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성왕씨 부산파

北 고려왕릉] ⑧수차례 도굴 ‘선릉’은 현종의 무덤일까

아지빠 2020. 2. 22. 08:02




北 고려왕릉] ⑧수차례 도굴 ‘선릉’은 현종의 무덤일까

 

왕건릉에서 북쪽 1.2km에 있는 3개의 왕릉 선릉은 가장 북쪽에 있는 능으로 추정

목종(穆宗)의 의릉(義陵)은 소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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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개성직할시 해선리에 있는 고려 8대 현종(顯宗)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선릉(宣陵) 전경. 고려 태조 왕건릉에서 북쪽으로 1.2km 정도 떨어져 있다. (사진=평화경제연구소 제공)

8회 ‘사생아’로 태어나 왕위에 오른 현종의 선릉(宣陵)

송악산 줄기가 서쪽으로 뻗어내려 온 작은 봉우리가 만수산(萬壽山)이다. 이방원의 ‘하여가(何如歌)’에 등장하는 산이다. 훗날 조선 태종이 되는 이방원은 세를 규합하며 정몽주에게 ‘하여가’를 통해 자신의 의중을 드러낸다. 조선 건국에 동참할 것을 권유하는 내용이었다.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칡이 얽혀진들 어떠하리. 우리가 이같이 얽혀져 백 년까지 누리리라.”

정몽주 역시나 익히 알려진 ‘단심가(丹心歌)’로 답한다.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 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정몽주의 마음을 확인한 이방원은 수하를 시켜 선죽교에서 그를 죽였다.

만수산은 ‘고려의 북망산’으로 불린다. 태조 왕건의 현릉이 이곳에 자리 잡은 후 가장 많은 왕릉이 조성됐기 때문이다. 고려 왕릉 외에도 고려의 귀족과 조선시대 고위 관료들의 묘가 만수산 주변에서 확인된다. 현재 행정구역상으로는 개성직할시 해선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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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개성직할시 해선리에 있는 선릉군 제2릉 전경. 무덤의 주인공은 알 수 없으며, 고려 8대 현종(顯宗)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선릉군 제1릉에서 남쪽으로 500m 정도 떨어져 있다. (사진=평화경제연구소 제공)

왕건릉 서쪽에서 북쪽으로 난 소로를 따라 낮은 언덕을 넘어 가면 ‘칠릉골’이 나온다. 무덤의 주인을 알 수 없는 7개의 고려 왕릉(칠릉군 또는 칠릉떼라고 부름)이 자리 잡고 있어 붙은 지명이다. 7개의 고려왕릉은 2013년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됐다.

여기서 동북쪽으로 다시 고개 하나를 넘으면 3개의 왕릉이 나타나는데, 선릉군(宣陵群) 혹은 선릉떼라고 부른다. 만수산이 서남으로 뻗기 시작하는 높지 않은 언덕에 남향으로 조성돼 있다. 과거에는 이 마을을 능현동(陵峴洞)이라고 불렀다. 역시 왕릉이 있기 때문에 붙은 이름으로 추정된다.

-선릉군(선릉떼)이라 불리는 3개의 왕릉

3개의 왕릉 중 ‘선릉군 제1릉’은 고려 8대 현종(顯宗)의 능으로 추정된다. '고려사' 따르면 현종은 1031년(현종 22) 5월 중광전(重光殿)에서 승하하여 송악산(松岳山) 서쪽 기슭에 장례 지냈다고 한다. 능호는 선릉(宣陵)이다.

고려 현종의 능으로 추정되는 선릉은 능 앞으로 완만하게 뻗어 내린 산기슭을 다듬어서 장축을 동서로 하는 장방형의 4층단으로 축조되어 있다.

제1단의 중심 부위에 봉분이 자리 잡고 있다. 북한의 조사에 따르면 봉분은 먼저 병풍석(屛風石)을 12각으로 축조한 위에 조성했고, 봉분의 높이는 2,25m, 직경은 9m이다.

병풍석의 아래 부분은 매몰되어 있고, 면석에는 12지신상(十二支神像)이 조각되었다. 12지신상은 능묘를 보호하는 기능으로 새겨지며, 대부분 문복을 입고 손에 홀(笏)을 잡고 있는 수수인신(獸首人身, 동물 머리에 사람 몸)의 모습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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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개성직할시 해선리에 있는 선릉군 제3릉 전경. 무덤의 주인공은 알 수 없으며, 고려 8대 현종(顯宗)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선릉군 제1릉에서 남동쪽으로 200m 정도 떨어져 있다. 1910년대에 촬영된 사진과 비교해 보면 망주석, 문인석 등 대부분의 주요 석물이 사라진 것이 확인된다. (사진=평화경제연구소 제공)

고려 임금의 능 중에서 선릉을 비롯해 태조의 현릉(顯陵), 경종의 영릉(榮陵), 공민왕의 현릉(玄陵) 등에서 12지신상이 확인된다. 선릉의 12지신상은 현재 대부분은 마멸되어 그 모습을 정확하게 판독하기 어렵다. 현재 병풍석의 일부 구간은 1963년 이전에 보수할 때 잡석으로 보충한 것으로 보이며, 북한은 2016년에 다시 대대적으로 능역을 정비했다.

봉분 주위에 12각형으로 난간석을 돌렸으나 현재 난간 기둥들은 대부분 없어지고 몇 개의 석물만 남아 있다. 동서 양 쪽에는 8각 돌기둥 형태로 된 망주석(望柱石) 1쌍이 마주 서 있다. 1910년대에 촬영된 사진을 보면 1867년(조선 고종 4)에 세운 표석이 서 있었다. 그러나 2016년에 촬영된 사진을 보면 능비가 사라졌다.

2단의 동서 양 켠에는 문인석(文人石) 1쌍이 마주 보며 서 있는데, 심하게 훼손되었고 인위적으로 파손된 부분도 있다. 높이는 2.12m이고, 너비는 0.36m, 두께는 0.4m 정도이다.

 

3단에도 2단의 문인석과 일직선상에 문인석 1쌍이 서 있다. 동쪽에 있는 문인석의 높이는 2m 정도다. 1910년대 사진을 보면 문인석 1쌍이 3단이 아닌 4단에 위치해 있어서 3단이 비어 있었고, 1쌍의 문석인이 서로 마주보지 않고 동쪽 문인석이 남향하여 서 있었다. 이밖에도 고려 왕릉의 기본 구조에서 벗어나 있었던 것이 많았는데, 현재는 원형에 가깝게 새로 조성되어 있다.

아래쪽 4단에는 정자각(丁字閣) 터가 있는데, 1963년에는 초석 2개와 기와 파편이 남아 있었다고 한다.

조선 건국 후 세종(世宗) 때까지만 해도 현종의 선릉은 수호인이 있어 어느 정도 관리가 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선릉을 비롯한 고려 왕릉의 대부분이 관리가 소홀해졌다. 조선 현종 때의 기록을 보면 “이미 봉토는 다 훼손되었고, 사면석물은 대부분 매몰되어 어느 것이 현종의 능인지 정확히 알 수 없었다”라고 할 정도로 선릉은 황폐화됐다.

그 후 선릉은 어느 시점에 다시 복원되었고, 조선 순조(純祖)와 고종(高宗) 때 왕릉 표석(表石)을 세우고 산지기를 두어 관리했지만 여러 차례 도굴당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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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대에 촬영된 선릉군 제3릉 전경. 무덤의 주인공은 알 수 없으며, 고려 8대 현종(顯宗)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선릉군 제1릉에서 남동쪽으로 200m 정도 떨어져 있다. 사진 왼쪽 위로 제1릉이 보인다. (사진=국립중앙박물관 제공)

1905년(대한 광무(光武) 9년)에 “고려 현종(顯宗) 선릉(宣陵)의 산지기가 보고하기를, ‘음력 정월 14일 밤에 알지 못할 어떤 놈이 능을 허물었습니다’라고 하기에 즉시 달려가 봉심하니 능이 허물어 진 곳이 3분의 1이나 되고 앞면의 판 곳은 깊이가 3, 4자 가량 되었습니다”라는 기록이 남아 있다.

이러한 기록을 볼 때 제1릉을 현종의 선릉으로 새로 파악한 것은 조선후기였고, 발굴된 유물로 거의 없기 때문에 제1릉을 선릉이라고 확증하기는 어렵다.

선릉군 제1릉에서 남쪽으로 500m 정도 떨어져 제2릉이 자리 잡고 있고, 제1릉에서 남동쪽으로 200m 정도 떨어져 제3릉이 있다. 제2릉과 제3릉은 현재 무덤의 주인을 알 수 없다. 선릉에 비해 제2릉과 제3릉이 규모 면에서 조금 작은 편이다.

현종의 제1비인 원정왕후(元貞王后)가 1018년(현종 9) 죽은 뒤 화릉(和陵)에 장사지냈는데, 현종의 무덤에 가깝게 조성됐다는 점에서 두 능 중 하나가 화릉일 가능성이 있다. 현종의 제3비인 원성왕후(元成王后, 고려 9대 덕종과 10대 정종의 모후), 현종의 제4비인 원혜왕후(元惠王后, 고려 11대 문종의 모후)의 무덤일 수도 있다.

-현종이 현화사(玄化寺)를 창건한 이유

고려 현종은 1021년(현종 12) 도성 서쪽에 현화사를 창건했다. 현재 현화사는 폐사돼 당간지주만 덩그러니 남아 있지만 창건 당시 세운 현화사비(玄化寺碑)가 1988년에 개관한 고려박물관 뒤뜰로 옮겨져 보존돼 있다.

북한의 국보유적 제151로호 지정된 현화사비에는 현종이 양친인 안종(安宗)과 헌정왕후(獻貞王后)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현화사를 창건하였다는 창건 연기(緣起, 절을 깃게 된 이유)와 절의 규모, 연중행사 및 국가에서 베푼 여러 가지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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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현종이 1021년(현종 12) 도성 서쪽에 세운 현화사터. 현재는 폐사되어 당간지주(사진 중앙 멀리 보이는 기둥처럼 생긴 것)만 덩그러니 남아 있고, 창건 당시 세운 현화사비(玄化寺碑)와 7층석탑은 고려박물관 뒤뜰로 옮겨져 보존돼 있다. (사진=미디어한국학 제공)

특히 비의 뒷면에는 현종이 국가의 번영과 사직의 안녕함을 위하여 매년 4월 8일부터 사흘간 밤낮으로 미륵보살회(彌勒菩薩會)를 베풀고, 양친의 명복을 위해서는 매년 7월 15일부터 사흘간 밤낮으로 미타불회(彌陀佛會)를 열었다고 기록돼 있다.

현종이 특별히 양친의 명복을 빌기 위해 현화사를 창건한 이유는 그의 출생 비밀과 연결돼 있다. 현종은 두 차례 거란의 침입을 수습하고 고려 왕조의 기틀을 다지는 데 크게 기여한 군주로 평가된다.

묘호인 현(顯) 자는 “업적이 나라 안, 밖으로 널리 알려졌다”란 의미를 담고 있다. 그러나 그에게는 ‘사생아’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다. 역대 한국 왕조 중에 서자 출신 군주는 여럿 나왔으나 부모가 정식 혼례 절차 없이 사생아로 태어난 군주는 고려 현종이 유일하다. 현종은 원찰(原刹)을 세워 사생아인 본인을 낳아 힘들게 살다 죽은 부모 안종과 헌정왕후의 명복을 빌고 그들의 명예를 회복시키고자 했던 것이다.

다만 사생아라는 약점만 빼고 부모의 혈통만 따지면 현종의 정통성은 뚜렷했다. 현종의 아버지는 안종(安宗)으로 추존되는 왕욱(王郁)이고, 어머니는 경종(景宗)의 왕비였던 헌정왕후(獻貞王后) 황보씨(皇甫氏)였다. 헌정왕후는 경종 사후에 사저로 나가 살고 있었는데, 이때 왕욱과 정을 통하여 아이를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이 사실이 알려져 왕욱은 지금의 경상남도 사천인 사수현(泗水縣)에 유배됐고, 헌정왕후는 아이를 낳고 바로 세상을 떠났다. 이 아이가 바로 왕순(王詢), 즉 훗날의 현종이다.

그가 국왕의 자리에 서게 된 과정은 매우 극적이었다. 헌정왕후는 당시 국왕이던 성종(成宗)의 친누이였으므로 현종은 성종의 친조카다. 현종은 성종의 배려로 유모의 손에서 자라다가 유배지에 있던 왕욱에게 보내져 함께 살았다. 이후 대량원군(大良院君)에 책봉됐고, 왕욱이 사망한 뒤에는 다시 개경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성종이 사망하고 고려 7대 목종(穆宗)이 즉위한 뒤로 정치적인 견제에 시달리게 되었다. 당시 권력을 쥔 목종의 어머니 천추태후(千秋太后)는 어린 현종을 강제로 머리를 깎아 숭교사(崇敎寺)에 들여보냈고, 이후 신혈사(神穴寺)로 옮겼다. 천추태후는 여러 차례 사람을 보내 현종을 해치려 했다고 한다.

그런데 1009년(목종 12)에 돌발적인 상황이 벌어졌다. 30세의 한창 나이였던 목종이 갑자기 병이 들어 위독해지면서 후계 문제가 대두한 것이다. 아들이 없던 목종은 측근들과 의논하여 당시 유일하게 남은 태조의 손자인 대량원군 왕순을 후계자로 정하고, 신혈사에 있던 왕순을 불러오는 한편, 서북면을 지키고 있던 강조(康兆)를 불러들여 호위를 맡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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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8대 현종(顯宗)이 1021년(현종 12) 도성 서쪽에 창건한 . 현화사가 폐사되면서 현재는 고려박물관 뒤뜰로 옮겨져 보존돼 있다. 북한의 국보유적 제151호로 지정된 현화사비에는 현종이 양친인 안종(安宗)과 헌정왕후(獻貞王后)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현화사를 창건하였다는 창건연기와 절의 규모, 연중행사 및 국가에서 베푼 여러 가지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사진=평화경제연구소 제공)

그러나 목종의 어미인 천추태후와 정을 통한 김치양(金致陽)이 정권을 잡았다고 오해한 강조는 개경에 도착한 후 목종을 폐위하고, 왕순을 새 왕으로 옹립했다. 즉 현종은 원래 목종의 지명을 받아 정상적으로 후계가 될 수 있었으나, 뜻하지 않은 정변으로 비정상적으로 즉위한 것이다.

우여곡절 끝에 왕위에 올랐지만 현종은 두 차례 거란을 침입을 막아내고, 군현제 실시로 중앙집권적인 정치체제를 수립해 100여 년간 지속된 고려의 전성기를 열었다.

특히 1018년(현종 9)에 시작된 거란과의 전쟁(‘3차 고려-거란 전쟁’)에서는 강감찬(姜邯贊)이 이끄는 고려군이 귀주(龜州)에서 결정적으로 승리(귀주대첩)함으로써 현종은 고려의 국제적인 위상을 높이고, 11세기의 활발한 국제 교류 시대를 여는 초석을 놓을 수 있었다.

한편 폐위된 목종은 강조가 보낸 자객에 의해 시해되어 ‘개성현 남쪽’에 화장(火葬)됐다. 이때 조성된 목종의 능은 공릉(恭陵)이라고 했으며, 묘호(廟號)는 민종(愍宗)이었다. 이것은 강조의 주도로 이뤄졌고, 후에 이 사실을 알게 된 현종은 1012년(현종 3)에 개성 동쪽으로 이장하고 능호를 의릉(義陵)으로 개칭했다.

그리고 목종의 제1비인 선정왕후가 사망하자 의릉에 합장됐다. 조선 세종대까지만 해도 “의릉 주변에서 벌목하거나 채취하는 것을 금했다”는 기록이 있지만 이후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없게 됐다. 의릉이 완전히 없어지지 않았다면 현재 개성 도성의 동북쪽에 있으면서 무덤의 주인을 알 수 없는 동구릉, 냉정동 무덤군, 소릉군 등의 왕릉급 무덤 중에서 찾아야 할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