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 미(王亹)
1365년 고려공민왕14년출생 .묘지위치:경기도 시흥시 군자동 산114(구지정뒷산)
고려가 멸망한 후 조선의 태조 이성계는 고려 왕족에 대하여 말살정책을 펴기 시작했는데 체포된 왕족들을 거제도와 강화도에 집단 수용시켜 식량을 주지 않으므로 초근목피와 곤충, 벌레들로 연명하게 되었고, 2년 뒤 이들마저 전부 바다에 수장시켜 버렸다.
이때 희생된 왕족은 무려10만 명에 이르는데 당시 전국 인구가 200~300만 명 정도였으니 그 잔악성은 가히 짐작이 가고 남는다.
이때부터 소수의 왕족은 어머님의 성을 따르거나 전(全),김(金),전(田)씨로 바꾸어 살았다.
이조 3대왕 태종은 어느 날 꿈에 고려태조(왕건)가 나타나 눈에 불을 품으며 자기를 죽이려고 하자 무릎을 꿇고 목숨만 살려달라고 빌었다. 이후부터 왕 씨 탄압정책을 완화하고 숨어사는 왕 씨들을 찾아내도록 했다. 이때 나타난 분이 현재 우리들의 중시조로 받드는 왕 미(王亹)할아버님이시다. 이 할아버님은 외가 성인 민(閔)씨로 변성하여 살다가 본성으로 되찾았는데 이때부터 왕 씨 말살 정치는 완화되었다.
원래 왕 미 할아버님은 태조의 12세손으로 벼슬이 교서감에 이르고 제용 감정이라는 직책이 있었는데 왕 씨 말살 정책을 피하여 어머니 성인 민 씨로 바꾸고 동생 왕 흥(王興)과 함께 중원(현재의 충주)에 숨어 살았다. 이때 이웃 아이들과 놀다가 성씨가 왕 씨로 탄로 나면서 곧 죽음을 당하게 되었는데 태종의 꿈에 나타난 고려 태조의 계시에 의하여 왕 미의 형제분이 풀려났다고 한다.
이때부터 고려태조의 후손들은 화를 면하게 되었지만 이전에 이미 살해되었거나 성을 바꾸었기 때문에 그 때 까지 유적과 후손들은 거의 없어진 상태이고 ,현재 우리 일족의 대부분(약90%이상) 이 할아버지의 후손이므로 개성 왕 씨 중시조라 할 수 있다.
이 할아버님의 총(塚)은 조선의 고종 말까지 알려지지 않다가 묘아래 살던 어느 분이 봉분과 석물을 없애고 남 몰래 개간했던 것을 알고 지석을 찾아 우리 문중에 알려줌으로 써 비로소 총을 찾게 되었다고 한다.
개성 왕 씨는 고려 때에는 개성에서 살다가 고려가 망한 후 왕 미(12세)할아버지 아래로 경기도 시흥에 살았으며 그 외 이천군 율면, 연천군 미산면, 경남 의령군 의령면, 전북 익산군 여산면 등에 집단을 이루고 살았다.
고려 태조(王建)는 29분의 부인을 두셨는데 그 중 9번째 부인이신 동양원 부인 유 씨의 차남이신 효은태자(이름은 東陽君 이시고 전체 아드님25명중 15번째)가 우리 부산파 의 직계이다.
여기서 판서공파(判書公派)와 평양공파(平壤公派)로 나누어지는데 우리 부산 파는 평양공파의 후손이며 이 평양공파의 시조가 바로 왕 미(王亹)할아버님이시다.(효은 태자로부터 10世)
우리나라 개성 왕씨 19,000여명 정도 인데 이중 효은태자(동양군)의 후손이 전체의 90%가 훨씬 넘으며 그 중 평양공파의 시조이신 왕 미 할아버님의 후손이 다시 90%정도이므로 오늘날 우리가 이 할아버님을 고려 태조 다음으로 중시조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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