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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도 조선영토확인

아지빠 2011. 5. 13. 07:47

 

대마도, 독도가  모두  우리영토로  기술된  국제법상  공인지도인  삼국접양 지도  프랑스어판,  1832년 Klaproth제작.

1862년 미·일·영의 영토협상 후 나타나는 1864년의 미국지도, 대한해협이 대마도 남단에 표기되고 대마도 남단 이끼섬도 우리영토로 표기,

1860년조선전도배경지도

1874년 조선세견전도

 

19세기말 부산시 지도(대마도가 부산시에포함)

 

일, '대마도=조선땅' 국제공인 지도 은폐-조작

일본제작 대마도=조선땅 지도 미국에 제시,프랑스-영국 지도도 "대마도는 조선땅" 인정


대한민국 정부수립 후 이승만 대통령은 1948년 8월 18일과 1949년 1월 7일 연두기자회견과 그해 연말 기자회견에서 일본에 대마도 반환을 공식 요구했다.

이 대통령은 당시 우리 지식인 중 일제 식민지 역사교육을 거치지 않고 서양에서 서양 역사를 통해, 구한말 우리 역사와 일본의 한국 영토침탈 과정을 공부한 거의 유일한 지식인이었다.

이 대통령은 연두기자회견서 대마도 반환을 요구하며, “한국과 일본 사이에 오래된 해상 경계가 있다”고 했다. 이런 이대통령의 발언에 나온 '오래된 해상경계'는 과연 어디일까?

이에 대한 의문이 풀렸다.

김상훈 대령(육군사관학교 군사훈련처장)은 11일 열린 뉴데일리 이승만연구소 주최 제3회 이승만 포럼에서 “이 오래된 해상경계는 대마도와 일본 본 섬 사이의 현해탄”이라고 밝혔다.

'오래된 해상 경계'가 현해탄이라면, 대마도는 엄연한 대한민국의 영토가 된다.

일본인 하야시 시헤이(林子平, 1738~93)는 1832년, <삼국접양지도>를 만든다. 이 지도의 해설서가 <삼국통람도설>이다.

하야시 시헤이는 이 책에서 당시 일본과 그 주위 3 개국, 즉 조선, 류쿠국(오끼나와), 하이국(북해도)과 무인도였던 오가사와라(小笠原, 일본 남부 태평양 1000km지점의 80여개 군도)제도에 대한 지도와 해설을 해놓았다.  아래 사진의 지도는 하야시 시헤이가 만든 <삼국접양지도>를 독일인 클라프로토(Klaproth)가 프랑스어로 번역한 것이다.

일본인이 만든 바로 이 지도가 대마도가 명백한 한국 영토임을 분명히 말해주고 있다. 그것도 색으로 구분해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이 프랑스어 판 지도의 국제적 가치는 호사카 유지 교수(세종대 독도연구센터 소장)의 일본어 논문(<三國通覽與地路程全圖> と‘伊能島’の 中の 獨島. 독도 창간호, 영남대 독도연구소, 2008)과 조선총독부 문서(1924년 일제하 발간된 일본천황 열람<삼국통람도설>)에 잘 기술되어 있다.

호사카 유지 교수는 당시 일본 정부가 이 지도를 국제공인지도로 활용했음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일본에 개국을 요구한 미국의 페리는, 오가사와라를 미국령으로 할 목적으로 이미 미국인을 군도에 살게 하였고, 이 사실을 들어 막부에 오가사와라를 미국령으로 인정하도록 요구한 것이다. 이에 대해 막부 측은, 하야시 시헤이의 <삼국통람도설>과 그 삽입지도인 <삼국통람여지노정전도>(삼국접양지도)’를 제시하였는데, 이를 미국이 인정하지 않자, 그 프랑스어판을 제시하여 겨우 미국의 영유권 주장을 물리친 것이다.”

즉 일본은 1861년 2월과 1862년 4월 미국의 해리스(Harris)대사, 영국의 알코크(Alcock) 대사 등 당시 열강 대사들에게 이 지도를 제시하면서, 국제적인 영토 분쟁의 공식 자료로 활용한 것이다.

김 대령은 “이 같은 미-일간의 오가사와라 영토분쟁을 해결한 하야시 시헤이에 대해, 1924년 조선총독부가 다시 발간한 <삼국통람도설>에는 '모든 일본인은 하야시 헤이시 선생의 은혜를 기억하고 감사해야 함. 광격천황께 바쳐져서 원본을 친히 열람하셨음.'이라는 표현이 있어 이 지도를 일본이 공식으로 인정한 것이 증명됐다“고 강조했다.

김 대령은 “대마도가 조선령으로 기록된 삼국접양도를 이토오 히로부미도 알고 있었다”면서 “일본은 이러한 사실을 은폐하고자 증거자료를 없애고, 사실과 다른 자료를 19세기부터 지금까지 다량 배포함으로서 우리를 기만 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김대령은 "시중에서 판매되고 있거나 박물관에 소장된 일본어판 <삼국접양지도>(구글에도 있음)는 물론, 심지어는 일본 극우단체가 제시한 프랑스어판 <삼국접양지도> 조차도 모조품으로 판단된다"고 말했다.

김 대령은 또 미국 국가기록보존소에 보관돼 있는 미국 페리제독의 1865년 일본 지도를 함께 제시했다.

그는 “미국 정부가 미 의회 지시로 미-일 조약체결(1858년)에 따라 페리제독의 정찰결과를 토대로 일본의 지도를 작성하도록 지시한 미 국가기록문서소(NARA ; The U.S National Archives and Records Administration)의 당시 기록과, 1862년 미-일 영토협상 후 미국에서 작성된 1864~68년 일본 지도 역시 대마도를 우리 영토로 표기하고 있다”고 밝혔다.

또 당시 영국지도에도 대마도를 우리의 영토로 표기하고 ‘대마도는 일본 영토에서 제외된다’고 지도에 직접 기록되어 있다고 밝혔다.

김 대령은 “한-일간의 해상 국경선은 일본지명사전에도 ‘고래로부터 일본과 한국, 대륙을 연결하는 통로’로 기록되어 있고, 우리는 현해탄(玄海灘), 일본은 겐카이나다(玄界灘 )으로 부르고 있는 곳, 즉, 대마도 남단 한참 아래인 이끼섬과 일본 본토 사이”라며 “일본이 현재 독도를 자기 영토라고 주장하는 의도는 대마도의 진실을 숨기기 위한 방패막이로 활용하려는 것일 수 있다”고 말했다.

김 대령은 “이승만 대통령의 대마도 반환 요구는 아직도 유효하다”며 “보다 많은 사람들이 이 문제에 대해 관심을 가져주길 바란다”고 강조했다.

“일본이 국제공인 지도 통해 대마도 조선땅 인정”


일본이 19세기말 국제적 공인받은 지도를 통해 대마도를 조선 땅으로 인정했다는 근거가 제시됐다. 육군사관학교 군사훈련처장인 김상훈 대령은 11일 “대마도가 조선 땅임을 일본 정부 스스로가 인정하는 지도를 발견했다”고 주장했다.

김 대령이 공개한 ‘삼국통람도설’은 일본인 하야시 시헤이가 1785년 작성한 책으로 일본과 그 주위 3국(조선, 오키나와, 홋카이도), 무인도였던 오가사와라 제도에 대한 지도와 해설을 담은 ‘삼국접양지도’ 등 5개 지도를 포함하고 있다. 일본은 이를 바탕으로 19세기말인 1860년대 미국과 분쟁하던 오가사와라 제도를 두고 이 책을 증거로 제시했다. 삼국접양지도는 독일의 동양학자인 클라프로스가 번역했고 이를 바탕으로 오가사와라 제도의 영유권을 인정받았다.

이 지도에 따르면 오가사와라 제도는 일본 영토로 규정했지만 울릉도와 독도는 물론이고 대마도까지 조선 영토로 표기돼 있다. 이 지도가 처음 공개된 것은 아니지만 지금까지는 대마도가 일본령으로 표기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김 대령은 “과거에 공개된 필사본은 흑백이라서 대마도의 영토 구분이 어려웠다”며 “원본은 분명히 대마도를 조선 땅으로 분류하고 있다”고 말했다.

원본은 독도연구 전문가인 한상복 박사가 호주에서 구입한 것으로 추정되며, 김대령은 이 지도를 국회도서관 독도특별 전시관에서 찾았다고 설명했다. 경향

 

세종실록 “대마도는 경상도 땅이다”

"대마도라는 섬은 본시 계림(신라의 별칭으로 경상도를 가리킨다)에 속한 우리나라 땅이다. 이것은 문서에도 기록된 명백한 사실이다."-<조선 세종실록>

지난 11일 뉴데일리 이승만연구소가 주최한 제3차 이승만포럼에서 김상훈 대령이 "대마도를 명백한 대한민국 영토"라고 주장한데 이어 이를 뒷받침하는 역사적인 자료들이 다수 발견되고 있다고 뉴데일리가 보도했다.

뉴데일리에 따르면 한단고기 고구려본기는 "구주(규슈)와 대마도는 삼한이 나누어 다스리던 곳으로 본래 왜인들이 세거(世居)하던 곳이 아니라"하고 "대마도는 삼가라로 나뉘었으니 좌호가라는 신라에 속하고 인위가라는 고구려에, 계지가라는 백제에 속하였다"고 기술하고 있다.

삼국시대 초기에는 대마도를 진도(津島)라고 불렀다는 기록도 있다. 또 고려 공민왕 때는 대마도주는 고려로부터 지방 무관직인 만호(萬戶) 벼슬을 받은 것으로 기록돼 있다.

함께 조선 초기 신숙주 등 17명이 통신사로 일본에 다녀오면서 남긴 '해행총재'(海行摠載)에는 '삼국시대에 이미 일본에 사는 왜인들은 대마도를 외국으로 보았고, 대마도 사람들은 스스로 반(半) 조선인으로 불렀다"고 기록돼 있다.

또 조선 세종실록에는 "대마도라는 섬은 본시 계림(신라의 별칭으로 경상도를 가리킨다)에 속한 우리나라 땅이다. 이것은 문서에도 기록된 명백한 사실이다. 다만 땅이 몹시 좁은데다 바다 한가운데 있어 내왕이 불편한 관계로 백성들이 들어가 살지 않을 뿐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1719년 조선통신사를 수행해 제술관으로 일본을 방문한 신유한은 '해유록'(海遊錄)에서 "대마도는 조선의 한 고을에 지나지 않는다. 태수가 조선 왕실로부터 도장을 받았고 조정의 녹을 먹으며 크고 작은 일에 명을 청하여 받으니 우리나라에 대해 번신(藩臣)의 의리가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처럼 대마도는 명백한 조선 영토로 인식되다가 일본이 근대국가 재편 과정에서 일본 영토로 편입했다. 당시 조선은 쇄국정책으로 열강의 개방 요구에 맞서다 이 같은 국제 정세에 적극 대처하지 못하고 대마도의 일본 지배를 막지 못했다.

이와 관련 각계에서는 "역사적인 근거가 명백한 만큼 대마도에 대해 우리 땅이라는 주장을 적극 펼칠 필요가 있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