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North Korean-Israeli Shadow War
오늘은 북한과 이스라엘의 과거와 관련된 깊은 역사를 소개한 2019년 9월 9일자 「Tablet」紙 인터넷 보도문을 번역해서 여러분들께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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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y Solomon
이 글은 제이 솔로몬이라는 The Washington Institute(워싱턴 연구소)의 부교수로 재직중이며, 아시아, 아프리카, 중동지역을 취재하는 기자이기도 하며 前 월스트리트 저널의 국무부 담당 특파원이었습니다. 또한 「IRAN WAR」(Random House 出版, 2016년) 책의 저자입니다.
그는 이 글을 통해 "이스라엘이 적대시하는 이란, 이라크, 시리아 등의 중동 국가들이 핵 무기 기술이 나타날 때마다 북한이 거의 대부분 옆에 참여해 왔다"는 부제로 이 글을 기고 하였습니다.
2007년도에 이스라엘이 해외 첩보를 수집한 정보들 중에 가장 대단하였던 정보를 취득한 것은 거의 우연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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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brahim Othman
당시 모사드(Mossad)는 이브라힘 오스만 (Ibrahim Othman)이라는 다소 주목을 끄는 관료 인 시리아 원자력위원회(the Syrian Atomic Energy Commission) 사무국장을 감시하고 있었습니다. 오스만(Othman)은 그 해(2007) 겨울에 오스트리아 빈에 소재하여 핵 감시 역활을 하고 있는 국제원자력기구, IAEA (International Atomic Energy Agency) 및 Mossad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빈을 방문했으며 그의 (시리아 원자력 위원회와 관련한) 비밀 활동에 대해 더 많이 정보를 취득하고자 했었습니다. 이스라엘 모사드는 (오스만이 사용하는)시리아의 개인용 랩탑을 오스트리아 수도빈에서 회의를 위해 (오스만이) 호텔을 떠난 후 해킹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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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rian Atomic facility nearby Euphrates River
이스라엘 정부는 Mossad가 Othman의 랩탑에서 발견 한 사진들 중에 한 장의 사진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오스만의 노트북에서 해킹으로) 다운로드 하였던 사진 한 장은 시리아 동부의 유프라테스 강 (Euphrates River)에 건설중인 상자 같은 건물을 자세히 보여주었던 것입니다. 그 전까지 이스라엘과 미국의 스파이 위성은 초기 시리아 (위성감시)정밀 촬영자료에서 이상한 구조물을 감지했지만 특별한 의미는 얻지 못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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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영변 원자로 시설과 시리아 핵 시설에 대한 비교분석 사진
그러나 Othman의 (랩탑) 사진은 Al Kibar라는 시리아 무역 도시 근처에 위치한 이 건물구조물이 미국의 가상 폭탄 제조 공장(virtual bomb making factory ; 미국의 핵 관련 시뮬레이션 프로그램, 미국은 영변 핵시설에 대한 내부 시설 설계구조도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추정됩니다.)으로 본 플루토늄 생산 시설 인 북한의 영변 원자로의 가상 복제품임이 밝혀졌습니다. 이 시설에는 실제 민간인 기술자들이 없었습니다. 북한과의 연계에 대한 이스라엘의 우려는 오스만의 랩탑에 저장된 사진들에 의해서만 증폭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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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brahim Othman과 함께 찍은 북한 핵 물리학자 전치부(왼쪽), 오른쪽은 6자회담에 참석한 전치부의 모습
사진구성 : CIA
그 사진들중에서 오스만은 모사드가 영변 핵 시설에서 일했었던 북한 핵 과학자 인 전치부 (Chon Chibu)라고 밝힌 북한인과 오스만이 팔을 잡고 서 있음을 보여 주었습니다. 전치부는 이전 활동 이력에 미국 및 다른 세계 강대국과의 군축 협상에 참여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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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 Kibar Diagram
시리아 內 Al Kibar 원자로 시설의 발견으로 이스라엘과 미국 당국자들 사이에 패닉(공황)을 일으켰지만, 북한이 이스라엘의 적대국들 중 한 곳인 시리아에게 치명적인 무기 전문 지식을 제공하는 데 적극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밝혀진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실제로 북한은 1960년대 부터 이스라엘에 대한 공격에 중동 국가들과 협력한 이래로 종종 이스라엘의 적대국들에게 (왕족들, 독재계급들) 문제나 중동 국가들의 (고질적인 문화적 문제의) 해결사로 생각되지 않지만, 평양의 김씨 일가는 이스라엘에 적대적인 국가들을 적극적으로 (유대를) 강화하고 촉진하고 있었습니다.
때때로 이스라엘과 적대국인 중동 국가 간 휴전을 시도했지만 이스라엘-북한 관계는 수십 년 동안 은밀한 적대감과 대리 분쟁, 다시 말해 양국 간의 그림자 전쟁으로 정의되었습니다. 이 패턴은 이란과 시리아와의 북한 동맹에서 현재까지 계속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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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hud Olmert (2006.04~2009.03 이스라엘 국무총리 역임)
2007년에 들어서 에후드 올메르트 이스라엘 총리는 이스라엘 정부가 바샤르 아사드(Bashar Assad) 시리아 대통령의 핵무기 개발 능력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고 워싱턴에 분명히 밝혔습니다.
이른바 베긴 독트린(Begin Doctrine)을 지키려는 이스라엘 정부는 이스라엘을 적대하는 중동 지역의 적대국들이 대량 살상 무기를 보유 할 수 없도록 노력하였습니다.
(1981년 이스라엘은 이라크가 가동을 시작하려던 오시라크 핵 원자로를 공습으로 파괴했습니다. 이후 주변국의 핵 개발을 막기 위한 이스라엘의 선제타격 정책은 당시 메나헴 베긴(Menachem Wolfovitch Begin, 1977년 이스라엘 6대 총리 취임) 총리의 이름을 따 베긴 독트린으로 불렸습니다. 이 정책의 핵심은 ‘이스라엘의 적 어느 누구라도 핵무기를 가지려 한다면 이를 무조건 막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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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rget Site in Syria
이 발언은 1981년 이라크의 오시라크 원자로에 대한 이스라엘의 공격으로 나타났으나 이스라엘의 정보는 Al Kibar 시설이 “뜨거워 질”것으로 나타났기 때문에 2007년 이스라엘 정부는 이에 대한 우려가 높아졌습니다. 이는 시리아 Al Kibar에 우라늄 연료가 원자로로 공급 될 것임을 의미하였기 때문입니다.
그 상황에서 이스라엘 정부의 (시리아 핵 시설)공격은 시리아와 이라크 전역에 방사성 오염이 퍼져 위험에 처하게 될 수 있었으며, 이는 유대 국가에 대한 광범위한 비난을 불러 일으킬 것이었습니다.
한편 조지 W. 부시 행정부는 국내적으로 어려움에 처했었던 상황이었습니다. 미국은 바그다드가 대량 살상 무기를 개발하고 있다는 오도된 정보들의 구실 하에서 독재자 사담 후세인 체제를 전복시켰지만 이라크에서 반군에 의한 내전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미국 당국자들은 워싱턴이 다른 아랍 국가에 대한 군사 작전에 참여할 수 있는지, 특히 WMD(대량파괴무기)의 확산을 막을 수 있을지에 의문을 제기하였습니다. 미국 정보 당국자들도 아사드 정권의 초기 원자로 설계 상황을 방해할 수있는 방법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었으며, 워싱턴은 이라크에 확실하지 않았던 WMD 프로그램의 존재를 내세우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과 미국은 2007년 봄과 여름에 Al Kibar에 대한 그들( 정보부 분석)의 평가가 정확한지 확인하기 위한 노력을 끈질기게 이어갔습니다. 이스라엘은 유프라테스의 시설 주변에서 토양 샘플을 얻기 위해 (이스라엘) 특공대를 동부 시리아로 은밀히 보냈습니다.
토양 샘플의 테스트 결과 핵 프로그램에 필요한 인공 우라늄 입자에 대한 긍정적(positive results)인 결과가 나타났습니다. 한편 부시 행정부는 지난 몇 년간 북한 외교관과 무역 회사가 시리아로 이동하는 것에 대한 정보를 입수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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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병호
(전병호와 그의 사위인 윤호진은 1980 년대부터 북한의 핵무기 개발 및 시험에 핵심적인 역할을 해 왔으며 불법 무기 거래 활동을 주도하고 있다고 미국 관리들을 인용하여 2010년 뉴욕에 기반을 둔 논문이 전하기도 하였습니다.)
미국은 결국 윤호진(전병호의 사위)이라는 북한 고위 관리가 이끄는 남천강 무역 회사가 국제 무기 거래시장에서 성가신 무기전문 딜러를 발견하였습니다.
유엔과 미국은 북한의 최악의 핵 확산 자 중 한 사람으로 윤호진을 제재하였습니다.
윤호진은 오스트리아 수도 빈에 있는 IAEA의 북한 외교관으로 1990 년대 후반 남천강 무역회사를 이용하여 독일의 엔지니어링 회사로부터 북한 김정일 정권의 핵 프로그램을 위해 알루미늄 튜브를 비밀리에 조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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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동아일보
윤호진은 남천강 무역회사와 국제 밀수 네트워크를 이용하여 경쟁 정보 기관을 속이는 마스터로 여겨졌습니다. 미국은 윤호진과 북한 군 고위급 장교가 파키스탄, 리비아, 미얀마로 군사 무기들을 옮기는 데 역할을 했으며 일부 경우에는 핵 기술이나 재료를 포함한 운반 역할을 했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Al Kibar에 대해서는 여전히 미스터리가 많았습니다. 이스라엘과 미국 모두 시리아 내에서 핵무기 프로그램에 필요한 지원 구조를 찾으려고 노력하였습니다. 여기에는 원자로에서 무기 등급 플루토늄을 얻게하기위한 재처리 시설과 핵분열 물질을 폭탄의 금속구체로 변환하는 데 필요한 엔지니어링 현장이 포함되었습니다. 미국과 이스라엘은 또한 Bashar Assad의 고갈 된 재정을 감안할 때 누가 (핵 시설)건설에 자금을 조달하고 있는지 의문을 제기했습니다. 한 가지 이론은 이란이 서방 정보국의 눈을 교란시키는 핵 위성 프로그램을 소유하는 방법으로 가까운 동맹국의 원자로 비용을 지불하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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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이스라엘 공군기들이 시리아 내 Al Kibar 핵 시설을 폭격한 Operation Orchard 의 모습
2007년 (9월 6일, 이스라엘이 이스라엘 공군을 동원하여 작전에 F-16S와 F-15S 등 전투기 8대를 투입하였고 폭탄 18톤이 투하되었습니다.)
(그러나)Al Kibar에 대한 폭격은 북한이 정교한 무기 시스템을 이스라엘의 적대국들에게, 심지어 경우에 따라 중동의 북한 우호국들에게 계속해서 확산시키는 것을 막지 못했습니다. 실제로, 시리아에 대한 공격 이후 12년 동안 북한에 대한 이스라엘에 대한 우려가 커졌습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2017 년 취임 한 이래 북한의 젊은 지도자 김정은은 자국의 군사력을 극적으로 향상 시켰습니다.
북한은 (탄도미사일 기술이) 완벽해지면 미국 서부에 타격을 줄 수있는 탄도 미사일을 시험했다고 미국 정보 관리들은 믿고 있습니다. 북한은 또한 핵무기 생산량을 늘리면서 김정은 정권이 수소 폭탄 기술을 (완성하게) 될 것이라고 말한쪽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보안 당국자들은 북한의 과거 행동은 김정은이 이러한 능력을 이스라엘의 중동 적대국들에게, 특히 적절한 가격으로 이전 할 자격이 없다고 공식적으로 언급했습니다.
(미국이 북한의) 핵무기를 무기로 해체하려는 목표로 북한에 대한 트럼프 행정부의 현재 외교적 전망은 예루살렘과 텔 아비브에 대한 우려가 커지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현재 그리고 前 이스라엘 관리들에 따르면 북한이 점점 더 정교한 무기를 중동에 공급하는 것을 막기 위해 군사 행동을 다시 고려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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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ytan Bentsur(아이탄 벤츠르) 1992년 비밀협상을 하기 위해 평양을 방문한 아이탄 벤츠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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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외교부의 前 부국장 인 Eytan Bentsur는 1990년대 초 북한과 비밀 협상을 가졌으며, “미국인들은 미국이 북한 미사일 문제를 다룰 것이라고 밝힌 바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북한의 위협에 대해 (미국과) 동일한 시간표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더 즉각적'입니다.(It’s more immediate.)"
북한과 이스라엘은 2개의 바다와 5,000 마일 정도로 떨어져 있지만 50 여년이 넘는 시간 동안 저강도 충돌과 위험천만한 스파이 대결에 참여하여 대적해 왔습니다. 북한은 핵무기 및 미사일 기술이 중동에 있는 이스라엘의 극렬 적대국들과 세력에게 반복적으로 이전되어 유태인 국가에 대해 근본적이고도 존재론적 위협을 제시하게 하였습니다. 북한의 경우, 1960 년대에 이스라엘과 대면하는 것은 서방 제국주의와 미국의 지원을 받는 정부와의 싸움에서 중심 세력으로 등장했습니다. 소련과 중국의 도움으로 북한(북조선인민공화국)을 건국한 김일성은 1970 년대 테러 공격에 이스라엘을 표적으로 한 아랍 무장 세력을 지원하고 팔레스타인 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두 국가 간의)적대감에도 불구하고 북한과 이스라엘은 최근 수십 년 동안 워싱턴의 뒤를 이어 국가 안보를 지키기 위해 간헐적 인 외교 접촉을 시도하여 비밀리에 참여했습니다. 이스라엘은 적어도 두 차례에 걸쳐 북한 외교관들과 함께 북한 평양의 미사일 수출에 대하여 중동을 향해 수출하는 문제에 대해 논의했습니다.
북한은 소비에트 연방 붕괴 이후 한때나마 이스라엘을 잠재적 경제 파트너로 보았고, 미국과의 관계 개선을 위한 중재자의 역활로 보았으나 외교는 부분적으로 이스라엘이 워싱턴과 독립적으로 행동 할 수 없기 때문에(같이 행동하여야 했기 때문에..) 두 국가간 관계는 끝난 거나 다름 없었습니다.
일부 이스라엘 외교관들은 북한에 대한 미국의 (핵무기 개발 포기에 관한 당근책과 관련한)의존이 북한의 군사력 강화와 북한의 정교한 군사 기술 수출로부터 이스라엘을 보호하지 못했다고 불평했습니다.
이스라엘에 대한 북한의 전략적 위협은 1960 년대 후반에 김일성이 자신의 군사력 및 정보 서비스를 중동 아랍국 對 이스라엘 전쟁에 직접 투입하기 시작한 1960 년대 후반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이스라엘을 지중해에서“제국주의 위성 국가”로 불렀던 김일성은 1967 년 6 일 전쟁에서 잃어버린 아랍 땅을 되찾기 위해 이집트의 가말 압델 나세르 (Gamal Abdel Nasser) 이집트 대통령과 하페즈 알-아사드 (Hafez al-Assad) 시리아 대통령이 일으킨 전쟁을 지지했습니다.
북한은 또한 1960 년대와 70 년대에 중동과 유럽에서 이스라엘의 (군사) 목표물에 대해 일련의 공격을 가한 팔레스타인과 좌익 테러 단체들을 꾸준히 지지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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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년 5월 30일 이스라엘 로드 공항에서 벌어진 일본 적군파 테러 당시 모습 , 오쿠 다이라(奥平剛士) 레바논 테러 캠프에서의 모습
팔레스타인 해방 인민전선(PFLP)이 보안이 강화된 이스라엘 공항에 테러를 가할 수 없게 되자 일본 적군파에게 도움을 요청하였고 1972 년 북한은 급진적인 맑스주의 단체였던 일본 적군파(赤軍派)의 테러 훈련과 재정 지원을 하여 이스라엘 로드 공항(Lod Airport massacre : 지금의 벤구리온 공항)에서 적군파 요원 3명(오쿠 다이라 주도, 당시 27세) 이 AK-47과 수류탄을 민간인을 향해 난사하여 26 명이 사망하고 80 명이 부상 당한 테러의 배후였습니다. 이러한 음모는 마치 스파이 소설처럼 진행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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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eorge Habash, 1970.03.03 , 출처 : alamy stock photo
일본 적군파 무장 세력은 레바논의 베카 계곡 (Bekaa Valley) 에서 팔레스타인 해방 인민전선 (PFLP)의 회원들과 훈련했습니다. PFLP 사령관 인 조지 하바쉬 (George Habash)는 2년 전(1970)에 북한의 정보 관리들로부터 지도를 받기 위해 평양을 방문했습니다.
Lod 공항 사건과 관련된 법원 문서에 따르면 북한은 팔레스타인 테러조직원들이 중동국가들의 아랍 테러 위협을 추적하는 데 집중되어진 이스라엘 정보망을 피할 수 있도록 PFLP를 일본 적군파와 연결시켰습니다. 또한 북한은 테러 음모에 대한 자금 조달과 전반적인 지침을 제공하였습니다.
1972 년 일본 테러리스트는 팔레스타인 테러리스트들이 할 수 없었던 방식으로 이스라엘 로드 공항 보안을 성공적으로 통과했습니다. 그 공격의 메세지는 대학살로 빠르게 변질되었습니다. 세 명의 일본 테러리스트들이 바이올린으로 숨긴 체코産 기관총을 공항으로 몰래 들여왔습니다. 도착 대기실에서 무차별 적으로 총을 쏘고 수류탄을 던졌습니다. 살해당한 사람들의 대부분은 푸에르토리코에서 성지를 방문하려는 기독교 순례자들이었습니다. 총격전에서 두 명의 일본 적군파 요원들이 사망했습니다. 그러나 일본 적군파의 세 번째 구성원 인 오카모토 코조 (Kozo Okamoto)는 살아 남았습니다. 그는 석방되기 전에 이스라엘 교도소에서 수십 년을 보냈으며 포로 교환의 일환으로 레바논으로 돌아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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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감옥에서 석방뒤 레바논으로 망명하여 환영받는 오카모토 코조 (岡本 公三)
이스라엘 로드 공항의 테러 공격으로 인한 좋지 못한 결과는 수십 년 동안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2010 년 푸에르토리코 희생자 가족들은 이 테러 공격에 대한 보상 댓가로 미국 법원에서 북한을 고소하여 3 억 7,800 만 달러의 배상금 판결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북한은 결코 푸에르토리코 희생자 가족들에게 지불하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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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년 아랍연합군과 이스라엘과의 전쟁(the Arab-Israeli wars in 1973, Yom Kippur War), 아랍 연합군과 함께 참전한 쿠바와 북한
http://idf-armor.blogspot.com/2010/07/yom-kippur-war-1973-participation-by.html
1973 년 평양에 배치된 북한 군병력들은 아랍-이스라엘 전쟁에 직접 참전하였습니다. 당시 카이로는 이스라엘에 대한 놀라운 공격을 준비하고 있었음에도 이집트는 소련과의 군사 관계를 끊었습니다. 안와르 사다트(Anwar Sadat) 대통령의 소련군 고문단 추방은 모스크바가 배치해 주었던 정교한 방공망을 수행 할 수있는 이집트의 능력을 염려했었다고 합니다. 당시 이집트 공군은 거의 완전히 러시아製 MiG-21로 구성, 배치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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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ad Al-Shazly, Egyptian General Egypt Air Force MIG-21
사드 알 샤즐리 이집트 공군 장군은 1973년 아랍 연합군으로 참전한 북한군에 대해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북한 조종사들은 1973년 아랍연합군 對 이스라엘 전쟁이 발발하기 몇 달 전에 이집트 군이 영공을 방어 할 수 있도록 주둔 해 왔으며, 이집트 군의 사드 알 샤 즐리 (Saad Al Shazly)는 북한군 참전으로 인한 지원은 큰 도움이 필요할 때 중요한 지원을 제공했습니다. 소련의 군사고문단 인원이 이집트 MiG-21 비행단의 약 30 %를 비행운영을 하고 있었고 과거 미국으로부터 도입한 지상 대공 미사일 배터리의 약 20 %를 운영하고 있었다고 회상하면서, 이집트 대통령 안와르 사다트 (Anwar Sadat)의 명령에 따라 소련 군사고문단이 출국 한 후 이집트 공군은 훈련 된 MiG 조종사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는 데 있어서 참전한 북한군의 역할과 관련하여, 장군은 회고록에 다음과 같이 언급했습니다. “이 문제는 1973 년 3 월, 북조선인민공화국의 김일성이 이집트 방문 중에 나에게 제기되었다. 1973년 3 월 6 일, 장송 장군을 수에즈 전선으로 안내하면서 나는 그들이 우리를 지원할 수 있는지, 조종사를 지원해주어서 유용한 전투 훈련을 해 줄 수 있는지 물었다. 나는 당시 북한이 MiG-21을 보유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정치적으로 많은 논의 끝에 4 월에 나는 북한 김일성을 방문하여 계획을 마무리했다."
이 아랍연합군 참전으로 북한 주민들은 한 걸음 더 나아 가게 되었습니다. 사다트 이집트 대통령과 이집트 군 (공군)참모장이었던 호스니 무바라크는 북한과 미국의 군사 후원지원들을 받았고 당시 전쟁에서 정예화된 북한의 군사력에 깊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불과 몇 년 전(1968년), 평양은 북한 (동해상 공해) 해역으로 들어온 미 해군 정보 선박 인 푸에블로를 나포했습니다. 소비에트 축의 일원 인 북한은 또한 방공 및 MiG-21을 포함한 이집트에 있는 소련이 공급하는 모든 군사 장비를 운영하는 방법을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1973 년 6 월 사다트(Sadat) 이집트 대통령은 공식적으로 북한 군사 고문단을 이집트에 초청했습니다. 당시 중국 언론 보도에 따르면 평양은 이스라엘과의 전쟁이 임박한 것처럼 이집트인들이 소련에서 제작 한 지대공 미사일 시스템을 운영 할 수 있도록 약 1,500 명의 인원을 파견했다고 보도하였습니다. 평양은 미국, 이스라엘, 한국 정보 기관의 눈에 띄지 않게 추적을 피하기 위해 주간에는 노동자로 병사들을 위장했다고 합니다. 영국의 연구원 인 Adrian Chan Wyles는 중국 언론 보도를 번역했습니다. 평양은 또한 한반도에서 미군에 대항하기 위하여 비행 훈련이 숙달된 20 명의 숙련 된 전투 조종사들을 포함하여 북한 군사고문단으로 임무를 보냈습니다.
이스라엘은 욤키푸르 전쟁이 시작되자 이스라엘 군 정보요원들은 시나이 전역에 출현한 북한 전투기와의 충돌에 대해 설명했습니다. 1973 년 10 월, 이스라엘 공군 사령관 벤자민 펠드 (Benjamin Peled) 장군은 기자 회견에서 이스라엘 공군기가 2 대의 북한 조종사 탑승한 미그기들을 공중전을 통해 격추했다고 발표했습니다.
북한 조종사들도 시리아 공군 조종사들과 함께 전투 비행에 참가하였습니다. 욤키푸르 전쟁이 공식적으로 끝난 지 몇 달이 지난 후에도 이스라엘의 군사 정보는 여전히 시리아 수도 다마스커스 국경을 지키기 위해 이스라엘에 대한 간헐적인 공격 임무를 수행하는 시리아 제트기 사이에서 대화를 시작했습니다. 일부 전투요원은 아랍어를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러한 의사소통은 이스라엘 군 정보 분석가들를 혼란스럽게했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중동이나 시리아 아랍 공화국의 모국어가 아닌 (북한)언어로 대화했습니다.
이스라엘 장교들은 이 이상한 언어를 사용하여 교신하는 전투기 조종사의 기원을 명확하게 밝히기 위해 혼란을 겪으며 분석을 위해 요격 신청을 이스라엘 국방부에 보냈습니다. 그들이 워싱턴으로부터 받은 대답은 그들을 놀라게 했습니다. 미국 정보원들은 시리아 군대에 포함된 북한 군인들이라고 말했습니다. 45 년 전 신호를 가로채서 분석 하였던 전 이스라엘 정보관 Pesach Malovany 대령은 "텔 아비브에서 나에게 말했습니다. 처음에는 북한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에 놀랐습니다. 우리의 갈등은 단순히 지역적 의미 이상의 상황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1979 년 이란의 이슬람 혁명으로 미국이 지원하는 팔레비 왕조를 무너뜨리고 신권적 호메이니 정권을 등장 한 이후 북한은 이스라엘의 주요 지역 라이벌이 될 국가와 동맹을 맺었습니다. 김일성이 테헤란의 새로운 이슬람 통치자들에게 설득력 있는 반미, 반제국주의 전선에 매료되게 하였습니다. 김일성은 이란과의 외교 및 경제 관계를 빠르게 심화 시켰으며 중동에서 북한의 군사 작전을 확장하고자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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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ran kish island
1980년 이라크가 이란을 침공했을 때, 미국 주도의 무기 수출금지령으로 인해 이란 테헤란 정부가 사담 후세인의 군대를 격퇴 할 수있는 무기를 확보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 해졌습니다. 김일성은 자신이 이끄는 군대에게 이슬람 공화국을 돕기 위해 파견 명령을 내렸습니다. 지난 10 년 동안 서울에서 Jay Solomon 과 인터뷰 한 탈북자들은 1980 년 대 내내 이란의 방어를 강화하기 위해 이란으로 파견되었다고 밝혔습니다. 평양의 군수 산업 공장에서 일한 한 탈북자는 테헤란이 호르무즈 해협을 통해 적군의 이동을 보다 잘 통제 할 수 있도록 이란 키시 섬에 미사일 배터리를 구축하는 임무를 가지고 북한의 제 2경제위원회에 의해 이란으로 파견되었다고 말했습니다.
탈북자는 자신이 주로 담당했었던 곳은 이란의 엘리트 군대인 이슬람 혁명 수비대(IRGC, The Islamic Revolutionary Guard Corps)라고 말했습니다. 전 수력 학자는 문화와 언어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그의 동료 100 명과 경비원 사이에서 동지애가 발전했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술을 마시지 않는 나라에서 긴장을 푸는 북한 군사지원단이 긴장을 푸는 데 어려움을 느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탈북자는 이란-북한 관계가 번영하고 견뎌낸 이유를 설명하면서 “이란은 세계의 다른 지역이 그들을 고립시킬 때 자신의 방어를 위해 온 것이 우리임을 항상 기억하고있다”고 말했습니다.
1988 년 이란-이라크 전쟁이 끝난 후에도 북한과 이란의 군사 동맹은 계속 발전했습니다. 이때 양국은 전략적 미사일 시스템 개발에 긴밀한 협력을 시작했습니다. 이 능력을 통해 이란은 사우디 아라비아와 아랍 에미리트(UAE)를 포함한 아랍의 적들을 공격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결국 테헤란은 이스라엘을 목표로 삼았는데,이란의 이슬람 지도자들은 그들의 지역에서 이스라엘을 제거해야 할 "암"으로 간주했습니다. 그러나 1990 년대 초 북한은 여러 전선에서 실존 위기에 직면했습니다. 소비에트 연방의 붕괴는 북한에 대한 모스크바의 재정 지원을 고갈시키고 세계 공산주의 블록에서 주요 수출 시장의 북쪽을 강탈당했습니다. 1950 년대 한국 전쟁이 끝난 후 북한은 때때로 산업재 생산국으로서 한국을 앞질르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대한민국이 전자, 선박 및 자동차 생산 분야의 세계적인 리더로 부상하면서 이러한 역학 구조는 크게 역전되었습니다.
북한 김일성은 당시 80세였으며 결국 자신의 삶을 주관하는 심장 문제로 고통을 겪었습니다. 그가 선택한 후계자, 김정일은 어려운시기에 북한을 이끌 수있는 능력에 대해 평양에는 큰 불확실성이 있었습니다. 젊은 김정일는 (한국의 영화 감독이었던 신상옥씨와 배우였던 최은희씨를 납치해서 신필름 영화제작소를 만들어 제작할 만큼)영화를 만드는 것을 선호하였고 독한 술을 과음하는 것으로 명성을 얻었습니다.
1992 년 북한이 이스라엘에 은밀한 협상제의를 한 것은 바로 이 불안정한 맥락에서 였습니다. 북한은 경제 불황에 대처하는 방법을 모색하고 있었고, 이스라엘을 산업 재건의 잠재적 파트너로 보았습니다. 또한 북한의 지도 수뇌부들은 이스라엘과 미국의 강력한 정치적 로비가 북한과 모스크바의 동맹에서 문제가 되었던시기에 미국과 더 나은 유대를 위한 통로가 될 수 있다고 믿었을 수도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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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금광(金鑛)인 운산 광산
1992 년 9 월 북한이 이스라엘에 처음으로 기관을 통한 접촉을 한 것은 한인 사업가를 통해 이루어졌습니다. 그 사업가는 팔레스타인 사람들과 협상을 위해 당시 워싱턴을 방문했던 이스라엘 외무부 차관 Eytan Bentsur의 친척을 통해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연락이 취해졌습니다. 맨하탄 중부의 다이아몬드 지구에서 초기 회의가 시작되었습니다. 평양의 초기 요청은 간단했습니다. 한국 전쟁 당시 미 공군에 의해 파괴 된 금광에 대한 이스라엘의 3 천만 달러 투자와 재건을 위한 기술 지원을 모색했습니다. 북한은 운산성 중심에서 이 프로젝트에 대한 성공적인 협력이 양국 간 경제 협력을 위한 다른 길을 열 수 있기를 희망했습니다.
벤츠르는 인터뷰에서 북한이 탄도 미사일 기술을 이스라엘 주변 지역 적대국들에게 이전하는 것에 대한 이스라엘의 우려가 커지면서 이 제안에 흥미가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강화된 관계는 이 무기의 흐름을 잠재적으로 막을 수 있고,이란, 시리아, 리비아의 미사일 시스템이 이스라엘에 대해 제기한 실존적 위협으로 떠오르고있는 것을 완화시킬 수 있다고 주장했었습니다. 벤츠르는 평양과 더 나은 관계는 한반도에 주둔 한 수십만 명의 병사들이 북한의 위협에 직면 할 수 있는 상황에 워싱턴이 관심을 가질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당시)“소련은 해체되고있었습니다. 굶주림은 북한에 뿌리를 내렸습니다.” 벤츠르 (Bentsur)는 텔 아비브에있는 커피 숍에서 말했습니다. "그들은 도움을 찾고있었습니다."
벤츠르는 1992 년과 1993 년 베이징과 평양에서 북한과 일련의 협상을 진행했습니다. 이스라엘 외교관은 북한 광산의 재활 가능성을 연구하기 위해 이스라엘 대학의 광업 및 광물 전문가를 포함시켰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사람들은 토론 중에 평양의 (중동지역에 대한) 미사일 수출에 대한 구상을 깨뜨리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벤츠르 대변인은 북한 협상가들에게 이스라엘의 모든 경제적 지원이 북한의 중동 무기 거래 중단을 포함시켜야 할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북한이라는 나라에 투자하기 위해 이스라엘은 10 억 달러의 더 큰 기금을 모색하였습니다.
1992 년 11 월 방문에서 벤츠르는 팔레스타인 해방기구 회장이었던 Yasser Arafat(야세르 아라파트)가 한 번 머물렀던 북한의 주 영빈관에서 머물게 되었습니다. 벤츠르는 이스라엘과 대립중이었던 아랍 혁명가와 같은 방에서 자고 있다고 회상했습니다. 회담이 광산에만 집중하는 것에서 경제적 인 참여로 진행됨에 따라 북한은 미사일 판매가 중동에 중단되는 것에 대해 (북한이 이스라엘에게)재정적 보상을 받아야 할 것이라고 구체적으로 언급했습니다. 평양은 매년 중동 무기 시장에서 수억 달러를 벌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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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몬 페레스, Shimon Peres (1923. 8. 2. 폴란드 ~ 2016. 9. 28.)
2007.06~2014.07 제9대 이스라엘 대통령 역임
궁극적으로 벤츠르와 그의 이스라엘 협상팀은 그들이 북한과 협상 계약에 Parameter (매개 변수)를 가지고 있다고 믿었습니다. 이스라엘은 북한의 광산 개발을 지원하고 이에 따른 10 억 달러를 조성하며 북한의 에너지 부족 문제를 해결할 방법을 모색 해야 할 것이었습니다. 그러한 상황 과정에서 북한은 중동의 아랍국가들에게 미사일 수출을 중단 할 것이라는 희망적 계산이었습니다. “북한은 이스라엘이 외교적 사명을 열 수 있도록 준비했습니다. 북한 외교협상가들은 페레스가 평양을 방문하기를 원했다.” 벤츠르는 이스라엘의 당시 외무 장관 시몬 페레스(Shimon Peres)를 언급하면서 말했습니다. "그들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들이 (무기 수출로) 이용하는 항구를 감시하게 하기로 동의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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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프레임 할레비(Ephraim Halevy, 1934. 12.02 ~ 영국 출생), Director of Mossad (1998년–2002년)
그러나 이스라엘과 북한의 협상 거래는 결코 보류되지 않았습니다. 벤츠르 협상팀에게 알려지지 않은 북한의 또다른 외교협상 관련자들은 이스라엘 해외정보업무를 비밀리에 담당하였던 유명한 모사드 (Mossad)를 통해 이스라엘과 별도의 외교 채널을 추구했었습니다. 당시 모사드의 부국장 인 에프레임 할레비 (Ephraim Halevy)는 10 년간 에너지 지원 계획에 중점을 둔 평양과 협상을 진행하고 있었습니다. 1992 년 11 월 두 사람은 토론을 위해 평양을 따로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북한의 국영 항공 인 고려항공(Air Koryo)을 통해 북한에서 중국으로 돌아 오는 같은 항공편에서 서로를 발견 한 것에 놀랐다고 합니다.(서로 만나기 전까지 북한내에서 다른 이스라엘 협상팀이 있으리라곤 전혀 생각 못한 것이었습니다.) 북한은 두 바퀴 외교 채널을 이용하여 대해 두 협상팀에 대해 의도적으로 서로의 존재를 알지 못하게 하였던 것입니다.
할레비(Halevy) 모사드 부국장은 북한과의 관계에 대한 벤츠르(Bentsur)의 협상 낙관론에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영국 태생의 이스라엘 모사드 스파이기관장은 북한이 미국의 전통적인 적대국에 대한 지렛대(leverage)를 줄이기 위한 수단으로 경제 무역을 이용하여 이스라엘을 조종하려한다고 생각했습니다. Halevy 모사드 부국장은 CIA에 (북한에서의) 비밀 회담에 대해 알리고 빌 클린턴 행정부가 (북한과의 협상) 계획을 지지하지 않았다고 워싱턴으로부터 소식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페레스 외무 장관은 1993 년 초 미국의 워런 크리스토퍼(Warren Christopher) 국무장관으로부터도 같은 메시지를 받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워싱턴에서 (북한과 이스라엘의 비밀 협상에 대한 생각들이) 어떻게 되는지에 대한 숙고없이 스스로 북한을 억누를 수 없었다”고 할레비 부국장은 텔 아비브에서 말했다고 합니다. "우리는 북한과 전문적으로 협상하는 對아시아 협상전문가 아니었습니다."
불과 몇 달 후, 유엔 핵 조사관(United Nations nuclear inspectors)들이 북한의 영변 원자로에서 플루토늄을 전환하여 잠재적으로 핵무기를 개발하여 사용하고 있음을 발견했을 때 북한發 국제 위기가 발발했습니다. 빌 클린턴 행정부는 김일성 정권과 협상을 벌였으며 양측은 결국 벤츠르 협상팀과 할레비 모사드 부국장 협상팀들이 추구 한 것과는 다른 거래에 도달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미국은 북한이 영변 시설 폐쇄에 대한 대가로 석유 선적 및 경수로 형태로 북한에 에너지 지원을 제공하기로 합의했습니다. 그러나 합의서 (Agreed Framework)로 알려진이 협정은 중동에 대한 북한의 미사일 수출을 다루지 않았습니다. 이 결과 북한은 미국과 유엔의 지원을 받아 비밀리에 핵 작업을 계속 수행 할 것입니다. 실제로 북한은 궁극적으로 핵폭탄을 만들기 위한 두 가지 기술을 마스터 할 것입니다. 두 번째는 원심 분리기를 사용하여 무기級 우라늄을 생산했습니다.
1999 년에 이스라엘 외교관들은 북한으로부터 미사일 수출을 중단하라는 또 다른 제안하며 북한과 비밀리에 접촉했습니다. 이번에는 북한이 스웨덴 스톡홀름에 기반을 둔 북한 외교관을 통해 이스라엘에 연락했다고 합니다. 북한은 시리아와 이란에 A級 기술이 들어간 미사일 시스템 수출을 중단하기 위해 이스라엘에게 10 억 달러를 청구 할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이스라엘은 미국의 뒤에서 그런 현금을 북한에 지불 할 수 없다고 응답했습니다. (이 내용은 태영호氏의 저서 "3층 서기실의 암호"에도 똑같이 적혀 있는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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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4월 22일 평안북도 룡천군 룡천역 폭발 사고 前의 위성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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룡천역 폭발 사고 後의 위성 사진
이스라엘 외교 당국자들은 북한 협상팀과의 만남에도 불구하고 북한의 국제사회를 향한 특이한 활동에 대해 별다른 특이정보를 얻지 못했다고 언급하였습니다. 김정일 정권이 이스라엘 안보 이익에 대한 중대한 위협에 관계없이 평양에서 벌이는 중동무기수출은 미국의 문제로 여겨지게 보여졌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사드(Mossad)가 북한에 대한 방해 작전을 수행하고 있다는 소문이 한국에 퍼졌습니다. 2004 년 봄, 중국 국경 근처를 가로 지르는 북한 열차가 폭발하여 50 명 이상이 사망했습니다. 아시아의 일부 뉴스 보도에 따르면 시리아 군 정보 요원이 사망했다고보도하였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정보요원들이 중동 아랍국가들에게 북한의 미사일 수출을 막기 위해 열차를 폭발 목표로 삼았다는 추측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나는 서울과 이스라엘에 대한 광범위한 보고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방해 작전 운영이 일어 났음을 확인할 수는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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룡천역 폭발 부근을 불도저를 이용하여 흙을 메우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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룡천역의 폭발 구덩이
(룡천역 폭발 사고는 실제는 150명이 사망하고 1400명이 부상을 당했던 상당한 규모의 폭발 사고였습니다.
당시 이 폭발 사고는 김정일을 겨냥하고 시리아로 가는 화공약품과 미사일 고체 연료와 시리아 핵 기술자들을 제거하기 위한 모사드의 비밀 작전의 결과였다는 내용입니다.
당시 룡천역에서 폭발하였던 열차에는 밀봉된 화물칸이 있었으며 이 화물칸 옆 객차에 12명의 시리아 과학자들이 타고 있었습니다. 이는 Mossad 요원이 파악한 정보였으며 이 과학자들은 이란 Natanz에서 핵 프로그램에 참여한 이력이 있었습니다. 당시 북한을 방문한 이유에 대해 2004년 당시에는 여러 이유가 분분하였는데 최종적인 정보 분석에 의하면 북한에서 핵 분열 물질을 인수받기 위해 북한을 방문한 것으로 결론이 났습니다.
시리아 과학자들은 룡천역의 거대한 폭발 충격으로 전원 사망하였으며 과학자들의 시신들은 후에 납으로 싼 관에 담겨져 군용기 편으로 시리아로 후송되었습니다.
화물차가 폭파된 지역은 즉시 봉쇄되었고 수십 명의 북한 병사들이 오염 방지복을 입고 며칠 동안 잔해들을 수거하고 오염 방지 약품을 살포하였습니다.
Mossad의 정보 분석관들은 당시 북한의 플루토늄 보유 추정치인 55kg중 일부가 폭파된 룡천 열차에 실려져 있어서 이를 회수하려고 노력했을 가능성을 추정하였습니다.
사망한 시리아 과학자들은 10번 이상 북한을 방문하였으며 북한 방문 때 마다 북한측 고위 관리들과 접촉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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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룡천역 폭발 사고의 위성 분석 사진 (출처 : Global Secur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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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에 위치한 룡천역
시리아에 북한이 건설한 원자로는 조지 W. 부시 대통령이 2007 년 여름, 미국의 군사력을 이용하여 시리아 원자로 시설을 파괴하기로 결정한 이후에도 이스라엘이 무시할 수없는 위협에 직면했습니다. 미국의 정보 기관이 시리아의 핵 개발 능력에 관한 미해결 질문에 대답 할 수 없는 것이 부시 행정부의 중요한 이유 중 하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또한 그의 보좌관들에게 두 번째 임기가 끝나는 달에 다른 지역의 중동 전쟁을 감수 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올메르트(Ehud Olmert) 이스라엘 총리에게 미국은 시리아를 국제 비확산 법규 위반으로 IAEA에 보고하고 시리아 수도 다마스쿠스의 위협을 외교적으로 제거하려고 노력하고 있다고 제안했습니다. 당시 부시 행정부는 북한 핵무기를 해체하는 것을 목표로 북한과의 대화를 동시에 추진하고 있었습니다. 콘돌리자 라이스 국무 장관은 Al Kibar(알 키바)에 대한 타격이 그 과정을 방해 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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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09.20. 이란 Natanz 핵 프로그램 시설
올메르트 이스라엘 총리는 부시 미 대통령의 외교론적 근거를 받아 들였지만 이스라엘이 혼자 행동 할 준비를 하고 있음을 분명히 했습니다. 올메르트 총리의 보좌관들은 IAEA와 관련된 외교적 궤도가 연장된 협상으로 시리아의 핵 프로그램을 공식화 할 위험이 있다고 믿었습니다. 실제 시리아는 이란이 2002 년 비밀리에 원자력 발전소를 건설 한 후 보였던 비슷한 모습들을 보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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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공군기들의 편대 비행 모습
2007 년 9 월 5 일 저녁 8 대의 이스라엘 공군기들이 네게브 사막에 있는 2 개의 공군 기지에서 비밀리에 이륙하여 시리아로 들어가기 전에 지중해를 지나 동쪽인 터키 공역 공간으로 날아 갔습니다. 이 공군기들은 알 키바르 시설을 완전히 파괴 한 후 이스라엘로 안전하게 돌아와서 착륙하였습니다. 올메르트 이스라엘 총리는 이스라엘 언론에 이 사건에 대한 보도를 통제하였습니다.(이 폭격작전은 2013년에 공개되었습니다.) 시리아 아사드 대통령은 이스라엘 공군기들의 폭격에 대해 자국의 느슨한 방공망이 외부에 노출 된 사실에 당황하면서 조용히 침묵하였습니다. 오직 북한 만이 이 작전을 공개적으로 비난했습니다. 미국 당국자들은 알 키바르 원자로 폭격으로 다수의 북한 과학자들과 엔지니어들이 사망했다고 밝혔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과 미국 관리들은 이 작전 결과에서 얻은 결과에 대해 여전히 우려하고 있습니다. 올메르트(Olmert) 이스라엘 총리는 아사드(Assad) 시리아 대통령이 이스라엘 공군기들의 기습 폭격에 군사적으로 대응하지 않았으며 잠재적으로 지역 전쟁을 일으킨 것으로 안심했습니다. 그러나 시리아나 북한은 국제사회에 대해 핵 확산 행위에 대한 외교적 또는 재정적 책임 비용을 지불하지 않았습니다. 실제로 부시 행정부는 2008 년 북한과의 핵 협약 추구를 계속하고 2008 년 테러 지원국 명단에서 북한을 제거했음에도 북한은 부시 미 대통령 임기 몇 달을 남겨놓고 회담을 철회하고 원자 폭탄과 장거리 미사일 생산량을 대폭 늘렸습니다. 한편 시리아와 북한은 유프라테스 강 부근에 원자로를 건설하기 위해 협력했었다는 것을 부인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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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lliott Abrams, (1948. 01. 24 ~ , 외교관, 변호사, 로널드 레이건, 조지 W. 부시,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의 외교 정책 담당)
북한이 얻은 외교적 성과는 중동과 다른 지역에서 핵이 확산되어 국제사회에서 북한에 대한 압박과 과도한 관심으로부터 도망 갈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북한에 대한 국제사회의 우려와 군사적 응징에 대한 관심일변도를 중동아랍지역에 핵 무기와 미사일 무기를 확산시켜서 관심을 분산시킬 수 있다는 의미) Al Kibar에 관한 회의 토론에 참여한 조지 W. 부시 백악관의 중동 최고 전문가 인 엘리엇 에이브람스 (Elliott Abrams)는 “부시 대통령의 임기 末에 북한에 대한 우리의 접근은 엄청나게 위험한 선례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그것에 대한 댓가를 지금 지불하고 있다." 고 언급하였습니다.
시리아에서 북한은 아사드 시리아 대통령이 2011 년 이후 벌어진 내전(Civil War)에서 승리 할 수 있도록 서두르고 있습니다. 미국과 유엔 그리고 아랍 관리들에 따르면 러시아, 이란, 레바논 민병대, 헤즈볼라는 잔인한 분쟁에서 아사드의 가장 큰 동맹국 이었지만, 시리아 독재자인 아사드에게도 잘 어울리는 상대들이었습니다.
아사드 시리아 대통령이 수천 명의 자국 시리아 인들에게 가스를 살포하는 데 사용했던 화학 무기의 생산 공급은 북한이 시리아 내전에서 한 주요한 역할입니다. 유엔 조사관들은 지난해 북한 무역 회사들이 시리아 과학 연구 센터(Syria’s Scientific Studies and Research Center)와 협력하여 새로운 화학 무기 시설을 건설하기 위해 수많은 산업 장비를 시리아로 밀수입 한 방법에 대해 비밀 보고서에 자세히 기록하여 설명했습니다. 시리아 과학 연구 센터(SSRC)는 Assad의 화학 무기 생산을 감독합니다. 화학무기 생산설비를 실은 선적은 미국과 여러 회원국에 의해 추적되었으며 산에 부식되지 않는 타일, 스테인레스 스틸 파이프 및 화학 무기 생산과 관련된 기타 재료가 포함되었습니다. 이 보고서에서 유엔은 2012 년부터 2017 년까지 SSRC에 신고되지 않았던 이전의 공개되지 않은 북한 선적 40 건을 확인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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