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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나지않은 고엽제 후유증 노란통속에살다

아지빠 2011. 6. 25. 08:19

 

 

 

한국 고엽제 문제삼다 베트남전쟁종결17년만에

 한국인의 고엽제 피해가 국내신문에 처음 보도된 것은 1992년 2월이다. 베트남전쟁이 미국의 패배로 끝난 지 17년 후의 일이다. 그동안 다른 참전국, 특히 미국과 베트남, 오스트레일리아 등에선 이미 70년대부터 고엽제 유해논쟁이 뜨겁게 달궈져 있었다.

전세계 고엽제 유해논쟁…한국은 나몰라라

한국은 조용했다. 전혀 말이 나오지 않았다. 철저한 보도 통제 탓이었다. '미국의 베트남 재향군인 에이전트오렌지 희생자회'가 78년 다우케미컬 등 고엽제 제조사를 상대로 손해배상소송을 제기하고 강력한 항의데모를 벌인 일도 한국에선 해외토픽의 한 귀퉁이 정도에만 보도됐다.

1)고엽제 후유증 '대 잇는 괴질'

1999. 11. 22 [경향신문] 25면

 국민의 눈 귀 입을 틀어막고 데모라면 몸서리를 친 유신정부에서 이는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젊은이들을 이역만리 전선에 보내 피 흘린 대가로 '경제개발 불쏘시개를 얻은' 박정희 대통령은 국민이 베트남전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걸 꺼렸다. 공산베트남을 피해자로, 미국을 가해자로 볼 수밖에 없는 고엽제문제 등 '참전의 과(過)'를 다루는 건 끔찍이 싫어했다. 그건 이후의 대통령도 마찬가지였다. 직접 베트남 전투에 참여한 전두환 노태우 대통령은 더욱 그랬다. 자신들의 전공에 흠이 갈 게 두려웠는지, 아니면 미국 눈치를 봤는지, 공산국과의 전쟁에서 일어난 반인류적 일을 다루는 게 싫었는지 역시 고엽제 보도를 통제했다. 1단짜리 기사도 참지 못했다.

1984년 고엽제 제조사들이 에이전트 오렌지 희생자에게 1억 8천만 달러를 주기로 합의했을 때 한국 신문은 그 기사를 싣지 않았다. 백마부대 연대장으로 참전한 전두환 대통령이나 맹호부대 대대장이었던 노태우 장관이 불편해 할 것을 미리 알고 정부가 보도통제 조치를 한 탓이 컸다.

86년 베트남전쟁이 낳은 기형쌍둥이, '베트와 도크'의 기사가 신문에 실렸을 때는 "그들이 고엽제 기형아라는 걸 홍보조정관들이 미처 몰랐던 탓에 보도가 가능했다"는 얘기가 돌았다. 물론 그들의 그 후 상황은 일절 보도되지 않았다. 일본에선 연일 큰 뉴스였지만 국내에선 1보만 있었을 뿐 나중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사람들은 알지 못했다. 그렇게 세월은 흘러만 갔다. 


월남 참전용사의 고엽제 후유증이 보도되자..

그러던 1992년. 그해는 노태우정부의 힘이 빠질 대로 빠져 각계의 민주화 확대요구가 봇물처럼 쏟아지던 때였다. 특히 3월 총선과 12월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자유화 바람도 거세게 일고 있었다. 바로 그 2월13일, 경향신문은 사회면의 절반가량을 털어 '월남 참전용사 고엽제 후유증' 기사를 실었다.

베트남전 종전 후 17년, 한국군이 해외전쟁에 참여한 지 28년 만에 처음으로 참전 군인의 고엽제 피해를 정면으로 다룬 기사였다. '대한 파월유공전우회'를 취재하고 현재 앓고 있는 후유증 환자와 이미 숨진 참전용사 유족까지 만나 작성한 기사였다.

1970년 맹호부대 전투요원으로 참전했던 이모씨(당시 49세)는 하반신마비 증세를 보였다. 그는 "베트남전쟁에서 돌아온 직후부터 다리와 발의 살이 빠지고 뼈만 남은 채 점차 굳어져 가고 있다"고 호소했다. 특히 "지난 20년 10여 군데 병원을 다니며 진찰을 받았지만 모두 병명을 알 수 없다는 말만 했다."며 울먹였다. 그는 "전쟁 당시 정글 지역의 매복과 수색정찰을 마치고 귀대할 때마다 얼굴 팔다리에 온통 물집이 생겨났었다."며 그게 미군이 대량 살포한 고엽제 때문이란 것을 나중 귀국 후에야 알게 됐다고 말했다.

1991년 12월 서울 보훈병원에서 간암으로 사망한 이 모씨(사망당시 48세)의 부인은 더 충격적인 증언을 했다. 남편이 죽기 전 "온몸의 피부가 벗겨져 마치 왁스를 발라놓은 것처럼 반질반질했다."는 것이다. 또 이씨는 "서 있으면 하반신에 피가 몰려 어쩔 수 없이 계속 누워서 생활을 했으며 그것도 고엽제 후유증 중 하나"라고 말했다. 병원 주치의는 "환자가 독성 약물의 과다복용으로 인한 간암으로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며 베트남전에서 뿌린 에이전트 오렌지가 악성 피부반응과 간암을 유발한다는 학계 연구보고가 나와 있다."라고 설명했다. 

2)월남 참전용사 고엽제 후유증

1992. 2. 13 [경향신문] 23면

고엽제 후유증을 앓으면서도 하소연조차 하지 못했던 군인들

기사가 나가자 사람들은 큰 충격을 받았다. 기사를 제보한 전우회 회장이 "현재 대충 파악한 에이전트 오렌지 후유증 환자가 38명에 이르며 실제로는 1천 명도 넘을 것"이라고 밝힌 데 따른 여파도 심각했다.

3)간암 등 후유증…월남전 고엽제

1992. 5. 28 [동아일보] 11면

 그동안 갖가지 증상으로 고생하던 참전 군인들이 "혹시 내가 고엽제 후유증을 앓고 있는 것 아니냐?"는 물음을 한꺼번에 쏟아내기 시작했다. 참전 전우회와 국방부 보훈처 등 정부 유관부처, 언론사에 문의전화가 쇄도했다. 피부병부터 암, 호흡기 질환부터 전신마비 증세까지 병을 앓으면서도 발병이유를 몰랐던 참전 군인들은 전화 도중 끝내 울음을 터트리는 경우가 많았다. 목소리도 높았고 그동안 정부가 배려하지 않은데 대한 불만도 높았다. 병도 병이지만 그동안 당한 설움이 한꺼번에 치밀어 오르는듯 했다.

나중에 알려진 사실이지만 참전군인 중 상당수는 고엽제 후유증을 앓으면서도 정확한 발병 원인을 몰라 누구에게 하소연하거나 항의하지 못했다. 당시 한국사회에서는 그들이 베트남에서 윤리적으로 부끄러운 짓을 하다 국제매독 등 고약한 성병에 걸린 것으로 치부하는 경우가 흔했다.

피부가 헐고 온몸이 짓무르거나 망가지는 증세가 무분별한 쾌락의 결과 생긴 것으로 오인되며 육체뿐 아니라 정신의 병도 심각해졌다. 아무리 그런 일이 없었다고 항변해도 사람들은 믿지 않았다. 그나마 동정하는 투로 얘기하는 경우가 "베트남 풍토병에 걸렸다."고 말하는 정도였다.

이것도 나중에 알려진 경우지만 참전 군인들이 고엽제 후유증이 있다는 걸 인식하고 미국에선 제약회사가 합의금을 냈다는 사실을 안 것도 1991년에 불과했다. 그 자신 베트남전에 장교로 참전했던 한 오스트레일리아 이민자가 동료에게 그 사실을 알려온 덕분이었다. 그때까지 국내 환자들은 "전쟁 중 뭔가 잘못돼 병에 걸렸을 것"이라고 짐작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보상을 위한 정부 및 관계자들의 발빠른 움직임

정부가 철저하게 입을 막아놓은 사실이 느닷없이 터져 나오자 상황은 갑자기 급물살을 탔다. 고엽제 후유증 환자들의 움직임이 우선 빨라졌다. 보상을 받거나 상이등급을 새로 받기 위한 활동을 구체화 해나갔다. 정부도 빠르게 움직였다. 국방부와 보훈처는 상이등급 분류 신검을 새로 해 판정을 조정키로 했다가 5월 들어서는 아예 "피해자들을 국가유공자로 대우하겠다."고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그런 가운데 고엽제 후유증을 견디다 못해 자살하는 경우, 2세에게서도 후유증이 드러난 경우가 속속 밝혀졌다. 또 일부 환자는 국방부에 참전기록조차 비치돼있지 않은 경우가 드러나 말썽을 빚었다. 이로 인해 정부가 고엽제 피해보상에 미온적이 아니냐는 의문이 불거졌고 급기야 9월에는 전우회 회원들이 경부고속도로를 막고 항의시위를 벌이는 사태로까지 진전됐다.

  

4)고엽제 후유증 파월장병 신병비관 목매 자살

1992. 8. 1 [동아일보] 23면

그해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민자당 김영삼 후보는 고엽제 특별법 제정을 골자로 하는 국가유공자 우대를 선거공약으로 내걸었다. 고엽제 후유의증 검진에 관한 법률안이 입법 예고됐고 이듬해 2, 3월 법안과 시행령이 잇달아 공포되었다. 그러나 이후에도 고엽제 후유증과 후유의증 판정을 둘러싼 피해자들의 항의와 불만이 끊이지 않았다.

한국 DMZ에도 고엽제가 살포되었다는 충격적인 사실

5)끝나지 않은 전투 '고엽제 후유증'

1999. 9. 2 [동아일보] 21면

 그리고 1999년. 이번에는 베트남전쟁이 아니라 한국의 비무장지대(DMZ)와 민통선에 고엽제를 살포한 사실이 주한미군 보고서를 통해 밝혀져 다시 한 번 충격을 주었다. 30년 만에 비밀 해제된 '식물 통제계획 68' 보고서는 "한국 육군이 68년 4~5월과 69년 5~7월에 걸쳐 연인원 3만여 명을 동원해 에이전트 오렌지, 블루, 모뉴론 등 3종류의 고엽제 2만 1천 갤런(315드럼)을 경유 등과 섞어 2천2백만 평의 지역에 집중 살포했다"고 밝힌 것.

이는 DMZ일대의 우거진 수목 때문에 북한 간첩과 공비의 침투가 쉽다고 우려했던 주한미군이 67년 시험살포를 해본 뒤 실시한 것이었다. 살포에 앞서 한국 국방부는 68년 1월 전방 철책과 주요시설, 도로주변에 살초제를 사용키로 결정했으며 유엔사에 고엽제 4만 5천 갤런을 요청했다는 것.

이렇게 받은 고엽제는 미군의 지휘 아래 한국 사병이 주로 맡았고 가루로 된 모뉴론은 철모에 담아 손으로 뿌린 사실도 확인됐다. 당시 고엽제 살포작업에 투입됐던 박모씨는 "재래식 분무기를 쓰다 나중에는 그냥 철모에 담아 뿌렸다"면서 "풀베기 작업에 지쳐있던 한국군들은 고엽제를 '하늘이 내린 선물쯤으로 생각해 나무를 베고 직접 손으로 바르기도 했다"고 말했다.

이들에게서도 호흡곤란 사지마비 악성종양 성기능 장애 등의 증상이 나타난 것이 확인됐다. 결국 당시 군인과 피해지역의 민간인들에게도 고엽제 후유증 치료 등 지원이 불가피해졌다. 고엽제 후유의증 지원법은 2000년대에 들어와 "1964년 7월부터 73년 3월 사이 베트남전에 참전하여 전투 또는 종군한 자와 67년 7월부터 70년 7월 사이 대한민국 남방한계선 인접지역에서 군인 군무원으로 복무한 사람들"로까지 지원 대상을 넓혔다. 


5)"철모에 고엽제 담아 맨손으로 뿌렸다"

1999. 11. 19 [동아일보] 29면

그리고 2011년. 이번에는 경북 칠곡 미군기지에 고엽제를 매립한 사실이 주한미군에 의해 폭로됐다. 50년 전 베트남의 전장과 한국 비무장지대에 뿌려진 고엽제와의 전쟁은 지금도 끝나지 않고 진행 중이다.

 


베트남 전쟁과 고엽제

고엽제(defoliant) 이야기가 한국 신문에 처음 등장한 것은 1966년이다. 2년 전 통킹 만 사건으로 미국이 본격 개입하면서 베트남전쟁이 더욱 치열해졌을 때다. 정글에서 기습적으로 치고 빠지는 베트콩('베트남 민족해방전선' 군인)에 놀란 미국은 정글의 나무와 잎사귀, 풀포기까지 씨를 말라 죽이는 고엽 작전을 폈다. 여기에 B-52 중폭격기 편대가 단 한번 출격에 200t의 폭탄을 쏟아 붓는 '융단폭격'도 실시, 베트남 전역을 거의 '초토화'하고 있었다.

 

1)인명살상·자연 파괴 - 월남전의 네 전술

1973. 1. 27 [동아일보] 5면

 한국도 64년 의료부대에 이어 65년엔 청룡부대 등 전투 병력을 파병했다. 그곳 전쟁 소식은 당연히 국내에서도 최대 관심사였다. 그러나 현지 상황은 국민에게 속 시원히 전달되지 못했다. 군의 통제 탓이었다. 전투병 참전 한 달이 안 돼 15명이 전사, 합동위령제도 열었지만 전사자들이 어떤 전투에서 어떻게 스러졌는지도 보도되지 않았다. 당시 군은 보여주기 위한, 자랑하고픈 전투에만 취재를 허용했다. 한국이나 미국 모두 마찬가지였다. 기자들은 대부분 전쟁 상황을 후방 공보실에서 유인물로만 접할 뿐이었다.

젊은 아들을 이역만리 전쟁터에 보낸 부모는 한 줄 소식에 목말라했다. 종군기자들은 삶과 죽음이 엇갈리는 생생한 전투 기사를 쓰고 싶어 했다. 그러나 군의 통제는 철저했다. 이러니 신문은 부수적인 문제나마 끄집어내 보도해 독자 갈증을 풀어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나온 것이 전쟁에 새로 등장한 무기와 성능을 소개하는 것이었다. 게릴라전으로 진행되고 군인 민간인 할 것 없이 무차별 살상하며 '기상 무기'에 '환경 무기'까지 등장한 베트남전쟁의 한 끄트머리라도 알리기 위한 방편이었다.


2)'낙엽제'로 알려진 고엽제의 위험성

고엽제는 처음엔 '낙엽제'로 국내에 알려졌다. 66년4월28일 동아일보는 '월남(베트남)은 미국의 최신병기 첫 실험장' 제하 기사에서 고엽제를 이렇게 설명했다. "전쟁의 성격이 본질적으로 게릴라전이니만큼 밀림에 출몰하는 게릴라에 대한 특수무기가 더욱 발달했다.…밀림 속에 숨은 베트콩을 노출시키기 위한 '낙엽제'로서 무서운 화학약제와 독가스가 살포되고 있다." 이밖에도 땅굴 속으로 타들어가며 구토 가스를 분출하는 CS화학제 등 신무기를 대거 소개했지만 감정 없이 드라이하게 서술한 기사였다.

그러나 이때쯤 미국에서는 무분별한 화학무기의 남용에 대한 우려가 커지고 있었다. 특히 지식인들이 그랬다. 그해 9월19일 노벨물리학상과 의학상 수상자 7명을 포함한 미국 최고과학자 22명은 존슨대통령에게 긴급서한을 보내 "베트남전쟁에서 화학무기 사용을 즉각 자제해줄 것"을 촉구했다. 이들은 "농작물과 인명에 막심한 피해를 주는 화학무기 사용중지를 베트남참전 미 공군에 긴급 지시하고 이러한 무기들의 사용 통제대책 토론회를 바로 백악관에서 개최해 달라"고 요구했다.

 

3)과학 정수 총동원 '미국의 최신병기' 월남은 첫 실험장

1966. 4. 28 [동아일보] 5면

과학자들은 화학무기의 구체적 명칭을 거론하진 않았다. 그러나 당시 미군이 '에이전트 오렌지'로 명명된 고엽제를 대량살포, 베트남 전역에서 초토화 작전을 펼친데 대한 비난 여론이 급등한 만큼 이를 지칭한 것으로 인식됐다. 학자들은 서한에서 "미국은 2차 대전 때만 해도 화학무기를 먼저 쓰지 않는다는 태도를 확고하게 고수했다"며 "그러나 지난 수년 사이 미국 태도는 불투명해졌고 화학무기에 대한 지출도 2차 대전 때의 몇 배에 이르렀다"고 비난했다. 베트남전에서 무차별적, 선제적으로 화학무기를 쓰고 있으며 이런 식의 전쟁은 정의롭지 못하다는 것을 적시한 것이었다. 


 

4)북폭 확대에 맞서 월남북부 지상전 격화

1967. 5. 4 [동아일보] 5면

  67년엔 한국 종군기자가 고엽제 살포현장을 찾았다. 북위 17도, 남북 베트남 사이에 설정된 폭 6마일의 비무장지대 아래서 미군이 벌이는 '무인지대'설정 공사를 취재한 것. 거기에선 불도저와 트랙터로 정글을 밀어버리고 다시 싹이 나지 않게 고엽제를 뿌리고 있었다. "바다에서 산악까지 짙푸르던 천연정글이 트랙터로 대패질 당해 공중에서 보면 푸른 수목 속에 검붉은 펀펀한 들판이 역력히 드러났다." '죽음의 경계선'을 긋는 이 공사는 그러니까 베트콩 침투를 최종 저지하는 마지노선을 만드는 것이었다.

공사 담당 미군 장교는 "불도저로 훑고 트랙터로 땅을 고르고 흙속에 깊이 박힌 식물뿌리를 뽑아내도 불과 몇 달 만에 정글이 다시 생기니까 고엽제를 아주 충분히 뿌려 초토작전을 끝낸다."고 설명했다. 또 '죽음의 경계선' 안에 든 민가는 모조리 불태우고 주민은 전원 이주시킨다는 것. 기자가 정착지에서 쫓겨나는 양민 심정이 어떨 것이냐고 묻자 그는 "우리 집 앞뜰을 누가 닦아버리고 약을 친다면 가만히 있겠소?"라면서도 "그러나 전쟁이니 어쩔 수 없지"라고 말했다.

육상부대가 직접 정글을 부수고 고엽제를 뿌리기도 했지만 사실 미군은 공중살포를 훨씬 선호했다. 지상 작업은 베트콩에 노출돼 공격받기 쉬웠던 때문이다. 베트남전에서 사용한 고엽제는 제초제 2, 4, 5-T와 2, 4-D를 혼합한 물질. 이걸 담은 드럼통을 쉽게 구분하려고 오렌지색을 칠해 놓아 '에이전트 오렌지'란 이름이 붙었다. 미 공군은 지상군으로부터 베트콩 은신지역의 좌표를 받으면 즉각 C123 수송기나 무장 헬기에 '에이전트 오렌지'를 가득 담고 출격해 공중에서 밑도 끝도 없이 정글에 쏟아 부었다.

61년 11월 처음 시작해 10년 동안 미국은 베트남의 산악과 농경지 2만4천 평방km에 고엽제를 살포했다. 이는 베트남 전 경작지의 10%, 전 삼림의 30%에 달하는 면적이었다. 살포량은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지만 미 재향군인회는 약 8,360만 리터가 뿌려진 것을 확인했다고 발표했다. 다국적 화학회사인 다우 케미컬, 몬산토, 발레로 에너지 등에서 제작해 미군에 납품했다. 전쟁이 더욱 격화된 60년대 후반엔 물량이 워낙 달려 미국은 뉴질랜드 등에 고엽제 생산 판매를 위탁하기도 했다.


5)차츰 알려지기 시작한 고엽제의 부작용

문제는 고엽제를 혼합 제조하는 과정에서 독극물질인 다이옥신이 생성된다는 것. 무색무취의 이 맹독성 물질은 분해되거나 다른 물질과 결합하지 않아 자연적으로 사라지지 않는다. 처음 노출되면 두통 구토 발진 등 증세를 일으키며 인체에 축적돼 10여년이 지난 후 암을 유발하고 기형아 출산의 원인이 된다. 미국은 고엽제 살포작전이 베트콩 게릴라의 은신처를 노출시키고 그들의 경작지를 고사시켜 식량보급을 끊으려 했을 뿐, 인체에 해로운 무기로서 쓴 것은 아니라고 변명했다. 그러나 60년대 후반 당시 베트남 국민 약 400만 명이 고엽제에 노출됐고 기형아 출산이 급증하는 등 부작용이 속속 보고되었다. 자연히 세계의 비난도 점증했다.

그러던 69년 11월25일. 미국 닉슨대통령은 "앞으로 미국은 어떤 종류의 세균전도 포기하며 현재 저장된 모든 생물학 무기를 파괴하고 인간을 살상하는 화학무기도 선제사용하지 않는다."고 선언했다. 화생무기의 무분별 사용에 대한 비난에 응답하는 형식이었지만 사실 이는 선언적 의미에 불과했다.

 

6)독성 체내 축적…간암 등 후유증 월남전 고엽제

1992. 5. 28 [동아일보] 11면

이날 미 정부관계자는 보충설명을 통해 "현재 미국이 초원을 태워 적을 수색하는 일과 농작물을 말라비틀어지게 하여 적의 식량공급을 막자는데 대량으로 사용하는 제초용 약품은 제네바 의정서의 적용을 받지 않는다."고 말해 고엽제 살포 중단의사가 없음을 분명히 했다. 


7)닉슨 화생무기 폐기 선언

1969. 11. 26 [동아일보] 1면

 닉슨의 선언 후 한 달 만인 12월27일 미 과학촉진협회(AAAS)의 화생전 위원회 소속 3명의 과학자는 다시 "산모에게 유해한 고엽제 사용을 즉각 중지할 것"을 미 국방부에 호소했다. 미국 전역을 휩쓴 반전데모대들도 화학무기의 사용중지를 소리높이 외쳤다. 반전파의 기수인 여배우 제인 폰다는 고엽제를 몸에 바른 뒤 결국 기형아를 출산하는 퍼포먼스를 선보이며 화학무기가 인류의 미래를 망친다고 경고했다.

70년2월 닉슨은 거듭 "현재 보유 중인 화생 무기를 포함한 모든 독소(毒素)무기를 파괴하고 앞으로 생산도 일절 중지하겠다."고 천명했다. 국제적으론 제네바 군축회의에, 국내적으론 더욱 격화되는 베트남 반전데모에 쫓겨 내놓은 방책이었다. 그리고 그해 12월 닉슨은 고엽제 사용도 일절 중지할 것을 베트남 미군에 지시했다고 밝혔다. 이때부터 75년 4월 사이공 함락 때까지 고엽제는 '공식적으로는' 베트남에서 사라졌다.

공식적인 고엽제 사용금지에도 불구하고..

그러나 상당수 참전용사들은 이후에도 부대별로 고엽제를 살포했다는 증언을 내놓았다. 72년 8월에는 미군 공병전문가들이 "한국이나 쿠바에서 게릴라전이나 재래식 전쟁이 발발할 경우 고엽제와 제초제를 사용할 것을 미 국방부에 건의했다"는 사실이 보도돼 파란을 일으켰다. 이들 전문가들은 특히 "베트남에서의 고엽작전은 매우 잘한 일이며 특수여건 하에서 군사작전을 지원하는데 유익했다"고 밝혀 미군이 여전히 고엽제를 쓰고 있지 않느냐는 의혹도 제기됐다.

전쟁이 끝난 지 한참 지나 스웨덴 스톡홀름의 국제평화연구소는 베트남에서의 고엽제 살포 상황을 수치로 밝혀줬다. 고엽작전 기간 중 베트남에는 9100만kg의 고엽제가 살포됐다. 베트남의 산림과 논 170만ha가 수난을 당했고 그중 57만8천ha에는 두 번 이상 뿌려졌다. 이는 1ha에 42kg의 고엽제를 뒤집어씌운 것과 같았다. 물론 이 수치는 자연 피해를 계량한 것일 뿐이었다. 인간에 직접 미친 피해는 70년대 후반에 들어 확연히 나타났다. 그건 그야말로 암울한, 정말로 대책이 없는 공포였다. 86년 도쿄에서 모습을 보인 베트남전 기형아의 모습을 보며 세계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고엽제 세계가 앓은 후유증

사람들은 놀라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다이옥신이 무섭다더니 사람을 정말 이렇게까지 기형으로 만들어 놓을 수 있단 말인가." 베트남 전쟁이 미국의 패배로 끝난 지 11년, 그에 앞서 미군이 모든 전선에서 고엽제 사용을 중단한다고 밝힌 지 벌써 15년이 지났을 때다. 1986년 6월, 일본 도쿄에 치료차 공수돼온 베트남의 일란성 남아 쌍둥이 모습을 보고 사람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1)베트남전 기형아 日서 치료

1986. 6. 23 [동아일보] 5면

 

 쌍둥이형제는 '상체는 둘, 하체는 하나'였다. 그러니까 머리와 가슴 팔은 따로따로 있으나 소장 대장 방광 항문 등 골반 아래는 붙어있는 이중체아(二重體 兒. Siamese twin)였다. 전후 5년째인 80년 2월 베트남 중부 고원 '지아라이 콘탐'에서 태어난 이들 소년의 이름은 각각 '베트'와 '도크'. 출생 직후 이들이 옮겨진 병원의 이름을 딴 것이었다. "엄마는 아이를 낳고 바로 기절"했고 "나중에 부모들은 아이들 낳은 것 자체를 부인"했다고 한다.


전쟁 때 미군이 고엽제를 집중 살포한 지역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의사들은 다이옥신이 그들을 기형으로 만들었다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이 형제가 도쿄로 공수된 것은 형뻘인 베트가 원인불명의 열병 증세를 보인 탓이었다. 병원은 베트남에서 고엽제 후유증 환자 진료봉사를 하고 있던 일본 적십자사에 긴급 치료를 호소했다. 그래서 종전 후 처음으로 일본 특별기가 베트남 공항에 내려 아이들을 일본으로 후송했다.

비행기 안에서나 일본의 병원에 도착해서나 병든 베트 군은 잠만 잤다. 그러나 도크는 달랐다. 명랑하게 웃고 인사도 하며 장난감을 가지고 노는 등 건강했다. 한 몸뚱이의 한 상체는 거의 혼수상태, 하지만 다른 또 하나의 상체는 아주 건강한 모습을 보여 사람들에게 기이한 감정을 자아내게 했다. 사실 이중체아의 경우 대개 생후 1년이 안 돼 사망하는데 쌍둥이가 6년이나 생존해 있는 것 자체가 기이한 일이었다.

일본 병원에선 이들의 몸을 분리하는 수술도 검토했던 것 같다. 그러나 여기에는 베트남 의료진이 반대했다. "수술이 성공할 것이란 확신이 없다"는 것. 일본에서 이미 10여 차례 분리수술을 했다지만 "이들 경우처럼 복잡한 결합체계를 분리하는 시술은 한 적이 없다"는 점도 고려됐다. 쌍둥이는 무균치료실에서 치료를 받았고 다행히 베트도 위험한 고비는 넘겼다. 뇌수막염으로 진단된 이들의 상태는 일본전역에 시시각각 전해졌다. 아이들을 살리기 위한 후원회가 생겨났고 각계에서 성원이 답지했다.  

2)고엽제 기억상실·기형아 출산 유발

1999. 11. 20 [매일경제] 11면

쌍둥이는 10월에 베트남으로 되돌아갔다. 그리고 2년이 지나 88년. 벌써 8세가 된 쌍둥이 중 도크는 건강했지만 베트는 그러지 않았다. 사실 일본에서 치료를 받고 온 후에도 그는 거의 식물인간 상태로 지냈다. 저항력도 떨어져 있었다. 그래 88년 10월 폐렴증세를 보이자 베트남 의료진도 그들을 분리해야 한다는데 이의가 없었다. 하노이 병원에서 이뤄진 분리수술엔 새벽부터 밤까지 40여명의 의료진이 투입됐다. 수술은 성공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살기 위한 고난과 고투가 세상에 전해질 때마다 미국의 고엽제 살포 행위는 '다시 있어선 안 될 반인류 범죄'로 사람들의 뇌리에 깊이 각인돼 갔다.

 

3)파월장병들 '끝나지 않은 전투' 고엽제 후유증

1999. 9. 2 [동아일보] 21면

 사실 이때 미국에선 이미 베트남 참전용사들의 고엽제 후유증이 커다란 사회문제가 돼 있었다. 일반인보다 훨씬 높은 후두암, 갑상선암 발병률을 보였고 피부병, 난청, 신경마비, 성기능 저하 등 증세에 시달리고 있었다. 전쟁이 끝난 지 6년이 돼 가던 79년 9월 미국의 '베트남 재향군인 에이전트오렌지 희생자회'(VVAOL)는 고엽제 제조회사인 다우 케미컬, 몬산토, 허큘리스, 옥시덴틀, 다이아몬드 샴록 등 7개 화학회사를 상대로 4백억 달러의 집단손해배상청구소송을 냈다.

당초 재향군인회는 미국 정부를 상대로 손배소를 내려 했다. 하지만 미국 법은 "전장에서 입은 피해에 대해 고소 고발하는 것을 금"하고 있어 할 수 없이 고엽제 제조회사를 건 것이었다. 회사들은 완강했다. 자기들은 단순히 "미국정부의 요청에 따라 제초제를 납품했을 뿐, 그 사용에 따른 피해는 전적으로 정부 책임"이라고 발뺌했다. 에이전트 오렌지, 블루, 화이트 등 고엽제 제조방식도 미군이 주문한대로만 만들었다는 것이었다.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다. 사람들은 화학회사의 뻔뻔함에 고개를 젓고 있었다.

이어지는 관계자들의 '美 화학전 실상' 폭로

베트남 정글전투 참여 군인, 에이전트오렌지 살포작전에 투입된 조종사, 고엽제 사용중지를 호소했던 과학자들이 언론인터뷰를 통해 미국의 화학전 실상을 폭로했다. 속속 드러나는 얘기에 사람들은 실망했다. 아니, 실망을 넘어 분노를 느꼈고, 분노에 앞서 미국 정부의 범죄적 행태에 할 말을 잃었다. 애초 미국은 고엽작전을 "남베트남 정부가 요청해" 받아들인 것으로 위장했다. 그래도 전선에 화학무기를 살포하는 것이 알려지지 않기를 바라 C-123기 조종사들의 미군 견장까지 뗀 채 작전에 참여토록 했다.

그뿐이 아니었다. 미국은 전쟁 중 계속해서 "고엽제가 인체에 해를 미치지 않는다."고 강변해왔다. 그래 베트남 상공에선 C-123기가 고엽제를 비처럼 뿌리고 그 밑의 정글에선 육군과 해병대 수색요원들이 그걸 맞으며 작전을 펼치는 일도 일어났다. 병사들은 비에 젖은 듯 약이 흠뻑 묻은 전투복을 입은 채 며칠이건 전장을 누볐다. 땀과 고엽제가 섞여 몸에 스며들었다. 병사들은 목이 마르면 고엽제가 살포된 곳의 강물이나 우물물도 서슴없이 마셨다. 헬멧에 고엽제 가루를 담아 손으로 뿌린 병사도 있었다. 

4)美 질병예방센터 조사결과

 

독성 체내 축적 간암등 후유증 '월남전 고엽제'

1992. 5. 28 [동아일보] 11면

 오렌지 제 희생자 재향군인들이 낸 소송은 84년 5월 8일 브루클린 연방법원에 올라가 있었다. 오스트레일리아의 참전 용사들도 이 집단소송에 참여하고 있었다. 여론은 이미 확실하게 참전 희생자들 쪽으로 기울어 있었다. 그러나 재판이 열리기 수 시간 전, 화학회사들은 재향군인 측에 1억8천만 달러를 지급하는 대신 소송을 취하토록 하는 합의를 전적으로 이끌어냈다. 재향 군인이 내걸었던 4백억 달러의 20분의 1에도 못 미치는 미미한 액수였다. 참전 용사 변호인단은 "승소한다는 확신이 없어서" 화해조정을 받아들였다고 설명했지만 사람들은 그 말을 믿지 않았다.

재판이 열렸다면 여러 가지 사실이 증언을 통해 세상에 공개될 터였다. 무엇보다 미군이 1961년 케네디 정부 때 처음 고엽제 살포를 시작한 이래 10년 넘게 고엽작전을 진행하면서 벌인 반인류 행태가 드러날 수밖에 없었다. 화생방 무기의 사용을 억제토록 한 제네바의정서에 미국이 가입하지는 않았더라도 이를 앞장서 위반한 사실이 속속 증언될 게 뻔했다. 자국민인 미국병사와 동맹 참전국 병사들에게 거짓말을 해가며 고엽제에 노출시킨 사실도 낱낱이 드러나게 돼 있었다.

화학회사들도 마찬가지. 고엽제 사용이 인체에 치명적 해를 입힌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또 몇 차례 실험까지 했으면서도 이를 은폐했거나 실험결과를 조작한 사실이 공개될 게 뻔했다. 화학회사들은 물론 인체에 미치는 다이옥신의 독성이 밝혀진 적이 없다고 강변했다. 하지만 언론은 화학회사들이 실험과학자, 실험대상자, 실험 약제를 제멋대로 선정하고 산출 수치도 조작한 의혹이 있다는 걸 잇달아 보도했다. 브루클린 법정에서 그런 사실이 세계에 공표되면 미국과 그들 기업이 받게 될 비판은 상상하기 힘들 정도였을 것이다. 더군다나 당시는 미소 냉전시대였다.

오렌지 제 희생자회가 받은 1억8천만 달러 중 변호사 비를 제외하고 희생자들에게 간 돈은 그야말로 푼돈이었다. "분명히 고엽제 피해임을 입증하고 그로 인해 암에 걸렸거나 사망한 것이 확실할 때" 몇 천 달러가 돌아갔다. 기준에 따라 몇 백 달러만 받게 될 사람도 있었다. 유족 중 몇이 "가족의 죽음과 질병을 팔아먹고 챙긴" 합의금을 수령할 수 없다고 항변했다. 브루클린 법원에서의 합의는 추악한 거래이며 그걸 바로잡아야 정의가 산다는 의견도 비등했다. 유족 일부가 다시 소송을 낸 건 당연했다.

 

5)월남 참전용사 고엽제 후유증

1992. 2. 13 [경향신문] 23면

80년대 미국 등 베트남전쟁 관련국에서 이처럼 고엽제 파문이 거셌으나 한국은 조용했다. 미국 다음으로 참전자 수가 많은 나라로선 참 이해하기 힘든 일이었다. 고엽제 후유증과 그를 둘러싼 논란, 왜 베트남전쟁 후 15년이 넘도록 한국에선 문제가 되지 않았던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