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대가야 땅에서 나온 백제풍 무덤…주인의 국적은?
등록 :2022-02-18 04:59수정 :2022-02-18 08:16노형석 기자 사진
[노형석의 시사문화재] 경남 산청 ‘M32호분’ 발굴 현장
봉분속 돌무더기 석실 구조물 아치형 천장·측벽 모두 온전
전형적인 송산리형 분묘 구조 “백제세력 영향력 행사 증거” 해석
“단순히 장제문화 퍼진 것” 견해도
(백제풍무덤-01)
백제계 굴식돌방(횡혈식 석실) 무덤으로 확인돼 학계의 주목을 받고 있는 경남 산청 생초 엠(M)32호분의 무덤 석실 내부. 6세기 초 백제가 웅진(공주)에 도읍하던 시기 지배층 무덤 형식인 굴식돌방 무덤의 전형적인 얼개를 보여준다. 사방의 벽체가 아치형의 윤곽을 그리며 천장석을 향해 좁혀져 올라가는 백제 석실무덤 특유의 궁륭형 상부 얼개를 지니고 있다는 점이 눈길을 끈다.
고대 왕국 백제의 영역은 동쪽으로 어디까지 뻗어나갔을까? 충청·전라도 넘어 경상도 내륙 깊숙한 곳까지 진출했을까? 가야를 직접 지배하며 신라와 대치했을까?
국내 역사학계 연구자들이 오래 품어왔던 궁금증을 풀어줄 단서가 새해 벽두에 나타났다. 지리산 동쪽 자락의 경남 산청 땅에서 6세기 제대로 된 백제풍의 지배층 무덤이 나왔다. 굴 모양으로 무덤 옆 측면을 파고 들어가 주검자리 묘실을 만든 무덤. 여러번 장사를 지낼 수 있게 만든 이른바 굴식 돌방(횡혈식 석실) 무덤이 출현했다. 백제가 고구려군에 의해 첫 수도 한성(서울)을 함락당하고 475년 웅진(공주)으로 천도한 뒤 무령왕(재위 501~523) 치세를 계기로 중흥하기 시작했던 시기 왕족·귀족의 전형적인 무덤 얼개다. 그것도 대가야의 주된 영역으로만 생각해온 경남 서부 내륙의 산청군 생초고분군에서 온전한 백제 지배층의 무덤이 나왔다는 소식에 학계 관심이 집중되는 중이다.
(백제풍무덤-02)
능선에 자리한 산청 생초고분군 서남쪽 자락에서 발견된 엠(M)32호분의 들머리 부분. 무덤 안 돌방으로 들어가는 널길(연도)의 문이 보인다. 널길 바닥에는 따로 돌들을 깔고 배수로를 틔워놓은 자취(나란히 내려오는 두줄의 흰색 선 부분)가 보인다.
지난 15일 오전 산청군 생초면 어서리 산93-1번지 일대의 태봉산 능선 자락에 강풍과 추위를 무릅쓰고 전국 각지에서 중견 고고학자들이 몰려들었다. 지난 연말부터 이 능선 끝자락에 있는 엠(M)32호분을 발굴한 극동문화재연구원의 현장을 보러 온 이들이었다. 산청의 젖줄 경호강을 굽어보면서 능선 끝자락에 자리한 지름 13m의 봉분을 절개해 돌무더기 석실 구조물이 드러나 있었다. 석실은 앞쪽에 널길 출입문을 틔워놓고 안에 있는 미지의 세계로 연구자들을 손짓하고 있었다. 류창환 연구원장의 안내를 받아 안전모를 쓰고 묘실로 가는 널길(연도)을 지나 묘실로 들어갔다. 길이 2.8m, 너비 1.7m의 묘실은 2평도 안 되는 4.85㎡의 다소 비좁은 공간이다. 하지만 들어간 순간 바라본 천장과 벽체의 모습들은 탄성을 발하게 했다.
(백제풍무덤-03)
엠(M)32호분 무덤방 내부. 환한 바깥으로 통하는 널길(연도)이 한쪽으로 치우쳐 뚫린 것이 보인다. 벽체가 위로 갈수록 사다리꼴 모양에서 아치형 모양으로 점점 좁아져 천장을 덮는 판석과 맞물리는 궁륭형 얼개를 하고 있다. 6세기 웅진 도읍 시기 백제 석실무덤의 전형적인 특징들이다.
송산리형 백제 귀족고분의 특징인 아치형 천장이 거의 훼손되지 않고 생생하게 남아 있었다. 사방의 벽체가 아치형의 윤곽을 그리며 천장석을 향해 좁혀져 올라가는 백제 석실무덤 특유의 무지개형 혹은 궁륭형 상부 얼개다. 6세기 초 백제가 웅진에 도읍하던 시기 지배층 무덤 형식인 굴식 돌방 무덤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널길에 문지방석과 문주석을 놓고 문비석(막음돌)으로 가로막아 폐쇄한 구조는 가야인들의 석실이나 석곽 고분과는 크게 다른 백제 계통 석실분의 특징이다. 충남 공주 송산리 고분군(무령왕릉 포함)의 이른바 송산리형 석실과 거의 똑같은 구조의 수장급 무덤임이 분명하다. 깬돌로 측벽과 좁아지는 천장부까지 채운 전형적인 백제 스타일 석실인데, 송산리 고분군에서도 볼 수 없는 측벽-천장의 연결 부분과 천장 판석까지 모두 온전히 남아 있었다.
(백제풍무덤-04)
산청 생초고분군의 엠(M)32호분 석실을 덮었던 봉분을 뒤에서 본 모습. 봉분 가운데 부분을 절개해 석실의 상부를 이루는 돌무더기가 드러나 있다. 능선 끝자락에 있는 봉분 앞쪽으로 산청의 젖줄인 경호강과 들녘의 모습이 보인다.
무령왕릉과 여러 왕릉급 고분이 자리 잡은 공주 송산리 고분군의 무덤 양식이라고 하여 송산리형으로 불리는 이 고분 양식이 뜻밖에도 지리산 너머 산청 땅 계곡에서 나타났다는 사실이 학자들을 설레게 했다. 미도굴 무덤이지만, 아쉽게도 당대 백제 풍습상 부장품을 별로 묻지 않아, 삭아 없어진 관에 쓰인 관못과 작은 손칼(도자) 외엔 다른 유물은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자갈과 점토가 깔린 채 정연하게 열석으로 주검자리를 표기한 묘실 바닥엔 망자의 영기가 배어나오는 듯했다. 발굴 당시 막음용 돌인 문비석이 무려 3개나 나온 것으로 봐 한 사람을 장사 지낸 뒤 추가로 두 사람의 망자를 더 장사 지낸 것으로 추정된다.
묘실을 돌아보고 나온 학자들 사이에선 왜 산청에 백제 지배층 묘실이 등장했는지를 놓고 여러 의견이 오갔다. 백제계 유적이 분명한데 과연 백제인의 것일까란 게 논점이 됐다. 성정용 충북대 교수는 인근 산성에서 백제계 유물인 인장 찍은 기와가 나오고 백제 송산리 형식의 전형적인 분묘 구조란 점을 중시했다. 백제 세력이 분명하게 산청에 영향력을 행사한 증거라고 해석했다. 반면, 김낙중 전북대 교수와 박천수 경북대 교수는 백제풍 기와나 백제풍 묘실이 보이지만, 주거지나 토기 등 다른 결정적인 백제인의 유물들이 나오지 않았기에 대가야 세력이 당시 우호세력이던 백제의 장제문화 영향을 받아 이런 식의 무덤을 축조한 것 아니냐는 견해를 폈다.
(백제풍무덤-05)
엠(M)32호분 석실의 천장 부분. 사방의 벽체들이 아치형 곡면을 그리며 좁혀지다가 정점의 천장석 1매와 맞물리는 궁륭형 얼개를 띠고 있다.
백제는 5~6세기 경상도의 가야 영역을 집요하게 점유하려고 애썼다. 고구려에 빼앗긴 한강 유역을 수복하기 위해 신라와 나제동맹을 결성한 이래 후방 방비를 위해 가야 지역을 직접적인 지배권 아래 끌어들이려고 신라와 물밑 암투를 벌였다. 이른바 ‘군령·성주’란 이름으로 가야 지역에 군사적 지배권과 행정권을 행사하는 관료들을 파견했다는 기록들도 보인다. 한반도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남북과 열강의 외교전이 치열한 상황에서 산청에서 1600년 전 한반도 남부를 떠돌았던 전란과 외교의 역사를 떠올리게 하는 유적이 바로 산청 생초고분군의 엠32호 무덤이었다.
산청/글·사진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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