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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구의 지정문화재

아지빠 2013. 3. 16. 09:38

 

 

 

3. 약조제찰비(約條制札碑)

종 류 : 부산시 지정문화재 제17호(1972. 6. 26)

소재지 : 부산직할시 시립박물관

부산시의 지방문화재 기념물 제 17호로 지정되어 있는 이 비석은, 1683년(숙종 9)에 동래부사와 대마도도주가 왜관의 운영을 위한 금제조항 다섯 가지를 제정하고, 이를 널리 알리기 위하여 세운 것이다. 비석의 높이는 140cm, 폭은 68cm이며, 머리는 반달모양이고 재료는 화강석이로서, 원래 용두산 공원 동쪽에 있던 것을 1978년 5월에 시립박물관 경내에 옮겨 놓았다. 이것을 세우기 된 경위는 다음과 같다.

1607년(선조 40) 부산의 두모포(현재 동구 수정동 부근)에 왜관이 설치되고, 또 이어서 조선과 일본 양국 간에 국교의 정상화가 이루어지자, 왜관에는 대마도관인과 항거왜인이 거주하게 되었으며 한편으로 일본상인들의 출입이 잦아지면서 양국 상인의 접촉도 빈번해져, 자연히 국금을 무시한 밀무역 잡상행위 등의 여러가지 폐단이 일어나게 되었다. 정부에서는 이러한 폐단을 바로잡기 위하여 왜인과 교섭하여 여러 차례의 약조를 맺고 위반자를 엄중히 단속하였으나 두모포에서 초량(현재 용두산 일대)으로 왜관을 옮긴 후 그 왜관의 규모가 매우 크고 넓었던 까닭에 왜인들의 범법행위는 걷잡을 수 없이 심해졌다. 이에 1683년(숙종 9)에 통신사로서 일본에 갔던 윤지완(尹志完)은 돌아올 때 대마도에서 도주와 더불어 전문 5개조에 달하는 약조를 체결하였는데, 동년 8월에 이르러 양측은 이것을 한문과 일문으로 각기 제찰하고 비석에 새겨 조선 측은 수문안, 일본 측은 왜관의 경계선에 각각 세워서 널리 알리게 하였다. 이때 조선 측에서 세운 비석이 지금 남아 있는 것으로서, 그 내용은 아래와 같다.

 

* 이 금표(禁標)한 정계(定界)밖에 대소사를 막론하고 함부로 뛰쳐나와 범월(犯越)하는 자는 사형죄로 논단(論斷) 할 것

* 노부세(路浮稅 : 倭債)는 현장에서 잡은 후 준 자와 받은 자를 똑같이 사형죄로 다스릴 것

* 개시(開市)할 때 각 방(房)에 몰래 들어가서 비밀리에 서로 물건을 팔고 사는 자는 피차가 각기 사형죄로 다스릴 것

* 5일마다 잡물(雜物)을 입급(入給)할 때 색리(色吏), 고자(庫子), 소통사(小桶事) 등은 화인(和人 : 일본인)들을 일체 끌어내어 구타하지 말 것

* 피차 의 범죄인은 모두 관문(館門) 밖에서 집행 할 것

 

(본문)

 

一, 禁標定界之外 母論大小事 欄出犯越者 論以一罪事

一, 路浮稅 現捉之後 與者受者 同施一罪事

一, 開市日 潛入各房 密相賣買者 彼此各施一罪事

一, 五日雜物入給時 色 子庫子小通事等 和人切勿扶曳毆打事

一, 彼此犯罪之人 俱於館門外刑事

 

 

  

 

4. 척화비(斥和碑)

 

종 류 : 부산시 지정문화재 제18호(1972. 6. 26)

소재지 : 부산직할시 시립박물관

 

1871년(고종8) 대원군이 서양 제국주의 세력의 침략을 경계하기 위하여 서울, 부산을 비롯하여 전국의 중요한 곳에 세우게 되었는데 이 비석이 그 중의 하나이다. 이 비석은 원래 부산진성터에 세워져 있던 것을 1924년 용두산 공원으로 옮겼다가 1978년 5월에 부산시 남구 대연동 소재 시립박물관 야외 전시장에 전시되어 있다.

비문의 내용은 병인양요 이래의 구호인 “서양 오랑캐가 침입하는 데 싸우지 않으면 화친하는 것이요, 화친을 주장하는 것은 나라를 팔아먹는 것이다.” 洋夷侵犯 非戰則和 主和賣國의 12자가 큰 글자로 되어있고, 그 옆에 “우리들의 자손만대에 경고하노라! 병인년에 짓고 신미년에 세운다.” 戒我萬年子孫 丙寅作 辛未立가 작은 글자로 각각 새겨져 있다.

그 뒤 1882년 임오군란 때 대원군이 청나라에 납치되자 이 틈을 탄 일본공사의 요구로 모두 철거되었다.

이 비석은 우리나라 개항 당시의 시대상황을 알리는 중요한 자료이며 당시의 상황을 보면 다음과 같다. 1866년(고종 3)에는 미국 상선 제너럴 셔어먼호가 강제로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가 평양에까지 이르러 통상을 강요하자 선원과 평양 군민간에 충돌이 발생, 상선은 화공을 당하고 선원들은 살해당했다. 1866년 로즈제독이 이끈 프랑스 함대 7척이 인천 앞바다에 나타났다. 프랑스 함대의 내습은 프랑스인 신부에 대한 정부의 박해가 직접적인 원인이 되어 프랑스군의 일부는 강화도에 상륙하여 강화읍을 점령, 병기와 서적들을 약탈했다. 그러나 서울로 향하던 함대는 많은 피해를 입고 퇴각하였는데 이것이 병인양요이다.

고종 8년(1871) 셔어먼호사건에 대한 추궁을 계기로 신미양요를 일으킨 미국은 이것을 기회로 삼아 조선을 개국하여 수호통상의 길을 열고자 하였다. 그러나 대원군은 전승의 기세로 척화의 결의를 다짐하면서 쇄국정책을 강행하게 되었는데 이것을 상징하기 위하여 척화비를 전국 요지에 세우게 되었다.

비의 높이는 143cm, 폭 44.7cm, 두께 23.8cm의 크기에 주문 12자가 새겨져 있으며 재료는 화강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