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고려왕릉] ⑥광종이 묻힌 헌릉, 원형 사라져 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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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성직할시 삼거리동 소재지에서 박연폭포로 가는 길가에 있는 고려 4대 광종(光宗)의 무덤인 헌릉(憲陵) 전경. 왕릉이라고 보기에는 대단히 초라한 상태다. (사진=평화경제연구소 제공)
박진희 기자 = 6회. 왕권 강화에 성공한 광종이 묻힌 헌릉(憲陵)
개성 시내를 빠져나와 개성-평양 간 고속도로를 타고 10km쯤 올라가다 오른쪽으로 빠져나와 2km 정도 더 가면 왼쪽으로 낮은 산줄기가 나온다. 이곳에 고려 4대 광종(光宗)의 무덤이 자리 잡고 있다. 현재 행정구역상으로는 개성직할시 삼거리동이다. 광종은 925년(태조 8) 태조 왕건의 아들로 태어나 949년 왕위에 오르고, 975년 재위 26년만에 51세로 죽어 송악산 북쪽 기슭에 묻혔다. 고려 3대 정종의 친동생으로 이름은 왕소(王昭)이고, 능 호는 헌릉(憲陵)이다. 풍수지리설에 따라 태조는 도성 서쪽에, 혜종은 동쪽에, 정종은 남쪽에, 광종은 북쪽에 안장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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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4대 광종(光宗)의 무덤인 헌릉(憲陵)에서 동북쪽으로 13km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박연폭포의 전경. 폭포 위가 박연(朴淵)이고, 아래가 고모담(姑母潭)이다. 고모담 왼쪽에 있는 것이 용바위다. (사진=평화경제연구소 제공)
헌릉에서 포장길을 따라 동북쪽으로 13km 정도 가면 송도삼절(松都三絶)의 하나인 박연폭포가 나오고, 박연폭포 남쪽에 광종 21년(970년)에 법인국사 탄문스님이 창건한 관음사가 자리 잡고 있다. 사실 북쪽 사람들도 박연폭포나 관음사를 찾지 가까운 곳에 헌릉이 있다는 사실 은 잘 모른다. 2007년부터 개성관광이 시작됐을 때도 박연폭포와 관음사만 관광코스에 포함됐지 헌릉은 관심 대상도 아니었다.
최근 촬영된 헌릉의 모습을 보면 그 이유를 알 것 같다. 헌릉까지 손쉽게 접근할 수 있는 길도 없고, 오랜 기간 방치돼 왕릉이라고 보기에도 민망할 정도다. 고려 31대 공민왕 때까지만 해도 왕이 광종의 헌릉에 배알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지만 조선 시대에 들어와 제대로 관리가 되지 못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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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4대 광종(光宗)의 무덤인 헌릉(憲陵)에서 동북쪽으로 13km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박연폭포 아래 고모담(姑母潭)에 솟아 있는 용바위 전경. 가장 오른쪽에 초서체로 ‘비류직하삼천척 의시은하락구천’이라고 쓴 글귀가 보인다. 황진이가 머리채에 먹을 적셔 휘둘러 썼다는 전설이 전해온다. (사진=평화경제연구소 제공)
반면 박연폭포는 여전히 즐겨 찾는 명소로 남아 있다. 개성 시내에서 직선거리로 16km 떨어진 천마산 기슭에 있는 박연폭포(높이 37m)는 금강산 비룡폭포(높이 50m), 설악산 대승폭포(높이 88m)와 함께 국내 3대 명폭의 하나다. 폭포 위쪽에 지름 8m의 박연(朴淵)이 있고, 아래쪽에 지름 40m쯤의 고모담이 있다. 박(朴) 씨 성을 가진 진사가 연못 가운데 바위에서 피리를 불자, 물속에 살던 용왕의 딸이 반해 용궁으로 데려가 함께 살았다 하여 박연이란 이름이 붙었다.
예로부터 박연폭포의 절경, 유학자 화담 서경덕(徐敬德)의 기품과 절개, 황진이의 절색을 일컬어 ‘송도삼절’이라 했다. 30년 면벽을 하던 지족암의 선사를 파계시킨 절색 황진이도, 황진이의 유혹을 뿌리친 서경덕도 이 폭포를 자주 찾아 경관을 즐겼다고 한다. 폭포 아래 고모담(姑母潭)에는 ‘용바위’라 불리는 바위 하나가 솟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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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4대 광종(光宗) 때 창건 된 관음사의 대웅전(오른쪽)과 7층석탑. 대웅전은 국보유적 12호로, 7층석탑은 보존유적 540호로 지정돼 있다. 7층석탑 뒤로 보이는 것이 관음굴이다. (사진=미디어한국학 제공)
용바위에는 숱한 한자 이름과 시구들이 새겨져 있는데 크고 유려한 초서체로 중국 이백(李白)의 시 ‘여산폭포를 바라보며(望廬山瀑布’) 중 ‘비류직하삼천척 의시은하락구천(飛流直下三千尺 疑是銀河落九天 나는 듯 흘러내려 삼천 척을 떨어지니 하늘에서 은하수가 쏟아져 내리는 듯하구나)’이란 두 구절이 새겨져 있다. 황진이가 머리채에 먹을 적셔 휘둘러 썼다는 전설이 전해온다.
폭포에서 남쪽으로 1km가량 떨어진 곳에 관음사가 자리 잡고 있다. 이 사찰은 고려 광종 때(970년) 처음 세워진 뒤 조선 인조 때 복원된 절로 경내에는 대웅전, 승방, 7층 석탑, 관음굴이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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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대에 촬영된 고려 4대 광종(光宗)의 헌릉(憲陵) 전경. (사진=국립중앙박물관 제공)
-일본 강점기 때까지 남아 있던 능비와 석수는 어디로?
광종 때 처음 세워진 관음사가 여러 차례 중건돼 잘 보존된 것에 비하면 헌릉의 관리상태는 대단히 안타깝다. 1910년대에 촬영된 사진과 비교해 봐도 능비뿐만 아니라 많은 석축이 사라지고, 능 구역이 협소화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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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대에 촬영된 고려 4대 광종(光宗)의 헌릉(憲陵)과 2017년에 촬영된 헌릉의 정면 모습. 봉분의 병풍석과 석축의 달라진 모습이 확인된다. (사진=국립중앙박물관, 평화경제연구소 제공)
1910년대에 찍은 사진을 보면 능 구역은 3단면으로 이루어져 그 좌 ·우 ·후방의 3면에 돌담장(곡장)을 둘렀던 흔적이 있다. 1단은 1.65m 높이의 토류석벽(土留石壁)으로 2단과 구별했고, 여기에 능과 돌난간, 돌짐승(石獸)이 남아 있었다. 높이 70cm의 12각형 병풍석에는 십이지신상이 새겨져 있고, 이 밖에 망주석과 석상(石床)이 남아 있었다.
2단에는 장명등(長明燈)과 석인(石人) 한 쌍이 좌우에 있고, 3단면에는 조선 후기에 세운 능비가 있었다. 정자각은 터에는 주춧돌이 남아 있어 원래 위치를 알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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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대에 촬영된 고려 4대 광종(光宗)의 헌릉(憲陵)과 2017년에 촬영된 헌릉의 정면 모습. 봉분의 병풍석과 석축의 달라진 모습이 확인된다.(사진=국립중앙박물관, 평화경제연구소 제공)
그러나 2017년에 촬영된 헌릉 사진을 보면 묘역 주변의 울창했던 산림은 훼손됐고, 돌담장의 흔적은 거의 사라졌다. 2단 양쪽에 설치돼 있던 너비 1.8m의 계단도 완전히 없어졌고, 묘비도 확인되지 않는다. 북한의 보고서에 보면 4구의 석수가 남아 있다고 했는데, 이제는 그마저도 사라진 듯하다.
봉분은 높이가 1.36m, 직경은 6.4m로, 제대로 관리가 되지 않았다. 개성직할시에서도 외진 곳이라 접근성이 떨어지기 때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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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대에 촬영된 고려 4대 광종(光宗)의 헌릉(憲陵)과 2017년에 촬영된 헌릉의 정면 모습. 봉분의 병풍석과 석축의 달라진 모습이 확인된다. (사진=국립중앙박물관, 평화경제연구소 제공)
고려 왕조의 기틀을 잡은 광종의 무덤치고는 너무나 초라하기 이를 데 없다. 과거 학계에서는 헌릉의 석물들이 훼손된 데 비해 축대나 초석들은 비교적 잘 보존되어 능 구역의 원형을 보여준다고 평가했지만, 최근 입수된 사진으로 보면 1단과 2단 사이의 축댓돌들은 완전히 사라지고, 정자각 터에 있던 돌들을 모아 보수해 놓았다. 원형이 사라진 것이다.
-평가 엇갈리는 광종의 개혁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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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서 바라 본 고려 4대 광종(光宗)의 무덤인 헌릉(憲陵) 전경. 석물들이 거의 다 사라지고 몇 개의 난간석만 확인된다. (사진=평화경제연구소 제공)
태조의 뒤를 이은 혜종과 정종 때에는 외척 세력이 개입된 왕위 계승 다툼이 벌어져 왕권이 위협을 받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즉위한 광종은 개혁 정치를 펼쳐 왕권을 강화하려 했다. 광종은 개혁 과정에서 자신의 정책 반대하는 외척 세력과 공신, 호족 세력들을 과감히 숙청했다.
이에 고려 초기의 공신과 호족 세력은 크게 약화하고 왕권이 강화되었다. 광종은 과거제를 정비하고 과거 출신자들을 우대하여 유학에 조예에 깊은 인재들의 적극적인 정치 참여를 유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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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4대 광종(光宗)의 무덤인 헌릉(憲陵)의 정면 모습. 석축은 북한이 정비하면서 새로 쌓은 것이다. (사진=평화경제연구소 제공)
엄격함과 관대함은 나라를 다스리는 제왕에게 필요한 덕목이다. 이를 겸비한 제왕은 흔치 않다. 광종은 그것을 겸비한 군주였다. 광종이 호족 숙청과 과거제 실시로 정치판과 관료 시스템을 물갈이한 건 채찍과 같은 엄격한 통치의 일면을 보여준다.
반면에 외국인 관료를 우대한 건 광종의 관대한 통치의 일면을 보여준다. 광종은 호족 세력에 의지한 정종의 정치에 분명한 한계가 있음을 통감(痛感)했다. 광종은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쌍기 등 중국계 귀화인 관료를 등용 시켜 정치판을 물갈이하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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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흥산성 남문 앞을 지나는 영통사와 박연폭포를 잇는 관광도로. 북한이 2014년 새로 확장한 도로로, 앞으로 개성관광이 재개되면 이용될 것으로 보인다. 대흥산성은 천마산 능선에 쌓은 10.1km의 산성으로, 박연폭포는 대흥산성 북문 근처에 있다. (사진=평화경제연구소 제공)
고려 성종 때 유학자인 최승로(崔承老)도 광종의 초기 정치에 대해서는 높이 평가했다.
“광종(光宗)은 예로써 아랫사람을 대접하고 사람을 알아보는 데 밝았으며, 친하고 귀한 사람에게 치우치지 않고 항상 호강(豪强)한 자를 누르고 소천(疏賤)한 사람을 버리지 않았으며, 환과(鰥寡) 고독(孤獨)에 은혜를 베풀었습니다. 왕위에 오른 해로부터 8년 만에 정치와 교화가 맑고 공평하며 형벌과 은상(恩賞)이 남발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당시 지배층 여론은 광종의 외국인 관료 우대 정책이나 호족 세력을 약화하는 노비안검법(奴婢按檢法) 시행에는 초기부터 우호적이지 않았다. 최승로(崔承老)는 당시의 분위기를 다음과 같이 전했다.
“왕조 건국 당시 공신들은 원래 소유한 노비에다 전쟁에서 얻은 포로 노비와 거래를 통해 얻은 매매 노비를 갖고 있었다. 태조는 포로 노비를 해방하려 했으나 공신들이 동요할까 염려하여 그들의 편의에 맡긴 지 약 60년이 되었다. 광종이 처음으로 공신들의 노비를 조사하여 불법으로 소유한 노비를 가려내자, 공신들은 모두 불만으로 가득 찼다. 대목왕후(大穆王后·광종비)가 광종에게 그만둘 것을 간절히 말해도 듣지 않았다.”(『고려사』 권93 최승로 열전)
노비는 호족들에 토지와 함께 당시 중요한 재산의 일부였다. 그런데 광종은 호족들이 불법으로 취득한 노비는 해방하거나 원래 주인에게 되돌려주겠다고 나선 것이다. 호족의 군사·경제 기반을 약화하려는 조치였다.
광종이 겨냥한 숙청의 주된 표적은 당시 최대 군벌인 서경의 호족 세력이었다. 광종이 960년(광종11) 개경을 황도(皇都), 서경을 서도(西都)라고 이름을 고쳐 정종의 서경 우대정책을 버리고 개경 중심의 정치를 천명한 것도 그 때문이다.
광종의 왕권 강화 정책이 지속하면서 수많은 호족이 목숨을 잃었다. 최승로는 광종이 “만년에 이르러서는 무고한 사람을 많이 죽였습니다”라며 “어찌하여 처음에는 잘하여 좋은 명예를 얻었는데도 뒤에 잘못하여 이 지경에 이르렀는지 매우 원통한 일입니다”라고 안타까움을 표시하기도 했다.
북한은 2014년 헌릉 앞으로 보이는 오관산 영통사와 박연폭포 사이를 잇는 관광 도로를 확장해 개통했다. 이제는 개성관광이 재개되더라도 헌릉 앞길을 지나 박연폭포로 가지 않고, 영통사를 관광하고 바로 산길로 박연폭포로 도달할 수 있게 됐다. 헌릉이 더 쇠락 되지 않을까 우려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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