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정보

임진왜란 일본의 병력소실에 대하여

아지빠 2021. 8. 1. 15:50

임진왜란 일본의 병력 손실에 대하여

(이미지-01)

사진은 KBS가 방영했던 사극 징비록의 한 장면입니다

평양성에서 달아난 고니시가 자기 부대의 병력이 얼마 남았는지 묻자,

부관으로 보이는 인물이 "거동 불편한자들이 낙오되어, 1만8천명에서 6천명으로 줄었다."고 말했죠

고니시는 20만석 정도되는 중소형 영주입니다.

일 전국시대 영주 규모는 1만석이면 작은편,

10만석이면 중간인편, 20만석~40만석이면 이름있고

100만석이 대형 영주입니다. 도쿠가와가 250만석였죠

(일본 전체가 쌀 2,000만석의 생산량을 가졌습니다. 같은때 선조가 통치하던 조선은 350만석이죠 광해군때는 70만석이 됩니다)

(이미지-02)

일본의 상식으로는 100석이 병력 1명~2명을 뽑아낼 수 있다고 여겨졌습니다

소형 영주는 200명~400명, 중소형 영주는 4,000명~8,000명

대형 영주는 16,000명~4,000명

놀랍게도 중세 유럽 사회에서 공작,백작,남작등 귀족 계급과 매우 유사하죠

왜냐하면 같은 봉건체제였기 때문에 개념이 비슷하게 진화할 수 밖에 없었죠

동서양의 귀족 계급이 거의 의미있는 차이가 없이 딱 떨어지는건 놀라운게 아닙니다

(이미지-03)

유럽을 볼까요? 공작은 왕의 아들이나 왕 다음가는 위세를 가졌죠, 지금으로 치면 국무총리였습니다

병력은 거의 5,000명~ 1만명을 가졌습니다

백작은 100명의 병사를 모을 수 있는 지방 행정관의 단위였습니다. (군대에 많이 있는 행정보급관들 생각나네요)

1만명이 넘는 만단위의 위세있는 지역에서 100명의 병사를 모을 수 있기 때문에

귀족이 될 수 있는 권력이죠

그래서 이름이 백작이죠

물론 나중에 인구증가로 5,000명 정도의 병력도 동원 가능해집니다.

이들이 일본에서는 '중소 영주' 바로 고니시입니다

그 밑의 남작은 baron, 동양에서는 사내 남을 써서 남작이라 부르죠.

지역에서 힘 쓰는 무관, 즉 사무라이나 기사가

자기 기사단을 이끌고 실력을 인정받으면 남작 정도의 작위를 받죠

귀족중의 말단입니다 수백명의 병력을 이끄는 대대장 같은 역할을 하죠.

춘추전국시대에서는 병력 500명을 이끄는 '오백인장' 혹은, 1000명을 이끄는 '천인장'이라는

형태로 직위가 등장했죠

(이미지-04)

자 이제 귀족 얘기를 쌩뚱맞게 꺼낸 이유가 나옵니다.

위 사진은 임진왜란이 끝난 뒤인,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때 서군 영주들의

병력입니다.

확실히 1만8,000명을 동원한 적있던 고니시는 이젠 4,000명으로 줄었습니다

이순신과 싸웠던 와키자카 다이묘는 900명을 이끌고 나오죠.

와키자카는 임진왜란에서 5,000명~1만명까지의 숫자를 끌고 다녔는데

이젠 1000명 이상은 동원을 못하는걸로 보이죠?

그 까닭이 이순신 장군에게 다 잃어서일까요?

문제는 정말 임진왜란에서 5,000명~1만명을 와키자카가 지휘한적있을까?

라는 질문에서 시작됩니다.

와키자카는 3만석의 소형 영주입니다.

일본 역사책을 볼까요?

임진왜란 전 와키자카 = 1,000명~2,000명의 병력을 이끌던 영주였다.

임진왜란때 와키자카 = 조선에서 2,000명의 병력으로 전투

임진왜란 후 세키가하라에서 와키자카 = 990명의 병력을 이끌던 영주다.

한국 역사책을 볼까요?

임진왜란 전 와키자카 = 언급하는 경우가 드뭄

임진왜란때 와키자카 = 5,000명 ~ 1만명을 이끌던 대영주로 묘사

임진왜란 후 세키가하라에서 와키자카 = 990명을 이끌던 영주로 전락

어딜 봐도 일본 역사책이 교차검증으로나 개연성으로나 자연스럽습니다.

한국 역사는 최근인 조선시대마저 장계 1차 사료를 "과학적으로 검증해서 과장된 숫자를 줄이는 작업"을

안하죠.

대표적인 예가 청산리 전투구요.

옛날 인터넷에서 청산리 전투 논쟁을 주제로 한일 키보드 배틀을 떴다가

한국이 참패당한 사건도 있었죠.

한국측이 졌었습니다. 증거에서 졌고, 한국측 주장이 앞뒤가 다 틀렸기 때문이죠.

한국이 증거도 불충분한도 청산리 전투 전과를 과장하고, 국가적으로 역사를 잘못 가르쳐온게 사실였기 때문이죠

마지막으로

시마즈를 볼까요?

70만석의 대영주가 맞고, 임진왜란 일어나기 전이나, 임진왜란때나 항상 2만명~3만명의 병력 동원이 가능한 영주인데,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는 1,500명만 이끌고 왔습니다.

그럼 이 이후로 이들의 세력이 약했나?

결코 아니죠. 시마즈 세력은 나중에 사쓰마 영주가 되서 일본 막부를 멸망시키고

일본제국 해군에 장성 자리들을 다 해먹는, 메이지 유신의 실세가 될 포텐을 가졌습니다.

그럼 처음 언급했던 고니시로 다시 돌아와볼까요?

1만8,000명으로 조선을 침공했던 백작 수준의 영주였지만, 임진왜란에서 병력을 너무 잃어서

사극 징비록에서 언급한것처럼 1만명을 잃었단 사실이 정말여서

4,000명만 들고 나온걸까요?

그게 아닐 가능성이 매우 큽니다.

동군으로 세키가하라에 참전한 가토 기요마사도

병력이 3,000명이었습니다.

가토 기요마사가 크게 패하거나, 패하진 않았지만 병력은 많이 잃었던건

북관대첩, 울산성 전투를 들 수 있겠는데요.

가토는 북관대첩뒤인 정유재란에서도 300척의 함선을 이끌고 다녔습니다.

당시 일본배 1척이 평균 50명이 탔었습니다. 1만5,000명을 꾸준히 이끌었죠.

시마즈도, 고니시도, 가토도, 모두 병력이 자기 영지에 충분히 있었지만

눈치 싸움으로 병력을 조금만 끌고 나왔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세키가하라는 성격 자체가 외교 눈치 싸움였습니다.

그럼 여기까지 둘러본 결과, 결론을 내릴 때가 됐습니다.

임진왜란에서 1군, 2군을 했던 고니시나 가토의 병력,

두번째로는 일본군 전체의 임진전쟁 손실이 적었을까?

조선시대 기록 특유의 "10만대군을 멸했사옵니다~"이 기록과

일본 기록 사이의 접점이 있다고 봐야할듯합니다.

조선때 세조의 어전회의에서 "우리 민족은 활을 잘쏘니 30만 궁수를 양성하면 국방이 튼튼할겁니다"라는 의견이 나왔죠

옛날 한국중국에서 십만대군은 진짜 10만대군이 아니라 "그만큼 많사옵니다 전하"라는 말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