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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원대 박물관장 도진순교수

아지빠 2016. 3. 16. 10:44






첫 출간 50주년 맞아 창원대 도진순교수가 펴내

한평생 민족만 생각하고, 민족을 위해 살다간 백범 김구. 그리고 백범의 파란만장한 삶을 담아 20세기 전기문학의 고전으로 꼽히는 그의 자서전 「백범일지」. 그러나 현재 시중에 20여종이나 나와있는 「백범일지」중 상당수가 오류와 탈락으로 원본이나 역사적 사실과 거리가 먼 불완전 본(본)이라면 어떨까?

창원대 사학과 도진순(도진순ㆍ40) 교수가 4년간 각고 끝에 「백범일지」의 원본과 관련 사료들을 뒤져 정본(정본)을 완성, 첫 「백범일지」 출간 50주년을 맞아 세상에 내보낸다(돌베개간).

「백범일지」는 백범이 1929년 중국 상해에서 쓰기 시작, 20년 가까이 그의 생애와 사상을 진솔한 육성으로 기록한 책. 서두의 「인,신 두 아들에게」라는 글에도 나와 있듯, 백범은 『나는 언제 죽을지 모르는 사선(사선)에 서 있는 몸. 너희들이 성장하여 아비의 일생 경력을 알 곳이 없기 때문에 쓰는 것』이라며 마치 아들들에게 유서를 쓰는 심정으로 이 일지를 쓰는 것임을 분명히 했다.

황해도 벽촌의 궁핍한 집안에서 태어나 과거에 낙방, 동학에 입문하는 어린 시절부터 질풍노도의 청년기, 식민지 백성이 겪는 시련, 망명, 풍찬노숙의 독립운동, 그 과정에서 지휘한 이봉창-윤봉길의거, 감격의 해방과 조국 귀환 등 이 책에서 파란만장하게 펼쳐지는 백범의 일생은 위대한 민족지도자의 면모와 함께 성실과 끈질긴 생명력으로 인생을 개척해가는 인간적 면모를 함께 보여주며 뭉클한 감동을 선사한다.

도교수가 「백범일지」 정본 작업에 착수한 것은 93년 서울대에서 박사학위 논문 「1945∼1948년 우익의 동향과 민족통일정부 수립운동」을 완성하고, 백범의 통일운동 근원인 그의 초기 삶을 추적하면서였다.

그는 시중에 나온 「백범일지」가 서로 내용이 달라 혼동이 될 뿐 아니라, 심지어는 「백범일지」 원본 자체에도 역사적 사실과 거리가 있는 서술이 있는 것을 발견, 정본을 만드는 일에 매달렸다.

『기존 「백범일지」에 누락이나 오류가 있는 것은 1947년 국사원에서 처음 나온 「백범일지」를 근간으로 삼았던 탓이 큽니다. 특히 광복 이후를 다룬 하권 부분이 심하지요. 그러나 국사원 간행 「백범일지」는 원본을 대폭 생략한 것이어서 진짜와는 거리가 멉니다. 』

 

도교수는 먼저 백범의 아들인 김신(김신)장군이 소장하고 있는 필사본을 원본으로 삼아 백범의 측근이었던 엄항섭(엄항섭)씨가 만든 등사본, 이동녕(이동녕)선생의 손자인 이석희(이석희)씨가 보관하는 필사본, 그리고 국사원본(1947년)-교문사본(1979년)-서문당본(1989년)등 중요한 출간본을 서로 비교, 교감했다.

특히 광복전후 부분은 기존 「백범일지」보다 두배 가량 늘었다. 유족들이 보관하고 있던 이 시기 백범의 구술내용을 보완했기 때문이다. 이 부분에는 그동안 밝혀지지 않았던 격동기 백범의 행적이 상당부분 들어있다.

 

도교수는 「백범일지」 정본을 서술하면서 몇가지 교감원칙을 세웠다고 말했다. 원문의 감동과 내용을 조금도 훼손하지 않으면서도 어렵고 난삽한 문장을 쉽게 풀어쓴다는 것, 그리고 원문에도 오류가 발견되면 각종 사료를 통해 보완한다는 것 등이다. 백범이 만리타향에서 변변한 자료 없이 기억에만 의존해 쓴 기록이기 때문에 인명이나 사건 날짜 등에 착오가 생길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이 과정을 거쳐 그는 「백범일지」의 본모습을 되살릴 수 있었다.

도교수는 『만약 책에도 족보가 있다면 이번 작업이 새로운 「백범일지」 가문(예컨대 새로운 축약본이나 「청소년을 위한 백범일지」 등)이 탄생하는 계기가 되길 감히 기원한다』는 말로 정본 발간의 감회를 대신했다. < 김태익기자 >

 

 

 

근현대사 연구자 도진순 교수, '역사비평'에 재해석 논문

이육사 청포도 (풋포도)

내 고장 칠월은

청포도가 익어 가는 시절.

이 마을 전설이 주저리주저리 열리고

먼 데 하늘이 꿈꾸며 알알이 들어와 박혀,

청포도

하늘 밑 푸른 바다가 가슴을 열고

흰 돛 단 배가 곱게 밀려서 오면,

내가 바라는 손님은 고달픈 몸으로

청포(靑袍)를 입고 찾아온다고 했으니,

내 그를 맞아 이 포도를 따 먹으면

두 손은 함뿍 적셔도 좋으련,

아이야, 우리 식탁엔 은쟁반에

하이얀 모시 수건을 마련해 두렴

 

"이육사의 詩 '靑포도'는 청포도 아닌 덜 익은 '풋포도'"

"청포도, 덜 무르익은 민족 의미"

"내 고장 칠월은/ 청포도가 익어가는 시절…" 항일시인 이육사(李陸史·1904~1944·사진)의 대표작 '청포도(靑葡萄)'에서 청포도가 연둣빛 포도가 아니라 '풋포도'라는 해석이 제기됐다.

한국근현대사 연구자인 도진순 창원대 교수는 계간지 '역사비평' 2016년 봄호(114호)에 실린 '육사의 '청포도' 재해석―'청포도'와 '청포(靑袍)', 그리고 윤세주'라는 논문에서 "이 시에서 청포도는 품종으로서의 '청'포도가 아니라 익기 전의 '풋'포도여야 제대로 독해된다"고 주장했다.

도 교수는 육사의 고향인 경상북도 안동군 도산면 원촌리에는 일제시대는 물론 지금도 청포도가 없으며, 그래서 육사가 시상(詩想)을 얻은 곳이 청포도가 재배되던 포항 동해면의 미쯔와포도원이었다는 주장이 나왔지만 당시 청포도는 와인 제조용이었을 뿐 시에 나오는 것처럼 손님 접대용으로는 사용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게 볼 수 없다고 했다. '강희자전'에 따르면 '청(靑)'이란 접두어는 '생물이 태어날 때의 색상'을 의미하며 우리말 '풋'에 해당하는데 이 시에서 '청포도'는 그런 뜻이라는 것이다. "내 그를 맞아 이 포도를 따 먹으면/ 두 손은 함뿍 적셔도 좋으련"이란 부분도 청포도는 물이 들지 않기 때문에 풋포도로 해석할 때 자연스럽다는 것이다.

도 교수는 시에서 '청포도'가 아직 무르익지 않은 우리 민족을 의미한다고 보았다. 육사는 지인에게 시 '청포도'에 대해 "내 고장은 조선이고 청포도는 우리 민족인데, 청포도가 익어가는 것처럼 우리 민족이 익어간다. 그리고 일본은 끝장난다"고 말했다.

도 교수는 또 "내가 바라는 손님은 고달픈 몸으로/ 청포(靑袍)를 입고 찾아온다고 했으니"에서 '청포'를 '벼슬아치가 공복(公服)으로 입던 푸른 도포'로 해석하여 시의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는다고 지적하는 것에 대해 "중국 한시에서 청포는 비천한 사람이 입는 옷이며 중국에 망명한 우리 혁명가들이 입었다"고 주장했다. 퇴계 이황의 14대 손(孫)인 육사는 한시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다는 것이다.

육사가 기다리던 '손님'으로 도 교수는 가장 가까운 동지였던 윤세주(尹世胄·1901~1942)를 지목했다. 밀양 출신인 그는 육사와 친분이 깊었고 1932년 9월 함께 의열단에 합류하여 군사훈련을 받았다. 육사는 1933년 7월 귀국 직전 아끼던 인장을 그에게 선물했고, 1941년 1월 발표한 산문 '연인기(戀印記)'에서 그를 애틋하게 그렸다. 윤세주는 김원봉과 함께 조선민족혁명당과 조선의용대를 만들어 항일운동을 계속했고, 1942년 태항산 전투에서 전사했다. 중국을 오가며 독립운동을 하던 육사는 1943년 서울에서 체포돼 베이징으로 송치됐고 1944년 1월 옥사했다.

도진순 교수는 "육사는 평생 독립·혁명운동과 문학을 넘나들었기 때문에 그가 지은 시를 제대로 해독하려면 그의 독립운동에 대한 이해가 필수"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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