집작 수헌관 ◉헌관수작 수전작
◉獻爵執爵 授獻官 ◉獻官受爵 授奠爵
◉전작수작 전어 신위전 헌관읍
◉奠爵受爵 奠於 神位前 獻官揖
◉헌관 집홀 .부복흥.평신.강복위
◉獻官 執芴 俯伏興.平身.降復位
행 종헌례
行 終獻禮
◉알자인 종헌관 예관세위◉진홀.관수.세수,집홀
◉謁者引 終獻官 詣盥帨位◉搢芴.盥手.帨手,執芴
◉예준소 ,북향립◉사준거멱,작주
◉詣樽所 ,北向立◉司樽擧冪 酌酒
◉헌관 신위전궤 진홀◉헌작 전작승
◉獻官 神位前跪 搢芴◉獻爵奠爵陞
◉헌작집작 수헌관 ◉헌관수작 수전작
◉獻爵執爵 授獻官 ◉獻官受爵 授奠爵
◉전작수작 전어신위전 헌관읍
◉奠爵受爵 奠於 神位前 獻官揖
◉헌관 집홀 .부복흥.평신.강복위
◉獻官 執芴 俯伏興.平身.降復位
◉진다.점다
◉進茶.點茶
◉현관이하 재위자 개사배(국궁.배.흥.배.흥.배.흥.배.흥.평신)
◉獻官以下 在位者 皆四拜(鞠躬.拜.興.拜.興.拜.興.拜.興.平身)
강복위
降復位
행 음복례
行 飮福禮
◉알자인 삼헌관 .예음복위, 서향정좌
◉謁者引 三獻官. 詣飮福位,西向定座
◉삼헌관 진홀.◉헌작전작승. 예준소,철작
◉三獻官 搢芴 ◉獻爵奠爵陞 .詣樽所 ,撤爵
◉대축이진감조육 성우반상
◉大祝以進減胙肉 盛宇盤上
◉헌작 이작수 삼헌관
◉獻爵 以爵授 三獻官
◉삼헌관 수작 줄음
◉三獻官 受爵 졸飮
◉헌작수 허작복어반상◉대축이조수 삼헌관
◉獻爵受 虛爵復於盤上◉大祝以胙授 三獻官
◉삼헌관 수조복환수대축
◉三獻官 受胙馥還授大祝
◉대축수조 복어반상◉삼헌관.집홀.부복흥.평신.
◉大祝受胙 復於盤上◉三獻官.執芴 俯伏興.平身
◉알자인 삼헌관 대축 헌작 전작 강복위
◉謁者引 三獻官 大祝 獻爵 奠爵 降復位
행 망요례
行 望燎禮
◉알자인 초헌관 예망요위 북향립
◉謁者引 初獻官 詣望燎位 北向立
◉대축승,이비취 축문급폐 강자서계출 이수헌관
◉大祝陞,以篚取 祝文及弊 降自西階出 以授獻官
◉헌관 치어감 가요
◉獻官 置於坎 可燎
◉알자인 초헌관 급대축 강복위
◉謁者引 初獻官 及大祝 降復位
◉헌작 전작승 하시저 합반개
◉獻爵 奠爵陞 下匙箸 合飯蓋
◉헌작 전작◉ 강복위
◉獻爵 奠爵◉ 降復位
◉알자 진헌관 지좌 백예필
◉謁者 進獻官 之左 白禮畢
◉헌관급 재위자 이차출
◉獻官及 在位者 以次出
◉대축승 합독
◉大祝陞 闔櫝
◉집례급 대축제 집사 구취배위
◉執禮及 大祝諸 執事 具就拜位
개사배(국궁.배.흥.배.흥.배.흥.배.흥.평신)이차출
皆四拜(鞠躬.拜.興.拜.興.拜.興.拜.興.平身)以次出
◉헌관이하 취원즙◉별좌음준
◉獻官以下 就圓楫◉別座飮餕
왕미(王亹) 할아버님의 묘(1365~?)고려공민왕14년
위치:경기도 시흥시 군자2동 산114(구지정뒤산)
고려가 멸망한 후 조선의 태조 이성계는 고려 왕족에 대하여
말살정책을 펴기 시작했는데 체포된 왕족들을 거제도와
강화도에 집단 수용시켜 식량을 주지 않으므로 초근목피와
곤충,벌레로 연명하게되었다.
2년뒤 이들마저 전부 바다에 수장시켜버렸다.
그때 희생된 왕족은 무려 10만명에 이르는데
당시 전국 인구가 2~3백만명 정도 였으니 그 잔악성은
가히 짐작이 가고 남는다.
이때부터 소수의 왕족은 어머니의 성을 따르거나
全(전)田(전)金(김)씨로 바꾸어 살았다
이조 3대왕 태종은 어느날 꿈에 고려태조(왕건)이 나타나
눈에 불을품으며 자기를 죽이려 하자 무릎을 꿇고
목숨만을 살려달라고 빌고난후 뉘우쳐
이후부터 왕씨탄압정책을 완화하고 숨어사는 왕씨들을
찾아내도록 했다
이때 나타난분이 현재 우리들의 중시조로 받드는
왕미(王亹)할아버님이시다.
할아버지는 외가성인 閔(민)씨로 변성하여 살다가
본성으로 되찾았는데 이때부터 왕씨말살정치는
완화되었다.
원래 亹(미)할아버지는 태조의12세손으로 벼슬은
교서감에 이르고 제용감정이라는 직책이 있었는데
왕씨 말살정책을 피하여 어머니의 성인 민씨로 바꾸고
동생 왕흥(王興)과 함께 중원(현충주)에 숨어 살았다.
이때 이웃아이들과 놀다가 성씨가 왕씨로 탄로나면서
곧 죽음을 당하게 되었는데 태종의 꿈에 나타난
고려 태조의 계시에 의하여 미할아버지의 형제분이
풀려 났다고 한다.
이때부터 고려왕씨의 후손들은 화를 면하게 되었지만
이전에 살해되었거나 성을바꾸었기 때문에 그 때까지
유적과 후손들은 거의 없어진 상태이고
현재 우리일족의 대부분(약90%이상)이 미 할아버지의
후손이므로 개성 왕씨의 중 시조라 한다
미 할아버지의 묘는 조선의 고종말까지 알려지지 않다가
묘지 근처에 살던 어느분이 봉분과 석물을 없애고
남 몰래 장사했던것을 알고 지석을 찾아 우리문중에
알려 줌으로써 비로서 묘를 찾게 되었다고 한다.
개성 왕씨는 고려때에는 개성에서 살다가
고려가 망한후 미할아버지(당시12세)부터 경기도
시흥에 살았으며 그 외 이천군 율면.연천군 미산면
경남 의령군 의령면. 전북익산군 여산면 등에
후손이 집단을 이루고 살았다
고려 태조는 29분의 부인을 두셨는데 그중9번째
부인이신 동양원부인 유씨의 차남이신 효은태자
(이름 東陽君이시고 전체아드님25명중 15번째)
가 우리 부산파의 직계이다.
여기서 다시 판서공파(判書公派)와 평양공파(平壤公派)
로 나누어지는데 우리부산파는 평양공파의 후손이며
평양공파의 시조이신 미할아버지의후손이90%이므로
오늘날 우리가 미할아버지를 고려태조 다음으로
중시조라고 하는이유다.
고릉(高陵)고려마지막임금(34대 공양왕)
고려 마지막 임금 공양왕 때에는 나라의 실권이 전부이성계
에게 넘어가고 이성계일파의 압력으로 즉위한 왕은 실권이
하나도 없는상태일 뿐만 아니라 즉위당시에도 왕의나이는
이미불혹을 넘긴 45세였다.고려는 34대 공양왕을 끝으로
나라가망하고, 이성계에 의하여 이씨조선이 건국하게 되는데
이러한 망국의 징조는 31대 공민왕 때부터 확연히 나타난다.
그래서 공민왕의 국정과 정세를 이해하기 쉽게 간략하게
기술하기로 한다,
고려31대 공민왕은 22세 즉위하여 처음에는 강력한 개혁정치를
실현하여 국가기강을 바로잡는 등 많은공을 세웠다.
금슬이 좋기로 소문난 왕비 노국공주가 15년이 가까워지도록
아이를 낳지못하다가 늦게 아이를가져 만삭이 되자 왕은
죄수들을 석방하는 등 크게 기뻐하였다,
그러나 노국공주는 산고를 이기지 못하고 끝내 죽자 크게충격을
받게된다. 실의에 빠진 공민왕은 “신돈”에게 모든 실권을 맡겨
놓고 정사를 돌보지 않을뿐만 아니라 ,정신병적인 증세를 보이기
시작하는데 젊고 예쁜 시녀들을 방안으로 불러들여 귀족의
아들로 구성된자제위소속 김흥경 홍륜등과 난잡한 음행을 하도록하고
자신은 문틈으로 그짓을 엿보곤 하였으며 ,마음이 동하면
홍륜등을 자기침실로 불러들여 동성애를 즐기기도 하였고
자신의 후계자가 없음을 염려한 나머지 홍륜과 함안등을 시켜
왕비를 강간토록하고 그들사이에 아들이 생기면 자기자식으로
삼으려 하였다, 그러든차에 그의 3번째부인 익비 한씨가 임신
하였다는 보고를 받고 이아이를 완전히 자기자식으로 조작하기
위하여 왕비와 관계한 홍륜과 그무리들을 죽이라고 최만생에게
지시하는데, 오히려 최만생이 홍륜에게 그 사실을 밀고 함으로써
공민왕이 만취한 상태로 침실에서 자고 있을때 이들이 침입하여
공민왕을 살해 하였다.
이성계 일파의 강압에 의하여 다음왕은 공민왕의 아들인 우왕이
10살의 어린나이로 제32대 왕으로 즉위하였으나 14년만에
쫓겨 났으며 제33대 왕으로 우왕의 아들인 창왕이 9살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였다,
창왕은 1년만에 쫓겨나 강화도로 유배 되었다가 두분은 모두
이성계의 일파에 의하여 죽임을 당하였는데 그때 우왕의나이24세
창왕의나이 10세에 불과 하였다
이렇게 이성계 일파에 의하여 두왕이 모두 죽임을 당한 표면상의
이유는 다음과 같다
공민왕 밑에서 왕의 총애를 한몸에 받고 왕권을 무작위로 행사한
“신돈”이 자기가 데리고 있던 몸종“반야”라는 여자를 공민왕의
6번째 부인으로 삼게하엿는데 그여자에게서 난아들 (우왕)이
필경 공민왕의 씨앗이 아니라 신돈의 씨앗이라는 것이었다.
이렇게 창왕이 10살의 어린나이에 죽자 그에게는 아들이
없으므로 다음으로 즉위한 임금이 왕요 인데 이분은 왕위를
13대나 거슬러 올라간 제20대왕 신종의7대손이었으며
그때 그이의 나이는 벌써 45세였는데 이가 곧 고려의 마지막
임금인 제34대 공양왕이다.
엉뚱하게 왕위를 계승할 대상이 아닌 왕요를 왕위에 올린 이유는
최근의 왕손과는 거리가 멀어 현직의 왕들을 해쳐도 반발이
적고 적당히 무능할뿐만 아니라 나이마져 많아 무기력하므로
부릴수가 있기 때문이었다,
형식적으로 왕권이 공양왕에게 있었으나 실직적으로는 이성계에
의하여 왕권이 이루어져 오다가 급기야 3년후 이성계가 국왕으로
즉위하면서 공양왕은 공양군으로 강등되 원주에 유배되었다가
고성군 간성으로 ,다시 삼척으로 이배된뒤 50세의 나이로 장남인
왕석과 차남인 왕우의3부자가 함께 죽임을 당하였다.
그로부터 22년후인 이조태종16년에 다시 공양왕으로 환원되었는데
삼척에는 아직도 살해제라는 지명이 남아 있다.
경기도 고양시 원당과 사지인 이곳 삼척의 두곳에 공양왕능이
있는데 고양시에 있는 능은 고려 공양왕 고릉이라는 비석이
세워져 있으나 ,삼척에 있는 능은 비석마져 없이 구전으로 전해져
오고 있을뿐이다.
또한 일설에 의하면 제2차유배지인 강원도 고성군 간성에
공양왕의 묘가 있다는 주장도 제기되었는데 이러한 점으로 보아
고려말의 정국이 얼마나 혼란하였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이조실록에는 태조3년(1394)3월14일에 공양군3부자를 간성에서
삼척으로 이배시켰고 동년4월15일에 충주 부원사 정남진과
형조의랑 함전림을 삼척으로 파견하였는데 삼척에 도착한 것은
4월17일이었다.도착하자 바로그날 공양군에게 왕명을 말하기를
군(공양왕을뜻함)과 여러친척을 각처에 보내어 편안하게 생업을
누리게 하였던바 이번 동래 현령 김가행과 염장관 박충질 등이
군(공양왕)과 군의 친척의 명령을받아 국가에 대한 음모를
계획하여 그 성패를 장님 점장이 이흥무에게 물었던 사실이
드러났으니 이는 용서할 수 없는 일이므로 공양군3부자를
목메여 죽인다“라고 적혀있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마을사람들이 시체를메고 매장하러 가는데
얼마를 가다가 행상군의 발이 떨어지지않아 그 자리에 매장한
곳이 지금 고돌재의 왕릉이라고 하고 또 어떤 부사가 이곳을 행차
하는 도중 주막집에서 유숙하게 되었는데 꿈속에 점잖은 분이
나타나더니 “그대는 복이 많아 편안한 생활을 하고 있으니
나는 송도의 왕자 왕석으로 국가가 망하고 망명하여 이곳에서
죽음을 당하였으나 마을사람들이 매장한 무덤을 헐어서 비바람을
못가리우니 한심스럽기 그지 없소,그대가 좀 봉축하여 주면
고맙겠소“하면서 사라졌다.부사는 다음날 마을사람을 동원하여
능을 다시 봉축하였다는 전설이 있다,
지금도 이마을 사람들은 공양왕능앞에 집을 짓게 되면 그날밤에는
반드시 무너지고 만다는 속신으로 집을 짓지 못한다고 하며
음력8월 초하루에 이능에 벌초를 제일 먼저 하게되면 어부들은
큰횡재가 있다고 하여 그 전날밤 자정이면 누가 먼저 하는지 벌써
벌초가 되어 있다고 하고 왕능곁에 암매장을 하게 되면 그 시체는
어디론가 없어지고 만다는 전설이 있다,
왕릉은 오랜세월이 흐르는 사이 허물어져 현종3년(1837)정유년
가을에 삼척부사 이규헌이 개축하였으며 1942년 면장 김기덕과
지방 유지들이 다시 개축하였고 1977년6월면장 최문갑이 다시
봉축하였다, 매년4월17일에 제사를 모시고 있는데 작년까지는
궁촌리에서 주관하였으나 금년부터는 삼척시에서 주관하게 되었다
1995년 10월에 강원도 지방 문화자료 제71호로 지정되었다
작성자 34세손 윤주
'개성왕씨 부산파'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강화도 고려능 (0) | 2013.11.06 |
---|---|
고려의 왕릉 (0) | 2013.11.05 |
동양군12대 미 묘소참배 (0) | 2013.11.05 |
계파(季派)2007년잔재 (0) | 2013.11.05 |
2007년 장자산선영시재 (0) | 2013.11.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