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양전함

거함거포 시대의 또 다른 주인공 순양전함

이미지-1

최초의 순양전함 인빈시블. 역사를 바꾼 드레드노트 전함보다 4노트 정도 빠른 25노트의 쾌속 항해가 가능했다.

1906년, 해군의 역사를 새롭게 쓴 전함 드레드노트(HMS Dreadnought)가 실전 배치되었다. 전함의 역사를 드레드노트의 등장 이전과 이후로 나눌 만큼, 새로운 시대를 선도한 영국 해군의 자부심은 대단했고 지금껏 그래 왔던 것처럼 앞으로도 세계의 바다를 지배할 것으로 자신했다. 적어도 등장 당시의 기준으로 볼 때, 드레드노트는 자타가 공인하는 최고의 군함이었다.

드레드노트급 전함과 순양전함의 탄생에 커다란 영향을 끼친 영국 해군 제1해군경 존 피셔. 한마디로 거함거포 시대를 이끈 인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1949년 소련이 핵무기 개발에 성공하면서 미국의 독주가 불과 4년 만에 막을 내린 것처럼, 영국의 자만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곧바로 대부분의 당대 열강들이 같은 수준의 전함 확보에 나선 것이다. 특히 1898년부터 이른바 건함 경쟁(Anglo-German naval arms race)을 불사하며 영국 해군의 아성에 도전해 온 독일의 움직임은 가히 위협적인 수준이었다.

두 나라의 치열한 군함 확보 경쟁은 재정에 엄청난 부담을 안겨 줄 정도였다. 드레드노트의 탄생을 이끈 제1해군경(해군 참모총장) 피셔(John Fisher)는 영국이 전력의 우위를 계속 유지하도록 하면서 경제에도 도움이 될 수 있는 대안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전력 분석에 나선 그는 전함의 느린 속도에 주목했다. 전노급(Pre-dreadnought)보다는 속도가 향상되었지만 드레드노트급은 여전히 순양함, 구축함 등에 비해 느렸다.

느린 만큼 유사시 대응 능력이 떨어져 전 세계 바다에서 작전을 펼쳐야 하는 영국 해군의 현실에서는 많이 만들어 곳곳에 분산 배치할 필요가 있었다. 당연히 전함을 호위하는 전력도 분산되어야 하므로 경제적인 부담이 클 수밖에 없었다. 피셔는 화력은 전함 수준이지만 신속한 이동이 가능해 운용상의 제약을 덜 받는 전투함의 도입을 고려했다. 그렇게 해서 탄생한 해군 무기사의 또 다른 거함이 바로 순양전함(Battlecruiser)이다.

이미지-2

제1차 대전 당시 상당히 인상적인 활약을 펼친 영국의 순양전함 타이거. 하지만 부족한 방어력 때문에 많이 애를 먹었다.

전함만으로 싸우기는 어렵다.

20세기 중반 항공모함에 의한 새로운 해전의 방식이 열리기 전까지 이론적으로 전함을 상대할 수 있었던 것은 전함뿐이었다. 만일 순양함 이하 체급의 전투함이 전함과 교전할 일이 벌어진다면 제일 먼저, 그리고 당연히 선택해야 할 방법은 도주였다. 이것은 결코 굴욕적이거나 비겁한 행위가 아니었다. 가까이 근접해 어뢰를 발사할 수도 있겠지만 기습이 아닌 교전 중에 전함의 주포 사정권 안으로 진입하는 것 자체가 만용이었다.

이처럼 전함은 해군력의 지표가 되었지만 건조와 운용에 워낙 많은 비용이 들기에 무조건 원한다고 보유할 수는 없었다. 또 “닭 잡는 데 소 잡는 칼 쓰랴”는 말처럼 해군이 벌이는 모든 작전에 전함을 동원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피셔는 정찰 임무, 함대 간 교전에서의 지원, 퇴각하는 적의 추적, 원양에서의 단독 작전이나 무력시위 등에 투입할 수 있는 별도의 다목적 군함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사실 이러한 임무의 상당 부분은 이미 순양함이 담당하고 있었다. 제국주의의 식민지 쟁탈 경쟁에서 가장 앞섰던 영국은 함대와 따로 떨어져 단독 혹은 소규모 전대로 대양을 장기간 항행하며 작전을 펼치는 순양함 분야에서도 선도국이었다. 하지만 최신이라 할 수 있는 장갑순양함도 20세기 들어와 부족한 부분이 많이 노출되고 있었다. 특히 1905년 러일전쟁 당시 벌어진 쓰시마 해전은 거포의 효용성이 극명하게 드러난 사례였다.

이미지-3

영국의 마지막 장갑순양함인 미노타우르. 1908년 취역했지만 20세기 이후 해군의 새로운 트렌드가 된 거함거포 사상에 맞지 않는 구시대의 전투함이었다.

속도를 높여 얻고자 한 것.

이에 따라 피셔는 새로운 전투함이 원칙적으로는 전함과의 교전을 삼가되, 경우에 따라서는 포격전도 마다하지 않을 만큼 강력한 화력을 보유해야 된다고 판단했다. 적어도 공격력만큼은 실존하는 모든 전투함들을 무력화시킬 수 있는 수준이어야 했다. 이런 구상에 따른 신예 전투함은 화력만 놓고 본다면 전함이지만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투입될 임무가 상이하기에 전함은 아니었다.

반면 기존의 순양함이 담당하던 임무도 수행해야 하니 속도가 빨라야 했다. 군함의 속도를 향상시키려면 엔진, 선체의 개량도 필요하지만 일단 가볍게 만들어야 하는데, 이는 무게와 관련된 문제다. 하지만 전함과 비슷한 화력을 보유하려면 어느 정도 선체의 크기를 유지해야 하므로 장갑을 줄여야 했다. 결국 이는 엄청난 장갑을 방패 삼아 포격전을 벌이는 전함과 정면으로 대결할 수 없는 결정적인 이유가 되었다.

속도를 위해 장갑을 희생하는 부분과 관련하여 영국 해군 내에서도 반대가 많았지만, 피셔는 ‘속도는 최선의 방어책’이라며 자신의 의지를 관철시켰다. 그는 최악의 경우 전함과 교전이 벌어진다면 우월한 속도로 적의 공격을 피하면서 강력한 화력으로 반격을 가하면 될 것이라 주장했다. 한마디로 새로운 전투함은 화력이 강화된 순양함이지만 기존에 존재하던 순양함의 범주를 뛰어넘는 또 다른 거함이었다.

이미지-4

독일의 순양전함 자이들리츠. 유틀란트 해전 당시 엄청난 타격을 받았지만 영국의 순양전함보다 뛰어난 방어력을 발판으로 끝까지 생존할 수 있었다.

새롭게 정의된 군함.

이런 구상에 따라 1908년부터 인빈시블(Invincible)급으로 명명된 3척의 새로운 전투함이 취역했다. 전함과 동일한 12인치 구경의 주포 8문을 탑재했고 당시로는 쾌속이라 할 수 있는 최대 25노트를 낼 수 있었지만 방어력은 같은 시기에 취역한 마지막 장갑순양함 미노타우르(HMS Minotaur)에도 미치지 못했다. 1912년 영국은 인빈시블급을 전함과 순양함의 특징을 모두 갖고 있다는 의미에서 ‘순양전함’이라는 별도의 체급으로 구분했다.

순양전함을 전함과 순양함의 중간에 위치한 군함으로 보는 이들이 많지만 앞서 설명한 것처럼 전혀 별개의 군함이다. 먼저 배수량 17,300여 톤은 전함과 맞먹는 수준이었고 제작비도 당시 화폐 가격 170만 파운드로 차이가 없었다. 굳이 전함과 순양함을 빗대어 설명하자면 속도가 빨라지고 방어력이 감소된 전함, 혹은 화력이 대폭 강화된 장갑순양함 정도의 개념이라 할 수 있었다.

인빈시블급을 운용해 본 결과 나름대로 쓸 만하다고 판단한 영국은 이후 인디패티거블(Indefatigable)급, 라이온(Lion)급 등으로 이어지는 후속함 건조에 박차를 가했다. 이처럼 급속히 주력함의 위치를 차지하게 되면서 순양전함은 전함과 더불어 거함거포 시대의 당당한 한 축이 되었다. 특히 빠른 속도와 넓은 활동 반경으로 인해 평시에 오히려 전함보다 활용 범위가 넓었다.

이미지-5.

 

영국의 초기 순양전함인 인디패티거블. 화력이 좋고 고속 항해도 가능했지만 빈약한 방어력으로 말미암아 유틀란트 해전에서 격침되었다.

독일의 도전.

영국의 이러한 행보는 당연히 여타 열강들에게도 자극이 되었다. 엄밀히 말해 해군 역사에서 영국이 시작한 것은 하나의 지침이자 표준이어서 우호국이든 경쟁국이든 이를 따르는 것이 당연한 수순이었다. 특히 영국과 치열한 건함 경쟁을 벌이며 바다의 패권을 다투던 독일은 조급해진 나머지 곧바로 순양전함 확보에 나섰다. 독일어 Schlachtkreuzer가 전함과 순양함의 합성어일 정도로 철저하게 벤치마킹을 했다.

덕분에 독일은 영국에 불과 1년 늦은 1909년 폰데어탄(SMS Von Der Tann)을 시작으로 순양전함들을 실전 배치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독일이 건조에 나섰을 때 영국의 순양전함 자체가 일급 기밀이어서 단지 거포를 갖추고 고속으로 항진한다는 점 외에는 알려진 것이 없었다. 결국 자신들이 설정한 별도의 개념에 따라 제작이 이루어지면서 독일과 영국의 순양전함은 명칭상 같은 함종으로 구분되지만 실질적으로는 상이했다.

가장 큰 차이는 방어력이었다. 독일의 순양전함은 전함 정도는 아니지만 상당한 수준의 장갑을 둘러 방어력이 좋았다. 그래서 영국과 달리 독일의 순양전함은 속도를 향상시킨 조금 작은 규모의 전함에 가까웠다. 독일은 아무래도 후발주자이고 영국과의 양적 격차를 인정할 수밖에 없다 보니 질적으로나마 우위를 달성하기 위해 개별함의 생존 능력을 키우려 한 종전의 방식대로 제작한 것이었다.

이미지-6

독일 최초의 순양전함 폰데어탄. 명칭상 같은 함종으로 구분되지만 실제로 독일의 순양전함은 영국의 순양전함과 많은 차이가 있었다. <출처: (cc) Bundesarchiv at Wikimedia.org>

실전에서의 결과

이러한 양국의 차이는 제1차 대전을 통해 여실히 드러났다. 영국의 순양전함들은 피셔의 생각대로 장갑순양함이나 전노급 전함과의 교전에서 압도적인 우위를 보였지만 1916년 벌어진 유틀란트 해전에서는 많은 문제점을 노출했다. 유틀란트 해전은 양국이 치열한 경쟁을 펼치며 구축한 함대가 정면충돌한 기념비적 전투로, 비단 순양전함뿐 아니라 드레드노트 이후 탄생한 전함들의 실질적인 데뷔 무대였다.

양측 합쳐 250여 척의 군함이 투입되었을 만큼 규모가 어마어마했지만, 정작 싸움을 벌인 것은 대부분 가장 앞에서 초계 임무를 수행한 양측의 순양전함 전대들이었다. 여기서 영국의 순양전함들은 방어력에 심각한 약점을 보이며 3척이 격침되는 엄청난 피해를 입은 반면 독일의 순양전함들은 복구가 어려워 자침시킨 루초우(SMS Lützow)를 제외하고는 어지간한 공격에도 살아남았다.

피셔는 빠른 속도를 이용하면 상대의 공격을 충분히 무력화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지만 실상은 배의 속도가 아무리 빨라도 초음속으로 날아오는 포탄을 피할 수는 없었다. 결국 빈약한 방어력이 전술적으로 독일에 우세를 내준 가장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더불어 이 해전을 통해 해군력의 중추인 드레드노트 전함들도 문제점을 노출했다. 속도가 느려 전투 공역에 뒤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별다른 역할을 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미지-7.

유틀란트 해전에서 탄약고를 가격당해 순식간에 굉침한 영국의 순양전함 퀸메리. 이러한 결과는 영국 해군을 심각한 고민에 빠뜨렸다.

짧았던 전성기

이미지-8

제2차 대전 발발 당시의 기준으로 사상 최대의 군함이었던 순양전함 후드. 공교롭게도 개량이 예정되었던 장갑 취약 부위를 강타당하면서 1941년 비극적인 최후를 맞았다.

거함거포 시대를 개막한 전함과 순양전함들의 역할은 탄생한 지 불과 10년 만에 다시 정립되어야 했다. 가장 인상적인 활약을 펼친 독일의 순양전함은 종전 후 해군이 해체되다시피 하면서 발전이 단절되었고, 영국을 비롯한 여타 국가의 순양전함들은 워싱턴 해군 조약이나 런던 해군 조약에 따라 군축을 실시하면서 전함과 더불어 먼저 감축해야 할 대상이 되어 버렸다.

앞서 든 문제점 때문에 추후 해군의 주력함은 순양전함만큼 빠르면서도 전함만큼 방어력도 강력해야 했다. 결국 제1차 대전 종전 후에 성능이 강화된 순양전함들이 제작되었지만 반대로 전함의 속도도 빨라지면서 양자의 구분은 거의 사라지게 된다. 이후 탄생한 새로운 주력함이 바로 거함거포 시대의 마지막을 장식한 고속전함이다. 그렇게 새로운 변화를 이끄는 징검다리가 되면서 순양전함의 전성기는 불과 10여 년 만에 막을 내렸다.

특히 제2차 대전 초기에 단 한방의 직격탄에 굉침당한 후드(HMS Hood)의 비극적인 최후는 한 시대의 종언을 고하는 상징과도 같았다. 한창 건조 중에 유틀란트 해전의 결과가 알려지며 대대적으로 재설계되어 1939년까지 세계 최대의 군함이라는 타이틀을 가졌음에도 끝내 방어력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처럼 순양전함은 무기사에 상당히 인상적이면서도 많은 교훈을 남기고 사라져간 거함거포 시대의 또 다른 상징이었다.

이미지-9

현존하는 가장 강력한 전투함으로 불리는 러시아 해군의 표트르 벨리키. 크기와 배수량 때문에 순양전함으로 분류되기도 하지만 고전적 의미의 순양전함은 제2차 대전 종전과 함께 사라졌다. <출처: (cc) RIA Novosti archive, image #669522 / Grigory Sysoev at Wikimedia.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