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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률의 개념과 일본원폭투하

아지빠 2019. 10. 8. 11:09





확률의 개념과 일본원폭투하

 

 

확률이란 일정한 조건 아래에서 어떤 사건이 발생할 가능성을 수 값으로 나타낸 것을 말한다.

수학의 확률 이론은 17세기 중엽 프랑스의 수학자인 블레즈 파스칼(Blaise Pascal, 1623~1662년)이 프랑스의 수학자인 피에르 드 페르마(1601~1665년)와 서신으로 도박 상금 문제를 풀면서 다루기 시작했다고 한다. 현재에도 확률은 여러 분야에서 아주 중요하게 쓰이고 있다.

원자 폭탄을 개발하기 위한 시뮬레이션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확률이라는 수학적 지식을 필요로 한다. 예를 들어 앞뒤가 대칭인 동전이나 눈금이 6개인 주사위를 던졌을 때 특정한 면이나 특정한 수가 나올 가능성은 각각 1/2과 1/6이다. 또 주사위를 던졌을 때 짝수{2, 4, 6}가 나올 확률은 P(A)=3/6=1/2이다. 따라서 사건 A가 발생할 수학적 확률 P(A)는 다음과 같이 표현된다.

P(A)가 1이면 사건 A가 반드시 일어나며, P(A)가 0이면 사건 A는 반드시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일반적으로 확률 P(A)의 값은 0≤P(A)≤1으로 표현할 수 있다. P(A)는 1에 가까울수록 사건 A가 발생할 가능성이 많지만 0에 가까울수록 A가 발생할 가능성이 적다는 뜻이다.

이러한 수학적 확률은 실제 경험에 앞서서 계산될 수 있다. 동전이나 주사위를 많은 횟수를 던져봄으로써 얻어지는 통계적 확률은 수학적 확률에 근접한다. 확률이 관찰하는 횟수를 거듭하면 할수록 일정한 값 P에 한없이 가까워진다는 큰수의 법칙(law of great number, 경험적 확률과 수학적 확률과의 관계가 점점 가까워진다는 법칙)을 따르기 때문이다

확률에 관한 초보적인 성질 문제로서는 덧셈정리, 곱셈정리 등을 들 수 있다. 확률의 덧셈정리는 어떤 두 사건 A, B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표현된다.

두 사건 A 또는 B가 나올 확률은 한쪽이 일어날 확률 P(A) 또는 P(B)를 더하고 동시에 A와 B가 일어날 확률을 빼면 된다.

예를 들어 1개의 주사위를 던졌을 때 주사위에 홀수가 나올 사건 A={1, 3, 5}이거나 3의 배수가 나올 사건 B={3, 6}이 나타날 확률은 P(A)=3/6, P(B)=2/6, P(A∩B)=1/6이므로 확률의 덧셈정리를 이용하면 다음과 같다.

확률의 곱셈정리는 어떤 두 사건 A, B가 서로 무관하게 나타나는 독립 사건인 경우 A와 B가 동시에 일어날 확률 P(A와 B)는 다음과 같이 표현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주머니 속에 빨간 당구공 3개와 파란 당구공 2개가 들어 있을 때 한 개씩 두 번 꺼내는 경우 두 개가 모두 빨간 당구공일 확률을 생각해 보자. 이때 첫 번째 꺼낸 공을 주머니에 다시 넣는 경우와 아예 넣지 않는 경우에 두 번째 꺼낸 빨간 공의 확률에 영향을 주므로 나눠서 생각해야 한다.

첫 번째 꺼낸 공을 주머니에 다시 넣지 않는 경우에는 사건이 종속되어 있으며 첫 번째 빨간 당구공이 나올 확률과 두 번째 빨간 당구공이 나올 확률이 다르므로 다음과 같이 계산할 수 있다.

다시 넣는 경우에는 독립된 사건이며 첫 번째 빨간 당구공이 나올 확률과 두 번째 빨간 당구공이 나올 확률이 동일하므로 아래와 같이 계산할 수 있다.

독립된 사건의 경우에는 첫 번째 일어난 사건이 두 번째 사건에 전혀 영향을 주지 않는다.

예를 들어 동전을 던져 우연히 앞면이 연속적으로 10번 나왔다고, 다음에 던졌을 때 뒷면이 나올 확률이 높아지는 것은 아니다. 전쟁 중에 폭탄이 떨어져 파괴된 웅덩이에 숨는다고 거기에 폭탄이 다시 떨어질 확률이 줄어 생존 확률이 높아지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독립된 사건들이 동시에 발생할 확률은 각각 발생한 사건들의 확률을 곱해서 작용된다. 예를 들어 숫자 0와 1이 번갈아 나오는 회전 기계에 5자리 전부 숫자 1이 나올 확률을 계산해 보자. 숫자 1이 나올 확률이 50퍼센트이므로 1이 5자리 연속으로 나올 확률은 3.1퍼센트로 아주 낮아진다.

또 엔트로피 정의도 확률로 나타낼 수 있다.

엔트로피는 물질의 열적 상태를 표현하는 물리량의 하나로, 에너지 흐름뿐만 아니라 자연 현상을 이해하고 판단하는 데 중요한 지침 역할을 하고 있으며 엔진 사이클이나 비행기 날개 주위 흐름 해석에도 활용된다.

일반적으로 엔트로피(dS=dQ/T)는 고전 열역학적인 측면에서 거시적인 열역학적 물리량(온도, 부피, 압력)으로 다루지만 분자 운동의 통계적 분석으로 미시적인 관점에서 표현될 수 있다.

수많은 입자로 구성된 계를 다루는 열역학을 통계적으로 취급해야 한다고 처음 생각한 사람은 제임스 맥스웰(1831~1879년)이다. 맥스웰의 기체에 대한 동역학적 이론을 통계적으로 처리해 더욱 발전시킨 사람은 오스트리아의 물리학자 루트비히 볼츠만(1844~1906년)이다.

수많은 입자들로 구성된 계는 여러 가지 거시적인 열역학적 물리량(온도, 부피, 압력)을 지니고 있다. 각각의 미시적인 상태에 있을 확률이 동등하다고 가정하면 거시적인 물리량에 대한 확률은 다음과 같이 기체 분자들이 어떤 부피에 위치할 방법의 숫자를 나타내는 미시적인 상태의 수에 비례한다고 볼 수 있다.

1877년 볼츠만은 논문에서 엔트로피를 미시적인 상태의 수 W에 로그를 취해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여기서 k는 볼츠만 상수를 나타내고, W는 계가 가질 수 있는 미시적인 상태의 수(열역학적 확률)를 나타낸다. 엔트로피는 미시적인 상태의 수, 즉 분자들의 배열 방법 수의 로그에 비례하므로 엔트로피는 확률의 로그에 비례한다고 할 수 있다. 로그를 취하면 곱셈으로 나타내야 하는 확률을 덧셈으로 바꿔 줄 수 있어 전체 엔트로피는 각 계의 엔트로피를 더한 값으로 단순하게 계산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핵 폭탄 투발 수단: 비행기

인류 역사상 두 번 사용된 핵 폭탄은 비행기로 투발되었다.

첫 번째는 1945년 8월 6일 폴 워필드 티베츠(1915~2007년) 대령이 B-29 폭격기에 리틀 보이를 탑재하고 출격해 히로시마에 투발한 것이다. 이어 1945년 8월 9일 찰스 스위니(1919~2004년) 소령이 B-29 폭격기에 팻맨을 탑재하고 출격해 나가사키에 투발했다.

핵 폭탄 투발 수단을 운영하는 북한 공군은 2012년에 공군사령부를 항공 및 반항공사령부로 명칭을 변경했으며, 사령부 예하 5개 비행사단을 비롯해 1개 전술수송여단, 2개 공군저격여단, 방공부대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실제 핵 폭탄 투발 수단으로 비행기가 사용된 과정을 알아보고, 북한 공군이 보유한 비행기 중에서 어떤 비행기가 핵 폭탄의 투발 수단으로 사용될 수 있는지도 살펴보자.

첫 번째 투발: 히로시마

제2차 세계 대전 종결 직전 1945년 7월 포츠담 회담에서 해리 S. 트루먼(1884~1972년)은 자세한 내용을 밝히지 않은 채 트리니티 실험이 성공해 강력한 신무기를 보유한 것을 밝혔다.

이 회의에서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요구했으나 일본이 이를 거부하자 일본에 대한 핵 폭탄 투하는 기정사실화되었다. 미국 국방부는 일본 히로시마와 고쿠라(제2 목표: 나가사키)에 핵 폭탄을 투하하기로 결정했다.

우선 미국 본토에서 제작한 원자 폭탄을 사이판 남쪽으로 5킬로미터 거리에 있는 티니안 섬으로 운반해야 했다. 티니안 섬에 있는 활주로에서 미 육군 항공대 소속의 B-29 폭격기가 일본 히로시마에 원자 폭탄을 투하하기 위해 출격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1945년 7월 16일, 중순양함 인디애나폴리스의 함장 찰스 맥베이 해군 대령은 원자 폭탄을 탑재하고 샌프란시스코를 출발해 열흘 만인 7월 26일에 티니안 섬에 도착해 원자 폭탄을 성공적으로 전달했다. 그 당시 미국 해군은 원폭 이송 임무를 극비로 취급했으며, 인디애나폴리스는 일본 해군이 눈치 채지 못하게 구축함 등 대잠 호위함 없이 단독으로 이동했다.

인디애나폴리스는 괌으로 보내졌으며 차기 작전을 위해 필리핀 중부 레이테 섬으로 이동하기 위해 7월 28일에 괌을 출발했다. 이때에도 샌프란시스코에서 출발할 때와 마찬가지로 상부에서 호위함을 붙여주지 않아 단독으로 항해했다.

인디애나폴리스는 괌을 출발한지 이틀 후 7월 30일 새벽 00:15분에 하시모토 모치츠라 중좌가 이끄는 일본군 잠수함 I-58에 어뢰 2발을 맞고 필리핀해상에서 격침되었다. 원자 폭탄을 탑재했을 때 격침되었다면 제2차 세계 대전은 어떻게 되었을까?

4발 엔진의 프로펠러 전략 폭격기인 에놀라 게이는 제2차 세계 대전의 마지막 단계인 1945년 8월 6일에 핵 폭탄을 투발한 최초의 항공기다. 보잉 B-29 슈퍼포트리스 폭격기로 기장 티벳 중령의 어머니 에놀라 게이 티벳 이름을 딴 것이다. 이 폭격기는 두 번째 원자 폭탄 공격인 나가사키 투하에서 기상측정을 위한 항공기로 참여했다.

히로시마 임무 수행후의 에놀라 게이

에놀라 게이는 1945년 6월 14일 B-29의 훈련 기지였던 유타 주의 웬도버 기지를 출발해 괌에 도착해 폭탄실을 수리한 다음 7월 6일에 티니안섬의 노스 필드에 도착했다.

에놀라 게이는 7월 한 달 동안에 8차례의 훈련 비행을 수행했으며, 24일과 26일에 날씨와 대공 방어 태세를 파악하기 위하여 일본 고베와 나고야의 산업기지에 실험용 폭탄(모양과 크기는 원자 폭탄과 거의 동일한 폭탄이지만 핵을 탑재하지 않은 폭탄)을 투하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에놀라 게이는 7월 31일에는 실제 임무를 수행하기 위한 티니안 섬 인근에 모의 원자 폭탄을 투하하는 리허설 비행까지 수행했다.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는 최초의 핵 폭탄 임무의 주 목표 지점이었고, 고쿠라(지금의 기타큐슈)와 나가사키는 대체 목표 지점이었다. 티베츠 중령이 조종한 에놀라 게이는 2대의 B-29를 동반하고 티니안 노스필드를 이륙한 후 히로시마까지 2,530킬로미터를 날아가기 위해 약 6시간을 비행해야 했다.

(이미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원폭 투하 비행 경로

이 지도에서 1945년 8월 6일의 히로시마 원폭 투하를 비롯하여 8월 9일의 주 목표였던 북 규슈의 공업 지대인 고쿠라와 2차 목표였던 나가사키 등에서 그 당시 수행했던 비행 임무를 파악할 수 있다. 에놀라 게이는 이오지마(Iwo Jima)를 통과해 히로시마를 향해 직선으로 비행하고 같은 경로로 귀환했다.

한편 나가사키에 원폭을 투하한 복스카는 야쿠시마 섬을 지나 고쿠라, 나가사키까지 비행했으며, 티니안으로 귀환하기 전에 연료 부족으로 인해 오키나와에 비상 착륙했다.

히로시마 원폭 투하에 투입된 B-29는 6일 새벽 2시 45분 티니안 노스필드 비행장을 이륙한 후 오전 6시에 일본 남쪽 해상에 있는 이오지마까지 각자 비행한 다음 9,300피트(2,835미터) 고도에서 랑데부해 일본 히로시마로 향했다.

일본은 티니안 섬을 1920년부터 정식으로 통치하기 시작했으며, 1930년대 말부터 섬 북쪽 끝에 1,450미터 길이의 하고이 비행장을 건설했다. 1944년 7월에 미국 해병대가 티니안 전투를 통해 점령한 이후 미국 공군 기지로 활용되었다.

미국은 일본이 건설한 하고이 비행장을 B-29 폭격기를 이착륙이 가능하도록 2,440미터 길이로 확장시켰다. 아이러니하게도 일본에 원폭을 투하한 B-29는 일본이 건설한 비행장에서 출격한 셈이다.

에놀라 게이는 히로시마 상공에 도착해 32,333 피트(9,855 미터) 고도에서 명확한 시야를 확보했다. 오전 9시 15분(히로시마 시간으로 오전 8시 15분)에 계획대로 31,060 피트(9,470 미터) 고도에서 우라늄형의 포신형 핵 폭탄인 리틀 보이를 투하했다.

에놀라 게이는 폭발로 인한 충격파를 피하기 위해 60도로 급선회하고 속도를 증가시켜 투하 장소에서 18.5킬로미터 떨어진 곳까지 피했다.

원자 폭탄 리틀보이는 530미터에 달하는 구름 기둥이 솟아오르고 TNT의 15 킬로톤에 해당하는 폭발을 일으켰다. 반경 약 1.6킬로미터 정도를 초토화시켰으며, 12제곱킬로미터가 파괴되었다. 도시 인구의 30퍼센트인 7~8만 명이 폭발과 폭풍으로 사망하고 또 7만 명이 부상을 입었다.

에놀라 게이는 새벽에 이륙한 지 12시간 13분 만인 오후 2시 58분 티니안 기지로 안전하게 귀환했다. 언론인과 사진기자를 비롯한 수백 명의 사람들이 에놀라 게이가 착륙하는 것을 보기 위해 모여 들었다. 에놀라 게이 기장인 티벳은 제일 먼저 비행기에서 내렸고 그 자리에서 수훈 십자가 훈장을 받았다.

전쟁이 끝나고 에놀라 게이는 미국 뉴 멕시코 주 로스웰 군 비행장 등 여러 장소에 오랫동안 방치되다가 1946년 8월 육군 항공대에서 제적되고 스미스소니언 박물관 명의가 되었다. 1961년 메릴랜드 주 스윗랜드에 있는 스미스소니언의 저장 시설에 해체 보관되었다.

2003년에는 복원된 B-29가 워싱턴 DC 덜래스 국제 공항에 있는 국립 항공 우주 박물관인 스티븐 우드바 헤이즈 센터에 영구 전시되었다.

두 번째 투발: 나가사키

미국은 히로시마 원자 폭탄을 투발한 이후에도 일본이 항복을 하지 않고 별 반응을 보이지 않자 히로시마 임무에 이어 또 하나의 원자 폭탄 공격을 속행하기로 결정했다. 원래 8월 11일로 예정되었으나, 악천후가 예상됨에 따라 8월 9일로 앞당겼다.

이번에는 스위니 소령이 조종하는 B-29 복스카가 플루토늄형의 내폭형 핵 폭탄인 팻맨을 투발하는 임무를 맡았다. 보잉 사에서 제작한 복스카는 1945년 3월에 미 육군 항공대에 인도되었으며, 조종은 프레더릭 복(Frederick C. Bock, 1918~2000년)이 담당했다. 이 폭격기는 그의 성에서 따와 복스카(Bock’s Car)로 불렀다.

복스카는 1945년 6월 16일 티니안 섬에 도착해 13번의 훈련 임무와 일본 니하마와 무사시노의 산업 기지에 실험용 폭탄을 투하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훈련 임무를 마친 복스카는 히로시마 임무 때에는 정찰 비행 임무를 수행하고, 나가사키 임무 때에는 직접 원폭을 투하해 핵 관련 임무를 두 번 수행했다.

복스카는 원폭 투하 작전 계획대로 티니안 섬에서 고쿠라까지 왕복 비행에는 큰 문제가 없었지만 작전에 차질이 생기는 경우 연료가 부족해 귀환할 수 없는 상황이 될 수 있었다.

복스카를 비롯한 B-29들은 새벽 3시 47분경에 티니안 노스필드 활주로의 2590미터 거리를 활주해 이륙했다. 야쿠시마 섬 상공 랑데뷰 포인트까지 개별적으로 비행하기로 했으며, 복스카는 랑데부하기 30분 전에 3만 피트(9,100 미터)의 폭격 고도까지 상승했다.

정찰 임무를 맡은 에놀라 게이는 고쿠라 상공에 아침 안개가 있지만 곧 맑아질 것으로 보고했으나 복스카가 도착했을 때에는 연기로 인해 도시가 가려졌다.

오전 10시 44분 고쿠라 상공에 도착한 고쿠라는 도시가 짙은 연기에 덮인 것을 발견했다. 야와타 제철소(Yawata Steel Works) 직원들이 공습을 피하기 위해 석탄 타르를 태웠기 때문이다. 고쿠라는 군수 공장과 제철소 때문에 일본에서 가장 중무장한 도시 중 하나였고 이곳에서는 공습을 피하기 위한 방어 작전이 펼쳐지고 있었다.

복스카는 11시 32분에 연기로 하늘을 가린 고쿠라 투발 임무를 포기하고 제2의 목표인 나가사키를 향해 남쪽으로 선회를 했다. 95마일 떨어진 나가사키에 도달하기 위해 최단 경로로 비행했으나 귀환할 만큼 충분한 연료를 보유하지 못해 오키나와 섬까지도 비행하기 곤란할 정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스카는 11시 56분 나가사키에 도착해 보니 나가사키 역시 기상 보고와 달리 구름이 2/10 정도로 있었다. 복스카 승무원들은 구름 중에 구멍이 있어 목표물을 식별할 수 있자 폭탄실 문을 열고 팻맨을 투하했다.

1945년 8월 9일 12시 2분(나가사키 시간으로 11시 2분) 팻맨이 나가사키 상공 1,650피트(503미터)에서 폭발했다. 팻맨은 계획된 목표 지점에서 북서쪽으로 약 2.4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 TNT의 21킬로톤의 위력을 나타냈다. 나가사키 도시의 44퍼센트가 파괴되었으며, 약 3만 5000명이 사망했고 6만 명이 부상당했다.

임무를 마친 복스카는 미군 점령 지역인 오키나와에서 735킬로미터 떨어져 있었고 3만 피트(9.1킬로미터) 높이에서 최소한의 연료 소비로 거의 활공에 가까울 정도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복스카는 연료가 부족했는데도 불구하고 간신히 오후 1시에 오키나와 옌탄 비행장(Yontan Airfield)에 간신히 착륙했다.

활주로에 접지할 때 시속 225킬로미터로 정상 속도보다 시속 48킬로미터 정도 빨라 공중으로 7.6미터를 부양했지만 무사히 착륙했다. 나가사키 원폭 투하에 투입된 B-29 폭격기 3대는 오후 5시 30분에 오키나와를 이륙해 오후 10시 30분에 티니안 섬에 도착했다.

나가사키 임무는 승무원들이 임무 수행 중에 많은 어려움을 겪었고 그 목표를 달성했지만 히로시마 임무와는 달리 잘못 계획되어 실패한 임무로 묘사되었다.

미국은 두 발의 팻 맨의 조립을 완료하고 8월 19일에 제3의 원자 폭탄을 투하하기 계획했으나 일본이 1945년 8월 15일 무조건 항복함에 따라 제3의 원자 폭탄 투하는 이루어지지 않았다.