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센인 수용이 일제의 만행이라면, 해방 후 그들을 학살한 것은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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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귀분 ‘재일조선인과 한센병’
일본 도쿄 외곽의 국립한센병자료관. <재일조선인과 한센병>의 저자 김귀분은 이곳에서 학예원으로 근무 중이다.
오늘은 재일교포 한센병 환자(이 글에서는 앞으로 ‘한센인’이라고 표기한다)의 역사와 현황을 다룬 김귀분(金貴粉) 선생의 <재일조선인과 한센병(在日朝鮮人とハンセン病)>(크레인, 2019)을 소개한다. 홋카이도 하코다테에서 태어난 김귀분 선생은 현재 일본 국립한센병자료관에서 학예원으로 근무 중이다. 국립한센병자료관은 한국의 전남 고흥군 소록도에 자리한 국립소록도병원의 한센병박물관에 해당하는 국립기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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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귀분은 패전 후 일본에서, 재일동포 한센인이라는 민감한 문제를 다뤘다
순천교도소 소록도지소에는 ‘일제의 인권유린 현장’이라는 안내문
이 책은 패전 후 일본에서 오랫동안 차별받아온 재일교포, 그중에서도 사회 일반에서 차별받는 존재인 한센인이라는 더욱 예민한 존재를 다루고 있다. 특히 더욱 차별받은 것이 여성 재일교포 한센인이겠으나, 이 책에서는 이 문제까지 파고들어가지는 않고 있다. 이 책에 따르면 한센병은 여성보다 남성에게서 더욱 빈번하게 발생한다고 하므로, 여성 재일교포 한센인의 문제를 일반화하기에는 그 사례가 적었기 때문인 것으로 추측된다.
한센병은 인간 사회에서 가장 오래전부터 알려졌으며, 최근에 이르기까지 불치병으로 간주돼 환자들이 사회적으로 배척받은 역사를 지니고 있다. 1873년 노르웨이의 한센(Hansen·1841~1912)이 그 원인을 밝힌 이후 현재는 치료 가능한 질환이 되었으며 발병자도 감소 상태다. 한반도에도 당연히 오래전부터 한센인은 존재했으나, 양성 한센인들을 수용할 시설을 오지(奧地)에 설치해 이들을 강제적으로 수용하기 시작한 것은 일본에 의한 식민지 통치 시기였다. 일본은 일본 본토, 조선, 타이완 등에 여러 곳의 한센인 수용소를 설치해 이들을 강제수용했다. 이들 시설 가운데 식민지 조선에 있던 것이 1919년 2월24일 설립된 소록도의 자혜의원(慈惠醫院)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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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천교도소 구 소록도지소(등록문화재 제469호)..
현대 한국에서는 소록도의 한센인 수용시설을 이야기할 때, 흔히 제국 일본의 강압적 통치를 상징하는 존재로서 이 시설을 거론하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1935년 건립돼 현재 등록문화재 제469호로 지정되어 있는 ‘순천교도소 구 소록도지소’에 대해 문화재청의 국가문화유산포털에서는 “일제강점기 한센병 환자들의 인권유린 현장을 간직하고 있는 교도소 건축으로 건립 당시 원형이 잘 간직되어 역사적, 건축사적 가치가 높다”고 설명하고 있다. 이 시설은 한센인 가운데 범죄를 저지른 사람들을 일반인과 동일하게 교도소에 수용할 수 없다고 하여 한센인 수용시설 안에 설치한 것이다. 제국 일본 시절 각지의 한센인 수용시설에는 ‘의료형무소(醫療刑務所)’ 또는 ‘중감방(重監房)’이라 불리는 이러한 자체 수용시설이 다수 설치됐다. 그 가운데 식민지 조선에 설치된 것이 ‘순천교도소 구 소록도지소’다.
그러나 이 시설은 1998년까지 운영됐고…해방 직후엔 84명 학살사건 벌어져
1957년 한센인들이 이주하려던 섬에서 주민들에게 살해당하는 사건도 발생
‘순천교도소 구 소록도지소’에 대한 문화재청 설명만 읽으면, 이 시설은 일본인이 조선인을 괴롭히기 위해 식민지 시기에만 운영한 곳으로 착각하기 쉽다. 그러나 해방 후에도 이 시설은 50년 이상 운영되다 1998년에야 운영이 중단됐다(MBC 1998년 8월15일자 ‘소록도 나환자용 별도 교도소 63년 만에 폐쇄’). 과연 소록도의 한센병 환자들은 식민지 시기에만 일본인 간부들에게 핍박받고, 해방 후에는 아무런 박해 없이 행복한 삶을 살았을까?
식민지 시기 소록도에서 일본인 간부가 조선인 환자들을 학대한 사건도 물론 있었지만, 오늘날까지 기억되고 있는 소록도 최악의 살인사건은 광복 후 일주일 뒤인 1945년 8월22일 발생한 ‘84인 학살사건’이다. 해방 후 좌익과 우익이 대립하던 상황에서 발생한 이 학살사건에서 살아남은 어떤 한센인은 “환자들이 한 줄로 줄을 서 총을 맞고 구덩이에 떨어졌다… 어떤 사람은 총 세 발을 맞고도 중심을 잃지 않아 사람들이 발로 구덩이에 처넣었다”고 증언했다(한겨레21 2005년 8월31일자 ‘구덩이흙 사이로 머리와 다리가…’). 이 사건은 최근에야 진상이 확인되었고 2002년에야 추모비가 세워졌다. 시 ‘보리피리’로 유명한 한센병력자 시인 한하운 선생은 <한국 나환자 학살사>에서 이 소록도 학살사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서술하며 현대 한국을 비판한다.
소록도를 이야기하면서 일본의 식민지 통치만을 비판해온 현대 한국 시민은, 한하운 선생의 이 글을 읽으면서 당혹감과 부끄러움을 느껴야 한다. 위의 글에서 한하운 선생이 소록도 학살사건과 함께 언급하고 있는 ‘사천 비토리 사건’은 사천의 남쪽 끝에 영복원이라는 마을을 만들어 정착하던 한센병력자들이 바다 건너 비토섬에서 농지를 구입하여 개간하려다가 1957년 8월28일 섬 주민들의 공격을 받아 27명이 학살된 사건이다. 이 사건을 증언한 박성연 할머니는 “그때 죽은 남편이 평생 한으로 남았다… 가해자 쪽에서 어떤 처벌을 받았는지 지금껏 듣지 못했다”(한겨레21 2006년 2월15일자 ‘한센인 학살, 경찰이 방관했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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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7년 한센병 환자들이 모여 살던 경남 사천 영복원 마을.
1957년이면 6·25전쟁이 끝난 4년 뒤다. 전쟁 중이었다면 혼란 통에 그랬다고 변명할 여지라도 있겠지만, 이 사천 비토리 사건에 대해서는 국가와 한국의 일반 시민들이 희생자와 유족분들께 변명할 여지가 없다. 그 후로도 한국 사회는 한센병력자들에 대한 편견을 버리지 못하고, 동네에서 아이들이 사라질 때마다 주변의 한센병력자 정착촌을 의심하고 괴롭혔다. 1991년 3월26일 발생한 개구리소년 사건 때에도 인근 칠곡의 정착촌이 근거 없는 혐의를 받고 일반 한국 시민들에 의해 괴롭힘을 당한 바 있다(한겨레21 2005년 7월7일자 ‘칠곡농원의 한은 풀리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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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사들이 세워 한센병 환자를 돌보던 전남 여수의 애양원 교회..
현대 한국의 일반 시민들이 소록도를 언급하는 것은 일본 식민지 통치를 비판할 때가 거의 전부이며, 한국 시민 자신들이 한국인 한센인들을 박해한 사실은 망각하고 있다. 이렇게 식민지 시기만 부각하고 현대 한국에서 일어난 일을 말하는 것을 터부시하는 경향은, 경기도 안산 선감도의 ‘부랑아’ 수용시설인 선감학원과 서울 서대문구의 서대문형무소에 대해 한국 사회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설명들에서도 확인된다. 이에 대해서는 나의 다른 책 <서울선언>에서 자세히 살핀 바 있다. 나는 한국 시민들이 자신들의 국가에서 일어난 인권침해를 자아비판해야 일본의 식민지 조선 통치에 대해서도 떳떳하게 비판하고 세계에 알릴 수 있다고 믿기에 굳이 이런 문제를 연구하고 세상에 알리고 있는 것이다. 한센병력자분들께서 이 글을 오해 없이 읽어주시기를 진심으로 바라고 있다.
김귀분 선생의 <재일조선인과 한센병>을 읽을 때에도, 이 문제를 “일본인이 한국인을 괴롭힌다”라고만 접근해서는 사태의 절반만 인식하는 것이다. 이 책에서는 20세기 일본열도에서 재일교포 한센인이 겪은 차별의 실상이 깊게 다루어지고 있지만, 그와 동시에 한반도에 생겨난 두 개의 국가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이들 재일교포 한센인에게 가한 차별도 언급되고 있다. 북한 측은 1950년대 재일교포 북송사업을 시작할 당시에는 재일교포 한센병력자들도 포용한다는 입장을 내세웠지만, 그 후 차츰 이들의 귀환을 거부하는 방향으로 정책을 전환했다. 한센병력자는 음성이므로 전염성이 없어 사회 복귀가 가능하지만, 북한 당국은 한센병력자를 양성 환자와 동일시하는 태도를 취했다고 한다. 북한 사회에서 소수자들에 대한 차별이 심하다는 사실은 여러 루트로 알려지고 있으며, 한센인에 대해서도 예외가 아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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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구마모토현 기쿠치 게이후엔의 기쿠치 의료형무소터. 이승연 제공.
한편 재일교포 한센인의 절대다수는 현재의 대한민국 영토 내에서 일본으로 건너갔다고 하며, 이들은 일본 내에서의 법적 권리 향상 투쟁이 끝나갈 즈음부터 여러 경로로 한국에 영구 귀국 또는 일시 방문을 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들이 단체로 일시 한국 방문을 하려 할 때마다 한국 내 여러 숙박시설에서 이들의 숙박을 거부하는 사태가 빈번히 일어났다. 가족과 친지가 살아 있어 고향을 찾아간 재일교포 한센병력자들도, 자신들이 묵었다는 이유로 한국의 가족과 친지가 주변 마을사람들에게 차별받을 것을 걱정해 인근 숙박업소에 묵고는 했다.
한센인은 ‘일본인’이 차별한 것이 아니라 ‘일반인’이 차별한 것
그런 자아비판이 있어야, 일본·북한·중국을 비판하는 데 힘이 실릴 것이다
일본 안에서도 ‘일반인’이 ‘한센병력자’를 차별하는 사회 분위기가 사라지지 않아, 요양소에서 병을 완치하고 사회로 나갔던 옛 환자들이 차별을 견디다 못해 다시 시설로 돌아오는 사례가 늘고 있다고 한다(도쿄신문 2019년 11월24일자 ‘한센병에 대한 지원이 부족 - 옛 환자 129명이 요양소 재입소’). 이러한 사례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일본인’이 ‘한국 한센병력자’를 차별하는 게 아니라 ‘일반인’이 ‘한센병력자’를 차별한다는 구조적 문제다. 이 세상의 모든 문제를 ‘민족’으로만 바라보아서는 나 자신, 나의 주변 ‘일반인’이 사회 속 소수자를 차별하는 문제를 놓치게 된다. 현대 한국에서 ‘일반인’ 시민들이 소수자들을 차별하고 죽여온 역사를 자아비판할 수 있어야, 한국 시민들이 일본·북한·중국 측을 비판하는 목소리가 국제적으로 힘을 얻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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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 애양원 역사관..
평생 일본의 한센인 시설에서 재일교포 한센인들을 사진 촬영한 조근재(趙根在) 선생은, 두 눈의 시력을 잃고 양손에도 심각한 후유증을 지니고 있던 김성대(金成大) 선생을 1960년에 만나면서 이 작업을 소명으로 삼게 되었다고 한다. 김성대 선생은 “사회에 계신 분들께 이것만은 꼭 전해주십시오”라면서 두 편의 시를 읊었다. 그 시를 소개하면서 이번 회를 마친다.
“일본으로 건너왔으나 바라던 학업은 이루지 못하고, 먹고사는 데 쫓겨서 터널을 판다”
“조선으로 돌아갈 희망은 점점 사라지고, 그저 괴롭게도 세월만 흘러가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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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돌림… 이혼… 한센인 ‘차별 대물림’ 끊으려 자녀와 연 끊었다
평균 78세… 정착촌 64% 자녀와 단절 자녀들 교육 못 받고 직장서도 기피해
부모 숨기고 결혼했다가 이혼당하기도 “한센인·가족 위한 국가의 제도 개선을”
소록도에서 수십년을 살아온 한센인들이 기자들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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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록도에서 수십년을 살아온 한센인들이 기자들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A씨는 딸 생각만 하면 지금도 가슴이 미어진다. 과외선생 하나 붙여 주지 못했지만 딸은 의대에 진학했고, 병원에서 만난 동료와 연애 결혼했다. 그러나 A씨는 결혼식에 갈 수 없었다. 사돈 집과도 거리를 뒀다. 이유는 따로 있었다. A씨는 한센병 환자다. 평생 손가락질 받으며 살았지만 어려운 환경에서도 잘 자라 준 딸의 인생까지 망칠 수는 없었다. 비밀은 오래가지 못했다. 부모가 나병환자라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결국 딸은 이혼했다.
한센인들에게 찍힌 사회적 낙인은 자녀들에게 대물림되고 있다. 부모가 나병을 앓는다는 이유만으로 학교 진학은 물론 직장, 결혼 생활에서도 어려움을 겪었다. 고통의 대물림을 막는 방법은 부모 자식 간의 연을 끊는 것밖에 없었다.
한센인의 현실은 서울신문이 11일 입수한 국가인권위원회의 ‘고령화 측면에서 본 한센인 인권상황 실태조사 결과보고서’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인권위 의뢰를 받은 서울대 사회발전연구소가 정착촌과 생활시설 등에 거주하는 한센인 500명을 대상으로 조사했다. 2007년 ‘한센인특별법’ 시행 이후 처음으로 한센인들의 삶을 들여다보기 위해 진행됐다.
한센인의 평균 연령은 78.1세로 이 중 절반 이상(54.2%)이 독거노인으로 산다. 10명 중 8명 이상(83.4%)은 자녀가 있었지만 47.5%는 자녀와 따로 살고 연락도 하지 않았다. 따로 사는 일반 노인 비율(7.9%)과 비교하면 현저히 높은 수치다. 특히 정착촌에 사는 한센인 10명 중 6명(64.3%)은 자녀가 있음에도 연락하거나 만나지 않는다고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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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한센인은 자녀에게 부정적 영향을 끼치지 않으려 관계를 단절했다. 자신들에게 씌워진 차별의 굴레가 대물림되는 경험을 이미 수차례 겪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한센병이 유전되지 않는다고 판명된 1990년대 중반 이전까지 국가 주 도하에 자녀들과 격리되거나 강제 낙태 수술 등을 받아야 했다.
한센인 2세들은 ‘아직 감염되지 않았다’는 뜻의 ‘미감아’로 불리며 성장했다. 교육의 기회도 제한적이었다. 일부 학부모들의 거센 반대로 한센인 자녀들은 일반 학생들과 분리돼 교육을 받았다. 한센인 자녀 B씨는 “대학은커녕 고등학교 문턱도 못 간 경우가 태반이라 생계에 어려움을 겪는 한센인 자녀들이 많다”고 털어놓았다.
성장 뒤에도 차별은 이어졌다. 또 다른 자녀 C씨는 “아버지 장례식장에 직장 동료들이 문상을 오면서 내가 한센인 2세라는 게 알려졌다”면서 “이후 동료들이 같이 밥 먹는 것도 피했다”고 털어놨다. 한센인 D씨는 “자녀들이 교육을 제대로 못 받아 일용직에 종사하는 경우가 많다”면서 “결혼도 부모가 한센인이라는 걸 숨기고 해야만 하기 때문에 결혼 생활이 마치 ‘시한폭탄’ 같다”고 말했다.
일부 한센인들은 경제적 이유로도 자식들과의 관계를 끊었다. 자신을 부양할 자녀가 있을 경우 기초생활수급권자에서 탈락할 것을 우려하기 때문이다. 조사 결과 한센인들의 한 달 수입 평균은 63.1만원에 불과했는데, 대부분 월 15만원의 한센인위로지원금과 기초생활수급비로 생활비를 충당했다. 한센인 E씨는 “(자녀와 왕래하면) 서로에게 피해만 간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해당 연구를 진행한 정근식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는 “고령 한센인들이 사망하면 정착촌과 한센인에게 자행된 국가폭력은 잊혀질 것”이라면서 “과거를 기억하고 피해자를 책임지기 위한 정부 지원책이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인권위 관계자는 “실태조사 결과를 토대로 내년쯤 한센인과 그 가족에 대한 제도개선 권고 등의 의견을 낼 것”이라고 덧붙였다.
진선민 기자 jsm@seoul.co.kr
이근아 기자 leegeunah@seoul.co.kr입력 : 2019-12-11 23:48 ㅣ 수정 : 2019-12-12 0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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