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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도연맹원 대학살( 부산.울산 경남 대전 산내)

아지빠 2014. 8. 4. 09:14

 

 

 

 

[보도연맹원 대학살] ①진상규명 재시도 왜 하나 반세기 지난 악몽 마지막 '치유'기회

6.25 발발 직후 발생한 국민보도연맹원 학살사건은 세계사에 보기드문 대학살극이었음에도 우리는 그동안 이를 땅속에 묻어 두고 살아왔다.'전쟁중이었으니 그럴 수도 있지 않느냐'는 방관자적 시각과 '반세기나 지난 지금에 와서 뭘 할 수 있겠느냐'는 자포자기 심정,게다가 '문제를 끄집어냈다 또 어떤 변을 당할지 모른다'는 과거 이데올로기 망령에 사로잡혀 우리는 맹목적으로 이를감추려고만 해왔다.본보는 이미 1960년 4.19 직후 이 사건과 관련,당시 국회조사와는 별도로 경남지역 학살현장을 샅샅이 뒤지며 진상규명을 시도한 적이 있다.보도연맹의 조직에서부터 학살에 이르기까지의 전 과정을 철저히 분석하고 관련 증언과 문건 등을 통해 진상을 밝히고자 한다.

'반세기나 지난 지금 이 문제를 들추어 내려는 이유가 뭡니까?'

이는 1950년 7~8월 부산.경남지역을 중심으로 자행된 국민보도연맹원 대학살의 진상규명을 위해 노력하는 유족과 시민.사회단체 등이 듣게 되는 가장 보편적인 질문이다.

이에 대한 답변은 이렇다.

'보도연맹 가입자가 33만명이었고,정부가 조직적으로 학살을 자행했으니 일부에서는 그 희생자수가 30만명에 달할 것으로 추산합니다.비록 50여년이란 세월이 흘렀지만 아직도 수많은 유족이 악몽에 시달리고 있습니다.또 당장 부산만 하더라도,지난 8일 유골이 대량 발견된 사하구 구평동 동매산 기슭을 비롯해 영도구 동삼동 미니공원,중구 영주동 부산터널 위,회동수원지 등에 엄청난 수의 피학살자 유골이 아직도 그대로 묻혀 있지 않습니까.'

반드시 다음과 같은 질문이 이어진다.

'그래서,반세기나 지난 지금에 와서 뭘 하자고.책임자를 찾아내 목이라도 매달자 이겁니까? 대부분 죽었잖아요!'

'누구에 대한 처벌을 요구하는 게 결코 아닙니다.아무런 범죄도 저지르지 않았는데,단순히 북한군에게 동조할 '우려'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진위여부를 가릴 어떠한 조사나 재판절차 없이 무참히 죽임을 당한 게 너무 억울하지 않습니까.

또 수년전까지만 해도 연좌제에 묶여 유족이 얼마나 큰 고통을 받아야 했습니까.혈육의 유골을 수습하고 제삿날이나 제대로 알수 있게 해달라는 것 뿐 입니다.

'1960년에 이어 최근 40년여만에 재개된 국민보도연맹원 대학살의 진상규명을 위한 노력이 유족을 비롯해 학계,시민사회단체 등을 중심으로 전국적으로 전개되고 있다..

우선 유족회의 경우 지난해 6월 본보 보도 이후 결성된 '부산.경남 6.25 양민피학살유족회'(회장 송철순.69)를 비롯해 문경과 경산 등 전국에서 30여개의 유족회가 결성되어 있다.

그중에서도 부산.경남유족회는 국민보도연맹 학살의 가장 큰 피해지역인 부산과 경남 밀양,하동,진영,진주,그리고 경북 경산 등지를 돌며 학살현장을 확인하고 증언을 청취하는 등 진상규명을 위한 활동을 꾸준히 펼치고 있다.

민주주의민족통일 부산연합,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새물결청년회 등이 부산.경남유족회의 이같은 활동을 돕고 있으며,참여단체수도 계속 늘어 날 전망이다.

특히 유족회의 결집체격인 '민간인학살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한 범국민위원회(공동대표 강정구 동국대교수 등 3인.이하 범국민위)'가 지난해 9월 결성돼 체계적이고 조직적인 진상규명 활동을 펼치고 있다.

범국민위는 보도연맹 학살을 비롯한 양민학살 전반에 걸친 철저한 진상조사를 요구하는 국회청원을 이미 지난 1월 19일 국회에 제출했다.늦어도 오는 6월까지 특별법 제정을 위한 법률안을 마련할 계획이다.

또 유엔인권위원회나 국제전범재판소 등에 정부를 상대로 제소하는 방안도 적극 검토하고 있다.

아울러 경북도의회 등 일부 지방의회들도 자체적으로 진상조사 특별위원회를 구성,잇달아 보고서를 내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5.16 세력을 비롯한 과거 군사독재정권이 진상규명에 없어서는 안될 정부기록들을 남김없이 모두 파기해 버린 것으로 드러나 진상조사 활동은 상당한 어려움을 겪고 있다.

게다가 국민의 정부라 자칭하는 현 정권마저 유족과 시민.사회단체의 이같은 노력을 외면,상황을 더욱 어렵게 하고 있다.

'시간적 여유가 없습니다.죽음의 문턱에서 가까스로 목숨을 건진 과거 연맹원과 학살을 목격한 증인,그리고 학살에 직.간접적으로 개입한 학살 당사자가 모두 70~80대 고령에 이르렀습니다.따라서 이번 진상조사 활동은 이 학살극의 전말을 밝힐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합니다.'

보도연맹 학살로 아버지를 잃고 진상규명을 요구하며 호주상속을 거부하고 있는 부산.경남유족회 송철순 회장의 말이다.

보도연맹원 대학살] ② '조직' 어떻게 만들어졌나'이승만 정권' 사상범 통제 수단

 

집단학살이라는 참극을 불러온 국민보도연맹이 창립된 것은 6.25가 터지기 1년전인 1949년 6월 5일이었다.중앙본부 결성식이 이날 있었다.

조직결성의 대외적 명목은 '개선의 여지가 있는 좌익세력에 기회를 준다'는 것이었고 그래서 단체 이름도 '올바른 길로 이끈다'는 뜻의 보도(保導)연맹으로 지었다.하지만 정권유지를 위한 사상범 통제에 목적이 있었음은 물론이다.

정부는 연맹에 가입하는 전향 좌익에 대해선 과거를 묻지 않는 것은 물론 생활지원까지 한다고 선전했는데 이는 기존의 좌익 뿐아니라 그 잠재세력까지 밖으로 끌어내 통제 아래 두겠다는 전략이었다.즉 '탄압'만으로는 좌익척결에 한계를 느낀 이승만 정권이 보다 고차원의 수단을 동원한 것이다.

국회 속기록과 당시 보도등에 따르면 조직결성에는 김효석 당시 내무부장관과 권승렬 법무부장관,신성모 국방부장관,김익진 검찰총장,김준연 국회의원,오제도 검사 등이 주도적 역할을 했다.중앙본부 총재는 내무장관이었고,법무,국방 등 장관들이 고문을,검찰과 경찰이 지도위원장과 하부 지방조직의 지도위원 등을 맡았다.

그러나 보도연맹은 이승만 정권의 순수한 창작품은 아니었다.

'1937년 일제는 한국에 사상보호단체인 대화숙(大和塾)을 설치,사상범을 무조건 가입시켰고 이듬해 '사상보국연맹'이란 기구를 만들었습니다.곧이어 중앙조직으로 조선방공협회를 조직해 각 도에 방공협회를,그 아래에 지부를 두고 사상범을 통제했습니다.사상범 통제였지만 독립운동의 싹을 자르겠다는 목적이 있었죠.국민보도연맹도 이의 모방으로 볼 수 있습니다.' 성균관대 사학과 서중석교수의 설명이다.

즉 일제가 독립운동을 탄압하기 위해 동원한 수단을 이승만 정권이 정권유지를 위해 그대로 모방했다는 말이다.

중앙본부에는 총재 이하 실질적으로 조직관리를 맡았던 운영협의회와 사무총국 그리고 선전공작을 담당하는 문화실 등(도표 참조)이 있었다.

조직은 전국적으로 이뤄졌다.그리고 6.25가 일어날 때까지 조직확대 작업은 계속됐다.중앙본부 이하 하부조직의 결성은 서울시연맹이 가장 빨라 1949년 9월에 만들어졌고 이후 내무부와 법무부,대한청년단 등의 주도로 도.시.군.읍.면 단위의 지부가 조직됐다.경기도 수원시연맹이 11월 10일,강원도연맹이 같은달 14일,춘천시연맹이 12월 3일 등이다.

부산,경남의 경우 1949년 11월 13일 부산 검찰청회의실에서 당시 서정국 검사장과 김동현 법원장,정종철 부산시장,최철용 경남도경찰국장,지역 유지 등 2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국민보도연맹 경남도본부(당시 부산은 경상남도에 포함돼 있었다) 발기대회가 있었다.그로부터 일주일 뒤인 11월 20일 부산 중구 대청동 옛 남일초등학교에서 선포대회가 열렸다.

경찰악대의 연주속에 800명의 보도연맹원 등 2천여명이 참석,대성황을 이룬 이날 선포대회에서는 보도연맹 중앙본부 지방조직 책임자 이용록씨 등 연맹의 중앙간부들도 상당수 참석했다.

해방 후 인민위원회 등에서 활동한 노백용씨가 도연맹 간사장을,강대홍 성낙명 임순야 권일초 김필난씨 등 35명이 주요 조직책을 맡았다.도연맹 명예이사장은 최 경남도경찰국장,이사장은 신영주 경남도경 사찰과장이었다.

도연맹 결성과 함께 하부조직이 구성됐는데,통영군 지부는 같은해 11월 10일,마산시지부는 12월 7일,동래군과 함안군지부는 12월 12일,밀양군지부는 12월14일 등이다.또 부산시의 경우 부산남지구와 북부산지구가 12월24일,영도지구는 12월 24일 결성됐다.부산시내의 구별 하부조직은 해당 경찰서 사찰계장이 책임자였다.

'간사장'이라는 연맹원 대표 자리에는 전향한 좌익을 앉혔는데 그들 모두는 검.경과 밀접한 관계에 있던 인물들이었다.예를 들어,'부산남지구 간사장 김일립 씨의 경우 평소 사찰계 직원들과 함께 여행을 다닐 정도로 아주 친밀한 사이였다'고 당시 이를 지켜본 전직 경찰관 B씨는 증언하고 있다.

그러나 정부가 의도했던 만큼 조직확대는 쉽지 않았다.연맹가입은 좌익으로 낙인찍히는 일인데 자진해 가입 도장을 찍을 사람이 없었다.실제 좌익들은 자신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무조건 가입됐고 가입을 거부하면 폭행과 고문이 가해졌다.

그래도 여의치 않자,정부는 마침내 읍.면.동 등 일선 행정기관에 인원수를 할당했다.할당된 인원을 채우기 위해 경찰과 행정기관들은 주민을 상대로 회유와 협박을 일삼았고,비료와 밀가루 등 배급을 미끼로 가입을 유도했다.이로 인해 좌익과는 전혀 무관한 농민 등이 대거 가입됐는데,연맹원 대다수는 결국 이런 사람들이었다.경남 양산 석산리의 경우 평범한 시골마을에 불과했지만 전체 세대수의 3분1 이상이 가입됐다.

변칙가입은 당시 국회에서도 문제로 지적됐다.1950년 2월11일 제11차 국회 본회의에서 민주국민당 민경식 의원 등은 장경근 내무부차관을 상대로 '가입종용을 넘어 협박까지 일삼으니 좌.우익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사람들까지 강제로 가입되고 있다'면서 이는 보도연맹 결성취지에 맞지 않다고 따졌다.

정확한 연맹원수는 과거 정권이 관련 기록을 남김없이 파기해 버려 지금으로선 파악하기 힘든 상황이다.그러나 경남도연맹 선포대회 때 800여명이나 참석했고 6.25 직전까지 대대적인 공작이 이뤄진 사실을 감안하면 부산.경남지역에만 수만명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학계는 당시 검사였던 선우종원씨의 주장과 일부 언론보도 등을 근거로 1950년 6월까지 전국에서 33만명(그중 2만명이 서울)이 가입한 것으로 추산한다.

[보도연맹원 대학살] ③ 왜 … 얼마나 죽였나부산만 사망자 1천200여명 확인

 

국민보도연맹 학살사건을 이야기 할때 가장 먼저 갖게 되는 2가지 의문이 있다.'왜 죽였을까'이고,'도대체 얼마나 죽였느냐'하는 것이다.

우선 전자에 대한 '민간인학살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한 범국민위원회' 강정구 공동대표(동국대 교수)의 설명이다.

'이승만 정권은 기본적으로 정통성이 없는 정권이었습니다.그래서 민중의 지지를 받지 못했고,반면 민중은 통일을 지향하고 있었습니다.그래서 비록 전쟁에 의한 통일이라 할지라도 민중이 그것을 수용할 가능성이 높은 게 전쟁초기의 상황이었습니다.또한 민중은 친일파와 친일경찰에 의해 일본 식민지 시절 못지 않게 고통과 탄압을 받아 왔습니다.따라서 언제든지 반(反)정권으로 전향할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이승만 정권이 보도연맹원을 반정권의 선봉에 설 것으로 여겼던 게 분명합니다.'

그는 '태생적으로 민중지향이 아닌 경찰국가였던 이승만 정부가 학살을 저지른 것은 결국 예정됐던 일'이라고 지적한다.

상황증거를 놓고 학살이유에 대해 좀더 구체적으로 접근하면 이렇다.

우선 시기적으로,보도연맹원에 대한 학살은 전선이 걷잡을 수 없이 후방으로 밀리던 1950년 7월 집중적으로 이뤄졌다.또 극히 일부이긴 하지만,연맹원중에는 보도연맹이라는 조직을 신분은닉의 수단으로 이용한 경우가 있었고 그들은 실제로 북한군 점령지역에서 우익척결 등에 앞장섰던 것으로 대검찰청이 발간한 좌익사건실록(1965)이나 증언 등에서 확인되고 있다.따라서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해 있던 이승만 정권이 다급한 나머지 '집단학살'이라는 극한 수단을 동원했을 것이라는 분석이 가능하다.

또 하나,서울을 떠난 뒤 임시수도를 어디로 할 것이냐를 놓고 고민하던 이승만 정권이 사전준비작업의 일환으로,이 지역 보도연맹원들을 학살했을 것이라는 일부 주장도 이와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실제로 후보지였던 제주와 부산에서는 비슷한 시기에 각각 '예비검속'에 의한 학살과 보도연맹원 학살이 있었다.예비검속이란 범죄우려가 있는 사람을 사전에 검거,조치(예방학살)를 취함으로써 사건발생을 미연에 방지하겠다는 제도로,그 성격이나 운영형태에서 보도연맹과 거의 동일하다.

두번째 의문,이승만 정권은 도대체 얼마나 많은 보도연맹원을 죽인 것일까?

사실 이는 가장 어려운 문제 중 하나다.물론 그 이유는 과거정권이 사건은폐를 위해 관련자료를 모두 없애 버렸기 때문이다.따라서 재야와 일부 학계에서는 미처 학살할 시간적 여유가 없었던 서울(연맹원수 1만9천800명)을 제외하면 전국에 30만명 가량의 연맹원이 있었는데,상당수가 학살을 모면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이는 당시 군과 경찰이 교육,공동작업 등이 있다고 속여 연맹원들을 일정한 장소에 소집한 뒤 그 모두를 연행,형무소(마산)나 경찰서(부산 동래) 혹은 창고(김해) 등에 며칠씩 가두어 뒀다가 산이나 바다로 끌고가 학살했다는 공통적 사실을 근거로 한다.

부산지역의 피학살자 수는 수천명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우선 본보가 지난해 6월이후 최근까지 유골발굴과 목격자 증언을 통해 사하구 구평동 동매산 자락 160여명,영도구 동삼동 300여명 등을 확인한 바 있다.

또 동래(사건 당시엔 경상남도 동래군)에선 현 부산.경남 피학살자 유족회 회장인 송철순씨가 1960년 동래유족회 대표로 회동수원지 인근 등에서 763명의 유골을 찾아냈다.그러나 가장 피해규모가 컸을 것으로 추정되는 오륙도 앞바다와 다대포 앞바다 수장사건은 아직까지 그 피해규모가 전혀 파악되지 않고 있으며,중구 영주동 부산터널위 야산과 철마입구,부산과 울산의 경계에 위치한 좌천고개 등에 묻혀 있는 피학살자수도 확인되지 않은 상태다.

여기다 북구 화명동쪽 금정산 자락 등지에도 상당수 보도연맹원이 학살,암매장됐다는 주장이 있고 부산형무소 학살사건도 미확인 상태니,결국 전체 피해규모는 확인된 1천200여명과 미확인자까지 포함할 경우 '수천명'이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경남지역은 이보다 훨씬 많아 1만여명에 이를 것으로 추산된다.우선 본보는 경남 김해시 대동면 주동광산과 인근 숯굴에서 400여명,양산에서 350여명,밀양 300여명,하동(매티재) 150여명이 학살된 사실을 확인한 바 있다.

지난해 9월 결성된 '민간인학살문제 해결을 위한 경남지역 모임'(대표 서봉석 산청군의회 의원)은 현지답사 등을 통해 마산 1천600여명,통영 800여명,거제 730명,김해와 창원 일부지역 750명,울산 869명,김해시 진영군 335명,진주시 명석면 200여명을 확인했다고 밝히고 있다.이외에도 함안과 창녕,삼랑진 등에서 각각 200여명이며,진양군 금산면과 사천이 각각 100여명 등이다.

 

거창,고성,함양,의령 등 다른 지역에서도 연맹원 학살이 있었지만 아직 조사를 하지 못한 상태다.

피학살자 수를 확인해 줄 정부기록은 없다.1960년 국회조사단이 다녀간 뒤 각 지방 유족들이 국회사무처에 제출한 입증자료도 전혀 남아있지 않다.

다만 본보가 단독입수한 1960년 국회진상조사특위의 '증언청취 속기록'에는 유족과 헌병대 문관 등 학살 관련자 발언중 학살규모에 대한 언급이 수차례 등장하는데,그 수치에 상당한 차이가 있다.

이는 속기록에도 명시돼 있듯,조사단이 도착하기 직전에야 현지에 조사일정이 통보돼 자료를 준비할 시간적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다.속기록에 의하면 마산의 경우 유족측 대표 김용국씨가 피학살자 수가 1천681명이라고 구두보고하면서도 명단은 250명의 것 밖에 제출하지 못한 것으로 되어 있다.부산은 국회조사단 자체에 대한 불신으로 조사에 불응,속기록 자체가 없다.

추후 공식 자료제출을 전제로 당시 각 지역이 보고한 피학살자수를 보면 울산 500여명,마산 250명,통영 200여명,진영 120여명 등이다.

보도연맹원 대학살] ④ 부산 동매산 암매장좌-우익 모른채 '총탄세례' 받아

최근 본보가 유골을 발굴한 부산 사하구 구평동 동매산에는 아직 확인안된 보도연맹원 집단 학살지 2곳이 그대로 방치되어 있다.동매산에서 학살된 전체 피해자수는 최소 160여명에 이를 것으로 추산된다.1950년 7~8월사이 자행된 이곳의 학살은 현지 주민에 의해 생생히 목격됐다.일제로부터 해방되던 해인 1945년 음력 2월23일 경남 의령에서 이곳으로 이사온 뒤 줄곧 살아왔다는 이모(73)씨도 그중 한 사람.'2개월여에 걸쳐 많은 사람들이 죽었습니다.내가 직접 본 것만 대여섯 차례인데 한번에 많게는 60여명까지 줄에 두손을 묶인채 끌려와 학살을 당했습니다.'이씨가 최초 목격한 것은 암매장된 시신들이었다고 한다.시신 8구를 내가 농사짓던 밭에 묻었는데 죽이는 것은 보질 못했습니다.당시 비가 많이 내린 뒤라 땅이 흠뻑 젖어 있었기 때문에 시신이 끌린 자국이 선명했지요.'그러나 이 시신들은 오래 가지 못했다.산에서 짐승들이 내려와 파헤쳤고,동네 개들까지 올라가 시신을 뜯어먹는 통에 훼손되고 말았던 것.

현장에서는 고무신 등 신발이 눈에 띄었고,짐승이 살을 뜯어먹어 주위가 벌겋게 물들어 있었다고 한다.

 

이 사건이 있은후 얼마되지 않아 이번에는 8명이 끌려왔는데 이들은 일본도에 의해 목이 잘려 처형당했다.

'군·경은 연맹원들을 끌고오기 전에 나무 말뚝을 먼저 세웠어요.그리곤 그 말뚝에 양손을 뒤로 묶은 뒤 일본도로 차례로 목을 내리 치더군요.'

학살은 계속 이어졌다.미군 GMC 트럭으로 40여명을 싣고 오더니 차는 구평동과 감천동 경계지점에 세워놓고 연맹원들을 끌어 내린 뒤 구평동쪽으로 산을 넘어왔다.산을 넘었다고는 하지만 학살 현장과는 1㎞도 채 떨어지지 않았다.

타원형 구덩이 위에 가로로 나무가 몇개 걸쳐졌다.그리곤 손을 뒤로 묶인채 4열종대로 앉아 대기중이던 연맹원들이 앞에 앉은 사람부터 차례로 끌려 나와 나무 위에 않혀졌다.구덩이가 깊어 발끝이 땅에 닿지 않았다.

그리곤 학살이 시작됐다.간부로 보이는 한 군인이 호각을 불면 카빈 소총을 들고 구덩이 옆에 서 있던 군인들이 그들의 등 뒤에서 방아쇠를 당겼다.군인 여럿이 동시에 총을 쏘았기 때문에 여러발의 총탄이 몸에 박혔다.

연맹원들은 총탄의 충격에 앞으로 고꾸라져 구덩이속으로 떨어졌다.줄지어 앉은채 자신의 순서를 기다리던 연맹원들은 공포에 질려 몸을 떨었다고 한다.

이곳에서 학살당한 보도연맹원 중에는 최소 4명의 여성이 있었다고 이씨는 증언한다.군경은 연맹원을 죽이기 전에 '하고싶은 말이 있느냐'고 물었는데 그때 연맹원들의 반응은 크게 2가지로 대별됐다.

이씨의 표현에 따르면,소위 '빨간물'이 약간이라도 든 사람은 '인민공화국 만세'를 외치거나 군인들을 향해 욕설을 퍼부었다고 한다.또 학살에 대한 항의표시로 총을 쏘기 전에 먼저 자진해 구덩이로 뛰어든 사람도 있었는데 그들에겐 집중사격이 가해졌다.

그러나 좌.우익이 뭔지도 모르고 도장을 찍었다가 이곳까지 끌려온 사람들은 '반장이 찍어라고 해서 도장찍은 것 뿐인데 왜 내가 죽어야 하느냐'고 소리쳤고 '대한민국 만세'를 외친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특히 한 여성은 '빨리죽여라'고 군인들을 향해 욕설을 퍼부었고 이에 군인들도 흥분해 욕설을 하며 그 여성의 하복부를 향해 집중사격을 가하는 일이 벌어졌다.

그 여성은 무차별 총탄세례로 하반신이 갈기갈기 찢겨져 참혹하게 죽임을 당했다고 이씨는 증언했다.

구덩이를 파고 시신을 묻는 작업은 주민들에게 맡겨졌는데,당시 성포에 16가구 뿐이었던 때라 길가던 행인들을 잡아다 이 일을 시켰다고 한다.

군인들은 학살현장에 대한 접근을 철저히 통제했으나 이씨는 100여m떨어진 맞은편 언덕에서 학살 장면을 모두 볼 수 있었다고 한다.

학살이 있은 뒤 얼마되지 않아 마을엔 썩는 냄새가 진동하기 시작했다.

'피가 벌건 척추뼈가 나뒹굴었는데 이게 냄새가 아주 심했어요.그대로 사람들은 무서워서 접근할 엄두조차 내질 못했습니다.해가 떨어지면 아예 문밖 출입을 못할 정도였지.'

그러던중 어느날 넝마주이 한명이 유골을 주워담는 모습이 이씨에게 목격됐다.

'강구쟁이(넝마주이의 사투리)가 풀을 슬슬 헤치며 뼈를 주워서는 등에 진 바구니에 집어 담지 뭐예요.

근데 당시 강구쟁이들은 사람들에게 패악 부리는 일이 많아 어떻게 할 수가 없었어요.하는 수 없이 언덕위로 올라가 돌맹이를 주워 집어던졌죠.'사람뼈를 뭐하러 가져가!' 하고 고함을 쳤더니 그놈 말이 '아 빨갱이뼈 팔아먹는데 어때서 지랄이야!' 하더군요.

당시에는 소나 돼지 등 가축뼈에서 기름을 뽑아 비누재료로 쓰곤 했는데 아마 비누공장에 갖다 팔려고 했나봅니다.

이씨는 '이런 이유 등으로 일부 유골이 없어지긴 했으나 지금도 땅속엔 엄청난 수의 유골이 그대로 묻혀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보도연맹원 대학살]⑤ 양산 할머니의 50년 '망부가'

그때가 7~8월께였다.

삽을 들고 문을 나선 남편 김모(당시 34세)씨는 그 길로 경찰에 붙잡혀 읍내 목화창고에 며칠간 갇혀 있다 학살을 당하고 말았다.

'아침마다 밥을 싸들고 목화창고를 찾아 갔는데,어쩌다 하루를 빼먹고 다음날 갔더니 창고가 텅 비어 있는 게 아니겠어요.

총을 메고 창고를 지키던 경찰까지 한 명도 보이질 않았습니다.날짜를 정확히 기억은 못하겠는데 마침 장날이었습니다.'

유씨는 남편이 왜 죽어야 했는지 지금도 그 이유를 모르겠다고 말한다.

'목화창고에 끌려가기 전 경찰서에 불려가 조사를 받은 적이 있어요.

누가 뭐라 모함했는지는 몰라도 영문도 모른 채 불려갔지요.그런데 금방 풀려나기에 아무 일도 없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남편 김씨는 논 10마지기를 일구며 살던 그저 평범한 농부였다.

그런데 보도연맹에 가입하면 신분보장이 된다고 선전하는 당시 양산 경찰서장의 말만 믿고 도장을 찍었던 게 화근이었다.

김씨에게는 남동생이 셋 있었는데,그들은 가입비를 마련못해 연맹에 가입하지 못한 터였다.

유씨는 남편의 가입 사실을 모르고 있다가 시동생을 통해 뒤늦게 알았지만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심지어 남편이 목화창고에 갇혀 있는 동안에도 보도연맹 가입 때문에 죽을 것이라곤 상상조차 못했다고 한다.

그러나 목화창고에 갇힌 사람들이 처형될 것이라는 소문이 났고,돈 많은 사람들은 뇌물을 주고 하나,둘 빠져나오기 시작했다.유씨는 남편 문제를 상의하기 위해 시댁을 찾아갔다.하지만 시댁에서도 설마했던지 뇌물을 주고 빼내는 것은 달갑지 않게 여겼다.

한번은 창고에 갇힌 사람들의 찬거리를 구하러 장터에 나온 남편에게 '이러지 말고 도망치세요' 했다가 '아무 죄도 없는 내가 왜 도망을 가'라며 되레 야단치는 남편을 보고 아무일 없을 거라 생각했단다.

'그런데 죽기 이틀전 찾아 갔을때 평소와는 달리 그만 오라고 고함을 쳐댔어요.

지금 생각하면 그때 아마 죽음을 예견하고 있었던 모양이예요.'

남편이 죽기 전날 마침내 시댁에서도 심상치 않다는 느낌이 들었던지 소를 팔아 남편을 빼내자는 말이 나왔었다.

김씨를 포함 보도연맹원 350여명이 학살됐고 유가족의 통곡소리가 양산 읍내를 뒤덮었다.

인근 사배골짜기에서 학살당했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누구 하나 그곳에 가보려 하질 않았다.

빨갱이로 몰리면 죽음을 면치 못한다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유씨도 남편 시신을 지척에 두고 어떻게 손써 볼 도리가 없었다고 한다.

그는 심적 충격으로 정신착란 증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눈을 떠보면 엉뚱한 곳에 와 있고,주변 사람들에게 헛소리를 하고…극단적인 생각을 한게 한두번이 아니었어요.'

그러나 이제 갓 8개월된 딸을 굶겨 죽이지 않기 위해서라도 열심히 농사를 지어야 했다.

학살 10년만인 1960년 4.19가 터지고 마을 주민들과 함께 사배골짜기를 찾아가 유골을 발굴했을 때 그는 다시 한번 치유될 수 없는 큰 상처를 받고 말았다.

'깊이 묻혀 있지도 않았어요.손으로 흙을 슬슬 헤치자 유골이 쏟아져 나왔으니까.

얼마나 죽였던지 유골이 겹겹이 쌓여 있더군요.통도사 스님들이 오셔서 그 자리에서 화장을 했습니다.'

유씨는 현장에서 남편의 허리띠를 찾아낼 수 있었다.시련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농지구획정리가 있었다.여자의 몸으로,그것도 정신이상 증세까지 보이며 혼자 사는 게 곱지 않게 보였기 때문일까,유씨에게 할당된 논은 마을 한쪽 구석에 있는 물구덩이였다고 한다.

'농사만 지어 놓으면 물이 들어찼어요.빚을 얻어 농사 짓고 망하고를 몇번…결국 그 땅마저 날려버리고 말았죠.'도저히 그대론 살 수 없었다고 한다.

딸을 혼자 남겨둔 채 집을 나선 유씨는 행려자가 돼 부산까지 흘러왔고 지금의 요양원에 수용됐다.그때가 1972년 2월3일이었다.

증세가 심한 게 아니었기에 그는 요양원에서 부엌일 등을 하며 살 수 있었다.

오랜 세월이 흐르고 딸과도 연락이 됐지만 딸은 이미 결혼해 가정을 꾸린 상태였다.

그러나 딸 역시 형편이 어려워 의지 하기가 힘든 상태였다.

유씨는 지난 1998년 9월 수용된지 26년만에 '조울증'이란 병명으로 정식입원,환자의 신분이 됐다.

입원은 그에게 일하지 않고도 이곳에서 살 수 있다는 것을 뜻한다.

그는 요양원에서 일년에 한 두번 외출을 허가받아 사배골짜기를 찾는다.

'왜 발길이 자꾸 그쪽으로 가는지 모르겠어요.

가봤자 이젠 아무것도 없는데….'

유씨는 '죽기전에 남편의 명예만이라도 회복돼야 할텐데 갇혀 살다보니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보도연맹원 대학살] ⑥거제

좌익성향 강해 6.25 前 참극 시작

거제도하면 요즘 사람들은 흔히 한려해상국립공원부터 머릿속에 떠올린다.또 역사적으로도 임진왜란때 왜구를 무찌른 곳 내지는 6.25때 포로수용소가 있었던 곳 정도로만 알고 있다.

그러나 이곳에서 보도연맹원 학살로 수백명이 목숨을 잃은 사실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 거제도는 역사적으로 저항적 기질과 민족주의 성향이 유난히 강했던 곳이다.

일제때는 신간회와 3.1운동청년회 등이 활약한 항일의 산실이었으며,특히 해방 이후에는 민족주의를 표방하는 좌익성향이 두드러졌던 곳이다.

6.25당시 토벌에 나섰던 군.경이 이곳을 두고 '제2의 모스크바'라고 비유했을 정도다.때문인지,거제도에선 6.25 발발 이전부터 이미 학살이 시작돼 보도연맹원을 포함,무려 700여명의 양민이 처형되는참극이 빚어졌다.

현지 주민들의 증언에 따르면 학살은 6.25 발발 전 한 주민의 말이 발단이 됐다고 한다.일운면 구조라 인근 바닷가에서 해산물을 채취하고 돌아오던 최모씨란 사람이 마을 근처 야산에서 간첩을 보았다고 한마디 던진 게 사건의 시작이다.

간첩이 나타났다는 소문이 순식간에 마을 전체로 번졌고,이를 접한 군이 이곳을 그냥 둘 리 없었다.호림부대,백골부대 등 소위 토벌대가 들이닥친 것이다.그러나 객지에서 온 그들로선 누가 간첩이고 누가 양민인지 구분할 수가 없었다.지역 경찰과 우익계열 주민 몇몇을 앞세워 보도연맹 가입자는 물론 일반 주민들까지 닥치는데로 잡아다 폭행과 고문을 해대기 시작했다.

하지만 군의 이같은 대응은 역효과만 가져왔으니,겁에 질린 주민들이 옥녀봉(555m) 국사봉(462m) 등 산속으로 도망을 친 것이다.군이 고삐를 죄면 죌수록 달아나는 주민만 늘어날 뿐이었다.

주민 서모(85.여)씨의 증언을 들어보자.

'영감이 나무하러 간다기에 아침 일찍 밥을 차려주고 방에서 잠시 쉬고 있는데 경찰이 닥쳤어요.그러더니 밥상을 보곤 다짜고짜 '빨갱이 한테 밥을 해준 게 아니냐'며 장승포경찰서로 끌고 가지 뭡니까.아무리 설명을 해도 말이 통해야지.내가 엉뚱한 소릴 하니까 화가 치밀었는지,전깃줄을 가져오더니 양손 엄지손가락에다 감고 전기고문을 해요.몇번이나 정신을 잃었는지 몰라요.이 지경인데 주민들이 안 달아나고 배겨요?'

참다 못한 군인들은 1950년 5월6일 마침내 구조라 일대 1천여 주민을 해변으로 집결시켰다.고기잡이 나간 어민들까지 모두 불러들여 어장막 속에다 며칠을 가두어 두었다.

그리곤 '너희들 속에 빨갱이가 숨어 있는데 도무지 자수를 하지 않으니 모두를 조사해야 겠다'며 주민들을 한꺼번에 바닷물 속으로 몰아 넣기 시작했다.'물 속에 몰아넣고선 마주보고 뺨을 때리라는 겁니다.나는 친구와 마주 서게 됐는데 코에서 열이 튀어 나올 정도로 때렸어요.시어머니와 며느리,아버지와 아들 할 것 없이 살기 위해 뺨을 때렸습니다.'

구조라 주민 노모(82)씨의 증언이다.이 뺨 때리기는 10여분간 계속됐다.

이윽고 군인들은 주민들을 모두 물밖으로 나오게 했다.그러더니 며칠전 산에서 붙잡은 동네 청년 5명을 끌고와 모두가 지켜 보는 앞에서 총살을 했다.일종의 본보기였던 셈이다.

그때 목숨을 잃은 사람이 노길만,강정수,김상목,강정엽,노길찬씨 등이다.이들 외에도 구조라초등학교 교정에서 임옥성 강명용씨 등이 총살되는 등 구조라 지역에서만 모두 13명이 처형됐다.

다른 지역에서도 학살이 있었는데,장승포 구촌의 일본인 신사(神社)에서는 강간두 강정길 김태일씨 등이 나무 말뚝에 묶여 군인들에 의해 총살을 당했다.또한 동부면 구천계곡과 둔덕면 산방산,하청,연초 등 지역에서도 유사한 학살이 있었다.

그런데 숨진 사람들이 죽어야 될 이유가 없었다는 게 유족과 주민들의 증언이다.따라서 자신들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일방적으로 보도연맹에 가입돼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중 일본인 신사 학살을 목격한 김모(79.여)씨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전한다.

'시퍼런 군복을 입은 군인들이 총을 쐈어요.말뚝에 묶인 사람들 얼마나 억울했으면 '빨리 죽여라'고 고함을 치고 '인민공화국 만세'를 부르기도 하고….'

그런데 이 말을 한 김씨 자신도 사실은 남편을 잃은 유족이다.남편(당시 32세)은 교사였다고 한다.그런데 일본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사람이라는 이유 하나로 좌익으로 몰려 쫓기게 됐고 나중에 스스로 경찰서를 찾아갔다고 한다.

그리곤 서너달동안 출퇴근을 하며 경찰서에서 서기로 일했다고 한다.그 역시 보도연맹에 강제로 가입돼 있었던 것이다.그러던중 1950년 7월께,경찰은 갑자기 그를 철사줄로 묶어 다른 몇몇 주민과 함께 지심도 인근 해상에서 수장을 하고 말았다. 이 무렵 전쟁전 일운면 인민위원장을 역임,보도연맹 지역 간사장이었던 노상선(당시 64세.일운면 구조라)씨도 지심도 근처에서 수장을 당했다.

거제지역의 보도연맹원 학살은 다른 지역과 좀 다른 측면이 있다.

우선 좌익성향이 강했던 지역 특성상 보도연맹 가입비율이 상당히 높아야 하는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는 것이다.이는 행정이나 경찰조직이 조직확대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못했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어쨌든 거제도 전체의 가입자수가 최소 1천명은 넘는다는 게 6.25당시 지역 민보단 단장을 했던 김모씨 등의 말이다.

학살 과정도 달라,다른 지역처럼 연맹원들을 한 장소에 소집해 처형하지 않았다.처형은 마을별로 이뤄졌다.비연맹원들이 함께 뒤섞여 처형을 당했다.때문에 정확한 피해자수를 확인하기가 어려운 상태다.

특히 지심도,칠천도 인근 바다로 끌고가 수장을 한 경우가 많기 때문에 유골발굴을 통한 확인작업도 불가능한 상황이다.그러나 전체 피해자 700여명중 최소 절반 이상은 보도연맹원이었을 것이라는 게 향토사를 연구하는 학자들의 분석이다.

[보도연맹원 대학살] ⑦ 일본까지 떠밀려간 주검

쓰시마 섬 곳곳에 손.발 묶인 시신

부산에서 육안으로도 볼 수 있는 일본 쓰시마 섬(對馬島.길이 82㎞,폭 18㎞).

동섬과 서섬,2개의 큰섬으로 이뤄진 쓰시마는 일본 본토 후쿠오카까지 거리가 132㎞인 반면

부산과는 49.5㎞밖에 떨어져 있지 않다. 때문에 쓰시마는 역사적으로 우리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보도연맹학살사건과도 역시 무관치 않아 그동안 부산과 경남 일원에서 수장당한 수많은

시신들이 남해안 해류를 타고 그곳까지 표류해 갔다는 소문이 끊임없이 나돌았다.

본보가 지난 16,17일 이틀간 현지에서 해상보안청과 경찰서,그리고 현지 주민 등을 상대로

취재한 결과 한국 남해안과 마주한 쓰시마 서쪽 해안의 거의 전역에서 표류중인 시체가 실제로 인양된 사실을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들 시신이 안치된 장소 2곳도 어렵지 않게 찾아낼 수 있었다.

쓰시마 주민중 70~80대 노인 대다수는 당시 상황을 아직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특히 1946년 창간된 쓰시마의 유일한 신문인 쓰시마신문 아카시 마사모(80) 사장은 손.발이 한데 묶인 채 수장된 5구의 시신을 직접 목격한 증인이다.

'1950년 9~10월께였을 겁니다.일선 기자로 현재의 이즈하라 항구옆 길을 걸어가는데 순사부장이던 사토씨가 나를 불러요.'여기 한국에서 떠내려온 시신들이 있는데 한번 와서 보라'는 것이었습니다.부두에는 7~8t가량의 생선운반선이 정박해 있었는데 무심코 갑판위로 뛰어 내렸다가 기겁을 하고 말았습니다.사지의 뼈가 허옇게 드러난 시신 5구가 발앞에 놓여 있었거든요.젓가락 굵기 정도의 새끼줄로 손발이 서로 묶여 있었습니다.'

이 시신들을 인양한 사람은 나가사키현에 거주하던 어민들로 쓰시마 인근 수역에서 조업을 하다 물위에 떠있는 것을 건져 이즈하라 항구로 운반해온 것이었다.

아카시 사장은 당시 수많은 시신들이 인양돼 왔으며,19세 가량의 여자 시체는 현재의 이즈하라 소방단 건물 자리에서 해부했는데 그 장면도 자신이 직접 목격한 사실이 있다고 말했다.이 여자 시신 역시 상당히 부패해 있었지만 손톱에는 꽃물이 들어 있었고 위장속에 든 음식물 등을 통해 한국인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고 증언했다. 쓰시마신문 1950년 10월12일자 2면에는 다음과 같은 기사가 게재됐다.

'야마구치현 다케스에 도라마쓰씨 소유인 신에이마루(7명 승선) 어선이 9일 오후 4시께 쓰쓰마을 아자모와 오도의 중간에 위치한 아자모 서쪽 근해 35마일 부근에서 조업 중 해상에 표류 중인 시체를 발견,어선에 올려 10일 이즈하라에 입항해 이즈하라 경찰서에 신고했다.검시에 의하면 죽은지 1개월이 경과된 30~40대 남자로 흉부가 굵은 새끼줄로 묶여 있었으며 양손에도 같은 흔적이 있어 이즈하라 경찰서는 타살로 보고 있다.'

이 기사를 쓴 아카시 사장은 당시 일본 당국의 보도통제로 인해 수장과 관련된 기사가 대부분이 신문에 실리지 못했다고 말했다.

6.25 당시 교사였던 이마주 치세(76.여)씨도 증인중 한 사람이다.그는 당시 쓰시마 북섬에 위치한 히타카쓰에서 교원연수를 받고 있었는데 한국인 남자 시신 1구가 해안으로 밀려온 적이 있었다고 했다. 비슷한 시기에 역시 히타카쓰에 머물고 있었던 에사키 마스코(69.여.식물학자)씨도 매일 부산쪽에서 대포소리가 들렸는데 어느날 시신 1구가 인양돼 의사가 이를 해부하는 장면을 본 사실이 있다고 했다.

쓰시마 주민들의 증언에 의하면 보도연맹원 수장사건이 있었을 무렵,쓰시마 서해안의 거의 전역에서 시신이 발견됐다.

그 지점은 쓰시마 북섬의 경우 우니지마섬 일대와 미사토,다노하마,기사카 등 일대 수역이며,남섬은 오사키에 위치한 쓰시마 사슴보호구 근방 수역과 아레,고모다하마신사,구네하마,쓰쓰자키 공원 일대 등이다. 인양된 시신중에는 산속에 그대로 매장된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은 화장돼 안치됐다.

매장된 장소는 이즈하라 세이잔지(西山寺) 뒤 야산으로 사찰경내 묘지를 지나 산속으로 20여분간 걸어가면 나오는 대나무숲속이다.가와치 쇼이치(65)씨 등이 매장하는 것을 직접 목격했으나 장기간 그대로 방치돼 정확한 인원수를 알기 위해선 발굴작업이 필요한 실정이다.

이즈하라 시내에 있는 다이헤지(太平寺)에는 상당수의 화장한 유골이 안치돼 있다.이 사찰 뒤 묘지에는 1963년 4월 건립된 '무연지제령(無緣之諸靈)'이란 비명이 붙은 높이 2m 가량의 비석이 있다.

이 사찰 주지의 부인 미야가와 아이코(53)씨는 '비석 기단 아래에 표류시신들의 유골이 안치돼 있으며,이전 주지가 비석을 세웠기 때문에 정확한 수는 파악할 수 없지만 30~40구 정도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해상보안부 다카야마 데쓰오 차장과 이즈하라경찰서 도미나가 미쓰오이 부서장은 표류시신에 대한 기록이 영구보존대상이 아니라 모두 폐기한 상태라고 밝혔다.

보도연맹 학살 때 수장이 이뤄진 곳은 부산의 경우 오륙도 인근 해상과 다대포 앞바다 등이며 경남은 마산 통영 거제 등 지역으로,마산만 1천500명이 수장되는 등 전체적으로 수천명이 수장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보도연맹원 대학살] ⑧ 1960년 국회 특위 활동

가해 집권당이 진상조사 규명 한계

1960년 5월 27일 제4대 국회는'양민학살사건 진상조사 특별위원회'(이하특위)를 구성,5월 31일부터 6월 10일까지경남 경북 전남 3개 지역에 대해 해당지역출신 국회의원 3명씩을 조사위원으로 해

보도연맹사건 등 양민학살 현장조사를 실시했다.특위는 당시 여당인 자유당 소속 박상길 의원 등 12명과 야당인 민주당 소속 김의택,서정귀 의원 등 24명의 결의안 제출로 구성된 것이었다.

특위는 11일간의 조사를 끝내고 6월 21일 제42차 본회의에 최종보고를 했다.인명피해는 경남 3천85명,경북 2천200명,전남 524명,전북 1천28명,제주 1천878명이었다.

국회는 이를 기초로 군.경.검 합동조사본부를 설치해 진상을 조사하고 시효와 상관없이 책임자를 처벌하며 피해를 보상토록 촉구하는 대정부 건의안을 채택했다.

특히 특위는 학살현장에서 유족과 군.경 관계자 등을 불러 그들의 증언을 채록한 '증언청취속기록'을 남겼는데 이는 각 지역의 유족들이 제출한 피해신고서(본보 5월 24일자 1면 보도)와 함께 진상규명에 중요한 단서가 되고 있다.

증언청취속기록을 통해 드러난 학살의 진상을 지역별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다만 학살규모는 특위의 현장조사가 이뤄질 당시까지 집계된 것이며 학살자는 지휘자급만 이름을 밝힌다.

▲통영

통영지역에 대한 피해조사는 60년 6월1일 통영시청에서,6월 5일 경남 도지사실,다음날 부산 동래호텔에서 각각 3차례에 걸쳐 실시됐다.유족측에서 탁모(여) 김모씨 등 5명이,가해자측에서는 해군헌병대 문관이었던 이모,허모씨 등 5명이 출석했다.

증언에 따르면 통영지역에서 학살피해자는 보도연맹원 200여명을 포함,800여명이다.학살주체는 해군헌병대이며 박태진 대위,오덕선 소위 등이 지휘했다.CIC,G-2,HID 등도 개입했다.학살방법은 수장이 많았는데 이때 동원된 배는 '제1 진해호' '동찬호 22호'였다.여러명을 한테 묶고 수면으로 떠오르지 않도록 줄에 돌을 매단 뒤 등뒤에서 권총을 쏘아 수장시켰다.

▲거제

6월 5일 경남도지사실에 유족 윤모,반모씨 등 4명이 출석,증언했다.학살은 6.25발발 이전인 49년부터 백호부대 호림부대 등에 의해 시작됐다.'야산대 토벌'을 이유로 마구잡이로 처형이 이뤄졌다.연맹원들중 상당수는 학살이 무서워 산속으로 도망했다가 야산대로 몰려 처형됐다.

학살주체는 CIC,HID,G-2 등 군과 경찰이며 HID에는 성모,CIC에는 유모씨 등이 있었고 당시 사찰계장은 강화봉씨이다.다섯명,열명씩 철사로 묶어 수장했는데 죽은 사람은 200여명 된다고 증언했다.

▲마산

6월 5일 경남도지사실에 유족 김모씨 1명이 출석했다.50년 음력 6월 1일(7월 15일.토요일) 경찰이 강연회를 구실로 보련원 등 1천681명을 시민극장에 집결 시킨뒤 마산형무소에 수감했다.그중 일부는 경찰과 형무소로부터 명단을 넘겨받은 헌병(해군)들이 직접 나서 검거했다.철사로 묶어 집단수장했는데 일부가 어망에 걸려 올라오기도 했다.

▲울산

6월 5일 경남도지사실에서 오모씨 등 유족 3명이 증언했다.50년 7월초 경찰서의 각 지서에서 보도연맹원들에게 삽과 도시락을 들고 집결하라고 지시한 뒤 끌어다 학살했다.

평소처럼 공동작업이 있는 양 속여 모아 놓고 학살한 것이다.당시 경찰서장은 조정호 씨이며 사찰계장은 조경래 씨였다.사찰계 형사는 백모,이모씨 등이다.CIC도 주둔하고 있었다.학살된 사람은 580명으로 거의 모두가 보도연맹원이다.

▲진영

6월 5일 경남도지사실에서 유족 김모씨 등 2명이 참석했다.50년 6월 27일부터 8월15일 사이 냉정고개,망루(상동고개를 말함) 등에서 CIC가 251명을 처형했다.CIC파견대장은 이명규 육군중위였다.G-2(파견대장 김식)도 12명을 트럭에 싣고 창원군 동면 덕산고개로 끌고가 총살했는데 그중 4명이 달아나거나 총상을 입고도 살아났다.

진영에서는 전국 학살사건 중 유일하게 (53년)학살 관련자들이 처벌을 받았는데 김병희 지서장과 하계백 부읍장,의용경찰 강백수 강치순씨 등이 살인죄로 구속기소돼 1심에서 모두 사형을 구형받았다.

그러나 김 지서장만 총살되고 나머지는 한달도 못돼 모두 풀려났다.속기록에는 이와 관련,김종원 계엄민사부장에게 3천만환을 줬다는 주장이 있다.

이상 내용을 살펴볼때,증언속기록이 학살경위와 책임자를 일부 밝혀냈다는 점에서 진상규명에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하고 있다고 평가할 수 있다.그러나 이 증언청취 속기록에는 근본적인 한계가 있다.

우선 학살의 책임자인 자유당 정권이 진상조사까지 하다보니 제대로 될 리가 없었다.자유당 소속 조사위원들은 보도연맹원을 여전히 빨갱이로 취급,조사기간중 심한 거부감을 나타냈다.

울산의 경우 보도연맹원 학살지였기 때문에 당초 조사대상 지역에 포함돼 있지 않았을 정도다.또 특위구성에 있어서도 경남반 반장을 맡은 최천 의원은 학살이 자행될 당시 경찰관이었다.

특위조사 때 참석한 증인 중 아직 생존해 있는 사람들의 말을 들어보면 당시 이 문제를 놓고 조사위원들 사이에서 욕설이 오가는 등 심한 마찰이 있었다.결국 760여구의 유골이 발굴된 부산 동래지역의 경우 증언 자체를 거부했다.

[보도연맹원 대학살] ⑨ 통영 학살 관여자 증언

'이적 행위'몰아 바다.육지서 총살 '반세기만에 찾아 온 첫 손님이군. 근데 내 이름은 어떻게 알았어.'

경남 통영에 살고 있는 이모(90)씨, 그는 이름이 2개였다.일제시대 때 일본인이 지어준 이름과 호적상 본명. 그는 일본 이름을 갖고 1950년 해군헌병대 정보문관으로 통영지역에서 근무하면서 보도연맹원 등에 대한 학살에 관여한 뒤 이제껏 호적상 이름으로 살아왔다. 그의 집을 찾았을때,그는 51년이란

세월 탓인지 당시 상황을 담담히 털어놨다. '내 손에 들려 있던 즉결처분(사형)자명단만 해도 800명이 훨씬 넘었어. 보도연맹원하고 야산대 같은… 우리 말고 G-2, CIC, 해병대 등도 자체적으로 처형했는데

이성수씨 아들처럼 학생들도 많이 죽었어. 학생은 주로 해병대가 많이 했지.'

이씨는 당시 정보문관으로 통영에 계엄군으로 주둔하고 있던 해군헌병대 소속 11명의 문관중 선임자인 수석문관이었다고 말했다.나이도 자신이 제일 많았다고 했다.그리고 현역은 계엄주동관인 오덕선 대위(전 진해해군헌병대장)를 포함해 17명이 근무하고 있었다고 말했다.

그가 털어 놓은 첫번째 학살은 수장사건이었다.

'정확한 날짜는 기억 못하겠는데 한번은 날이 어두워 보도연맹원 등 48명을 '동찬호'란 배에 태우고 삼청 앞바다로 나가 총으로 쏘아 죽였어.'

동찬호에는 이씨 자신을 포함해 문관 11명이 모두 승선했고 이씨 자신은 선임자로 일본도를 들고 처형현장을 지켜보았다고 말했다.

'이물(뱃머리)에 차례로 앉히고 뒤통수 숨골에다 대고 '꽝'하고 한방씩 놓았거든.문관들이.총 안 쏜 문관이 없어.(총을 맞고 쓰러지면) 돌멩이를 달아 물속에 밀어 넣었는데 아래로 내려다보니까 물속에서 일렁일렁하다 가라 앉는 거야.'

2~3일에 한번꼴로 수장은 계속됐다.초저녁부터 밤 10시 사이에 집행됐다.배는 문관들이 사용하던 것으로 당시로선 큰 배였다.헌병들은 복천호라는 배를 따로 사용하고 있었다.

그에 따르면 통영에서 자행된 학살 중 일부는 공개적으로 이뤄졌다.

멸치부대를 머리에 씌우고 그위에 빨간색 글씨로 '이적행위' 등을 써서 시내를 끌고 다니다 처형했다.

'처형은 모두 오덕선이가 결정했어.

전권을 행사했지.통영시 항남동 옛 엔젤호 터미널 자리에 광도어망조합 멸치창고가 있었어.그안에 매일 270~280명씩 들어차 있었는데…여자는 거의 없었고.'

'오덕선이가 명단을 나한테 넘기면 문관들이 창고에 가서 명단에 이름이 올라 있는 사람들을 끌고 나와.

학도병(고등학생)들한테 돌멩이 40~50개를 주워오라고 시킨 뒤 즉결처분될 사람들을 멸치부대 매는 새끼줄로 묶어 배에 싣고 나가거든.한번에 보통 47~48명씩.'

육지에서도 처형은 이뤄졌다.충렬초등학교 인근 '절골'이란 곳에서 보도연맹원 등 17명을 총살했는데 이씨는 이 현장에도 일본도를 들고 있었다고 털어놨다.

''김도때'라고 병든 영감이 한명 있었는데,절골로 올라가다가(제대로 걷지를 못하니까) 고랑에서 총을 한방 쏴가지고 지게꾼에 지워 올라갔는데 가보니 구경꾼들이 몰려들어 세겹네겹으로 둘러싸여 있는거야.

젊은 문관들이 M-1,카빈 등으로 한 사람한테 대여섯방씩 놨어.그렇게 많이 쏠 필요는 없었는데…너무 잔인했어.'

'근데 오덕선이가 나보고 일본도로 한번 쳐보라지 뭐야.못하니까 지가 칼을 뺏어가더니만 나중엔 결국 지도 못하데.

오덕선이는 서울사람이었는데 평소에는 순하다가도 이상하게 빨갱이만 보면 사람이 확 변해.'

이씨는 '김도때 영감은 야산대한테 밥을 줬다는 이유로 강덕용, 공학수배 등 문관들에 의해 이전에 3차례나 잡혀 온 적이 있었는데 4번째 절도누명을 쓰고 다시 끌려와 이날 처형되고 말았다'고 했다.

경찰이 즉결처분 대상자를 헌병대로 넘기는 경우도 있었다.

박모라는 형사가 사람들을 끌고 왔는데 경찰이 자체적으로 조사한 경우라 추가 조사없이 바로 처형했다고 이씨는 증언했다.

경찰이 직접 처형하는 경우도 있었다.통영경찰서가 광도면 안정이란 곳에서 보도연맹원 등 115명을 즉결처분했다고 이씨는 말했다.

통영에서의 이같은 학살은 '견디다 못한 지역 유지들이 진해 해군헌병대 서모 소령에게 호소해 중단됐다'고 이씨는 말했다.

서 소령이 통영에 직접와서 문관들을 무릎 꿇린 뒤 심하게 질책했다고 했다.

이씨는 40여년전인 1960년 국회진상 조사특위가 통영지역에 현장조사를 나왔을 때 가해자측 증인으로 유족들 앞에 선 적이 있다.그러나 그는 당시 이같은 사실을 전혀 말하지 않았다.

국회의원들에게 '군사기밀'이라 말할 수 없다고 했더니 그냥 넘어가더라는 것이다.

이씨는 자신이 부산에 근무하다 통영으로 온 게 50년 8월 중순께였는데 오덕선 계엄주동관과는 이전에 함께 근문한 적이 있어 아주 가까운 사이였고,그래서 자신이 말을 잘해 풀려난 사람도 수십명이라고 덧붙였다. 이씨는 통영지역 학살에 참여한 11명의 문관 중 현재 유일한 생존자다

 

[보도연맹원 대학살] ⑩ 1960년 유족회 활동

지역마다 위령제 '명예회복' 시도

60년 6월25일 경남 진영 합동장례식에는 1만여명이 참여,진영역에서 설창고개까지 10리길이 장례인파로 가득찼다.

보도연맹 학살이 있은지 10년만인 1960년 4.19가 터졌다.학살로 혈육을 잃고 더구나 그 유골이 지척에 암매장되어 있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동안 애만 태웠던 유족들은 이승만 대통령까지 물러났으니 이제는 억울함을 세상에 알려 명예를 회복해야 겠다며 유족회를 결성,유골발굴에 나섰다.

유족회 결성은 학살의 피해가 가장 컸던 경남.북지역이 주축이 됐다.

경남의 경우 동래를 비롯해 김해와 창원일부를 포함한 금창,마산,창원,밀양,함양 등지서 잇따라 유족회가 결성됐고 60년 8월28일에는 부산상공회의소에서 이를 포괄한 '경남유족회' 결성대회가 개최됐다.

경북에서도 코발트광산에서 대학살을 당한 경산과 경주,대구 등에서 유족회가 구성돼 60년 6월15일 대구상공회의소에서 '경북유족회'가 발족됐다.

그리고 같은해 10월20일 서울 종로의 전 자유당중앙당부 회의실에 경남.북 각 시군 유족회 대표 50여명이 모여 '전국유족회'를 출범시키고 그 회장에 마산유족회 대표인 노현섭(당시 41세)씨를 선임했다.

유족회들은 지역별로 합동위령제를 지내는 한편 국회에 탄원서를 내는 등 명예회복을 시도했다.

금창유족회는 유골 300여구를 발굴,진영역 앞에서 유족 등 1만여명이 지켜보는 가운데 합동위령제를 지내고 설창리고개에 안치했다.

동래유족회도 기장과 회동수원지 인근 등지서 모두 700여구(신고된 것은 360명)의 유골을 발굴해 부산 연제구 거제동 화지산 능선에 합동묘지를 만들고 위령제를 지내는 등 각 지역마다 합동위령제가 잇따랐다.국회도 진상조사특위를 구성,지역별로 조사반을 파견해 피해조사에 나섰고 동래 등 일부 지역에 대해선 합동위령제를 위한 지원금까지 지급했다.유족들은 비록 가족이 억울하게 죽었지만 '빨갱이'라는 누명만은 벗게 됐다며 안도의 한숨을 돌렸다.

그러나 이데올로기의 망령은 그들을 그냥 두지 않았으니 합동위령제가 있은지 채 1년도 안돼 5.16쿠데타가 일어났던 것이다.

5.16세력은 반공의 기치를 들고 유족들을 잡아 들이기 시작했다.

합동묘지는 모두 파헤쳐져 유골은 불살라졌고 비석은 박살이 났다.

화지산 합동묘지에 있던 높이 1m20㎝,폭 90㎝ 위령비는 나흘동안 계속된 망치질에 가루로 변해 거제동 철길에 뿌려졌다.

'특수범죄처벌에 관한 특별조치법'이라는 소급법이 만들어졌다.소급기간이 무려 3년6개월에 달했다.

더구나 현재 부산.경남유족회 회장인 송철순(69)씨 등 일부 유족들중 이 법이 공포되기 수개월전 이미 검거된 상태였다.

미리 잡아놓고 소급법을 만들어 기소하는 어처구니 없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유족들에게 적용된 죄명은 동법 제6조에 규정된 '특수반국가행위'였다.

한마디로 유골발굴이 국가보안법상 반국가단체인 북측을 이롭게 했다는 것이었다.

8개 유족회 간부 27명이 재판에 회부돼 사형,무기 등 중형이 구형됐고,경상남북도유족회 이모(당시 49세)씨에 대해서는 사형이,그리고 12명에 대해 징역 15년에서 5년이 선고됐다.15년이 3명,10년이 4명이다.쿠데타세력은 특히 유족을 검거하면서 관련 기록을 남김없이 압수해 갔다.

당시 동래유족회 총무였던 송씨는 '소급법이 공포되기 2개월여전 붙잡혀 갈때 경찰이 들이닥쳐 집의 천장까지 모두 뜯어내며 기록들을 모조리 압수했다'고 말했다.

당시 검찰이 유족들을 기소하면서 증거물로 내세운 증거목록을 보면 발굴일지와 유골수집철,(피해자)조사명부,사진,(학살자)고발장 등 학살의 진상을 파악하는데 결정적인 단서들이 많다.

그러나 이같은 기록들은 지금까지 발견되지 않고 있다.

본보가 국회에서 피해자신고서 등 일부를 찾아내기는 했지만 이마저 경북지역에서 제출한 것만 있을 뿐이다.판결문이 영구보존대상이니 관련 증거물도 첨부자료로 남아 있을 가능성이 있지만,정부 당국에서 일체 공개를 하지 않고 있으니 그 존재여부조차 알 길이 없다.

한국전쟁 또 하나의 비극

[美기밀문서로 본 '민간인 학살' 진상]대학살 왜 일어났나

1950년 6월 25일 새벽 전쟁이 터졌다. 인민군은 파죽지세로 남하,사흘만에 서울을 점령했다. 이 풍전등화와 같은 상황에서 한국 정부는 보호해야 할 의무가 있는 자국민을 향해 총부리를 돌렸다. 형무소 좌익수감자와 국민보도연맹원(이하 보련원)에 대해서 거의 무차별적인 학살을 자행한 것이다.

왜 이같은 일이 벌어졌을까? 도대체 무슨 이유로 전투지역도 아닌 곳에서 비무장 자국민을 집단 살해했을까?

본보는 그 해답을 찾기 위해 미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을 뒤졌다. 그리고 대학살극의 도화선이 된 것으로 보이는 중요한 단서를 발견했다.

전쟁 당시 주한 미대사관 2등 서기관이었던 도날드 맥도날드(Donald S. Macdonald)가 50년 7월 11일 국무부에 보낸 '북한군 점령지역의 상황보고서'는 그중 하나이다.

보고서 내용은 서울이 인민군에 점령된 6월 28일로 거슬러 올라간다. 정확히 그날 오후,서울에 인민위원회가 구성됐다. 위원장은 이승엽이란 인물이었고,행정기관과 경찰시설을 접수한 뒤 동(tong)과 반(ban)별로 하부조직을 꾸렸다.

곧이어 서울 용산구 서빙고 자리에 인민재판소를 설치,경찰 군인 대한청년단 간부 등에 대한 즉결처형에 들어갔다.

그런데 맥도날드는 '서울에서 인민위원회가 이처럼 빨리 조직될 수 있었던 것은 국민보도연맹(이하 보련) 때문'이라고 밝혔다. 한국 정부가 전쟁 전 '좌익 전향단체'인 보련을 만드는 바람에 공산주의자들이 신속하고 조직적으로 움직일 수 있었다는 것이다. 맥도날드는 보고서 말미에 '보련을 만든 것은 한국 정부의 실수였다'고 주장했다.

주한 미대사관의 그레고리 헨더슨(Gregory Henderson) 부영사도 같은 해 7월 4~5일 국무부에 보낸 보고서를 통해 '북한 노동당 거물로 남로당 재건을 위해 한국에 침투했다가 체포된 뒤 보련에 가입한 정 백이 인민재판소 책임자가 됐다'면서 '보련이 인민재판에서 가장 뛰어난 도구 역할을 하고 있다'고 밝혔다. 그는 또 '공격을 하거나 후퇴를 하면서 보고서를 만들 때 (보련의 행위를) 반드시 다뤄야 한다'고 주장했다.

형무소 수감자들의 움직임에 대한 정보보고서들도 비슷한 내용을 담고 있다.

'서울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돼 있던 좌익 혐의자들이 보련원과 함께 인민군에 의해 풀려난 뒤 인민위원회 구성 등에 상당한 역할을 하고 있다'는 내용이 상당수 발견되고 있다.

이 보고서들은 7월 형무소 수감자와 보련원 집단학살과 직접적인 연관성을 갖는다. 보고서 내용들이 한결같이 '그들을 그대로 둬선 안 된다'는 결론에 이르고 있기 때문이다.

당시 미국 측에 이 같은 정보를 제공한 주체는 한국 정부의 고위인사나 군,혹은 경찰 간부들이었다. 실제로 헨더슨 보고서는 당시 내무부 장관 겸 국회부의장이었던 윤치영,서울시장 윤보선,민주국민당 김성수 등을 만난 뒤 작성됐다.

그렇다면,여기서 '서울지역 일부 보련원과 형무소 수감자들이 인민군에 적극 협조한 사실이 한국 정부를 자극,대 학살극을 불러오는 빌미가 됐을 것'이라는 해석이 가능하다.

바꿔 말해 '일부'의 행위를 이유로 '전체'를 죽이는 무차별적인 학살극이 저질러졌다는 것이다.

이게 사실이라면 매우 심각한 문제가 제기된다. 보련의 경우 좌익 전향단체라고는 하지만 그 가입자들을 일률적으로 판단하긴 힘들며,특히 서울과 지방 조직은 도저히 같은 잣대로 재단할 대상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실제 서울 보련 본부의 구성원들 가운데 일부는 과거 남로당 등에서 활동했던 좌익들이었다. 특히 보련 명예총재 정 백의 경우 '조국통일 민주주의전선'의 지도자였고,공산주의 운동과 관련해 박헌영에 맞설만큼 거물급으로 평가됐다. 그러나 나머지 대다수는 실제 공산주의와는 거리가 먼 사람들이었다.

이와 관련,주한 미 대사관은 전쟁 전인 1949년 11월 보고서에서 보련이란 조직에 대한 평가를 보류하면서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들었다.

'전향자 대다수가 공산주의에 대한 열의가 없고 생활에 약간의 이득을 보기 위해,혹은 실제로 공산주의자나 그 동조자가 아니면서 단지 좋지 못한 전력을 지우기 위해 전향을 선언한 것으로 보인다.'

방첩부대인 미군 CIC조차도 당초 보련의 주된 침투 목표였던 남로당에 대해 '남로당원이라 해서 그 모두가 공산주의자는 아니며,남로당에 가입돼 있다고 해서 그들이 무조건 공산주의자라는 증거가 없다'고 밝혔다.

한편 이에 대해 '보도연맹원이 대학살의 빌미를 제공했다기보다는 오히려 한국정부가 대학살을 정당화시키기 위해 극소수 보도연맹원들의 행위를 부풀린 것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그러나 '빌미'로 삼은 것은 곧 '정당화'에 이용됐다는 뜻인 만큼 근본적인 의미가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김기진기자 kkj99@busanilbo.com

 

[방송가] 암흑 속 '대학살' 세상밖으로…

MBC 특별기획 '이제는 말할 수 있다'

보도연맹원 학살.한국전쟁 초기 두달간 전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난 사건으로 당시 숨진 인원만 20만명으로 추정하는 국내 최대 규모의 양민대학살이다.알려진 바에 의하면 이 사건은 당시 최고위층의 명령에 의해 저질러진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MBC 특별기획 '이제는 말할 수 있다'는 올해 시리즈 첫 편으로 '보도연맹'을 2회(27일 오후 9시55분 첫 방송)에 걸쳐 내보낸다.

'보도연맹'은 1949년 6월 이승만 정권이 당시 좌익활동 경력이 있거나 혐의가 있었던 사람들을 손쉽게 관리하기 위해 사상 전향을 시킨 뒤 만든 단체이다.'국민보도연맹'이 정확한 명칭으로 전국의 회원 수만 30만명에 이른다.그러나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북한에 협력할 위험이 있다는 이유로 이들은 무차별 학살을 당했다.이 사건에 대해 4.19 이후 몇차례 진상규명 노력이 있었지만 번번이 좌절,오늘에 이르렀다.1회 '잊혀진 대학살'편에선 학살지 발굴과 전국에 널려 있는 사례와 생존자들의 증언,미국 극비문서 등을 공개한다.3천500명이 총살,매장된 것으로 알려진 경북 경산시 코발트광산 유해발굴 현장과 한국전쟁 발발 당시 내무부 치안국장이 전국 경찰서에 내려보낸 명령 문서,지난해 12월 본사 대강당에서 열린 보도연맹 학살 피해자 유족 모임 등을 통해 학살이 전쟁 발발과 동시에 이뤄졌음을 알려준다.

2회 '산 자와 죽은 자'편에선 보도연맹 사건이 당시 권력기관에 의한 조직적 학살이었음을 밝혀낸다.당시 군인,경찰의 증언을 통해 내무 국방 법무,3개 주무 장관이 학살과 관련한 일을 분담했고 이승만 대통령이 이를 지휘했음이 드러난다.

이채훈 PD는 '당시 학살의 주범들에 대한 처벌이나 유족자 보상에 관한 특별법을 마련하자는 취지에서 이 프로그램을 기획하게 됐다'고 말했다.

배동진기자 djbae@pusanilbo.com

"우리 아버지 누가 죽인 건가요" 뒹굴며 통곡한 산내 학살 유족

대전 골령골 유해 세종 추모의 집으로 임시 안치... 추모제 열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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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유가족이 설움과 고통이 밀려오는 듯 가슴을 치다 바닥을 뒹굴며 통곡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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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족들은 서로를 감싸 안으며 위로하기 바빴다.

유족들이 손수 음식을 차렸다. 제물 앞에는 흰 보자기에 싼 유골이 놓여 있다. 모두 20여 구다.

세상에서 가장 긴 무덤으로 불리는 대전 산내 골령골(대전 동구 낭월동 산 13번지) 민간인 희생지에서 발굴한 유해를 세종 추모의 집으로 옮겨 안치됐다.

대전산내학살희생자유족회는 15일 오전 오전 11시 산내 골령골에서 지난 2015년 지역 시민사회단체가 공동 발굴해 현장에 안치해 오던 유해를 세종 추모의 집으로 임시 옮겨 안치하는 추모제를 개최했다.

추모제는 눈물 반, 추모 반이었다. 유해를 보다 편안한 곳으로 옮기는 일인데도 유족들에게는 현장을 떠나는 유해를 대면하는 일 자체가 상처를 헤집는 아픔이었다.

홍성문화연대 윤혜경씨가 살풀이춤을 추기 시작하자 곳곳에서 울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한 유족은 "아버지 보고 싶어요, 울 아버지 누가 죽었나요"하며 흐느꼈다.

아직도 유해 수백구 묻혀 있어... 행자부 집중 발굴 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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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족들이 유해를 세종 추모의 집에안치할 유해를 옮기고 있다.

▲ 유족들이 유해를 세종 추모의 집에안치할 유해를 옮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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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일 오전 오전 11시 산내 골령골에서 지난 2015년 지역 시민사회단체가 공동 발굴해 현장에 안치해오던 유해를 세종 추모의 집으로 임시 옮겨 안치하는 추모제를 개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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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불교 대전충남교구 성도들은 특별천도제로 휘생자의 넋을 위로하고 있다.

원불교 대전충남교구 성도들은 특별천도제로 휘생자의 넋을 위로했다. 그러자 한 유가족은 설움과 고통이 밀려오는 듯 가슴을 치다 바닥을 뒹굴며 통곡했다. 유족들은 서로를 감싸 안으며 위로하기 바빴다.

이날 세종추모의 집에 임시 안치한 유해는 골령골 현장에 '한국전쟁 민간인 희생자 위령 시설'이 조성되면 다시 돌아올 예정이다. 이날 현장에 "아버지, 어머니 편안한 곳으로 다시 모시겠습니다'는 천 글씨를 내건 이유다.

정부는 이곳 골령골에 전국 곳곳에서 희생된 민간인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추모관, 인권 전시관, 상징물, 조형물, 평화공원 등을 조성할 예정이다.

대전 산내 골령골은 1950년 전쟁 발발 직후 대전형무소 정치범과 국민보도연맹원 등 수천 명이 군인과 경찰에 의해 처형 당한 비극의 땅이다. 희생자 수는 최소 4000명에서 최대 7000명으로 추정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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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족들이 손수 음식을 차렸다. 제물 앞에는 흰 보자기에 싼 유골이 놓여 있다. 모두 20여 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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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골령골 유해매장 추정지에 세운 표지석

이곳에 묻힌 희생자 유해는 지난 2007년 진실화해위원회와 2015년 민간유해발굴공대위가 유해를 발굴했지만 모두 60여 구에 불과하다. 남아 있는 유해는 대략 수 백여 구로 추정되며 나머지 유해는 대부분 훼손 또는 유실됐다.

행정자치부는 2억 원의 예산을 세워 내년 중 나머지 유해를 집중하여 발굴할 계획이다.

최종 업데이트 19.11.15 18:47l심규상(djsi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