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성왕씨 부산파

삼국시대 연호와 왕의 재위기간

아지빠 2015. 1. 3. 09:41

 

 

 

 

 

 

 

 

신라 시대 여왕들, 우리 역사 속의 진귀한 흔적

한국 역사상 전무후무한 여왕의 치세가 신라에 있었다. 삼국시대 고구려, 백제에도 없었던 여왕이 유독 신라에만 존재했다. 이것은 참으로 희한한 역사적 사건이다.

신라에는 선덕여왕, 진덕여왕, 진성여왕 세 사람의 여왕이 있었다. 당시 신라는 오늘날 우리 사회와는 전혀 다른 사회였다. 여성의 지위와 권한이 남성을 능가하는 면이 있었다. 그리고 가계가 남계, 여계 모두에 의해 계승되는 사회였다.

경주 호장 거천의 가계를 보면 그의 어미는 '아지', 할미는 '명주', 증조모는 '적리'였고 적리의 아들이 '광학 대덕', '대연 삼중'이었다. 즉 적리-명주, 광학대덕, 대연 삼중-아지-거천이란 가계도였다.

이처럼 신라의 가계도는 오늘날 우리 부계에 의한 가계도와 근본적으로 달랐다. 신라 왕릉 중에서 허물어진 서봉롱, 대릉의 발굴 조사 결과, 부부합장의 표주박꼴 쌍릉이었다. 그리고 큰 무덤이 예상외로 여성의 무덤이었고 쌍무덤의 작은 무

덤이 남성의 것이었다. 그 부장품의 여성 쪽이 월등히 호화찬란했다. 이것은 신라 여인의 위상을 말해주는 것이다. 이와 같이 여성의 높은 사회적 지위 속에서 여왕 탄생이 가능했던 것이다.

신라 상고를 통치한 임금은 샤만적인 군왕이었다. 신라는 제사장격인 매금왕과 정치적인 갈문왕이 통치하는 이원제였다고 추정된다. 류큐·왜도 이원제 왕권이었다. 여기서 여왕은 제사장이었고 남왕은 정치를 담당했다. 이와 같은 이원제 왕권이어야 대릉이나 서봉릉의 여성 피장자를 설명할 수 있다. 대릉이나 서봉릉의 여주인공은 일반적인 상식으로는 왕비로 추정되나 어쩌면 여왕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현 사서에 기록되지 않았던 또 다른 여왕이 신라에 존재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하겠다.

실제 샤만적인 제사장 왕인 매금 '간우데 왕'이 존재했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삼국사기' 제사지에 의하면 신라 시조왕의 종묘에 왕의 누이(이때 누이는 당시 왕비, 부인의 뜻으로 쓰였다) '아로'로 하여금 제사를 받드는 제사장으로 했다는 기록은 매우 주목된다.

선덕여왕

현존하는 사서에 최초로 등장하는 선덕여왕은 진평왕의 맏딸로 632년에 즉위했다. 화백회의에서 추대한 선덕여왕의 이름은 덕만이었고 즉위해서는 선덕이라 했다. 그래서 선덕여왕이라 칭하게 됐고 왕이 붕어한 후에도 이 이름을 가지고 시

호로 올렸다.

여왕의 아버지인 진평왕 대에 진평왕가를 성골이라 칭하게 됐다. 성골이란 부처의 가족이라는 신성개념이었다. 진평왕은 이름이 '백정'인데, 이것은 석가모니의 아버지 이름으로 '정반왕'이라고도 한다. 진평왕비의 이름을 마야 부인이라고 했으니 이것은 석가모니 어머니의 이름인 것이다.

그 두 부모의 사이에서 탄생한 선덕여왕은 부처인 것이다. 신라인은 여왕에게 성조황고라는 최고의 신성한 칭호를 올렸다. 그 뜻은 성스런 부처님같은 여왕이란 뜻이다.

'선덕'이라는 이름은 불경에 나오는 유명한 바라문의 이름이다. 성불하기를 서원하고 도리천을 다스리는 제왕이 돼 전륜성왕이 누린 위복을 거이 누린다는 이상과 서원을 딴 것이다.

여왕은 신라 제일의 호불 제왕으로 당신의 증조부 진황왕과 병칭될 정도이다. 선덕여왕은 황룡사 9층탑을 세워 삼국 통일을 기원하고 진흥왕이 창건한 황룡사를 완성했다. 그리고 영묘사, 분황사, 통도사 등 많은 사찰을 창건했다.

여왕은 세 가지 사실을 예견했다는 것으로 유명하다. 여근곡에 침입한 백제군을 남녀의 성행위를 들어 격퇴할 것을 예견하고 당나라에서 모란꽃씨를 보냈을 때 이 꽃이 향기가 없어 나비와 벌이 오지 않을 것을 알아 맞췄다. 또 자신의 능 아래 사천왕사가 창건될 것을 알아 자신을 도리천(남산)에 묻어달라 유언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모두 사실과 먼 것으로 드러났다.

여왕 16년에 상대등 비담이 국난타개의 기치를 들고 여왕을 폐하는 반란을 일으키고 여왕은 이 난 중에 붕어했다. 아마도 시해당한 것으로 여겨진다. 반란의 원인은 여왕의 과도한 사원 창건과 부교 행사로 인한 국력의 소모와 당나라의 여왕체제에 대한 거부감, 정군 권위의 취약성, 여왕 건강의 병약함이다.

신라의 전통 귀족회의(화백회의)는 여왕의 폐위를 선언했다. 이 시기는 고구려, 백제 연합군(나제 동맹군)의 침공으로 신라는 국운이 바람 앞의 등불과 같은 시기였다.

 

진덕여왕

 

지방 세력을 장악한 왕당파 김유신과 김춘추 세력이 제휴해 비담의 난을 무력으로 진압하고 647년 선덕여왕의 사촌동생인 승만 공주를 국왕으로 추대하니, 이분이 진덕 여왕이다. 여제 동맹군의 맹열한 침공으로 국가 멸망의 위기에 처하자 병마대권을 김유신에게, 정치외교권을 김춘구에게 맡겨 국난을 타개해갔고 당나라와 군사동맹을 맺어 여동맹에 대항했다.

 

진덕여왕은 당나라 고조황제 태평송 오언시를 지어 비단에 짜서 보낸 것으로 유명하다. 그러나 여왕은 재위 8년만에 붕어하고 김춘추가 무열왕으로 즉위했다. 진덕여왕 시대는 중대 유교적 왕도 정치의 무열왕 시대로 이행하는 과도기적 성격이었다. 불교왕 시대, 즉 성골 시대의 막을 내리는 시기였다.

 

진성여왕

 

경문왕의 태자 헌강왕의 치세는 신라 최고의 호사와 향략이 극에 달하게 했다. 왕이 재위 12년에 붕어하니 경문왕의 둘째아들 정강왕이 즉위하나 겨우 일년만에 붕어한다. 그후 정강왕의 누이도 북궁장공주 만이 887년에 즉위하니 이 분이 진성여왕이다.

진성여왕이 즉위하기 전부터 혹심한 한발이 전국을 휩쓸었고 신라의 전성기를 지나 제반적인 모순이 이때 와서 드러나 신라는 쇠망의 기로에 접어들게 됐다. 게다가 여왕은 즉위한지 2년만에 그렇게 사랑하고 의지하던 부군인 숙부 각간(수상) 위홍이 죽자 너무도 슬퍼한 나머지 정사에 의욕을 읽고 공허한 가슴을 달래기 위해 미소년 2, 3인을 애인으로 두고 음란한 생활을 했다. 또 그녀의 사치가 극에 달해 신라의 정치와 기강이 붕괴됐다.

극심한 흉년과 민생의 도탄에 빠진 백성은 각지에 반란을 일으켜 전국이 전란과 살육과 약탈의 소용돌이에 휩싸이게 됐다. 당시의 신라 정국은 당나라에 돌아온 신진 엘리트 최치원의 노력으로도 이 정국을 돌이킬 수 없었다.

전국은 양길, 견훤, 궁예 등 군웅의 할거 시대로 돌입하게 됐다.

재위 11년만에 조카인 효공왕에게 양위하고 부군인 위홍(혜성대왕이라 시호를 올림)의 명복을 비는 원당사찰을 세워 그의 명복을 조석으로 빌다가 죽은 순정의 여인이었다.

혜성대왕 위홍은 허물어진 황룡사 9층 목탑을 복원 중수하고 유명한 신라의 가요대전인 삼대목을 편집한다.

신라 600년의 역사시대에 있어 여왕이 즉위할 때는 국가가 멸망의 위기에 처해 있을때다. 이 국난을 타개하기 위해 신라인은 샤만적인 영능을 소유한 여왕에 구국을 기대한 것이 그 특징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그와 같은 국민의 염원은 모두 허망한 수포로 돌아갔고 여왕의 치세의 종말은 비극적이었다. 그러나 선덕여왕은 황룡사 9층탑이라는 신라 제일의 국보를 남겼고 진덕여왕은 나당동맹을 결성해 통일의 기초를 다졌다. 또 진성여왕은 신라 상·중·하대의 전 향가를 집대성한 민족 문화사상 빛나는 금자탑인 '삼대목'을 남겼다. 그러나 탑이나 책이 오늘날에 전해지지 못하고 있는 것은 후손이 못난 탓이요, 천추의 유한이 아닐 수 없다.

 

 

 삼국시대의 연호와 재위기간을 올립니다 참고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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