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경과정보.기상/사랑과믿음

석가모니가 설산에서 나오다

아지빠 2022. 4. 30. 20:07

석가모니가 설산에서 나오다

등록 :2022-04-29 13:56수정 :2022-04-29 14:17

석가모니가 설산에서 나오다

(이미지-01)

출산석가도, 도쿄 박물관 소장품. <한겨레> 자료사진.

용자봉질출왕궁(龍姿鳳質出王宮) 구면회두하설봉(垢面灰頭下雪峰)

서원욕궁제유해(誓願欲窮諸有海) 부지제유기시궁(不知諸有幾時窮)

빼어난 자태로 왕궁을 나오셨다가 까칠한 얼굴로 설봉을 내려오면서 온갖 중생을 모두 제도하겠다고 맹세하니 언제나 다 할려는지 알 수 없구려

이 선시에 이야기를 입힌 축원묘도(元나라 竺元妙道 1257~1345) 선사는 대주(臺州 절강성) 영해(寧海) 출신으로 진(陳)씨 집안에서 태어났다. 항주(杭州 절강성) 육화사(六和寺)로 출가했으며 아육왕산(阿育王山)의 횡천여공(橫川如珙 임제종 양기파) 선사의 법을 이었다. 이후 대주(臺州) 소주(蘇州) 지역의 여러 선원에서 법석을 폈으며 스스로 ‘동해모옹’(東海暮翁 동해지방의 저물어 가는 늙은이)이라 하였다. 인종(仁宗) 황제는 ‘정혜원명(定慧圓明) 선사’라는 시호를 내렸다.

묘도 선사는 ‘석가출산상’(釋迦出山相 석가모니가 설산에서 나오는 모습)에 대하여 송(頌)을 붙였다. 하지만 그는 이 선시에서 설산을 설봉이라고 한 것은 운(韻)자의 구애 때문에 할 수 없이 바꾼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중국 땅에서 살아가는 모든 이가 알고 있는 설봉산(복건성 설봉산에 ‘북쪽의 조주 남쪽의 설봉’이라 할 만큼 남방을 대표하는 설봉의존 선사가 수행했던 곳)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도의 설산을 설봉으로 바꾸었기 때문에 게송의 완결성에 다소 흠집이 생기게 되었노라고 알아서 미리 고백했다. 왜냐하면 게송을 지을 때는 반드시 사실(事)과 이치(理)를 동시에 갖추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것을 두 다리의 길이가 똑같지 않으면 제대로 걸을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라고 비유했다. <산암잡록>에는 이런 자기변명까지 가감 없이 실려 있고 또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까지 달아놓았다. 운(韻)이라는 형식을 무시하자니 무식하다는 소리가 뒤따라 나올 것이고 운(韻)을 따르자니 지명의 고유명사까지 바꾸어야 하는 자기모순에 빠졌기 때문이다.

(이미지-02)

히말라야 안나푸르나. 조현 종교전문기자

(해설)

전통적인 부처님 일대기는 ‘팔상록’(八相錄)이다. 도솔천에서 인간세계로 오는 모습(도솔내의상), 카필라국에서 왕자로 태어난 모습(비람강생상), 궁궐의 사대문을 나서면서 생로병사를 목격하는 모습(사문유관상), 왕궁의 성벽을 넘어 출가하는 모습(유성출가상), 설산에서 수행하는 모습(설산수도상), 번뇌라는 마장을 이겨내는 모습(수하항마상), 녹야원에서 처음으로 설법하는 모습(녹원전법상), 쌍림에서 열반하는 모습(쌍림열반상)을 말한다. 이렇게 여덟가지 극적인 인생전환점을 중심으로 서술하는 방식으로 기술했다. 그런데 선종에서는 ‘설산출산상’(雪山出山相)을 더해 9상록을 만들었다. 그 이유는 이 모습에 선종적인 의미를 부여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붓타 선사’의 탄생인 것이다.

선사들은 기존 팔상록이 아니라 ‘설산출산상’에 적지 않은 의미를 부여했다. 보통 사람이 수행을 통해 깨달음을 얻은 뒤 다시 선사적인 방편을 갖추어 중생세계로 나아갔기 때문이다. 그래서 선가(禪家)에서는 출산(出山)에 관한 선시는 물론 ‘출산석가도’(出山釋迦圖)라는 선화(禪畵)까지 두루 등장한다.

남송시대 선(禪) 화가인 양해(梁楷 생몰연대 미상)가 그린 ‘출산석가도’(出山釋迦圖 도쿄 국립박물관 소장. 일본 국보)가 가장 압권이다. 깨달음을 얻은 석가가 설산을 나오는 모습은 세밀한 사실적 묘사는 말할 것도 없고, 내면의 심리까지 표현한 뛰어난 작품이다. 크기는 가로 50㎝ 세로 1m가 약간 넘는다. ‘어전도면’(御前圖面)이란 낙관이 찍혀 있는 것으로 미루어보건대 궁중화원에서 그린 것으로 보인다. 양해는 남송 4대 임금 영종(寧宗 재위 1168~1224)에게 화가로서 최고 벼슬인 대조(待詔)를 받았지만 그 증표로 하사받은 금대(金帶 금띠)를 버려두고 표표히 궁궐을 떠나 산으로 갔다는 전설적인 인물인지라 그 뒤 양풍자(梁風子 바람 같은 양씨)라는 별명까지 생겼다. 스승은 궁중 화가인 가사고(賈師古)인데 제자는 그 스승마저 뛰어넘은 솜씨라는 평가를 받았다. 고려 공민왕과 조선 김홍도 역시 ‘석가출산상’을 그렸다고 하나 현재는 전하지 않는다.

서두의 출산송(出山頌)에서 보듯이 왕자의 신분일 때는 자태가 빼어났다. 그런 임금의 아들이 설산에서 고행을 했으니 얼굴도 까칠해질 수밖에 없다. 피부에는 때가 묻었고 머리카락에는 잿가루(灰)까지 날렸다. 선가에서는 회두토면(灰頭土面)이 바로 청정법신(淸淨法身)이라고 했다. 마지막 구절은 선종 특유의 역설적 반어법이다. 이 세상 모든 사람을 하나도 남김없이 내가 깨친 내용을 한 마디도 빼지 않고 끝까지 전달하겠다는 큰 뜻을 마지막까지 실천하겠다는 의미다. 역설적인 반어법을 액면 그대로 이해한다면 작가가 의도하는 본래 의미를 그르치기 마련이다.

음력 사월팔일은 아기 부처님이 이 세상에 오신 날이다. 설산출산일은 선사의 모습으로 다시 하산(下山)하신 날이라 하겠다.

원철 스님/조계종 불교사회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