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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필에게묻는다 회고록에서

아지빠 2016. 1. 10. 11:24

‘그냥 웃지요’ 하던 김종필이 입을 열었다

[김종필에게 묻는다 ⓵] 회고록을 빙자한 자기변호와 역사왜곡… 5·16이 혁명이라고?

 

 

 

 

지난 3월2일부터 중앙일보는 김종필 전 국무총리의 증언록 ‘소이부답(笑而不答)’을 연재하기 시작했습니다. 증언록은 중앙일보 기자들과 작가까지 동원돼 이미 100회를 넘겼고, 웹툰으로 재구성됐으며 책으로도 만들어질 중요한 역사적 자료입니다. 하지만 증언록 곳곳에는 역사왜곡과 미화의 흔적이 보입니다. 미디어오늘은 이를 검증하는 차원에서 증언록의 이면을 살펴보고 중앙일보가 하지 않은 김종필의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편집자주>

 

“우스갯소리를 좀 하겠다. 인간이 어떻게 하면 성공한 사람이라고 하느냐, 미운 사람 죽는 것을 확인하고 죽을 때까지 아프지 않고 편안하게 숨 거두는 사람이 승자야. 그런데 졸수(90세)가 되고 보니 미워할 사람이 없어.”

지난 2월23일 김종필 전 국무총리(JP·89)의 부인 故 박영옥 여사의 빈소에서 JP가 조문객들에게 한 말이다. 노회한 정치인이 덕담하듯 혹은 인생의 진리를 발견한 듯 내뱉은 말에 가까워 보였다. 그러나 ‘정치9단’ JP의 말을 교훈처럼 받아들일 수는 없다.

‘소이부답(笑而不答)’

정확히 일주일 뒤인 지난 3월2일 중앙일보 지면을 통해 ‘우스갯소리’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중앙일보는 김종필 증언록 ‘소이부답’을 연재하기 시작했다. JP의 청구동 자택 1층에 걸려있는 글씨이기도 하다. ‘미소 지을 뿐 대답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중국 당나라 시인 이백의 ‘산중문답’에 나오는 구절이다.

JP는 그동안 회고록 집필에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미소로 답변을 대신했을 뿐이다. 그러던 그가 왜 지금 입을 열었을까? “미운 사람이 죽는 것을 다 확인”해서 였을까. 실제로 박정희 전 대통령과 권력을 함께 누렸던 사람 중에 JP 증언에 대해 반박할 수 있거나 실제로 JP와 경쟁관계에 있던 이들이 세상을 떠났다.

바꿔 말하면 JP가 역사를 왜곡하더라도 바로 잡기 어려운 상황이다. JP는 증언록 곳곳에서 자신과 다른 주장을 했던 이들의 말을 반박하기도 한다. 증언록에서도 눈길을 끄는 부분이 있다. 지난 3월3일자 ‘소이부답’에서 JP는 목숨 걸고 ‘혁명(5·16쿠데타)공약’을 쓸 때 뇌리에 ‘역사는 기록되는 것이 아니라 기록해 나가는 것’이라는 말이 스쳤다고 했다.

‘현대사 연출가’라는 그의 별명답게 그는 역사를 자신이 만들어야 한다고 믿는 것처럼 보인다. 증언록만 읽으면 JP가 5·16을 주도했고, 5·16은 4·19와 같은 맥락의 혁명이며, 신군부의 쿠데타와는 성격이 다른 것으로 이해된다. “군부의 중심은 JP”라면서도 그는 1인자를 넘보지 않으며, 경제발전은 물론 베트남전 참전을 통해 안보를 지켰고, 북방외교를 위해 3당합당이 필요했다.

전직 대통령 관련 평가도 흥미롭다. 지난 22일 세상을 떠난 김영삼 전 대통령(YS)에 대해 1992년 대선 이전부터 “YS가 차기 대권을 맡는 게 좋겠다”고 예견했다고 밝혔고, DJP연합을 통해 정권교체에 성공했던 김대중 전 대통령에 대해 “공산주의자가 아니라 공산주의자를 이용했다”고 평가했다. 자신이 원했던 내각제가 물 건너가자 JP는 대인의 풍모로 권력을 양보한 것처럼 서술하기도 했다.

 

증언록은 JP 1인칭 화자가 말하는 형식인데 중앙일보 박보균, 한애란 등의 기자들과 전직 중앙일보 논설위원인 유광종 작가를 섭외해 JP의 증언을 재구성했다. JP가 한 말을 취재기자들이 녹취해 보완하고, 작가가 다듬은 것으로 보이는 증언록은 웹툰(JP무빙툰)으로 재구성됐으며 이 만화 중간에는 실제 자료사진까지 첨부해 사실성을 더했다.

한 사람의 발언이 중앙일보를 거쳐 신빙성을 얻는 과정에서 증언록에 대한 역사적 책임은 분산된다. 증언록의 왜곡은 JP만의 책임도, 중앙일보만의 책임도, 작가만의 책임도 아닌 게 돼 버렸다. 증언록은 책으로도 나올 예정이고, 지난 5월 중앙일보는 JP의 사진집 ‘운정 김종필’을 출판하기도 했다.

미디어오늘은 지난 3월10일 JP와 중앙일보의 ‘소이부답’ 연재에 대해 현대사를 왜곡할 소지가 있다고 지적하는 기사에서 몇 가지 질문을 던졌다. 5·16에 대한 그의 생각, 박정희와 박상희(JP의 장인, 박정희의 형)에 대한 평가, 황태성 사건과 한일회담에 대한 평가, 정치를 가리켜 ‘허업(虛業)’이라고 했는데 어떻게 그 많은 재산을 축적했는지 등이다.

이는 한국사회가 JP와 독재정권에 던지는 상식적인 물음이다. 미디어오늘은 JP와 중앙일보가 이런 질문에 얼마나 충실하게 답변을 했는지 살펴보고, 풀리지 않는 의문에 대해 다시 질문하려고 한다. 또한 JP 증언의 맥락과 의미도 살펴보고, 그가 말하지 않은 역사적 사실에 대해서도 재조명하려고 한다.

물론 100회가 넘게 연재되고 있는 증언록에는 의미 있는 발언도 있다. 북한 무역상(차관급) 출신 황태성이 공작금을 가지고 내려와 공화당 창당자금으로 쓰였고, KBS 현대화 자금으로 쓰였다는 소문이 일부 사실로 밝혀지기도 했고, JP가 과거 주장해오던 것을 이번 증언록에서 뒤집기도 했다. 황태성은 박정희의 셋째 형이자 JP의 장인인 박상희의 절친한 친구다.

지난 23일 중앙일보 증언록 <JP “YS는 자신만의 채색으로 역사를 칠해 간 정치인…3김 중 나 혼자 남아 그들과의 회고 남길 줄 몰랐다”>에서 JP는 “YS도 가고 이제 나 혼자 남았다”며 “조물주가 나를 이 세상에 남겨놓은 이유는 마무리를 하라는 뜻일 것”이라고 했다. 그는 승자다. 그의 증언은 역사가 될 것이다. 미화의 주된 대상은 당연히 JP 본인이다.

 

JP, 군부 중심이자 5·16 설계자?

쿠데타 세력이 정당성을 얻기 위해 가장 신경을 썼던 부분 중 하나는 박정희의 좌익전력을 은폐하는 일이었다. 5·16쿠데타 직후 미국은 박정희 좌익전력에 대해 의심했고, 북한은 좌익세력의 쿠데타를 환영했다. 5·16의 성공을 위해 박정희의 좌익전력을 덮는 일은 중요한 일이었고, 이후 박정희 정권의 안정을 위해 ‘반공’은 지속적으로 악용됐다.

증언록 시작을 알리는 3월2일자 중앙일보 1면 기사의 제목은 <5·16 반공 국시, 내가 넣었다>이다. JP가 고민 끝에 만든 ‘5·16 혁명공약’ 제1항 반공국시가 박정희를 위한 공약이었다는 뜻이다. JP는 박정희에 대해서도 미화하지만 본인에게 이익이 될 만한 수준까지만 했다. 증언록 9회에서 “JP가 5·16을 기획하고 설계했다”고 했다.

JP는 5·16과 관련한 기록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뒤집었다. 1963년 8월 쿠데타 세력이 발행한 책 ‘한국군사혁명사’에는 박정희와 육사 8기생이 1960년 11월9일 신당동 박정희 소장 집에 모여 “정군과 구국을 위한 혁명을 확인하고 거사를 위한 동지의 조직에 전력하기로 서로를 격려했다”고 나온다.

JP는 이에 대해 “엉터리(지어낸 이야기)”라며 당시 박정희 소장 집 회동 자체가 없었다고 주장했다. ‘한국군사혁명사’는 JP가 해외에 있을 때 작성됐는데, 공화당 대통령 후보인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5·16을 주도했음을 강조하기 위해 사실이 아닌 내용을 넣었다는 것이다. JP에 따르면 5·16의 중심은 박정희가 아니라 JP 본인이다.

JP가 박정희를 허수아비처럼 묘사한 부분은 더 있다. 소이부답 1회 <“박정희 권력의지 약해 내가 장도영 체포”>에 따르면 “박정희가 18년간 집권했지만 대통령을 할 만하다고 생각한 것은 60년대 후반에 들어와서”라고 했다. 이런 박정희를 대신해 장도영을 체포하는 등 군사정권을 이끈 장본인은 JP다.

장도영 14대 육군참모총장은 1960년 5월16일 ‘군사혁명위원회’ 포고문의 명의자로 군정 최고 권력기관인 국가재건최고회의 초대 의장이다. 증언록에 따르면 박정희가 장도영을 5·16 간판으로 내세웠는데 그는 같은해 7월 ‘반혁명혐의’로 체포돼 숙청됐다. 결과적으로 장도영은 이용당한 셈인데, JP는 “장도영이 혁명을 파괴할 것 같아” 체포했다고 포장했다.

5·16은 정군운동의 연장선인가?

‘한국군사혁명사’에 따르면 박정희 소장은 4·19 이전에도 쿠데타를 기획했고, 사실 한국군은 이미 1950년대 즉 이승만 정권 때부터 권력을 장악할 가능성이 있는 집단으로 부상해있었다. 5·16 거사주체들은 부패한 군 내부의 개혁을 추진하기 위해 정군 운동(군 개혁)에 나섰지만 무능한 장면정부에 의해 좌절되자 불가피하게 ‘혁명’을 하게 됐다고 주장한다.

홍석률 성신여대 사학과 교수의 논문 ‘4월혁명 직후 정군운동과 5·16쿠데타’에 따르면 거사주체장교 중 일부가 정군운동으로 예편된 송요찬 11대 육군참모총장에게 이승만 사임직후(1960년 5월) 찾아가 군을 움직여 정권을 장악해달라고 했으나 송요찬은 이를 거부했다. 그러자 박정희가 바로 다음날 송요찬에게 사임을 촉구하는 서한을 보냈다고 했다.

비슷한 일은 최영희 12대 육군참모총장에게도 있었다. 조갑제의 저서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에 따르면 1960년 6월경 JP가 최영희를 찾아 “나라가 혼란하고 좌익이 발호하고 있는데 군이 가만있을 수 있겠냐”는 이야기를 했다 거절당했다. JP와 15명의 장교는 최영희의 용퇴를 요구했다가(16인의 하극상 사건) 군법회의에 넘겨지기도 했다.

박정희는 1960년 11월 이미 장도영에게 거사 계획을 말했다(장도영은 이를 부인). 군을 정화하겠다고 나선 정군파들은 왜 정군운동의 대상자들에게 쿠데타를 도와달라고 했을까? 육군참모총장을 내세운 것에 대해 홍석률 교수는 “(한국)내부적으로 장도영 총장을 내세우면 쿠데타가 소수 장교집단이 일으킨 것이 아니라 전군의 지지를 받고 확실한 반공 쿠데타로 보일 수 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조갑제의 위 저서에 따르면 실제 거사 때 동원된 핵심병력은 김포 해병여단, 6군단 포병대, 공수단이었는데 이 중 6군단 포병단장 문재준과 공수단장 박치옥은 육사 5기생으로 박정희보다는 장도영과 더 친밀한 관계였고, 장도영이 쿠데타를 주도하는 것으로 알고 여기에 참여했다고 했다. 육참총장을 끌어들이는 것은 쿠데타의 성공 가능성을 높이는 행위에 불과하다고 해석할 수 있다.

대외적으로는 미국의 시선도 중요했다. 친미주의자였던 장도영은 한국군의 작전통제권을 가지고 있는 유엔군사령관 매그루더와 친했다. 쿠데타 직후 미8군이 반발하자 JP는 자신이 미군을 설득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5·16 참가자로 최고회의 정보분과 위원이었던 방원철은 저서 ‘김종필 정체’에서 미군을 설득한 것이 본인이라고 주장했다. 미 정보기관과 접촉해 성사시킨 사람은 전 청와대 경호실장 박종규였다는 설이 당시엔 기정사실처럼 돌아다녔다.

어찌됐건 미8군 사령관 매그루더에게 보내는 서한은 장도영 이름으로 전달됐고, 미군은 일단 쿠데타를 인정하기로 했다. JP는 쿠데타 보름만인 1960년 7월 초 장도영을 그냥 두면 혁명이 파괴될 우려가 있어 체포했다고 밝혔다. 쿠데타 주도세력에게 장도영은 미군 방탄용에 불과했고, 장도영은 순진했다.

5·16은 혁명인가?

 

홍석률 교수는 “확실한 것은 군 쿠데타 모의는 정군운동이 완전히 좌절된 시점이 아니라 그것이 진행되고 있는 시점에서 병행해 전개됐다”고 주장했다. 5·16의 성공원인은 크게 2가지다. 박태균(서울대 교수), 김일영(성대 교수) 등은 주로 당시 장면 총리, 윤보선 대통령 등 한국 정치지도자의 소극적 대응을 원인으로 꼽고, 홍석률 교수는 한미관계에서 원인을 찾는다.

JP는 증언록 곳곳에서 부패한 군 수뇌부와 이를 개혁하지 못하는 장면 정부의 무능을 비판한다. 정군운동과 무관하게 군 내부에서 부패한 지도부에 대한 불만이 팽배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방원철의 저서 ‘김종필 정체’에 나온 김형욱(이후 중앙정보부장, 육사 8기)과 JP의 대화를 보면 5·16이 사적이익을 위한 쿠데타였다는 정황이 드러난다.

1960년 4월혁명 직후 JP는 “4·19로 말미암아 우리들의 거사 명분이 사라졌다”며 “한발 빨리 거사했어야 했다”고 말했다. 그러자 김형욱은 “자네 그게 무슨 망발인가”라고 힐책하자 JP는 “그게 무슨 소린가, 망발이라니”라고 답했다. 전쟁이 끝나고 장교들의 승진이 밀려있던 답답한 상황을 뒤집을 쿠데타가 시민혁명보다 중요했던 것이다.

장면 총리는 쿠데타가 일어나자 몸을 숨겼고, 윤보선 대통령은 “올 것이 왔구나”라고 했다. 쿠데타 세력이 작성한 ‘5·16 혁명실기’에 따르면 장면 정부는 4·19 1주기 시위진압을 위한 군사계획인 ‘비둘기 작전’을 구체화했고, 쿠데타세력은 이를 이용해 쿠데타를 성공했다. 장면정부는 민주적인 개혁을 하다 붕괴된 것이 아니라 민주적 요구를 배반하고 군대를 정치에 이용하다 당한 것이다. 쿠데타세력은 장면정부의 무능을 이용했을 뿐이다.

쿠데타 세력들은 ‘군사혁명사’에 미군이 정군운동을 반대한 사실에 대해 비판하기는커녕 제대로 서술하지도 않았다. 또한 쿠데타 이후 정군운동 정신을 이어 군 개혁을 단행하거나 정군을 반대했던 미군의 내정간섭을 막기 위해 작전통제권을 회수하지 않았다. 오히려 권력 유지를 위해 반공을 내걸었고, 미국 요구에 맞춰 한일회담을 밀어붙이고 베트남전에 뛰어들었다.

5·16이 혁명인가, 쿠데타인가? 21세기 위정자들조차 쉽게 대답하지 못하는 이 질문에 JP는 이렇게 답했다. “쿠데타면 어떻고 혁명이면 어떠냐.” 증언록은 모두 5·16을 혁명으로 기록하고 있다. 증언록 7회에는 역술인 백운학과 대화를 길게 실으며 그의 입에서 “혁명”이라는 단어가 나왔고, “(박정희가) 20년은 간다”고 한 사실이 나온다. 5·16은 혁명이고, 장기집권은 운명이라는 메시지를 주려던 의도였을까.

5·16 주체로 지금까지 살아남은 사람 중 한명인 JP라는 ‘승자’의 증언록은 곧 역사가 될 것이다. 회고록이란 ‘지나간 일을 돌이켜 기록한다’는 뜻이다. 회고의 과정에서 미화와 왜곡은 쉽게 따라붙는다. JP 증언록은 회고록인가, 자기변호인가.

 

“갈매기 똥이나 싸는 섬, 폭파하자” JP 발언의 진실은?

[김종필에게 묻는다 ②] ‘제2의 이완용’ 불사하며 한일회담 강행하고 정치자금 챙겨… ‘미해결의 해결’ 원칙으로 잘못 꿴 첫 단추

 

 

지난 3월2일부터 중앙일보는 김종필 전 국무총리의 증언록 ‘소이부답(笑而不答)’을 연재하기 시작했습니다. 증언록은 중앙일보 기자들과 작가까지 동원돼 114회까지 이어졌고, 웹툰으로 재구성됐으며 책으로도 만들어질 중요한 역사적 자료입니다. 하지만 증언록 곳곳에는 역사왜곡과 미화의 흔적이 보입니다. 미디어오늘은 이를 검증하는 차원에서 증언록의 이면을 살펴보고 중앙일보가 하지 않은 김종필의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편집자주>

 

김종필 전 국무총리(JP)는 “제2의 이완용”이라고도 불린다. JP는 이를 부인하지 않는다. 오히려 “나는 한일 청구권 협상을 진행하면서 매국노, 제2의 이완용 같이 욕이란 욕은 다 들었다”며 “세상을 바꿔 가는 데는 고통이 따른다”고 했다. 가혹한 비판을 피할 수 없을 때는 ‘쿨’하게 인정하고 자신이 할 말을 해나가는 게 더 효과적이다.

JP는 왜 ‘매국노’라는 비판까지 받게 된 걸까? 지난 1965년 타결된 한일협정 때문이다. 1961년부터 한일회담을 주도한 JP가 굴욕적인 회담으로 돈 몇 푼에 식민지 피해를 ‘퉁’쳤다는 지적이다. 매주 수요일이면 주한일본대사관 앞에서 ‘일본군 위안부 수요집회’가 열리지만 한일협정은 위안부 문제 해결의 가장 큰 걸림돌이다.

한일협정이란 1965년 6월22일 체결(12월18일 성립·발효)된 한국과 일본 간 기본관계에 관한 조약과 부속 협정 4가지(청구권·경제협력에 관한 협정, 재일교포의 법적지위와 대우에 관한 협정, 어업에 관한 협정, 문화재·문화협력에 관한 협정 등)를 가리킨다. 그 결과 한국은 일본으로부터 무상 3억달러, 유상 2억달러, 차관 3억달러를 10년에 걸쳐 받았고, 식민지배의 피해를 받은 개인은 일본에 손해배상을 청구하기 어렵게 됐다.

 

박정희의 친일경력이 여전히 논란이 되는 가운데 “매국행위”라고 비판받는 한일회담에 대해 JP가 어떻게 해명했는지 관심을 끈다. ‘소이부답’에서 한일회담 내용은 24회(4월27일자)부터 시작된다. 24회에서 지난 2005년 도쿄에서 했던 연설 전문을 중앙일보 세 면(8~10면)씩이나 할애해 실은 것을 보면 JP가 이 연설을 꽤나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2005년 6월3일 도쿄 ‘한·일 국교정상화 40주년 초청강연’ 다시보기

JP의 연설문은 이렇게 시작한다. “금년(2005년)은 1905년 일본이 한국과 보호조약을 맺은 지 100년, 제2차 세계대전이 종전된 지 60년, 한·일 국교정상화가 이루어진 지 40년이 되는 해입니다.”

‘보호조약’이라는 표현이 나온다. 일본은 을사조약에 대해 대외적으로 ‘우리나라를 보호한다는 구실로 체결했다’고 했다. 일본의 관점이 녹아있는 ‘보호조약’이란 표현이 여과 없이 등장했다. 실제 을사조약은 한반도 식민화를 위한 예비수단으로 외교권을 박탈하기 위한 강제조약이었다. 체결당시 정식 명칭도 ‘한일협상조약’이다.

 

연설 중에 한일교류의 중요성과 일제 식민지배에 대한 비판이 번갈아 등장했다. “최근 시마네현의 ‘다케시마의 날 조례’ 제정으로 비롯된 양국 갈등에도 지난 40년간 착실하게 성장한 양국 국민들 사이의 교류와 협력의 기반은 흔들리지 않고 있다.” 한일교류의 시작인 한·일 국교정상화에 대한 자화자찬은 연설 곳곳에서 볼 수 있다.

JP의 연설 중 나카소네 야스히로 전 총리의 지적을 인용해 일제 식민지배를 비판했다. 요지는 2005년 일본인들은 일·러전쟁 승리 100주년을 기념하고 있는데 일본이 당시 전쟁 승리에 취해 교만해져 제국주의의 길로 들어섰다는 내용이다. 또한 JP는 정한론자인 사이고 다카모리나 이토 히로부미에 대해 비판하기도 했다. 한일관계를 합리적으로 보는 정치인으로 보인다.

JP가 연설을 통해 한일 협력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한일관계는 시혜니 종속이니 하는 일방적 낱말로 설명될 수 없는 양면성을 띠고, 결국 양국의 상호 이익으로 돌아오고 있다.” JP처럼 일제를 비판했던 정치인이 한일 협력을 강조한 것을 보면 JP를 ‘제2의 이완용’이라고 하긴 무리가 있어 보인다. 이는 JP의 도쿄 연설을 증언록에 비중 있게 실은 이유라고 해석할 수 있다.

JP는 과연 누굴 대표했나?

한일협정 결과 한국이 받은 3억달러(무상)의 성격은 불분명하다. 한국은 일제 식민지배에 대한 ‘(전쟁배상)청구권’으로 해석하고 JP도 증언록에서 ‘청구권’이라고 했지만 일본은 ‘독립축하금 또는 경제협력자금’으로 부르고 있다.

금액이 적다는 비판도 있다. 1960년대 당시 야당에서는 25억~30억달러를 주장했다. 일본에게 4년 지배당한 필리핀은 1955년에 무상지원 5억5000만달러로 합의했고, 역시 4년간 지배당한 인도네시아와 미얀마는 각각 2억2308만 달러, 2억 달러로 합의했다. 한국은 일본에게 약 36년간 지배당했다.

하지만 JP는 증언록에서 “당시 일본의 외환보유액은 14억 달러였다”며 “패전국으로 전후 복구가 진행되고 있어 재정이 어려울 때였다”고 말했다. 전범국의 재정상황을 걱정하고 있다. JP는 피해자이자 자신이 대표하고 있는 한국의 관점이 아닌 범죄자이자 상대국인 일본의 관점에 서 있었다.

노다니엘(일본학 박사, 월간중앙 객원편집위원)은 저서 ‘독도밀약’에서 다소 충격적인 일화를 하나 소개했다. 한일 양국 지도자들이 외교상대를 ‘적’으로 간주한 것이 아니라 ‘우리’로 간주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장면이다.

‘독도밀약’에 따르면 오노 반보쿠(자민당 부총재)가 JP(당시 36세)를 처음 만난 곳은 목욕탕이었다. JP는 오노가 초면임에도 “오, 선생님 물건 크네요”라고 했다. 노다니엘은 “한국 중앙정보부장이 일본 자민당 부총재를 만나서 하는 대화가 아니라 순진한 청년이 목욕탕에서 동네 선배를 만나서 하는 투의 말”이라고 평했다. 오노는 박정희 전 대통령 취임식에서 자신과 박정희의 관계를 “부자관계”라고 하며 “아들의 경사를 보러왔다”고 했던 인물이다.

한일회담은 최선이었나?

JP는 증언록에서 상당 부분을 한일회담 당시 자신의 당당했던 태도를 회상하는 데 할애했다. JP는 1962년 11월 일본 오히라 마사요시 외상과 회담 중 오히라에게 이렇게 말했다. “벌써 세 시간 정도 얘기를 하고 있는데 커피 한잔조차 내줄 생각이 없는 거요.” 오히라는 그때서야 커피를 내왔고 JP 앞에서 끙끙대기도 했다.

JP는 오히라에게 일본 전국시대 이야기를 꺼내며 분위기를 풀었고, 그러자 오히라는 이에 감탄해 속내를 털어놨다고 했다. 이어 협상이 진행됐고 JP는 “협상을 네 시간 가까이 진행하면서 3000만 달러에서 시작된 ‘청구권’ 협상 금액이 6억달러+α까지 올라갔다”고 밝혔다. 증언록만 놓고 보면 JP라는 인물은 박정희가 요구했던 8억달러를 자신의 능력으로 돌파해 낸 훌륭한 외교관이다.

 

하지만 최근 공개된 미국 비밀문서에는 JP의 증언록과 배치되는 분위기가 감지된다. 사무엘 버거 전 주한미국대사의 미 국무성 전문보고에는 “박정희는 배상요구보다는 원조를 포함한 ‘일괄 처리’에 관심이 있었으며 증거 자료가 없는 일부 청구권의 포기를 먼저 일본 측에 제안했다”고 돼 있다.

이 말을 풀이하면 한국은 식민지배에 대한 증거자료를 최대한 수집해 (전쟁배상)청구권을 주장한 것이 아니라 청구권, 경제협력 등을 묶어서 한 번에 처리하고 돈을 받는 데 초점을 뒀다는 뜻이다. 위 문서에서 버거는 “일본은 이 자금을 그들이 원하는 바에 따라서 적절히 부를 수 있지만 한국은 그것을 청구권에 대한 배상이라고 부를 것”이라고 했다.

협상타결 금액도 미국이 관심을 가진 흔적이 보인다. 1962년 9월26일자 주한미국대사관 비망록에 따르면 한 주한 미대사관 직원은 개인적인 견해로 무상공여 금액은 3억~4억달러 사이에서 결정될 것이라는 관점을 비춘 적이 있고, 이 범위는 합리적 관점에서 더욱 좁혀질 수 있는데 아마 그 범위는 3억~3억5000만 달러 사이라고 시사했다.

미국은 한일회담에 개입한 것으로 보인다. 1962년 7월13일 주일 미대사관에 발송한 미 국무성 전문은 “합리적인 협상을 통해 타결을 이루도록 한일 양측에 주재하는 대사관 인력과 영향력을 사용하라”며 “한국정부 최고위층을 접촉해 청구권 문제를 청구권을 강조하지 않고 하나의 패키지로서 받아들일 수 있도록 청구권 지불, 무상공여, 장기저리차관을 포함한 합리적인 수준의 타결방안을 생각해보도록 설득하라”고 했다. 결과적으로 JP는 미국의 요구를 그대로 수용한 셈이다. 그리고 협상 과정을 자신의 업적으로 미화했다.

JP가 얻은 것은 정치자금

한일협상은 애초 미국의 요구로 시작됐다. 1953년 7월16일 미국무성 정보보고서(No.6287)에 따르면 한일협상은 연합국 총사령관의 주선으로 시작됐다. 또한 한국이 확고한 협상자세를 갖는 이유는 미국에 군사, 경제원조를 받기 때문이고, 일본이 한일협상 타결의 필요성을 느끼는 이유는 미국이 압력을 가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보고서는 밝혔다.

5·16 쿠데타가 일어났을 때 미국 케네디 정부는 그동안 지지부진했던 한일협상 타결을 적극 요구했고, 매국노라는 비판을 받아가며 쿠데타 세력이 얻은 것은 정치자금이다. 1966년 3월18일자 미국 CIA 보고서 ‘한일관계의 미래’에는 “일본 기업들이 61년~65년까지 당시 민주공화당 총예산의 3분의 2를 제공했다(6개 기업이 총 6600만달러 지원)”고 돼 있다. 한국이 일본에게 받은 금액 무상 3억달러의 약 5분의 1을 한일회담이 진행되던 중에 5·16 쿠데타 세력이 이미 뒷돈으로 받은 것이다.

또한 이 보고서는 “공화당은 일본에서 사업을 하고 있는 한국 기업으로부터도 지불을 받았는데 정부방출미 6만톤을 일본에 수출하는 과정에 개입한 8개 회사가 공화당에 11만5000달러를 지불했다”고 밝혔다. JP가 증언록에서 이런 기록에 대한 납득할만한 해명을 내놓지 않은 채 독도에 대한 새로운 논쟁을 남겼다.

‘김종필·오히라 메모’ 엉뚱한 기록물?

JP와 오히라는 양국 정상에게 회담 내용을 보고하기 위해 합의안을 종이에 작성했다. ‘김종필·오히라 메모’로 불리는 이 문서는 2005년 외교부가 공개했다. JP는 이 문서에 대해 “엉뚱한 기록물이 내가 쓴 메모인 것처럼 둔갑해 세상에 알려졌다”고 했다. 외교부 공개 문서는 메모가 일본어와 영어로 써 있는데 JP는 한글과 한자로 썼다는 것이다.

JP는 “내가 작성한 메모가 장관을 통해 외무부에 전달되거나 보관하는 과정에서 분실됐을 것”이라 추측했다. 메모의 진위는 논란이 될 수 있지만 메모 내용은 “무상 3억불, 유상 2억불, 수출입은행에서 1억불+α”로 변하지 않았다. 확실한 건 한일회담이 대단히 비밀리에 진행됐다는 사실이다. 비밀은 불리한 정보는 숨기고 유리한 것만 밝힐 수 있다.

진짜 숨기고 싶은 사실, 독도 폭파론과 독도 밀약설

‘김종필·오히라 메모’와 함께 왜곡됐다고 주장하는 사안은 ‘독도 폭파론’과 ‘독도 밀약설’이다. 중앙일보 증언록 5월4일자, 5월11일자 등 반복해서 이 신문과 JP는 ‘김종필·오히라 메모’와 함께 독도문제에 왜곡이 있다고 주장했다. JP는 한일 양국이 독도문제에 대해 ‘미해결의 해결(해결하지 않은 채 두는 것으로 해결하자)’로 마무리 짓고, 그 과정에서 JP가 “한일 국교정상화를 위해 독도가 방해가 되면 독도를 폭파하자고 했다”는 것에 대해 부인했다.

증언록에 따르면 ‘김종필·오히라 메모’를 작성한 뒤 오히라가 뜬금없이 독도 얘기를 꺼냈는데 JP는 “회담 의제가 아니”라며 말을 잘랐다. JP는 “독도를 폭파하면 했지 당신들(일본)에게는 줄 수 없다”고 한 게 전부라고 주장했다. 독도밀약문서에 대해 JP는 밀약 자체가 없었다고 주장했다.

JP가 이번에 한마디 말로 부인한 사실이 얼마나 설득력이 없는지 구체적으로 보자. 2007년 월간중앙은 “한일협정 체결 5개월 전인 1965년 1월11일 당시 일본 건설장관 고노 이치로의 특명을 받아 서울을 방문한 우노 소스케 자민당 의원이 박건석 범양상선 회장 자택에서 정일권 국무총리를 만나 ‘미해결의 해결’ 대원칙 아래 모두 4개항으로 된 독도 부속조항에 합의했다”고 보도했다.

 

1962년 10월29일자 미 외교문서에는 러스크 국무장관이 “독도가 어떤 섬인가”라고 묻자 JP가 “갈매기가 똥이나 싸는 장소”라며 “나는 일본에 독도를 폭파하자고 제안했다”는 대목이 나온다. 일본도 1962년 9월3일 ‘독도 폭파론’을 제기했다. 이날 일본 외무성에서 열린 한·일 예비절충 4차 회의에서 이세키 유지로 국장은 “독도는 무가치한 섬”이라며 “크기가 히비야 공원 정도인데 폭파라도 해서 없애버리면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했다는 사실 역시 미 외교문서에 나와 있다.

2004년 연합뉴스가 보도한 미국 국무부 (기밀) 대화 비망록에 따르면 박정희도 “수교 협상에서 비록 작은 것이지만 화나게 하는(irritating problems) 문제 가운데 하나가 독도문제”라며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독도를 폭파시켜 없애버리고 싶다”고 말했다.

 

노다니엘 박사는 2007년 1월30일 JP의 셋째 형인 김종락(5·16 민간인 신분 가담)을 만나 밀약문서가 어디 있는지 물었고 김종락은 “내가 태웠다”고 답했다고 밝혔다. 노다니엘에 따르면, 왜 문서를 태웠냐는 물음에 김종락이 “역사의 죄인이라는 낙인이 찍히는 것이 두려웠다”고 답했다. 불태운 시점은 박정희가 암살당하고 신군부가 주도권을 잡아가던 때다. JP가 왜 지금에서야 김종락의 증언을 뒤집었을까? 김종락은 지난 2013년 세상을 떠났다.

JP가 이 모든 것을 한마디의 말로 부인하기에는 설득력이 떨어진다. 독도문제에 대한 ‘미해결의 해결’ 상태는 반세기가 지나도록 유지됐다. 2005년 3월21일 조선일보에 따르면 당시 야당인 한나라당 정문헌 의원은 일본 정부가 매년 3월 다케시마 영유권을 주장하는 구상서를 한국 정부에 보냈다고 밝혔다.

정 의원에 따르면 구상서 내용은 이렇다. “주대한민국 일본국 대사관은 대한민국 외교부에 대해, 다케시마가 역사적, 법적으로 일본 고유의 영토임을 밝힌다. 대한민국이 다케시마에 대한 불법적인 영유를 중단할 것을 요청한다.” 한국 정부는 이를 문서대장에 기록·보관하고 반론하는 외교문서를 매년 발송한다.

소위 ‘청구권’ 회담을 주도한 JP는 민족반역자로 비판받았다. 시인 김지하는 ‘시체여’에서 “썩고 있던 네 주검의 악취는 ‘사쿠라’의 향기가 되어… 민족적 자존심을 짓밟고 일본에의 노예화를 추진하는 굴욕적인 한일회담을 즉각 중지할 것을 요구한다”고 했다. 한일회담에 반대하는 시위인 1964년 6·3사태는 일본정치가가 아닌 JP의 인형이 태워졌다.

 

JP는 이에 대한 책임을 지고 ‘2차 외유’를 떠났다. JP는 중앙일보 증언록에서 “(1964년)6월18일 아내와 함께 출국해 6개월 동안 세상을 구름처럼 돌아다녔다”고 표현했다. 정치적 책임을 무겁게 느끼며 쫓겨나듯 떠난 이의 모습이라기보다는 그간 힘든 일을 하나 끝내고 휴가를 떠나는 모습에 더 가까워 보인다. JP는 ‘2차 외유’ 중 베트남전에 한국 장병을 보낼 계략을 꾸민다.

 

‘허업’으로 마련한 창당자금과 개인자산, 뻔뻔한 JP

[김종필에게 묻는다 4대의혹사건 “욕 좀 먹으면 어때, 살점 떨어지는 것도 아닌데”

 

지난 3월2일부터 중앙일보는 김종필 전 국무총리의 증언록 ‘소이부답(笑而不答)’을 연재하기 시작했습니다. 증언록은 중앙일보 기자들과 작가까지 동원돼 114회까지 이어졌고, 웹툰으로 재구성됐으며 책으로도 만들어질 중요한 역사적 자료입니다. 하지만 증언록 곳곳에는 역사왜곡과 미화의 흔적이 보입니다. 미디어오늘은 이를 검증하는 차원에서 증언록의 이면을 살펴보고 중앙일보가 하지 않은 김종필의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편집자주>

 

정치는 ‘허업(虛業)’이다. ‘허업’은 서비스업과 같이 생산하는 게 없는, 즉 ‘실업(實業)’이 아닌 직업을 말한다. 지난 2월 김종필 전 국무총리(JP)는 부인 故 박영옥 여사 빈소에서 “정치는 허업”이라며 “국민들에게 나눠주는 게 정치인의 희생정신이지 정치인이 열매를 따먹겠다면 교도소밖에 갈 데가 없다”고 말했다.

 

‘허업’이라던 정치를 통해 JP가 만진 ‘떡고물’은 천문학적인 금액이다. ‘떡고물’은 대통령비서실장, 중앙정보부(중정)장 등을 했던 JP의 라이벌 이후락이 박정희 암살 이후 194억원을 부정축재한 것으로 밝혀지자 “떡을 주무르다 보면 떡고물이 묻는 것 아니냐”고 해 유명해진 표현이다. 당시 JP의 ‘떡고물’은 이후락의 그것을 뛰어넘는 수준이었다.

 

1980년 6월18일자 경향신문에 따르면 신군부가 몰수한 JP의 부정축재 금액은 213억4648만원으로 ‘일요신문’을 발간한 61억원 규모의 현대경제일보사, 28억원에 이르는 12만평의 제주 감귤농장, 79억원에 상당하는 640만평 서산 소재 삼화축산, 300돈의 순금제 칼, 50돈의 순금제 황소, 각종 고서화와 골동품 1억3000만원 등이다.

 

1974년 JP가 부정축재자라는 사회적 여론이 일어나자 자신의 아호를 딴 ‘운정장학회’를 설립해 감귤농장과 서산목장 등을 기증해 관리했다. JP는 중앙일보 증언록에서 제주도 황무지를 개척해 감귤나무를 심고 거기서 재원을 얻어 한국에서 영국의 ‘이튼스쿨’같은 학교를 만들려했다고 밝혔다. 사학과 재단은 70년대부터 최적의 재테크 수단 중 하나였다.

 

신군부에 의해 213억원을 뺏기고 잠시 쫓겨났던 JP는 노태우 정권 이후 3김정치(김영삼·김대중·김종필)의 한축을 담당하며 정치인생을 이어갔다. 김영삼 정부 초기인 1993년 함승희 검사 등 수사팀은 안영모 전 동화은행장이 이원조 전 의원, 이현우 전 청와대경호실장에 뇌물을 건낸 혐의를 포착하며 JP의 계좌도 발견했다.

 

함승희 전 검사는 1995년 언론과 인터뷰에서 “이 전 의원은 수백억원을 은닉했고, JP의 계좌에도 100억원대가 발견됐다”며 “당시 수사과정에서 검찰지휘부로부터 사건을 축소하라는 회유와 압력을 받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DJP(김대중+김종필)연합으로 JP가 실세가 되자 1999년 함승희는 연합뉴스와 인터뷰에서 “더이상 그 문제에 관해 언급하기 싫다”고 밝혔다. 권력은 허물을 덮는 능력이다.

 

권력자가 법의 칼날을 피하거나 목표를 위해 수단과 방법을 무시하는 편의주의식 사고방식은 이제 국민에게 익숙하다. 이는 군사독재의 유산이다. 5·16쿠데타 이전 자유당, 민주당 간부들은 정치자금을 ‘필요악’이라고 생각하며 최소한의 도덕성을 유지하려 했다. 신익희 민주당 전 최고위원이나 조병옥 전 내무장관이 개인적으로 가난했던 것은 유명한 얘기다.

‘구악’을 뺨친 ‘신악’

 

‘신악(5·16쿠데타세력)’이 독재와 부정선거로 물러났던 ‘구악(이승만 정권)’을 ‘뺨친다’는 평가를 받게 된 것은 4대의혹사건 이후였다. 5·16 쿠데타세력이 공권력을 이용해 부당한 이익을 취한 정황이 뚜렷하지만 JP는 반세기가 지난 지금 대수롭지 않다는 듯 웃어넘겼고, 중앙일보는 증언록을 작성하며 더 이상 캐묻지 않았다.

 

4대의혹사건이란 증권파동, 워커힐 호텔, 새나라자동차, 빠징꼬 등 네 가지 문제에 JP가 수장으로 있던 중앙정보부가 개입해 거액의 돈을 챙겼고 이를 민주공화당(공화당) 창당 자금으로 썼다는 의혹이다. 이 사건들은 모두 쿠데타 직후인 1961년 가을부터 벌어졌다. 결론부터 말하면 JP는 이 사건을 책임진다는 명목으로 1963년 2월25일 해외여행을 떠났을 뿐이다.

 

4대의혹사건이 국가재건최고회의 내부에서 문제가 되자 당시 중정부장이자 육군 대령이었던 JP는 준장으로 승진하면서 예비역으로 편입됨과 동시에 중정부장에서 물러났다. 그때가1963년 1월5일이다. JP는 당시 공화당 창당 준비위원장도 맡고 있었는데 따가운 시선이 지속되자 당직도 사퇴한 뒤 ‘외유’를 떠난 것이다.

사람은 보고 싶은 것만 보게 된다. JP는 증언록(34회)에서 “이들 의혹은 비밀 창당 작업을 둘러싸고 번지는 루머들 때문에 실체 이상으로 증폭됐다”며 “겉은 권력비리 사건처럼 포장됐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반(反)JP 권력투쟁이었다”고 밝혔다. 승진과 외유로 훈훈하게 마무리된 사건에서도 JP는 자신을 비판한 이들만 탓하는 모습이다.

JP는 증언록에서 빠찡코 사건은 자신과 관계없는 일이라고 선을 그었고, 나머지 사건에 대해서는 자신이 기획했지만 정치자금과는 무관하며 국가 발전이었다는 점을 강조했다.

 

일단 잡아떼기 “빠찡꼬는 민주당 정권 때”

 

빠찡꼬가 처음으로 한국에 들어온 것은 1960년 8월 장면 정부 때였다. 당시 500대가 들어왔지만 사행심을 조장한다는 여론이 일자 금지됐다. 쿠데타 세력은 1961년 ‘유기장법’을 제정했다. 빠찡코 사건이란 중정이 일본에서 빠찡코 2527대를 들여왔는데 일본 시세보다 고가로 들여와 이를 허가해주며 업자들에게 뇌물을 받아 4000만원이라는 거액의 정치자금을 챙겼다는 혐의다.

한국정치문제연구소가 펴낸 ‘김종필과 이후락의 떡고물’은 “실제로 강성원, 정지원, 이영근 등이 수입업무를 주관했는데 이 세 사람은 JP의 특명으로 민주공화당 사전조직에 가담하고 있었기 때문에 빠찡꼬 사건으로 얻은 자금은 그대로 공화당 사전조직(재건동지회) 자금으로 전용됐으리라는 사실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고 지적했다.

처벌받은 이가 없는 사건이라 그랬을까, JP는 증언록에서 “빠찡꼬는 5·16이전 민주당 정권에서 발생한 일로 처음부터 나나 중정과는 전혀 관계없는 헛소문”이라고 선을 그었다. JP는 4대의혹사건을 해명하며 “욕 좀 먹으면 어떠냐”며 “내 살점이 떨어지는 것도 아니지 않으냐”고 했다. 죽기를 각오한 병사만큼이나 욕먹기를 각오한 정치인은 섬뜩하다.

 

새나라자동차, 투자자가 도망갔다?

 

4대의혹사건 중 가장 규모가 큰 사건은 새나라자동차 사건이다. 1961년 12월부터 ‘새나라자동차공업주식회사’라는 회사를 차렸다. JP는 “일제 자동차 부품을 수입해 조립·시판하기로 했다”며 “우선 완제품 250대를 면세로 도입했다”고 했지만 실제로 일본 닛산 자동차 수입을 2000대까지 늘려 국내에 있던 ‘시발택시’까지 밀려나 국내자동차 산업은 어려움을 겪었다.

이 과정에서 1대당 수입가격이 13만원이었던 자동차를 25만원씩 시중에 판매해 중정은 약 2억5000만원의 부당이득을 얻었다. 새나라자동차공업주식회사 자본금 1억원 중 3000만원은 재일교포 사업가 박노정, 나머지는 JP의 형 김종락이 상무로 있는 한일은행에서 융자를 받아 충당했다.

JP는 증언록에서 “63년 5월 회사가 망했다”며 “돈을 대던 사람(박노정)이 미국으로 도망간 판에 어떻게 수십억원을 빼돌릴 수 있겠는가”라며 횡령 혐의를 부인했다. 하지만 ‘김종필과 이후락의 떡고물’에 따르면 최초 이익금 1200만원의 분배를 두고 JP가 이익을 독점해 박노정이 불만을 품고 진정서를 각계에 보냈다. 그러자 JP는 박노정의 체포를 지시했다.

 

박노정은 이를 눈치 채고 파자마 바람으로 숙소 반도호텔에서 나와 밀항선을 타고 일본으로 도망쳤다. 새나라자동차 건으로 JP 이미지에 큰 손상을 입었고, 투자금을 떼인 박노정 사건이 화제가 돼 일본에서도 JP의 악명이 드높아졌다. 이 사건은 중정 제2국장 석정선이 책임지고 1963년 구속됐다. 석정선은 워커힐호텔 건설에도 깊이 개입했다.

워커힐호텔 “자부심을 느낀다”

 

부정한 돈은 또 다른 부정의 씨앗이 된다. 태평양점령군 총사령부 교육국 과장 출신의 언론인 D.W.콘데는 저서 ‘남한-그 불행한 역사’에서 워커힐호텔 건설자금이 그동안 중정이 압수한 ‘북한 스파이들의 자금’과 중정이 받은 뇌물, 밀수로 생긴 자금, 한국군의 부정이용 등에서 나왔다고 단정하고 있다. 워커힐사건은 건설 자재를 면세로 들여온 횡령의혹사건이다.

워커힐 사건은 비밀투성이다. ‘워커힐 30년사’에 의하면 사업 기공식은 1962년 1월5일에 거행됐는데 일반에게는 비밀이었다. 하지만 기공 전부터 강제노역은 진행 중이었다. 4대의혹사건 관련 국회 내무위원회가 중정을 감사한 결과 1961년 9월부터 연인원 2만4000여명이 무상으로 노역에 동원돼 공사가 진행됐다.

JP는 “비용과 공기(工期)를 줄이기 위해 육군과 죄수를 동원하고 군의 트럭도 지원받았다”며 “이 과정에서 적절한 행정절차를 밟지 못한 부분은 있었을지 모른다”고 말했다. 작은 흠을 드러내는 것은 모든 혐의를 부인하는 것보다 신뢰감을 준다. 또한 행정절차‘쯤’은 무시해도 된다는 도덕불감증은 박정희 정권이 남긴 악습 중 하나다.

JP는 “총 공사비 220만 달러를 투입해 10개월 만인 12월에 완공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워커힐 30년사’에 따르면 총 공사비는 6억4000만원인데 그 중 외화가 약 220만 달러였다. 손정목 전 서울시사편찬위원장은 저서 ‘서울도시계획이야기’에서 “6억4000만원이면 당시 환율에 따라 493만 달러밖에 되지 않는다”며 “이 금액으로 엄청난 시설을 할 수 있을까”라며 공사비 축소 의혹을 제기했다.

 

워커힐호텔은 1인당 국민소득 100달러였던 당시 ‘엄청난 시설’이었다. 설계에 참여한 강명구 회고에 따르면 호텔 모든 건물 안의 어느 곳에서나 한강을 내려다 볼 수 있도록 설계했다. 아차산 기슭 19만 평 터에 26개 동의 건물이 들어섰다. 부지 중 약 10만평은 JP가 대한전선 창업주 설경동를 부정축재자로 몰아 그의 땅을 헐값에 사들였고, 나머지 땅도 토착민 14명에게 시가의 5분의 1쯤 되는 가격으로 사들였다.

 

JP는 “워커힐호텔은 내가 직접 지휘한 국가적 작품으로 지금도 자부심을 느끼고 있다”고 말했다. 당시 중정부장 JP(육사 8기), 중정 제2국장 석정선(육사 8기), 제2국 1과장 임병주(육군 중령)가 워커힐 공사를 주도했고 임병주는 건설사무소장을 맡았다. 건설 자재 중 나이트클럽 회전무대, 전기장치 심지어 시멘트까지 모두 일본제품이었는데 중정에서 무관세로 들여와 150만 달러 이상의 자금을 마련했다고 알려졌다.

 

JP는 ‘6·25전쟁에 참전했다 전사한 월턴 워커 장군을 기리는 의미에서 워커힐호텔이라는 이름을 지었다’는 등의 이야기로 증언록을 할애했다. JP에 따르면 미군이 일본으로 휴가 가는 것을 막기 위해 워커힐호텔을 짓고, 건물 이름은 역대 유엔군 사령관 이름으로 붙였다.

 

1962년 AP통신이 이곳을 “매춘굴·카지노·주사위판·룰렛장·슬럿 머신 그리고 미인 호스티스를 완비한 시설”이라고 하는 등 일본과 미국에서 이 비밀사업을 감지하고 비판하자 중정이 독단적으로 사업을 끌고 갈 수 없게 됐다. 부랴부랴 ‘국제관광공사법’을 제정해 ‘국제관광공사’를 만든 사실 등에 대해 JP는 말하지 않았다.

 

증권파동, 중앙정보부의 ‘먹튀’와 민주공화당 창당

 

1962년 5월 한동안 치솟던 증권이 한순간에 폭락해 5242명의 투자자가 176억6000여만원의 손실을 입는 사건이 발생했다. 피해자 중에는 30대 젊은 주부가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했고, 수많은 가정들이 파산하거나 이혼을 했다. 증권파동은 중앙정보부로부터 시작됐다.

 

1961년 가을, JP는 공화당 창당자금 마련을 두고 고민 중이었다. JP는 같은해 9월말 공화당 사전조직인 ‘재건동지회’를 핵심으로 하는 ‘8·15계획서’를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에게 보고했다. 1962년 1월 충무로1가 카네기홀 2층에 아지트를 만들고 젊은 대학교수, 언론인, 금융인 등을 포섭해 중앙과 지방의 정당사무국 조직을 만들기 시작했다.

 

당시 재건동지회 조직부장은 강성원 소령으로 그는 중정요원이었다. 강성원은 증권투기의 귀재로 소문난 윤응상을 접촉했다. 윤응상은 당시 김성곤(남로당 재정위원 출신, 훗날 공화당 재정위원장)이 운영하던 연합신문, 동양통신의 전무였는데 그는 ‘7억환(1원=10환)만 투자하면 3개월 만에 100억환을 만들어주겠다’고 했다. 중정은 5억환을 윤응상에게 전달했다.

 

윤응상은 이 돈으로 통일·일홍·동명 세 증권사를 설립하게 해 대한증권거래소 주식의 70%까지 사들여 주가를 올렸고, 중정요원인 강성원은 농협이 보유하던 한국전력 주식 12만8000주를 ‘지정된 증권회사’에 팔라고 요구한 뒤 5% 싸게 사 주가가 4200% 오르자 되팔았다.

 

뒤늦게 투자한 이들에게 손해를 떠넘기는 주가조작사건의 원조였던 이 사건은 12명이 구속됐지만 윤응상, 강성원만 법정에 섰고, 1963년 육군보통군법회의는 전원 무죄판결을 내렸다. 증권파동으로 주식시장에 대한 불신과 망가진 경제가 회복되는데 10년의 시간이 걸렸다. (MBC 드라마 제3공화국, 공규영 ‘김종필 허망론 그리고 그 종말’, 방원철 ‘김종필 정체’, 이동형 ‘김대중vs김영삼’ 참고)

 

피해자는 5000명이 넘는데 가해자는 없었다. JP는 군정이 끝난 지 약 3년 후에 “나 혼자 한 것은 아니며 시작은 같이 해놓고 문제가 어렵게 되자 모두들 발뺌했다”며 억울해했다. 조갑제의 저서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에 따르면 JP는 “새 정당을 조직하려면 돈이 많이 든다”며 “정당을 만드는 데 국고금을 쓸 수는 없지 않느냐? 그래서 증권시장에서 조달하여 쓴 것인데 재미보는 사람도 있고 손해보는 사람도 있게 마련”이라고 했다.

 

제대로 처벌받지 않은 ‘만행’은 업적으로 둔갑했다. JP는 증언록에서 “증권시장에 관여한 건 사실인데 경제개발을 위해 자본시장을 활성화해 보자는 게 관여한 이유”라며 “나는 몰랐지만 도의적인 책임을 느낀다”고 했다. 1963년 사건송치서에 따르면 4대 의혹 사건을 수사한 김재춘의 중정이 JP가 증권 파동을 주도한 사실을 밝혀냈지만, JP를 외국에 보낸 뒤 은밀히 기소 중지 처분을 했다.

 

사건 당시 쿠데타 정부는 지하경제를 키우는 데도 한몫했다. 1961년 제정된 금융실명 거래에 관한 법률은 경제단체와 쿠데타 주체들이 경제개발을 위한 자본축적의 필요라는 명분하에 엄청난 규모의 가명 금융거래를 허용했고, 이에 대한 추적을 제한(영장없이는 원칙적 불가)해 이중의 보호막을 쳐줬다.

기존 정치인들은 정치활동을 못하게 하는 ‘정치활동정화법’을 만들고는 쿠데타 세력은 중정에서 자금, ‘재건동지회’에서 인력을 동원해 1963년 2월26일 공화당을 창당했다. 공화당은 이전 정당과 달리 꽤 발전된 형태의 조직이었다. 그 뒤에는 대한민국 첫 간첩조작사건 피해자인 황태성이 있었다.

 

 

KBS는 김일성이 준 돈으로 만들었다”

[김종필에게 묻는다 ⓸] 박정희가 형님이라 불렀던 황태성, 밀사에서 간첩으로 둔갑, 사형에 이르기까지

 

 

지난 3월2일부터 중앙일보는 김종필 전 국무총리의 증언록 ‘소이부답(笑而不答)’을 연재하기 시작했습니다. 증언록은 중앙일보 기자들과 작가까지 동원돼 114회까지 이어졌고, 웹툰으로 재구성됐으며 책으로도 만들어질 중요한 역사적 자료입니다. 하지만 증언록 곳곳에는 역사왜곡과 미화의 흔적이 보입니다. 미디어오늘은 이를 검증하는 차원에서 증언록의 이면을 살펴보고 중앙일보가 하지 않은 김종필의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편집자주>

 

박정희는 1963년 12월17일 제5대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군인 박정희가 군복을 벗고 민정을 시작한 시점이다. 동시에 ‘빨갱이’라고 공격받던 박정희가 좌익혐의를 벗으며 정권 비판자들을 ‘빨갱이’로 몰기 시작한, 소위 ‘공수교대’가 이뤄진 시점이다. 박정희의 변신은 취임 3일전인 63년 12월14일 간첩죄 혐의로 황태성을 죽이며 확실해졌다.

 

황태성은 북한 무역성 부상(차관급) 출신으로 박정희의 셋째 형이자 당시 중앙정보부장 김종필(JP)의 장인인 박상희(남로당원)의 친구이며 박상희와 그의 부인 조귀분을 소개해 준 사람이다. JP 중앙일보 증언록 ‘소이부답’에 따르면 박정희는 어려서 황태성에게 ‘형님, 형님’하며 친하게 지냈다. 익히 알던 사람들이 남쪽에서 쿠데타에 성공했기 때문에 황태성은 밀사를 자처하게 됐다.

 

JP는 증언록에서 황태성을 “밀사가 아닌 간첩”이라고 했고, “박정희와 자신은 황태성을 만난 적이 없다”고 말했다. 지난달 20일 미디어오늘은 황태성 사건을 분석한 책 ‘박정희 장군, 나를 꼭 죽여야겠소’의 저자 김학민 이한열기념사업회 이사장을 만나 황태성 사건에 대해 들었다. 그는 3년 간 자료를 수집해 책을 썼다.

 

쿠데타 100일 쯤 뒤인 1961년 8월31일 황태성(당시 56세)은 임진강을 건너 서울에 도착했다. 황태성은 박정희와 JP를 만나러 고향사람 김민하(당시 중앙대 강사), 자신의 조카딸과 조카사위 임미정과 권상능을 만났다. 휴전선을 넘은 지 한 달 반이 지난 61년 10월15일 오전 당시 중앙정보부(중정)장 JP는 장모 조귀분의 전화를 받고 황태성의 소식을 듣게 됐다.

 

JP는 황태성을 만났나?

JP는 증언록에서 “박정희와 나는 황태성을 만날 까닭이 없고, 만나지 않았다”고 했다. 황태성은 반도호텔(현 롯데호텔 자리, 당시 중정 본부)에서 조사를 받았다. 김학민 이사장은 “김형욱(제4대 중정부장)은 JP 대신 박문병이 황태성을 대신 만났다고 했고, 당시 대화록도 있다”며 “JP도 그동안 김형욱의 발표를 따랐다”고 말했다. 박문병은 중정에 파견된 치안국 경감이다.

하지만 JP는 증언록에서 “황태성이 내 얼굴을 본 적이 없어서 박 경감을 위장시켜 황태성을 신문해보기로 했지만 그와 몇 마디 말을 나누던 황태성이 대뜸 ‘가짜는 저리 가라’고 소리쳤다”고 말을 바꿨다. 황태성이 중정에 잡힌 게 61년 10월20일인데 JP의 얼굴을 몰랐다는 건 현실성이 떨어진다.

김 이사장은 “8월31일에 내려왔으면 쿠데타 두 달 반이 지난 시점인데 JP 얼굴을 모를 수 없고, 모르고 내려왔더라도 이쪽 신문만 봐도 알게 된다”고 말했다. 황태성을 신문한 대화록은 있는데 박문병이 신문하지 못했다면 JP가 만났을 가능성이 크다. JP는 박정희와 황태성이 만난 사실도 부인했다.

박정희도 황태성을 만나지 않았을까?

 

김학민 이사장은 미국 정보기관 G2 비밀정보원 출신 CIA요원 래리 베이커에게 진상을 묻는 문명자(워싱턴 특파원, 백악관 출입기자)의 기록을 소개했다. 여기서 베이커는 “황태성이 온 다음 두 달 간 박정희와 황태성은 반도호텔에서 적어도 세 번 만났다”며 “박정희는 내가 아는 게 너무 많아 한국에 남아있는 것을 원치 않아 추방했다”고 밝혔다.

김 이사장은 “역대 모든 정권이 피라미 간첩 하나만 잡아도 언론에 대서특필하는데 황태성은 거물간첩이라면서 언론에 공개를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JP는 왜 자신과 박정희가 황태성을 만나지 않았다고 주장할까? 1963년 10월10일 동아일보에 따르면 윤보선이 황태성이 공화당을 조직했고 자금을 제공했다고 폭로했다. 쿠데타 세력은 황태성과 선을 그어야 했다.

 

또한 JP는 1961년 9월 서해 군사분계선 부근 용매도에 강성국, 김석순 등 남한 대표를 보내 남북대화를 시도했던 사실도 몰랐다고 선을 그었다. 김 이사장은 “당시 남에서 먼저 제의해서 올라갔는데 준비가 부족해 대화 진전이 되지 않았고, 황태성의 남한 방문은 답방 성격이 크다”고 말했다.

 

쿠데타 세력이 남북대화를 위해 밀사를 보냈고 답방 형식으로 황태성이 내려왔다면 그에게 간첩 혐의를 씌울 명분이 사라진다. 따라서 JP가 용매도 회담부터 “몰랐다”고 끊어내야 했다는 게 김 이사장의 분석이다. JP는 증언록에서 용매도 회담에 대해 “육군첩보부대(HID) 자체 대북공작”이라며 “중정과 관계가 없다”고 주장했다.

 

이에 김 이사장은 “박정희나 수뇌부의 재가 없이 대북접촉을 한다는 건 당시 분위기로서 말이 안 된다”며 “서해안 휴전선에서 미군이 촘촘하게 감시하고 있을 때인데 HID가 몰래했다는 것도 현실성이 없다”고 말했다. 이번 증언록 뿐 아니라 그동안 황태성과 관련된 기록 중에서도 현실성이 떨어지는 부분은 더 있다.

 

김성곤은 왜 황태성을 못 만났을까?

 

황태성은 서울에 내려와 가장 먼저 김성곤(남로당 재정위원, 훗날 공화당 재정위원장, 쌍용그룹 창업주)을 만나러 갔다. JP는 증언록에서 “남로당 재정부장을 지낸 김성곤은 황태성과 친한 사이였지만 김성곤이 일본 출장 중이어서 만나지 못했다”고 했고, 조갑제의 ‘박정희 전기’와 김형욱의 ‘김형욱 회고록’에도 김성곤이 IPI(국제언론인협회) 회의 참석차 외국에 나가있어 황태성을 만나지 못했다고 기록했다.

 

이에 대해 김 이사장은 “사실이 아니”라고 했다. 그는 “70년대 초까지 국민의 99%는 여권조차 없었고, 공항에는 출입기자들이 있어 해외 나가는 사람들을 신문 출입국동정란에 실었다”며 “61년 5월30일~6월3일 해외에 나갔다 왔고, (황태성은 8월31일 내려와 10월20일 중정에 연행) 같은해 10월24일 출국한 기록이 있을 뿐 황태성이 내려왔을 때 김성곤은 국내에 있었다”고 말했다.

문명자의 저서 ‘내가 본 박정희와 김대중’에 따르면 김성곤은 61년 5월 IPI 총회를 마치고 워싱턴으로 가 5·16에 대한 미국의 반응을 살폈다. 그 결과 김성곤은 미국이 쿠데타를 지지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됐다. 김 이사장은 “미국이 쿠데타를 지지한다는 것을 안 이상, 김성곤은 당연히 황태성을 피했을 것”이라고 봤다.

황태성 소문 바로잡기

 

황태성은 중정에 잡힌 지 2년이 넘도록 세상에 알려지지 않다가 1963년 말 대선 직전에 알려졌다. 북한 밀사였기 때문에 비밀에 둘러싸였고 정치 지도자들은 제 입맛대로 각색해 소문만 무성했다. 김 이사장은 몇 가지 잘못 알려진 황태성 이야기를 바로잡았다.

조갑제 저서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에는 황태성이 김천 어모면에 살았고, 부유한 집안이라 아들과 딸 모두 대구로 유학을 보냈으며 황태성은 대구 계성학교를 졸업했다고 돼 있다. 하지만 김 이사장은 “황태성은 김천 어모면에 산 적이 없고, 딸은 아예 없으며 아들 둘은 대구가 아니라 서울과 일본에서 유학했다”며 “황태성은 계성학교가 아닌 상주보통학교를 졸업했고, 서울로 올라와 경성제일고보를 다녔다”고 바로잡았다. 황태성 학교에 대해서는 JP도 증언록에서 경성제일고보를 다녔다고 했다.

영남일보 연재물 ‘대구경북 근현대 인물사’에는 황태성이 박정희의 결혼식 주례를 봤다고 돼 있다. 박정희는 1936년 김호남과 결혼했고, 1950년 육영수와 재혼했다. 김 이사장에 따르면 황태성은 1936년 ‘김천그룹 재건협의회’ 사건으로 대구형무소에 있었고, 1950년에는 월북해 주례를 설 수 없었다.

 

여러 자료에 따르면 박정희가 신경군관학교로 떠날 때 황태성이 조언을 했고, 박정희가 휴가 나올 때마다 황태성을 찾아 조언을 구했다고 한다. 이는 독립운동가 황태성의 영향을 받은 박정희가 일본군으로 위장한 독립운동가였다는 주장으로 이어진다. 지난 10월 새누리당 논평에서 박정희를 비밀독립군이라 주장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 나왔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김 이사장은 “박정희가 혈서를 써서 신경군관학교에 지원한 건 1939년인데 황태성은 1935년부터 1940년까지 대구형무소에 수감돼 있어 조언을 구할 처지가 아니었다”며 “공산주의 활동으로 투옥됐고, 나와서도 요시찰 인물로 감시받는 독립운동가에게 일제 괴뢰국 장교가 찾아와 조언을 구할 리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황태성은 간첩인가?

 

JP는 “황태성은 간첩죄로 처형됐다”며 간첩으로 규정했다. 하지만 황태성을 간첩으로 규정하면 이해하기 힘든 부분들이 많다. 황태성은 61년 10월20일에 연행됐고 재판은 12월1일 시작됐다. 12월27일 육군고등군법회의에서 사형 판결을 받았고, 당시 재판은 단심제였다. 김 이사장은 “그때 죽였어도 법적으로 문제가 없었는데 형 집행은 늘어지게 된다”고 말했다.

 

쿠데타 세력(국가재건최고회의)은 1962년 1월 단심제를 3심제로 바꾸는 결정을 했다. 제도를 정비해 같은 해 6월부터 3심제가 시행됐다. 김 이사장은 “소급적용 대상도 아닌데 6개월을 내버려둔 황태성에 대한 2심을 시작했다”며 “밀사니까 북한과 접촉하는 통로로 이용했을 수도 있고, 내부에서 죽일지 말지 논의할 시간을 버는 효과도 얻은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해 6월 한겨레는 황태성 재판기록을 다루며 황태성이 1963년 법정에서 “소위 적국간에도 (밀사를) 사형치 않는 것이 국제법상 관례인지라 하물며 괴집(괴뢰집단)에 가담했다 하더라도 극형 선고 필요성을 고려해야 할 것”이라며 “원심 판결 후 전향하는 탄원서를 제출했으므로 대한민국 품 안에 돌아오는 피고인에 대해 극형을 처함은 부당하다”고 한 사실을 보도했다.

 

하지만 전향서는 황태성의 법률대리인 홍승만이 작성한 것이다. 김 이사장은 “황태성이 전향했으면 왜 사형을 당하느냐”며 “황태성은 밀사로 내려왔고 끝까지 전향한 적은 없다”고 말했다. 황태성이 군사기밀 등을 탐지해 북에 알린 흔적도 발견되지 않았다.

 

황태성은 1심과 2심 모두 사형판결을 받았지만 대법원에서 결과가 뒤집혔다. 당시 법률대리인 홍승만도 눈여겨볼 인물이다. 홍승만은 항소심을 앞두고 선임된 변호사로 박정희의 법률대리인이기도 했고, 박정희 측근 김성곤, 백남억과 함께 좌익 활동도 했던 인물이다. 훗날 공화당 국회의원이 된다.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는 글 ‘황태성 사건과 박정희의 레드 콤플렉스’에서 “단심으로 사형판결 받은 황태성 사건을 3심제로 돌린 것이나, 대법원에서 원심을 파기한 것이나, 홍승만 변호사가 변론을 맡아 파기환송을 이끌어내는 등 맹활약을 한 것을 단순한 우연으로 보기 어렵다”고 분석했다. 황태성을 살려 둘 필요가 있었다는 뜻이다. 대법원에서 파기환송해 황태성 재판은 시간을 벌었다. 하지만 고등법원으로 내려온 사건은 다시 사형, 두 번째 대법에서 사형이 확정됐다.

“KBS는 김일성이 준 돈으로 만든 언론”

황태성은 2년간(1961~1963년) 뭘 했을까? 세간의 루머와 당시 야당의 주장은 황태성이 20만 달러를 공작금으로 가져와 공화당 창당 작업으로 사용했고, 일부는 KBS 현대화 자금으로 썼다는 내용이었다. 김 이사장은 “JP의 증언으로 이중 일부가 사실로 드러났다”고 말했다.

 

황태성 재판 기록에 따르면 황태성은 20만 달러가 아닌 2669달러만 가지고 남으로 내려왔다. 김 이사장은 “20만달러는 황태성 이후 내려온 간첩 이만희의 공작금으로 추정된다”며 “황태성은 김성곤 등 남쪽에 남로당 출신 지인들이 많으니 돈을 많이 가지고 내려오지 않았다”고 말했다.

 

JP는 증언록에서 “간첩들에게 압수한 20만 달러를 당시 오재경 공보부 장관에게 넘겨 KBS 개국을 지시했다”며 “결과적으로 김일성이 KBS TV개국에 큰 역할을 한 셈”이라고 말했다. 김 이사장은 “여기에 황태성의 돈도 포함돼 있는 건 사실”이라고 말했다. 공화당 자금은 한일회담과 4대의혹 사건으로 마련한 돈이 비중 있게 쓰였다.

 

민주공화당, 공산당과 닮았다

 

김학민 이사장은 “61년 중정에서 황태성을 연행할 때 중정요원들이 큰절 올리고 모셔갔다”며 “김민하, 권상능, 황유경(황태성 손녀)도 모두 황태성을 밀사라고 주장하고 있다”고 말했다. 일각에서는 황태성이 공화당 조직에 도움을 줬다는 주장이 있다. 큰절까지 하고 모셔간 밀사 황태성을 2년 간 살려둔 이유로 볼만한 정황이다.

 

김 이사장은 “공화당은 당시 획기적인 정당으로 크게 두 가지가 공산당 조직을 벤치마킹한 냄새가 난다”고 말했다. 첫째는 사무국 중심의 정당이라는 점이다. 김 이사장에 따르면 이전 자유당과 민주당과 다르게 사무국이 있고, 사무원 공채를 시작했다. 공화당 사전조직인 ‘재건동지회’는 중앙당과 지방조직을 만들기 위해 교수, 언론인, 금융인 등을 포섭했다.

 

김 이사장은 “공산당은 사무국 서기장 중심으로 일상적인 사무를 가지고 전국 조직이 가지는데 이전 정당은 의원들만 회의 때 모이는 정도였다”며 “지금 정당에 있는 사무총장이 서기장 비슷한 것이고 사무총장의 힘이 세다”고 말했다.

 

래리 베이커도 당시 “박정희 정권에는 각 행정기구에 군사위원들이 배치돼 있는데 평소에는 상급자의 지휘를 받지만 위급한 상황에는 박정희에게 직접 보고를 하는 이중계통”이라며 “이중계통은 중정에도 있는데 이는 공산당의 정치위원 제도와 같은 것”이라고 밝혔다.

 

두 번째는 당원교육을 하는 것이다. 김 이사장은 “지금 정당들도 당원교육 잘 못하지 않느냐”며 “당원교육하고 정기적으로 재교육하는 것은 공산당에서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공화당은 최초로 연수원을 만들어 민정당까지 이어진다”며 “당시 남로당 출신이 많아 황태성이 모든 것을 지도했다고 확신할 수는 없지만 북한노동당 조직이나 운영방식을 참고했다고 볼 수는 있다”고 말했다.

 

“아까운 사람인데 꼭 사형시켜야 하나”

김 이사장은 “황태성에 대해 박정희와 박정희 주변사람들의 생각이 달랐다”며 “JP 역시 황태성 월북 이후에야 박정희의 친척이 된 것이기 때문에 쉽게 ‘죽이네 마네’ 할 수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박정희 장군, 나를 꼭 죽여야겠소’에 따르면 1963년 12월 초 김형욱은 박정희에게 사형집행 승인서류를 내밀었다. 박정희가 “아까운 사람인데 꼭 사형시켜야 하나”라고 두 번이나 되물었지만 김형욱은 “미국과 야당에 몰리지 않으려면 사형을 집행해야 한다”고 답했다.

 

1963년 12월14일 오전 인천의 한 군부대에서 황태성은 총에 맞아 세상을 떠났다. 결과적으로 북한은 순진했다. 5·16 세력이 함경도와 경상도 출신, 육사 5기와 8기 간 갈등으로 권력이 불안했고 미국의 의심도 가시지 않은 상황에서 북은 섣불리 밀사를 보내 남쪽을 파악하려 했다.

밀사를 죽이는 것은 전쟁선포와 다름없다. 남북관계는 ‘냉전’이 유지돼 살벌해졌고, 휴전선에서 우발적 충돌은 끊이지 않았다. 1968년 1월21일엔 민족보위성 정찰국 소속 124 부대 김신조 일당이 “박정희 모가지 뗄 임무”로 내려오기도 했다. 황태성의 죽음은 남북관계 악화와 박정희 정권 이후 본격화할 간첩조작 사건의 서막이었다.

 

박정희 독재 2인자 JP, 전두환 "안 되겠어" 한마디 하자…

[김종필에게 묻는다 ⓹] 만년 2인자 JP의 권력욕… 내각제 카드 불발, 퇴장해야 할 때 외면하다 결국 퇴출

지난 3월2일부터 중앙일보는 김종필 전 국무총리의 증언록 ‘소이부답(笑而不答)’을 연재하기 시작했습니다. 증언록은 중앙일보 기자들과 작가까지 동원돼 114회까지 이어졌고, 웹툰으로 재구성됐으며 책으로도 만들어질 중요한 역사적 자료입니다. 하지만 증언록 곳곳에는 역사왜곡과 미화의 흔적이 보입니다. 미디어오늘은 이를 검증하는 차원에서 증언록의 이면을 살펴보고 중앙일보가 하지 않은 김종필의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편집자주>

 

김종필 전 국무총리(JP)는 중앙일보 증언록에서 “군부의 중심은 나”였다며 “박정희는 권력의지가 약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자신은 절대권력을 넘보지 않았고 대의를 먼저 생각했다고 주장했다. JP는 자신을 겸손한 2인자로 표현하지만 1인자를 향한 욕망은 여기저기서 새어 나온다. JP의 권력욕은 이미 1960년대부터 드러나기 시작했다.

‘고다마 불충사건’

 

고다마 요시오(1911~1984)라는 일본인이 있다. 미국 CIA에 협조하는 조건으로 석방된 제2차 세계대전 A급 전범이다. 폭력조직에서 활동하며 ‘우익의 거괴’, ‘정재계의 흑막’ 등의 별칭으로 불린 극우인사다. 하루는 고다마가 김형욱 중정부장에게 이렇게 말했다.

 

“사실 내가 숙소인 반도호텔에서 석정선, 김용태, 김종락 세 분을 만났죠. 그분들 말씀이 이 나라에는 JP가 있으니 박정희 대통령이 있을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 앞으로 한국과 뭘 하려고하면 실권자인 JP와 손잡지 않으면 말짱 헛것이라며 협력을 요청하더라고요.”

 

고다마는 김형욱에게 그 세 명이 자신에게 이런 말도 했다고 전했다. “사실 혁명(5·16)을 주도한 것도, 그 후 모든 정책 결정도 JP 머리에서 나온 것이며 박정희는 상징적 존재일 뿐이라는 거죠. 쉽게 말하면 허수아비라는 겁니다.” JP가 중앙일보 증언록에서 자신이 박정희를 설득하며 혁명을 이끌어 갔다고 했던 말과 비슷한 맥락이다.

 

황당한 사실은 일제 식민지배가 끝난 지 20여년이 지난 시점에 여전히 국내 실력자들이 고다마와 같은 일본 실력자에게 한국 차기 대통령에 대해 상의했다는 것이다.

 

고다마는 박정희와 만주시절 친분을 쌓았고, 우익 폭력단체 ‘동성회’를 조직한 재일교포 정건영, 아베 신조 현 일본 총리를 외손자로 두고 있는 A급 전범 기시 노부스케, 한국의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 특별고문을 역임한 세지마 류조(일본군 장교, 이토추 상사 회장) 등과 막후에서 한일 국교 정상화를 이끈 인물 중 하나다.

 

1971년 2월 고다마는 한일친선에 공이 있다는 이유로 2등급 수교훈장인 광화장을 한국 정부로부터 받는 등 막강한 영향력을 과시했다. 당시 집권당인 민주공화당(공화당) 인사들은 고다마와 친분을 쌓았다. JP는 정건영을 통해 고다마와 친분을 쌓았다. 김형욱, 박종규, 김용태, 석정선 등 실세들도 고다마를 자주 만났다.

 

석정선(JP 육사동기), 김용태, 김종락(JP의 셋째형)은 박정희 정권 2인자였던 JP와 친한 사람들이었다. 박정희는 당시 청와대 경호실장 박종규를 통해 JP 주변인들이 JP 대통령 만들기와 관련해 고다마의 협조를 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중정부장 김형욱은 고다마와 JP계 3인의 대화를 도청한 테이프를 박정희에게 보고했고 3인은 중정에 연행됐다. 이를 ‘고다마 불충사건’이라고 한다. (김형욱 회고록, 김종필과 이후락의 떡고물 참고)

 

2인자는 1인자를 꿈꾼다

 

JP는 증언록에서 “1인자는 2인자를 소외하거나 무력화하고 싶어하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며 “조금도 의심받을 만한 일은 하지 말고, 때가 올 때까지 1인자를 잘 보좌해야 한다”고 ‘2인자 철학’에 대해 말했다. 고다마 불충사건은 1인자에게 의심받을 만한 일을 하다 걸린 일이다.

 

1인자는 영구집권을 꿈꿨다. 3선 개헌 얘기는 1967년 6월 7대 국회의원 선거 전부터 나왔다. 당시 야당은 “공화당이 다수의석을 차지하면 3선을 위한 개헌이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공화당은 7대 총선에서 개헌 선인 의석 3분의 2를 넘기자 1969년 1월 윤치영 공화당 의장서리가 3선 개헌 논의를 본격적으로 꺼냈다.

 

JP는 69년 2월 “이 나라의 민주 정치와 박 대통령을 위해 3선 개헌을 반대한다”고 말했다고 증언록에서 주장했다. 박정희는 이미 두 번(1963년, 1967년 대선)이나 대통령을 했고, 1967년 대선은 부정선거 논란에도 휩싸였다. 이런 상황에서 초법적 국가기구인 중정의 창립자이자 쿠데타 정부 2인자 JP의 입에서 나온 “민주 정치”라는 단어는 사뭇 어색하다.

 

JP가 3선 개헌에 반대했던 이유는 따로 있다. 1인자의 장기 집권은 2인자로서 애가 타는 일이다. ‘현대 정치사와 김종필’에 따르면 박정희의 후계자 문제는 심각한 정치쟁점이었다. 1967년 선거 후 박정희의 장기집권을 지지하는 세력과 이를 저지하려는 인사들 간 경쟁이 치열해졌다.

 

이 책에 따르면 1968년 5월 공화당은 ‘당내 사조직을 만들어 해당 행위를 했다’는 이유로 김용태, 최영두, 송상남을 전격 제명했다. ‘박정희 3선 개헌을 저지하고 당의장 JP를 1971년 대통령으로 추대하려다 들킨 것’이 실제 원인이었다.

 

JP 증언록에 따르면 박정희가 JP를 따로 불러 3선 개헌 동참을 요청했다. 박정희는 JP의 손을 꼭 잡았고, 눈에 눈물이 고인 채 이렇게 말했다. “이봐. 같이 죽자고 혁명 해놓고, 혼자 살려고 그래? 60년대엔 빈곤을 겨우 퇴치했는데, 70년대엔 중화학 공업을 일으켜 선진국으로 가는 길을 열어야 할 것 아니야. 이 길을 같이 가자.”

 

JP는 경제발전을 위해 1인자의 눈물을 외면할 수 없었다고 고백했다. 하지만 ‘현대 정치사와 김종필’ 저자 이달순은 JP가 개헌 찬성으로 돌아선 이유를 “만일 JP가 동지들과 끝까지 (3선개헌을) 막았더라면 숙청을 당했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이는 JP의 2인자 철학에 따르면 아직 때가 오지 않았다는 소리와 같다.

 

3선 개헌안은 결국 통과됐다. 1971년 3월 공화당 전당대회에서 박정희는 대통령 후보로 공식 지명됐고, JP는 새로 신설한 당 부총재로 선출됐다. 같은 해 6월 박정희의 제7대 대통령 임기가 시작되면서 박정희는 JP를 국무총리에 임명했다. JP의 첫 번째 국무총리 임기는 1975년 12월까지 이어졌다.

 

절대로 1인자를 넘겨다보지 말라

 

JP가 강조한 2인자 철학 첫 번째는 “절대로 1인자를 넘겨다보지 말라”다. 유신정권시절 국무총리였던 JP가 2인자 자리에서 물러나면서 얻게 된 교훈은 아닐까? 1976년 코리아게이트 사건 이후 미국 하원 국제관계위원회 산하 국제기구소위원회(프레이저 위원회)가 미 의회에 보고했던 ‘프레이저 보고서’에는 JP가 국무총리에서 경질되기 직전 상황이 나온다.

 

1973년 초 박정희는 슐 아이젠버그가 진행하는 상업 프로젝트의 편의를 봐주도록 정부에 지시했다. 박정희는 한국정부가 캐나다산 CANDU 핵 반응로(핵개발용)를 구매하도록 했고, 아이젠버그는 대리인 역할을 했다. 아이젠버그는 1960년대 초 미국이 경제개발 계획들이 현실성이 없다는 이유로 경시했을 때 필요한 자금을 지급해 박정희에게 우호적인 인물이다.

 

프레이저 위원회 조사에 따르면 아이젠버그는 핵 반응로 판매 수수료 등으로 200만 달러를 받았는데 이 중 일부를 민충식과 JP가 뒷돈으로 받았다. 이 사실을 청와대에서 알게 돼 JP는 국무총리, 민충식은 한국전력 사장에서 해임됐다. 민충식은 친 JP 인물로 1963년 국가재건최고회의 참여해 대통령 정무비서관을 역임했고 73년부터 한전 사장으로 일했다.

 

JP는 증언록에서 “건강상의 이유”로 사퇴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JP는 “정치적으로 박정희 대통령은 특유의 ‘디바이드 앤드 룰(divide and rule:분할 통치)’ 통치술로 나를 힘들게 했다”고 덧붙였는데 이게 사퇴한 진짜 이유에 가까워 보인다. 여기서 ‘분할통치’는 2인자의 영향력이 커지는 것을 막기 위해 또 다른 실력자를 통해 견제하게 했던 박정희의 통치술을 가리킨다.

JP의 국무총리 사퇴의 이유에 대해 프레이저 보고서는 “박정희 돈에 손 댄 후 쫓겨났다”고 했다. 더 정확하게는 “편의를 봐주라”는 1인자의 지시를 온전히 따르지 않은 것을 말한다.

 

1인자의 사망, 결정적 기회

 

JP는 증언록에서 “내가 아는 한 박 대통령은 돌아가실 때까지 누구에게든 권력을 넘겨줄 분이 아니었다”고 말했다. 맞는 말이다. 1979년 10월26일 박정희가 죽자 JP는 공화당 총재가 됐다. JP는 공화당 요직을 개편해 ‘JP 체제’를 만들며 차기 유력 대권주자로 부상했다.

 

10·26 후 전두환과 JP의 메신저 역할을 한 박재홍(박정희의 장조카) 전 민자당 의원도 전두환이 12·12사태 이전까지 JP를 대세 인물로 봤다고 전했다. 박 전 의원에 따르면 전두환이 JP에게 요구한 사항은 5·16세력만 끼고돌지 말라, 육사 8기생만 편애하지 말라(전두환은 육사 11기), JP 비서실 잡음을 정리해달라, JP가 일본 측인 건 알지만 앞으로 미국과도 친하게 지내달라 등 네 가지였다.

 

18년을 집권한 독재자가 죽고 민주화 바람이 불며 재야인사들이 복권되자 프라하의 봄에 빗댄 ‘서울의 봄’이라는 말이 퍼졌다. 재야인사 뿐 아니라 1인자의 그림자만 밟았던 JP에게도 봄이 오는 듯했다. 하지만 권력은 온전히 JP에게 넘어오지 않았다. JP는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 봄이 왔어도 봄 같지 않구나)’이라고 당시 정국을 표현해야 했다.

 

1980년 1월17일 전두환은 언론사 간부들과 술자리에서 “JP는 안 되겠어”라고 했다. 봄은 꽃피지 못하고 다시 겨울로 되돌아갔다. 10.26 이후 만발했던 개헌논의가 얼어붙고 1980년 5월17일 전국에 비상계엄령을 내린 신군부는 모든 정치활동을 중단시켰다. 당시 국군보안사령관 전두환 육군소장은 중정부장, 계엄사 합동수사본부장까지 겸임하고 있었다.

 

JP는 신군부에게 부정축재로 쌓은 216억4648만원을 몰수당했다. 1980년 6월 공화당 총재직에서도 물러났다. 그리고 전두환 집권기 7년 동안 잊혀졌다. 1987년 구 민주공화당 정치인들을 모아 만든 신민주공화당 대통령 후보로 나선 JP는 13대 대선에서 8%(4위)의 지지밖에 얻지 못했다. 당시 노태우 36.6%(당선), 김영삼(YS) 28%, 김대중(DJ) 27%를 각각 얻었다.

물 건너간 대통령 “내각제 하자”

 

JP는 원래 내각책임제에 대해 부정적이었다. 10·26 직후인 1980년 1월 ‘주간한국’과 인터뷰에서 “정부조직은 대통령 중심제가 좋다”고 밝혔고, 같은 해 3월 기자간담회에서도 “대통령은 언제라도 총리를 경질할 수 있어야 하며, 이원집정부제는 반대한다”고 밝혔다. 5·16쿠데타로 내각제(2공화국 장면내각)를 붕괴한 뒤 강력한 대통령의 2인자 특혜를 누려온 상황에서 차기 대통령이 눈앞에 보이는 상황에서 자연스런 발언이다.

 

하지만 13대 대선이 끝나고 대통령 당선 가능성이 희박해지자 JP는 1988년 1월 기자간담회에서 내각제를 주장하기 시작했다. JP를 중심으로 한 신민주공화당은 3당 합당(노태우+YS+JP) 결과 민주자유당으로 흡수됐다. 3당 합당 후 JP는 YS에게 내각제를 하자고 요구했다.

 

강력한 차기 대권주자는 시간이 지날수록 대통령의 권력을 이어받는다. JP 증언록에 따르면 YS는 ‘자신이 민자당 총재-노태우 당시 대통령이 명예총재-JP는 최고위원’을 각각 맡는 수직적 지도체제를 제안했다. 다음 대통령이 자신이라고 믿었던 YS는 내각제에 부정적이었다. JP는 계속 1인자의 그림자만 좇아야 했다.

 

JP가 말하지 않은 2인자 철학

 

JP는 YS를 지지했고, DJ와는 DJP연합까지 했지만 결국 내각제를 거절당했다. 박정희가 3선개헌이나 유신을 밀어붙일 때 반대하는 JP에게 “임자 한번만 도와줘, 이번만 내가 하고 다음은 임자 차례”라고 하며 설득했을 때도, YS가 민자당 대선후보 시절 JP에게 도움을 요청하며 ‘나 다음은 당신’이라고 했을 때도, 3당이 합의한 ‘내각제 합의서’를 YS가 뒤엎었을 때도 JP는 절대 자신의 입을 통해 상대를 비난하지 않았다.

 

절대권력에 저항하지 않는 것이 2인자의 덕목이다. 그래서 자신의 입을 대신할 JP계보를 만드는 것도 경계했다. 친 JP계로 불리는 사람들은 있었지만 DJ의 동교동계, YS의 상도동계에 버금가는 계보는 없었다. 절대권력에 대항하기 위한 DJ, YS의 계보가 곧 집권의 발판이 됐다는 점에서 JP 계보가 취약했던 것은 그를 영원히 2인자로 머물게 한 원인이기도 했다.

 

2인자는 손에 피를 묻히지 않았다. YS정부 시절 JP는 ‘5·18특별법’을 반대했다. 이 법은 자신을 부정축재자로 몰아 재산을 빼앗고 정치권에서 쫓아낸 전두환·노태우를 처벌하는 법이었다. 훗날 노무현 전 대통령 탄핵 당시에도 JP가 총재로 있던 자유민주연합(자민련) 당론으로 탄핵을 찬성하면서도 JP 본인은 표결에 참여하지 않았다.

 

JP는 증언록에서 2인자는 “참을 수 없는 것도 참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JP는 노태우가 대통령이 되자 1990년 9월 성균관대에서 “민주화 전환기에 노 대통령을 선택한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라며 “노 대통령 말고 누가 현 시국을 조화롭게 이끌 수 있겠는가”라고 찬양했다.

YS가 대통령에 취임하기 직전인 1993년 1월 당무회의를 주재하며 “차기 대통령의 윤허를 받아 회의를 주재하게 됐다”며 다시 바뀐 1인자를 깍듯하게 모셨다. YS에게 레임덕이 찾아온 1997년 JP는 “이제 눈을 감기 전에 가야 할 길이 남았다”며 대선 출마를 시사했다.

 

97년 대선 역시 DJ에게 밀렸고, JP는 공동정부를 약속받으며 국무총리에 올랐지만 총리가 실권을 갖는 내각제까지 얻어내진 못했다. JP는 증언록에서 DJ가 당시 외환위기 수습을 위해 내각제를 못할 것 같다고 말하자 자신은 “정상의 고뇌를 이해한다”며 내각제 포기를 받아들였다고 밝혔다.

 

대의를 위해 권력을 포기한 듯 보이지만 그렇지 않았다. 퇴장해야 할 때를 외면한 JP는 퇴출됐다. 자민련은 창당 첫 총선 1996년에 50석을 얻었지만 2000년 총선에서 17석으로 쇠락했다. 2004년 17대 총선에서는 정당지지율을 2.8% 밖에 얻지 못해 비례대표 1번에 이름을 올렸던 JP마저 낙선했다(지역구만 4석). 당시 13%의 지지를 얻은 진보정당인 민주노동당에게도 밀린 참패였다.

 

JP는 이 상황을 증언록에 이렇게 표현했다. “세상에 타다 남은 나무토막처럼 추한 게 없다. 아낌없이 타야 한다. 활활 타서 하얀 재가 돼야 한다. 어떤 인생도 자기를 다 태울 자격이 있다. 정치적으로 나는 완전 연소됐고 재만 남았다.” 어렸을 때 ‘일야일권(一夜一卷) 독파주의(讀破主義)’라며 밤마다 책 한 권씩 읽은 사람답게 JP의 수사는 화려했다.

JP는 “좀 더 장엄하게 정치와 이별하고 싶었다”며 “내일 또다시 떠오를 태양을 기약하며 서해의 붉은 낙조로 빨려 들어가는 햇덩어리가 되길 나는 욕망했다”고 덧붙였다. 지난달 JP눈 내년 총선에서 공주지역 출마예정인 정진석 전 새누리당 의원의 후원회장을 맡았다. 해당 지역 공주고(JP 19회 졸업생)에는 JP 흉상 건립이 추진 중이다. 그의 욕망은 식지 않은 것인가?

 

 

딸과 2인자의 오랜 갈등, JP는 박근혜를 인정하지 않았다

[김종필에게 묻는다 ⑥] 자신의 과오 덮으면서 숙적의 허물은 낱낱이 공개… JP의 라이벌 6인과 신군부

지난 3월2일부터 중앙일보는 김종필 전 국무총리의 증언록 ‘소이부답(笑而不答)’을 연재하기 시작했습니다. 증언록은 중앙일보 기자들과 작가까지 동원돼 114회까지 이어졌고, 웹툰으로 재구성됐으며 책으로도 만들어질 중요한 역사적 자료입니다. 하지만 증언록 곳곳에는 역사왜곡과 미화의 흔적이 보입니다. 미디어오늘은 이를 검증하는 차원에서 증언록의 이면을 살펴보고 중앙일보가 하지 않은 김종필의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편집자주>

 

“배신의 정치” 박근혜 대통령의 역린이다. ‘배신했다’는 것은 과거엔 한배를 탔다는 뜻이다. 한때 ‘친박’, 한때 아버지 박정희에게 충성했던 이가 돌아섰을 때 박 대통령에게 배신자로 찍힐 수 있다. 지난 10월 청와대 5자회동에서 이종걸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에게 3년이 지난 일을 꺼내며 “인상도 좋으시던데 왜 저보고 이년, 그년 그런 거냐”고 묻는 걸 보면 박 대통령은 기억력이 좋고 뒤끝은 길다.

 

박 대통령은 김종필 전 국무총리(JP)를 어떻게 생각할까? 지난 2월 JP의 부인이자 박 대통령과 사촌지간인 박영옥 여사가 척추협착증과 요도암으로 투병하다 세상을 떠났을 때 박 대통령이 빈소를 방문하고, 지난 대선 때 JP가 박근혜 당시 새누리당 대선 후보를 지지한 것을 보면 최근 3년 박정희의 2인자와 박정희의 딸 관계는 돈독해 보인다.

 

하지만 대선 이전 약 30년간 둘의 관계는 다르다. 1975년(당시 박근혜는 퍼스트레이디) 박정희와 갈등 끝에 국무총리에서 경질된 JP는 1979년 박정희가 죽을 때까지 실권을 쥐지 못했다. 10·26 이후 권력을 잡은 전두환 신군부는 유신정권의 흔적을 지워갔다. 다들 유신과 결별해야 하는 분위기였다. 1974년 8월 어머니(육영수 여사)를 잃은 박근혜와 그의 동생들은 아버지를 잃었을 뿐 아니라 ‘아버지의 사람들’도 잃었다.

 

1989년 1월 ‘여성동아’와 인터뷰에서 박근혜는 “유신 시절 책임이 막중한 자리에 앉았던 정치인 중에는 유신을 죄악시하는 요즘의 풍토 때문인지는 몰라도 ‘나는 그때 반대를 했다. 내가 그때 무슨 힘이 있어 반대할 수 있었겠느냐’고 발뺌을 하는 경우가 쉽게 보인다”며 박정희와 선을 그은 ‘박정희의 사람들’을 비판했다. 거기엔 JP도 예외일 수 없다.

 

JP는 곧 박정희의 업적을 가지고 신민주공화당을 창당하는 등 박정희 옹호자로 복귀했지만 박근혜는 개인적으로 JP에게 서운한 감정을 잊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JP는 신군부가 들어서 돌봐줄 이 없는 사촌 박근혜를 외면했다. JP는 일본·미국 등지로 돌아다니다 1986년이 돼서야 (JP에 따르면) ‘망명 아닌 망명생활’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왔다.

 

당시 박정희의 자녀들을 돌봐준 사람은 박태준(1927~2011·포항제철 창립자·국무총리 출신)이다. JP가 박정희의 킹메이커이자 2인자였던 것은 사실이지만 박정희가 정말 신뢰했던 사람은 박태준이었다. 5·16에 박태준이 가담하지 않은 이유도 혹 쿠데타에 실패했을 경우 박정희가 박태준에게 가족을 맡아달라고 부탁해서다. 쿠데타 성공직후인 1960년 7월 박태준은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박정희의 비서실장이 된다. (이대환, 대한민국의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

 

좋을 때(박정희 집권기) 함께했던 사람보다는 힘들 때(박정희 사망 이후) 외면한 사람이 더 기억에 남는다. 1987년 JP가 신민주공화당을 창당하며 참여해달라고 요청했을 때도, 1995년 자유민주연합(자민련)을 창당해 구미 지역구 총선출마를 제안했을 때도 박근혜는 응하지 않았다.

1997년 15대 대선, 둘은 완전히 갈라졌다. JP가 DJP연합으로 김대중 정부 2인자가 될 때 박근혜는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를 지지했다. 1998년 대구 달성 재·보궐선거에서 박근혜는 한나라당 후보로 당선됐다. 둘은 같은 해 11월 대정부질의에서 햇볕정책을 놓고 충돌하기도 한다. 2007년 한나라당 대선 후보를 선출하기 위한 당내 경선에서 JP는 박근혜가 아닌 이명박 후보를 지지했다.

 

박근혜가 서운해한 JP

JP가 미워한 사람은?

 

권력은 나눌 수 없다. 빼앗는 것만이 가능하다. 권력의 맛을 본 사람에게 최악의 사람은 자신의 권력을 빼앗은 자다. JP가 지난 2월 부인 박영옥 여사 빈소에서 “졸수(90세)가 되고 보니 미워할 사람이 없다”고 말했지만 그의 중앙일보 증언록 ‘소이부답’에 보면 그렇지 않다는 걸 알 수 있다.

 

지난 9월23일 중앙일보 홈페이지에 올라온 JP 증언록 영상에는 1986년 10월 박정희 대통령 7주기 행사를 앞두고 당시 국가안전기획부장(안기부장, 중앙정보부 후신) 장세동과 나눴던 대화 내용이 나온다.

 

JP는 “(86년) 10월 (박정희)대통령 7주기를 내가 당당하게 한다고 떠들었는데 나를 제일 괴롭히고 못하게 방해하는 사람이 장세동”이라고 말했다. 이어 JP는 “이 자식(장세동)이 쫓아다니면서 방해를 해”라며 장세동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회고했다. “내일이 보이느냐. 너 이러고 돌아다니는데. 내일이 안보이지? 그게 너한테 이로워. 내가 기억해두겠다.”

 

1979년 말 다음 대통령은 자신이라고 믿었던 JP가 213억원의 부정축재 재산을 뺏기고 미국으로 망명까지 간 게 신군부 때문이니 “이 자식”이라 할만하다. JP가 신군부 중에서도 구체적으로 장세동을 특정한 이유는 그가 전두환의 2인자였기 때문이다. 마키아벨리 ‘군주론’에도 “군주는 잔인하기보다는 인자하다는 평판을 받으려 한다”고 했다.

 

대신 유능한 2인자가 악역을 자처한다. JP가 4대 의혹사건이나 ‘굴욕’적인 한일협정을 주도하며 박정희의 빈 부분을 메웠던 것과 같은 이치다. 장세동은 집권 후에도 5공화국의 모든 죄악을 스스로 떠안고 옥에 간 충신이다. JP에게는 가장 미운 사람이다.

 

여자 문제가 있었던 이후락

 

중앙일보는 JP 증언록을 시작하며 지난 3월3일 “정치인의 지혜는 무엇인가. 직설보다 함축, 진격보다 우회, 단정보다 은유를 주문한 듯하다”라고 표현했다. ‘정치 9단’ JP는 직설적으로 상대를 비판하지 않으며 메시지를 전달한다. JP가 직접 비판하지 않고 타인의 입을 빌려 비판한 사람을 찾으면 그가 미워한 사람을 알 수 있다.

 

JP의 강력한 경쟁자 중 한 명은 이후락(3대 대통령비서실장, 6대 중정부장)이다. JP는 증언록에서 “머리 회전이 빨랐던 이후락은 독특한 책사형 인물이었다”면서 “육영수 여사는 이후락의 정보부장 임명을 못마땅하게 여겼는데 주일대사 시절 그의 염문설이 육 여사 귀에 들어갔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JP는 “육영수가 이후락의 여자문제에 민감했고, (이후락이) 이를 해결하기 위해 1972년 김일성을 만나는 일을 꾸몄다”고 말했다. 이후락의 사생활뿐 아니라 7·4남북공동성명을 이끈 그의 업적을 깎아내릴 소지가 있는 발언이다.

 

JP는 계속 이후락을 몰아붙였다. JP는 이후락이 ‘북괴’가 아닌 ‘북한’이라는 표현을 쓴 것이나 국가보안법 폐지를 주장한 것을 상세히 지적했다. ‘반공’을 국시로 내건 쿠데타 세력에겐 ‘기회주의적 속성’으로 비칠 행동이다. JP는 이후락에 대해 “일 꾸며 자리 지키는 데 재주가 있다”고 평가했다.

 

JP는 이후락이 몰락한 ‘윤필용 사건’을 상세히 설명했다. JP와 육사동기(8기)인 윤필용은 1972년 10월 당시 수도경비사령관 신분이었다. 윤필용은 이후락 당시 중정부장과 술자리에서 ‘박정희가 노쇠하니 물러나게 하고 후계자로 이후락을 내세워야 한다’는 말을 했다. 이 대화가 도청돼 청와대에 보고됐고 윤필용은 이 사건으로 숙청됐다.

 

JP측근들이 일본 극우인사인 고다마 요시오에게 박정희 후계자로 JP를 언급한 게 청와대로부터 도청된 사건(고마다 불충사건)을 증언록에서 언급하지 않은 것과는 대비된다. ‘윤필용 사건’으로 이후락은 박정희 눈 밖에 났다. JP에 따르면 이후락은 이 위기를 만회하기 위해 ‘김대중 납치사건’을 기획했다.

 

미국 프레이저위원회 보고서에 따르면 이후락의 아들 이동훈은 “중정의 부정이나 김대중 납치 때문이 아니라 이후락 개인 권력에 대해 대통령이 두려워해 실각됐다”라며 ‘윤필용 사건’을 언급했다. JP는 증언록에서 권력욕에 눈먼 이후락과 이를 비판하는 JP의 대결구도를 예상한 것으로 보이지만 이후락과 JP의 실상은 비슷했다.

 

JP는 “윤필용 사건 뒤 박정희의 태도가 달라졌다”며 “이후락·윤필용·하나회처럼 경계해야 할 대상은 옆에 키워놓고서 쓸데없이 나를 경계했다”고 말했다. JP는 “이후락과 같이 정말 위험한 대상은 따로 있는데 자신을 견제하는 게 박정희의 약점”이었고, 그것이 권력 종말의 시작이었다고 주장했다.

 

인간이 덜 된 ‘남산의 돈까스’ 김형욱

JP는 가장 오래 중정부장(1963년 7월~1969년 10월)을 역임한 김형욱을 소개하며 인신공격성 발언을 시작했다. JP는 “김형욱의 인간성의 여러 색깔은 골프를 칠 때 잘 나타난다”고 말했다. JP에 따르면 김형욱은 늘 내기 골프를 쳤는데 자신이 이길 것 같으면 내기 금액을 올리고 질 것 같으면 각하(박정희)가 찾는다며 도망갔다.

 

김형욱은 과격한 성격 탓에 ‘남산의 돈까스’, ‘멧돼지’ 등의 별명을 가지고 있다. JP는 김형욱의 성격을 먼저 흠집 낸 뒤 그에 대한 비판을 시작했다. JP는 김형욱이 중정부장 시절 박정희에게 잘 보이기 위해 1967년 ‘동백림(동베를린) 사건’을 조작했다고 비판했다. JP도 중정부장 시절 밀사 황태성을 간첩으로 둔갑시켜 사형시켰다는 주장이 있다.

 

JP가 김형욱을 미워하는 이유도 이후락을 미워하는 이유와 같다. 2인자 간 암투는 ‘상대가 죽어야 내가 사는 게임’이다. 김형욱은 자신의 회고록에서 박정희가 김형욱을 불러 “요새 (JP 측근) 김용태가 회장이 돼 공화당 안에 무슨 복지회라는 것을 만들고 있다는데 이건 JP를 71년 대통령 선거에 추대하기 위한 공작”이니 조사해볼 것을 지시했다고 주장했다.

 

이는 ‘국민복지회 사건’이다. 친JP계의 ‘불충’이 청와대에 보고되자 1968년 5월 친JP인사 김용태, 최영두, 송상남이 민주공화당에서 제명됐고, 당시 당 의장이었던 JP 역시 정계를 떠나야 했다. 자신을 쫓아낸 김형욱을 미워할 수밖에 없다. JP는 이후락·김형욱의 과(過)는 부각하고 공(功)은 감췄다. 하지만 이후락(1924~2009)과 김형욱(1925~1984)은 모두 세상을 떠나 이를 반박하지 못한다.

 

‘공화당 4인체제’ 리더 김성곤은 좌익출신

 

JP는 “내 인생의 여러 인연 가운데 김성곤·김형욱·이후락은 악연에 속한다”며 “셋 모두 내가 박정희 대통령에게 추천했고 한 시대를 누렸고, 그들은 나와 박 대통령 사이를 갈라놓기도 했다”고 말했다. 김성곤(1913~1975)은 JP를 견제한 ‘공화당 4인체제(4인방)’의 리더로 쌍용그룹 창업주, 민주공화당 재정위원장 등을 역임했다.

 

JP는 김성곤의 좌익 이력을 먼저 꺼냈다. JP는 “김성곤이 공화당에 합류하게 된 데는 사연이 있는데 5·16 직후 금성방직과 동양통신사를 운영하던 김성곤이 찾아와 자신의 남조선노동당(남로당) 출신 공산주의자 기록을 지워달라고 부탁했다”고 했다. 박정희, JP의 장인이자 박정희의 형인 박상희, 박상희 친구 황태성도 모두 남로당 전력이 있다.

 

JP는 “그렇게 경력에 콤플렉스를 느끼고 있는 사람을 도와주면 정말 충성을 다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며 “그래서 부탁을 들어줬다”고 말했다. 이어 JP는 “김성곤은 얼마동안 깍듯이 박정희를 모셨다”며 “공화당에서는 재정위원장을 맡아 성의를 보였다”고 덧붙였다. 국가 기록을 마음대로 지운 것을 자랑스럽게 얘기하면서까지 JP가 강조한 것은 김성곤이 ‘하자 있는’ 사람이었는데 자신이 구제해줬다는 사실이다.

 

JP가 두 차례 외유(1963년 1차 외유, 1964년 2차 외유)를 다녀온 뒤 JP는 구주류 세력이 됐다. 반면 공화당의 재정·공천·운영을 좌지우지하는 실세그룹, 신주류는 반JP세력이며 TK(대구·경북)출신이었다. 이들을 ‘공화당 4인체제’라고 불렀는데 1966년 1월 당시 김성곤은 공화당 재정위원장, 백남억은 정책위의장, 김진만은 원내총무, 길재호는 사무총장이었다.

 

JP는 이들이 “엄민영 내무부 장관을 비롯해 대구고보(경북고) 선후배를 중심으로 뭉쳤고, 박정희와 출신 지역이 비슷해 친밀도가 높았다”며 “대통령을 돕는다는 이유로, 조금이라도 치고 올라오는 인물을 누르는 데 앞장섰다”고 말했다. “기업인으로 부를 쌓은 김성곤의 재력이 이를 뒷받침하니 박정희의 마음이 서서히 거대 파벌인 TK세력이 형성됐다”고 덧붙였다.

 

공화당 4인방은 사사건건 JP를 견제했다. 1965년 국회의장단 선출을 둘러싸고 JP가 정구영을 국회의장으로 밀자 4인방은 대구출신 이효상을 지지했다. JP에 따르면 야당 의원들 정치자금까지 관리하던 김성곤의 영향력으로 국회의장은 이효상으로 선출됐다. 1968년 JP가 스포츠소년단 창설을 추진하자 4인방은 “JP가 대통령하려고 별짓을 다 한다”며 견제했다.

 

결국 5·16 성공 초기부터 2인자로 급부상한 JP는 공화당 4인방·김형욱·이후락 등 6인에게 포위됐다. 박정희는 6인이 JP를 견제하는 것에 대해 묵인했다. JP는 증언록에서 요직에 앉은 자들이 서로 경쟁·감시하게 해 박정희에게만 충성하게 만드는 ‘디바이드 앤드 룰(Divide and rule)’을 수차례 언급하며 불만을 드러냈다.

 

결국 박정희에게 서운했나?

 

한국정치문제연구소가 펴낸 ‘김종필과 이후락의 떡고물’에 따르면 3선 개헌 이후 박정희는 JP를 후계자로 생각하지 않았고, JP의 수족이 이미 잘려나가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1970년대 권력의 중심은 중정에서 청와대 경호실로 차츰 이동했고, JP는 국무회의에서조차 정치문제를 꺼내지 못했다. JP는 정치에서 소외됐다.

 

박정희 시절 총선을 앞두고 공화당은 공천명단을 청와대에 보고했다. 1978년 10대 총선에서 JP는 당 공천에서 제외될 정도로 밀려났다. 우여곡절 끝에 당선된 뒤 ‘JP 국회의장설’이 나돌기도 했지만 불발됐다.

 

1967년 ‘국민복지회’ 사건 당시를 회상하며 JP는 증언록에서 “6인방(김성곤·백남억·김진만·길재호·이후락·김형욱)의 행보로 볼 때 어느 정도는 예견했던 일”이지만 “막상 당하고 나니 나 자신에게도 염증이 났다”고 말했다. 이어 “나를 정계에서 몰아내려고 갖은 수단과 방법을 구사한 6인방과 그것을 받아들이는 박정희 대통령까지 솔직히 싫어졌다”고 덧붙였다.

 

당시 JP는 박정희에게 대들었다고 말했다. “각하, 제가 나세르입니까!” JP는 “지독한 견제와 감시에 시달려왔던 내가 참다 참다 토해낸 한 마디였다”고 말했다. 박정희는 알아듣지 못했다. JP는 박정희에게 이집트 혁명 뒤 1인자 ‘나기브’를 제치고 대통령에 오른 ‘나세르’라고 설명했다. 1인자보다 유능했던 2인자, 끝끝내 권력을 양보 받지 못했던 JP. 결국 JP가 박근혜를 외면했던 것은 박정희에 대한 서운함 때문은 아니었을까?

장슬기 기자 wit@mediatoday.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